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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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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인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산내 말사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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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사고사라고도 하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인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산내 말사이다. </br>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할 목적으로 창건하였다. 1606년(선조 36) 퇴락한 절을 중창하여 사고사(史庫寺)라고 하였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은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땅이라고 하며, 유정(惟政)이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다. </br>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할 목적으로 창건하였다. 1606년(선조 36) 퇴락한 절을 중창하여 사고사(史庫寺)라고 하였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은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땅이라고 하며, 유정(惟政)이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다. </br>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실록을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할 것을 결정하였고, 묘향산·태백산·강화도 등과 함께 이 오대산에 사고를 지었던 것이다. 1717년(숙종 43) 당시에 사고의 운영에 관한 응원(應元) 등의 상소문이 『사고절목(史庫節目)』 속에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고에는 화재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봄·가을로 20명씩 수직(守直)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br>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실록을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할 것을 결정하였고, 묘향산·태백산·강화도 등과 함께 이 오대산에 사고를 지었던 것이다. 1717년(숙종 43) 당시에 사고의 운영에 관한 응원(應元) 등의 상소문이 『사고절목(史庫節目)』 속에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고에는 화재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봄·가을로 20명씩 수직(守直)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br>

2024년 5월 9일 (목) 20:02 판

  • 사찰명 : 월정사 영감사(靈鑑寺), 월정사 영감난야(靈鑑蘭若), 월정사 사고사(史庫寺),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1


영감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사고사라고도 하며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인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산내 말사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할 목적으로 창건하였다. 1606년(선조 36) 퇴락한 절을 중창하여 사고사(史庫寺)라고 하였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은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땅이라고 하며, 유정(惟政)이 터를 잡았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실록을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할 것을 결정하였고, 묘향산·태백산·강화도 등과 함께 이 오대산에 사고를 지었던 것이다. 1717년(숙종 43) 당시에 사고의 운영에 관한 응원(應元) 등의 상소문이 『사고절목(史庫節目)』 속에 남아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고에는 화재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봄·가을로 20명씩 수직(守直)을 세워야 한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1914년 3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들이 모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이 실록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어 버렸고, 그 전에 외부에 대출되었던 45책만 무사하였다. 그 가운데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고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1961년에 비구니 뇌묵(雷默)이 절을 중건한 뒤 사고사라고 하였다가 그 뒤 다시 본래의 이름인 영감사로 바꾸었다. 당우로는 본당인 5칸 규모의 원통전(圓通殿)과 요사채가 있다.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의 좌상을 안치하였다. 원통전의 뒤에 있는 오대산 사고지는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옛 영감사지는 그곳에서 남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지금은 수수밭으로 변하였고 초석들만 남아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고사

영감난야(영감사)는 1961년 비구니 뇌묵(雷默)스님이 새롭게 건립한 사찰이다. 일제 강점기에 오대산의 사고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유린되어 『실록』과 『의궤』는 일본으로 반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속살을 빼앗기고 껍질만 남은 사고 역시, 1.4후퇴 때 아군들에 의해서 전소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뇌묵스님이, 폐허 뒤쪽에 건립한 사찰이 바로 옛 이름을 다시 사용한 영감암이다.
오대산사고가 현대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89년의 일이다. 즉 영감암은 사고가 들어설 때 절터를 내주고, 사고가 사라진 후에는 먼저 건축되어 근 30년 가까이나 사고지를 지켜냈다. 영감암의 영감靈鑑은 신령한 거울이라는 의미로, 이는 우리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본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또 영감난야라고 할 때의 난야(蘭若)는, 인도어 아란야(araya)의 줄임말로 청정한 수행처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의 본성을 찾는 선수행의 청정한 수행처가 바로 영감난야이다.
또 영감암은 사고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고지에 함께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 출처 : 여행은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