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惠庵)스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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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혜암현문(慧庵玄門 : 1884~1985), 혜암현문(慧庵玄門 : 1884~1985), 혜암현문(慧菴玄門 : 1884~1985) ''' ― 덕숭총림 초대 방장
 
* ''' 생애·업적 '''
 
스님은 조선 말기 대선지식인 경허·만공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선풍을 계승하였다. 스님의 속명은 순천(順天). 법호는 혜암이다. 황해도 백천(百川)에서 강릉 최씨인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1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출가를 결심, 1897년 12세 때 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로 출가하여 보암(保庵)을 은사(恩師)로, 금운(錦雲)을 계사(戒師)로 하여 16세에 사미계 를 받았다. 1911년 27세에 해담(海曇)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은 뒤 성월 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며 화두를 간택받았다. 이후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운수행각을 하며 공부 하는데 진력하였다.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만공·혜월·용성 선사를 모시고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다. 다음은 스님의 오도송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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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면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
 
한 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저절로 맞추지 못하리라 하리라.
 
語默動靜句 (어묵동정구)
 
箇中誰敢着 (개중수감착)
 
問我動靜離 (문아동정리)
 
卽破器相從 (즉파기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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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6년 오도의 경지를 확연히 맛보았다. 이 무렵 묘향산 상원사 주지와 강원도 정선군 정암사(淨岩寺) 주지를 잠깐씩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9년 45세 때 수덕사 조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을 받았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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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혜암현문 선자에게 보이다
 
示惠庵玄門禪子 (시혜암현문선자)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도 없고
 
대가의 가풍도 또한 없어라
 
이와 같은 글자의 인을 혜암, 너에게 주노라.
 
雲山無同別 (운산무동별)
 
亦無大家風 (역무대가풍)
 
如是無文印 (여시무문인)
 
分付惠庵與 (분부혜암여)
 
 
世尊應化 二九五六年 己巳年 三月 初七日 (세존응화 이구오육년 을사년 삼월 초칠일)
 
鏡虛門人 滿空月面 稿 (경허문인 만공월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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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어느 날 만공과 혜암은 서산 간월도로 가는 배 위에 올라, 법담을 나누었다. 만공이 혜암에게 물었다. </br>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 </br>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br>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 </br>
 
라고 재차 물어오는 만공의 질문에 혜암은 손수건을 말없이 들어 보이자 만공은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br>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던가.” </br>
 
스님은 1956년 72세 때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에 머물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또한 한국 전통선의 진수를 전하려는 스님의 집념은 마침내 해외포교를 염원하게 되어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 우리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는 값진 역할을 하였다. 그 해 말에 설립된 덕숭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었다.
 
1985년 수덕사 염화실에서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76년 스님의 법어를 모아 엮은 《선문법요(禪門法要)》와 직접 편역한 《선문촬요(禪門撮要)》가 있고, 문인 묘봉 스님의 영역으로 발행한 《선문촬요》 등이 있으며, 법어집 《조사선에로의 길 Gate way to Patriarchal Son》은 한영대역판으로 출판 되었다. 문하에는 대의(大義)·법우(法雨) 등의 제자들이 있다. </br>
 
혜암은 깨달음을 인가받은 뒤에도 정진을 늦추는 법이 없었다. 무섭도록 철저한 오후(悟後) 보림(保任)을 하였다. 경허―만공의 법을 이은 그는 덕숭산의 가풍을 온전히 계승한 선사답게 독자적인 견성 체험을 통해 응집된 자신만의 오도적 세계를 구가하였다. 그는 중국 선사들의 게송이나 송구를 인용하는 데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목소리를 냈다. </br>
 
1985년 수덕사에 총림이 설치되면서 초대방장을 맡았는데 납자제과 선풍진작에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경허에 의해 발양된 한국선의 법통을 이은 혜암은 독특한 덕숭가풍을 선양하였을 뿐 아니라, 평생을 참선 정진에 매진하면서도 선에 매몰되지 않았고 명리와 재물을 멀리하는 바람직한 수행자상을 보여 주었다. </br>
 
또한 혜암 스님이 남긴 생애는 지극히 평범하고 진지하며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남긴 자취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평범한 것이었지만 선사의 생은 감동적인 향기가 흠씬 풍겼다. 100세가 넘도록 운수행각과 참선 정진을 거듭해 온 혜암은 만년에 자신의 일생을 간단히 노래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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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장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한 개
 
동서로 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누가 만약 어디로 그렇게 달렸냐 하면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리.
 
行狀衲衣一枝筇 (행상납의일지공)
 
東走西走走無窮 (동주서주주무궁)
 
傍人若問何處走 (방인약문하처주)
 
天下橫行無不通 (천하횡행무불통)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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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232~234.
 
 
[[분류 : 비구스님]]
 

2024년 3월 10일 (일) 12:08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