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옥련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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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 326,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29.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 326,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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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 : [https://map.kakao.com/?q=청도군_금천면_신지리_1139 옥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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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 : [https://map.kakao.com/?q=청도군_금천면_신지리_1139 옥련암]</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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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사찰]]

2024년 5월 10일 (금) 06:36 판

  • 사찰명 : 청도 옥련암(玉蓮庵)
  •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139

성림스님(成林, 1916生, 비구니)이 6.25 전쟁 반발 후 1953년 38세 때, 청신암에서 같이 살던 법손 비구니 영원스님(盈圓, 1949生, 비구니)의 아버지가 공산당으로 몰려 궁지에 처했다. 이에 성림 스님은 출가한 영원스님의 고모 2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영원스님과 함께 백련암으로 갔다. 15평 법당 외에 아무것도 없던 청도 금천 백련암이었다. 산에 터를 닦아 손수 초가집 짓고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였다.
1972년 성림 노스님이 60세 때의 일이다. 원래 백련암 터는 박씨 문중의 땅이라 양식 2말을 세로 주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20가마니를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1972년 현재의 옥련암으로 옮겨 왔다. 옥련암은 당시 3마지기 정도의 밭에 불과했다. 성림스님이 옥련암으로 올 때 손수 터를 닦아 백련암의 15평 법당을 그대로 떠서 옮기고, 초가 요사도 떠서 옮겨 지붕을 기와로 바꾸셨다.
옥련암 주지로 취임하면서 불사를 하였는데 법당, 요사채와 더불어 사찰전답이 모두 1,000평에 이른다. 그동안 땅 문제로 어려운 일이 많아서 주변의 땅을 사들인 것이다.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 326,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