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만선스님(萬善, 190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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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표제 = 만선(萬善)스님
+
|표제= 만선(萬善)스님
|사진 = 20.만선스님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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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4 만선(萬善).jpg
|법명 = 만선(萬善)
+
|법명= '''만선(萬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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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호=  
|속명 = 구순복
+
|속명= 구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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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6.08.22.
|출생 = 1906년8월 22일
+
|출가= 1916년
|출가 = 1916년
+
|입적=1989.12.13. </br> (세수84세, 법랍74세)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
+
|사찰='''쌍암사'''</br>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98-4
|입적 = 1989년
+
|특이사항=
|사찰 = 쌍암사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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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만선(萬善)스님은 625 전쟁 후 의정부 쌍암사에서 100여명의 아이들을 키워 낸 ‘관음보살의 화신’인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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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萬善)스님은 한국전쟁 후 의정부 쌍암사에서 100여명의 아이들을 키워 낸‘관음보살의 화신’인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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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황해도 개풍 출생  
 
|1906 || 황해도 개풍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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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개성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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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29076&cid=46648&categoryId=46648 개성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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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17 ||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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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월정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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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http://woljeongsa.org/?skipintro=1 월정사]에서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75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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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989 || 쌍암사에서 36년 동안 부모 없는 아이 1백여명을 양육하여 사회로 배출
 
|1953~1989 || 쌍암사에서 36년 동안 부모 없는 아이 1백여명을 양육하여 사회로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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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의정부 쌍암사 중창
 
|1973 || 의정부 쌍암사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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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쌍암사에서 입적(세수 84세, 법납 73세), 사리 59과 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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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89.12.13. 쌍암사에서 입적(세수 84세, 법납 73세), 사리 59과 수습
 
|}
 
|}
  
 
==활동 및 공헌==
 
==활동 및 공헌==
 
===출가===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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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0.만선스님2부도.jpg|섬네일|[만선스님 부도]</br>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ckddmltmd/50067288374]]
  
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만선(萬善)스님은 1906년 7월 3일 황해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서 강화 능성 구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순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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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만선(萬善)스님은 1906년 7월 3일 황해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서 강화 능성 구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구순복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큰 의문을 품고 개성의 화장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1916년 4월 5일 스님의 나이 겨우 11살 때의 일이었다. 1년여의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이듬해 1917년 7월 20일 화장사에서 자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큰 의문을 품고 개성의 화장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1916년 4월 5일 스님의 나이 겨우 11살 때의 일이었다. 1년여의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이듬해 1917년 7월 20일 화장사에서 자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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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이때부터 34년 동안 개성 화장사를 중심으로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며 안거수선에 들었으며, 신 새벽 오롯한 구도행이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행하던 중 방한암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하고, 만선이란 법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때부터 34년 동안 개성 화장사를 중심으로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며 안거수선에 들었으며, 신 새벽 오롯한 구도행이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행하던 중 방한암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하고, 만선이란 법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쌍암사 복원===
 
===쌍암사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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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화장사에서 구도정진에 여념이 없던 스님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올라 남행하던 중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적조암에 당도했다. 여기서 두 해 동안 안거를 성만하고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쌍암사에 머물게 되었다. 잠시 들렸다 만행을 떠나고자 했던 스님은 동네 어른들의 간곡한 당부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여 장암동 산자락에 임시로 쌍암사를 세우고, 전쟁 고아들을 한 두 명씩 데려다 기르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전소된 쌍암사를 중창한 때가 1953년이며, 이때부터 입적하던 1989년까지 장장 36년에 이르는 동안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당시 화장사에서 구도정진에 여념이 없던 스님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올라 남행을 하던 중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적조암에 당도했다. 여기서 두 해 동안 안거를 성만하고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쌍암사에 머물게 되었다. 잠시 들렸다 만행을 떠나고자 했던 스님은 동네 어른들의 간곡한 당부를 끝내 뿌리치질 못했하였고 장암동 산자락에 쌍암사를 세우고, 전쟁 고아들을 한 두 명씩 데려다 기르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전소된 쌍암사를 중창한 때가 1953년이며, 이때부터 입적하던 1989년까지 장장 36년에 이르는 동안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아이들을 돌보다.===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아이들을 돌보다.===
 
 
스님은 바랑을 메고 탁발하여 받은 시주로 고아들의 굶주림을 달래주었고, 그렇게 스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엿한 성인으로 자란 사람이 1백여 명에 달하였다. 만선스님의 대자대비한 원력은 실로 하늘을 덮고도 남았다.
 
스님은 바랑을 메고 탁발하여 받은 시주로 고아들의 굶주림을 달래주었고, 그렇게 스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엿한 성인으로 자란 사람이 1백여 명에 달하였다. 만선스님의 대자대비한 원력은 실로 하늘을 덮고도 남았다.
 
스님이 간직했던 자비광명의 빛은 그대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고아들의 희망이 되었다.
 
스님이 간직했던 자비광명의 빛은 그대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고아들의 희망이 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스님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법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교단 정화를 명문으로 비구와 대처승과의 분규가 아직 끝나지 않은 1960년대 초, 조계종 소속의 비구승이 갑자기 쌍암사 소유권을 들먹이며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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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사 소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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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스님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법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교단 정화를 명분으로 비구와 대처승과의 분규가 아직 끝나지 않은 1960년대 초, 조계종 소속의 비구승이 갑자기 쌍암사 소유권을 들먹이며 들이닥쳤다.
 
25교구 본사 말사로 있던 쌍암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므로 종단에 귀속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눈앞이 캄캄했다.
 
25교구 본사 말사로 있던 쌍암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므로 종단에 귀속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눈앞이 캄캄했다.
  
만선스님과 신도님들은 물론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인 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폐사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때 쌍암사에 살던 한 소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여기 와서 밥 해먹고 사세요.”라고 외쳤다. 소년은 ‘쌍암사에서 죽일 놈’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사람들은 이 당돌하고 맹랑한 소년에게 욕을 하고 싫어했지만, 만선스님은 소년을 품에 안으며 똑똑하여 뭔가 되어도 될 놈이라고 감싸주곤 하였다. 후에 성장한 소년은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고 그 분이 바로 비구 성천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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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스님과 신도들은 물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인 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폐사를 시키겠다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때 쌍암사에 살던 한 소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여기 와서 밥 해먹고 사세요.”라고 외쳤다. 소년은‘쌍암사에서 죽일 놈'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사람들은 이 당돌하고 맹랑한 소년에게 욕을 하고 싫어했지만, 만선스님은 소년을 품에 안으며 똑똑하여 뭐가 되어도 될 놈이라고 감싸주곤 하였다. 후에 성장한 소년은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고 그 분이 바로 비구 성천 스님이다.
 
이렇게 스님과 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해 대항하자 절을 차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승려는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스님과 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해 대항하자 절을 차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승려는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쌍암사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스님의 금강과 같은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고아들의 의지처가 되었던 쌍암사는 그렇게 지켜졌다.
 
쌍암사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스님의 금강과 같은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고아들의 의지처가 되었던 쌍암사는 그렇게 지켜졌다.
  
만선스님의 생활철학은 찢어버리거나 깨버리는 것은 매우 싫어하였고 ‘노는 입에 염불이라도 해라.’ 그것이 중노릇하는데 제일 큰 재산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염불을 가르쳐 주면서 항상 입에 달고 살게 하였다. 철부지 아이들은 스님이 볼 때면 악을 쓰고 염불을 하는 척하다가 스님이 안 보이면 꾀를 부리며 하지 않아 스님에게 혼이 날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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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스님의 생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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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스님의 생활철학은 찢어버리거나 깨버리는 것은 매우 싫어하였고 ‘노는 입에 염불이라도 해라.’ 그것이 중노릇하는 데에 제일 큰 재산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염불을 가르쳐 주면서 항상 입에 달고 살게 하였다. 철부지 아이들은 스님이 볼 때면 악을 쓰고 염불을 하는 척하다가 스님이 안 보이면 꾀를 부리며 하지 않아 스님에게 혼이 날 때가 많았다.
  
 
스님은 굉장히 엄하였다. 한 가지 잘못을 하면 반목하여 지적하고 따끔하게 가르쳤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항상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스님에게 물어보고 행하며 행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상대방과 충분한 상의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할 일이 주어지면 두말 없이 해야 했는데, 그럴 때는 완전히 호랑이 스님 같았다. 하지만 스님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자식처럼 정성스레 보살폈다.
 
스님은 굉장히 엄하였다. 한 가지 잘못을 하면 반목하여 지적하고 따끔하게 가르쳤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항상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스님에게 물어보고 행하며 행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상대방과 충분한 상의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할 일이 주어지면 두말 없이 해야 했는데, 그럴 때는 완전히 호랑이 스님 같았다. 하지만 스님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자식처럼 정성스레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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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법명을 지을 때 ‘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의미에서 만선이라 지었고, 전쟁 고아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그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이름에 참으로 걸맞는 일이었다.
 
스님의 법명을 지을 때 ‘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의미에서 만선이라 지었고, 전쟁 고아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그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이름에 참으로 걸맞는 일이었다.
  
모두가 어렵고도 어렵던 시절, 탁발하러 나간 스님이 탁발을 너무 많이 해서 짐이 무거워질 때면 아이들이 스님을 도우러 마중을 나가곤 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에미중 새끼 중이 같이 지나간다.”고 놀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마음에 행여 그늘이라도 질까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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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웠던 시절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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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렵고도 어렵던 시절, 탁발하러 나간 스님이 탁발을 너무 많이 해서 짐이 무거워질 때면 아이들이 스님을 도우러 마중을 나가곤 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에미 중 새끼 중이 같이 지나간다.”고 놀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은 아이들의 마음에 행여 그늘이라도 질까 안타까워했다.
  
그 때는 워낙 먹을 것이 없어서 버리는 우거지까지 끓여 먹고, 수박 껍질도 깎아서 국을 끓여 먹던 시절이었다. 보통 고아들을 키울 때 여자와 남자를 가려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만선스님은 달랐다. 모두가 똑같은 아이들이었고 소중했기에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거두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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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워낙 먹을 것이 없어서 버리는 우거지까지 끓여 먹고, 수박 껍질도 깎아서 국을 끓여 먹던 시절이었다. 보통 고아들을 키울 때 여자와 남자를 가려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만선스님은 달랐다. 모두가 똑같은 아이들이었고 소중했기에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거두어 키웠다.
  
배고픈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먹이는 것을 제일 힘은 문제였다. 그래야 투정부리는 아이도 없고, 먹는 입장도 주는 입장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죽을 끓일 때에도 아이들 숫자에 맞춰서 물을 넣고 끓였다. 탁발해 온 양은 늘모자라기 일쑤라서 밥보다는 우거지를 더 많이 넣어서 끓였다.
+
배고픈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먹이는 것이 제일 힘든 문제였다. 그래야 투정부리는 아이도 없고, 먹는 입장도 주는 입장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님은 죽을 끓일 때에도 아이들 숫자에 맞춰서 물을 넣고 끓였다. 탁발해 온 양은 늘 모자라기 일쑤라서 밥보다는 우거지를 더 많이 넣어서 끓였다.
  
그 당시는 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으며 학교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려면 아침을 굶거나 누룽지 밥을 먹고 아침밥을 도시락에 담아가야만 했다.
+
그 당시는 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으며 학교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려면 아침을 굶거나 누룽지 밥을 먹고 아침밥을 도시락에 담아 가야만 했다.
성천스님은 등하교 길에 배 밭이나 복숭아밭 등 과수원을 지나다녔는데, 항상 허기졌다.그래서 과수원에서 솎아 버리는 배나 복숭아를 주워 먹고, 가을이 되면 밤과 썩어서 떨어진 배 등을 주워 먹으며 주린 배를 달래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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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스님은 등하교 길에 배밭이나 복숭아밭 등 과수원을 지나다녔는데, 항상 허기졌다.그래서 과수원에서 솎아 버리는 배나 복숭아를 주워 먹고, 가을이 되면 밤과 썩어서 떨어진 배 등을 주워 먹으며 주린 배를 달래곤 했다고 한다.
 
만선스님은 밥그릇에 물을 부어 찌꺼기 물까지 다 먹게 하였다. 먹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시는 척하며 화장실로 바로 가서 토하곤 했다.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먹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만선스님은 밥그릇에 물을 부어 찌꺼기 물까지 다 먹게 하였다. 먹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시는 척하며 화장실로 바로 가서 토하곤 했다.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먹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어린 시절 배를 주려가며 성장한 탓인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몸에 배어서 성천스님도 상좌들이나 신도들이 반찬은 남겨도 밥을 남기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배를 주려가며 성장한 탓인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몸에 배어서 성천스님도 상좌들이나 신도들이 반찬은 남겨도 밥을 남기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만선스님은 새벽예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이들이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않으면 밥을 안 준다 하였고, 만약 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목탁자루로 등을 때려가며 예불에 참여하게 하였다.
 
또한 만선스님은 새벽예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이들이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않으면 밥을 안 준다 하였고, 만약 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목탁자루로 등을 때려가며 예불에 참여하게 하였다.
평소 스님은 염불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루를 대부분을 법당 산신각에서 지냈다. 잠시라도 쉴 생각을 안 하고 틈만 나면 법당에서 염불 하고 기도를 하였다.
+
평소 스님은 염불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법당 산신각에서 지냈다. 잠시라도 쉴 생각을 안 하고 틈만 나면 법당에서 염불하고 기도하였다.
  
쌍암사에는 아이들이 평균 15~26명 정도 있었는데 성장한 아이가 사회로 나가면 스님은 밖에서 새로운 고아들을 계속 데리고 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서 신도들이 주는 헌옷이나 탁발해 온 음식, 병이나 깡통을 주워 판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였다. 후원금을 받아 충당하기도 했고, 관광객의 시주로 근근이 생활을 꾸려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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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사에는 아이들이 평균 15~26명 정도 있었는데 성장한 아이가 사회로 나가면 스님은 밖에서 새로운 고아들을 계속 데리고 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서 신도들이 주는 헌옷이나 탁발해 온 음식, 병이나 깡통을 주워 판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였다. 후원금을 받아 충당하기도 했고, 관광객의 시주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기도 했다.
  
 
워낙 어려운 형편이었던지라 스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고 기르기만 하였다. 다만 기도생활과 ‘노는 입에도 염불하라.’는 원칙만큼은 매우 중요하게 가르쳤다. 이런 형편 탓에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은 쌍암사로 출가한 비구스님들 밖에 없다.
 
워낙 어려운 형편이었던지라 스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고 기르기만 하였다. 다만 기도생활과 ‘노는 입에도 염불하라.’는 원칙만큼은 매우 중요하게 가르쳤다. 이런 형편 탓에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은 쌍암사로 출가한 비구스님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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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 59과 사리탑===
 
===사리 59과 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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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에 참석한 대중의 눈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스님의 화관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그들의 모습은 스님의 일생이 결코 범상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다비식을 통해 나온 59과의 많은 사리는 맏상좌인 성천스님이 수습하여 1990년 7월 15일 쌍암사 입구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영결식에 참석한 대중의 눈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스님의 화관을 부여잡고 오열을 터뜨리는 그들의 모습은 스님의 일생이 결코 범상치 않았음을 웅변해 주었다. 다비식을 통해 나온 59과의 많은 사리는 맏상좌인 성천스님이 수습하여 1990년 7월 15일 쌍암사 입구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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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사는 6·25 전쟁 때 만선스님이 복원한 사찰로 과거에는 의정부에서 망월사, 성림사와 더불어 세 손가락 안에 들었으며, 여러 스님들이 마음을 낼 정도로 도량이 좋은 절이었다.
 
 
쌍암사는 6·25 전쟁때 만선스님이 복원한 사찰로 과거에는 의정부에서 망월사, 성림사와 더불어 세 손가락 안에 들었으며, 여러 스님들이 마음을 낼 정도로 도량이 좋은 절이었다.
 
[[File:20.만선스님2부도.jpg|섬네일|[만선스님 부도]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ckddmltmd/50067288374]]
 
  
 
===쌍암사 가족===
 
===쌍암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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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사==
 
==쌍암사==
[[File:20.만선스님3쌍암사.jpg|섬네일|[의정부 쌍암사 전경]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lovehubby/222344252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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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0.만선스님3쌍암사.jpg|섬네일|[의정부 쌍암사 전경]</br>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lovehubby/222344252979)]]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쌍암(雙庵)이라고도 한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내의 냇가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서 쌍암사라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쌍암(雙庵)이라고도 한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내의 냇가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서 쌍암사라 하였다.
  
1880년(고종 17)에는 화주(化主) 화운(化雲)이 비구니 유원(有願)과 함께 중건하였다. 1950년 6·25로 전소된 것을 1956년에 비구니 순복(順福)이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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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고종 17)에는 화주(化主) 화운(化雲)이 비구니 유원(有願)과 함께 중건하였다. 1950년 6·25로 전소된 것을 1956년에 비구니 만선스님이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1동뿐이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관세음보살상·미륵보살상·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후불탱화(後佛幀畵)·신중탱화(神衆幀畵)·산신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문화재는 없으며, 조선 후기의 중건기만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1동뿐이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관세음보살상·미륵보살상·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후불탱화(後佛幀畵)·신중탱화(神衆幀畵)·산신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문화재는 없으며, 조선 후기의 중건기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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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4.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4.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229~240.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229~240.
* 법보신문, 교계 미신고시설 - 불우이웃의 보금자리 ‘의정부 쌍암사’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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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보신문, 교계 미신고시설 - 불우이웃의 보금자리 ‘의정부 쌍암사’ (2005년)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16
*한북신문, (의정부의 땅이름-81)쌍암(雙巖) http://www.hb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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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북신문, (의정부의 땅이름-81)쌍암(雙巖) (2018년) http://www.hb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5507
 
* 두산백과, 쌍암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9807&cid=40942&categoryId=33081
 
* 두산백과, 쌍암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209807&cid=40942&categoryId=33081
*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불상이 가득한 수락산 쌍암사 계곡 & 500년 고찰 쌍암사 https://blog.naver.com/hope_city/22198738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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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시 공식 블로그, 불상이 가득한 수락산 쌍암사 계곡 & 500년 고찰 쌍암사 (2020년) https://blog.naver.com/hope_city/22198738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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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지도==
* 쌍암사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98-4) (지도 상의 위치는 맞으나 사찰이름이 잘못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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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암사'''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98-4
{{구글지도 | 위도=37.706798| 경도=127.064604| 줌=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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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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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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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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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니스님]]

2024년 9월 16일 (월) 11:03 기준 최신판



정의

만선(萬善)스님은 한국전쟁 후 의정부 쌍암사에서 100여명의 아이들을 키워 낸‘관음보살의 화신’인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6 황해도 개풍 출생
1916 개성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7 화장사에서 자오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0 월정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3~1989 쌍암사에서 36년 동안 부모 없는 아이 1백여명을 양육하여 사회로 배출
1973 의정부 쌍암사 중창
1989 1989.12.13. 쌍암사에서 입적(세수 84세, 법납 73세), 사리 59과 수습

활동 및 공헌

출가

[만선스님 부도]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ckddmltmd/50067288374

'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만선(萬善)스님은 1906년 7월 3일 황해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서 강화 능성 구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구순복이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큰 의문을 품고 개성의 화장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1916년 4월 5일 스님의 나이 겨우 11살 때의 일이었다. 1년여의 행자 생활을 마친 스님은 이듬해 1917년 7월 20일 화장사에서 자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스님은 이때부터 34년 동안 개성 화장사를 중심으로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며 안거수선에 들었으며, 신 새벽 오롯한 구도행이 마침내 그 결실을 보게 된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행하던 중 방한암스님에게 구족계를 수지하고, 만선이란 법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했다.

쌍암사 복원

당시 화장사에서 구도정진에 여념이 없던 스님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길에 올라 남행하던 중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적조암에 당도했다. 여기서 두 해 동안 안거를 성만하고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쌍암사에 머물게 되었다. 잠시 들렸다 만행을 떠나고자 했던 스님은 동네 어른들의 간곡한 당부를 끝내 뿌리치지 못하여 장암동 산자락에 임시로 쌍암사를 세우고, 전쟁 고아들을 한 두 명씩 데려다 기르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전소된 쌍암사를 중창한 때가 1953년이며, 이때부터 입적하던 1989년까지 장장 36년에 이르는 동안 고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대자대비한 원력으로 아이들을 돌보다.

스님은 바랑을 메고 탁발하여 받은 시주로 고아들의 굶주림을 달래주었고, 그렇게 스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엿한 성인으로 자란 사람이 1백여 명에 달하였다. 만선스님의 대자대비한 원력은 실로 하늘을 덮고도 남았다. 스님이 간직했던 자비광명의 빛은 그대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고아들의 희망이 되었다.

쌍암사 소유권 분쟁

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스님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법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야속했다. 교단 정화를 명분으로 비구와 대처승과의 분규가 아직 끝나지 않은 1960년대 초, 조계종 소속의 비구승이 갑자기 쌍암사 소유권을 들먹이며 들이닥쳤다. 25교구 본사 말사로 있던 쌍암사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므로 종단에 귀속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눈앞이 캄캄했다.

만선스님과 신도들은 물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인 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폐사를 시키겠다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 때 쌍암사에 살던 한 소년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여기 와서 밥 해먹고 사세요.”라고 외쳤다. 소년은‘쌍암사에서 죽일 놈'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사람들은 이 당돌하고 맹랑한 소년에게 욕을 하고 싫어했지만, 만선스님은 소년을 품에 안으며 똑똑하여 뭐가 되어도 될 놈이라고 감싸주곤 하였다. 후에 성장한 소년은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고 그 분이 바로 비구 성천 스님이다. 이렇게 스님과 아이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해 대항하자 절을 차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승려는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쌍암사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이후에도 여러 번 있었으나 스님의 금강과 같은 의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고아들의 의지처가 되었던 쌍암사는 그렇게 지켜졌다.

만선스님의 생활 철학

만선스님의 생활철학은 찢어버리거나 깨버리는 것은 매우 싫어하였고 ‘노는 입에 염불이라도 해라.’ 그것이 중노릇하는 데에 제일 큰 재산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염불을 가르쳐 주면서 항상 입에 달고 살게 하였다. 철부지 아이들은 스님이 볼 때면 악을 쓰고 염불을 하는 척하다가 스님이 안 보이면 꾀를 부리며 하지 않아 스님에게 혼이 날 때가 많았다.

스님은 굉장히 엄하였다. 한 가지 잘못을 하면 반목하여 지적하고 따끔하게 가르쳤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항상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스님에게 물어보고 행하며 행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상대방과 충분한 상의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할 일이 주어지면 두말 없이 해야 했는데, 그럴 때는 완전히 호랑이 스님 같았다. 하지만 스님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자식처럼 정성스레 보살폈다.

성천스님은 누구보다 장난이 심해 항상 일을 저질렀고, 그럴 때마다 만선스님에게 혼이 날까봐 낮에는 산으로 도망가곤 했다. 그렇지만 결국 붙잡혀 밤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싸리나무로 매를 맞는 등 자주 혼이 났다.

스님의 법명을 지을 때 ‘만 가지의 선을 행하라’는 의미에서 만선이라 지었고, 전쟁 고아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그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 이름에 참으로 걸맞는 일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다

모두가 어렵고도 어렵던 시절, 탁발하러 나간 스님이 탁발을 너무 많이 해서 짐이 무거워질 때면 아이들이 스님을 도우러 마중을 나가곤 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에미 중 새끼 중이 같이 지나간다.”고 놀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스님은 아이들의 마음에 행여 그늘이라도 질까 안타까워했다.

그 때는 워낙 먹을 것이 없어서 버리는 우거지까지 끓여 먹고, 수박 껍질도 깎아서 국을 끓여 먹던 시절이었다. 보통 고아들을 키울 때 여자와 남자를 가려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만선스님은 달랐다. 모두가 똑같은 아이들이었고 소중했기에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거두어 키웠다.

배고픈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먹이는 것이 제일 힘든 문제였다. 그래야 투정부리는 아이도 없고, 먹는 입장도 주는 입장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스님은 죽을 끓일 때에도 아이들 숫자에 맞춰서 물을 넣고 끓였다. 탁발해 온 양은 늘 모자라기 일쑤라서 밥보다는 우거지를 더 많이 넣어서 끓였다.

그 당시는 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으며 학교에 갈 때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려면 아침을 굶거나 누룽지 밥을 먹고 아침밥을 도시락에 담아 가야만 했다. 성천스님은 등하교 길에 배밭이나 복숭아밭 등 과수원을 지나다녔는데, 항상 허기졌다.그래서 과수원에서 솎아 버리는 배나 복숭아를 주워 먹고, 가을이 되면 밤과 썩어서 떨어진 배 등을 주워 먹으며 주린 배를 달래곤 했다고 한다. 만선스님은 밥그릇에 물을 부어 찌꺼기 물까지 다 먹게 하였다. 먹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시는 척하며 화장실로 바로 가서 토하곤 했다.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먹으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어린 시절 배를 주려가며 성장한 탓인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몸에 배어서 성천스님도 상좌들이나 신도들이 반찬은 남겨도 밥을 남기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만선스님은 새벽예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이들이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않으면 밥을 안 준다 하였고, 만약 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목탁자루로 등을 때려가며 예불에 참여하게 하였다. 평소 스님은 염불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법당 산신각에서 지냈다. 잠시라도 쉴 생각을 안 하고 틈만 나면 법당에서 염불하고 기도하였다.

쌍암사에는 아이들이 평균 15~26명 정도 있었는데 성장한 아이가 사회로 나가면 스님은 밖에서 새로운 고아들을 계속 데리고 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서 신도들이 주는 헌옷이나 탁발해 온 음식, 병이나 깡통을 주워 판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였다. 후원금을 받아 충당하기도 했고, 관광객의 시주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기도 했다.

워낙 어려운 형편이었던지라 스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못하고 기르기만 하였다. 다만 기도생활과 ‘노는 입에도 염불하라.’는 원칙만큼은 매우 중요하게 가르쳤다. 이런 형편 탓에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은 쌍암사로 출가한 비구스님들 밖에 없다.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하시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탁발하기 힘든 시절에 농사는 거의 짓지 않고 탁발, 그리고 신도들의 애경사에 찾아다니면서 대식구의 가장으로 쌍암사를 꾸려 나갔다.

입적

이렇게 반평생을 오직 고아들을 돌보며 살던 스님은 1989년 12월 13일 노환으로 쌍암사에서 입적에 들고 말았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 쌍암사 출신인 상좌들과 같이 살고 싶어 하였다. 항상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기만 하던 스님은 돌아가실 때에도 불쌍한 아이들을 잘 보살피라는 당부를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셨을 때는 눈이 많이 내렸는데 향내가 어찌나 진동했던지 전방 500m 거리에서도 향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스님의 세수 84세요, 법랍 74세였다.

사리 59과 사리탑

영결식에 참석한 대중의 눈시울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스님의 화관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그들의 모습은 스님의 일생이 결코 범상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다비식을 통해 나온 59과의 많은 사리는 맏상좌인 성천스님이 수습하여 1990년 7월 15일 쌍암사 입구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쌍암사는 6·25 전쟁 때 만선스님이 복원한 사찰로 과거에는 의정부에서 망월사, 성림사와 더불어 세 손가락 안에 들었으며, 여러 스님들이 마음을 낼 정도로 도량이 좋은 절이었다.

쌍암사 가족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삶을 벗어나 만선스님의 따뜻한 품에서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한 쌍암사 가족들 중 모두 여섯 명이 출가하였는데, 현재 쌍암사 주지로 있는 오철스님을 비롯해 마산의 자암스님, 정문스님, 성천스님, 성원스님(강화도 선원사 주지), 태범스님(미국 워싱턴 보림사 주석), 설암스님(봉선사 월운스님 상좌로 입실)이 있다. 성천스님과 함께 출가하여 모두 조계종 스님이 되었다. 지금은 사형사제로 지내고 있는 스님들은 만선스님에 대해 늘 가까이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길을 인도하여 주신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고 말한다. ※ 성천스님(서울 구로복지관 포교원 연화정토사 주지)과의 대담자료 참조

쌍암사

[의정부 쌍암사 전경]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ilovehubby/222344252979)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쌍암(雙庵)이라고도 한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내의 냇가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서 쌍암사라 하였다.

1880년(고종 17)에는 화주(化主) 화운(化雲)이 비구니 유원(有願)과 함께 중건하였다. 1950년 6·25로 전소된 것을 1956년에 비구니 만선스님이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1동뿐이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관세음보살상·미륵보살상·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후불탱화(後佛幀畵)·신중탱화(神衆幀畵)·산신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문화재는 없으며, 조선 후기의 중건기만이 남아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만선(萬善)스님 본항목 만선스님(萬善, 1906~1989) 萬善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선스님(萬善,_190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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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스님(萬善) 개성 화장사 ~에서 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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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스님(萬善) 의정부 쌍암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쌍암사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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