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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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 {{인물정보 | ||
− | |표제 = 법일(法一)스님 | + | |표제= 법일(法一)스님 |
− | |사진 = 181 법일(法一).jpg | + | |사진= 181 법일(法一).jpg |
− | |법명 = 법일(法一) | + | |법명= '''법일(法一)''' |
− | |법호 = 만허(滿虛) | + | |법호= 만허(滿虛) |
− | |속명 = 김봉이(金鳳伊) | + | |속명= 김봉이(金鳳伊) |
− | + | |출생= 1904.08.23. | |
− | |출생 = | + | |출가= 1936년 |
− | |출가 = | + | |입적=1991.10.10.</br>(세수88세, 법랍56세) |
− | + | |사찰='''대원사'''</br>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길 455 | |
− | |입적 = | + | |특이사항= |
− | |사찰 = | ||
}} | }} | ||
==정의== | ==정의== | ||
− | 법일(法一) 스님은 폐사였던 | + | 법일(法一) 스님은 폐사였던 산청 대원사를 참선도량으로 일군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
==생애== | ==생애== | ||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 |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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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 | !연도 !!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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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서울 출생 | |1904 || 서울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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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 || | + | |1925 || 경기여고를 거쳐 동덕여고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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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진주 식산은행 근무 | |1927|| 진주 식산은행 근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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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 || | + | |1936 || 산청 대원사에서 문성(文成)스님을 은사로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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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 || | + | |1937 || 산청 대원사에서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426 영암(映巖)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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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 || 영암스님으로부터 | + | |1940 || 영암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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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 || 해인사에서 효봉(曉峰) | + | |1950 || 해인사에서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4468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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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 동화사 비구니 총림 교무국장 및 종회의원 | |1953 || 동화사 비구니 총림 교무국장 및 종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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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 | |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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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 || | + | |1955 || 산청 대원사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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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사리전 선원 증축 | |1957|| 사리전 선원 증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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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객실 신축 | |1960|| 객실 신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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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원통보전(관음전) 산신각 신축 | + | |1963|| 원통보전(관음전), 산신각 신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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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봉상루, 범종각 신축, 범종불사 | |1968|| 봉상루, 범종각 신축, 범종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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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84||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 | |1983~1984||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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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년 10월 10일 || 대원사에서 (세수 88세, 법랍 55세) | + | |1991년 10월 10일 || 대원사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5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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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 |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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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중|| [[계민(戒珉)문중]] | + | |style= "width: 120px|문중|| [[계민(戒珉)문중|계민문중(戒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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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총무원장 표창장 | |상훈|| 총무원장 표창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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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계제자 || 행원(行願) | +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행원스님(行願, 1928生, 비구니)|행원(行願)]]・[[성우스님(性牛, 1922生, 비구니)|성우(性牛)]]・[[행돈스님(行敦, 1933生, 비구니) | 행돈(行敦)]]・[[행석스님(行錫, 1925生, 비구니)|행석(行錫)]]・진홍(眞弘)・행욱(行旭)・자현(慈賢)・행련(行蓮)・지형(智亨)・계정(戒靜)・종재(宗齋)・도정(道正)・도행(道行)・수현(修賢)・도문(道文) |
+ | |- | ||
+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문오(文悟, 10)→지부(志赴, 11)→주화(周和, 12)→문성(文成, 13)→[[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법일(法一, 14)]]→[[행원스님(行願, 1927生, 비구니)|행원(行願, 15)]], [[성우스님(性牛, 1922生, 비구니)|성우(性牛, 15)]], [[행돈스님(行敦, 1933生, 비구니)|행돈(行敦, 15)]], [[행석스님(行錫, 1925生, 비구니)|행석(行錫, 15)]], 진홍(眞弘, 15), 행욱(行旭, 15), 자현(自顯, 15), 행련(行蓮, 15), 지형(智亨, 15), 서지(西至, 15), 계정(戒靜, 15), 종재(宗齋, 15), 도정(道正, 15), 도행(道行, 15), 수현(修賢, 15), 도문(道文, 15) | ||
|} | |} | ||
==활동 및 공헌== | ==활동 및 공헌== | ||
===법일스님 태몽=== | ===법일스님 태몽=== | ||
− | + | ||
− | + | 법일스님은 1904년 음력 8월 2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아버지 김유찬과 어머니 전영순 사이의 2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스님의 출가 전 속명은 봉이(鳳伊)인데, 이는 어머니의 태몽에 따라 지은 것이다. 꿈 속에 조부께서 큰 봉황새를 어머니 가슴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 |
===교육=== |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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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출가=== | ||
− | 일본 | + | 고교를 졸업한 소녀 봉이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위해 진주에 있는 외가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27년 진주 식산 은행에 취직을 하여 십년 동안을 근무하였다. 인척인 직장 상사와 대원사에 다니던 중 어느 날 대원사에 주석하시던 비구니 문성(文成)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
− | 그 후 | + | 그 후 소녀 봉이는 출가자의 힘든 수행과정을 존경하게 되었고, 문득‘속세의 살림살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출가하여 구도자로 살아가는 것만은 못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바로 출가를 단행하였다. 1936년 9월 15일 문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니 이때 스님의 나이는 33세였다. |
[[File:181-01.jpg|섬네일|[법일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4]] | [[File:181-01.jpg|섬네일|[법일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4]] | ||
+ | |||
===수행=== | ===수행=== | ||
− |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가게 된 스님은 1937년 9월 9일 영암映岩화상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0년에는 | + |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가게 된 스님은 1937년 9월 9일 영암映岩화상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0년에는 강원에서 사교(四敎)를 수료하였다. 그 후 쌍계사 국사암에서 견성암 대중 30여명과 당시의 대비구 선사 만공, 고봉스님 회상에서 각각 3년씩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후에도 각 선방에서 용맹 정진을 거듭하신 스님은 1950년 4월 8일 해인사 효봉(曉峯)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
===조계종 종회의원이 되다=== | ===조계종 종회의원이 되다=== | ||
− | 1953년 동화사 비구니총림과 1954년 운문사 | + | 1953년 동화사 비구니총림과 1954년 운문사 비구니강원에서 교무국장을 역임하신 스님은 1953년 9월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수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
− | === | + | ===산청 대원사 중창=== |
− | 1955년 9월 5일 주지로 부임한 대원사는 완전 폐허가 된 | + | 1955년 9월 5일 주지로 부임한 대원사는 완전 폐허가 된 절터였다. 대작불사(大作佛事)의 원력을 세우고 그 면모를 일신하기까지 스님의 삶은 원력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
스님이 부임하신 후에 도량을 일군 첫 번째 결실은 현재 선방으로 사용되는 탑전의 불사였다. 그 당시는 비구-대처승간의 치열한 시비가 있었던 터라 기득권을 가진 대처승의 방해로 인하여 불사가 쉽지 않았다. | 스님이 부임하신 후에 도량을 일군 첫 번째 결실은 현재 선방으로 사용되는 탑전의 불사였다. 그 당시는 비구-대처승간의 치열한 시비가 있었던 터라 기득권을 가진 대처승의 방해로 인하여 불사가 쉽지 않았다. | ||
− | 결국 대원사 소유권 분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졌고, 불행 중 다행으로 1959년 고등법원에서 법일스님 측이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기쁨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시주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 + | 결국 대원사 소유권 분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졌고, 불행 중 다행으로 1959년 고등법원에서 법일스님 측이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기쁨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시주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만큼 그 자체가 바로 고행(苦行)이나 다름이 없었다. |
− |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깊고 지극한 신심에 감복한 신도들의 시주금으로 30년에 걸쳐 조금씩 불사를 이어갔다. 1957년 사리전 선원을 | + |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깊고 지극한 신심에 감복한 신도들의 시주금으로 30년에 걸쳐 조금씩 불사를 이어갔다. |
− | 다시 1981년 명부전을 신축하고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후문을 신축하였다. 30여 년 동안 계속된 불사에 스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 1986년 대원사는 17여 동의 건물로 장엄한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 + | 1957년 가장 먼저 사리전 선원을 신축하여 향곡 큰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참선정진토록 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대웅전과 천광전을 신축하여 제영스님과 혼해스님을 모시고 강원을 개설하여 선교합일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 이듬해인 1960년에는 객실을 신축하였다. 스님의 불사에 대한 원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3년 원통보전(관음전) 및 산신각을 신축하고, 1968년 봉상루와 범종각을 신축하고 범종 불사를 하였다. 다시 1981년 명부전을 신축하고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후문을 신축하였다. 30여 년 동안 계속된 불사에 스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 1986년 대원사는 17여 동의 건물로 장엄한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
[[File:181-02.jpg|섬네일|[상좌들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5]] | [[File:181-02.jpg|섬네일|[상좌들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75]] | ||
===청빈납자로서 후학의 모범이 되다=== | ===청빈납자로서 후학의 모범이 되다=== | ||
− | 평생을 참선정진으로 | + | 법일 스님이 평생을 참선정진으로 일관하면서도 가람과 대중수호를 원만히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원력 속에 항시 관음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
− | + |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 처함에 있어 둥글둥글 원만해야지, 모가 나면 아니 된다.”고 말씀하면서 우리 모두가 불이不二 의 인격체임을 일깨워 주었다. | |
“도에는 성냄이 으뜸으로 해가 되니, 참고 참는 가운데 도가 성숙해짐”을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 “도에는 성냄이 으뜸으로 해가 되니, 참고 참는 가운데 도가 성숙해짐”을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 ||
법일스님은 종종 “이제는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다”며 이처럼 텅-비인 느낌을 오래 전부터 체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더함 없는 원력으로 살았으면서도 끝내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겸허한 수행자였다. | 법일스님은 종종 “이제는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다”며 이처럼 텅-비인 느낌을 오래 전부터 체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더함 없는 원력으로 살았으면서도 끝내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겸허한 수행자였다. | ||
− | 스님은 아랫사람 보기를 천진불 보듯, 보살 대하듯 항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며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다. | + | 스님은 아랫사람 보기를 천진불 보듯, 보살 대하듯 항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며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다. 법일 스님의 상좌 도행 스님에 따르면 법일 스님은 대중외호에 지극정성을 다하면서 늘 대중 한 분 한 분을 부처님 같이 볼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또 1984년 선방을 증·개축하면서 상량식 때에는 “도인이 깨알같이 쏟아져라.”라고 간절히 축원하셨다고 한다. |
스님의 이러한 청빈한 납자의 삶은 후학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다. | 스님의 이러한 청빈한 납자의 삶은 후학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다. | ||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
− | + | "저 대원사에 여걸이 계시니 가서 만나보라." | |
대원사 앞마당은 스님을 만나 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스님에게 경배를 올리는 이들은 사부대중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스님도 법일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여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다. | 대원사 앞마당은 스님을 만나 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스님에게 경배를 올리는 이들은 사부대중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스님도 법일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여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다. | ||
− | ===스님의 치열한 | + | ===스님의 치열한 구도 여정=== |
− | 198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를 역임한 스님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 + | 198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를 역임한 스님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수행자였다. |
− | 하루는 스님께서 출가 전에 외상으로 약을 사고 그 값을 치르지 못한 채 출가한 것을 기억해 | + | 하루는 스님께서 출가 전에 외상으로 약을 사고 그 값을 치르지 못한 채 출가한 것을 기억해 내고, 그 약값을 치르기 위해 찾아가니 주인은 이미 명(命)을 다한 지 오래였다. 이에 스님은 그 약값을 영전에 놓고 제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 질 정도다. |
− | 스님은 가람수호 원력 이면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그대로 | + | 스님은 가람수호 원력 이면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출가 후 입적에 이를 때까지 스님의 청빈한 삶과 불타는 구도열정은 후대 수행자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입적=== | ===입적=== | ||
− |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남긴 유품으로는 | + |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남긴 유품으로는 2 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있는 골동품 같은 나무책상 한 개와 벽시계 하나, 오래 된 라디오 하나, 서류를 보관하던 낡은 캐비넷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가 스님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1950년 비구니계 수지 이후 무려 30하(夏)를 성취하신 스님의 치열한 구도열정이다. |
− | + | 오로지 앉으나 서나 밤낮없이 대원사를 염려하셨던 비구니 법일 스님은 납자로서의 길을 따라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챙기던 어느 날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를 들으며 홀연히 세속의 인연을 마감하였다. 세수 88세요, 법랍은 55세였다. | |
− | 오로지 앉으나 서나 밤낮없이 대원사를 염려하셨던 | ||
스님이 입적에 들던 1991년 음력 10월 10일, 지리산은 온통 스님을 기리고 찬탄하는 불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스님이 입적에 들던 1991년 음력 10월 10일, 지리산은 온통 스님을 기리고 찬탄하는 불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
− | 문도들은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 + | 문도들은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4월 '지리산 대원사 중창 사적비'를 건립하여 대원사의 창건과 중건의 역사는 물론 법일스님의 가람수호 원력의 업적을 만고(萬古)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대원사에는 매년 수많은 눈 푸른 비구니 납자들이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br> |
+ | 수계제자로는 [[행원스님(行願, 1928生, 비구니)|행원(行願)]]・성우(性牛)・행돈(行敦)・행석(行錫)・진홍(眞弘)・행욱(行旭)・자현(慈賢)・행련(行蓮)・지형(智亨)・계정(戒靜)・종재(宗齋)・도정(道正)・도행(道行)・수현(修賢)・도문(道文)스님이 있다. | ||
− | == | + | ==산청 대원사== |
− | 대원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할 당시 이름은 | + | 대원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할 당시 이름은 평원사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
− | 그 뒤 숙종 11년(1685) 운권선사가 | + | 그 뒤 숙종 11년(1685) 운권선사가 평원사를 중창하고 대원암으로 개명했고, 고종 27년(1890) 혜흔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
− | 1948년 여수·순천사건 반란을 일으킨 | + | 1948년 여수·순천사건 반란을 일으킨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대원사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대원사는 1955년 이후로 법일스님이 꾸준히 복구사업을 벌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br> |
− |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수덕사 견성암 선원, 가지산 석남사 선원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1898년 구하스님은 이곳에서 | + |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수덕사 견성암 선원, 가지산 석남사 선원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1898년 구하스님은 이곳에서 박영호(朴永湖) 강백으로부터 대교를 배웠는데, 당시 대원사에는 수백 명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br> |
− | 1928년 서래각(西來閣) 선원이 | + | 1928년 서래각(西來閣) 선원이 개설되었으며, 1935년 무렵 성철(性徹)스님이 재가불자의 신분으로 대원사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당시 성철스님은 정진에 든 지 42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br> |
− | 1948년 여순사건으로 대원사의 모든 전각이 불타기 전까지 이곳에는 ‘상판’과 ‘하판’이라는 선방이 있었는데, 이 두 선방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같은 대원사 대중이면서도 진주 시내에서 만나면 어느 절에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경봉(鏡峰), 전강(田岡) | + | 1948년 여순사건으로 대원사의 모든 전각이 불타기 전까지 이곳에는 ‘상판’과 ‘하판’이라는 선방이 있었는데, 이 두 선방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같은 대원사 대중이면서도 진주 시내에서 만나면 어느 절에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경봉(鏡峰), 전강(田岡)스님 등 역대 큰스님 중에서 대원사 선방을 거쳐 가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선원이 융성하였다. </br> |
− | 대원사에 여법한 비구니 선원이 개원된 것은 1957년의 일이다. 가람은 대웅전(大雄殿), 원통전(圓通殿 | + | 대원사에 여법한 비구니 선원이 개원된 것은 1957년의 일이다. 가람은 대웅전(大雄殿), 원통전(圓通殿), 산왕각(山王閣), 봉익루(鳳翊樓), 천왕문(天王門), 명부전(冥府殿), 천광전(千光殿), 염화실(拈花室), 범종각(梵鐘閣), 백인당(百忍堂, 후원), 설성당(雪星堂: 주지실), 큰방, 객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의 측면 뒤편에 선원 건물인 사리전이 자리 잡고 있다. </br> |
− | 경내에는 | + | 경내에는 높이 6.6m의 다층석탑이 있는데 1989년에 보수하고 부처님 진신사리 58과가 출토되어 보물 제 1112호로 지정되었다. |
− | + | 방장산 대원사는 견성암, 내원사, 석남사, 윤필암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대원사가 비구니 선원으로 거듭나기까지 법일 스님의 대원력이 없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
− | 방장산 대원사는 견성암, 내원사, 석남사, 윤필암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대원사가 비구니 선원으로 거듭나기까지 | ||
− | ※ 출처: | + | ※ 출처: 대원사에 대한 상기 내용은 운문회보 제22호(불기 2531년, 1987년 11월 25일)를 기본으로 하되, 일부 잘못된 정보는 2023년 5월 1일 대원사로부터 확인 받아 수정함 |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374~380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6. |
+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49, 351, 352. | ||
+ | * 만허당 법일스님 문도회 저, 『방장산 대원사와 만허당 법일스님』, 비움과 소통, 2013 | ||
+ | * [이진두의 고승전] <37> 만허당 법일스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4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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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법일스님(法一, 1904生, 비구니)|법일스님(法一)]] || [[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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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7일 (화) 17:43 기준 최신판
법일(法一)스님 | |
---|---|
법명 | 법일(法一) |
법호 | 만허(滿虛) |
속명 | 김봉이(金鳳伊) |
출생 | 1904.08.23. |
출가 | 1936년 |
입적 | 1991.10.10. (세수88세, 법랍56세) |
사찰 | 대원사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길 45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법일(法一) 스님은 폐사였던 산청 대원사를 참선도량으로 일군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04 | 서울 출생 |
1925 | 경기여고를 거쳐 동덕여고 졸업 |
1927 | 진주 식산은행 근무 |
1936 | 산청 대원사에서 문성(文成)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7 | 산청 대원사에서 영암(映巖)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0 | 영암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 |
1950 | 해인사에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3 | 동화사 비구니 총림 교무국장 및 종회의원 |
1954 |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 |
1955 | 산청 대원사 주지 |
1957 | 사리전 선원 증축 |
1958 | 대웅전, 천광전, 사무실 신축 |
1960 | 객실 신축 |
1963 | 원통보전(관음전), 산신각 신축 |
1968 | 봉상루, 범종각 신축, 범종불사 |
1981 | 명부전 신축, 창고 건립, 후문 신축 |
1983~1984 |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 |
1991년 10월 10일 | 대원사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55세) |
문중 | 계민문중(戒珉) |
상훈 | 총무원장 표창장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행원(行願)・성우(性牛)・ 행돈(行敦)・행석(行錫)・진홍(眞弘)・행욱(行旭)・자현(慈賢)・행련(行蓮)・지형(智亨)・계정(戒靜)・종재(宗齋)・도정(道正)・도행(道行)・수현(修賢)・도문(道文)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문오(文悟, 10)→지부(志赴, 11)→주화(周和, 12)→문성(文成, 13)→법일(法一, 14)→행원(行願, 15), 성우(性牛, 15), 행돈(行敦, 15), 행석(行錫, 15), 진홍(眞弘, 15), 행욱(行旭, 15), 자현(自顯, 15), 행련(行蓮, 15), 지형(智亨, 15), 서지(西至, 15), 계정(戒靜, 15), 종재(宗齋, 15), 도정(道正, 15), 도행(道行, 15), 수현(修賢, 15), 도문(道文, 15) |
활동 및 공헌
법일스님 태몽
법일스님은 1904년 음력 8월 2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아버지 김유찬과 어머니 전영순 사이의 2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스님의 출가 전 속명은 봉이(鳳伊)인데, 이는 어머니의 태몽에 따라 지은 것이다. 꿈 속에 조부께서 큰 봉황새를 어머니 가슴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교육
일제시대 부유하고 개화된 집안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최고의 명문인 경기여고를 거쳐 1925년 동덕여고를 졸업하였다.
출가
고교를 졸업한 소녀 봉이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위해 진주에 있는 외가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27년 진주 식산 은행에 취직을 하여 십년 동안을 근무하였다. 인척인 직장 상사와 대원사에 다니던 중 어느 날 대원사에 주석하시던 비구니 문성(文成)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그 후 소녀 봉이는 출가자의 힘든 수행과정을 존경하게 되었고, 문득‘속세의 살림살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출가하여 구도자로 살아가는 것만은 못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바로 출가를 단행하였다. 1936년 9월 15일 문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니 이때 스님의 나이는 33세였다.
수행
세속의 삶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가게 된 스님은 1937년 9월 9일 영암映岩화상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40년에는 강원에서 사교(四敎)를 수료하였다. 그 후 쌍계사 국사암에서 견성암 대중 30여명과 당시의 대비구 선사 만공, 고봉스님 회상에서 각각 3년씩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후에도 각 선방에서 용맹 정진을 거듭하신 스님은 1950년 4월 8일 해인사 효봉(曉峯)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조계종 종회의원이 되다
1953년 동화사 비구니총림과 1954년 운문사 비구니강원에서 교무국장을 역임하신 스님은 1953년 9월에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어 수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산청 대원사 중창
1955년 9월 5일 주지로 부임한 대원사는 완전 폐허가 된 절터였다. 대작불사(大作佛事)의 원력을 세우고 그 면모를 일신하기까지 스님의 삶은 원력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스님이 부임하신 후에 도량을 일군 첫 번째 결실은 현재 선방으로 사용되는 탑전의 불사였다. 그 당시는 비구-대처승간의 치열한 시비가 있었던 터라 기득권을 가진 대처승의 방해로 인하여 불사가 쉽지 않았다. 결국 대원사 소유권 분쟁은 법정에까지 이어졌고, 불행 중 다행으로 1959년 고등법원에서 법일스님 측이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기쁨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시주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시대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만큼 그 자체가 바로 고행(苦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깊고 지극한 신심에 감복한 신도들의 시주금으로 30년에 걸쳐 조금씩 불사를 이어갔다. 1957년 가장 먼저 사리전 선원을 신축하여 향곡 큰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참선정진토록 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대웅전과 천광전을 신축하여 제영스님과 혼해스님을 모시고 강원을 개설하여 선교합일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 이듬해인 1960년에는 객실을 신축하였다. 스님의 불사에 대한 원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63년 원통보전(관음전) 및 산신각을 신축하고, 1968년 봉상루와 범종각을 신축하고 범종 불사를 하였다. 다시 1981년 명부전을 신축하고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후문을 신축하였다. 30여 년 동안 계속된 불사에 스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 1986년 대원사는 17여 동의 건물로 장엄한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청빈납자로서 후학의 모범이 되다
법일 스님이 평생을 참선정진으로 일관하면서도 가람과 대중수호를 원만히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원력 속에 항시 관음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 처함에 있어 둥글둥글 원만해야지, 모가 나면 아니 된다.”고 말씀하면서 우리 모두가 불이不二 의 인격체임을 일깨워 주었다. “도에는 성냄이 으뜸으로 해가 되니, 참고 참는 가운데 도가 성숙해짐”을 거듭거듭 당부하였다. 법일스님은 종종 “이제는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다”며 이처럼 텅-비인 느낌을 오래 전부터 체험하였다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더함 없는 원력으로 살았으면서도 끝내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겸허한 수행자였다. 스님은 아랫사람 보기를 천진불 보듯, 보살 대하듯 항시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며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다. 법일 스님의 상좌 도행 스님에 따르면 법일 스님은 대중외호에 지극정성을 다하면서 늘 대중 한 분 한 분을 부처님 같이 볼 것을 수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또 1984년 선방을 증·개축하면서 상량식 때에는 “도인이 깨알같이 쏟아져라.”라고 간절히 축원하셨다고 한다. 스님의 이러한 청빈한 납자의 삶은 후학의 모범이 되고도 남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대원사에 여걸이 계시니 가서 만나보라." 대원사 앞마당은 스님을 만나 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스님에게 경배를 올리는 이들은 사부대중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스님도 법일스님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여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다.
스님의 치열한 구도 여정
198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단일 구족계단 비구니 증명사를 역임한 스님은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수행자였다. 하루는 스님께서 출가 전에 외상으로 약을 사고 그 값을 치르지 못한 채 출가한 것을 기억해 내고, 그 약값을 치르기 위해 찾아가니 주인은 이미 명(命)을 다한 지 오래였다. 이에 스님은 그 약값을 영전에 놓고 제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 질 정도다. 스님은 가람수호 원력 이면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출가 후 입적에 이를 때까지 스님의 청빈한 삶과 불타는 구도열정은 후대 수행자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입적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 남긴 유품으로는 2 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있는 골동품 같은 나무책상 한 개와 벽시계 하나, 오래 된 라디오 하나, 서류를 보관하던 낡은 캐비넷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가 스님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1950년 비구니계 수지 이후 무려 30하(夏)를 성취하신 스님의 치열한 구도열정이다.
오로지 앉으나 서나 밤낮없이 대원사를 염려하셨던 비구니 법일 스님은 납자로서의 길을 따라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챙기던 어느 날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를 들으며 홀연히 세속의 인연을 마감하였다. 세수 88세요, 법랍은 55세였다.
스님이 입적에 들던 1991년 음력 10월 10일, 지리산은 온통 스님을 기리고 찬탄하는 불제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도들은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4월 '지리산 대원사 중창 사적비'를 건립하여 대원사의 창건과 중건의 역사는 물론 법일스님의 가람수호 원력의 업적을 만고(萬古)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원력에 힘입어 대원사에는 매년 수많은 눈 푸른 비구니 납자들이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수계제자로는 행원(行願)・성우(性牛)・행돈(行敦)・행석(行錫)・진홍(眞弘)・행욱(行旭)・자현(慈賢)・행련(行蓮)・지형(智亨)・계정(戒靜)・종재(宗齋)・도정(道正)・도행(道行)・수현(修賢)・도문(道文)스님이 있다.
산청 대원사
대원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9년(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할 당시 이름은 평원사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그 뒤 숙종 11년(1685) 운권선사가 평원사를 중창하고 대원암으로 개명했고, 고종 27년(1890) 혜흔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반란을 일으킨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대원사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대원사는 1955년 이후로 법일스님이 꾸준히 복구사업을 벌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수덕사 견성암 선원, 가지산 석남사 선원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1898년 구하스님은 이곳에서 박영호(朴永湖) 강백으로부터 대교를 배웠는데, 당시 대원사에는 수백 명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28년 서래각(西來閣) 선원이 개설되었으며, 1935년 무렵 성철(性徹)스님이 재가불자의 신분으로 대원사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당시 성철스님은 정진에 든 지 42일 만에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대원사의 모든 전각이 불타기 전까지 이곳에는 ‘상판’과 ‘하판’이라는 선방이 있었는데, 이 두 선방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같은 대원사 대중이면서도 진주 시내에서 만나면 어느 절에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경봉(鏡峰), 전강(田岡)스님 등 역대 큰스님 중에서 대원사 선방을 거쳐 가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로 선원이 융성하였다.
대원사에 여법한 비구니 선원이 개원된 것은 1957년의 일이다. 가람은 대웅전(大雄殿), 원통전(圓通殿), 산왕각(山王閣), 봉익루(鳳翊樓), 천왕문(天王門), 명부전(冥府殿), 천광전(千光殿), 염화실(拈花室), 범종각(梵鐘閣), 백인당(百忍堂, 후원), 설성당(雪星堂: 주지실), 큰방, 객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의 측면 뒤편에 선원 건물인 사리전이 자리 잡고 있다.
경내에는 높이 6.6m의 다층석탑이 있는데 1989년에 보수하고 부처님 진신사리 58과가 출토되어 보물 제 1112호로 지정되었다.
방장산 대원사는 견성암, 내원사, 석남사, 윤필암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대원사가 비구니 선원으로 거듭나기까지 법일 스님의 대원력이 없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출처: 대원사에 대한 상기 내용은 운문회보 제22호(불기 2531년, 1987년 11월 25일)를 기본으로 하되, 일부 잘못된 정보는 2023년 5월 1일 대원사로부터 확인 받아 수정함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374~380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6.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49, 351, 352.
- 만허당 법일스님 문도회 저, 『방장산 대원사와 만허당 법일스님』, 비움과 소통, 2013
- [이진두의 고승전] <37> 만허당 법일스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46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법일(法一)스님 | 본항목 | 법일(法一, 1904~1991) | 法一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일스님(法一,_1904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법일스님(法一)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법일스님(法一) | 문성스님(文成) | ~의 수계제자이다 | |
법일스님(法一) | 산청(진주) 대원사 | ~에서 출가하다 | |
법일스님(法一) | 영암스님(映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법일스님(法一) | 효봉스님(曉峰)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법일스님(法一) | 산청(진주) 대원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법일스님(法一) | 산청(진주) 대원사 | ~을(를) 중창하다 | |
법일스님(法一) |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중앙종회의원 |
법일스님(法一) | 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
지도
- 대원사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원사길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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