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스님(性眞, 189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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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진(性眞)스님은 오로지 굳은 신념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대중을 시봉하고 가람을 수호하였으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비구니 선원인 기린선원을 개원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 + | 묘공당(妙空堂) 성진(性眞)스님은 오로지 굳은 신념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대중을 시봉하고 가람을 수호하였으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비구니 선원인 기린선원을 개원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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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896 || 강원 삼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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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943 || 오대산 [http://woljeongsa.org/bbs/board.php?bo_table=101050&wr_id=68&sca=산내암자 월정사 지장암]에서 [[선일(善一)스님]]을 은사로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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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964~1967 || 월정사 지장암 법당 및 삼성각 중창 불사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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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972 || 월정사 지장암에 육화료(六和寮) 중창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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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1983. 2. 12. || 월정사 지장암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4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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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중|| [[문중]] | + | |문중|| [[봉래(蓬萊)문중|봉래문중(蓬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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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행지침|| | + | |수행지침|| 옛 조사의 경계 말로는 알 수 없어 그저 입가에 미소만, 먹구름 속 보름달 둥실 문득 말은 끊어지고 그저 입기에 미소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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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신조|| | + | |생활신조|| 나 때문에 다른 사람 괴롭히지 않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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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종스님(慧宗, 1930生, 비구니)|혜종(慧宗)]]・대하(大河)・혜안(慧眼)・법화(法華)・보명(普明)・자인(慈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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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태묵(太黙, 2)→태전(泰典, 3)→?→선일(善一, 5)→[[성진스님(性眞, 1896生, 비구니)|성진(性眞, 6)]]→[[혜종스님(慧宗, 1930生, 비구니)|혜종(慧宗, 7)]], 대하(大河, 7), 혜안(慧眼, 7), 법화(法華, 7), 자인(慈仁, 7), 보명(普明, 7) |
|} | |} | ||
==활동 및 공헌== | ==활동 및 공헌== | ||
===출가=== | ===출가=== | ||
+ | [[File:293-01.jpg|섬네일|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42]] | ||
+ | [[File:293-02.jpg|섬네일|[지장암 상량기념, 1963.8.26.]</br>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43]] | ||
+ | [[File:293-03.jpg|섬네일|[전쟁 후 지장암이 전소된 후 2칸 초막을 지어 세분의 노스님을 봉양하던 초막집]</br>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44]] | ||
+ | [[File:293-04.jpg|섬네일|[지장암]</br>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45]] | ||
+ | [[File:성진비구니.jpg|섬네일|[지장암 입구 성진스님비]</br>사진출처:2023년 3월 전영숙 촬영]] | ||
+ | [[File:성진스님부도.jpg|섬네일|[지장암 입구 성진스님부도]</br>사진출처:2023년 3월 전영숙 촬영]] | ||
− | == | + | |
+ | 묘공당(妙空堂) 성진(性眞)스님은 1896년 8월 25일 강원도 삼척에서 아버지 손동권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무남이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손성녀이다. | ||
+ | |||
+ | 월정사 지장암에 출가하여 글은 전혀 몰랐으나 오로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굳은 신념으로 서래일지(西來密旨)를 탐구하면서 대중시봉과 가람수호를 하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자비한 어머니로서 고행 정진하여 후인들에게 천고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 바로 묘공당 성진 비구니스님이다. | ||
+ | |||
+ | 스님은 품성이 온유하고 모습이 단정할 뿐만 아니라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홀어머니의 49재 때 한암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줄가 입산을 결심하였다. 성진스님은 1943년 3 월 15일 월정사 지장암의 선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945년 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리고 1948년 한암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 ||
+ | |||
+ | ===지장암 중창=== | ||
+ | [[File:대광명보살.jpg|섬네일|[지장암중창대화주 대광명보살의 공덕비와 부도]</br>사진출처:2023년 3월 전영숙 촬영]] | ||
+ | 그 후 큰 원을 세우고 지장암에 선방을 마련하여 매년 하안거 때마다 삼십 명의 선승들을 돌보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의 소개령(疎開令)에 따라 대중은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병든 노스님 세 분만 남게 되자 스님은 절 아래 마을로 노스님들을 모시고 내려가 시봉하면서 지장암을 지켰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지장암에서 1952년부터 두 칸 방의 초막을 짓고 정진하다가 1954년 상좌 혜종스님에게 지장암 운영을 맡기고 큰 대중에서 수행하고자 울산 석남사 [[인홍스님(仁弘, 1908生, 비구니)|인홍스님]] 회상<ref> 대중이 모인 법회 </ref>으로 갔다. 그곳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산감소임을 맡아 도량과 산을 돌보면서 항상 화두를 놓지 않았으며 일념만년거로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4790&replyAll=&reply_sc_order_by=I 동정일여]를 체험하였다. | ||
+ | |||
+ | 1961년 지장암 복구 불사를 위해 지장암에서 백일지장기도를 봉행하던 중 회향 전날 밤, 팔대보살이 앞에 서고 일만지장보살이 나타나 스님의 이마를 만지고 장상명주를 건네주는 경험을 하였다. 그로부터 법당, 삼성각을 중창하고, 1964년 10월 15일 낙성법회 때 월정사 주지 탄허 대종사로부터 표장장을 받았다. | ||
+ | 1972년 육화료를 신축하여 비로소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선원을 개설하게 되니 안거 철마다 삼십여 납자가 내방하여 머리의 불을 끄듯 정진하고 있으며, 수많은 눈 푸른 비구니 납자들이 오대산을 거쳐 가고 있다. | ||
+ | |||
+ | ===입적=== | ||
+ | 성진스님은 1983년 2월 12일 지장암에서 세수 88세, 법랍 41세를 일기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 ||
+ | 손상좌 정안스님은 폐허에서 수행도량을 일구어낸 스님의 자취를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 ||
+ | |||
+ | <poem> | ||
+ | |||
+ | 오대산중(五臺山中) 월정사(月精寺)는 자장율사(慈藏律師) 창건(創建)하고 | ||
+ | 불사리(佛舍利)를 봉안(奉安)하니 많은 불자(佛子) 귀의(歸依)하다. | ||
+ | 동대(東臺)에는 일만관음(一萬觀音) 서대(西臺)에는 일만세지(一萬勢至) | ||
+ | 남대(南臺)에는 일만지장(一萬地藏) 북대(北臺)에는 오백나한(五白羅漢) | ||
+ | 중대(中臺)에는 일만문수(一萬文殊) 오만성중(五萬聖衆) 계시옵는 | ||
+ | 성지(聖地) 중의 성지이며 사리(寺利) 중의 으뜸일세 | ||
+ | 성진니(性眞尼)의 원력(願力)으로 지장암(地藏庵)을 복원(復元)하여 | ||
+ | 많은 납자(衲子) 정진(精進)하니 오만성중(五萬聖衆) 미소(微笑)짓다 | ||
+ | |||
+ | |||
+ | </poem> | ||
+ | 성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종스님(慧宗, 1930生, 비구니)|혜종(慧宗)]]・대하(大河)・혜안(慧眼)・법화(法華)・보명(普明)・자인(慈仁)스님 등이 있다. | ||
+ | |||
+ |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월정사 지장암]]== | ||
+ | [[File:지장암_오대산1.jpg|섬네일|[지장암 전경]</br>사진출처:다음블로그https://blog.daum.net/gotemplestay/74]] | ||
+ | 지장암은 월정사의 산내 암자로 월정사에서 서쪽 500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대산 성지에서는 '남대 지장암'으로 불리운다. | ||
+ | 지장암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월정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 ||
+ | 8세기 초에 이르러 보천과 효명태자는 오대산이 문수보살뿐만 아니라 석가세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의 오류성중이 상주하는 곳으로 보고 동서남북중앙의 오대에 각각 만월산, 장령산, 기린산, 상왕산, 풍로산이라 이름지었다. 지장암은 기린산, 즉 남대의 암자로 지장보살님이 상주하시는 곳이다. | ||
+ | |||
+ | 오랫동안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던 지장암은 근대에 이르러 비구니스님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1937년 본공스님이 상원사로 와서 이듬해인 1938년 지장암에 비구니 선원을 열었다. 6·25 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지장암을 1961년 경희스님과 성진스님이 주축이 되어 법당을 재건하였으며, 1974년 성진스님과 [[혜종스님(慧宗, 1930生, 비구니)|혜종스님]]이 삼성각, 요사 객실, 욕실 등을 지어 자장암을 중창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정식으로 방부를 받아 선원으로 다시 개원하였다. 기린선원 큰방은 지장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ㄱ'자 모양의 건물로 건평 60평에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집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수용인원은 30명이다. 기린선원의 편액은 석주스님의 글씨이다. | ||
+ |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2007년, pp.546 | ||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
− |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541~546 |
− |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293.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41. | ||
+ |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theme/page/html/company/03.php) | ||
+ | * 프레시안, 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 <2> (2005년)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7221 | ||
+ | * 불교신문, 18. 지장암 기린선원 (2006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701 | ||
+ | * 오마이뉴스, [오대산의 암자들 ③] 비구니들이 지키는 기린산 남대 지장암 (2007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4796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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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분류 : 비구니스님]] |
2024년 10월 6일 (일) 18:18 기준 최신판
성진(性眞)스님 | |
---|---|
법명 | 성진(性眞) |
법호 | 묘공(妙空) |
속명 | 손성녀(孫聖女) |
출생 | 1896.08.25. |
출가 | 1943년 |
입적 | 1983.02.12. (세수88세, 법랍41세) |
사찰 |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 강원도 펑창군 진부면 동산리 63-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묘공당(妙空堂) 성진(性眞)스님은 오로지 굳은 신념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대중을 시봉하고 가람을 수호하였으며 특히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비구니 선원인 기린선원을 개원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896 | 강원 삼척 출생 |
1943 |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에서 선일(善一)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5 |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8 |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1 | 한국전쟁으로 평창 월정사 지장암 완전 소실 |
1952 | 한국전쟁 후 불탄 지장암 자리에 초막 2칸 세움 |
1960 | 석남사 산감[1] 소임 |
1964~1967 | 월정사 지장암 법당 및 삼성각 중창 불사 완공 |
1972 | 월정사 지장암에 육화료(六和寮) 중창 완공 |
1973 | 한국전쟁 이후 월정사 지장암에 인법당을 개설하고 북방 최초 비구니 선원인 기린선원 개원 |
1983. 2. 12. | 월정사 지장암에서 입적(세수 88세, 법랍 41세) |
문중 | 봉래문중(蓬萊) |
수행지침 | 옛 조사의 경계 말로는 알 수 없어 그저 입가에 미소만, 먹구름 속 보름달 둥실 문득 말은 끊어지고 그저 입기에 미소만 |
생활신조 | 나 때문에 다른 사람 괴롭히지 않기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혜종(慧宗)・대하(大河)・혜안(慧眼)・법화(法華)・보명(普明)・자인(慈仁)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태묵(太黙, 2)→태전(泰典, 3)→?→선일(善一, 5)→성진(性眞, 6)→혜종(慧宗, 7), 대하(大河, 7), 혜안(慧眼, 7), 법화(法華, 7), 자인(慈仁, 7), 보명(普明, 7) |
활동 및 공헌
출가
묘공당(妙空堂) 성진(性眞)스님은 1896년 8월 25일 강원도 삼척에서 아버지 손동권과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의 무남이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손성녀이다.
월정사 지장암에 출가하여 글은 전혀 몰랐으나 오로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굳은 신념으로 서래일지(西來密旨)를 탐구하면서 대중시봉과 가람수호를 하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자비한 어머니로서 고행 정진하여 후인들에게 천고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 바로 묘공당 성진 비구니스님이다.
스님은 품성이 온유하고 모습이 단정할 뿐만 아니라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홀어머니의 49재 때 한암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줄가 입산을 결심하였다. 성진스님은 1943년 3 월 15일 월정사 지장암의 선일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945년 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리고 1948년 한암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지장암 중창
그 후 큰 원을 세우고 지장암에 선방을 마련하여 매년 하안거 때마다 삼십 명의 선승들을 돌보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정부의 소개령(疎開令)에 따라 대중은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병든 노스님 세 분만 남게 되자 스님은 절 아래 마을로 노스님들을 모시고 내려가 시봉하면서 지장암을 지켰다.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지장암에서 1952년부터 두 칸 방의 초막을 짓고 정진하다가 1954년 상좌 혜종스님에게 지장암 운영을 맡기고 큰 대중에서 수행하고자 울산 석남사 인홍스님 회상[2]으로 갔다. 그곳에서 남들이 기피하는 산감소임을 맡아 도량과 산을 돌보면서 항상 화두를 놓지 않았으며 일념만년거로 동정일여를 체험하였다.
1961년 지장암 복구 불사를 위해 지장암에서 백일지장기도를 봉행하던 중 회향 전날 밤, 팔대보살이 앞에 서고 일만지장보살이 나타나 스님의 이마를 만지고 장상명주를 건네주는 경험을 하였다. 그로부터 법당, 삼성각을 중창하고, 1964년 10월 15일 낙성법회 때 월정사 주지 탄허 대종사로부터 표장장을 받았다. 1972년 육화료를 신축하여 비로소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선원을 개설하게 되니 안거 철마다 삼십여 납자가 내방하여 머리의 불을 끄듯 정진하고 있으며, 수많은 눈 푸른 비구니 납자들이 오대산을 거쳐 가고 있다.
입적
성진스님은 1983년 2월 12일 지장암에서 세수 88세, 법랍 41세를 일기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손상좌 정안스님은 폐허에서 수행도량을 일구어낸 스님의 자취를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세웠다.
오대산중(五臺山中) 월정사(月精寺)는 자장율사(慈藏律師) 창건(創建)하고
불사리(佛舍利)를 봉안(奉安)하니 많은 불자(佛子) 귀의(歸依)하다.
동대(東臺)에는 일만관음(一萬觀音) 서대(西臺)에는 일만세지(一萬勢至)
남대(南臺)에는 일만지장(一萬地藏) 북대(北臺)에는 오백나한(五白羅漢)
중대(中臺)에는 일만문수(一萬文殊) 오만성중(五萬聖衆) 계시옵는
성지(聖地) 중의 성지이며 사리(寺利) 중의 으뜸일세
성진니(性眞尼)의 원력(願力)으로 지장암(地藏庵)을 복원(復元)하여
많은 납자(衲子) 정진(精進)하니 오만성중(五萬聖衆) 미소(微笑)짓다
성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종(慧宗)・대하(大河)・혜안(慧眼)・법화(法華)・보명(普明)・자인(慈仁)스님 등이 있다.
월정사 지장암
지장암은 월정사의 산내 암자로 월정사에서 서쪽 500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오대산 성지에서는 '남대 지장암'으로 불리운다. 지장암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월정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8세기 초에 이르러 보천과 효명태자는 오대산이 문수보살뿐만 아니라 석가세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의 오류성중이 상주하는 곳으로 보고 동서남북중앙의 오대에 각각 만월산, 장령산, 기린산, 상왕산, 풍로산이라 이름지었다. 지장암은 기린산, 즉 남대의 암자로 지장보살님이 상주하시는 곳이다.
오랫동안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던 지장암은 근대에 이르러 비구니스님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1937년 본공스님이 상원사로 와서 이듬해인 1938년 지장암에 비구니 선원을 열었다. 6·25 전쟁 이후 잿더미가 된 지장암을 1961년 경희스님과 성진스님이 주축이 되어 법당을 재건하였으며, 1974년 성진스님과 혜종스님이 삼성각, 요사 객실, 욕실 등을 지어 자장암을 중창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정식으로 방부를 받아 선원으로 다시 개원하였다. 기린선원 큰방은 지장암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ㄱ'자 모양의 건물로 건평 60평에 정면 6칸, 측면 3칸의 겹집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수용인원은 30명이다. 기린선원의 편액은 석주스님의 글씨이다.
-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2007년, pp.546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541~54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29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41.
- 오대산 기린선원 남대 지장암 홈페이지 (http://namdaejja.webbit.kr/theme/page/html/company/03.php)
- 프레시안, 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 <2> (2005년)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7221
- 불교신문, 18. 지장암 기린선원 (2006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701
- 오마이뉴스, [오대산의 암자들 ③] 비구니들이 지키는 기린산 남대 지장암 (2007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47966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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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性眞)스님 | 본항목 | 성진스님(性眞, 1896~1983) | 性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진스님(性眞,_1896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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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스님(性眞) | 봉래문중(蓬萊) | ~의 일원이다 | |
성진스님(性眞) | 선일스님(善一)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진스님(性眞) |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 ~에서 출가하다 | |
성진스님(性眞) | 한암스님(漢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비구니계 |
성진스님(性眞) |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 ~을(를) 건립하다 | 기린선원 |
성진스님(性眞) |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 ~을(를) 중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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