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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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82 || 보령사,  [http://www.tongdosa.or.kr/bbs/board.php?bo_table=menu01301_01&wr_id=1 통도사 극락암], 부석사, [http://www.naewon.or.kr/ 내원사], 대성암, 대원사, [http://www.donghwasa.net/?c=1/9/51 동화사 내원암], 부도암, 용주사 등 안거 성만, 사자산 법흥사, 인천 용화사, 범어사 기도 정진
 
|1961~1982 || 보령사,  [http://www.tongdosa.or.kr/bbs/board.php?bo_table=menu01301_01&wr_id=1 통도사 극락암], 부석사, [http://www.naewon.or.kr/ 내원사], 대성암, 대원사, [http://www.donghwasa.net/?c=1/9/51 동화사 내원암], 부도암, 용주사 등 안거 성만, 사자산 법흥사, 인천 용화사, 범어사 기도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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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인과를 철저히 믿고 실행하여 항상 참회하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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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6~40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6~40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7.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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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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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지도==
* 시래사(경북 경주시 시래동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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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래사''' : 경상북도 경주시 시래동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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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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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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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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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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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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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니스님]]

2024년 9월 17일 (화) 21:27 기준 최신판



정의

혜문(慧門)스님은 쉼 없이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0 경북 예천 출생
1955 상주 용흥사에서 종덕(鍾德)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6 선암사 강원에서 『치문』 수학, 용흥사에서 혜봉(慧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8 운문사 사리암에서 기도 정진
1959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1~1982 보령사, 통도사 극락암, 부석사, 내원사, 대성암, 대원사, 동화사 내원암, 부도암, 용주사 등 안거 성만, 사자산 법흥사, 인천 용화사, 범어사 기도 정진
1982 경주 시래사 주지 취임, 시래사 중창 불사
2000 미얀마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와 제자 사리탑 완공
2004 시래사 주석
문중 청해(靑海)문중
수행지침 인과를 철저히 믿고 실행하여 항상 참회하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정민(靖旼)·정안(正安)·정엄(正嚴)·정휴·정인(正印)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영주(永周, 5)→응섭(應攝, 6)→수인(修仁, 7)종덕(鍾德, 8)혜문(慧門, 9)정민(靖旼, 10), 정안(正安, 10), 정엄(正嚴, 10), 정인(正印, 10)

활동 및 공헌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7
[시래사 창건 상량문]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9
[시래사 산신각]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402
[시래사 대웅전]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403

유년기의 불가인연과 출가

법성(法性) 혜문스님은 1930년 11월 30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에서 아버지 김홍도와 어머니 보행(普行)스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속명은 김옥남이다. 평소에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석남사 인홍스님의 권유로 출가하여 ‘보행’이라는 불명을 받고 사미니계를 받은 후 입적하셨다. 어머니 보행스님은 출가 전 절에 다녀온 후에는 자녀들에게 법문을 그대로 들려주곤 했으므로 혜문스님은 출가 전 어린 시절부터 무서울 때에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탁발 나온 스님들을 잘 따랐으며 출가를 동경하였다.

성장하면서 소녀 옥분은 ‘사람의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게 되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스스로 화두를 삼았다. 그 후 직지사 조실로 계시던 관응 큰스님과 석성우 스님 등으로부터 출가를 권유 받자 10년 간 아미타불을 주력하면서 육신으로서 서방정토에 가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한 후 1955년 10월 세수 30세에 상주 갑장산 용흥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의 생년월일은 주민등록상과 5살 차이가 난다. 용흥사로 출가한 다음 해에는 선암사 중강으로 있던 명성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을 배웠다.

전국의 선방을 돌며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다

스님은 30세에 출가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정도 나이의 출가를 늦은 출가로 생각했다. 혜문스님은 나이는 많고 이룬 것이 없음에 조급함을 느껴 밤잠도 안 자며 공부를 하다 그만 상기가 올랐다. 이 상태에서 쉬지도 않고 곧장 만성스님을 따라 대승암에서 32세에 첫 안거를 난 후 용흥사로 돌아가서도 상기가 계속되었으나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스님은 1958년에 청도 운문사로 가서 삼칠일 기도정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상기가 호전 되지 않았고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탁발을 하여 삼칠일 기도를 올렸다. 스님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시래기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단 없이 기도정진을 해나갔다. 1~2주가 지나자 조금씩 상황이 호전되었는데, 스님이 치열하게 기도정진 하는 것을 보고 대중들도 신심을 내게 되었으며, 삼칠일 기도를 회향할 때에는 지장보살이 백지에 편지를 써주는 가피체험을 했다.

스님의 건강이 완전히 호전되지 않아서 주위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오히려 운문사에서 사리암으로 올라가 다시 100일 기도를 시작했다. 그 후 충청도 보령사에서 하안거를 났는데, 졸음을 큰 적으로 여기고 100일 동안 찬물에 밥만 말아서 먹었다. 그후 혜문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을 찾아가 공부했는데, 당시 경봉스님이 가르쳐 주신 단전호흡을 통하여 무려 6년 동안이나 고생해온 상기가 30분도 안 되어 내렸다고 한다. 그후 스님은 해제 때 잠시 출타를 한 것을 제외하고 10년 동안 통도사 극락암에서 정진하였다. 당시 극락암의 대중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11시에 방선을 하며 치열한 수행을 했다고 한다.

혜문스님은 인천 용화사 전강스님 회상에서도 2철의 안거를 났는데, 10시에 방선하여 새벽 1시에 일어난 후 1시간 법문을 듣고 참선에 들어갔으며, 이때 비로소 잠을 항복시켰다고 한다. 또한 1968년에는 영주 부석사 근처 가시밭에 도인이 나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텐트를 치고 생식을 하며 석 달 동안 잠을 안 자고 정진을 계속하여 그간 없어지지 않았던 망상이 끊어지는 등 공부에 많은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파계사 성전암 철웅스님 밑에서 안거를 했으며, 내원사, 대성암, 대원사, 동화사 내원암, 부도암, 용주사 등에서도 안거를 했다.

혜문스님은 생활하다가 힘들고 분한 마음이 들면 언제나 화두를 찾는데, 그것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놈이 무엇인고? 무엇인고?'를 되뇌면서 조용히 밝히는 것이 의(疑)·분(憤)을 없애는 방법이라고 했다.

단식수행

혜문스님은 세납 40~46세까지 7번의 단식과 6년간의 생식을 했는데, 생식을 할 때에는 일체 생것만 먹고 무염식을 하였다. 스님에 따르면 생식을 할 때에는 생식을 마치고 화식으로 전환할 때에 특히 눈이 나빠질 수 있으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경주 시래사 창건

혜문스님은 세수 57세 때인 1982년 경주에 시래사를 창건했다. 당시 봉암사 조실 스님이 이 곳에 토굴을 지어 공부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가까운 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토굴 터를 보러 다니다가 신라시대 절터인 경주시 시래동 784번지 시래사 터 450평을 매입해서 주석하게 되었다. 시래사는 마을 안에 있던 민가였는데 터가 강해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고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걸망 하나만 지고 들어가서 요사채를 짓고, 3년 만에 법당을 낙성하는 등 10년 만에 800평 가람으로 완공하였다.

오색사리가 쏟아지는 꿈을 꾸고 부처님과 제자들의 사리를 얻어 사리탑을 세우다

1982년 음력 2월 20일 혜문스님은 오색사리가 부엌에서 쏟아지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상좌 정인스님이 1990년 미얀마 민쟌(Myingyan) 보디타운 사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문득 미얀마의 민쟌 보디타운 스님께서 사리를 가지고 와서 “이 사리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신심이 있는 스님에게 인연 따라 가는 부처님의 뜻입니다.” 하며 부처님 정골 사리 10과 외에 피부사리 9과, 목련, 사리불, 아나율, 우바리 등 7불 제자의 사리를 주었다. 오늘날 시래사 앞마당의 사리탑은 그러한 인연으로 조성된 것이다. 1990년(불기 2534년) 4월 회주 김백초성의 공덕으로 탑을 세우고, 그 뒤 주지 혜문스님의 발원으로 1999년 10월 26일 사천왕상을 조각한 기단부 신석을 새로 교체하고 석사자 4구를 만들어 2000년 2월 3일 사리를 봉안하여 2월 8일 회향하였다. 나무도 새도 개구리도 모두 부처님이자 대중이다

시래사는 왕래하는 신도가 몇 안 되는 조용한 사찰이다. 혜문스님 혼자 기거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절에는 항상 대중이 몇 백이 되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무도 새도 개구리도 모두 부처님이자 대중이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수계제자로는 정민(靖旼)·정안(正安)·정엄(正嚴)·정휴·정인(正印)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6~40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4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37.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혜문(慧門)스님 본항목 혜문스님(慧門, 1930~) 慧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문스님(慧門,_1930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혜문스님(慧門)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혜문스님(慧門) 종덕스님(鍾德) ~의 수계제자이다
혜문스님(慧門) 상주 용흥사 ~에서 출가하다
혜문스님(慧門) 혜봉스님(慧峰)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혜문스님(慧門)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혜문스님(慧門) 경주 시래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혜문스님(慧門) 경주 시래사 ~을(를) 중창하다
혜문스님(慧門) 안거 ~을(를) 성만하다 충주 보령사, 통도사 극락암, 영주 부석사, 양산 내원사,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산청 대원사, 내원암, 대구 동화사 부도암(도학동), 화성 용주사 등

지도

  • 시래사 : 경상북도 경주시 시래동 784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