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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인물명 : 도성(道成)스님''' |
| + | 수정문중의 도성스님(道成)은 불교 찬불가의 성악가인 [[정율스님(廷律, 1963生, 비구니)|정율스님(廷律)]]의 은사로서 인천 보광사에 주석했다. </br> |
| + | 정율스님(廷律)은 한국의 세계적인 불교 성악가로서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행사나 외국의 무대에서 아름다운 불교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법음(法音)을 선사했다. </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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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정보
| + |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18. |
− | |표제 = 도성(道成)스님
| + | </br> |
− |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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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명 = 도성(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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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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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 = 김해(金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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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명 = 김운태(金雲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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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192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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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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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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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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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분류 : 비구니스님]] |
− | ==1..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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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道成)스님은 평소 은사 일엽스님의 수행정신을 본받아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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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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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 경기 양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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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곡보통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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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 견성암에서 일엽(一葉)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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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 정혜사에서 춘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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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2004 수덕사에서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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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가사, 청룡사, 내원사, 삼선암 등 선원 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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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월도 간월암 주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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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현재 수덕사 견성암 주석 및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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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 중 : 성혜(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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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계제자 :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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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활동 및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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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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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道成)스님은 1922년 4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율성리에서 아버지 김종화와 어머니 창녕 조씨 조관암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이름은 김운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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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은 견성암에서 개화기의 여류시인으로 이름난 김일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후 힘든 일을 많이 해서 몸은 괴로웠지만 출가한 것에 대한 후회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일이 힘들수록 신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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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가 다음해인 1950년 정혜사에서 춘성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70년 예산 수덕사에서 일타 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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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과 수행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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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덕사 서편 산중턱에 있는 견성암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으로 원래는 정혜사 동쪽에 초가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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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 만공 큰스님의 뜻에 따 라 도흡스님이 창건한 이래 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 벽초스님에 의해 법당을 현대식 2층 석조 건물로 이전 건립하고, 서선당(西禪堂), 동선당(東禪堂) 등의 요사채를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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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이 출가할 당시 은사이신 일엽스님은 건강이 악화되어 대중 울력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엽스님은 평소 신장님께 공심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원을 하셨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도성수좌를 만나고부터 마음이 흐뭇하다. 하시며 대중 울력을 부탁하고 기뻐하셨다. 일엽스님은 늘 꼬챙이를 가지고 계시다가 졸음이 오면 뾰족한 꼬챙이 끝으로 스스로를 찔러 잠을 쫓곤 하셨다. 스님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꼬챙이로 스스로를 찌르는 것을 보면 눈물도 나오고 발심도 더 일어나곤 하였다. 이렇듯 스님은 은사스님의 철저한 수행 정진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신심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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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사 일엽스님 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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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은 은사스님의 말씀이라면 조금도 어김이 없이 실천하였다. 6·25전쟁 당시 예산에 있는 교각을 폭파하는 포성이 들리면, 일을 하다가도 뛰어 들어와 은사스님의 곁을 지킬 만큼 지극정성으로 20년 동안 일엽스님을 시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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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스님은 환희대에서 은사스님을 모시다가 입적하시기 3개월 전에 다시 견성암으로 모셔와 변함없는 마음으로 정성껏 시봉을 하였다. 일엽스님은 1971년 정월 초이틀 새벽 4시에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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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은사스님 옆을 지켰던 도성스님은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방 선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견성암을 벗어나지도 않았었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신 뒤에야 승가사를 비롯하여 청룡사와 통도사 등 제방을 두루 다니며 정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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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 삼선암에서 정진할 당시 부재중인 입승스님을 대신해 아픈 몸으로 입승을 살기도 하였고, 벽초 노스님과 덕산스님, 춘성 큰스님의 시자를 살기도 하였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스님 이 옷을 지어드리면 큰스님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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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스님은 1970년 간월도 간월암 주지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수덕사 견성암에 주석하고 있다. 스님이 주지로 있었던 간월암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외딴섬에 위치하고 있다. 간월도는 1980년대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물이 된 섬이다. 천수만 한가운데 떠 있던 바위섬 간월도는 어쩌다 드물게 굴양식 배만 드나들던 외딴섬이었으나 지금은 관광지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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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계제자로는 자인·자용·자우·자적·자경스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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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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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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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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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비구니인명사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