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림스님(成林, 191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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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 경북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桂雲)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3 || 경북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桂雲)스님을 은사로 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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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 + | |2004 || 옥련암 주석- ''입적 여부 확인 (2004년 현재 스님의 세수는 92세(주민등록상 89세), 법랍은 7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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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계제자 || 월명(月明)(1973년 12월 15일 입적)・화정(華禎)(공주 연화정사) | +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월명(月明)(1973년 12월 15일 입적)・화정(華禎)(공주 연화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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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한 부모님은 당시 양반들이 모두 그렇듯이 남존여비사상이 확고하여 출가 전에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아 스님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스님의 나이 18세 되던 해인 1933년 10월 18일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41년 4월 8일에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서혜담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이후 4년 뒤인 1945년 4월 8일에 해인사에서 경하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당시 청신암은 비구니 선방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 때 청신암 토지를 국유지로 전환하려는 정부 움직임에 스님이 증인으로 뛰어 다니며 애를 쓴 결과 무사히 땅을 지킬 수 있었다. | 완고한 부모님은 당시 양반들이 모두 그렇듯이 남존여비사상이 확고하여 출가 전에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아 스님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스님의 나이 18세 되던 해인 1933년 10월 18일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41년 4월 8일에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서혜담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이후 4년 뒤인 1945년 4월 8일에 해인사에서 경하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당시 청신암은 비구니 선방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 때 청신암 토지를 국유지로 전환하려는 정부 움직임에 스님이 증인으로 뛰어 다니며 애를 쓴 결과 무사히 땅을 지킬 수 있었다. | ||
− | === | + | ===백련암에서 옥련암으로=== |
6.25 전쟁 반발 후 1953년 38세 때, 청신암에서 같이 살던 영원스님의 아버지가 공산당으로 몰려 궁지에 처했다. 이에 스님은 출가한 영원스님의 고모 2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영원스님과 함께 백련암으로 갔다. 15평 법당 외에 아무것도 없던 청도 금천 백련암이었다. 산에 터를 닦아 손수 초가집 짓고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였다. | 6.25 전쟁 반발 후 1953년 38세 때, 청신암에서 같이 살던 영원스님의 아버지가 공산당으로 몰려 궁지에 처했다. 이에 스님은 출가한 영원스님의 고모 2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영원스님과 함께 백련암으로 갔다. 15평 법당 외에 아무것도 없던 청도 금천 백련암이었다. 산에 터를 닦아 손수 초가집 짓고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였다. | ||
1975년 스님의 나이 60세에 현재의 청도 금천면 옥련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옥련암으로 올 때 백련암에 있던 15평의 법당을 그대로 옮겨왔다. 옥련암 주지로 취임하면서 불사를 하였는데 법당, 요사채와 더불어 사찰전답이 모두 1,000평에 이른다. | 1975년 스님의 나이 60세에 현재의 청도 금천면 옥련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옥련암으로 올 때 백련암에 있던 15평의 법당을 그대로 옮겨왔다. 옥련암 주지로 취임하면서 불사를 하였는데 법당, 요사채와 더불어 사찰전답이 모두 1,000평에 이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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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88세의 고령에도 밭농사며, 감나무 과수원의 농사일을 손수 하고 늘 정정한 모습으로 매일 정진하고 있다. 평소 말이 없는 스님은‘시은施恩을 잊지 말고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아야 하며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 스님은 88세의 고령에도 밭농사며, 감나무 과수원의 농사일을 손수 하고 늘 정정한 모습으로 매일 정진하고 있다. 평소 말이 없는 스님은‘시은施恩을 잊지 말고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아야 하며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 ||
− | == 참고자료== | + | ==참고자료== |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 324~327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67. |
− | +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54.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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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비구니스님]] |
2024년 9월 17일 (화) 17:19 기준 최신판
성림(成林)스님 | |
---|---|
법명 | 성림(成林) |
법호 | |
속명 | 이복희(李福禧) |
출생 | 1916.08.08. |
출가 | 1933년 |
입적 | |
사찰 | 청도 옥련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139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림(成林)스님은 경북 청도 금천 옥련암을 창건하고 어려운 아이들은 돌 분 대한민국 비구니스님 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16 | 경북 청도 출생 |
1933 | 경북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桂雲)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1 | 청신암(청도) 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5 | 해인사에서 경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3 | 청도 백련암에 거처 마련 |
1975 | 경북 청도 금천 옥련암 창건, 대웅전 요사채 등 불사 |
2004 | 옥련암 주석- 입적 여부 확인 (2004년 현재 스님의 세수는 92세(주민등록상 89세), 법랍은 76세). |
문중 | 계민(戒珉)문중 |
수행지침 | 시은(施恩)을 소중히 여겨 정진하라. |
생활지침 |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월명(月明)(1973년 12월 15일 입적)・화정(華禎)(공주 연화정사)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수일(守一, 8)→선학(9)→도장(10)→계운(桂雲, 11)→성림(成林, 12)→월명(月明, 13), 화정(華禎, 13) |
활동 및 공헌
출가동기
양반집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나 3살 때 생모를 여의고 새어머니한테서 3명의 여동생이 생겼다. 그러나 새엄마에게 깊은 정을 느낄 수 없었던 스님은 출가자의 생활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와 운문사 청신암으로 간 것이 출가의 첫걸음이었다.
교육
완고한 부모님은 당시 양반들이 모두 그렇듯이 남존여비사상이 확고하여 출가 전에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아 스님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스님의 나이 18세 되던 해인 1933년 10월 18일 운문사 청신암에서 계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41년 4월 8일에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서혜담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이후 4년 뒤인 1945년 4월 8일에 해인사에서 경하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그 당시 청신암은 비구니 선방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 때 청신암 토지를 국유지로 전환하려는 정부 움직임에 스님이 증인으로 뛰어 다니며 애를 쓴 결과 무사히 땅을 지킬 수 있었다.
백련암에서 옥련암으로
6.25 전쟁 반발 후 1953년 38세 때, 청신암에서 같이 살던 영원스님의 아버지가 공산당으로 몰려 궁지에 처했다. 이에 스님은 출가한 영원스님의 고모 2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영원스님과 함께 백련암으로 갔다. 15평 법당 외에 아무것도 없던 청도 금천 백련암이었다. 산에 터를 닦아 손수 초가집 짓고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였다. 1975년 스님의 나이 60세에 현재의 청도 금천면 옥련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옥련암으로 올 때 백련암에 있던 15평의 법당을 그대로 옮겨왔다. 옥련암 주지로 취임하면서 불사를 하였는데 법당, 요사채와 더불어 사찰전답이 모두 1,000평에 이른다.
자비심으로 키운 아이
절에서 소비하는 채소는 직접 농사를 지어 해결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 자비심으로 키운 아이가 16명이며 그 중에서 삭발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된 스님이 6명이다. 열악한 생활 속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어 더러는 떠나보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아픔으로 남아있다. 스님이 아이를 맡아 키우실 때에 아이의 성품을 보아서 심성이 바르지 못한 아이는 특별히 훈육하려고 했고 심성이 바른 아이는 자신의 심성을 지켜가도록 보살펴 주었다. 지금의 주지스님도 5살 때부터 키워서 불제자가 되었다.
시은(施恩)을 잊지 말고 정진하라
스님은 88세의 고령에도 밭농사며, 감나무 과수원의 농사일을 손수 하고 늘 정정한 모습으로 매일 정진하고 있다. 평소 말이 없는 스님은‘시은施恩을 잊지 말고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아야 하며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고 한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 324~327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6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5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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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림(成林)스님 | 본항목 | 성림스님(成林, 1916~) | 成林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림스님(成林,_1916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성림스님(成林) | 계민문중(戒珉) | ~의 일원이다 | |
성림스님(成林) | 계운스님(桂雲)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림스님(成林) | 운문사 청신암 | ~에서 출가하다 | |
성림스님(成林) | 해담스님(海曇)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성림스님(成林) | 경하스님(景霞)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성림스님(成林) | 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
성림스님(成林) | 청도 옥련암 | ~을(를) 창건하다 |
지도
- 청도 옥련암 :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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