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본공스님(本空, 1907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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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
 
* 불교신문, 비구니 스님의 역사와 고승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375
 
* BTN, 본공스님 54주기 다례재 https://www.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47277
 
* BTN, 본공스님 54주기 다례재 https://www.btn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47277
* 운문사, 본공당(本空堂) 계명(戒明)선사의 삶과 수행http://unmunsa.or.kr/data/file/04_03_1/2105552687_nDR0S3dw_non01_EAB590EC8898EB85BCEB8BA8EBB484ED98B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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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 본공당(本空堂) 계명(戒明)선사의 삶과 수행 http://unmunsa.or.kr/data/file/04_03_1/2105552687_nDR0S3dw_non01_EAB590EC8898EB85BCEB8BA8EBB484ED98B8.pdf
* 한국선학회(논문), 비구니 본공의 선풍진작과 법맥상승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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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선학회(논문), 비구니 본공의 선풍진작과 법맥상승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70419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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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7일 (화) 15:39 기준 최신판



정의

본공당(本空堂) 계명(戒明)스님은 시대의 참 선객(禪客)이었으며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인가를 받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7 강원도 고성군 출생
1925 금강산 유점사에서 상운(祥雲)스님을 은사로 출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니계 수지
1928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29 수덕사 견성암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10년간 안거 성만
1935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본공(本空)”이라는 법호와 “달마사행론(達磨四行論)”게문을 받음
1935~1965 사불산 윤필암. 오대산 지장암, 해인사 국일암 범어사 대성암, 통도사 보타암, 내원사, 남해 보리암, 월내 묘관음사, 동화사 부도암 등에서 안거 성만
1937 월정사 지장암 선원 불사
1948 해인사 국일암 비구니 최초 선원 개원
1965 1965.2.27. 대구 서봉사에서 입적 (세수 59세, 법납 41세)
문중 봉래(蓬萊)문중
생활신조 ‘선(禪)이 기도고 기도가 선(禪)이다.”라는 강한 의지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법열(法悅)・선행(善行)・경희(慶喜)・도안(道眼)・유심(唯心)・무주(無住)・지홍(知弘)・현오(賢悟)・현성(賢性)・자호(慈浩)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세묵(世黙, 2)→사득(四得, 3)→만성(萬性, 4)→상운(祥雲, 5)→본공(本空, 6)→법열(法悅, 7), 선행(善行, 7), 경희(慶喜, 7), 도안(道眼, 7), 도안(道眼, 7), 유심(唯心, 7), 무주(無住, 7), 지홍(知弘, 7), 현오(賢悟, 7), 현성(賢性, 7), 자호(慈浩, 7)

활동 및 공헌

출가

월정사 지장암에서. 1943년 계미년 하안거
앞줄 좌측부터 본공스님, 만공 큰스님, 인홍스님 뒷줄 좌측부터 선경스님, 청룡사 윤호스님, 회룡사 도준스님, 상근스님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234

본공당(本空堂) 계명(戒明)스님은 1907년 봄, 강원도 고성군 수락면 덕산리에서 불심이 깊었던 아버지 서대현 거사와 어머니 변보리행 보살 사이의 7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이며, 이름은 서봉이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근을 키우며 자란 본공스님은 인품이 넉넉하고 씩씩하여 장부의 성격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19세에 금강산 유점사 홍수암에서 상운(祥雲)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미니계를 수지하였으며 22세에 유점사 동선 조실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 때 받은 법명이 ’계명(戒明)‘이다. 당시 은사 상운스님도 삭발한 지 불과 7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다. 본공스님의 노스님이신 박사득(朴四得) 스님은 속가에서 물려 받은 유산으로 금강산의 비구니 재벌로 불릴 만큼 재력이 있었는데, 아낌없이 주위에 나누어주고 불사에 보시하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만공 큰 스님의 수하로 들어가다.

그 해 가을 만공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재발심하여 선문에 들어갔으니, 스님의 자아를 찾기 위한 스님의 고행은 시작된 것이다. 그때 스님은 은사스님께 만공 큰스님의 문하생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으나 은사스님은 허락하지 않으하셨다. 이에 차비조차 없는 빈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며칠을 걸어 충남 수덕사로 본의 아니게 도망을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견성암에서 10년을 기한하고 용맹정진하였고, 그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만공 큰스님께 ’본공(本空)‘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스님은 드디어 온 우주가 열리고 삼라만상이 하나가 되는 이치를 터득하였다.


          어찌 불법에 비구, 비구니가 있으며
          어찌 너와 내가 있을 수 있으리오.
          어찌하여 북이 있고 남이 있으며
          어찌 너와 내가 있을 수 있으리오.
 

스님의 나이 24세인 1930년 11월에는 봉래산에 계시던 만공스님이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어 게문(偈文)을 보내주셨다.

만공스님이 본공 계명스님에게 준 게문(偈文)
사진출처: 불교신문(인터넷판 2019년12월20일), [이진두의 고승전] <41> 본공당 계명스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666


          無相戒明比丘尼
          示無相戒明比丘尼
          若以色見我 以音聲丘我
          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


          무상계명비구니
          무상계명비구니 보아라
          만일 물질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그는 사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존응화(世尊應化) 이천구백오십칠(二天九百五十七年) 십일월(十一月)
          건곤탄토객(乾坤呑吐客) 만공월면(滿空月面) 서우(書于) 봉래산자묘실중(蓬萊山慈妙室中)

스님은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마다 걸어서 구법행각을 다녔다. 한편 가끔 만공 큰스님께 제자의 도리를 다하였는데, 본공스님의 거룩한 사자(師資)의 인연은 오늘날까지 끝없이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만공 큰스님께 법호와 함께 법서를 받다.

만공 큰스님께서는 법호와 함께 법서를 내리셨는데, 달마대사 사행론을 잘 살려 간직하라는 내용이었다.


           사 본공니(賜 本空尼)
           달마대사사행론(達磨大師四行論)
           부작일개물명위작도(不作一介物名爲作道)
           부견일개물명위견도(不見一介物名爲見道)
           불수일개물명위수도(不修一介物名爲修道)
           부득일개물명위득도(不得一介物名爲得道)

           본공 비구니에게 내리노라.
           달마대사의 사행론이 그것이다.
           한낱 물건도 지음 없음을 이름하되 도를 짓는다 하며,
           한낱 물건도 봄이 없음을 이름하되 도를 본다고 하며,
           한낱 물건도 닦음 없음을 이름하되 도를 닦는다 하며,
           한낱 물건도 얻음 없음을 이름하되 도를 얻는다 하느니라.
           이 네 가지를 경솔하게 살펴 얻으면 헛수고이며 큰 병을 얻을지니 살피고 살필지어다.



한 물건도 지을 것이 없고, 볼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것이 바로 도라는 가르침인데, 이것은 스님의 법호인 '본공', 즉 '본래 공한 그 자리가 도'임을 일러주신 것이었다.

월정사 지장암에 선원을 개설

그 후 만공스님의 권유로 오대산 한암스님을 찾아뵙고 한암스님의 지도 아래 월정사 지장암에 선방을 개설하여 수년간 머물렀으며 훗날 대구 서봉사를 창건하게 된다.

한 시대의 비구니 조실로 살아온 스님은 고집스러우리만큼 청빈하였고, 평생 주지를 산 적이 없는 무소유의 납자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 후학들에게는 말없는 교훈을 주고 있는 스님은 살아 생전에는 후학들이 진정 알고 싶어하는 것을 일러주고 그들이 원하는 원천적인 활력소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선(禪)이 기도요 기도가 선(禪)이다.‘는 강한 의지 아래 여일하게 일관한 삶을 살았다.

어느 해 몹시 추웠던 겨울, 오대산 상원사에 기도를 가는 도중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난데없이 한 동자가 나타나서 길을 안내하여 무사히 상원사에 도착하였다. 이 사실을 방한암 큰스님께 여쭈었더니, 신심이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극복할 수 있는 법이라고 하시며 격려해주셨다고 한다.

여러 선방에서 안거

그 후로 본공스님은 윤필암에 입승을 지냈고 오대산 방한암 큰스님 회상에서 수철을 안거하였으며, 해방 직후엔 해인사 효봉 큰스님 회상에서 그칠 줄 모르는 선열의 기쁨을 누렸다. 홍련암에 있을 때에는 생전에 가장 아끼시고 사랑했던 손주 상좌 전명성 스님을 두고 몹시 기뻐했는데, 아마도 후일 대강백이 될 것을 미리 관철하였던 것이리라. 또한 스님은 범어사 대성암, 통도사 부도암, 내원사 향곡스님 회상에서 안거하였으며, 그 당시 큰스님들께서는 ’본공은 결코 비구니가 아니다.‘ 하시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951년 석우스님은 본공스님의 또 다른 법호인 각환(覺幻)비구니의 이름으로 게문을 보내셨다


           시비구니각환(示比丘尼覺幻)
           지환즉리부작방편(知環卽離不作方便)
           지리즉각역무점차(知離卽覺亦無漸次)
           범도불방편무점차(凡道不方便無漸次)
           시심마경계(是甚摩境界)
           지시통각환비구니 돌(只是筒覺幻比丘尼 咄)

           비구니 각환 보아라.
           (생사가) 환상인줄 알면 곧장 (생사)를 벗어남이니 방편을 지을 필요가 없고,
           (생사를) 벗어난 줄 알면 곧장 깨달음이니 또한 차근차근 닦을 필요가 없다.
           무릇 도라 함은 방관도 아니고 점차(漸次)도 없는 것이거늘.
           이것이 무슨 경계인고?
           그것은 바로 각휜 비구니로다. 억!

후학에 남긴 가르침

본공스님은 매우 엄격한 반면 한없이 자상하고 인자하였다. 행여 대중스님들의 건강을 해칠세라, 공부하는 데 소홀히 하는 것이 있을세라, 그때그때 공양까지 심려를 하였으니 그 자상함을 누가 감히 따르겠는가. 평소 참선과 기도를 주장한 스님은 '논과 밭을 후대에 남기기보다는 기도의 힘으로써 후학들에게 힘을 주리라.’ 하였고, 길을 가다가도 죽을 처지에 놓인 물고기나 뭇 생명을 보면 반드시 사서 방생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본공스님은 상좌 경희스님에게 '수좌는 반드시 신심이 있어야 하며 애써서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후학들에게는 항상 ‘선객은 신심으로 애써 공부해야 된다. 신심이 없으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으며 참다운 수행인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였다.

한 그루의 백송이 수백 년의 연륜을 쌓아오면서도 묵언으로써 교훈을 남기듯 스님은 늘 침묵하였으니, 본공스님의 수행은 세월이 무상으로 흘러가도 쉼 없는 수행자의 행 그대로였다. 또한 단 한 톨의 곡식이라도 공과 사를 엄격히 하였으며, 그 수행의 자취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역력하기만 하다.

입적

그러나 스님은 애석하게도 1965년 음력 2월 27일 대구 기린산 서봉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세수 59세, 법랍 41세였다.

수계제자로는 법열(法悅)・선행(善行)・경희(慶喜)・도안(道眼)・유심(唯心)・무주(無住)・지홍(知弘)・현오(賢悟)・현성(賢性)・자호(慈浩)스님 등이 있다.

대구 서봉사

기린산 서봉사는 대구시 남구 이천동 439-2번지에 있으며, 1920년경 한 청신녀가 창건하고, 탄응, 동운, 전강, 학봉스님 등 여러 큰스님께서 주석하셨다. 운허스님이 쓰신 서봉사 사적비에 따르면, 1952년 본공스님이 결제 후 해제 때 주석하면서 사찰을 수호하고 불법을 선도했다고 한다.

그 후 1965년 조계종 산하의 재단법인 선학원 명의로 등록하고 그 분원이 되기까지 6년간의 법정분쟁 끝에 1971년 쌍방의 화해가 성립된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가람 불사를 할 수 있었다.

본래의 목재 요사채를 헐고, 1972년 당시 2층 콘크리트 건물 88칸의 요사채, 대웅전 8칸, 명부전 4칸, 칠성각 2칸, 기타 요사 10칸 등의 불사를 했고, 그 후 범종각, 사천왕 등의 불사를 보완하여 가람의 규모를 현재의 위용으로 갖추었다.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654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본공(本空)스님 본항목 본공스님(本空, 1907~1965) 本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본공스님(本空,_190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본공스님(本空) 봉래문중(蓬萊) ~의 일원이다
본공스님(本空) 상운스님(祥雲) ~의 수계제자이다
본공스님(本空)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에서 출가하다
본공스님(本空) 동선스님(東宣)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본공스님(本空) 월정사 남대지장암(기린선원) ~을(를) 건립하다
본공스님(本空) 대구 서봉사 ~을(를) 중창하다
본공스님(本空) 안거 ~을(를) 성만하다 예산 수덕사 견성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사불산), 평창 월정사 지장암(오대산), 합천 해인사 국일암,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양산 통도사, 울주 보타암, 양산 내원사(천성산), 남해 보리암, 기장 월내 묘관음사, 대구 동화사 부도암(도학동) 등

지도

  • 서봉사 :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 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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