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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명 : 부산 보광원(普光院)'''
 
* '''사찰명 : 부산 보광원(普光院)'''
 
* 주소 : 부산 부산진구 진남로304번길 18 (전포동 485-22)        연락처 051-802-6236  
 
* 주소 : 부산 부산진구 진남로304번길 18 (전포동 485-22)        연락처 051-802-6236  
대형(大亨) 지원(知元)스님이 1980년 부산 전포동에 보광원을 중창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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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스님(知元, 1931生, 비구니)|대형(大亨) 지원스님(知元)]]이 1980년 부산 전포동에 보광원을 중창했다.  </br>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로 등록되어 법향을 피우고 있는 이 절은 예전에 조그마한 암자로 있던 것을 1979년 3월에 사직동 보림사에 주석하시던 은사이신 지원스님이 매입하여 상좌인 인환스님 앞으로 등록을 마치고 쉬임없는 불사를 하여 대웅전 30평, 3층 70평, 2층60평, 1층은 40평으로 비탈진 지형에 맞춰 오늘의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셔놓고 있다. </br>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로 등록되어 법향을 피우고 있는 이 절은 예전에 조그마한 암자로 있던 것을 1979년 3월에 사직동 보림사에 주석하시던 은사이신 지원스님이 매입하여 상좌인 인환스님 앞으로 등록을 마치고 쉬임없는 불사를 하여 대웅전 30평, 3층 70평, 2층60평, 1층은 40평으로 비탈진 지형에 맞춰 오늘의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셔놓고 있다. </br>
 
이곳엔 대웅전을 바라보며 우측 편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비가 황령산 터널로 빠져나가는 지기를 잡고 있듯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시비가 언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곳 황령산 자락에는 무허가 사찰들이 많아서 사찰 정화 때 모두 폐찰 될 위기에 처했는데 유독 이 사찰은 만해 한용운스님의 시비 덕으로 폐찰되지 않고 맥을 이었다고 한다. 승려요..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요.. 민족 지도자인 만해 한용운스님의 원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br></br>
 
이곳엔 대웅전을 바라보며 우측 편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비가 황령산 터널로 빠져나가는 지기를 잡고 있듯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시비가 언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곳 황령산 자락에는 무허가 사찰들이 많아서 사찰 정화 때 모두 폐찰 될 위기에 처했는데 유독 이 사찰은 만해 한용운스님의 시비 덕으로 폐찰되지 않고 맥을 이었다고 한다. 승려요..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요.. 민족 지도자인 만해 한용운스님의 원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br></br>

2024년 5월 9일 (목) 21:53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부산 보광원(普光院)
  • 주소 : 부산 부산진구 진남로304번길 18 (전포동 485-22) 연락처 051-802-6236

대형(大亨) 지원스님(知元)이 1980년 부산 전포동에 보광원을 중창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로 등록되어 법향을 피우고 있는 이 절은 예전에 조그마한 암자로 있던 것을 1979년 3월에 사직동 보림사에 주석하시던 은사이신 지원스님이 매입하여 상좌인 인환스님 앞으로 등록을 마치고 쉬임없는 불사를 하여 대웅전 30평, 3층 70평, 2층60평, 1층은 40평으로 비탈진 지형에 맞춰 오늘의 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셔놓고 있다.
이곳엔 대웅전을 바라보며 우측 편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비가 황령산 터널로 빠져나가는 지기를 잡고 있듯 의연한 자세로 서 있다. 시비가 언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 이곳 황령산 자락에는 무허가 사찰들이 많아서 사찰 정화 때 모두 폐찰 될 위기에 처했는데 유독 이 사찰은 만해 한용운스님의 시비 덕으로 폐찰되지 않고 맥을 이었다고 한다. 승려요..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요.. 민족 지도자인 만해 한용운스님의 원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