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지스님(聖智, 1926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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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 친견===
 
===문수보살 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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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용안사.jpg|섬네일|'''용안사'''</br>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ggandolhome/221297361820 깐돌이네 여행이야기] ]]
 
39세 되던 해, 스님은 양산 통도사로 가는 길에 옷과 피부가 온통 새까맣고 버드나무 비녀를 찌른 어느 할머니를 만났다. 지리산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군 입대를 한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서 만나고 난 뒤 만행을 하는 중이었다. 스님은 할머니와 함께 신평 입구에서 통도사 입구까지 불법을 얘기하며 걸어가게 되었다. 길을 걷는 동안 할머니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39세 되던 해, 스님은 양산 통도사로 가는 길에 옷과 피부가 온통 새까맣고 버드나무 비녀를 찌른 어느 할머니를 만났다. 지리산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군 입대를 한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서 만나고 난 뒤 만행을 하는 중이었다. 스님은 할머니와 함께 신평 입구에서 통도사 입구까지 불법을 얘기하며 걸어가게 되었다. 길을 걷는 동안 할머니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 사진출처(용안사): 깐돌이네 여행이야기 https://blog.naver.com/ggandolhome/22129736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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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한 여인이 20대에 혼자되어, 정승집 방아를 찧어주고 남은 싸래기를 얻어 와서 밥을 해 먹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정승 부인이 쌀 한 말을 곱게 찧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가난한 여인은 '정승 부인같이 복 많은 사람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이제부터 나도 올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가난한 여인은 다음날부터 방아를 찧고 나온 싸래기에서 온톨만 골라 따로 모아두었다. 그렇게 모은 쌀은 어느 덧 한 되가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한 여인이 20대에 혼자되어, 정승집 방아를 찧어주고 남은 싸래기를 얻어 와서 밥을 해 먹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정승 부인이 쌀 한 말을 곱게 찧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가난한 여인은 '정승 부인같이 복 많은 사람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이제부터 나도 올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가난한 여인은 다음날부터 방아를 찧고 나온 싸래기에서 온톨만 골라 따로 모아두었다. 그렇게 모은 쌀은 어느 덧 한 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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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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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삼평리 1259
 
* '''용안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삼평리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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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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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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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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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니스님]]
==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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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 주요 비구니 스님]] '''</big>
 

2024년 9월 16일 (월) 12:35 기준 최신판



정의

용천 성지(聖智)스님은 출가 수행 중에 기이한 행적을 많이 보여주셨으며, 대중포교에 크게 기여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6 경남 진양 출생
1950 청도 운문사에서 호명[1]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해인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일광 원효대에서 17년간 공양주 소임
1968 경남 용안사 주지 취임
용안사 중창 불사
2000 교도소 법회 등 포교와 후진 양성
2008 입적(2008년 11월 25일)
생활신조 인과를 알아야 하고 한을 가지면 안 되며, 화를 내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법인·법륜·법수·법안

활동 및 공헌

출가

용천 성지(聖智)스님은 1926년 10월 3일 경남 진양군 미천면 안강리에서 아버지 윤윤선과 어머니 서희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속명은 윤판림이다.

스님은 1950년 청도 운문사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7~8년간 하였다.

성지(聖智)스님의 기적

스님이 6·25전쟁 이후 원효대에서 기도할 때의 일이다. 부산 소림사에서 보살들과 함께 일광에 나가 탁발을 한 후 사찰로 돌아오려고 기차역으로 갔다. 그때 스님의 수중에는 기차요금이 100원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처사님이 역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데, 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우는 것이었다. 너무나 보기가 딱해 스님은 먹을 것을 사주라며 전 재산 100원을 선뜻 건네주었다.
처사는 스님에게 연신 고마워하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는 시청에서 과장으로 재직 중인 사람인데, 바람난 아내가 집을 나가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스님은 처사의 안타까운 사연을 다 들어주었지만, 정작 차비가 없어 소림사까지 걸어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가씨가 다가오더니 스님을 소림사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후라 당시 기차역 앞에는 전쟁고아를 비롯해 생활이 어려운 어른들이 많았다. 스님은 소림사에서 기도를 하면서 2,000원이 생기면 2,000원을 전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다시 소림사로 돌아와 기도를 하면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4,000원이 생겼다. 스님은 그 모든 것을 부처님의 가피로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다.
당시 부산 다대포 고아원은 어른 400명, 어린이 800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 다섯 명과 함께 2년 동안 기도와 탁발을 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 한 말씩을 나눠주고 다녔다.

문수보살 친견

용안사
사진출처: 깐돌이네 여행이야기

39세 되던 해, 스님은 양산 통도사로 가는 길에 옷과 피부가 온통 새까맣고 버드나무 비녀를 찌른 어느 할머니를 만났다. 지리산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군 입대를 한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서 만나고 난 뒤 만행을 하는 중이었다. 스님은 할머니와 함께 신평 입구에서 통도사 입구까지 불법을 얘기하며 걸어가게 되었다. 길을 걷는 동안 할머니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한 여인이 20대에 혼자되어, 정승집 방아를 찧어주고 남은 싸래기를 얻어 와서 밥을 해 먹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정승 부인이 쌀 한 말을 곱게 찧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가난한 여인은 '정승 부인같이 복 많은 사람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이제부터 나도 올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가난한 여인은 다음날부터 방아를 찧고 나온 싸래기에서 온톨만 골라 따로 모아두었다. 그렇게 모은 쌀은 어느 덧 한 되가 되었다.
하루는 저녁 무렵에 한 도승이 찾아와 가난한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였다. 흔쾌히 승낙한 여인은 부처님께 올리려던 공양을 스님께 지어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쌀 한 되 중 반 되를 씻어서 정성껏 밥을 지어 스님께 공양을 올렸다. 스님은 반찬도 없는 밥을 맛있게 드시고 하룻밤을 묵어갔다. 여인은 그때 '내가 박복해서 스님 한 분 제대로 모시지 못하니 이를 어쩌나' 하고 한탄하며, 주무시는 스님의 머리맡에 앉아 합장을 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아침 가난한 여인은 남아있는 반 되의 쌀을 씻어서 스님께 아침공양을 지어드렸다. 공양을 다 드신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났는데, 가다가 되돌아 와서는 “저절로 부처님 되어 왕의 모친 되옵소서.” 라는 염불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가난한 여인은 스님이 가르쳐준 염불을 열심히 하였다. 이 염불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아이들까지도 ‘무슨 소리를 하느냐 ’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한편 그 나라의 왕자가 몹시 위중한 병에 걸려 온갖 좋은 약을 다 써도 별 차도가 없는 탓에 왕궁은 온통 시름에 젖어 있었다. 의원은 '천하에 없는 꽃을 먹으면 낫는다.'는 처방을 내렸고, 온 나라의 정승들이 그 꽃을 찾아 백방으로 돌아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난한 여인이 자고 일어나보니 부뚜막 돌 위에 큰 작약 8송이가 활짝 피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난한 여인은 깜짝 놀라 얼른 꽃을 덮어 놓고 정승 집으로 방아를 찧으러 갔다. 정승 집에서는 세상에 없는 꽃에 대한 이야기로 야단법석이었다.
이에 여인이 “저희 집에 간밤에 꽃이 피었습니다.”하고 말하였지만,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승이 가난한 여인의 집 부엌으로 가보니 여인의 말처럼 서광이 비치는 꽃이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정승이 꽃을 꺾으려고 하였으나 꽃은 꺾이지 않았다. 이에 가난한 여인이 다가가 꽃을 꺾으니 향기가 진동을 하면서 꽃이 꺾이는 것이었다. 꽃을 든 정승은 마치 나는 듯 궁으로 들어가 왕자에게 먹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왕자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양산 통도사 일주문 앞에서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보살이 오늘 부처님을 친견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이 극락암 경봉 큰스님께 그 일을 말씀드리니 “성지야, 네가 문수보살을 친견했구나.” 하는 것이었다.

포교활동

남해 보리암에서 천일 관음기도를 하던 중 한 시간 동안 방광을 한 적이 있는 성지스님은 43세 되던 해인 1968년 경남 울주군 온산면 삼평리 1263번지에 위치한 용안사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84년 울산시 남구 신정동에 용안사 포교원을 개원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개원 당시 300여 명이었던 신도는 1990년에 이르자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용안사 포교원은 개원 당시 정당 회의실, 예식장 등을 빌려 유랑법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타종교에 신도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스님이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여, 지금은 울산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포교원이 되었다. 처음 개원했을 때에는 보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거사는 물론 어린이, 청소년들의 참여와 활동도 많아졌다.
신도층이 다양해진 만큼 포교의 내용도 다양해져서 음악, 붓글씨, 도자기 등 예술 활동을 통한 포교를 펼쳤다. 용안사 합창단인 연화합창단은 불교방송 주최 찬불가 합창제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인과(因果)를 알아야 하며, 한을 가지면 안 되고, 화를 내지 말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강조하는 성지스님은 한 달에 한 번 교도소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으며, 부모가 없어서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 6명을 길렀다.

수계제자

성지스님은 2008년 11월 25일 용안사에서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법인·법륜·법수·법안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33~136.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2.
  • 불교신문. 울산 용안사 회주 성지스님 다비식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378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지(聖智)스님 본항목 성지스님(聖智, 1951~2014) 聖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지스님(聖智,_1926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성지스님(聖智) 호명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성지스님(聖智) 청도 운문사 ~에서 출가하다
성지스님(聖智)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비구니계
성지스님(聖智) 울산울주 용안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지스님(聖智) 울산울주 용안사 ~을(를) 중창하다

지도

  • 용안사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삼평리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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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불교신문 울산 용안사 회주 성지스님 다비식'에는 1963년 호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