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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스님은 1872년 2월10일 충남 부여군 남면 송학리에서 장홍근(張洪根) 선생의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모친은 은진 송씨(宋氏). 스님의 법호는 석상(石霜)이고, 법명은 신수(信首)이다. </br> | 석상스님은 1872년 2월10일 충남 부여군 남면 송학리에서 장홍근(張洪根) 선생의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모친은 은진 송씨(宋氏). 스님의 법호는 석상(石霜)이고, 법명은 신수(信首)이다. </br> | ||
스님은 1884년부터 7년간 충남 부여군 내산면 녹간리(鹿澗里)에서 김기상(金箕祥)선생에게 <통감(痛鑑)>과 <사서삼경> 등 한학을 중심으로 한 외전을 깊이 공부했다. </br> | 스님은 1884년부터 7년간 충남 부여군 내산면 녹간리(鹿澗里)에서 김기상(金箕祥)선생에게 <통감(痛鑑)>과 <사서삼경> 등 한학을 중심으로 한 외전을 깊이 공부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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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까지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복천선원을 창건하고 대동강습소를 열었으며, 미륵대불조성에 힘썼다. 또한 스님은 1945년 9월 조선불교 중앙교무회 고문으로 추대됐고, 1947년 5월13일에는 선학원에 설립된 조선불교 총본원의 교정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1947년 12월23일(음력11월12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75세였다. 스님의 비와 부도는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다. </br> | 1940년까지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복천선원을 창건하고 대동강습소를 열었으며, 미륵대불조성에 힘썼다. 또한 스님은 1945년 9월 조선불교 중앙교무회 고문으로 추대됐고, 1947년 5월13일에는 선학원에 설립된 조선불교 총본원의 교정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1947년 12월23일(음력11월12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75세였다. 스님의 비와 부도는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다. </br> | ||
− | ※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087 불교신문(2008.08.30 09:05) 28. 석상신수] | + | ※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087 불교신문(2008.08.30 09:05) 28. 석상신수]</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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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비구스님]] |
2024년 5월 6일 (월) 21:33 기준 최신판
- 석상신수(石霜信首,1872~1947)
- 생애·업적
석상스님은 1872년 2월10일 충남 부여군 남면 송학리에서 장홍근(張洪根) 선생의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모친은 은진 송씨(宋氏). 스님의 법호는 석상(石霜)이고, 법명은 신수(信首)이다.
스님은 1884년부터 7년간 충남 부여군 내산면 녹간리(鹿澗里)에서 김기상(金箕祥)선생에게 <통감(痛鑑)>과 <사서삼경> 등 한학을 중심으로 한 외전을 깊이 공부했다.
1893년 4월8일 강원도 고성 신계사에서 서진하(徐震河)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청허휴정스님의 16대 법손이다. 같은해 6월 16일 신계사에서 진하스님에게 사미십계를 수지했고, 1895년 7월15일 고성 건봉사에서 진하스님에게 비구 구족계와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스님은 1903년 10월15일 고성 건봉사에서 개강(開講)하고 수선 안거를 성취하며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수행에 몰두했다.
출가 이듬해인 1894년 3월1일부터 이듬해 10월까지는 충남 공주 동학사 김만우(金萬愚) 스님 문하에서 초등과(初等科)를 졸업했다.
1895년 10월15일부터 1896년10월까지는 전북 순창 구암사 박한영 스님에게 중등과(中等科) 가운데 <능엄경>과 <기신론>을 익혔다. 1897년 3월10일부터 1898년 10월까지는 전남 순천 송광사 김금명(金錦溟) 스님에게 <반야경>과 <원각경>을 배워 중등과를 졸업했다. 1899년 3월15일부터 1901년 10월까지는 경남 산청 대원사에서 박한영 스님의 지도를 받고 고등과(高等科)를 졸업했다.
스님은 1913년 7월30일 법주사 선시(選試)에 합격해 대선법계(大禪法階)를 받았고, 1916년에는 중덕법계(中德法階), 1918년에는 대덕법계(大德法階), 1921년에는 대선사법계(大禪師法階)를 수지했다.
선교율을 겸비한 스님은 특히 교학을 통한 도제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1903년부터 1926년까지 30여년간 건봉사와 법주사에서 강사(講師)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했다. 1903년 고성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취임했고, 1905년에는 법주사 판사(判事)로 임명됐다.
1912년부터 1925년2월까지 법주사에서 강사를 지냈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는 법주사 법무(法務) 소임도 겸했다. 스님은 1925년 ‘충북불교청주용화포교당(지금의 청주 용화사)’의 포교사로 선임되어 전법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다시 법주사 강사로 취임했고, 1928년12월에는 법주사 주지로 선출됐다.
1940년까지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복천선원을 창건하고 대동강습소를 열었으며, 미륵대불조성에 힘썼다. 또한 스님은 1945년 9월 조선불교 중앙교무회 고문으로 추대됐고, 1947년 5월13일에는 선학원에 설립된 조선불교 총본원의 교정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1947년 12월23일(음력11월12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75세였다. 스님의 비와 부도는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