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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명 : 성내포교당(城內布敎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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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제주읍 성내 이도리 1362 (현 제주시 이도일동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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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내포교당은 봉려관 스님이 1925년 창건한 사찰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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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이 1924년 제주도 상권 최중심지인 제주 성내 이도리 1362번지(당시)에 땅 500여 평을 매입하고, 1925년 2월 상량식을 거행했으며, 1925년 4월 10일(양력)에는 이미 성내포교당 건축을 완료했다. 성내포교당 법당 건축양식은 건물 정중앙에 출입구가 있고 외부 벽에는 돌과 목재가 사용된 기와를 얹은 건축물이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재가자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봉려관이 거처하던 조그마한 승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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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5월 ‘성내포교당’ 창건 낙성식과 함께 계단을 설치해서 367명이 계를 받았으며, 1925년 8월 24일 해남 대흥사에서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와서 성내포교당에 봉안하고, 1925년 10월 비구니 경화(1889-1940)가 모연해서 관세음보살상의 개금 불사를 마치고 성내포교당에 봉안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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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내에 거주하던 신도들이 한라산 관음사를 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소요되었고, 불공을 하려면 산천단 소림사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새벽에 공양물을 지고 관음사로 올라가 사시에 불공을 했는데, 게다가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왕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신도들을 관음사가 다 수용할 수도 없었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중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상권 중심지에 성내포교당을 창건한 것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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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는 기도, 수행 중심의 사찰 역할을 담당했고, 성내포교당은 불교단체, 지역사회단체 행사가 개최되는 활동 공간이고, 입도자의 거점지고, 정재계 사회 인사와의 교류 장소로써 제주불교 교세 확장을 견인했고, 신여성 양성과 유소년 청장년 포교의 장이고, 불교 교육의 산실이고, 제주불교 중흥의 요충지고 산 증인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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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는 성내포교당에서 각계각층과 상호 교류하면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활짝 꽃피운다. 봉려관은 성내포교당에서 지역사회단체, 민중과 교류하면서 저변을 확대해 나갔으며, 더불어 제주불교 기력도 강화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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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포교당’은 훗날 ‘중앙포교당’으로 불리었고, 그 후 다시 사명을 바꾸어 ‘대각사’라 불리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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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중앙포교당 일부 부지가 매각돼 버렸고, 그 후 봉려관 스님이 지은 건축물을 철거하고 주차장과 상가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상가건물 맨 위층에 대각사가 자리해서 중심지 포교를 근근이 담당했지만, 근래에는 상가와 주차장 용도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고, 상가 제일 위층에 자리한 대각사는 이제 더는 운영되지 않는다.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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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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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사찰]]

2024년 5월 10일 (금) 07:07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성내포교당(城內布敎堂)
  • 주소 : 제주읍 성내 이도리 1362 (현 제주시 이도일동 1362)

제주 성내포교당은 봉려관 스님이 1925년 창건한 사찰이다.
봉려관 스님이 1924년 제주도 상권 최중심지인 제주 성내 이도리 1362번지(당시)에 땅 500여 평을 매입하고, 1925년 2월 상량식을 거행했으며, 1925년 4월 10일(양력)에는 이미 성내포교당 건축을 완료했다. 성내포교당 법당 건축양식은 건물 정중앙에 출입구가 있고 외부 벽에는 돌과 목재가 사용된 기와를 얹은 건축물이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재가자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봉려관이 거처하던 조그마한 승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25년 5월 ‘성내포교당’ 창건 낙성식과 함께 계단을 설치해서 367명이 계를 받았으며, 1925년 8월 24일 해남 대흥사에서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와서 성내포교당에 봉안하고, 1925년 10월 비구니 경화(1889-1940)가 모연해서 관세음보살상의 개금 불사를 마치고 성내포교당에 봉안한다.
제주 성내에 거주하던 신도들이 한라산 관음사를 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소요되었고, 불공을 하려면 산천단 소림사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새벽에 공양물을 지고 관음사로 올라가 사시에 불공을 했는데, 게다가 겨울에 눈이라도 쌓이면 왕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신도들을 관음사가 다 수용할 수도 없었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중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상권 중심지에 성내포교당을 창건한 것이다.
관음사는 기도, 수행 중심의 사찰 역할을 담당했고, 성내포교당은 불교단체, 지역사회단체 행사가 개최되는 활동 공간이고, 입도자의 거점지고, 정재계 사회 인사와의 교류 장소로써 제주불교 교세 확장을 견인했고, 신여성 양성과 유소년 청장년 포교의 장이고, 불교 교육의 산실이고, 제주불교 중흥의 요충지고 산 증인이다.
근대 제주불교는 성내포교당에서 각계각층과 상호 교류하면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활짝 꽃피운다. 봉려관은 성내포교당에서 지역사회단체, 민중과 교류하면서 저변을 확대해 나갔으며, 더불어 제주불교 기력도 강화된다.
‘성내포교당’은 훗날 ‘중앙포교당’으로 불리었고, 그 후 다시 사명을 바꾸어 ‘대각사’라 불리었다.
훗날 중앙포교당 일부 부지가 매각돼 버렸고, 그 후 봉려관 스님이 지은 건축물을 철거하고 주차장과 상가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상가건물 맨 위층에 대각사가 자리해서 중심지 포교를 근근이 담당했지만, 근래에는 상가와 주차장 용도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고, 상가 제일 위층에 자리한 대각사는 이제 더는 운영되지 않는다.

[출처]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