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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 ''' 사찰명 : 화성 신흥사(新興寺) ''' * ''' 주소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72-16 '''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사적 217호로 지정된 구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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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명 : 화성 신흥사(新興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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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소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72-16 '''
 
* ''' 주소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72-16 '''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사적 217호로 지정된 구봉산 당성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신흥사는 1934년 덕인스님이 한영석거사의 시주로 창건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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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신흥사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구봉산의 사적 217호로 지정된 화성당성(華城唐城)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1934년 덕인스님이 한영석거사의 시주로 창건했다.</br>
 
당성은 고구려 영유왕때 덕과 예술과 문학을 겸비한 선비를 보내 달라는 고구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에서 팔학사를 보내어 그중 홍학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며, 군사 요충지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br>
 
당성은 고구려 영유왕때 덕과 예술과 문학을 겸비한 선비를 보내 달라는 고구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에서 팔학사를 보내어 그중 홍학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며, 군사 요충지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br>
 
원래 이 당성 안에 절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절은 없어지고 그 옛날에 절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세월만 흘러가던 어느날 구봉산 북쪽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한영석거사의 꿈에 위풍이 당당한 도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당성 안에 옛고려 시대의 석불이 계시니 잘 모셔다 새로이 절을 일으키라." 하고는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현몽을 받은 거사는 곧 칡넝쿨이 무성한 당성에 이르러 숲을 헤치며 새떼들이 인도해 준 옛절터에서 석불을 찾으니 키가 2m 정도이고 서있는 불상이었다.</br>
 
원래 이 당성 안에 절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절은 없어지고 그 옛날에 절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세월만 흘러가던 어느날 구봉산 북쪽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한영석거사의 꿈에 위풍이 당당한 도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당성 안에 옛고려 시대의 석불이 계시니 잘 모셔다 새로이 절을 일으키라." 하고는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현몽을 받은 거사는 곧 칡넝쿨이 무성한 당성에 이르러 숲을 헤치며 새떼들이 인도해 준 옛절터에서 석불을 찾으니 키가 2m 정도이고 서있는 불상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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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www.shinheungsa.or.kr/contents/about/about1.html?sm=1_1 신흥사] 신흥사 소개
 
※ 출처 : [http://www.shinheungsa.or.kr/contents/about/about1.html?sm=1_1 신흥사] 신흥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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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 : [https://map.kakao.com/?q=화성시_서신면_상안리_72-16 신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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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 : [https://map.kakao.com/?q=화성시_서신면_상안리_72-16 신흥사]</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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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사찰]]

2024년 5월 10일 (금) 20:40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화성 신흥사(新興寺)
  • 주소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72-16

화성 신흥사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구봉산의 사적 217호로 지정된 화성당성(華城唐城)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1934년 덕인스님이 한영석거사의 시주로 창건했다.
당성은 고구려 영유왕때 덕과 예술과 문학을 겸비한 선비를 보내 달라는 고구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에서 팔학사를 보내어 그중 홍학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국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며, 군사 요충지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원래 이 당성 안에 절이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절은 없어지고 그 옛날에 절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무심히 세월만 흘러가던 어느날 구봉산 북쪽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한영석거사의 꿈에 위풍이 당당한 도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당성 안에 옛고려 시대의 석불이 계시니 잘 모셔다 새로이 절을 일으키라." 하고는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현몽을 받은 거사는 곧 칡넝쿨이 무성한 당성에 이르러 숲을 헤치며 새떼들이 인도해 준 옛절터에서 석불을 찾으니 키가 2m 정도이고 서있는 불상이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고 시달렸는데도 그 상호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니 현재 큰 법당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이십니다. 가운데 주불로 모셔진 아미타부처님은 불도섬에서 모셔왔고 오른쪽 대세지보살님은 10년 기도 중 새로 모셨다.
이러한 인연으로 1934년도에 한영석거사의 산과 전답 시주로 절을 세우고 신흥사라 하였으며 그후 이윤태 청신녀가 구법당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73년도에 주지로 부임한 오성일스님이 불교 황무지인 이곳에 불법홍포의 원력을 세우고 어린이, 청소년 교화에 몸 바쳐 30년을 노력한 결과 어린이, 청소년 포교의 모범 사찰로 알려져서 수많은 불자들이 수련하러 찾아 왔다.
그러나 수용할 장소가 없어서 1980년도에 초가집 요사체를 헐고 설법당(현요사체)을 건축하여 열심히 법회와 수련을 하고, 또 1986년도에 현 청소년 수련원을 건축하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쉬지 않고 수련을 하면서 힘드는 일이 많아, 이 일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고 크나크신 부처님의 가피가 계셔야 되는데 그러려면 기도하는 일 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현 주지 성일스님이 1988년 음력 4월 24일 두문불출 10년 관음 기도를 시작하여 하루 4분 정근으로 많은 시간을 일심으로 기도하여 부처님의 크신 가피가 내려졌다.
처음 천일 동안에는 수련원 건축비가 정리되고 큰법당이 세워졌고(1990년 10월), 이천일 기도 중에는 640평 수련원 교육관이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1993. 4월). 삼천일 기도 중에는 구법당 관음전을 헐고 다시 지어 어린이 법당으로 현판을 부쳤고(1994년 10월) 1995년에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조성했다.
1996년도에는 도량 양쪽 옆산 일만여평을 매입하였고, 1997년도에는 종각을 신축하고 1천관의 범종을 주조하여 사물을 갖추고 1998년도에 10년기도 회향과 아울러 전체 불사를 회향 했다.
2001년도에 천왕문 건축 과정은 절앞에 일주문을 세울 터가 여의치 않아 일주문 불사비로 우선 천왕문을 세워서 2001년 11월 4일 준공을 했다.
※ 출처 : 신흥사 신흥사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