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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 계율엄수(戒律嚴守), 간화선수행, 자비보살행, 하심, 일중식(日中食) | |수행지침 || 계율엄수(戒律嚴守), 간화선수행, 자비보살행, 하심, 일중식(日中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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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참고자료== | ||
+ |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 10([[광호스님(光毫, 1915生, 비구니)|광호(光毫)]]), 577([[효명스님(曉明, 1930生, 비구니)|효명(曉明)]]) | ||
+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260~262. | ||
* 제주불교, 청정 수행가풍’ 잇는 만남의 장 (2006년)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28 | * 제주불교, 청정 수행가풍’ 잇는 만남의 장 (2006년)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28 | ||
* 승보찰 송광사(네이버 블로그), 광주 흥룡사 (2019년) https://m.blog.naver.com/songgwang01/221477744440 | * 승보찰 송광사(네이버 블로그), 광주 흥룡사 (2019년) https://m.blog.naver.com/songgwang01/2214777444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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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7일 (수) 14:21 기준 최신판
법희(法稀)스님 | |
---|---|
법명 | 법희(法稀) |
법호 | 덕원(德源) |
속명 | 김유순(金有順) |
출생 | 1923 |
출가 | 1943 |
입적 | 1987.06.07 (세수64세, 법랍42세) |
사찰 | 흥룡사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1231-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법희(法稀)스님은 하심의 표본이셨으며 자비보살행으로 4부대중의 존경을 받으신 분으로 ‘한국불교계 어머니’, ‘한국불교계 관세음보살’이라 칭송 받는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23 |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평리 364번지에서 출생 |
1943 | 광주 흥룡사 광호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45 | 백양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1 |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46~1986 | 안거수행 |
1987 | 광주 흥룡사에서 입적(세수 64세, 법랍42) |
문중 | 두옥문중(斗玉) |
수행지침 | 계율엄수(戒律嚴守), 간화선수행, 자비보살행, 하심, 일중식(日中食) |
수계제자 | 상운, 상문, 효명, 지성, 지수, 정하, 혜달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두옥(斗玉)→경윤(5)→혜원(慧圓, 6)→광호(光毫, 7)→법희(法稀, 8)→상운 |
활동 및 공헌
전법 포교
법희스님은 1923년 5월 24일 전남 곡성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김성표이고 모친은 김수평이며, 속명은 김유순이다. 1943년 20세 되던 해 1927년 창건한 서석동 소재 옛 흥룡사로 출가했으며, 1945년 백양사에서 광호스님을 은사로 만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으며, 1961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다. 법희스님은 1946년 수선안거를 시작으로 1986년 동안거까지 제방 선원에서 안거수행을 했으며, 선원 안거수행에 나가지 않을 때는 흥룡사에서 신도와 함께 결제를 하고 간화선수행에 임했으며 송광사 해제법회에 반드시 참석하신다. 법희스님은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는 낮 12시 전에 점심공양을 마치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물을 비롯해 일체 음식을 드시지 않는 일중식과 함께 참선수행을 한다. 흥룡사 재가제자들도 법희스님과 함께 일중식을 하면서 주력을 하거나, 참선을 한다. 새벽 예불을 마치면 늘 참선을 하셨고, 낮에 허리를 바닥에 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본사인 송광사가 잘 돼야한다
조계종 승단정화를 마치고 순천 송광사에는 구산큰스님 권속이 들어오게 되었다. 순천 송광사는 비구와 대처 간 싸움 없이 순조롭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진 본사이다. 그런데 송광사의 경제사정은 어려웠고, 법희스님은 오로지 경제사정이 어려운 송광사 걱정뿐이었다. 된장이 모자라면 된장을 간장이 모라자면 간장을 쌀이 부족하면 쌀을 송광사에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만 하면 준비해서 친히 짊어지고 가거나 송광사로 보낸다. 송광사 스님들도 광주에 오면 흥룡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시내에서 일을 본 후 송광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흥룡사에는 송광사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이 하나 준비되어 있었다. 법희스님은 송광사 광주 포교당 원각사가 개원하자, 흥룡사 신도를 원각사로 보내기 위해 관음재일 법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흥룡사 신도들을 원각사로 보내 법회와 기도에 동참하게 하고, 심지어 송광사까지 가도록 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신도들은 더더욱 송광사를 가도록 유도한다. 더불어 흥룡사에 새로운 신도가 오거나 먹고살만한 신도가 오면 송광사 불일회 회원으로 입회할 것을 권유했고, 법희스님이 권유하면 신기하게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법희스님은 흥룡사 스님이 아니라 송광사 스님이었다. 이처럼 법희스님은 누구든지 부족한 것을 감지하면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흥룡사 살림은 늘 뒷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 승단 정화 후, 은사이신 광호스님이 본사인 선암사 주지를 역임하실 때, 광주시내에 위치한 흥룡사는 선암사 살림도 도와야 했다. 법희스님은 흥룡사에 들어온 쌀과 물품을 챙겨 구루마에 싫고 선암사로 간다. 사제 법공스님은 “광호스님께서 선암사 주지하실 때, 선원, 강원을 하셔서 대중이 많았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는데, 희스님이 흥룡사에서 먹을 거리도 생활용품도 대느라고 고생 많이 했지”라고 말한다. 법희스님은 입적하실 때까지 송광사와 은사 광호스님이 늘 우선이었다. 그 중 송광사가 더 우선이었다고 본다. 자비로운 법희스님으로 인해 흥룡사는 늘 비구, 비구니 객스님을 맞이해야 했고, 맞이하면 정성을 다해 대접해 보내드렸고, 송광사를 위해 흥룡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구니 구족계 7증사를 거절하시다
혜춘스님께서 비구니회장을 역임하실 때다. 법희스님이 해인사 보현암에서 안거를 하셨는데, 법희스님의 일상을 곁에서 직접 보신 혜춘스님께서 법희스님을 7증사로 추대하였다. 7증사로 추대되었다는 문건을 흥룡사에서 받아본 법희스님은 자신의 덕과 복이 부족해서 7증사로 앉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를 사양하시고 되돌려 보냈다. 시간이 지나, 7증사 증서를 되돌려 보낸 이유를 재차 묻자, 법희스님은 자신은 복이 없고 덕이 부족해 새로 스님이 되는 후학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7증사는 복과 덕을 갖춘 스님들이 앉으셔야 후학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자신이 앉고 서야 할 자리를 뒷자리로 물러설 줄 아는 분이시다.
자비보살이라 칭송받다
상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늘 하심을 하였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법희스님 앞에 있는 분은 정성으로 보살피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평생을 보답은 하셨지만 보답을 받아본 적이 없으신 분이다. 한번은 비구니스님 한 분이 병환을 앓고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원각사 근처에 있는 한의원을 방문해서 처방을 받아들고서 시장에 있는 약재상에 가서 약재를 사서 3일 밤낮을 가마솥에 다려서 통에 담아 직접 가서 전달해 주고 오신다. 약을 전달받은 그 비구니스님은 희스님의 정성에 그 약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하겠다.
은사이신 광호스님에 대한 효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광호스님은 당뇨가 있었는데, 하루는 흥룡사에 재(齋)가 있었다. 찹쌀을 쪄서 쑥을 넣고 절구통에 찧어서 인절미를 만들어 부처님께 올렸는데, 그 후로 희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신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희스님은 어두움이 내린 저녁이 되어서야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냐는 질문에 희스님은 “쑥인절미를 보니 스님이 생각나서 부산 다녀오는 길이다”고 하신다. 따끈한 쑥인절미를 보니 당뇨가 있으신 광호스님이 떠올라 일반고속을 타고 부산까지 가서 은사스님이 드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흥룡사로 되돌아오신 것이다.
법희스님은 입적하기 전 천은사 선방에 대중공양을 갔다. 희스님은 밀가루와 만두 속 재료를 사서 등에 지고 양손에 들고 천은사로 가서, 손수 반죽하고 만두를 만들어 천은사 대중에게 만두공양을 했다. 대중스님들이 너무 맛있다는 말에 희스님은 “다음에 또 와서 만들어 줄께”라고 약속한다. 음식솜씨가 뛰어난 희스님은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도 참 맛나다. 며칠 후 희스님은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고, 결제기간이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천은사 비구스님 두 분이 해제하자 흥룡사 영단에 모셔진 희스님 사진 앞에 예를 다하고는 앉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비구가 그렇게 슬피 우는 모습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법당에서 내려온 비구스님 두 분은 우리에게 “만두가 맛있다고 하니까 다음에 와서 또 만들어준다고 해놓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승려든 재가제자든 희스님은 모두 부처님을 대하듯 사람을 대하신다. 그러다보니 일부 재가제자는 희스님을 부려먹기도 한다. 그렇지만 희스님은 웃으시며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독신이었던 흥룡사 노보살 한 분이 자궁에 병이 있어 피를 흘리게 되자 놀라 희스님에게 연락을 했고, 희스님은 날마다 노보살 집을 방문해서 드실 반찬과 옷 빨래까지 거들었다. 도와야 할 소식을 접하면 반드시 몸소 가서 손수 해결하셨지 누구에게 시키는 법이 없다. 이처럼 하심이 바탕이 된 자비를 늘 베푸신 분이 법희스님의 모습이다.
‘부처님 오신 날’ 저녁 흥룡사에 도둑이 들었다. 복면을 하고 칼을 든 남자는 흥룡사 스님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을 질렀다. 마침 송광사 스님이 구입할 물건이 있어서 흥룡사에서 하룻밤 숙박해야 했고, 흥룡사 마당에 들어섰는데 밤손님과 흥룡사스님들이 실랑이 하는 소리를 듣고는 바로 파출소에 신고를 했고, 밤손님은 바로 잡혀갔다. 뒤이어 파출소에 도착한 법희스님은 깜짝 놀랐다. 밤손님이 바로 흥룡사 신도 아들 이어서다. 밤손님은 부인이 해산을 해야 하는데 미역과 쌀을 구입할 돈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 부처님 오신 날 흥룡사에 등 값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밤에 식칼을 들고 복면을 하고 들어와 돈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들은 법희스님은 갑자기 느닷없이 “아이고 내 아들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풀어주십시오”라며 경찰에게 사정을 해서 밤손님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다음 날 법희스님은 쌀과 미역을 바랑에 가득 담아 등에 지고는 해산에 필요한 비용도 함께 전달해주었고, 그 후 법희스님은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쌀을 바랑에 짊어지고 끼니를 거르는 집에 가져다주는 일이다.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일 때, 선학원에서 큰스님들이 불교계 정화를 원만히 회향할 수 있도록 먹거리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살피고, 후원에서 여력을 다하셨다. 먹을 것이 부족할 것 같으면 담양에 거주하셨던 국성해스님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국성해스님은 희스님이 말만 하면 곧바로 쌀과 야채 등 먹거리를 그때그때 실어 선학원으로 보내주었다. 이때 선학원에서 주석하셨던 스님들은 희스님의 한결같은 자비행 그리고 노고를 칭송하였고, 희스님은 자비보살로 불려진다. 희스님을 아는 분은 ‘자비보살이지’라는 말부터 하신다.
승려로서 통장을 가져본 적이 없으시고, 돈을 모아두고 써보신 적이 없으시다. 주머니에 있는 금전은 사용처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필요한 일에 사용하셨다. 출가 후 오신채와 육식을 금하는 것은 물론 우유가 들어간 식품도 입에 대지 않으셨고, 먹거리나 나뭇잎을 갉아먹는 벌레는 손으로 조심스레 떼어내서 거리를 두고 놓아주면서 염불하고 축원까지 해준다. 희스님 머리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모기를 본 제자가 모기를 죽이자, 희스님은 “겨우 피 한 방울 먹으면 날아갈 것인데~”라고 하신다.
1987년 흥룡사에서는 가사불사가 한창이었다. 법희스님께 모시옷을 공양하신 노보살이 있었는데, 이 분은 당료로 인해 시력이 저하돼서 앞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스님은 새로 만든 모시옷을 입으시고 친히 노보살 집에 가서 “보살님께서 해 주신 새 모시옷을 입고 왔습니다. 만져보십시오”라며, 노보살이 옷을 만져보게 하신 후 흥룡사로 되돌아오던 중 건널목을 건너다 대형트럭에 의해 사고를 당하셨고, 그 자리에서 명을 달리 하셨다. ‘주지하면 중노릇 망친다’며 평생 주지소임을 피하셨던 법희스님은 이렇게 이생의 인연을 마무리하셨다.
누구나 법희스님만 보면 저절로 미소를 짓는다. 법희스님에게는 늘 칭찬이 따라온다. 당시 송광사 주지였던 현호스님의 요청으로, 희스님의 관은 송광사 대중스님 손에 들려져서 다비장으로 옮겨졌고, 송광사 측의 요청으로 다비장에서 비구니가 다비를 한 첫 사례이다. 다비장 앞 도로에 법희스님 유구가 실린 차가 도착하자, 송광사 현고스님은 “희스님에게 얻어먹은 사람은 다 붙어라”고 말한다.
1987년 입적하신 후, 유품을 정리하려 하였지만 희스님이 남긴 것은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뿐이었다. 이 주머니에는 희스님의 수첩과 작은 소지품 그리고 청암사 승가대학에 공양하실 30만원이 들어있었다. 30만원은 장례에 참석한 청암사 학장 지형스님에게 전해졌다.
이처럼 평생을 나보다 상대를 위한 삶을 사신 법희스님을 비구니 혜해선사는 ‘한국불교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불교계 관세음보살이 돌아가셨다’고 혜달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법희스님의 승려생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익히 가늠할 수 있다 하겠다. 법희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찌 지면에 다 닮을 수 있겠는가. 희스님으로 불리었던 법희스님은 소박하고 평범한 비구니였지만, 그의 자비행은 미소에서도 풍겨온다. 묘엄스님께서는 “나는 스님의 자비로운 웃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작성자: 혜달스님(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p. 10(광호(光毫)), 577(효명(曉明))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260~262.
- 제주불교, 청정 수행가풍’ 잇는 만남의 장 (2006년)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28
- 승보찰 송광사(네이버 블로그), 광주 흥룡사 (2019년) https://m.blog.naver.com/songgwang01/221477744440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법희(法稀)스님 | 본항목 | 법희스님(法稀, 1923~1987) | 法稀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희스님(法稀,_192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법희스님(法稀) | 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
법희스님(法稀) | 광호스님(光毫) | ~의 수계제자이다 | |
법희스님(法稀) | 광주 흥룡사 | ~에서 출가하다 | |
법희스님(法稀) | 만암스님(曼庵)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법희스님(法稀) | 동산스님(東山)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법희스님(法稀) | 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
법희스님(法稀) | 순천 송광사 | ~에 기여하다 | 사찰중흥 |
지도
- 흥룡사 :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1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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