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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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 현행(賢行)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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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현행(賢行)스님
|사진 = 현행스님.png|현행스님.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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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31 현행(賢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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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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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수덕사 견성암'''</br>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사찰 = 수덕사 견성암(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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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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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
 
!연도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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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164/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5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164/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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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만공(滿空)스님|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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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0976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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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서울 청룡사에서 [[석암(昔岩)스님|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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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459681&cid=46648&categoryId=46648 서울 숭인동 청룡사]에서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062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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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1955||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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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실상(實相)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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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 [[실상(實相)문중|실상문중(實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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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지침|| 청정하게 참선 수행
 
|수행지침|| 청정하게 참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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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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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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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 4)]]→[[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현행(賢行, 5)]]→[[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명안(明岸, 6)]], 명관(明官, 6), 명선(明仙, 6), 명지(明志, 6), 명상(明尙, 6), 돈오(頓悟,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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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결심===
 
===출가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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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만성스님위패_미타사.jpg|섬네일|[음성 미타사에 있는 현행스님 위패(왼쪽부터 현행스님, 만성스님, 명안스님)]</br> 사진촬영: 전영숙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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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어느 날 성철 큰스님의 법제자인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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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 큰스님]의 법제자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656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 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등불을 건네주신 용음스님===
 
  
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가는데,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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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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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갔다.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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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https://ko.wikipedia.org/wiki/만공_(승려)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 홍인스님이 육조혜능 스님 배의 노를 주어주겠다는 이야기(육조법보단경)
 
 
깊은 밤에 홍인 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육조 혜능은 강가에 이르러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탔다. 홍인 대사가 배웅 나와 손수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려고 하자, 혜능이 말하였다.
 
“스님, 노는 제가 젓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아니다. 내가 너를 건네주리라.”
 
“아닙니다. 제가 아는 바가 없을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하지만, 알고 난 지금은 제 힘으로 건너는 것이 옳습니다."
 
“참으로 그렇다. 앞으로 불법이 너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리라. 나는 삼 년이 지나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너는 되도록 남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 불법을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은사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스님]]과의 인연===
 
===은사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스님]]과의 인연===
  
정화시기에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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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스님은 정화시기에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1g1836b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입적===
 
===입적===
현행스님은 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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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스님은 [[응민스님(應旼, 1923生, 비구니)|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706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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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로는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수계제자로는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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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견성암==
* * 수덕사 견성암(☎ 041-337-6007,  http://www.sudeoksa.com/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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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6.대영스님3견성암.jpg|섬네일|[견성암]</br>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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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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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회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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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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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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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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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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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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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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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 참고자료==
 
==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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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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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4, 435.
  
 
==시맨틱 데이터==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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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션 데이터===
 
===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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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120px" | 항목1 || style="width:240px" | 항목2 || style="width:180px" |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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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 | 현행(賢行)스님]] || [[석암(昔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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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현행스님(賢行)]] || [[석암혜수(昔巖慧秀)|석암스님(昔巖)]]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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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 | 현행(賢行)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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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현행스님(賢行)]]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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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 | 현행(賢行)스님]] || [[단일구족계단 ]] || ~비구니 증사를 역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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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현행스님(賢行)]] || [[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8-14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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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행스님(賢行, 1928生, 비구니)|현행스님(賢行)]]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양산 내원사, 산청 대원사, 합천 해인사, 서울 승가사(구기동), 예산 수덕사 견성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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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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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sudeoksa.com/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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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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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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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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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니스님]]

2024년 9월 17일 (화) 19:59 기준 최신판



정의

현행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출가하여 대중스님들과 잘 화합했으며, 특히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8 충남 부여 출생
1945 수덕사 견성암에서 만성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6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5 서울 숭인동 청룡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5 내원사, 대원사, 해인사, 승가사 등 안거 성만
1977 견성암 입승
1989 견성암 도감
1989 견성암 선원장
1989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8, 9, 10, 11, 12, 13, 14회 존증아사리)
2002 견성암에서 입적(세수 75세, 법랍 58세)
문중 실상문중(實相)
수행지침 청정하게 참선 수행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만성(萬性, 4)현행(賢行, 5)명안(明岸, 6), 명관(明官, 6), 명선(明仙, 6), 명지(明志, 6), 명상(明尙, 6), 돈오(頓悟, 6)

활동 및 공헌

출가 결심

[음성 미타사에 있는 현행스님 위패(왼쪽부터 현행스님, 만성스님, 명안스님)]
사진촬영: 전영숙 2021년

현행(賢行)스님은 1928년 12월 11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에서 아버지 서길봉과 어머니 박은옥 사이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강이며, 이름은 서기순이다.

어느 날 만공 큰스님의 법제자인 용음스님이 홍성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신 일이 있었다. 현행스님은 용음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발심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세상살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욕심을 갖지도 않고 출가를 자신의 길로 삼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렵게 출가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는 며칠 간 고심한 끝에 출가를 허락했다.

만공스님의 가르침을 받다

스님은 1945년 나이 18세에 쌀 두 말과 옷 서너 벌을 준비해서 버스를 타고 수덕사 아랫마을에 내려 정혜사로 올라갔다. 산이 얼마나 웅장한지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무섭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스님은 용음스님을 만나서 스님이 되려고 왔다는 말씀을 드렸다. “스님이 돼? 스님이 되면 좋지. 그런데 날이 너무 어두워서 못 올라가겠다. 내가 등불 하나 준비 해줄 테니 저기 비구니스님들 사는 곳으로 가거라.” 스님은 용음스님이 주신 등불을 가지고 당시 정혜사 바로 밑에 있던 견성암으로 갔다. 견성암에 도착하자 스님이 되려는 사람이 한 명 왔다는 소리에 명주 목도리를 두른 젊은 스님 9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스님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대중들은 만공 큰스님이 간월도 간월암에 가셨다가 돌아오신다며 마중을 나갔다. 흰 동정에 검은 장삼을 입고 홍 가사를 걸친 스님 4명이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나머지 100여 명의 대중스님들이 줄지어 뒤따라왔다. 그 모습 또한 신선이 하강하는 것만 같아서 환희심이 일었다. 대중이 인사를 한 후 스님도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께서 “응, 왜 왔니?” 하고 물으셨다. “승려 생활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스님이 이렇게 공손히 여쭈어 올리니 만공스님은 기특해 하시며 “그럼 한번 해봐라.” 했다. 스님은 이후 만공 큰스님 밑에서 10여 년을 생활했다.

은사 만성스님과의 인연

현행스님은 정화시기에 개심사에 들어가 대처승을 몰아내고 20여 명이 함께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며 지냈다. 그 후 개심사를 나와 견성암에 머물고 있는데, 은사스님이 주지로 계시는 온양 봉곡사에서 스님을 불러 몇 해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갔다. 스님의 은사스님은 만성스님이다. 만성스님은 공부에만 전념하시며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던 분이었는데 전생의 연이 닿았는지 스님을 상좌로 들였다. 현행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효행심이 지극했다. 한번은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일념으로 삼고 계신 은사스님께 보탬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팔아 은사스님의 양식 값을 마련했다. 그 후에도 안거결제를 하러 가실 때에는 누룽지를 말려 빻아 미숫가루를 만들고, 설탕을 준비해서 은사스님을 홍성까지 배웅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이 좋아서 더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싶었으나 그만오라고 하셔서 더 가지는 못했다.

입적

현행스님은 응민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다. 공부에 대해 늘 탁마를 하며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연이 짧았는지 응민스님은 먼저 입적했다. 현행스님은 남아 있는 자신이 응민스님의 몫까지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80세 가까운 고령에도 세세생생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열심히 살면 신장님, 불보살님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수행에 임했다.

현행스님은 2002년 견성암에서 수행의 열정을 후학에게 남기고 세수 75세, 법랍 58세로 입적했다.

수계제자로는 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

수덕사 견성암

[견성암]
사진출처 : 고우어깨동무 (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goudongmoo/QjKW/582?q=%EA%B2%AC%EC%84%B1%EC%95%94&re=1)


견성암은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의 부속 암자이다. 이 암자는 창건 시부터 선원으로 출발한 까닭에 선원 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다. 수덕사 덕숭총림(德崇叢林) 내에서는 비구 참선도량인 정혜사의 능인선원과 함께 비구니 참선도량으로서 그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전국비구니 참선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과거 정혜사 동북쪽 방향에 자리 잡았던 견성암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법회스님이 1913년 견성암으로 와서 정진했으며, 1916년 견성암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므로 최소한 1913년 이전에 견성암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회스님이 수선할 당시 견성암은 두어 칸 남짓의 토굴에 지나지 않았지만, 결제 때만 되면 만공스님을 뵈려고 40~50명의 납자가 북적거렸다고 한다. 견성암 창건의 공덕주는 비구니 도흡(道洽)스님이다. 스님이 큰 시주와 대중의 동참으로 초가집을 지어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1928년 만공스님은 '견성암방함록서(見性庵芳銜錄序)를 써서 견성암 선원이 명실상부한 비구니 선원으로서 확고히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하여 여법하게 제1회 안거자를 배출하였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견성암은 그 후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척을 거듭하다가 1940년경 기와집을 이었다. 근현대 비구니스님의 법맥은 만공스님 문하의 견성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이 견성암으로 와서 만공스님을 참례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견성암 선원은 1965년 벽초스님이 지금의 수덕사 서쪽 덕숭산 기슭에 석조 2층 건물로 선방을 세워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벽초스님 이하 전 대중이 서해안의 돌을 직접 나르는 등 합심하여 선원 건물을 완성하였다. 당시 도감은 수인스님, 재무는 정관스님이었다. 김일엽스님이 당시에 입승이셨고 불사 당시 견성암을 신식학교 건물을 본받아 석조건물로 짓는 구상을 했고 견성암 건축 시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 공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정확보를 위해 일엽스님의 상좌 월송스님 주연의 법극 ‘이차돈의 사’를 공연하기도 했다. 1986년 도감을 맡은 수연스님이 견성암 본당 1층에 선방을, 2층 법당 좌측에 서선당(西禪堂)(편액 원담 친필)을 짓고 선방 본당에 기와를 얹었다. 자료 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70~71.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617~620.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31.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4, 43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현행(賢行)스님 본항목 현행스님(賢行, 1928生~2002) 賢行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현행스님(賢行,_192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현행스님(賢行) 실상문중(實相) ~의 일원이다
현행스님(賢行) 만성스님(萬性) ~의 수계제자이다
현행스님(賢行)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현행스님(賢行) 만공스님(滿空)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현행스님(賢行)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현행스님(賢行) 수덕사 견성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원장
현행스님(賢行)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8-14회 존증아사리)
현행스님(賢行)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산 내원사, 산청 대원사, 합천 해인사, 서울 승가사(구기동), 예산 수덕사 견성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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