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스님(明洙, 1925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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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 {{인물정보 | ||
− | |표제 = 명수(明洙)스님 | + | |표제= 명수(明洙)스님 |
− | |사진 = 112 명수(明洙).jpg | + | |사진= 112 명수(明洙).jpg |
− | |법명 = 명수(明洙) | + | |법명= '''명수(明洙)''' |
− | |법호 = 숭심(崇深) | + | |법호= 숭심(崇深) |
− | |속명 = 김복동(金福童) | + | |속명= 김복동(金福童) |
− | + | |출생= 1925.11.09. | |
− | |출생 = | + | |출가= 1937년 |
− | |출가 = 1937년 | + | |입적= 2013.09.04. </br> (세납 88세, 법랍 77세) |
− | + | |사찰= '''연화사(연화선원)'''</br>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93 | |
− | |입적 = | + | |특이사항= |
− | |사찰 = 연화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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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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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 | !연도 !!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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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수덕사 견성암]]에서 [[성윤(性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7 || [[수덕사 견성암]]에서 [[성윤(性允)스님]]을 은사로 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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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수덕사에서 [ | + | |1937 || 수덕사에서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0976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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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 || 서울 청룡사에서 만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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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수덕사 견성암 안거 성만 | |1957 || 수덕사 견성암 안거 성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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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 |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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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120px" | 문중|| [[실상(實相)문중]] | |style="width:120px" | 문중|| [[실상(實相)문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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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계제자 || 혜조(慧照) | +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혜조(慧照)·[[혜일스님(慧日, 1947生, 비구니)|혜일(慧日)]]·혜욱(慧旭)·혜오(慧悟)·혜근(慧漌) |
+ | |- | ||
+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성윤(性允, 4)→[[명수스님(明洙, 1925生, 비구니)|명수(明洙, 5)]]→혜조(慧照, 6), 혜영(慧英, 6), [[혜일스님(慧日, 1947生, 비구니)|혜일(慧日, 6)]], 혜욱(慧郁, 6), 혜성(慧性, 6), 혜오(慧晤, 6), 혜근(慧漌, 6)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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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12-03.jpg|섬네일|[명수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p410]] | [[파일:112-03.jpg|섬네일|[명수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p410]] | ||
[[파일:명수스님법문.png|섬네일|[법문하는 명수스님] 사진출처: 다음카페 ‘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 [[파일:명수스님법문.png|섬네일|[법문하는 명수스님] 사진출처: 다음카페 ‘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 ||
− | 숭심(崇深) 명수(明洙)스님은 1925년 11월 9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로 2가 105번지에서 아버지 김익배 처사와 어머니 안간난 보살 사이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복동이다. | + | [[File:20220916_153819.jpg|섬네일|[종로구 연화사] 사진촬영: 김은희 2022년]] |
− | 스님은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의지하며 생활했다. 스님의 외할머니는 '여자가 학교는 가서 무얼 하느냐'며 입학원서와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 + | |
− | 스님은 외할머니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속이 상했던 중에 이모가 수덕사 근처에 절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외할머니를 따라 구경 가게 되었는데 이 일이 스님에게 발심의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 | 숭심(崇深) 명수(明洙)스님은 1925년 11월 9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로 2가 105번지에서 아버지 김익배 처사와 어머니 안간난 보살 사이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복동이다. </br> |
− | 마침 스님이 절에 당도했을 때, 삽교에 사는 큰 부자가 생전예수재 100일간 기도 회향 중이었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연시련을 하는 모습을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눈에도 아이의 그 모습이 그대로 불국토이며 극락세계로 보였다. 그 장엄하고 멋진 모습에 경탄을 하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 + | 스님은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의지하며 생활했다. 스님의 외할머니는 '여자가 학교는 가서 무얼 하느냐'며 입학원서와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br> |
− | 학교에 가지 못해 속상했던 일도, 또한 학교에 다니고 싶은 간절한 생각도 일순간 사라지고 오로지 스님처럼 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작은 소녀의 마음에 이미 발심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명수스님의 속가 언니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지명 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수행을 하고 있었다. | + | 스님은 외할머니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속이 상했던 중에 이모가 수덕사 근처에 절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외할머니를 따라 구경 가게 되었는데 이 일이 스님에게 발심의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br> |
− | 명수스님은 예수재를 보고 온 뒤로 발심하여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렇지만 이모스님과 외할머니는 어린아이의 한때의 변덕스런 마음이라고 여겨 출가를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발심이 이뤄진 명수스님의 마음에는 간절함만이 남아 방청소를 하는 무엇을 하든 간에 “나 머리 깎아줘.”하며 두 달을 꼬박 졸랐다. | + | 마침 스님이 절에 당도했을 때, 삽교에 사는 큰 부자가 생전예수재 100일간 기도 회향 중이었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연시련을 하는 모습을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눈에도 아이의 그 모습이 그대로 불국토이며 극락세계로 보였다. 그 장엄하고 멋진 모습에 경탄을 하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br> |
− |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명수스님이 방을 쓸고 있는데, 외할머니와 이모가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스님이 가만히 들어보니 외할머니께서 이모에게 “쟤가 저렇게 스님이 되겠다고 하니 네 앞으로 출가시켜라.” 하며 삭발출가를 | + | 학교에 가지 못해 속상했던 일도, 또한 학교에 다니고 싶은 간절한 생각도 일순간 사라지고 오로지 스님처럼 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작은 소녀의 마음에 이미 발심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명수스님의 속가 언니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지명 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수행을 하고 있었다. </br> |
− | 그렇지만 이모스님은 나이 어린 조카가 아무리 출가의 마음이 간절하다지만 노파심이 앞서 어린 명수스님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또 물었다. | + | 명수스님은 예수재를 보고 온 뒤로 발심하여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렇지만 이모스님과 외할머니는 어린아이의 한때의 변덕스런 마음이라고 여겨 출가를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발심이 이뤄진 명수스님의 마음에는 간절함만이 남아 방청소를 하는 무엇을 하든 간에 “나 머리 깎아줘.”하며 두 달을 꼬박 졸랐다. </br> |
− | 정말 스님이 되고 싶은지, 또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있는지 등등 이모스님의 걱정스런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출가 허락에 마냥 기분이 들뜬 어린 명수 스님은 태연히 아무려면 스님이 되어서 그 정도도 못 견디겠냐며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등 어린아이답지 않은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 + |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명수스님이 방을 쓸고 있는데, 외할머니와 이모가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스님이 가만히 들어보니 외할머니께서 이모에게 “쟤가 저렇게 스님이 되겠다고 하니 네 앞으로 출가시켜라.” 하며 삭발출가를 허락하셨다. </br> |
− | 어린 명수스님은 출가 허락을 받은 후 급한 마음에 곧장 혼자서 | + | 그렇지만 이모스님은 나이 어린 조카가 아무리 출가의 마음이 간절하다지만 노파심이 앞서 어린 명수스님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또 물었다. </br> |
− | 드디어 12세에 속가의 이모이신 성윤스님을 은사로 정하니 그 연이 어머니보다도 깊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사스님은 스님이 14세 되던 해에 입적하셨다. | + | 정말 스님이 되고 싶은지, 또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있는지 등등 이모스님의 걱정스런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출가 허락에 마냥 기분이 들뜬 어린 명수 스님은 태연히 아무려면 스님이 되어서 그 정도도 못 견디겠냐며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등 어린아이답지 않은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br> |
− | 훗날 두 딸이 모두 스님이 되자 명수스님의 속가 어머니도 절에 들어오셔서 스님이 되셨다. | + | 어린 명수스님은 출가 허락을 받은 후 급한 마음에 곧장 혼자서 소림초당(少林草堂)<ref>1920년대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저 곳에 수행처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벽초 경선(碧超鏡禪, 1899~1986)스님이 받들어 지었다. 덕숭산 산중턱 절벽위에 지은 암자로 자연목 그대로 짓고 그 위에 볏지붕을 덮어 자연의 곡선미가 그대로 살아나있는 아담한 초당(草堂)이다.</ref>으로 올라가 만공 큰 스님으로부터 '명순' 이라는 법명을 받고, 4월 7일 삭발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br> |
− | 명수스님은 세수 32세 때 서울 청룡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했다. | + | 드디어 12세에 속가의 이모이신 성윤스님을 은사로 정하니 그 연이 어머니보다도 깊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사스님은 스님이 14세 되던 해에 입적하셨다. </br> |
+ | 훗날 두 딸이 모두 스님이 되자 명수스님의 속가 어머니도 절에 들어오셔서 스님이 되셨다. </br> | ||
+ | 명수스님은 세수 32세 때 서울 청룡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했다. | ||
+ | |||
===속가와 정신대의 내우외환(內憂外患) 극복=== | ===속가와 정신대의 내우외환(內憂外患) 극복=== | ||
− | 강원에 가서 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만공 큰스님께 그 뜻을 전했더니 수덕사 가풍에 따라 우선은 참선을 해야 된다며 반대를 하셨다. | + | 강원에 가서 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만공 큰스님께 그 뜻을 전했더니 수덕사 가풍에 따라 우선은 참선을 해야 된다며 반대를 하셨다. </br> |
− | 만공 큰스님의 뜻에 따라 수덕사에서 『치문』을 배우는 중에도 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쉽게 없어 지지 않았다. 이에 명수스님이 보따리를 싸니 만공 큰스님과 견성암 어른스님들을 비롯한 속가의 언니인 지명스님까지 모두 합세하여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말리며 야단을 치셨다. | + | 만공 큰스님의 뜻에 따라 수덕사에서 『치문』을 배우는 중에도 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쉽게 없어 지지 않았다. 이에 명수스님이 보따리를 싸니 만공 큰스님과 견성암 어른스님들을 비롯한 속가의 언니인 지명스님까지 모두 합세하여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말리며 야단을 치셨다. </br> |
− | 특히 그 중에서 지명스님은 더욱 완고히 반대를 했다. 그러면서 그 까닭을 말씀하는데, 비구들이 있는 처소에 가서 경을 배우면 속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네가 정 가겠다면 형제간의 인연을 끊겠다.' 하여 명수스님은 차마 강원으로 떠날 수가 없었다. | + | 특히 그 중에서 지명스님은 더욱 완고히 반대를 했다. 그러면서 그 까닭을 말씀하는데, 비구들이 있는 처소에 가서 경을 배우면 속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네가 정 가겠다면 형제간의 인연을 끊겠다.' 하여 명수스님은 차마 강원으로 떠날 수가 없었다. </br> |
− | 그 당시는 일제 강점기여서 정신대에 갈 처자를 뽑았는데, 견성암에 있는 스님 또래의 30명 도반들이 모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에 대중들은 결혼을 했다는 거짓 호적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대에는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대중공사를 했다. 그리고 모두 피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피하라고 하기에 스님은 외갓집으로 피신했다. | + | 그 당시는 일제 강점기여서 정신대에 갈 처자를 뽑았는데, 견성암에 있는 스님 또래의 30명 도반들이 모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에 대중들은 결혼을 했다는 거짓 호적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대에는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대중공사를 했다. 그리고 모두 피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피하라고 하기에 스님은 외갓집으로 피신했다. </br> |
− | 그렇게 외가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스님은 도저히 속가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이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상주 남장사 수옥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경을 보다가 다시 수덕사로 되돌아갔다. | + | 그렇게 외가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스님은 도저히 속가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이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상주 남장사 수옥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경을 보다가 다시 수덕사로 되돌아갔다. </br> |
− | 우리나라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인 정화 당시에는 정신이 살아있는 스님들이 많았다. | + | 우리나라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인 정화 당시에는 정신이 살아있는 스님들이 많았다. |
===불교정화운동=== | ===불교정화운동=== | ||
− | 비구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3일간 단식 투쟁을 하자는 외침에 명수스님도 함께 단식을 하게 되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무렵, 여섯 명의 비구스님이 법원에 들어가 할복을 하는 사태에 이르자 농성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산이 되었다. 일부 스님들은 해산 후에도 장삼을 입고서 무리를 지어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갔다. 스님들이 할복하는 지경까지 이른 심각한 상황에서 이 나라의 비구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많은 스님들이 법원 마당에 모여 농성을 벌였다. | + | 비구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3일간 단식 투쟁을 하자는 외침에 명수스님도 함께 단식을 하게 되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무렵, 여섯 명의 비구스님이 법원에 들어가 할복을 하는 사태에 이르자 농성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산이 되었다. 일부 스님들은 해산 후에도 장삼을 입고서 무리를 지어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갔다. 스님들이 할복하는 지경까지 이른 심각한 상황에서 이 나라의 비구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많은 스님들이 법원 마당에 모여 농성을 벌였다. </br> |
− | 농성을 막으려는 경찰들은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스님들을 차에 태우려고 시도했지만, 스님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스님들을 한 명씩 안아서 강제로 차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했다. | + | 농성을 막으려는 경찰들은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스님들을 차에 태우려고 시도했지만, 스님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스님들을 한 명씩 안아서 강제로 차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했다. </br> |
− | 명수스님도 다른 스님들과 함께 마포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스님은 학인들을 이끌던 올곧은 습관으로 자리를 정돈시킨 후 주력 정진을 했다. 하루를 꼬박 그곳에서 보내고 그 다음날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 + | 명수스님도 다른 스님들과 함께 마포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스님은 학인들을 이끌던 올곧은 습관으로 자리를 정돈시킨 후 주력 정진을 했다. 하루를 꼬박 그곳에서 보내고 그 다음날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br> |
− | 스님은 해인사 삼선암에서 정진하던 중에 6·25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다니다가 불교 정화시기 인 세수 36세에 대중들의 뜻에 따라 지명스님의 뒤를 이어 개심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 | + | 스님은 해인사 삼선암에서 정진하던 중에 6·25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다니다가 불교 정화시기 인 세수 36세에 대중들의 뜻에 따라 지명스님의 뒤를 이어 개심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 </br> |
− | 스님은 개심사에서 강당과 선방을 운영하며 40세까지 살다가 당진 흥국사에서 2년간 거주하 고 42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 시기에 혜봉스님이 법명을 명순에서 명수로 바꿔주었다. | + | 스님은 개심사에서 강당과 선방을 운영하며 40세까지 살다가 당진 흥국사에서 2년간 거주하 고 42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 시기에 혜봉스님이 법명을 명순에서 명수로 바꿔주었다. |
===도량불사=== | ===도량불사=== | ||
92번째 줄: | 98번째 줄: | ||
===척추결핵과 관음보살 가피=== | ===척추결핵과 관음보살 가피=== | ||
− | 스님은 동학사 선방에서 한철을 난 후 29세 되던 해에 척추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천안까지 간 일이 있었는데, 기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서 무거운 바랑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서있어야 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스님은 정차하는 역마다 내렸다 다시 타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다. | + | 스님은 동학사 선방에서 한철을 난 후 29세 되던 해에 척추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천안까지 간 일이 있었는데, 기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서 무거운 바랑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서있어야 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스님은 정차하는 역마다 내렸다 다시 타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다. </br> |
− | 그리고 박고봉 스님과 언니 지명스님을 찾아뵙고 갈 생각으로 봉곡사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온양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척추결핵이었다. | + | 그리고 박고봉 스님과 언니 지명스님을 찾아뵙고 갈 생각으로 봉곡사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온양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척추결핵이었다. </br> |
− | 수덕사에 돌아와서도 전혀 거동을 하지 못해 지명스님의 수발을 받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유명하다는 여러 의원을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명수스님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 + | 수덕사에 돌아와서도 전혀 거동을 하지 못해 지명스님의 수발을 받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유명하다는 여러 의원을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명수스님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br> |
− | 그러던 차에 한 도반과 같이 부산 반야사에 가게 되었다. 이때 고통이 너무나 심해 '이제 나는 죽게 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죽을 바에야 일념으로 염불이나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 | 그러던 차에 한 도반과 같이 부산 반야사에 가게 되었다. 이때 고통이 너무나 심해 '이제 나는 죽게 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죽을 바에야 일념으로 염불이나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br> |
− |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대신 누워서 관음주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관세음보살님이 감로수 병에 든 물을 따라 스님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옆에 도반스님이 있어 그 도반스님에게 물을 나누어주려고 하니 관세음보살님께서 막으며 명수스님 혼자 다 먹으라고 하셨다. 이에 명수스님은 그 감로수를 감사히 받아 마셨는데, 이후 허리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대자비하신 관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다. | + |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대신 누워서 관음주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관세음보살님이 감로수 병에 든 물을 따라 스님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옆에 도반스님이 있어 그 도반스님에게 물을 나누어주려고 하니 관세음보살님께서 막으며 명수스님 혼자 다 먹으라고 하셨다. 이에 명수스님은 그 감로수를 감사히 받아 마셨는데, 이후 허리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대자비하신 관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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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 가르침과 후학에 대한 당부=== | ===만공스님 가르침과 후학에 대한 당부=== | ||
− | 만공 큰스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 큰스님은 항상 “삭발염의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나' 라는 존재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 | 만공 큰스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 큰스님은 항상 “삭발염의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나' 라는 존재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br> |
− | 옛날에는 울력이 너무 많아서 지게 가득 나무를 지고 오다 힘이 들어 잠깐 쉬고 있으면 만공 큰 스님께서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 와서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 + | 옛날에는 울력이 너무 많아서 지게 가득 나무를 지고 오다 힘이 들어 잠깐 쉬고 있으면 만공 큰 스님께서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 와서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br> |
− | 그때 만공 큰스님은 “지게에 짊어진 것을 나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도 무겁다고 생각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은 나무가 대중스님들을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니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 + | 그때 만공 큰스님은 “지게에 짊어진 것을 나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도 무겁다고 생각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은 나무가 대중스님들을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니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br> |
− | 명수스님은 '평생 중노릇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이렇게 힘든 것을 인욕하고 정진한다면 금생에는 비록 성불을 못하더라도 성불의 길로 반은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정진했다. | + | 명수스님은 '평생 중노릇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이렇게 힘든 것을 인욕하고 정진한다면 금생에는 비록 성불을 못하더라도 성불의 길로 반은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정진했다. </br> |
− | 스님은 요즈음 젊은 스님들을 마냥 칭찬만 하지는 않는다. 옛날과 비교하여 어른에 대한 공경 심이 부족하고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가 없고, 누가 보더라도 정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정진력을 갖춘 스님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 + | 스님은 요즈음 젊은 스님들을 마냥 칭찬만 하지는 않는다. 옛날과 비교하여 어른에 대한 공경 심이 부족하고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가 없고, 누가 보더라도 정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정진력을 갖춘 스님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br> |
− |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 + |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br> |
“스님들은 모두 지성인인 만큼 지성인에 걸맞은 행과 실천으로 불법문중의 혜명을 이어주길 바랍니다. 중노릇을 하는 외에 다른 것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 온갖 시비를 끊고 정진하고 염불도 바르게 배워서 어딜 가든지 걸림 없이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어야 합니다.” | “스님들은 모두 지성인인 만큼 지성인에 걸맞은 행과 실천으로 불법문중의 혜명을 이어주길 바랍니다. 중노릇을 하는 외에 다른 것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 온갖 시비를 끊고 정진하고 염불도 바르게 배워서 어딜 가든지 걸림 없이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어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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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07~413.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07~413. |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12.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12. | ||
− | * 불교저널 ( | + |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3. |
− | * | + | * 불교저널, 선학원 소속 비구니회 원로 명수스님 입적 (2013년)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6) |
+ | * 다음 카페, 서울 연화사 숭심당 명수 비구니 노스님 49재 (2013년) https://cafe.daum.net/zee-an/KIV0/273?q=연화사%20명수스님%20입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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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분류 : 비구니스님]] |
2024년 9월 17일 (화) 17:55 기준 최신판
명수(明洙)스님 | |
---|---|
법명 | 명수(明洙) |
법호 | 숭심(崇深) |
속명 | 김복동(金福童) |
출생 | 1925.11.09. |
출가 | 1937년 |
입적 | 2013.09.04. (세납 88세, 법랍 77세) |
사찰 | 연화사(연화선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9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숭심(崇深) 명수(明洙)스님은 출가를 극구 말리는 속가의 출가 만류와 일제의 정신대 징발의 위기를 극복하고 출가하여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고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결핵을 기도로 치유하신 대한민국의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
1925 | 수원 출생 |
1937 | 수덕사 견성암에서 성윤(性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7 | 수덕사에서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56 | 서울 청룡사에서 만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7 | 수덕사 견성암 안거 성만 |
1958 | 상주 남장사에서 사교과 수료 |
1961 | 서산 개심사 주지 |
1966 | 당진 흥국사 주지 |
1967 | 서울 연화사 주지 |
1968 | 연화사 삼존불 개금 불사 및 탱화 봉안, 단청 불사 |
1978 | 연화사 중창 불사,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중사(별소계단 4, 5회 존증아사리) |
2013.9.4 | 입적(세납 88세, 법랍 77세) |
문중 | 실상(實相)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혜조(慧照)·혜일(慧日)·혜욱(慧旭)·혜오(慧悟)·혜근(慧漌)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실상(實相, 1)→순동(順同, 2)→의선(義善, 3)→성윤(性允, 4)→명수(明洙, 5)→혜조(慧照, 6), 혜영(慧英, 6), 혜일(慧日, 6), 혜욱(慧郁, 6), 혜성(慧性, 6), 혜오(慧晤, 6), 혜근(慧漌, 6) |
활동 및 공헌
출가
숭심(崇深) 명수(明洙)스님은 1925년 11월 9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로 2가 105번지에서 아버지 김익배 처사와 어머니 안간난 보살 사이의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복동이다.
스님은 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의지하며 생활했다. 스님의 외할머니는 '여자가 학교는 가서 무얼 하느냐'며 입학원서와 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스님은 외할머니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자 속이 상했던 중에 이모가 수덕사 근처에 절을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 외할머니를 따라 구경 가게 되었는데 이 일이 스님에게 발심의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스님이 절에 당도했을 때, 삽교에 사는 큰 부자가 생전예수재 100일간 기도 회향 중이었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연시련을 하는 모습을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눈에도 아이의 그 모습이 그대로 불국토이며 극락세계로 보였다. 그 장엄하고 멋진 모습에 경탄을 하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학교에 가지 못해 속상했던 일도, 또한 학교에 다니고 싶은 간절한 생각도 일순간 사라지고 오로지 스님처럼 절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작은 소녀의 마음에 이미 발심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명수스님의 속가 언니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지명 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수행을 하고 있었다.
명수스님은 예수재를 보고 온 뒤로 발심하여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렇지만 이모스님과 외할머니는 어린아이의 한때의 변덕스런 마음이라고 여겨 출가를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발심이 이뤄진 명수스님의 마음에는 간절함만이 남아 방청소를 하는 무엇을 하든 간에 “나 머리 깎아줘.”하며 두 달을 꼬박 졸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명수스님이 방을 쓸고 있는데, 외할머니와 이모가 무엇인가를 의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수스님이 가만히 들어보니 외할머니께서 이모에게 “쟤가 저렇게 스님이 되겠다고 하니 네 앞으로 출가시켜라.” 하며 삭발출가를 허락하셨다.
그렇지만 이모스님은 나이 어린 조카가 아무리 출가의 마음이 간절하다지만 노파심이 앞서 어린 명수스님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또 물었다.
정말 스님이 되고 싶은지, 또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도 않으면서 고기를 안 먹고 살 수 있는지 등등 이모스님의 걱정스런 물음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출가 허락에 마냥 기분이 들뜬 어린 명수 스님은 태연히 아무려면 스님이 되어서 그 정도도 못 견디겠냐며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등 어린아이답지 않은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 명수스님은 출가 허락을 받은 후 급한 마음에 곧장 혼자서 소림초당(少林草堂)[1]으로 올라가 만공 큰 스님으로부터 '명순' 이라는 법명을 받고, 4월 7일 삭발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만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드디어 12세에 속가의 이모이신 성윤스님을 은사로 정하니 그 연이 어머니보다도 깊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은사스님은 스님이 14세 되던 해에 입적하셨다.
훗날 두 딸이 모두 스님이 되자 명수스님의 속가 어머니도 절에 들어오셔서 스님이 되셨다.
명수스님은 세수 32세 때 서울 청룡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했다.
속가와 정신대의 내우외환(內憂外患) 극복
강원에 가서 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만공 큰스님께 그 뜻을 전했더니 수덕사 가풍에 따라 우선은 참선을 해야 된다며 반대를 하셨다.
만공 큰스님의 뜻에 따라 수덕사에서 『치문』을 배우는 중에도 경을 보고 싶은 마음은 쉽게 없어 지지 않았다. 이에 명수스님이 보따리를 싸니 만공 큰스님과 견성암 어른스님들을 비롯한 속가의 언니인 지명스님까지 모두 합세하여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말리며 야단을 치셨다.
특히 그 중에서 지명스님은 더욱 완고히 반대를 했다. 그러면서 그 까닭을 말씀하는데, 비구들이 있는 처소에 가서 경을 배우면 속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네가 정 가겠다면 형제간의 인연을 끊겠다.' 하여 명수스님은 차마 강원으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일제 강점기여서 정신대에 갈 처자를 뽑았는데, 견성암에 있는 스님 또래의 30명 도반들이 모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이에 대중들은 결혼을 했다는 거짓 호적을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정신대에는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는 대중공사를 했다. 그리고 모두 피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피하라고 하기에 스님은 외갓집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외가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스님은 도저히 속가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이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상주 남장사 수옥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경을 보다가 다시 수덕사로 되돌아갔다.
우리나라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인 정화 당시에는 정신이 살아있는 스님들이 많았다.
불교정화운동
비구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3일간 단식 투쟁을 하자는 외침에 명수스님도 함께 단식을 하게 되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무렵, 여섯 명의 비구스님이 법원에 들어가 할복을 하는 사태에 이르자 농성은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산이 되었다. 일부 스님들은 해산 후에도 장삼을 입고서 무리를 지어 택시를 타고 법원으로 갔다. 스님들이 할복하는 지경까지 이른 심각한 상황에서 이 나라의 비구니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많은 스님들이 법원 마당에 모여 농성을 벌였다.
농성을 막으려는 경찰들은 버스를 대기시켜놓고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스님들을 차에 태우려고 시도했지만, 스님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스님들을 한 명씩 안아서 강제로 차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했다.
명수스님도 다른 스님들과 함께 마포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 갇혀 있는 동안 스님은 학인들을 이끌던 올곧은 습관으로 자리를 정돈시킨 후 주력 정진을 했다. 하루를 꼬박 그곳에서 보내고 그 다음날 밤 아홉 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스님은 해인사 삼선암에서 정진하던 중에 6·25전쟁이 발발해 피난을 다니다가 불교 정화시기 인 세수 36세에 대중들의 뜻에 따라 지명스님의 뒤를 이어 개심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
스님은 개심사에서 강당과 선방을 운영하며 40세까지 살다가 당진 흥국사에서 2년간 거주하 고 42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왔다. 이 시기에 혜봉스님이 법명을 명순에서 명수로 바꿔주었다.
도량불사
서울에 올라온 스님은 절을 짓고자 했으나 신도가 없어 고민이었다. 그런데 문중으로 사숙님 상좌가 되는 사촌스님의 어머니가 땅을 선뜻 내주셔서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렵고 가난한 시기에 직접 화주를 해서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한 후, 10년을 살다가 다시 대웅전을 중창했다. 스님의 불사에 대한 원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생전에 대웅전 앞에 뜰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1억 3천만 원의 불사를 추진 중이다.
척추결핵과 관음보살 가피
스님은 동학사 선방에서 한철을 난 후 29세 되던 해에 척추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한번은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천안까지 간 일이 있었는데, 기차 안은 사람들로 꽉 차서 무거운 바랑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서있어야 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스님은 정차하는 역마다 내렸다 다시 타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박고봉 스님과 언니 지명스님을 찾아뵙고 갈 생각으로 봉곡사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는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온양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척추결핵이었다.
수덕사에 돌아와서도 전혀 거동을 하지 못해 지명스님의 수발을 받다가 다시 대구로 가서 병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유명하다는 여러 의원을 다 찾아다녀 보았지만 명수스님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도반과 같이 부산 반야사에 가게 되었다. 이때 고통이 너무나 심해 '이제 나는 죽게 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죽을 바에야 일념으로 염불이나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대신 누워서 관음주력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관세음보살님이 감로수 병에 든 물을 따라 스님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옆에 도반스님이 있어 그 도반스님에게 물을 나누어주려고 하니 관세음보살님께서 막으며 명수스님 혼자 다 먹으라고 하셨다. 이에 명수스님은 그 감로수를 감사히 받아 마셨는데, 이후 허리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대자비하신 관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다.
만공스님 가르침과 후학에 대한 당부
만공 큰스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 큰스님은 항상 “삭발염의 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나' 라는 존재를 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울력이 너무 많아서 지게 가득 나무를 지고 오다 힘이 들어 잠깐 쉬고 있으면 만공 큰 스님께서 일부러 그곳까지 찾아 와서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그때 만공 큰스님은 “지게에 짊어진 것을 나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도 무겁다고 생각하지 말아라.”하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은 나무가 대중스님들을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니 임금님의 용포보다도 더 좋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명수스님은 '평생 중노릇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이렇게 힘든 것을 인욕하고 정진한다면 금생에는 비록 성불을 못하더라도 성불의 길로 반은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정진했다.
스님은 요즈음 젊은 스님들을 마냥 칭찬만 하지는 않는다. 옛날과 비교하여 어른에 대한 공경 심이 부족하고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예의가 없고, 누가 보더라도 정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정진력을 갖춘 스님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스님들은 모두 지성인인 만큼 지성인에 걸맞은 행과 실천으로 불법문중의 혜명을 이어주길 바랍니다. 중노릇을 하는 외에 다른 것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 온갖 시비를 끊고 정진하고 염불도 바르게 배워서 어딜 가든지 걸림 없이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시봉자가 되어야 합니다.”
입적
선학원 소속 연화사(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193) 초대 창건주이자 비구니회 원로 숭심당(崇深堂) 명수(明洙)스님이 2013년9월4일 저녁에 세납 88세 법랍 77세로 입적했다. [출처] 불교저널 (인터넷 언론매체,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6) 수계제자로는 혜조(慧照)·혜일(慧日)·혜욱(慧旭)·혜오(慧悟)·혜근(慧漌)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07~41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12.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3.
- 불교저널, 선학원 소속 비구니회 원로 명수스님 입적 (2013년)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06)
- 다음 카페, 서울 연화사 숭심당 명수 비구니 노스님 49재 (2013년) https://cafe.daum.net/zee-an/KIV0/273?q=연화사%20명수스님%20입적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명수(明洙)스님 | 본항목 | 명수스님(明洙, 1925~2013) | 明洙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수스님(明洙,_1925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명수스님(明洙) | 실상문중(實相) | ~의 일원이다 | |
명수스님(明洙) | 성윤스님(性允) | ~의 수계제자이다 | |
명수스님(明洙)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명수스님(明洙) | 만공스님(滿空)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비구니계 |
명수스님(明洙) | 남장사 관음강원 | ~에서 수학하다 | 사교과 |
명수스님(明洙) | 서산 개심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명수스님(明洙) | 당진 흥국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명수스님(明洙) | 서울 연화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명수스님(明洙) | 서울 연화사 | ~을(를) 창건하다 | |
명수스님(明洙) | 서울 연화사 | ~을(를) 중창하다 | |
명수스님(明洙) | 계단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구족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4-5회 존증아사리) |
명수스님(明洙)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 |
지도
- 연화사(연화선원)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193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 ↑ 1920년대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저 곳에 수행처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벽초 경선(碧超鏡禪, 1899~1986)스님이 받들어 지었다. 덕숭산 산중턱 절벽위에 지은 암자로 자연목 그대로 짓고 그 위에 볏지붕을 덮어 자연의 곡선미가 그대로 살아나있는 아담한 초당(草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