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명성스님(眀星, 193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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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수광(秀光)·[[도광스님(度光, 1952生, 비구니)|도광(度光)]]·유광(琉光)·진광(眞光) 외 3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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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만성(萬性, 4)]]→상운(祥雲, 5)→[[본공스님(本空, 1907生, 비구니)|본공(本空, 6)]]→선행(善行, 7)→[[명성스님(眀星, 1931生, 비구니)|명성(眀星, 8)]]→수광(秀光, 9), 류광(琉光, 9), [[도광스님(度光, 1952生, 비구니)|도광(度光, 9)]], 혜광(慧光, 9), 묘광(妙光, 9), 선광(善光, 9), [[진광스님(眞光, 1957生, 비구니)|진광(眞光, 9)]], 연광(蓮光, 9), 정광(定光, 9), 미광(彌光, 9), 보광(普光, 9), 운광(雲光, 9), 주광(珠光, 9), 현광(玄光, 9), 월광(月光, 9), 지광(智光, 9), 송광(松光, 9), 희광(希光, 9), 일광(日光, 9), 은광(殷光, 9), 원광(圓光, 9), 서광(瑞光, 9), 여광(如光, 9), 윤광(允光, 9), 인광(印光, 9), 세광(世光, 9), 등광(燈光,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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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일) 12:55 판



정의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은 비구니 강백으로서 많은 후학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대선각자로서 전국비구니회를 통하여 비구니 스님들의 위상을 높이고 활동 입지를 다양하게 넓혀서 한국불교가 앞으로 추구해야할 진로를 개척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31 경북 상주 출생
1948 강릉여고 졸업
1949 강릉군 강동국민학교 교사
1952 합천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善行)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56~1958 공주 동학사 강원 사교과, 선암사 강원 대교 졸업
1958 순천 선암사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
1958~1970 순천 선암사 강원 강사, 청룡사 강원 강사
1967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 대한불교 조계종 제 3, 4, 5, 8, 9대 중앙종회의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운문사 강원 강사
1977~1998 청도 운문사 주지 역임
1985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1987 운문사승가대학 학장
1989~1998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학과 강사
1993 시카고 세계종교자대회 참석
1995 국제난민돕기 캄보디아, 태국 등 방문, 목동청소년회관 및 양천체육관 운영위원장
1998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취득
2001~2003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별소계단 2~20, 특 1~3회 존증아사리)
2002 운문사승가대학 회주
2004 전국비구니회 회장,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Sakyadhita) 공동대회장
2022 청도 운문사 주석
문중 봉래(蓬萊)문중
생활신조 즉사이진(卽事而眞)
저서 및 작품 『초능변식(初能變識)의 연구』, 『불교학논문집-명성스님 고희 기념』 외 다수
상훈 조계종포교대상(曹溪宗布敎大賞)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수광(秀光)·도광(度光)·유광(琉光)·진광(眞光) 외 30여 명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만성(萬性, 4)→상운(祥雲, 5)→본공(本空, 6)→선행(善行, 7)→명성(眀星, 8)→수광(秀光, 9), 류광(琉光, 9), 도광(度光, 9), 혜광(慧光, 9), 묘광(妙光, 9), 선광(善光, 9), 진광(眞光, 9), 연광(蓮光, 9), 정광(定光, 9), 미광(彌光, 9), 보광(普光, 9), 운광(雲光, 9), 주광(珠光, 9), 현광(玄光, 9), 월광(月光, 9), 지광(智光, 9), 송광(松光, 9), 희광(希光, 9), 일광(日光, 9), 은광(殷光, 9), 원광(圓光, 9), 서광(瑞光, 9), 여광(如光, 9), 윤광(允光, 9), 인광(印光, 9), 세광(世光, 9), 등광(燈光, 9)


【명성스님의 저서】

  • 논문 : 『초능변식의 연구』, 『삼능변식의 연구』, 『불교학논문집』(화갑기념), 『불교학논문집』(고희기념)
  • 역서 : 『구사론대강』, 『유식강요』, 『아비달마순정이론』
  • 편서 : 『사미니율의』, 『제경서문』
  • 저서 : 『즉사이진, 매사에 진실하라』(법문집), 『꽃의 웃음처럼 새의 눈물처럼』(서간집)
  • 평전(서광스님 저) : 『후박꽃 향기』
  • 전집 : 『법계명성전집』(20권)
  • 기타 간행물 : 즉사이진의 삶(명성 스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1화 ‘감나무를 살게요’ 2화 ‘스님과 스마트폰’), 〈구름 속의 큰 별 명성〉(오디오북 포함, 영문판, 명성 스님의 삶을 평전소설로 엮음), 법문 및 강의 영상 등

[출처] 운문사 홈페이지 http://www.unmunsa.or.kr/?c=209/212 현대불교신문;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974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96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97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98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99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00
[운문사 대웅전]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0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04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07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08
[전국비구니회 원로회의 최초 회의 장면(2016년5월3일)]사진출처:법보신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424
[명사 법계 품서식(해인사 대적광전)]사진출처: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679
[법계명성스님 전집]사진출처:경북매일신문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33166
[명성스님]사진출처:연합뉴스https://www.yna.co.kr/view/AKR20191204176000005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은 1931년 5월 5일 경북 상주에서 아버지 전재영(全在英)과 어머니 진양 정씨 정오종(鄭五終)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옥천이고, 법호는 법계이며, 이름은 전임호이다.

스님은 어렸을 때 자신의 이름에 아이 밸 임자가 있다는 게 매우 싫었다. 그러다가 문왕의 어머니 이름도 '태임' 이고, 사임당의 '임' 자도 같은 한자라는 말을 듣고 이름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 지금 돌아보면 이름 덕에 평생 많은 학인들을 곁에 두고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스님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하거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이럴 때 관세음보살은 어떻게 처세를 하셨을까?' 하며 관세음보살을 떠올렸다. 그리고 '틀림없이 관용을 베푸셨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실천하는 등 사소하고 작은 부분부터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스님은 어릴 적부터 아이답지 않게 마음을 넓게 썼고, 행동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불교학자를 비롯한 모든 성현들처럼 남을 위해 사는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었다.

스님이 가슴 깊은 곳에 관세음보살을 모시게 된 것은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불교 서적을 접하면서였다. 당시 스님은 한글로 해석된 반야심경을 읽고 손수 사경을 하면서 환희심을 느꼈다.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을 꼬집어 말하기 힘들 만큼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을 전부 좋아했다.

1948년 강릉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님은 강릉군 강동국민학교 및 장성국민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교 서적과 성현전을 비롯한 위인전들을 두루 섭렵하고 그리스도나 소크라테스, 부처님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희망을 품었다. 한편 '바쁘게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허덕이고 다니는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싸고 화려한 물건으로 장식한 부잣집을 봐도 부럽지 않고 허황되게만 보였다. 도무지 세속 적인 가치에 마음이 끌리지 않고, 오히려 인생의 무상함만 짙어져 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했다.

명성스님은 1952년 4월 15일 세수 22세 때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善行)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했다. 같은 해 4월 24일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7년 9월 23일 해인사에서 자운(慈雲)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행자시절

스님은 행자 시절 여러 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남다른 경험을 했다. 스님이 공양주를 살 때의 일이다. 당시 국일암의 조왕단 부뚜막은 지금처럼 시멘트가 아니라 흙으로 되어 있어서 자칫하면 망가지기 쉬웠다. 조왕단에는 조왕님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액자를 잘못 건드려서 조왕님이 부엌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어찌나 놀랐던지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뚜막에 부딪치면서 부엌바닥으로 떨어졌는데도 유리가 전혀 깨지지 않았다. 어른스님께 혼이 날까 염려가 된 스님은 얼른 바닥에 떨어진 조왕님 사진을 주워 들고 맷돌이 있는 딸기밭으로 가서 빠진 액자의 유리를 간신히 끼워 제자리에 갖다가 걸어놓았다.

그러나 나중에 스님은 자신의 실수로 조왕님 사진을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깨지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다. 그랬더니 어른스님께서 '네가 너무나도 신심껏 공양주를 사니 조왕님이 내려오신 것이다.' 하며 오히려 칭찬을 해주셨다. 명성스님은 어찌나 부지런했던지 하루에 서너 번씩 황토를 물에 개어 빗자루로 흙부뚜막을 발랐다. 밥풀 하나도 흘리지 않게 조심했고, 보리쌀을 씻을 때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돌 사이에 떨어진 곡식을 모두 줍다 보니 자연히 일하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많이 걸렸다. 곡식 한 알 도 버리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공양주 살던 때가 가장 심신 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의 신심이 한결 같았으면 벌써 성불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처음의 뜻이 퇴색하지 않고 계속 일관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 생활이 나태해진 것 같아요.” 이후 스님은 해인사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6·25전쟁 직후여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가야산 곳곳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고, 스님은 남아 있는 군인들 때문에 공부에 장애가 있을까 염려되어 부처님께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올리곤 했다. 공양주를 살던 국일암에서 해인사까지 통학을 하며 공부를 하러 다니느라 몹시 힘이 들었지만 스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 더 성심성의껏 공부와 수행에 진력했다.

스님이 미륵암에서 지낼 때는 아침마다 벼를 절구에 찧어 껍질을 벗기고 아궁이에 청솔가지를 때서 죽을 끓였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끓인 죽을 본공 노스님께 올리면 맛있게 잘 드셨는데, 명성스님이 끓인 죽을 한 그릇 반이 넘게 드실 정도로 좋아하셨다. 벼를 껍질째 절구에 넣고 찧으면 힘은 많이 들지만 정성이 듬뿍 들어가고 신선한 곡식 맛이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그윽함을 자아냈다. 겨울철에는 일하는 분들이 금방 산에서 베어온 미처 마르지도 않은 청솔가지로 불을 땠는데, 그럴 때면 매캐한 연기 때문에 울기 싫어도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수학

스님은 진주 미륵암에 있을 때 지나가는 객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객스님은 만독을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공양주를 살면서 틈나는 시간에 잠깐씩 하다 보니 만 독을 채우지 못하고 3천 독 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은 그때 글을 보는 문리가 났다고 생각한다.

명성스님은 미륵암에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해인사에서 『치문』을 공부했다. 미륵암에는 1년 정도 있었는데, 당시 노스님이 미륵암과 해인사 국일암에 계셨기 때문에 노스님을 모시고 양쪽을 오가며 공부와 수행을 병행해야만 했다. 스님은 『치문』을 배운 뒤 다시 국일암에서 공양주를 살게 되었는데, 늘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혼자서 열심히 정진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진주 연화사에 가서 공부 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연화사에는 속가의 아버지인 관응 큰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도솔암에 머물면서 매일같이 연화사로 통학을 하며 공부를 했다. 사집을 거의 다 배울 무렵 명성스님은 통도사 운허스님을 찾아가 묘엄스님, 묘영스님과 함께 사교를 수학했다. 당시에는 비구, 비구니스님이 따로따로 글을 배웠는데, 월운스님과 지관스님(두 분은 같은 동료였다.)도 그곳에서 운허스님께 글을 배우고 있었다.

1954년 3월 13일 운허스님이 진주 연화사로 거처를 옮기시자 명성스님은 묘엄스님과 함께 운허스님을 따라가 『기신론』을 배웠다. 『기신론』을 마칠 무렵 선학원에서 불교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금강경은 나중에 서울 대비원에 계시던 명봉스님(현 해인사 강주스님)께 배우게 되었다. 당시 개운사에 머물고 있던 스님은 통학을 하면서 동료 없이 혼자 공부를 했다. 개운사에는 비구니 3대 법사로 일컬어지는 금광(금룡)스님, 정수옥스님, 혜옥스님이 『법화경』 법문을 하고 계셨는데, 남은 부분을 묘엄스님과 명성스님이 이어서 하게 되었다. 당시 개운사의 주지는 금룡(금광)스님이 맡고 있었다.

대비원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선학원 부근에 있었다. 명성스님은 김일엽, 월송스님과 함께 개운사에 머물렀다.

그 후 동학사로 온 명성스님은 경봉스님께 원각경을 모두 배우고, 전라도 선암사로 가서 『화엄경』을 배웠다. 『화엄경』은 만우스님이 강을 하셨는데 승가사로 가시게 되어 통도사의 강사스님으로 계시던 선능스님이 그 뒤를 이었고, 명성스님은 선능스님에게 전강을 받았다.

1958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선능스님께서 당신이 깔고 앉은 좌복을 스님에게 상으로 주시면서 “여기 앉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명성스님은 그곳에 앉은 뒤 전강을 받았다. 의발을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책을 한 권 받은 적도 없이 오로지 좌복 하나만 내어준 참으로 멋진 전강이었다. 좌복을 내어준 것은 바로 자리를 내어준다는 뜻으로 스승의 자리를 조금도 모자람 없이 채우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명성스님은 이 단출한 전강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큰 가르침을 받았다. 오직 스승의 한 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진 전강을 받는 거룩하면서도 엄숙한 자리였다.

그 단순함과 소박함 속에는 제자에 대한 스승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또한 미래에 불교를 짊어지고 갈 젊은 후학들을 가르칠 스님의 재능을 당신의 좌복이라는 법좌(法座)를 밀어주면서 인정을 하셨던 것이다. 이때가 1958년이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명성스님은 승주 선암사 강원 강사로 취임을 했다.

스승의 길에 들다

강사가 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은 스님은 1961년 2월 10일 서울 청룡사 강원 강사로 취임하여 학인을 가르쳤는데, 그러는 중에 동국대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청룡사 강사 시절에는 각처에서 모인 약 25여 명의 학인들에게 『치문』부터 『화엄경』까지 (치문반과 화엄반) 모두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스님은 선암사에서 5년, 청룡사에서 10년 동안 스승의 길을 걸었다.

명성스님은 1970년 9월 석사학위를 받은 후 운문사로 내려오게 되었다. 당시 태구스님, 지원스님, 태호스님 등 경상도에 상주하는 8명의 비구니 중진 스님들이 청룡사로 오셨는데, 운문사의 주지 묘전스님과 강사 묘엄스님이 모두 운문사를 떠나시게 되자 마침 석사학위 공부가 끝난 명성스님을 운문사로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운문사의 학인스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석남사 어른스님들께 상의 드린 결과 명성스님을 모시고 오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8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서울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청룡사 노스님은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명성스님을 보내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반대를 했다. 그때 명성스님은 청룡사의 강사로 재직 중이었다. 청룡사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노스님과 8명의 비구니스님들은 대구 서봉사로 내려가 회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태구스님이 운문사의 주지로, 명성스님은 강사로 선임되었다.

명성스님은 1970년 9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3대 중앙종회의원으로 피선되었고, 그해 9월 30일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운문사 강사로 취임한 것은 두 달 뒤인 1970년 11월 15일이었다.

스님은 1975년 12월 11일부터 1976년 6월 1일까지 정확히 5개월 24일 동안 태국왕립사원 초청으로 원시불교연구를 위해 동남아 일대와 유럽을 거쳐서 미국까지 돌아보았다. 견학을 마친 뒤 명성스님은 사표를 쓸 생각을 했다. 선방에 가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학인 30명이 스님을 모시러 서울까지 와서 다시 운문사의 주지 겸 강사를 맡게 되었다. 이때가 1977년 7월 14일이었다.

비구니 대강백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은 학인들이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할 때면 책이 귀하여 손수 책을 베껴가며 공부를 하던 옛 시절이 떠오른다. 선암사에서 재무 소임을 보는 바쁜 와중에도 스님은 어떻게든 짬을 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진주 도솔암에 있을 때는 1년 동안 매일 연화사로 통학을 하며 관응 큰스님께 사집을 배웠다. 그때는 부전을 살면서 사분 정근을 하고, 통학을 하면서 30번 이상 사집을 독송했는데,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다.

또한 선암사에서 『화엄경』을 볼 때는 그 많은 내용을 반드시 3번씩 읽고 넘어갔으며, 충분히 읽고 나서는 노스님들께 해석을 해 드리기도 했다. 하루에 사집 30번, 『화엄경』 3번은 꼭 읽었던 셈이다. 하루 사분 정근을 하고 진주에서 통학을 하면서도 이렇게 책을 읽었던 것은 반드시 하겠다고 계획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님은 몸이 아프다고 해서 공부를 미루거나 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날 할 일은 꼭 그날 하고야 마는 성품이어서, 바쁘다고 거르고 아프다고 미루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철저함이 스님을 오늘날 비구니 대강백으로 우뚝 서게 한 힘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9일 동안 입원을 했는데, 퇴원을 하자마자 그 이튿날부터 다시 수업을 시작하고 그동안 빼먹은 과목들은 모두 보강을 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 써야 할 만큼 바쁘지만 계획한 일은 반드시 마무리를 짓는 스님은 다른 스님들한테도 그날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고 그날 꼭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출가를 한 뒤 학인을 가르칠 뜻은 없었다. 그러나 출가 전 교육계에 몸을 담고 있었고, 출가 후에도 자연스럽게 학인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교육과는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강원에 서 항상 안거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명성스님은 잠들기 전 언제나 화두를 들고 눕고, 자고 일어나면 '퍼뜩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스님은 졸업한 학인스님들이 선방에 갔다가 인사를 하러 찾아오면 그때마다 신선한 자극을 얻어 분발심을 낸다고 한다.

“내가 가르친 학인스님들도 선방에 가서 납자로서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 나도 뒤지지 말고 정 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공부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는 거죠. 따로 선방에 가지 않더라도 몸담고 있는 이곳이 나에게는 수행의 안거처입니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더라도 멍하게 앉아 있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생전에 명성스님을 많이 아껴주던 본공 노스님은 만공 노스님이 사용하던 주장자와 죽비를 명성스님에게 물려주셨다. 만공 노스님이 본공 노스님께 물려주신 것을 다시 만공 노스님의 손주이며 평소 아끼던 명성스님에게 물려주신 것이다.

스승의 애정이 이렇듯 각별했으니 명성스님은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것이 스님에게 조도(助道)가 되었다. 본공 노스님은 가는 곳마다 입승을 살아서 만성스님 전에 입승을 살기도 하셨다. 노스님은 가는 곳마다 죽비를 들고 무척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셨다. 노스님은 글을 많이 배우지 않았는데도 큰스님들께 들은 법문을 분명하게 잘 전달하셨고,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확고하셨으며, 평생 성성력력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명성스님의 은사 선행스님은 본공 노스님이 굉장히 아끼시던 분이다. 선행스님은 경 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옛날 어른스님들과 달리 법화경을 다 읽으셨고, 중노릇 하는 것에 대해 차분히 잘 일러주곤 하셨다. 단 한 마디 말씀으로도 스님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나 행동들을 은은한 생활 속에서 조용히, 야단스럽지 않게 가르쳐주셨다.

선행스님은 학인들 수업 때문에 바쁜 명성스님이 금방 왔다 가는 모습을 보고 “명성이는 내가 죽어도 바빠서, 바빠서 이 소리를 할 사람이야.” 하시며 곧잘 농담을 하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은사스님은 명성스님이 1975년 12월 11일부터 1976년 6월 1일까지 유럽을 순회하던 중에 입적하시고 말았다.

운문사 주지 선임

명성스님은 1977년 7월 14일 운문사 주지에 임명되어 그동안 운문사에 속해 있는 35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의 보수와 중수를 하고, 그 밖에 매표소를 비롯한 팔각정 등 허물어진 건물들을 다시 개축하여 총 39개 건물의 상량식을 했다. 책상 하나를 짜더라도 스님 주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강사와 주지를 겸하고 계셨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스님이 결정하고 실행한 일들은 모두 학인들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1988년 10월 8일 무려 20여 년 동안 근념했던 운문사 주지직에서 물러났다.

기도의 힘

명성스님은 운문사 불사를 할 때면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청풍료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전라도부터 시작하여 강원도까지 올라갔는데, 운문사 학인스님들을 위해 요사채를 짓는다고 하자 많은 분들이 성금을 내주셨다.

젊은 강사스님들을 데리고 표충사에서 108배를 한 뒤 이를 기점으로 해인사까지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때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식당에서 공양을 하다가 예전에 해 넣은 치아가 솟구쳐서 빠지고 말았다. 그만큼 힘들게 요사채를 지었던 것이다.

학인들은 운문사의 입장료로 별 어려움 없이 불사가 되는 줄 알지만, 250명이 넘는 학인들의 학비와 생활비는 결코 만만치 않기에 운문사는 불사를 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하여 종각과 만세루를 지을 때는 경북도지사에게 협조를 구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시주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 만큼 운문사를 졸업한 학인들은 명성스님에 대해 남다른 사랑과 존경을 느끼고 있다. 특히 운문사 강원시절을 떠올릴 때면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얘기가 있다.

학장스님이 수행하시는 당우 바로 앞에 있는 화엄채에서 학인들이 떠들고 있었는데,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라며 꾸중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많은 학인들이 감동을 받았고, 오랜 동안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내원암 골짜기 부근에서 산불이 났다. 스님은 그때 회성당 앞에서 나무를 심고 있었다. 등산객의 부주의로 불이 났는데 스님은 불이 난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심던 나무를 마저 다 심은 뒤 방에 들어가서 향을 피워놓고 천수를 모셨다. 그리고 산불이 빨리 진화가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산으로 쫓아 올라간다고 해서 산불이 진화될 리 만무하니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려고 했던 것이다.

스님이 기도를 다 마친 뒤에도 산불은 계속 번져나가 사흘 밤낮을 타올랐다.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군부대 쪽에서 진화 계획을 세우고 산불 진화에 전력투구했다. 한편 산불이 나기 얼마 전 전라도 어느 지역에 산불이 났었는데, 제때에 진화하지 못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자 군수는 물론 경찰서장까지 파면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스님은 군청 공보실 차를 빌려 타고 직접 도청으로 가서 산불 진화를 요청했고, 이후 도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군수와 경찰서장이 힘을 합해 진화 작업에 나섰다. 이렇게 하여 3일 만에 가까스로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군수와 경찰서장은 명성스님의 재빠른 조치 덕분에 자신들이 파면 당하지 않고 불을 잘 끄게 되었다며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국내외 활동

명성스님은 1970년 이후 제 3, 4, 5, 8, 9대 중앙종회의원,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학과 강사, 목동청소년회관 및 양천체육회관 운영위원장, 비구니 별소계단(比丘尼 別所戒壇)의 갈마아사리, 교수아사리를 역임했다. 또한 1987년 운문사 강원이 승가대학으로 승격하고 학장으로 취임했다.

19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자대회(世界宗敎者大會)에 참석했고, 1995년 국제난민을 돕기 위하여 태국과 캄보디아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그동안의 연구논문을 모아 회갑기념으로 『불교학 논문집』을 발간하는 등 불교 발전과 후학 양성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이 밖에도 1998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같은 해 10월 8일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운문사의 주지를 사임하고 현재는 오로지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에는 공부의 여건을 만드는 불사에 역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좋은 인재들을 배양하여 한국 불교발전에 필요한 역군을 배출하는 데 힘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운문사승가대학을 예로 들어보면, 학인은 250여 명이나 되는데 강사는 9명뿐이다. 그 중 두 명이 『치문』반을 가르치고, 두 명이 사교반을, 세 명이 사집반을 맡고 있다. 꽃꽂이를 비롯한 피아노, 서예, 사군자, 일어, 영어, 컴퓨터 등은 외래강사를 초빙하여 가르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강사스님들은 늘 빡빡한 강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무리를 하게 된다. 학인에 비해 강사가 부족한 형편이니 그만큼 강사들의 부담이 크다는 얘기이다.

교육자들은 원래 강의를 위한 시간과 연구를 하는 시간을 번갈아 가져야 한다는 게 명성스님의 평소 생각이며, 앞으로 더 많은 강사를 배출하여 강의와 연구를 서로 교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명성스님의 바람이다.

“졸업생은 많지만 후배들을 위해 공헌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사람은 드뭅니다. 이것은 비단 운문사승가대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교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또 강사스님을 하던 비구니스님이 주지가 되면 다시 강단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드문데, 이 또한 우리 불교 발전의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가장 큰 원력은 학인들을 가르칠 강사스님을 많이 배출하는 일입니다. 교법을 널리 유포 할 수 있는 학덕이 높은 스님들이 배출 되면 한국 불교가 발전하고, 더 나아가 세계 불교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운문사의 재학생이나 졸업생들 중에 는 명성스님을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명성스님이 학장스님으로서의 소임을 살면서 사찰의 운영을 투명하게 하고, 또 학인들의 편의와 복지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여 학인들이 명성스님께 상의를 드리면, 혼자서 결정을 하지 않고 매주 한 번 열리는 소임자 회의에서 함께 고민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스님의 이러한 원칙은 운문사의 운영 방식이 되었고, 운문사는 현재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모두 대중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화합을 바탕으로 대중의 결의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이뤄가는 불교 교단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 그 실천도량이 바로 운문사이다.

전국비구니회장 피선

2003년 8월 스님은 제7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역사는, 1968년 전임 회장인 광우스님을 비롯하여 몇몇 뜻있는 스님들이 불교 현대화의 역군을 양성할 비구니총림을 건립하자고 발원하여 결성한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회장인 보문사 주지 은영스님을 중심으로 '비구니총림 건립', '불교대중화를 위한 포교 합리화', '중생제도를 위한 복지사회 건설' 이라는 3대 강령을 바탕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1년 비구니 승가대학을 설립했고, 1985년 9월 5일 대한불교 조계종 전국비구니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특히 제5, 6대 회장 광우스님의 원력으로 2003년 7월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전국 7,000여 비구니스님의 총본산격인 전국비구니회관이 문을 열면서 하나의 중심축을 형성해 도약하게 되었다.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8th Sakyadhita) 개최

2004년은 명성스님에게 여러모로 뜻깊은 한 해가 되었다. 2004년 6월 26일에서 7월 5일까지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8th Sakyadhita)'가 경기도 김포 중앙승가대학교에서 개최되었는데, 전국비구니회가 행사의 주최자였다. 카르마 렉쉬 쏘모 스님과 함께 명성스님이 공동대회장을 맡은 이 행사는, 세계 45개국 1,000여 명의 수행자와 불교학자가 참가하여 '여성 불자의 교육과 수행' 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인 아름다운 화합의 장이었다.

세계여성불자대회는 크게 본행사와 사찰순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본행사는 학술 발표 위주로 6월 27일에서 7월 2일까지 펼쳐졌고, 7월 3일부터 2박 3일간 사찰순례가 이뤄졌다. 학술발표에서는 국내외 58명의 여성 불자들이 연사로 나와 세계 여성 불자의 수행 환경 개선과 여성문제, 지역사회 참여 방안 등에 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6월 27일 개회식에서 미국 칼레스톤대 종교학과 파울라 아라이 교수, 리스대 앤 캐럴라인 크레인 교수, 한국의 광우스님 등이 기조 연설자로 나와 인류의 고통을 불교를 통해 치유하는 방법을 소개하여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특히 6월 28일 오전에는 한국 비구니승단과 재가불자의 활동상이 집중 소개되고, 오후에는 세계여성불자들의 활동상이 조명되었다. 7월 3일부터 시작된 사찰 순례에서는 해인사, 불국사, 운문사, 봉녕사, 석남사 등 한국의 유서 깊은 고찰들을 방문, 한국불교의 교육과 수행가풍을 소개 했다.

대회 기간 중에는 중앙승가대학교 야외무대에서 매일 밤 각종 공연과 전시회가 마련되는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원불교, 가톨릭, 불교의 여성수도자 모임인 삼소회 회원들이 들려준 기도송, 티베트 불교 가수 나왕캐촉의 독창, 삼선승가대학 학인스님의 수화, 동희스님의 범패 공연 등이 펼쳐졌다. 또 쪽물전시, 가사전시, 한지공예, 서각전시 등 한국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다양한 전시회도 선보였다.

공동대회장이며 전국비구니회장인 명성스님은 “한국의 비구니 승단과 여성 재가 불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수행과 사회봉사 등 모든 면에서 이웃 국가들을 도와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회는 한국불교의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세계불교 현안을 논의하는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될 것입니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사카디타(Sakyadhita; 석가의 딸들)’로 명명된 세계여성불자대회는 1987년 인도 보드가야에서 결성된 세계최대 여성불교단체인 세계여성불자협회(협회장 카르마 렉쉬 쏘모 스님) 등에 의해 창설됐으며, 세계 45개국 1,900여명의 회원과 후원자들이 세계 여성 불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전국비구니회 초대 원로회의 의장 피선

전국비구니회 원로회의는 2016년5월3일 서울 일원동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에서 제1차 원로회의를 열고 초대 원로의장에 명성 스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이에 대해 명성 스님은 “나는 나이가 많아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과의 소통도 어렵다”며 “다른 스님이 원로의장을 맡아 비구니원로회의를 이끌어 주길 바란다”고 고사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한 비구니 원로 스님들과 전국비구니회장스님 등은 명성 스님에게 원로의장을 맡아 줄 것을 간곡하게 거듭된 요청에 따라 명성 스님은 “수행력이 부족한 제가 이 자리를 맡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원로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원로회의를 잘 이끌어 보겠다”고 수락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참석 대중들은 박수로 환호하며 명성 스님이 초대 비구니 원로의장에 추대됐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명사 법계 품서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은 2007년10월23일 23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한불교조계종 명사 법계 품서식’에서 혜운스님, 정화스님, 광우스님, 정훈스님, 묘엄스님, 지원스님과 함께 법전 종정예하로부터 명사 법계증과 가사(25조)를 전달받았다.

법전 종정예하는 법계증 품서 후 주장자를 높이 들어 “법계(法階)는 구경각(究境覺)에 이르는 차제(次第)가 아니라 선종(善種)을 심는 일이요, 이 선종(善種)은 훗날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을 이루는 근본(根本)이 될 것”이라고 법어했다.

저술활동

명성스님은 그동안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논문으로는 『초능변식(初能變識)의 연구(硏究)』, 『삼능변식(三能變識)의 연구』, 『불교학논문집(佛敎學論文集)』(화갑기념), 『불교학논문집(佛敎學論文集)』(고희기념) 이 있으며, 저서로는 『화엄학개론』, 『즉사이진, 매사에 진실하라』(법문집), 『꽃의 웃음처럼 새의 눈물처럼』(서간집)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구사론 대강(俱舍論 大綱)』, 『유식강요(唯識綱要)』, 『아비달마순정이론(阿毘達磨順正理論)』이 있으며, 편서로는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와 『제경서문(諸經序文)』이 있다.

법계(法界) 명성(眀星)스님에 대한 평전으로 2010년 서광스님이 저술한 『후박꽃 향기』가 있다.

법계명성스님 전집

불광출판사에서 출간한 『법계명성 전집(法界眀星全集)』(전20권) 봉정식을 2019년12월11일 운문사 대웅전에서 거행했다. 이 전집은 명성 스님의 저술을 비롯해 연구 논문, 편서와 역서, 법문, 강의, 기고문, 공예 및 서예 작품, 사진집, 제자들이 전해 받은 가르침과 여러 인연 등 흩어져 있는 스님의 소중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전집은 한 개인으로서의 명성 스님 생애와 사상을 총망라하면서도 한국 근현대 불교사와 한국 비구니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법계명성 전집〉 편찬위원장 진광 스님은 간행사에서 “〈법계명성 전집〉 발간은 후학들이 모범 삼아 따르고 배워야 할 지남(指南)의 자료를 남기려는 데 가장 큰 뜻이 있다. 언제나 살아 숨 쉬는 가르침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서 실천하고 완성시켜야 할 몫이 온전히 우리 후학들에게 남겨져 있음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후학에 대한 당부

명성스님은 오랜 세월 애정과 정성을 다해 지도해온 학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훌륭한 불제자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먹물 옷을 입었다고 저절로 좋은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먹물 옷에 걸맞는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진심을 다해 부처님의 뜻을 계승할 마음가짐으로 중노릇을 해야 합니다. 시장에 갈 때 이웃 사람이 가니 나도 덩달아 가는 것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목적의식을 갖고 시장에 가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같은 이치로, 삭발염의를 했으면 부처님을 닮아가는 스님이 되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로서 확고한 불교 사상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불제자가 되든지 출가승이 되든지 해야지 덮어놓고 아무 뜻도 모른 채 무의미하게 머리만 조아리는 것은 안 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사이진(卽事而眞)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스님은 학인들을 지도할 때도 큰일이나 작은 일 모두 반드시 부처님의 뜻(진리)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 대학 교수님이나 총장님 등 다른 분들이 운문사를 졸업한 학인스님들을 보고 공심과 봉사 정신이 투철하고 또 꾀를 안 부리고 소탈하다는 칭찬을 많이 합니다. 물론 학인스님들이 매사에 행동을 훌륭하게 잘 했기 때문이지만, 저도 '잘한다, 잘한다.' 하는 소리를 들으면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기쁘답니다.”

수계제자

명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수광(秀光)·도광(度光)·유광(琉光)·진광(眞光)스님 등 30여 명이 있으며, 현재 운문사 회주, 운문승가대학원 원장 겸 전국 비구니회 원로의장인 명성스님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정진 중이다. 스님의 상좌 중에는 외국인도 있는데, 호주의 지광스님과 영국의 법광스님 그리고 미국의 여광스님 등 세 명이다. 세 명의 외국인 상좌들은 한국에서 공부를 한 뒤 각자 자국에 돌아가서 참선지도와 포교활동으로 수행 정진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운문사] 사진출처 :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5186)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명성(眀星)스님 본항목 명성스님(眀星, 1931~) 眀星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성스님(眀星,_193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명성스님(眀星) 봉래문중(蓬萊) ~의 일원이다
명성스님(眀星) 선행스님(善行) ~의 수계제자이다
명성스님(眀星) 해인사 국일암 ~에서 출가하다
명성스님(眀星)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명성스님(眀星)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명성스님(眀星)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명성스님(眀星) 청도 운문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명성스님(眀星) 제8차세계여성불자대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공동대회장
명성스님(眀星)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2-20회, 특 1-3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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