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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스님은 주지 소임을 보면서 승려교육과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격(寺格)을 일신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br>
 
금봉스님은 주지 소임을 보면서 승려교육과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격(寺格)을 일신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br>
 
또한 망실된 임야(林野)를 되찾는 등 사찰 재정을 확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스님은 1916년 하안거 해제후 미질(微疾,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젊은 나이에 원적에 들었다. 세수 48세, 법납 35세. 금봉스님의 진영과 비는 순천 선암사에 모셔져 있다.</br>
 
또한 망실된 임야(林野)를 되찾는 등 사찰 재정을 확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스님은 1916년 하안거 해제후 미질(微疾,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젊은 나이에 원적에 들었다. 세수 48세, 법납 35세. 금봉스님의 진영과 비는 순천 선암사에 모셔져 있다.</br>
수법제자(受法弟子)로 철운종현(鐵雲宗玄).용곡정호(龍谷正浩) 스님을 두었다. 종현스님은 불후의 명작 <태백산맥>을 지은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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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법제자(受法弟子)로 철운종현(鐵雲宗玄).용곡정호(龍谷正浩) 스님을 두었다. 종현스님은 불후의 명작 <태백산맥>을 지은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다.</br>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전국의 강원엔 3대 강백.7대 강사라 칭송받던 대덕들이 실존했다. 당시 3대 강백은 석전한영(石顚漢英).축원진하(竺源震河).금봉병연(錦峰秉演) 스님이며 진호석연(震湖錫淵).퇴경상로(退耕相老).포광영수(包光映遂) 스님을 보태 7대 강사로 꼽았다. 이 가운데 한영스님의 강맥이 가장 뚜렷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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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전국의 강원엔 3대 강백.7대 강사라 칭송받던 대덕들이 실존했다. 당시 3대 강백은 석전한영(石顚漢英).축원진하(竺源震河).금봉병연(錦峰秉演) 스님이며 진호석연(震湖錫淵).퇴경상로(退耕相老).포광영수(包光映遂) 스님을 보태 7대 강사로 꼽았다. 이 가운데 한영스님의 강맥이 가장 뚜렷하게 서 있다.</br></br>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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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자료] </br>
 
-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263 불교신문(2008.11.29)] 40.금봉병연</br>
 
-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263 불교신문(2008.11.29)] 40.금봉병연</br>
 
-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402 불교신문(2007.06.23)] ⑧ 백양사승가대학</br>
 
-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402 불교신문(2007.06.23)] ⑧ 백양사승가대학</br>
  
 
[[분류 : 비구스님]]
 
[[분류 : 비구스님]]

2024년 8월 13일 (화) 21:01 판

  • 인물명 : 금봉병연(錦峰秉演)

금봉병연(錦峰秉演)스님은 1869년 12월24일 전라도 근천부(近天府) 화양면 옥적리(玉笛里)에서 태어났다. 근천부는 지금의 여수시이다. 이때는 고종 6년으로 조선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부친은 장건하(張建廈)선생, 모친은 영성(靈城) 정씨(丁氏)였다. 속명은 장기림(張基林)이다. 법명은 병연(秉演), 법호는 금봉(錦峰), 아호는 향엄(香嚴)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스님은 13세에 사기(史記)와 경서(經書) 등을 두루 통달했다. 14세에 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느끼고, 출가의 원력을 세웠다. 이해에 여수 영취산 흥국사의 경담(鏡潭)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며, 이듬해 4월8일 정식으로 출가했다.
출가한 후 금봉스님은 10여년간 오직 내전(內典)을 공부하는데 몰두했다. 경학을 연찬하며 출가사문의 기초를 닦는데 전념했던 것이다. 당대의 강백 회상에서 두루 공부했는데, 이때 원화(圓化,구례 화엄사).경운(擎雲, 순천 선암사).범애(梵海, 해남 대흥사).원응(圓應, 해남 대흥사)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사집> <사교> <염송> 등을 배웠다. 이밖에도 이밀제(李蜜齊).황매천(黃梅泉) 선생 등과 토론을 벌일 만큼 외전(外典)에도 밝았다.
내외전을 두루 익힌 금봉스님은 1895년(을미년) 3월 선암사 대승암 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승암에서는 10여 년간 제자들에게 경학을 지도했다.
1910년 이른바 원종(圓宗)이 설립되어 이회광을 중심으로 일본 조동종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스님은 박한영.진진응.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조선불교 수호운동을 전개했다.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해 경운스님을 종장(宗長)으로 추대했다. 1913년 선암사 주지에 취임했고, 순천 환선정(喚仙亭) 포교당 개설하는 등 산중불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금봉스님은 주지 소임을 보면서 승려교육과 포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격(寺格)을 일신하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또한 망실된 임야(林野)를 되찾는 등 사찰 재정을 확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스님은 1916년 하안거 해제후 미질(微疾,가벼운 질환)을 보이다 젊은 나이에 원적에 들었다. 세수 48세, 법납 35세. 금봉스님의 진영과 비는 순천 선암사에 모셔져 있다.
수법제자(受法弟子)로 철운종현(鐵雲宗玄).용곡정호(龍谷正浩) 스님을 두었다. 종현스님은 불후의 명작 <태백산맥>을 지은 조정래 작가의 부친이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전국의 강원엔 3대 강백.7대 강사라 칭송받던 대덕들이 실존했다. 당시 3대 강백은 석전한영(石顚漢英).축원진하(竺源震河).금봉병연(錦峰秉演) 스님이며 진호석연(震湖錫淵).퇴경상로(退耕相老).포광영수(包光映遂) 스님을 보태 7대 강사로 꼽았다. 이 가운데 한영스님의 강맥이 가장 뚜렷하게 서 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불교신문(2008.11.29) 40.금봉병연
- 불교신문(2007.06.23) ⑧ 백양사승가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