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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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유스님은 수정문중 계보의 기초를 만들었고 비구니 위상 정립에 힘썻으며 삼세를 뛰어넘는 무소유의 선지식이었던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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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유(快愈)스님은 수정문중 계보의 기초를 만들었고 비구니 위상 정립에 힘썻으며 삼세를 뛰어넘는 무소유의 선지식이었던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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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30일 (목) 17:46 판



정의

쾌유(快愈)스님은 수정문중 계보의 기초를 만들었고 비구니 위상 정립에 힘썻으며 삼세를 뛰어넘는 무소유의 선지식이었던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7 경남 덕현군 출생
1911 해인사 약수암에 모친과 함께 출가
1936 법주사 수정암에서 유성스님을 은사로 건당
1936~1953 금강산, 오대산, 사불산, 남장사 관음암 등 안거 성만
1953~1974 법주사 수정암 안거 성만
1955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8 전국 비구니회 전신인 ‘우담바라회’ 충북지회장
1974 수정암에서 입적 (세수 68세, 법납 64세)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계제자 성연(性蓮)・혜욱(慧郁)・성천(性天)・성원(性圓)・성법(性法)・자선(慈善)・성오(性悟)・성관(性觀)・성정(性正)・화엄(華嚴)・성각(性覺)

활동 및 공헌

출가

쾌유(快愈)스님은 1907년 8월 17일 경북 덕현군 가야면 매화리에서 아버지 진상문과 모친 진주(晋州) 하(河)씨 사이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닜다. 본관은 여양이며, 이름은 진점순이다. 스님은 속가의 천륜지정이 그리 길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가야산 해인사 약수암을 찾은 것이 속세와의 마지막이었다.

1911년 3월 5일 나이 겨우 5세,에 출가하였으니 말 그대로 동진출가(童眞出家)였다. 스님과 함께 어머니도 출가하였는데 법명이 계윤(戒允)이다. 속세의 모녀 지간에서 불가의 사제지간으로 억겁의 연을 다시 쌓아 올린 두 모녀의 구도적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눈물겨운 여정이었다.

어머니 계윤 스님

어머니 계윤 스님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것은 딸자식이 구도자로서의 본분을 익히며 당시의 암울한 사회 현실을 희망의 텃밭으로 일구도록 그 역할을 다 해주는 것이었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선구자,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정신적 스승으로서 만인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는 계윤스님의 무언의 가르침은 쾌유스님에게는 최고의 진리요, 구도자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수행이니, 구도니 하는 말이 생소하기만 한 어린 아이였던 스님은 때때로 어머니에게 상심을 주었다. 대중이 잠든 깊은 밤중, 계윤스님은 혹여 딸자식이 어디론가 도망가지 않을까 괜한 두려움에 밤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가분의 방편을 통해 안심(安心)을 찾고자 했던 당시 모녀지간의 일화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딸 쾌유스님이 행여나 어린 마음에 적막한 사찰의 무료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갈까 불안했던 계윤스님은 낮엔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일러줌으로서 딸을 안심시켰고, 잠자리에 들 때면 자신과 쾌유스님의 옷고름을 서로 묶어 몽중에서도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삼선암 성문(性文)스님과의 인연

계윤스님의 그러한 눈물겨운 의지를 읽어낸 것일까. 쾌유스님은 청소년기를 맞으면서 한 해가 다르게 구도자로서의 위의를 갖춰갔다. 큰 절에서 일대시교를 배워가는 동안 강사 스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핵심을 놓치지 않을 만큼 날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한 도반 정행스님은 쾌유스님에게 당시 삼선암에 주석하고 있던 성문(性文)스님의 상좌가 되기를 권유했다. 그것은 쾌유스님이 당시 해인사 사중에서 혜안의 구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다는 반증이었다. 당시 성문스님은 삼선암에 주석하며 비구니 납자로서의 수범을 보이던 선승이셨다. 아울러 정행스님은 성문스님의 속가 동생이었으며, 훗날 쾌유 스님이 “자신이 먼저 입적하게 되면 시달림을 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해인사 약수암에서 모친 계윤스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안으로는 정진의 도를 높이고, 밖으로는 수행자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한 스님은 어느 날 생애의 한 획을 긋는 일대사 인연을 접한다.

만행

스님의 나이 30세이던 1936년은 일제의 조선 탄압이 더더욱 치성을 떨던 시기였다. 약수암 한 곳에서만 도를 익히는 것은 병 속에 갇힌 새와 다를 바 없다는 모친 계윤스님의 유시와 같은 채찍을 거울 삼아 만행 길에 오른 것이다. 만행에 오른 지 며칠 후 당시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이름나 있던 법주사 수정암에 도착했다. 진정한 법의 도반으로서 사제의 정을 견지하며 비로소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도를 일깨우게 되는 은사 유성(宥成)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이뤄졌다.

법주사 수정암 유성스님과의 인연

유성스님은 그때까지 상좌를 두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유성스님께서 만년이 다가도록 자신한테 사제의 인연이 도래하지 않음을 스스로 한탄하며, 마지막 가는 길이나마 두터운 업장을 씻고 법의 스승이 될 수 있기를 발원하는 백일기도를 부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 일이 되는 날, 기도 회향식을 막 끝내던 차에 쾌유스님이 계윤스님과 함께 만행 길에 올라 수정암에 도착한 것이다.

유성스님과 쾌유스님은 말이 필요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제의 인연을 받아들였고, 이후 쾌유스님이‘속리산의 사자’로 불리며 한국 불교사에서 비구니 선맥의 대표적인 계보의 하나인 수정문중의 대들보로서 그 이름을 드날리게 된 것은 그 때부터다.

진 무구의 동자승으로 절집과 인연을 맺은 후 출가자의 본분을 익히고, 다시 정진의 도를 높이기 위한 여정에서 진정한 법의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여여하였다. 유성 스님과 사자(師資)의 예를 갖춘 후 보여준 스님의 행보는 해인사 약수암을 떠나올 때의 마음 그대로였다.

수행

수정암 문중으로 출가한 스님은 곧바로 만행을 떠났다.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과 유점사 반야암, 오대산 지장암과 사불산 윤필암 등은 스님이 안거를 성만한 대표적인 수행처였다. 세 번에 걸친 금강산 만행 길에는 일평생 무위의 삶을 살다간, 그래서 생전 ‘인욕보살’로 이름난 대비구니 대영(大英)스님이 동행하셨다.

그렇게 만행의 도착지에서 안거를 성만하며 ‘참나’를 찾기 위한 정진에 몰입하고 있던 어느 날, 스님에게 비보가 날아왔다. 1940년 음력 8월 9일, 금강산에서 수선안거를 마치고 다시 오대산 지장암에 막 도찰할 때였다. 은사 유성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즉시 발길을 돌려 수정암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후였다. 이미 은사스님의 4재를 올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은사스님과 함께한 시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속세의 법으로 보면 분명 불효였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 속세의 잣대일 뿐이었다. 은사 유성스님은 불과 4년 전 수정암을 찾은 쾌유스님으로부터 삼세를 뛰어넘는 구도자적 모습을 보았으며, 상좌로 흔쾌히 받아들였던 까닭도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수정암의 절 살림을 운영하라는 대중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만행을 떠난 쾌유스님의 그 모습에서, 유성스님은 비록 만년에 둔 상좌였지만 결코 남부럽지 않은 감회를 간직하고 있었다.

49재를 지낸 후 스님은 다시 사불산을 찾았다. 윤필암 맞은편 나옹 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알려진 묘적암에서 정진 수행하던 중 6·25전쟁를 맞아 경북 상주 남장사 관음암으로 자리를 옮겨 피나는 안거수선에 들었다. 그렇듯 용맹정진의 처절한 수행 습의를 익히고자 만행을 놓지 않았던 스님이 다시 수정암으로 돌아온 것은 휴전협정이 이뤄지던 즈음이었다. 수정암으로 돌아온 스님은 이때부터 입적할 때까지 선방의 도감을 맡았다.

수정암의 태수스님

수정암의 기반을 쌓아올린 비구니는 태수스님이셨다. 태수스님은 출가 전, 당대의 지방 유지이던 부잣집 딸이었다. 속가는 법주사를 감싸고 있는 보은군 외속리 장안 지역 대부분의 논과 밭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던 지주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태수스님은 이후 수정암으로 출가를 결행했고, 속가 소유의 그 많은 논과 밭은 그대로 수정암으로 이전됐다. 그것은 또 암자인 수정암이 큰절인 법주사보다 넉넉한 살림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사찰 경제의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은 대중의 용맹 정진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그 결과 대중에게는 ‘수정암이 당대 최고의 비구니 선방’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수정문중의 비구니 선맥(禪脈)은 그렇게 이어졌으며 태수스님이 수정암을 중창한 주요 인물로 기록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수정암의 정체성을 찾는데 태수스님의 역할은 그만큼 컸다. 그리고 쾌유스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 업적은 더욱 빛나게 된다. 이른바 수정문중의 탄생이 그것이다.

수정문중의 성립

오늘날 비구니 문중의 한 계보로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수정문중의 성립은 스님의 공에 힘입은 바 컸다. 수정암 선방에서 수많은 대중이 참나를 찾기 위한 수선안거(修禪安居)에 몰두하고 사자상승의 선맥을 전수하는 등 법맥 계승의 본거지로서 수정암이 그 역할을 다 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 전법의 계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후학들의 정진을 드높이고자 함이었다. 스님은 태수스님과 함께 수정암의 수행 가풍을 정립한 선인들을 정리했다. 1960년대 말 경이었다.

수정암을 개창한 관선스님을 초조로 세우고, 2대 능행스님, 3대 응운·정안·상학스님, 4대·재일·자흡·도원·덕진·실상·변홍·묘홍·대전·대흔·대순스님, 5대 청언·오봉·봉정·법선·만각스님, 6대 태석·태용·두전·문석·태수·유성·유묵·상완·도현·계윤스님 등으로 이어진 수정 계보의 기초를 작성했다. 후학들에 의해 훗날 ‘수정문중계보’로 확대 정리되는 큰 틀을 일찍이 제시한 것이었다.

쾌유스님은 관선-능행-응운-재일-봉정-유성-쾌유로 전승된 수정문중 제7대 법손에 해당한다. 이러한 문중 계보를 근거로 현재 수정암에는 4대 재일스님과 5대 봉정스님과 6대 태수·유성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수정문중의 계보는 그렇듯 쾌유스님의 역사의식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여 완성되었다. 비구니 문중의 정리를 통해 역사를 바로 알고 법맥계승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던 스님의 투철한 개혁의식은 비구니의 위상정립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의 충북지회장 역임

1968년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전신인 ‘대한불교 비구니 우담바라회’의 충북지회장을 역임하던 때였다. 비구니 선원과 강원, 그곳에서 용맹정진하고 있는 비구니들의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구니의 위상 정립과 향후 비구니를 통한 한국불교의 발전상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비구니 관련 사항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스님은 걷고 또 걸어서 현장을 답사하고 숫자를 파악해 그 기록을 남겼다. 오늘의 ‘전국비구니회’ 결성에 그 기초적인 단서를 제공매우 중요한 행보였다.

가람수호를 위한 노력

그러던 중 수정암의 살림이 갑자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태수스님이 소유했던 전답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른 정부의 토지 정책에 의해 소작인들에게 일제히 분배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절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스님마저 어려운 살림을 핑계로 정진 대중의 안위를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속리산 등산객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고 청주와 옥천 등 주변 도회지로 탁발하며 화주하기 몇 년, 어려운 절 살림을 마다하지 않고 대중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수정암의 경제는 날로 여유를 찾았으며, 큰절인 법주사의 궁핍한 살림도 나날이 좋아졌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러 1967년에 이르러 비로소 사찰 땅으로 논 30마지기를 매입했다. 극락전과 진영각을 중창하는 등 수정암의 옛 명성을 다시 찾은 것은 1972년, 스님의 나이 66세 때였다.

무소유 정신

그것은 청렴청빈의 결실이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입적할 당시 남겨진 유물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입던 옷가지와 발우, 상좌 성정스님이 드린 은수저와 입적 직전 조카 상좌 수현스님이 용돈으로 드렸던 5천원이 전부였다는 게 후학들의 전언이다.

그렇듯 스님은 생전에 의식주에서 한 치의 낭비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혹시라도 대중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후학들이 잘못할 때는 주장자로 경책하는 한편 연대 책임을 물어 다시는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엄한 태도를 보인 것은 장군죽비의 깨우침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불교가 살려면 승려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평소의 지론을 바깥으로 내 보인 진중함에 다름 아니었다.

슬기로운 대처 능력

후학들이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아야 불교의 내일이 밝다.'는 스님의 지론은 단순히 물질을 아끼고 욕심을 버리는 소극적 삶을 뛰어넘는 원칙이었다. 절 살림이 어려울 때 슬기로운 대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육신의 고달픔 이전에 굳건한 사고 의식의 발로였다. 한마디로 스님은 수정암의 기둥이었다. 100개의 서까래에 비유할 바가 아닌 대들보의 존재였다. 그 어려운 시절 후학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것도 그러한 사고의 반영이었다. 일반 사회교육에 관심을 갖도록 배려했으며, 그에 따른 교육비를 마다하지 않고 지원해 주는 등 후학에 거는 기대가 컸다. 1950년대 교단 정화의 명목으로 비구와 대처승간의 다툼이 일어났을 때는 당시 수정암 입승인 정행스님과 함께 도보로 속리산에서 대전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상경해 정화 불사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를 걱정하는 그 정성은 누구도 쉽게 따라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즈음 스님은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는데, 1955년 나이 49세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육영수 여사가 수정암을 원찰로 삼아 마음의 안위를 찾기도 했다.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다

쾌유스님은 한 마디로 절 살림의 귀재였으며, 후학들의 현대교육에 일찍이 눈을 떠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하였고, 호국불교의 사상적 실천면에서도 지혜를 발휘했던 수행자였다. 특히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는 한 치의 틈을 보이지 않고자 정진에 힘을 쏟았다. 아침저녁 예불과 참선은 일상사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결제 기간 안거수선은 반드시 지켰다. 정(定)과 혜(慧)를 닦는 한편 염불과 전통 불교의식에도 남다른 자질을 보였던 스님은 평소 후학들에게 첫째, 특별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조석예불을 잘 할 것. 둘째, 구설을 듣고 중노릇하면 금이 간 그릇과 같으니 자기 몸 소중히 가꾸며 중노릇 잘 할 것. 셋째, 성불은 만행과 수선안거에서 찾을 수 있느니 결코 소홀히 하지 말 것 등을 특히 강조했다.

이 경책은 후학들을 향해서만 던진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평생 정진의 도를 가늠하는 기준이었으며, 스스로 그렇게 수행 습의를 익혔다. 수정암이 참선도량으로 비구니 선풍의 맥을 이어온 것은 스님의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롯한 수행은 삼세를 뛰어넘는 스님의 삶의 전부였다. 그 결과 일생동안 오롯한 선지식을 찾아 정진에 매진했으며, 스스로 오롯한 선지식이 되었다.

입적

그렇게 오매불망 선객으로 남기를 갈구했던 스님에게도 허물을 벗어야 하는 육신의 변화가 여지없이 찾아왔다. 197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7일 육신의 허옷을 훌훌 벗어던지시니 세수 68세요, 법랍 64세였다.

수계제자로는 성연(性蓮)・혜욱(慧郁)・성천(性天)・성원(性圓)・성법(性法)・자선(慈善)・성오(性悟)・성관(性觀)・성정(性正)・화엄(華嚴)・성각(性覺)이 있다.

법주사 수정암

수정암 극락전 사진출처 : 만다라 불교 문화원(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mdala/Nyo9/1678?q=%EB%B2%95%EC%A3%BC%EC%82%AC%20%EC%88%98%EC%A0%95%EC%95%94)
수정암 경내 사진출처 : 만다라 불교 문화원(인터넷 카페 https://cafe.daum.net/mdala/Nyo9/1678?q=%EB%B2%95%EC%A3%BC%EC%82%AC%20%EC%88%98%EC%A0%95%EC%95%94)

법주사의 산내암자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553년(백제 성왕 31년) 의신(義信) 스님이 법주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914년 태수(泰守) 스님이 칠성각·독성각·산신각을 비롯해 현재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쓰이는 대선방(大禪房)을 지었다. 1960년 선방을 다시 지었고, 1973년 극락전·진영각·요사채 등의 전각을 세웠다. 암자 입구에는 태수스님의 부도와 탑비, 방인혁공덕비가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42~148.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99.
  • 전국비구니회, 『한국의 비구니의 수행과 삶 2』, 예문서원, 2009년, pp 313~332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200~201.
  • 하춘생. 『깨달음의 꽃2(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여래, 2001, pp. 121~138
  • 불교신문,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 대한불교 보문종 탑골승방 보문사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446
  • 대한뉴스, 세계 유일 비구니 종단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 http://www.daehannews.kr/news/article.html?no=44902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쾌유(快愈)스님 본항목 쾌유스님(快愈, 1951~2014) 快愈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유스님(快愈,_190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쾌유(快愈)스님 수정(水晶)문중 ~의 일원이다
쾌유(快愈)스님 유성스님)스님 ~의 제자이다
쾌유(快愈)스님 해인사 약수암 ~에서 출가하다
쾌유(快愈)스님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