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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비구니정혜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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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정혜도량은 1994년 5월 9일 삼선포교원에서 50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법회를 통해 출범했다. 정혜도량은 종단개혁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소극적 활동을 성찰하고 개혁의지 확산, 비구니 역할 및 위상 논의 등이 주요 목적이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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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정혜도량은 1994년 종단개혁운동과 맞물려 있다.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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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이모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인 [[법능(法能)스님]]이 계수스님을 불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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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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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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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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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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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 의현스님(제25,26대, 1986~1994)년과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계수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一衍, 1947生, 비구니)]]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 비구니들은 당시 총무원장은 '불교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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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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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도량의 창립법회에서 '''△비구니 위상 정립해 종단 화합, △불교 관계 악법 철폐해 불교 자주화 실현, △3.29, 4.10 법난 유발한 김영삼 대통령 공개 사과와 최형우 내무부 장관 즉각 해임''' 등이 담긴 결의문도 발표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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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결의를 다진 정혜도량의 전신은 ‘종단개혁을 뜻을 함께하는 비구니 모임’이었다. 이들 모임은 1994년 4월 26일 조계사 산중다원에서 자민·선중 스님 등 13명이 참여한 1차 모임부터 경북 영천 백흥암에서 선원·강원 대표 63명이 참여한 3차 모임까지 이뤄졌다. 이를 통해 정혜도량은 창립법회 전 전국비구니회로부터 지지를 받고 비구니스님들의 '공식적 단일창구'로 승인을 받았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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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에서 '비구니 중심 단일 의사 창구'의 권한을 부여받은 정혜도량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두 번에 걸친 세미나와 비구니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비구니 위상 제고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모여진 의견들은 정혜도량에서 정리돼 총무원 등에 전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어떤 내용의 안건들이 정리돼 전달됐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문건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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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구니 스님들의 주장에 대한 종단 내부 개혁 작업은 지난했다. 당시 비구 스님들은 비구니 팔경계 등을 들어 “비구 총무원장을 선출하는데 왜 비구니가 들어오는가”라고 힐난했다. 현실의 벽을 절감한 정혜도량은 8월 16일 종단개혁의 중추인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에 공문을 보내 탈퇴 의사를 밝혔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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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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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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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참고자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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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1955 현대불교] "94년 종단개혁사, 비구니 활동 조명돼야" 2021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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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cafe.daum.net/choongjeongsa/BruL/154?q=비구니%20정혜도량&re=1 대한불교 조계종 충정사] 잊을 수 없는 비구니 스님 한 분, / 계수 스님!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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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5911 불교신문] 개혁 비구니회 [정혜도량]출범  1994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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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46296 불교신문] 비구니 정혜도량 의식개혁 세미나  1994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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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665 법보신문] 정혜도량의 참종권 요구, 개혁종단서도 외면”  2021년.  </br>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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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관/단체]]

2024년 5월 10일 (금) 22:27 기준 최신판

  • 명칭 : 비구니정혜도량
  • 소재지 :

비구니정혜도량은 1994년 5월 9일 삼선포교원에서 50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참여한 가운데 창립법회를 통해 출범했다. 정혜도량은 종단개혁에서 비구니스님들의 소극적 활동을 성찰하고 개혁의지 확산, 비구니 역할 및 위상 논의 등이 주요 목적이었다.
비구니정혜도량은 1994년 종단개혁운동과 맞물려 있다.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
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이모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인 법능(法能)스님이 계수스님을 불렀다.
"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
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 의현스님(제25,26대, 1986~1994)년과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 계수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一衍, 1947生, 비구니)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 비구니들은 당시 총무원장은 '불교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정혜도량의 창립법회에서 △비구니 위상 정립해 종단 화합, △불교 관계 악법 철폐해 불교 자주화 실현, △3.29, 4.10 법난 유발한 김영삼 대통령 공개 사과와 최형우 내무부 장관 즉각 해임 등이 담긴 결의문도 발표하였다.
이 같은 결의를 다진 정혜도량의 전신은 ‘종단개혁을 뜻을 함께하는 비구니 모임’이었다. 이들 모임은 1994년 4월 26일 조계사 산중다원에서 자민·선중 스님 등 13명이 참여한 1차 모임부터 경북 영천 백흥암에서 선원·강원 대표 63명이 참여한 3차 모임까지 이뤄졌다. 이를 통해 정혜도량은 창립법회 전 전국비구니회로부터 지지를 받고 비구니스님들의 '공식적 단일창구'로 승인을 받았다.
종단개혁에서 '비구니 중심 단일 의사 창구'의 권한을 부여받은 정혜도량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두 번에 걸친 세미나와 비구니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비구니 위상 제고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모여진 의견들은 정혜도량에서 정리돼 총무원 등에 전달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어떤 내용의 안건들이 정리돼 전달됐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문건은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비구니 스님들의 주장에 대한 종단 내부 개혁 작업은 지난했다. 당시 비구 스님들은 비구니 팔경계 등을 들어 “비구 총무원장을 선출하는데 왜 비구니가 들어오는가”라고 힐난했다. 현실의 벽을 절감한 정혜도량은 8월 16일 종단개혁의 중추인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에 공문을 보내 탈퇴 의사를 밝혔다.
"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

[출처 및 참고자료]
- 현대불교 "94년 종단개혁사, 비구니 활동 조명돼야" 2021년.
- 대한불교 조계종 충정사 잊을 수 없는 비구니 스님 한 분, / 계수 스님!
- 불교신문 개혁 비구니회 [정혜도량]출범 1994년.
- 불교신문 비구니 정혜도량 의식개혁 세미나 1994년.
- 법보신문 정혜도량의 참종권 요구, 개혁종단서도 외면”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