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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 '''명칭 : 석남사 선원(石南寺 禪院)-정수선원(正受禪院), 금당선원(金堂禪院),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 석남사(石南寺)는 대한불교조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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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석남사 선원(石南寺 禪院)-정수선원(正受禪院), 금당선원(金堂禪院),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 | * '''명칭 : 석남사 선원(石南寺 禪院)-정수선원(正受禪院), 금당선원(金堂禪院),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 | ||
− | 석남사(石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으로 가지산(迦智山) 기슭에 옛 선사들의 향기 그윽한 가풍을 간직한 채 정갈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늘 푸른 하늘처럼 청정한 가람의 모습 그대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 또한 여법하며 빈틈이 없다. | + | 석남사(石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으로 가지산(迦智山) 기슭에 옛 선사들의 향기 그윽한 가풍을 간직한 채 정갈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늘 푸른 하늘처럼 청정한 가람의 모습 그대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 또한 여법하며 빈틈이 없다. </br> |
− |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므로 석남사의 선맥은 도의국사로부터 1천 2백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 + |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므로 석남사의 선맥은 도의국사로부터 1천 2백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br> |
− | 임진왜란으로 전소한 절을 현종 15년(1674)에 탁령(卓靈)·자운(慈雲)·선철(善鐵) 등의 스님이 1803년에는 침허(枕虛)·수일(守一) 스님이 1812년에는 우운당(友雲堂)스님이 중수하였다. | + | 임진왜란으로 전소한 절을 현종 15년(1674)에 탁령(卓靈)·자운(慈雲)·선철(善鐵) 등의 스님이 1803년에는 침허(枕虛)·수일(守一) 스님이 1812년에는 우운당(友雲堂)스님이 중수하였다. </br> |
− | 1957년 인홍(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가람을 크게 일신하였다. 대웅전·극락전·조사전·강선당·침계루·정수선원·금당선원·서래각·선영당·청화당·백인당·영봉헌 등 각 당우를 중수 복원하여 23동의 당우가 들어서 석남 대가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석남사는 비구니 수도처로 각광을 받으며 항상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 + | 1957년 인홍(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가람을 크게 일신하였다. 대웅전·극락전·조사전·강선당·침계루·정수선원·금당선원·서래각·선영당·청화당·백인당·영봉헌 등 각 당우를 중수 복원하여 23동의 당우가 들어서 석남 대가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석남사는 비구니 수도처로 각광을 받으며 항상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br> |
− | 대웅전 옆을 지나서 백일홍이 피어 있는 옆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도의 국사 부도(보물 제369호)가 있고, 후원 뒤뜰을 지나서 식당 옆 지하에는 돌구유(문화재자료 제157호)가 있는데, 지금은 채소와 음식물을 세척하는 물을 담아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중심 공간에 들어서기 앞서 산문을 겸한 침계루가 있는데, 이곳은 여름에 백팔대참회와 저녁예불과 법문을 듣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 | 대웅전 옆을 지나서 백일홍이 피어 있는 옆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도의 국사 부도(보물 제369호)가 있고, 후원 뒤뜰을 지나서 식당 옆 지하에는 돌구유(문화재자료 제157호)가 있는데, 지금은 채소와 음식물을 세척하는 물을 담아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중심 공간에 들어서기 앞서 산문을 겸한 침계루가 있는데, 이곳은 여름에 백팔대참회와 저녁예불과 법문을 듣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br> |
− | 석남사 선원은 1957년 당시 주지였던 인홍 스님이 퇴색해 있던 가람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정수선원(正受禪院)을 신축하여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대표적인 비구니 선도량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63년부터 이곳에서 연이어 3년결사를 진행해 오다가 1999년에는 1년 결사에 들어갔다. | + | 석남사 선원은 1957년 당시 주지였던 인홍 스님이 퇴색해 있던 가람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정수선원(正受禪院)을 신축하여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대표적인 비구니 선도량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63년부터 이곳에서 연이어 3년결사를 진행해 오다가 1999년에는 1년 결사에 들어갔다. </br> |
− | 인홍 스님은 1963년에 선기(禪機)가 수승한 납자들을 위한 수도 공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끝에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을 신축하였다. | + | 인홍 스님은 1963년에 선기(禪機)가 수승한 납자들을 위한 수도 공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끝에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을 신축하였다. </br> |
− | + | 1995년 주지 도문(道門)스님은 수선 공간이 부족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금당선원(金堂禪院)을 신축, 개원하여 많은 청풍 납자들을 받아 들여 정진케 했으며 현재 이곳에서 1년 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br> | |
− | 1995년 주지 도문(道門)스님은 수선 공간이 부족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금당선원(金堂禪院)을 신축, 개원하여 많은 청풍 납자들을 받아 들여 정진케 했으며 현재 이곳에서 1년 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 + | 이렇게 석남사 선원이 여법한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면모를 거듭 새롭게 하여 가일층 선풍을 휘날리게 되자, 1999년 8월에 조계종 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br> |
− | 이렇게 석남사 선원이 여법한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면모를 거듭 새롭게 하여 가일층 선풍을 휘날리게 되자, 1999년 8월에 조계종 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 + | 석남사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은 정수선원, 금당선원, 심검당선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정수선원에서는 일반정진, 금당선원에서는 결사도량으로 가행정진, 심검당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앞으로 심검당에서는 무문관을 개설할 예정이라 한다. </br> |
− | 석남사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은 정수선원, 금당선원, 심검당선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정수선원에서는 일반정진, 금당선원에서는 결사도량으로 가행정진, 심검당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앞으로 심검당에서는 무문관을 개설할 예정이라 한다. | + | 정수선원은 석남사 본당으로 종무소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원 앞으로는 조사전과 탑 1기가 서 있다. 선원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60평 규모인데, 큰방 뒤에 간병실과 창고, 정랑이 붙어 있다. 큰방에서 대중 30여 명이 좌선 수행할 수 있으며 몇 해 전까지도 여기서 수차례 3년결사를 맺기도 하였다. </br> |
− | 정수선원은 석남사 본당으로 종무소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원 앞으로는 조사전과 탑 1기가 서 있다. 선원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60평 규모인데, 큰방 뒤에 간병실과 창고, 정랑이 붙어 있다. 큰방에서 대중 30여 명이 좌선 수행할 수 있으며 몇 해 전까지도 여기서 수차례 3년결사를 맺기도 하였다. | + | 금당선원은 석남사 본절에서 우측으로 빠져 올라가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동인암(東仁庵)이 있던 자리로 1994년 동인암을 해체 증축하여 선원을 만들어 현재 1년결사를 하고 있다. 금당선원은 큰방, 목욕탕과 다각실을 겸한 요사, 정랑의 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당선원 큰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0명이 수행할 수 있다. 1999년 하안거에는 결제. 해제와 상관없이 납자들이 가행정진으로 1년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결 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 한다. </br> |
− | 금당선원은 석남사 본절에서 우측으로 빠져 올라가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동인암(東仁庵)이 있던 자리로 1994년 동인암을 해체 증축하여 선원을 만들어 현재 1년결사를 하고 있다. 금당선원은 큰방, 목욕탕과 다각실을 겸한 요사, 정랑의 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당선원 큰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0명이 수행할 수 있다. 1999년 하안거에는 결제. 해제와 상관없이 납자들이 가행정진으로 1년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결 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 한다. | + | 심검당선원은 석남사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상선원(上禪院)으로서 특별선원이다. 공부가 순숙한 선중(禪衆)이 용맹정진하는 무문관 당우로 만든 것인데, 큰방에서 10여 명이 정진할 수 있다. 현재 불필(不必) 스님 외 노스님 들이 기거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다. 심검당 큰방 옆에는 요사채가 있어, 다각실, 목욕탕으로 쓰고 있으며, 심검당 향 좌측 앞쪽으로 정랑이 있다. </br> |
− | 심검당선원은 석남사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상선원(上禪院)으로서 특별선원이다. 공부가 순숙한 선중(禪衆)이 용맹정진하는 무문관 당우로 만든 것인데, 큰방에서 10여 명이 정진할 수 있다. 현재 불필(不必) 스님 외 노스님 들이 기거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다. 심검당 큰방 옆에는 요사채가 있어, 다각실, 목욕탕으로 쓰고 있으며, 심검당 향 좌측 앞쪽으로 정랑이 있다. | ||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772~775. |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772~775. | ||
[[분류 : 선원/강원/율원]] | [[분류 : 선원/강원/율원]] |
2024년 5월 10일 (금) 21:23 판
- 명칭 : 석남사 선원(石南寺 禪院)-정수선원(正受禪院), 금당선원(金堂禪院),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
석남사(石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으로 가지산(迦智山) 기슭에 옛 선사들의 향기 그윽한 가풍을 간직한 채 정갈하게 단장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늘 푸른 하늘처럼 청정한 가람의 모습 그대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 또한 여법하며 빈틈이 없다.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므로 석남사의 선맥은 도의국사로부터 1천 2백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셈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소한 절을 현종 15년(1674)에 탁령(卓靈)·자운(慈雲)·선철(善鐵) 등의 스님이 1803년에는 침허(枕虛)·수일(守一) 스님이 1812년에는 우운당(友雲堂)스님이 중수하였다.
1957년 인홍(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6·25동란으로 폐허가 된 가람을 크게 일신하였다. 대웅전·극락전·조사전·강선당·침계루·정수선원·금당선원·서래각·선영당·청화당·백인당·영봉헌 등 각 당우를 중수 복원하여 23동의 당우가 들어서 석남 대가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석남사는 비구니 수도처로 각광을 받으며 항상 100여 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대웅전 옆을 지나서 백일홍이 피어 있는 옆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도의 국사 부도(보물 제369호)가 있고, 후원 뒤뜰을 지나서 식당 옆 지하에는 돌구유(문화재자료 제157호)가 있는데, 지금은 채소와 음식물을 세척하는 물을 담아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중심 공간에 들어서기 앞서 산문을 겸한 침계루가 있는데, 이곳은 여름에 백팔대참회와 저녁예불과 법문을 듣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석남사 선원은 1957년 당시 주지였던 인홍 스님이 퇴색해 있던 가람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정수선원(正受禪院)을 신축하여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수행 도량으로 삼으면서 대표적인 비구니 선도량으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63년부터 이곳에서 연이어 3년결사를 진행해 오다가 1999년에는 1년 결사에 들어갔다.
인홍 스님은 1963년에 선기(禪機)가 수승한 납자들을 위한 수도 공간을 세워야겠다는 생각 끝에 심검당선원(尋劍堂禪院)을 신축하였다.
1995년 주지 도문(道門)스님은 수선 공간이 부족함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금당선원(金堂禪院)을 신축, 개원하여 많은 청풍 납자들을 받아 들여 정진케 했으며 현재 이곳에서 1년 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석남사 선원이 여법한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으로 면모를 거듭 새롭게 하여 가일층 선풍을 휘날리게 되자, 1999년 8월에 조계종 종립 비구니 특별선원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석남사 비구니 종립 특별선원은 정수선원, 금당선원, 심검당선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정수선원에서는 일반정진, 금당선원에서는 결사도량으로 가행정진, 심검당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앞으로 심검당에서는 무문관을 개설할 예정이라 한다.
정수선원은 석남사 본당으로 종무소 뒤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원 앞으로는 조사전과 탑 1기가 서 있다. 선원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60평 규모인데, 큰방 뒤에 간병실과 창고, 정랑이 붙어 있다. 큰방에서 대중 30여 명이 좌선 수행할 수 있으며 몇 해 전까지도 여기서 수차례 3년결사를 맺기도 하였다.
금당선원은 석남사 본절에서 우측으로 빠져 올라가면 모습을 드러낸다. 옛 동인암(東仁庵)이 있던 자리로 1994년 동인암을 해체 증축하여 선원을 만들어 현재 1년결사를 하고 있다. 금당선원은 큰방, 목욕탕과 다각실을 겸한 요사, 정랑의 3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당선원 큰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30명이 수행할 수 있다. 1999년 하안거에는 결제. 해제와 상관없이 납자들이 가행정진으로 1년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결 사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 한다.
심검당선원은 석남사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상선원(上禪院)으로서 특별선원이다. 공부가 순숙한 선중(禪衆)이 용맹정진하는 무문관 당우로 만든 것인데, 큰방에서 10여 명이 정진할 수 있다. 현재 불필(不必) 스님 외 노스님 들이 기거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다. 심검당 큰방 옆에는 요사채가 있어, 다각실, 목욕탕으로 쓰고 있으며, 심검당 향 좌측 앞쪽으로 정랑이 있다.
[출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선원총람』, 2000, pp. 772~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