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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명 : 무안 용덕사(龍德寺) '''
 
* ''' 사찰명 : 무안 용덕사(龍德寺) '''
 
* ''' 주소 :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474-3 '''
 
* ''' 주소 :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474-3 '''
“용덕사는 한반도 소백산의 메아리가 줄기차게 달리다 머물러서 서남단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솟아오른 봉대산 자락에 꽃피운 절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산 41번지, 구룡곡에 1965년 10월 15일 부처님 자비도량으로 개산하였다. (중간줄임)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남편 사후를 추모하여 효열 미풍의 시묘 3년이라는 천하에 유례없는 공을 세운 분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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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사는 한반도 소백산의 메아리가 줄기차게 달리다 머물러서 서남단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솟아오른 봉대산 자락에 꽃피운 절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산 41번지, 구룡곡에 1965년 10월 15일 부처님 자비도량으로 개산하였다. (중간줄임)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남편 사후를 추모하여 효열 미풍의 시묘 3년이라는 천하에 유례없는 공을 세운 분이다. </br>
 
숲이 우거져 낮에도 혼자서는 내왕이 어려운 우적골에서, 문덕금(훗날 종수 스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혼인한 문덕금의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떴다. 무덤 옆에 작은 토막을 짓고 방에는 짚을 깔고 짚 베개를 베고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았으며, 입고 있던 흰옷은 검정 옷으로 변해있었다.(중간줄임) 시묘살이 뒤에 유년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던 종수 스님은 비구니절로 들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했는데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중을 빛낸 분’을 어찌 남의 절로 가시게 할 수 있냐는 의논 끝에 문중의 선산 680여 평과 인법당(人法堂)을 지어 종수 스님께 희사했다. </br>
 
숲이 우거져 낮에도 혼자서는 내왕이 어려운 우적골에서, 문덕금(훗날 종수 스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혼인한 문덕금의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떴다. 무덤 옆에 작은 토막을 짓고 방에는 짚을 깔고 짚 베개를 베고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았으며, 입고 있던 흰옷은 검정 옷으로 변해있었다.(중간줄임) 시묘살이 뒤에 유년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던 종수 스님은 비구니절로 들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했는데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중을 빛낸 분’을 어찌 남의 절로 가시게 할 수 있냐는 의논 끝에 문중의 선산 680여 평과 인법당(人法堂)을 지어 종수 스님께 희사했다. </br>
이때가 1969년 11월 17일이었다. 사찰명은 구룡곡(九龍谷)의 용(龍)자와 속가명인 문덕금(文德今)의 덕(德)자를 취해 용덕사(龍德寺)라 지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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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1969년 11월 17일이었다. 사찰명은 구룡곡(九龍谷)의 용(龍)자와 속가명인 문덕금(文德今)의 덕(德)자를 취해 용덕사(龍德寺)라 지었다. </br></br>
※ 출처 :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32285 우리문화신문] 전남 무안 용덕사를 세운 비구니 종수 스님의 삶</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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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32285 우리문화신문] 전남 무안 용덕사를 세운 비구니 종수 스님의 삶</br></br>
  
 
* ''' 지도 ''' : [https://map.kakao.com/?q=무안군_해제면_광산리_474-3 용덕사]</br></br>
 
* ''' 지도 ''' : [https://map.kakao.com/?q=무안군_해제면_광산리_474-3 용덕사]</br></br>
  
 
[[분류 : 사찰]]
 
[[분류 : 사찰]]

2024년 5월 9일 (목) 21:34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무안 용덕사(龍德寺)
  • 주소 :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474-3

용덕사는 한반도 소백산의 메아리가 줄기차게 달리다 머물러서 서남단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솟아오른 봉대산 자락에 꽃피운 절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산 41번지, 구룡곡에 1965년 10월 15일 부처님 자비도량으로 개산하였다. (중간줄임)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남편 사후를 추모하여 효열 미풍의 시묘 3년이라는 천하에 유례없는 공을 세운 분이다.
숲이 우거져 낮에도 혼자서는 내왕이 어려운 우적골에서, 문덕금(훗날 종수 스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혼인한 문덕금의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떴다. 무덤 옆에 작은 토막을 짓고 방에는 짚을 깔고 짚 베개를 베고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았으며, 입고 있던 흰옷은 검정 옷으로 변해있었다.(중간줄임) 시묘살이 뒤에 유년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던 종수 스님은 비구니절로 들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했는데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중을 빛낸 분’을 어찌 남의 절로 가시게 할 수 있냐는 의논 끝에 문중의 선산 680여 평과 인법당(人法堂)을 지어 종수 스님께 희사했다.
이때가 1969년 11월 17일이었다. 사찰명은 구룡곡(九龍谷)의 용(龍)자와 속가명인 문덕금(文德今)의 덕(德)자를 취해 용덕사(龍德寺)라 지었다.

※ 출처 : 우리문화신문 전남 무안 용덕사를 세운 비구니 종수 스님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