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사 익성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bigun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번째 줄: 1번째 줄:
 
* ''' 사찰명 : 내원사(內院寺) 익성암(益聖庵) '''
 
* ''' 사찰명 : 내원사(內院寺) 익성암(益聖庵) '''
 
* ''' 주소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산63-1 '''
 
* ''' 주소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산63-1 '''
원효는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중·하내원암(上中下內院庵)을 비롯,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오도(悟道)하게 하였다.</br>
+
원효는 양산시 하북면 원효산 아래 내원사(內院寺) 계곡에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중·하내원암(上中下內院庵)을 비롯,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오도(悟道)하게 하였다.</br>
 
이 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산이름을 천성산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에 대둔사 및 상·중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br>
 
이 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산이름을 천성산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에 대둔사 및 상·중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br>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義天)이 중건하였고, 1845년(헌종 11)에 용운(龍雲)이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는 해령(海嶺)이 중수하였다. 1898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한 뒤 선찰(禪刹)로 이름을 떨쳤고, 민족항일기에는 혜월(慧月)이 주석하면서 많은 선승(禪僧)들을 배출하였다.</br>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義天)이 중건하였고, 1845년(헌종 11)에 용운(龍雲)이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는 해령(海嶺)이 중수하였다. 1898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한 뒤 선찰(禪刹)로 이름을 떨쳤고, 민족항일기에는 혜월(慧月)이 주석하면서 많은 선승(禪僧)들을 배출하였다.</br>

2024년 5월 9일 (목) 21:13 기준 최신판

  • 사찰명 : 내원사(內院寺) 익성암(益聖庵)
  • 주소 :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산63-1

원효는 양산시 하북면 원효산 아래 내원사(內院寺) 계곡에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중·하내원암(上中下內院庵)을 비롯,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오도(悟道)하게 하였다.
이 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산이름을 천성산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에 대둔사 및 상·중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義天)이 중건하였고, 1845년(헌종 11)에 용운(龍雲)이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는 해령(海嶺)이 중수하였다. 1898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한 뒤 선찰(禪刹)로 이름을 떨쳤고, 민족항일기에는 혜월(慧月)이 주석하면서 많은 선승(禪僧)들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 원효스님 창건.수옥스님이 중창하였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원사 / 내원사(홈페이지) 내원사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