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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참선공부로 선회하여 내원사(內院寺),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던 중,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감화 받아, 통도사 극락암에서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였다. </br> | 1912년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참선공부로 선회하여 내원사(內院寺),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던 중,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감화 받아, 통도사 극락암에서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였다. </br> | ||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 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한암(方漢巖)·김제산(金霽山)·백용성(白龍城) 등과 교류하며 정진하였다. </br> |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 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한암(方漢巖)·김제산(金霽山)·백용성(白龍城) 등과 교류하며 정진하였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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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6일 (월) 21:19 기준 최신판
- 법호·법명 :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 생애·업적
본관은 광주(廣州).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법호는 경봉(鏡峰), 시호(詩號)는 원광(圓光). 법명은 정석(靖錫). 경상남도 밀양 출신.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1912년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뒤, 참선공부로 선회하여 내원사(內院寺),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던 중,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감화 받아, 통도사 극락암에서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 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당시의 선지식이었던 방한암(方漢巖)·김제산(金霽山)·백용성(白龍城) 등과 교류하며 정진하였다.
여러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선(禪)과 교(敎)를 포괄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으로 선승들을 지도하였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