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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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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제 = 행원(行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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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행원(行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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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명 = 행원(行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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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 = 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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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명 = 박정자(朴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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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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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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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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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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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적 = 1980.6.2 입적(세수 54세, 법랍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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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찰 = 대원사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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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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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10월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으로 폐허가 된 대원사 가람 복원불사를 은사 법일스님과 함께 1955년부터 시작하여 1980년까지 완성해서 온전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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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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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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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도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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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27|| 충남 서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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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1|| 경남 쌍계사에서 법일(法一)스님을 은사로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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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2|| 해인사에서 고봉(高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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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8|| 견성암 안거 성만 1955 산청 대원사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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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61|| 해인사에서 혜일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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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80. 6. 2|| 대원사 총무 소임 중 입적(세수 54세, 법랍 4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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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계제자 : 묘혜(妙慧)·영호(榮浩)·영주(榮珠)·진전(眞典)·영운(榮云)·대경(大鏡)·대영(大瑛)·광오(光悟)·묘현(妙玄)·묘인(妙仁)·묘명(妙明)·현주(玄宙) 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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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동 및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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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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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원(行願)스님은 1927년 음력 6월 6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에서 아버지 태화 거사와 어머니 서 안덕화 보살 사이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박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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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의 속가는 맏이인 오빠가 수덕사로 출가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으며, 스님도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그러나 어렸을 적 우연히 집에 들른 어느 스님의 수명이 짧다는 말에 어머니가 늘 속으로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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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던 중 먼저 출가한 행원스님의 오빠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발심했고, 1941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쌍계사 국사암에서 법일스님의 맏상좌로 출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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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원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2년 2월 25일 해인사에서 고봉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고, 1961년 3월 16일 해인사에서 혜일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으니, 이때 스님의 나이 3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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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행정진을 한 스님은 성품이 곧고 진실해서 은사스님을 지성으로 섬기며, 약한 몸을 이끌고 오직 관음기도로 정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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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람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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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년 9월 5일, 여수·순천사건 때 불에 타서 폐허가 된 채 방치된 지가 8년이 넘은 대원사 터에 은사 법일스님과 함께 들어가서 꾸준히 복구사업을 벌여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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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은 2년 만에 사리탑 옆에 조그마한 탑전을 지었다. 그 때 비구·대처승간의 치열한 분규로 촉발한 불교정화에 휩싸이게 되어 약 4년여의 소송 끝에 고등법원의 승소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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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사인 법일스님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탁발을 다니셨고, 총무 소임을 맡고 있던 행원스님은 손발이 얼 정도로 오직 간절한 기도로써 불사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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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게 노력해서 1955년부터 시작한 불사가 1980년까지 사리전, 탑전, 대웅전, 천광전, 원통전, 산신각 등 17여 동 3백 20평에 이르는 불사를 완성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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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화선원 송담스님은 세등선원 경신년(1980년) 하안거 반살림 법문에서 성옥 행원스님을 “우리와 같이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 동안을 참선을 하고, 또 불사를 하고, 교화(敎化)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서 애를 쓰다가 너무 과로한 탓으로 해서 홀연히 이승을 하직(下直)을 했습니다.”하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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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도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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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의 기도 원력은 남다른 데가 있어서 적멸보궁마다 관음성지마다 백일기도를 4분 정근을 하면서 쉼 없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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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이 기도 정진할 때면 종종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산 정상에 위치한 남해 보리암에 가뭄이 들면 식수조차 모자라서 쩔쩔매곤 했는데 스님이 기도하러 갈 때면 이상하게 비가 와서 항상 물이 풍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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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는 곧 간절함과 진실함이 우러나오는 지극한 신심은 폐허를 거룩한 성전으로, 물이 없는 곳에는 물이 솟아나게 하는 신령스러움으로 발현되었고, 가뭄이 든 곳에는 해갈을 가져오는 영험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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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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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원스님은 마지막 대웅전 기와 불사를 마무리하고 총무 소임 중인 1980년 6월 2일 저녁 공양을 들고 각단 예불을 모두 마 치고 목욕을 한 후 고요히 입적했다. 이때가 스님의 세수 54세, 법랍 4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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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행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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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의 가르침은 특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대중에게 모범을 보였다. 평생 예불을 절대 빠뜨리지 않았던 스님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중노릇을 하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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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나는 수행자' 라는 생각을 항상 잊지 말 것, 관 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말것, 큰소리 치지 말 것, 겸손하게 조심하며 살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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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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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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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18~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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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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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담스님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살림(80.05.30.음) 법문오디오(세등선원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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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s://chamsonbub.tistory.com/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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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맨틱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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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드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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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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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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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style="width:120px" | 항목1 || style="width:240px" | 항목2 || style="width:180px" | 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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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행원스님(行願,_1927生,_비구니) | 행원(行願) 스님]] || [[쌍계사]] || [[법일스님]] ~ 은사로 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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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행원스님(行願,_1927生,_비구니) | 행원(行願) 스님]] || [[해인사]] || [[고봉스님]] ~ 을 계사로 사미니계수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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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행원스님(行願,_1927生,_비구니) | 행원(行願) 스님]] || [[해인사]] || [[헤일스님]] ~ 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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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행원스님(行願,_1927生,_비구니) | 행원(行願) 스님]] || [[대원사]] || 총무소임중 입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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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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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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