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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1일 (토) 19: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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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혜돈(慧頓) |
법호 | |
속명 | 정민오(鄭敏悟) |
출생 | 1949. 5. 15 |
출가 | |
입적 | |
사찰 | |
특이사항 |
Experience
정의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1949 경북 상주 출생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 1974 화운사 사교 수료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 1999~2000 화운사 주지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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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중 : 실상(實相)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
활동 및 공헌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
출가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이며,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고즈넉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왠지 좋았다.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살림을 돕게 하였다. 하지만 정작 스님은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간절해졌다. 나중에 스님의 부모님은 스님에게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도 싫은 나머지 절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 살 되던 해 친척 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 가서 며칠을 지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보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 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 같은 저녁 공양을 하는 것으로 출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 행자생활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 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만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 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때의 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
서용스님이 은사이신 혜춘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깊다. 당시 혜춘스님의 구도 정진의 열정은 제방에 다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는데 마침 선방을 직접 다니시던 할머니께서 그 소식을 접하고는 혜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스님은 혜춘스님이 계신 곳을 수소문하여 해인사에 머물러 계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즈음 고암 큰스님이 부산 동래 포교당에서 가끔 법문을 여셨는데 그곳으로 찾아가 고암 큰스님께 혜춘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실 수 있도록 편지를 써주시길 부탁드렸다.
당시 혜춘스님은 백련암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사람을 보내 서찰을 전하자 혜춘스님은 곧 고암 큰스님을 찾아왔다. 상좌 들이기를 권하시는 고암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혜춘스님은 선뜻 허락을 하지 않았다. 다만 ‘중노릇을 하려거든 석남사로 가라.’는 말씀만 남긴 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그 말을 따라 스님은 바로 석남사에 가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기도를 마치신 혜춘스님이 석남사로 오셨다. 그때도 혜춘스님은 은사스님이 되는 것을 마뜩치 않게 여기며 ‘석남사 대중에 훌륭한 스님들이 많으니 은사를 정해서 중노릇을 하라.’는 말씀만 남기셨다. 서용스님은 이후 3년 동안 신심에 겨워 소임을 살고 시간이 나면 법당에 절을 올리며 삭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생활하였다. 혜춘스님은 마침내 인연을 받아들이고 삭발해주셨다.
스님은 혜춘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68년 7월 23일 혜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고, 1969년 4월 13일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 보현암 건립
그 후 1969년 운문사에 입학하였으나, 1970년도에 석남사 상선원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은사스님이 3년 결사를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3년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해 공양을 지어 올렸다. 1972년부터는 보현암을 건립하는 불사를 시작하였는데 일단 뼈대만 세워 올린 후 본격적으로 들어와 은사스님을 도와 장애 없는 불사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와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원래 보현암 터는 일타 큰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이 서로 마음에 들어 하고 애착을 가진 절터였던지라 합의하에 욕심을 갖지 말고 절도 짓지 않기로 결의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해인사에 큰일이 있었는데 혜춘스님이 그 일을 마무리함으로써 일이 잘 해결되자 해인사 주지였던 봉주스님이 무척 고마워하며 어떻게든 보답하기를 원했다. 혜춘스님은 ‘달리 바라는 것은 없으니 그저 기도 정진할 수 있는 작은 토굴 자리 하나만 마련해달라.’고 청하셨다. 그러자 봉주스님이 혜춘스님에게 보현암 터에 절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밭으로 이용하고 있던 그 절터에 선방을 짓는 게 평생 소원이었던 혜춘스님의 바람대로 불사를 시작하였다. 선방 위주로 불사를 하였기에 법당은 그 규모가 비교적 작아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원주실과 객실, 장경각 등도 지었는데 모두 다 두 번 손을 거쳐야 할 만큼 중건 중수를 거듭하였다. 20년간 불사를 하면서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만큼의 불사는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이제 불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말한다. 불사할 당시를 돌이켜보면, 채공간에 가기 전까지는 은사스님과 함께 정진을 하고 그 사이사이 공양을 짓는 등 불사의 무장무애를 위하여 절 기도와 정진을 쉼 없이 거듭하였다. 이렇듯 불사의 원만한 성공을 위한 기도정진 노력의 결실로 큰 사고 없이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불사를 이끌어올 수 있었다. 지금의 보현암이 존재하는 데는 많은 스님들의 노고가 있었다. 서용스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 또한 없다. 은사스님이신 혜춘스님은 외부에서 시주금을 모으고 서용스님은 불사 현장을 감독하며 열정을 쏟았다. 보현암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은사스님의 공덕 때문이라고 말하는 서용스님은 ‘불사는 공부하는 마음으로 하고 신심이 가정 먼저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유훈인 ‘보현암 선방에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수행자는 공부하는 마음을 놓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보현암 불사를 마치고 제주도의 선덕사로 가서 제주도 유일의 비구니 선원을 개원하여 비구니 스님들의 선수행(禪修行) 도량을 만들기도 한 서용스님은, 2004년 현재 보현암에 머물면서 사중의 소임을 맡아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 일광(一光)·일탁(欥卓)·경후(俓厚)·진후(眞厚)·근후(根厚)·자유스님 등이 있다.
관련 정보
해인사, 보현암, 석남사, 경봉 노스님, 혜춘스님, 운문사,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
4.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31~335.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