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부적음(草夫寂音)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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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초부적음(草夫寂音, 1900~1961)
  • 생애·업적

1900년 11월1일 경북 군위군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재화(金在化)선생이고 모친은 유매실(柳梅實) 여사이며, 속명은 김영조(金永祚)이다.
어려서(1912년) 고향에 있는 사숙(私塾,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5세에 김천 직지사에서 은사는 제산(霽山)스님로 출가했다.
출가후 직지사에서 수선 안거를 한 적음스님은 1922년 3월30일부터 4월1일까지 경성 선학원에서 열린 선우공제회 총회에서 서무부 이사로 추대됐다. 1927년에는 직지사에서 사교과를 마쳤으며, 1930년에는 만공(滿空)스님에게 입실 건당했다. 이때 초부(草夫)라는 법호를 받았다.
1931년 선학원 상임포교사 소임을 맡았으며, 1932년 부산 범어사에서 도첩(度牒)을 받았다. 1934년 조선중앙선리참구원 상무이사를 거쳐, 선학원 3대.5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조선불교 수호에 앞장섰다. 조선불교문화운동협회 경리(經理) 소임을 보았다.
1935년 1월5일 조선불교선종 종헌 반포 당시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계승하기 위해 개최된 유교법회에 동참했다. 같은 해 범행단(梵行團)을 결성해 청정비구승단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되던 해 12월17일 서울 충무로 3가 50번지에 있는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1947년 1월에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하고 역시 초대 원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대한민주당과 한국국민당이 통합한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자료에는 조직부 명단에 게재돼 있다.
1950년 4월20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제5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6월24일 정화운동 발기인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이튿날 교단정화추진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1955년 공주 마곡사 주지로 취임했고, 1956년3월에는 선학원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노년에 병고를 겪은 스님은 1961년 10월3일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했다. 세수 61세, 법납 39세. 제자로는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과 동국대 이사장, 공주 신원사 조실을 역임한 벽암(碧岩)스님이 있다. <적음집>이 발간됐다는 구전이 전해오지만 실체는 확인할 수 없다.
※ 출처 : 불교신문(2009.08.19 11:00) 65. 초부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