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송(應松)스님
- 법명·성명 : 응송(應松) 박영희(朴暎熙)
- 생애·업적
응송 박영희(應松 朴暎熙·1893~1990)는 전남 해남의 대흥사 승려다. 초의선사가 완성한 ‘초의차’의 격조 높은 다법(茶法·제다법과 탕법)을 후세에 전했다.
그의 속성은 박씨이며 완도 서망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영희이고 포길과 학규라는 아명을 썼다. 법명은 응송이고 호는 매다옹(賣茶翁),일주(一舟)였다.
응송은 아전출신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조부의 名은 忠直, 字는 一溟, 號가 巖崖이며, 해남에서 戶房을 지낸 인물로 고을에서 덕망이 높았다고 전한다. 조부의 사망이 후 가세가 기울어져 2세 때 완도읍 죽청리로 이주하였다. 농부인 아버지 용권(鎔權)은 밀양 박씨로 숙민공파 27대손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이다. 대한제국 태왕제 29년 壬辰年(1893)에 박씨의 5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숙부가 서당을 운영했다는《자서전》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어린 시절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응송은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보내지 못했다. 14세 때, 완도에 있는 향교에 다니며《명심보감》등 유가서(儒家書)를 익히긴 하였지만 학업에만 전념할 수가 없어서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해 틈틈이 공부하였다. 17세 되던 해 평생의 정신적 스승인 황준성이라는 무관을 만난다. 황준성은 1907년 군대 해산 명령에 불복하여 2년 뒤인 1909년 완도로 귀양을 온 사람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향교인 명륜당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조숙했던 응송은 그의 애국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황준성은 밤이면 응송에게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토로하였고, 이에 응송은 자연스럽게 抗日에 대한 투철한 저항의식을 길렀다. 그가 어린 나이에 황준성을 따라 항일 민병대가 된 것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심적암사건” 에 연루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황준성의 권유로 출가하였다. 1911년 1월 15일 대흥사에서 응송은 鄭 印潭 能悟(정인담능오)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허 원응계정(許圓應戒正 1856~1927)을 법사로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응송의 생애에서 가장 큰 인생의 전기는 의병활동과 유학생활이다. 유학은 독립에 대한 의지와 불교에 대한 수행이 구체화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곤란(困難)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1919년에 사비장학생(寺費獎學生)에 선발되었던 때를 회상하는 그의 글에 “꿈에도 그리던 유학의 길이 나에게 주어질 줄이야. 나는 이 우주 태중(胎中)에 온 후 이렇게 기쁨을 느껴보긴 난생 처음이었으니 어찌 언설(言說)로 다 표현하랴” 라고 그 심회를 밝혔다. 사비 장학생으로 중앙학림에 입학한 그는 재학 시절 3.1독립 운동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배필(配匹)의 인연을 만났다. 그는 일경에 쫓겨서 완도에 내려가면서도 독립선언문을 배포, 화엄사 승려 청년들에게 독립선언의 취지를 설파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이시영(李始榮, 1882~ 1919))이 만주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독립군이 되었으나 만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대와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하였다.
응송은 나라가 자주독립을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시급한 일은 사람을 교육 시켜 정신을 무장하는 것 이라고 여겨 교육계에 투신, 후학을 기르는데 헌신하였다. 1920년~ 1926년까지 대흥사에서 설립한 장춘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완도군 금일면과 소안면에 위치한 소학교에서 어린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신문물에 대해 더욱 공부해야한다는 필요를 절감하고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1928년 서울 혜화전문(동국대학 전신)에 입학한 응송은 당시의 지식인이었던 위당 정인보(1892~? ), 김영수(金映遂, 1884년 ~ 1967년 )에게 수학하였다.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1870~1948))을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석전은 응송이 3.1독립운동 사건으로 피신하는 몸이 되었을 때 그를 감싸주었다. 응송은 대흥사 주지 시절, 민멸된 초의의 비를 새로 세웠는데, 이때 초의의 비문에 음기(陰記)는 석전이 썼다.
응송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1944)이 조직한 불교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만당원(卍黨員)으로 활약하였다. 당시 본사 주지 임명은 먼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 전력으로 인해 2년 동안 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1937년 9대 대흥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는 해방 후 대한 불교 총무원에서 감찰 원장을 맡아 중앙에서 활동 하였으며, 미군정 당시에 불교 교단의 소유재산을 원활히 접수케 하는데 큰 공을 남기도 하였다. 한 편 김구(金九 1876년~1949년)의 경교장에 출입하면서 정부 수립의 준비기구인 민주의원에 불교대표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김구선생 피살 당시 경교장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현장을 목도하기도 하였으며, 김구장례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7년 김영수 총장의 요청으로 한 때 동국대학교에서 인명학을 강의하기도 하였고, 학사 신축공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6.25사변으로 중단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그의 일생에 또 한 번의 전환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 사찰에 남아 있던 일본 잔재를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든 사찰의 대처승을 절에서 축출하였다. 응송은 대처승이었다. 그와 일생을 함께 했던 부인은 배화전문에 다니던 신여성으로, 응송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응송이 대처승이 된 이유는 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일에서 물러나 대흥사 반야교 아래에 있는 백화사에서 머물며, 참선과 차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차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출가 시절 다각을 지냈던 경험을 살려, 다도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선이 차에 미친 영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봄이면 대흥사 근방인 진도, 강진에서 차 잎을 채취하여 몸소 차를 만들어 제다의 원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작은 다포를 만들어 차나무를 삽지하여 뿌리를 내리는 방법을 탐구 하였다. 한편 그는 수수한 정원에서 분재를 기르며, 자연을 벗 삼아 품천(品泉)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백화사 시절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요하고 깊은 선정에 들었던 시기였다.
응송은 1977년 3.1독립운동의 공로로 국가 독립 유공자에 추서되었으며 1990년 1월10일 광주 소재 극락암에서 열반,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그의 저술로는 1985년에 간행된 차에 대한 연구서인《동다정통고》와 불교 연구서로 미간본(未刊本)《선학연구(禪學硏究)》,《인도철학개요》,육필(肉筆)원고인《자서전(自敍傳)》이 있고 다수의 시문이《자사전(自敍傳)》말미에 남아 있다.
1950년대 불교정화 과정에서 많은 스님들이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당했다. 응송(應松) 박영희(朴映熙, 1893~1990) 스님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응송 스님은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한 이후 구한 말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며 교육자였다.
청소년기 항일 민병으로 활약했으며 만주에서는 독립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생을 항일정신과 독립의지를 품은 응송 스님은 불교 정화 운동 이후 대흥사 산내 백화사에 머무르며 다도 연구를 심화시켰다. 특히 초의선사 다법을 이어 한국 다도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데 힘썼다.
- 출처:
- 사단법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응송 박영희의 다도사상 - 스님은 독립운동가이자 다맥 중흥조”, 현대불교, 2015.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