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松巖)스님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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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송암(松岩, 1915~2000)
  • 생애·업적

스님의 본명은 박희덕(朴喜德)이다. 스님은 한말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朴泳孝)의 손자다.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해 죽자, 그 아들이 남의집살이로 전전하다가 출가해 운허(雲虛)라는 스님이 됐다. 갑신정변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봉원사에 주석하고 있어, 운허는 뒷날 봉원사 주지가 됐다. 그리고 운허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들이 박희덕(朴喜德)으로 어려서 봉원사 주지인 아버지가 주지로 있는 절 앞에서 이발소를 차려 이발사로 일하며 생활했다. 그러다가 그 역시 출가해 송암(松岩)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범패에 심취해 사라져가던 범패를 되살린 공로자가 됐다. 송암스님은 1915년 10월 14일 생이다. 부친이 스님이었기에 큰 걱정없이 자랐을 거라는 대부분의 추측과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고생을 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가 열한살 때 부친은 산림벌채에 손을 댔으나 돈을 몽땅 떼이게 되었고, 거기에 사기까지 당해 거의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어린 박희덕은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됐다. 열세살 무렵 어린 박희덕은 봉원사 앞에다 간이 이발소를 차리고 스님들의 머리를 깍아주는 일을 한다. 부친인 운허스님이 봉원사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봉원사 스님들은 모두 어린 박희덕에게 이발하기를 희망했고 덕분에 생활도 안정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박희덕은 문득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에서 한문공부만 해오던 터라 신식공부에 대한 열망이 생겼던 것이다.
'신식공부하면 사람버린다'는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희보명학교를 2학년에 입학해서 졸업하고 이어 경성상업실천학교를 진학한다. 그러나 유난히 총명했던 박희덕은 2년여만에 학교를 그만 두고 만다. 상업부기니 하는 회계법을 이미 다 떼어버린 터고, 한문 같은 교육 과정은 선생님이 오히려 그에게 묻는 실정이었고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매일같이 실시하는 근로봉사는 그를 지겹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성상업실천학교를 그만 둔 박희덕은 당시에 명동입구에 있던 경성호텔 사무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호텔이라는 곳이 박희덕의 정서와 어울리기 만무했다. 보름여만에 그만 둔 그는 무역회사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한달여만에 그만둔다. 그리고 세번째 취직한 곳 종로의 한 양복점이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20여일을 일하고 그만둔다. 남을 속이고 알랑거리는 장사꾼의 작태가 생리에 맞이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취직한 곳은 바로 머리를 깍는 일이었다. 세간을 건너 출세간으로 들어서기 위해 박희덕, 아닌 박송암 스님은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아홉나던 해 11월달에 출가한다.
입산하자 송암스님은 범패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절밥을 먹고 자란 터였고, 등너머로 보고 귀로 익힌 거나 진배 없었던 것이 범패이고 보면, 송암스님에게는 그 일이 가장 쉬운 것일수도 있었다.
오히려 스승을 재촉하여 하루에 두어 곡씩을 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던 송암스님은 월하(月河)스님과 그의 제자 벽해스님 등, 여러 스승들을 섭렵하면서 범패를 습한다. 송암스님이 본격적으로 범패승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출가한지 2년여정도 지난 스물한살 무렵이었다. 하루종일 재를 올리는데 한 스님이 소리를 잘못하여 스승에게 꾸지람을 받고 ?i겨난 자리를 스님이 채우면서였다. 30여분동안 틀린 스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소화해내자 어장스님이 송암스님을 칭찬하며 범패스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송암스님은 봉원사의 모든 재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사찰로부터 재를 요청 받을 때마다 뛰어가야 했고,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스님의 독특한 이력 중에 알려지지 않은 행적이 하나 있다. 바로 서른살 무렵에 일년여정도 관여했던 '극단 청춘극장'에서의 활동이었다. '극단 청춘극장'은 당시의 신파극과 같은 연극을 올리곤 하였는데, 여기에서 송암스님은 주로 스님 배역을 도맡곤 하였다.
청춘극장 시절의 송암스님의 인기는 웬만한 배우를 뺨칠 정도였다고 전한다. 기생들이 인력거나 택시를 보내 다른 절에서 그를 찾는 것처럼하고 납치를 도모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송암스님은 지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범패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스승인 이월하스님에게서 범패를 배운지 40여년만의 일이다. 당시 스님과 함께 범패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은 벽응스님이었다. 벽응스님은 송암스님에 비해 나이는 연상이지만 젊은 시절부터 함께 범패를 부르며 자웅을 겨뤘던 명인이기도 했다. 벽응스님은 지금도 매년 한번씩 신촌 봉원사에서 열리는 영산재 발표회에 참가해 범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청량하고 화려한 성음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는 송암스님의 범패 인생은 어린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평탄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더군다나, 일제시대 사찰령에 이해 범패가 금지되고, 또한 해방이후 대처승들에 대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신촌 봉원사에서 수행하면서 부처님 찬탄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범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약에 송암스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범패의 역사는 그 명맥이 거의 끊겼을거라고 말한다. 그 어렵고 힘든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오직 부처님 찬탄의 길을 걸어오면서 제자들에게 범패를 온전히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송암스님은 그의 스승 월하스님에게서 범패의 전과정을 가장 충실하게 전수받은 제자이다. 해서 현재 남아있는 범패의 15가지 짓소리는 물론이고 안채비 바깥채비 홋소리 등 일체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서 구전심수로 전해오면서 자칫 사라질 뻔했던 영산재 대부분의 과정을 재현해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바다 밑 제비집 한국 범패의 신 중흥조/ 송암스님
-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ㅅ ― 3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송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