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원
- 명칭 : 선학원(禪學院)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40 선학원 (전화번호 : 02-703-9654)
선학원의 공식 명칭은 재단법인 선학원(財團法人 禪學院)이다. 식민지 불교정책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족불교의 지도자 만해스님을 중심으로 저항의 기치를 올려왔고, 일제의 사찰령을 견제하며 수좌스님들이 임제종 운동의 전통을 의연히 수호해 온 불교계 독립운동의 터전이다.
일제의 사찰정책에 항거했던 선학원 조사스님들은 임제종 운동의 선풍을 이음과 아울러, 3·1운동으로 당시 옥고를 치르고 있던 만해 용운스님의 출옥에 대비하여 1921년 10월 4일 ‘조선불교 선학원 본부’ 상량식(서울 안국동)을 봉행하여 선학원을 건립했다. 두 달 후 출옥한 만해 용운스님을 중심으로 남전 한규 · 도봉 본연 · 석두 보택스님 등 민족불교 지도자들은 선학원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한국전통불교 수호와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다수 신도의 기부와, 임제종 인사동 포교당의 자재와 기와를 기부 받아 안국동 40번지에 수행도량을 건축했고 1922년 3월 30일에‘선우공제회’는 선풍진작과 민족불교의 자주·자립적 기치를 사명감으로 삼아 창립되었다. 민족불교 수호를 위한 임제종 운동의 숭고한 의지를 계승하는 한편, 수좌스님들의 안정된 수행도량을 마련하고 대중포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설립된 ‘선우공제회’는 자립자애와 중생구제의 기반을 세운 한국 불교계의 희망이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모든 사암(寺庵)은 사찰령(寺刹令)과 사법(寺法)의 직간접적인 통제를 받아야 했던 시대였다. 본말사의 주지취임을 포함하여 법회개최를 비롯한 동산·부동산 변동의 소소한 내용까지 일제 총독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선학원 스님들은 '사(寺)'나 '암(庵)'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항하는 한편 후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판계의 수도원(修道院) 선학원은 일제의 여러 탄압과 분란책을 이겨내며 견디어 왔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6년에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하여 선학원은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5년 후인 1931년에 적음스님이 이를 인수하여 재건의 시기를 맞이했다. 만공스님과 여러 신도들의 기부로 재원을 확충하여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냈다.
1935년 3월 7일에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키기 위해 ‘조선불교전국수좌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선종종무원’을 발족시켰다. 선학원은 조선불교선종의 종정으로 만공, 한암, 혜월스님을 추대하였다. 1941년 2월 26일부터 10일간 승가의 청정승풍과 불조 이래의 전통선맥을 선양하기 위해 만공, 한영, 동산 등 청정비구 34인이 참석한 ‘유교법회(遺敎法會)’를 선학원에서 개최하였고 ‘범행단’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1973년 지하 1층, 지상 4층의 현대적 대가람으로 중창되었고, 선의 실수(實修)나 보급을 위하여 상설 선원(禪院)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531개의 사암을 가지고 있으며, 산하에 선우회(禪友會) 등의 신행단체를 두고 있다.
월간지 『선원(禪院)』을 간행하고 있으며, 종로어린이집·반포어린이집 등의 시설도 운행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600개소의 분원을 보유하고 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재단법인 선학원(홈페이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학원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1. 선학원 설립배경과 의미 2019년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2. 설립조사와 역대 이사장 2020년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3. 선학원 정관으로 본 관계 변화 2020년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4. 승려법·분원관리규정 변화 2020년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5. 자민 스님 인터뷰(끝) 2020년
- 불교저널 선학원 활동의 주체인 전국 수좌들의 조직체 ‘선우공제회’ 2023년
- 불교저널 선학원 설립정신, 활동·가치 알리려 창간한 기관지 2023년
- 불교저널 '선원' 지(誌), 선 중흥·대중화 앞장…선학원 설립 정신 천명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