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곡혜순(梅谷慧淳)
법호·법명 : 매곡혜순(梅谷慧淳)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는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의 법사(法嗣, 제자)로 학명계종 선사와 함께 1938년 정읍 내장사를 중창한 스님이다.
내장사는 원래 내장산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靈隱寺)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幼海禪師)가 세운 내장사(內藏寺, '백련사(白蓮寺), '벽련암(碧蓮菴)'이라고도 전함)가 있었다.
1539(중종 34)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났다. '승도탁란사건'은 승과를 없애는 등 억불정책을 펼쳤던 중종이 승려들을 환속시켜 군적에 넣도록 한 것에 대해 호남지역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했던 사건으로, 중종이 이에 크게 분노하여 내장사와 영은사를 도적의 소굴이라 칭하며 소각을 명함에 따라 불태워졌다.
1557년(명종 12) 희묵대사(熙黙大師)가 영은사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는데, 이곳이 현재의 내장사 전신이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을 1639년(인조 17) 부용대사(芙蓉大師)가 중수하고 불상을 도금했으며, 1779년(정조 3) 영운대사(暎雲大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했다.
1925년 학명선사(鶴鳴禪師)가 옛 내장사 자리인 벽련암으로 옮겨 벽련사라 하고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그러나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77년까지 대규모 중건을 통해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매곡혜순(梅谷慧淳)선사 약력
- 출생과 은사 이연(1902 ~ 1923)
출생: 1902년(광무 6년) 3월 10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속성은 정(鄭)씨로 아버지는 정인섭(鄭寅燮) 공이며 어머니는 영월 신씨입니다.
성장과 발심: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불교를 깊이 신앙하던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자랐습니다. 자비로운 성품으로 형제들을 잘 보살피던 막내아들이었으나,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을 세웠습니다.
출가: 21세가 되던 1922년(임술년), 고향을 떠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련(寶蓮) 장로를 은사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을 혜순(慧淳)이라 하였습니다.
구족계 수지: 이듬해인 1923년 3월,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일봉(一鳳)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 참선 수행과 ‘매곡’ 법호 수지(1923 ~ 1929)
내전 연구: 출가 후 스님은 유점사 강원에서 불교 경전(내전)을 6년간 깊이 연구하셨습니다. 언제나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참선을 좋아했으며, 사념처관(四念處觀)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捨敎行禪(사교행선): 27세가 되던 1928년(무진년) 봄, 경전 공부를 접고 오직 참선에만 몰두하기 위해 남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 명산을 돌며 고승들을 참문(參問)하였습니다.
학명 선사 친견: 28세가 되던 1929년(기사년) 2월, 호남의 명찰인 내장사(內藏寺)에서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이었던 학명(鶴鳴) 선사를 친견하였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깊이 통해 학명 선사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고 매곡(梅谷)이라는 법호를 받으며 입실(入室) 제자가 되었습니다.
- 내장사 중창과 선농불교 실천(1930년대 ~ 1945)
내장사 7차 중창주: 이후 10여 년 동안 교학과 실천(理事)을 함께 닦으며 수행에 힘써 큰스님의 지위(법계 대종사)에 올랐습니다. 내장사 주지를 3기(三期) 연임하는 동안, 허물어져 가던 법당과 협소한 요사채를 대대적으로 새로 지었습니다. 특히 1938년에는 사찰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여, 오늘날 내장사의 기틀을 닦은 ‘제7창 중창주’로 기록되었습니다.
선농병행(禪農倂行)의 모범: 스님은 백양사와 내장사에서 강조되던 선농불교(수행하며 일하는 전통)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 내장사 인근 쌍암리에 농원을 설치했습니다. 스님을 따르는 대중들이 스스로 노동하여 식량을 조달하는 자급자족의 수행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 해방 후 불교 재건과 교육 구국 운동(1946 ~ 1954)
종단 행정의 중책: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승단 조직이 개편되자, 45세가 되던 1946년(병술년) 봄에 불교중앙총무원 교무부장에 취임하여 해방 공간의 불교 재건에 나섰습니다.
전북 불교의 수장: 이어 전북불교교무원장(현 교구본사 주지급)으로 추대되어 전라북도 내의 사찰들을 총괄 통리하였습니다.
현대식 교육 기관 설립: 인재 양성이 곧 구국이라는 신념으로 재단법인 전북교원(全北敎園)을 조직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김제 금산중학교와 금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평생의 전력을 다했습니다. (※ 정읍 지역의 영생학원 설립 등에도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조계종 및 동국대 이사: 1954년(갑오년) 3월에는 다시 불교중앙총무원 총무부장과 동국대학교 재단이사를 겸임하며, 종단 재단의 완성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 왜정이 제정한 사찰령(寺刹令)의 폐단을 타파하는 등 불교 발전에 앞장섰습니다.
- 은거와 열반(1954 ~ 1955)
정혜사 은거: 1950년대 중반, 불교계 내부에 비구-대처 승단 간의 극심한 내분(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크게 한탄하며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전주 정혜사(定慧社)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참선에 몰두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과 임종게: 1955년(을미년) 7월 23일, 홀연히 병을 얻어 몸이 불편해지자 목욕재계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상좌(제자)인 금파(錦波) 스님을 불러 아래와 같은 마지막 임종게를 남기셨습니다.
- 임종게(臨終偈)]
元來不知處(원래부지처) : 원래 머무는 곳을 알지 못했고
元來不知來(원래부지래) : 원래 오는 것도 알지 못했으며
不知去(부지거) : 가는 것 또한 알지 못하네.
畢竟如何(필경여하) : 필경에 이것이 어떠한가?
喝(할)! : (할을 한 번 크게 외치시고)
完山七峰屹(완산칠봉흘) : 완산칠봉은 우뚝 솟아 있고
寒碧樓水流(한벽루수류) : 한벽루 아래 강물은 흘러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