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경순스님(景順, 1925生, 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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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자(大慈) 경순(景順)은 25세에 복전암 주지를 맡아 대전 최고의 비구니 암자로 키우는데 평생을 바쳤으며, 동학사가 비구니사찰로 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5 충북 보은 출생
1931 법주사 여적암에서 도학(道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32 서울 돈암동 적조암으로 입산, 박성기 노스님의 보살핌으로 성장
1932 경시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33 서울 안국동 화광초등학교 입학
1939 화광초등학교 졸업, 15세까지 청룡암에 머물며 화광야학에서 수학
1945 서울 보문사 불교니승전문학원(佛敎尼僧專門學院) 입학, 수옥스님께 중강
1946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47 탑골 미타사에서 박고봉(朴古峯) 선사께 참회계 수계
1950 서울 보문동 불교니승전문강원 1회 졸업
1951 대전 보문산 복전암 주지 취임
1952 고봉 큰스님을 모시고 대전 복전암 원통선원 개원
1954 대전 복전암 원통선원에서 동안거 성만
1959 복전암 대웅전과 요사채 신축
1962 대한불교조계종 선학원에 사찰 등록, 농림부장관 산림녹화 유공 수상
1968 대전경찰서장 청소년 선도 유공 수상
1981 동학사 주지
동학사 주지 사임
1983 (재)선학원 이사
1985 조계종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 1, (9, 10, 11, 12, 13, 14, 17 특 2회 존증아사리)
2022년 현재 복전암 주석
문중 법기문중(法起)
수행지침 염불, 참선
수계제자 법진(法眞)·법성(法性)·명원(明圓)·법일(法一)·보현(普賢)·법찬(法贊)·성원(性源)·보관(普觀)·보상(寶常)·보안(寶眼)·보운(普云)·보명(普明)·보림(寶林)·보천(普天)·보중(普中)·보공(普空).보련(普蓮)·보성(普誠)·보월(寶月)·보여(普如)·보영(普榮)·보인(普仁)·보장(寶藏)·보춘(普春)·보적(普寂)·보타(普陀)·보일·보견·보행·보우·보주·보전·보석·보길·보화·보민

활동 및 공헌

출가

[경순스님의 모습]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59
[복전암 보제루]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0
[복전암 큰방의 큰스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1
[복전암 복전선원]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3
[복전암 종각]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4
[복전암 전경]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368

대자(大慈) 경순(景順)스님은 1925년 5월 29일 충북 보은에서 아버지 이영훈과 어머니 이하성 사이에서 1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이상월이다. 불교신자였던 아버지는 삼백석지기 대가(大家)의 삼형제 중 막내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약국집 맏딸이었다. 두 분은 보은읍에서 살았는데, 조부께서 작고하시고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어렵게 4남매(위로 오빠와 언니, 아래로 여동생)를 키우셨다.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크고 작은 일들을 스님들과 의논했는데, 어느 날 스님께서 아이를 출가시키라는 조언을 하셨다. 동생과 함께 법주사의 말사인 여적암에서 삭발을 했는데, 스님의 나이 6세, 동생은 3세 때였다.

여적암은 높은 산에 위치해 있었는데, 2km쯤 내려가면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면 ‘고향집에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집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고 한다. 해우소(解憂所)에 숨어 어머니와 올라왔던 오솔길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급기야 앓아눕고 말았다. 걱정이 된 여적암의 스님이 한의사를 모셔왔다. 의원은 맥을 짚어보고 어린 스님의 귀에 대고 물었다. “원이 무엇이냐.”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와 집이 그리웠던 것이다. 한달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어린 스님을 끌어안고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최초 비구니전문 강원인 보문사비구니강원 제1회 졸업생

이듬해 봄, 어린 경순스님은 대전에서 스님과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적조암에서 지내게 되었다. 적조암의 노스님 비구니 박성기 스님은 출가 전 한일강제합방이 된 후 자결한 영의정 이종근 대감의 부인이셨던 분이다. 정경부인이었던 노스님은 삼천 석을 가지고 적조암에 들어와 일생 동안 고종황제와 남편의 왕생극락, 나라의 독립을 기도하며 사셨다. 노스님은 어린 경순스님을 관철동 화광초등학교에 보내주셨고, 경순스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후 경순 스님은 성북동 청룡암에서 7년 동안 살다가 열아홉 살 때 신설동 탑골승방인 보문사로 갔다. 보문사로 간 이유는, 그곳에서 불교니승전문강원을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승'이란 비구니스님을 말하며, 보문사 은영스님이 최초의 비구니전문강원을 정식으로 세웠다. 경순스님은 강원의 제1회 졸업생이다.

강원시절 에피소드

강원 시절,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 오대산 지장암에서 머문 적이 있다. 그때 상원사의 한암스님께 화두를 타러 도반(道伴) 스님들과 함께 상원사까지 수km를 걸어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입승(立繩)스님이 “비구니들이 어디를 펄럭거리며 다니느냐. 근처에는 얼씬대지도 말라”면서 그와 도반 스님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남녀 스님이 함께 공부하지 않는 것은 불가의 엄격한 원칙이었다. “그때 마침 점심 공양 시간이라 배가 몹시 고팠는데, 물 한 모금 못 얻어 마시고 돌아서야 했다. 돌아서는데 발이 부르터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났다. 상원사 비구 스님 40명이 몰려와 지장암 비구니 스님들을 보려고 울타리에 매달렸다가 담이 무너졌다. 그 바람에 장독이 다 깨졌다. 다음날 아침 어른 스님들은 ‘젊은 스님들 데리고 있다가 큰일 나겠다’며 우리 비구니 스님들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내쫓기듯 지장암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야 했죠.”라고 회고 했다.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10만 독씩 외우다

스님은 16세 때부터 21세까지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10만 독씩 외웠다. 당시 20명 정도의 대중이 함께 살았는데, 경순스님이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외면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큰스님께서 미래계획이 무엇인지 물으셨다. 그날 경순스님은 어리고 고달픈 마음에 큰스님께 “남의 마음속을 알고 싶습니다.” 하고 여쭈었다. “하루에 10만 독씩 '옴마니밧메훔' 을 10년 동안 부르면 된다.” 고 하여 경순스님은 매일 ‘옴마니밧메훔' 을 외우기 시작했다. 3년이 흐르자 스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이 맑아져서 어떤 생각을 하면 무엇이든지 금방 알게 되었고,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어졌다. '옴마니밧메훔'은 스님에게 많은 것을 얻게 해주었다. 5·16 군사정변 직전 쌍용자동차가 고비를 맞은 적이 있는데, 이때 김재원회장은 경순스님의 권유로 하루에 '옴마니밧메훔 3만 독을 100일 동안 외웠다. 그러는 사이 김 회장은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경순스님은 절을 하거나 주력을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너의 마음을 찾아라”

그러던 어느 날, 고봉스님께서 밤에 미타사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고봉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학감은 “학인이 건방지게 어디를 가느냐.”호통쳐 몰래 큰방 부엌에서 들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마음의 심월은 어디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주는 것도 아니다. 원래 있는 것이다. 칠팔월 장마에 운무가 잠시 흩어진 사이 보이는 빛이 여우 빛이다. 그것이 심월인데 심월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여래의 빛이다. 개는 하늘의 달을 보라, 해를 보라 해도 아래의 먹을 것을 찾는다. 삼척동자는 아버지가 달달 하면 손가락 끝의 달을 본다. 꼭꼭 숨어있는 여래를 찾아라. 그것이 극락이고 도솔천이다. 반복적인 생활이 원칙이라 하더라도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다. 스님은 그때 그동안 내가 빛을 따라 다니기만 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다. 다음날 고봉 큰스님은 '대자(大慈)' 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화두를 잡으라고 했다. 경순스님은 이때부터 화두를 잡기 시작했는데, 몇 년 동안 계속해 온 '옴마니밧메훔'을 버리는데 3년이나 걸렸다.

함께 출가했던 동생의 죽음

강원 졸업식 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1·4후퇴 때 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피난을 가, 대구 정혜사에서 17명의 도반 스님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산 수덕사 견성암에 있는 동생이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약국을 하는 오빠가 약을 한아름 싸줘서 짊어지고 수덕사로 갔지만, 동생은 사흘 전에 이미 입적(入寂)한 상태였다. 그때 동생 나이 23세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화장터에 가서 밤새 울었다.

25세에 복전암 주지가 되다

그 즈음, 그는 평생의 스승이라 여기던 고봉스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절을 구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치료를 받아야 하니, 와서 주지를 맡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고봉스님이 그를 믿고 맡긴 절이 지금의 복전암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25세에 복전암 주지가 되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비구 선사 고봉스님께서 16명의 비구니스님들과 같이 복전암으로 피난을 오셨고, 이를 계기로 복전암에 원통선원이라는 선방을 운영하였다.

“당시 민심이 흉흉했어요. 전쟁 상황임을 감안한다 해도 텃세가 무척 심했고, 거지와 건달패를 비롯해 일부 상이용사의 횡포까지 더해져 비구니 스님들이 생활하기가 어려웠죠. 그래도 부처님께 의지해 겨우겨우 탁발을 하고 배급을 받아 살아갔어요. 우리 스님들은 불이나 때고 쌀만 있으면 되잖아요. 다른 욕심이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 어렵지만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었죠. 그러던 중 고봉스님이 비구니 스님 16명을 데리고 복전암으로 돌아와 식구가 30여 명으로 늘어났어요.”경순스님은 이분들을 돌보느라 발이 부르트도록 탁발을 다녔지만 마음만은 환희로웠다. 이후에도 많은 비구니가 복전암을 거쳐 갔다고 한다.

복전암은 현재의 도량으로 터를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복전암의 땅은 학교부지였고, 건물주는 따로 있었다. 복전암 부지가 공원묘지에 속해 있어서 마음대로 집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400개 정도 묘를 이장하고 밤나무 200그루와 잣나무 100그루를 심었다. 법당과 삼성각은 32세 때 비로소 지었고, 근래에 들어서 보제루를 지었다.

경순스님은 상좌만 80명 가까이 되는데, 비구니계에서는 드문 경우라 하겠다.

동학사를 비구니사찰로 만들다

1981년 경순스님은 동학사의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훌륭한 두 스님을 두고 세 번째 후보였던 경순스님에게 주지 발령이 떨어지자 일련의 소란이 벌어졌다.

동학사는 경순스님이 어린 시절에 잠깐 살았던 절이었다. 동학사는 정화 운동 당시 대처승이 살던 절이었고, 미타사는 비구니 처소로서 70~80명 정도의 비구니스님들이 살고 있었다. 고봉스님이 복전암에 계실 때 서원 (총무원장) 스님 등 비구스님 다섯 분이 내려와 한 달 반가량 미타사에서 지내셨다. 신광사, 마곡사, 동학사 등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경순스님은 법원, 경찰서, 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면서 앞장 서 소개하고 인사하며 심부름을 해드렸다. 정화 결과 신광사를 받아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선반도 떼어가고 빗자루도 가져갔다. 절 살림에 필요한 것이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스님은 이불, 곡식, 푸성귀 등의 필수품들을 급한 대로 모두 챙겨드렸다. 그때 비구 서원스님이 감사의 뜻으로 경순스님에게 손목시계를 풀어주고 가셨다고 한다.

정화 후 서원스님이 동학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구와 비구니가 한 산중에 못 산다며 나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경순스님이 서원스님께 청탁하여 비구니스님으로 주지 물망에 대현스님과 경순스님이 올랐다. 경합 끝에 경순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지만 고봉 큰스님 병환치료와 복전암 선방 운영 중이라 대현스님에게 주지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학사는 수량이 풍부하고 평지인데다 또 도시와 가까워 비구니 처소로 적격이어서 10여년 후 일현스님의 협조로 비구니사찰로 만들었다. 주지 소임을 2년 정도 한 뒤 1983년 선학원 복전암 허가가 나자 곧 동학사 주지직을 사임하였다.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마음껏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킬 역량 있는 스님이 뒤를 잇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직을 역임하다

1985년부터 25년간 전국 비구니회 부회장직을 역임한 바 있는 스님은 복전암 스님이 아니더라도 비구니 스님들은 모두 한 식구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생면부지의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신분을 알 수 없어서 그냥 화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물어물어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병원 영안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시체들을 일일이 다 확인해 스님의 시신을 찾아낸 후, 각고의 노력 끝에 신분을 밝혀내 가족을 찾아주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이후 사흘 동안 심하게 앓았다.

스님은 "스님네들이 서로 아끼고 위해줘야 합니다. 스님들이 양로원에 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제가 60대만 같아도 스님들을 위한 양로원을 하나 지어 운영해보겠는데,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천일기도 회향날 부처님 이적

1989년 천일기도 회향 날이었다. 며칠간 비가 계속 내리는 중이었고, 그날도 200mm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회향식이 걱정된 스님은 밤 12시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1시에 목욕재계하고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물동이 째 쏟아 붓듯이 내렸다. 목탁을 잡고 부처님을 부르다가 목탁을 내려놓고 부처님께 사정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날이 새고 아침 7시가 되자 갑자기 비가 뚝 그치고 햇빛까지 비췄다. 그날 수많은 신도들이 참석하여 천일기도 회향은 성대히 잘 치러졌다. 스님은 범패를 하는 10명의 스님들이 보는 앞에서 사다라니와 상주권공을 하였다.

그런데 회향식이 끝난 후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대전 중앙시장이 모두 물바다가 되는 등 온통 물난리가 났는데, 복전암 근방에만 비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순스님은 부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형무소 포교 중 죄수들을 감동시키다

스님이 형무소에 법문을 갔을 때의 일이다. “저는 큰 형무소에서 왔고, 여러분은 작은 형무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곳이며, 그동안의 죄를 닦는 곳입니다. 우리는 생사무대에 나와 언제 죽을지 모른 채로 살 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밥 먹여주고 잠 재워줄 때 공부를 하십시오. '인신난득(人身難得) 장부난득(丈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했는데,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입니다. 부디 갑갑한 나쁜 마음 내지 말고 '이 나이 먹도록 내 마음 찾지 못하고 무엇 했느냐.' 하고 생각하십시오. 간수들은 채근하는 법사라고 생각하십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꼿꼿이 앉아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십시오. 이 집에서 나오고 싶으면 '관세음보살' 을 매일 10만독씩 부르십시오. 그렇게 100일이면 귀인을 만나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칠흑통에 갇힌 마음을 발견하고, 바늘구멍을 통해서 광채를 본다면 문이 열립니다. 부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제천(諸天)이 여의식(與衣食)이라 선신들이 약속하셨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일제히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관건은 참선이다

무엇보다 시주의 은혜를 잊지 않고,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경순 스님은 늘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님은 21세부터 참선을 했는데, 참선을 하면 지금도 잊었던 글이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스님은 '염불은 내쏟는 것으로 빛을 쫓는 것과 같아 이름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참선은 가라앉히는 것이다.' 라며 참선을 권한다.

인욕보살이 되어야 한다

또한 스님은 참선, 염불, 범패에도 능하다. 못 만드는 꽃이 없을 정도로 솜씨가 좋고, 직접 가사를 지을 정도로 바느질 솜씨도 대단하다. 먹물도 잘 들이고, 음식도 잘 하고, 떡방아를 찧어서 떡도 잘 만든다. 스님은 농사일을 비롯하여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일을 배우고 해왔기 때문에 절집 살림을 꾸려가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그런 스님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참는 것이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욕이라고 생각한다.

“피부로 느끼고 체험한 것은 정진으로 끝을 내야 합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인과응보라고 여기고 얼굴색도 붉히지 않고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요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정진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2023년 현재 세수 99세인 경순스님은 복전암(복전선원)에 주석 중이며, '이제 열반에 들 때가 되었다.' 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대중스님들께 모범을 보이고자 낮잠 밤잠을 삼가 조심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경순(景順)스님 본항목 경순(景順, 1925~) 景順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경순스님(景順,_192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경순스님(景順)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경순스님(景順) 도학스님(道學) ~의 수계제자이다
경순스님(景順) 법주사 여적암 ~에서 출가하다
경순스님(景順) 경시스님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경순스님(景順)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경순스님(景順) 보문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수학하다
경순스님(景順) 서울 청룡암 ~에서 수학하다
경순스님(景順) 공주 동학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경순스님(景順) 대전 복전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경순스님(景順)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9, 10, 11, 12, 13, 14, 17 특 2회 존증아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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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복전암 :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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