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진제(眞諦)스님

big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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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호·법명 : 진제법원(眞際法遠, 1934~)
  • 생애·업적

진제 스님은 1934년 경남 남해군 상동면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때 경남 남해군 해관암(海觀庵)에서 전 조계종(통합종단 이전) 초대 종정 설석우(薛石友) 스님을 친견한 것이 출가의 인연으로 작용했다.
1954년 21세 때, 석우 스님이 “범부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이 세상에서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권유에 해관암으로 출가했던 것이다.
1955년 석우스님이 해인사 선원 조실로 가게 되자, 스님도 역시 해인사로 가서 사미계를 받고 해인강원에서 경전을 익혔다. 1956년 스님은 석우 스님을 따라 동화사에 가서 토굴에 앉아 대중 스님 몇 명과 일주일 동안 용맹 정진하였다. 1957년 24세 때 스님은 동화사를 떠나 운수행각 길에 올랐다. 태백산 동암(東庵)에서 두달 동안 홀로 각고의 정진을 했다. 이후 선산 도리사로 옮겨, 7, 8명의 납자와 동안거를 지내며 한철을 지냈다.
1958년 월내(月內) 묘관음사에 주석하던 향곡스님을 찾아 뵌 이후 2년 동안 제방을 행각하며 선지식들과 법거량을 나누었다. 1959년 26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면서 모든 잘못된 소견을 놓아 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공부하리라 작심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줄 눈밝은 선지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으로 해제하자마자 향곡 스님을 찾아뵈었다.
향곡스님은 진제스님에게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라는 화두를 주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해야겠느냐?” 라는 화두의 내용이었다. 스님은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두문불출 참구하였다. 1961년 28세 되던 해 가을, 드디어 “향엄상수화” 화두의 관문을 뚫었다. 스님은 다음의 오도송을 지어 향곡스님에게 바쳤다.

이 주장자, 아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 하누나.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그러자 향곡 스님이 물었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당황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자 향곡 스님은 “옳다, 옳다.” 하면서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설두 스님도 다른 공안에는 다 확연 명백하였으나 “일면불 월면불”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 하였듯이 진제스님도 이 공안에는 막혔다. 이 화두를 5년 동안 참구한 끝에 1967년, 스님의 나이 33세 되던 해에 확철대오 하게 되었다.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 정상 무너지고
벽력같은 일할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스님이 조실방으로 가서 향곡스님께 여쭈었다.
“불안과 혜안은 여쭙지 아니 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의 안목입니까?”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라.”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향곡 스님이 물어왔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이렇게 답하자 향곡 스님은 “옳고 옳다.”라며 전법게를 내렸다.

진제법원장실에 부치노라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니라.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이렇게 해서 경허 - 혜월 - 운봉 - 향곡으로 이어지던 법맥이 진제 스님에게 가 닿게 된다. 스님은 1971년 선학원 중앙선원 조실을 역임하면서 해운정사를 창건하였으며, 1981년에 향상선원을 열었다. 진제제일의(眞際第一義)를 깨닫고 은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민생의 한중심에 선원을 열고 속제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은 조주종심(趙州從諗) 선사도 80세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고향에 관음원(觀音院)을 세우고 개당을 했는데, 진제 스님의 경우에는 37세에 거대한 해운정사를 건립하고 그 조실로서 개당하여 금모선원의 가풍이 부산 땅에 드날리고 있는 중이다.
한편 스님은 1994년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맡아 금당선원의 납자를 제접했으며, 1996년 조계종 기초선원 조실, 2000년에 조계종립 봉암사 태고선원 조실, 2003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2012부터 2013년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와 제14대 종정을 역임했으며, 2013년부터 팔공총림 동화사 방장 소임을 맡았다.
※ 출처 :
아름다운 5060 한국의 대승 (27) - 진제법원(眞際法遠) (1934 ~ )
위키백과 진제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