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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igun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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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4-24T23:34:13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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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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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16: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File:6.인허스님2.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파일:6.인허스님7..jpg|섬네일]]&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File:6.인허스님3.jpg|400px|출처: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 ]]&lt;br /&gt;
&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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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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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11: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File:6.인허스님2.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File:6.인허스님7.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File:6.인허스님3.jpg|400px|출처: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 ]]&lt;br /&gt;
&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97</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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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09: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File:6.인허스님2.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File:6.인허스님7.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File:6.인허스님3.jpg|400px|출처: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 ]]&lt;br /&gt;
&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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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08: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p&gt;
&lt;hr /&gt;
&lt;div&gt;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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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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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03: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생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File:6.인허스님2.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File:6.인허스님3.jpg|400px|출처: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 ]]&lt;br /&gt;
&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File:6.인허스님7&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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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01: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p&gt;
&lt;hr /&gt;
&lt;div&gt;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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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59:1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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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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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54: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File:6.인허스님2.jpg|500px|섬네일|출처:[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File:6.인허스님3.jpg|200px|출처: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 ]]&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8C%8C%EC%9D%BC:6.%EC%9D%B8%ED%97%88%EC%8A%A4%EB%8B%983.jpg&amp;diff=1671</id>
		<title>파일:6.인허스님3.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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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52:43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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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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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6.인허스님2.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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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48:56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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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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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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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44: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56</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56"/>
		<updated>2022-06-25T08:43: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54</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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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42: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사찰=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52</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52"/>
		<updated>2022-06-25T08:41: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6.인허스님.jpg]]&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8C%8C%EC%9D%BC:6.%EC%9D%B8%ED%97%88%EC%8A%A4%EB%8B%98.jpg&amp;diff=1647</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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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39: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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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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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38: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39</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39"/>
		<updated>2022-06-25T08:34: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 &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03</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603"/>
		<updated>2022-06-25T08:16: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97</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97"/>
		<updated>2022-06-25T08:15: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3. 활동 및 공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92</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92"/>
		<updated>2022-06-25T08:13: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89</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89"/>
		<updated>2022-06-25T08:12: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생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D%97%88%EC%8A%A4%EB%8B%98(%E5%8D%B0%E8%99%9B,_191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86</id>
		<title>인허스님(印虛, 191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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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11: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새 문서: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 {{인물정보 |표제= 인허(印虛)스님 |사진= |법명= 인허(印虛) |속명= 방정옥(方正玉) |본관=...&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인허(印虛)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 인허(印虛)&lt;br /&gt;
|속명= 방정옥(方正玉)&lt;br /&gt;
|본관= 청주(淸州)&lt;br /&gt;
|출생= 1911. 12. 1&lt;br /&gt;
|입적= 2004. 12. 30&lt;br /&gt;
&lt;br /&gt;
|주소=전북 정읍시 쌍암동 463&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인허스님은 출가 전 내장사 복구불사에 일조하고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amp;lt;pre&amp;gt;1911 충남 예산 출생&lt;br /&gt;
1960 전북 내소사 지장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한국의 비구니문중에는 ‘지승’스님으로 나와 있다. 한문은 없다.)&lt;br /&gt;
1961 내소사에서 혜안(慧眼)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62 내소사에서 혜안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2004.12.30. 성불암에서 입적&lt;br /&gt;
(http://www.jnews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66)&lt;br /&gt;
&lt;br /&gt;
* 문중 : 계민(戒珉)문중 &lt;br /&gt;
* 생활신조 : 덕을 닦아야 한다.&lt;br /&gt;
* 취미 : 독서&lt;br /&gt;
* 수계제자 : 자인·자윤&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영영암(英煐庵) 인허(印虛)스님은 1911년 12월 1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에서 아버지 방한두와 어머니 이태고심(불명)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성이며, 이름은 방정옥이다.&lt;br /&gt;
 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인허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소사 혜안스님께서 하안거 결제 때, 원각선원의 문을 닫고 인허스님을 앞세워 내장사 복구 불사를 시작하여 동짓달에 모두 끝마쳤다.&lt;br /&gt;
 &lt;br /&gt;
내장사의 역사&lt;br /&gt;
 인허스님이 복구 불사에 일조를 한 내장사는 660년(백제 의자왕 20년) 유해(幼海)의 초창(初創)으로 세워졌으며, 현재의 사찰은 본래 영은사(靈隱寺) 자리인데 636년(백제 무왕 37년) 영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은조사(靈隱祖師)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절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셋째 자제와 함께 수행할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3&lt;br /&gt;
&lt;br /&gt;
[스님이 복원한 내장사 대웅전 앞]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4&lt;br /&gt;
&lt;br /&gt;
이후 1095년(고려 숙종 3년) 행안선사(幸安禪師)가 건물을 중창했는데, 1539년(조선 중종 34년)에 조령(朝令)으로 소각되었다. 1557년(명종 12년) 희묵(希默)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수축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으며, 1639년(인조 17년) 부용(芙蓉)스님이 절 건물을 개축하였다.&lt;br /&gt;
 한국 최고의 가을 산을 자랑하는 내장산의 한가운데 위치한 내장사는 내장산과 화려한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내장사의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수령 50~200년짜리 단풍나무 터널은 내장산 단풍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또 내장사를 중심으로 갈색의 굴참나무, 붉은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붓으로 붉은 물감을 무수히 찍어 놓은 듯하다.&lt;br /&gt;
 내장사는 백제 무왕 636년에 영은조사가 내장산 어귀인 부도전 일대에 건설한 50동의 큰 절이었다. 건축 당시에는 영은사로 불리었다. 지금의 내장사 어귀인 부도전 일대가 본래의 영은사 절터였다.&lt;br /&gt;
 영은조사는 내장사 불사를 한 이듬해 묵담 큰스님을 모시고 수륙재를 올리기 위해 권선을 다니다가 성불암 골짜기에 와서 보니 조용하고 공부하기에 좋은 터라 생각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인허스님은 속가의 처사님이 54세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산문에 들어섰다. 그 뒤를 이어 스님의 막내딸이 보덕사로 출가를 하였다.&lt;br /&gt;
 인허스님은 세수 50세 되던 해에 부안 청일암에 계시던 지선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하였다. 스님이 재가 불자로 있을 때 내장사에서 법당 불사를 마치고 일주문 불사를 하려는데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서는 아침 첫차로 부안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lt;br /&gt;
 꿈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내장사 주지스님인 금파스님이 오더니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꿈 내용이 인허스님과 똑 같았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두 분은 노인이 꿈에서 시킨 대로 첫차를 타고 부안으로 향했고, 그 도중에 어느 거사가 스님에게 다가와서 “내가 보살님을 한 번 꼭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하고 반가워했다&lt;br /&gt;
이에 스님은 “왜 나를 만나려고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거사가 “저희 집 주인이 문루를 내장사에 시주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날 그 자리에서 불사를 시주하겠다는 권선을 받고 돌아와서 일주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인허스님은 1961년 3월 15일 51세의 늦은 나이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 화상에게 사미니계 수계를 받았고, 다음해에 다시 부안 지장암에서 혜안화상에게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도반스님, 상좌스님들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65&lt;br /&gt;
&lt;br /&gt;
&lt;br /&gt;
===만행===&lt;br /&gt;
스님은 계를 받고 난 뒤, 10년 동안 강원도를 무려 네 바퀴나 도는 만행을 계속하였다. 40세 때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이치를 세속에 머물며 깨달았는데, 모다라니 기도를 일념으로 하여 효험을 보기도 했다.&lt;br /&gt;
 스님은 ‘덕을 닦아야 한다. 덕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안정되면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진정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보면 스님은 “마음을 열면 곧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lt;br /&gt;
 그리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한량없이 넓혀 놓으면 바로 그것이 덕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다. 고 강조한다. 또한 “마음을 비운 곳에 덕을 베풀면 그것이 성불의 길이 되고, 덕을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그것이 곧 망상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넓히면 비워지는 것이고, 공(空)하면 저절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고 덕을 닦아야 한다. 무심해야 하며, 무심한 가운데 부지런히 덕을 닦고, 그 무심한 가운데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불암에서의 방광&lt;br /&gt;
 스님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불암 도량에서는 3번의 방광이 있었다. 첫 번째 방광은 현재의 법당 자리를 환히 비추었는데 스님이 그곳을 파보았더니 반야선 같은 돌이 나왔다. 두 번째 방광은 그 돌 위에 부처님을 모시고 낙성식을 하는 날에 있었다. 세 번째 방광은 4월 7일 7시에 마치 영산홍 빛 같은 색으로 도량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백운이 이야기&lt;br /&gt;
 스님이 만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름을 백운이라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lt;br /&gt;
 하루는 스님이 관세음보살 모다라니를 써서 백운이에게 보여주며 ‘너와 내가 오늘 이것을 먼저 외우면 부처님한테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 상은 네가 꿈꾸는 것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스님의 입에서 나왔다.&lt;br /&gt;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백운이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내용인즉 자신의 뱃속에서 풍선이 커지는 것을 스님이 터뜨렸다는 것이다.&lt;br /&gt;
 백운이는 그렇게 모다라니를 한 번 읽은 공덕으로 잃어버렸던 맑은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백운이는 원래 너무나 얌전하고 정직한 아이였는데, 집착이 강해서 정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누구나 집착만 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하는 자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못하여 성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스님은 안타까워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당신들이 말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기준이 기능입니까, 남녀 입니까? 기능을 보존하는 사람을 찾는 것일 텐데 왜 옛 문헌에 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까?” &lt;br /&gt;
스님은 그렇게 엄포를 놓고 관리소를 박차고 나왔다. 이를 분통스럽게 여긴 것은 비단 스님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이신 송암스님께서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문화재관리국에 동희스님의 이름을 넣고, 반환되면 다시 넣는 지루한 싸움을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계속 해오셨다. 범패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불교계가 인정해준 것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lt;br /&gt;
부처님이 좋고 염불이 너무 좋아서 걸어온 길이었다. 동희스님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한편 백방으로 애쓰고 계신 송암스님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lt;br /&gt;
스님은 송암스님에게 이수자로 등록이 안 돼도 좋으니 그냥 스님 곁에서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으나, 송암스님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재관리국과 싸워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1995년 동희스님을 영산작법 이수자로 등록시킨 것이다. 송암스님의 제자 사랑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lt;br /&gt;
&lt;br /&gt;
[좌탈입망한 인허스님] 사진출처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정읍신문, 성불암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입망’ 화제 (2005년)&lt;br /&gt;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99&lt;br /&gt;
전북일보, 비구니 선사 영암당 인허 스님 입적 (2005년)&lt;br /&gt;
https://www.jjan.kr/article/20050106141409&lt;br /&gt;
불교신문, 94세 비구니 인허스님 좌탈 정읍 성불암서 다비식 (2005년)&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3567&lt;br /&gt;
불교타임즈, 수행 열기로 가득찬 정읍 성불암 (2011년)&lt;br /&gt;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정읍 성불암===&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brahmavihara&lt;br /&gt;
 정읍 성불암은 지난 2004년말 좌탈입망한 비구니 인허스님이 1960대 초 창건한 작은 사찰이다.&lt;br /&gt;
정읍에서 내장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내장사 못미쳐 호수가에 자리잡고 있다.&lt;br /&gt;
현재는 상운스님이 주석하고 있으면서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하고 어린이 법당과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lt;br /&gt;
* 출처 :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성불암 대웅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인허스님 부도] 사진출처: 불교타임즈 https://bud1080.tistory.com/1579&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62~6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8.&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0. 347.&lt;br /&gt;
 &lt;br /&gt;
성불암 전북 정읍시 내장호반로 106 (쌍암동 463)&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8</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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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6:45: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혜돈스님은 1949년 5월 경북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세살때부터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약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화운사는 용인에서 매우 규모있는 사찰로서 선방외호와 농사 어린이포교 사회사업까지 늘 할일이 많다&lt;br /&gt;
2011년 3월에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서 열었다(조계종교육원) &lt;br /&gt;
혜돈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오늘날 스님들이 자긍심을 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7</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7"/>
		<updated>2022-06-21T06:44: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혜돈스님은 1949년 5월 경북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세살때부터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화운사는 용인에서 매우 규모있는 사찰로서 선방외호와 농사 어린이포교 사회사업까지 늘 할일이 많다&lt;br /&gt;
2011년 3월에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서 열었다(조계종교육원) &lt;br /&gt;
혜돈스님은 은사스님에 대한 깊은 존경심으로 오늘날 스님들이 자긍심을 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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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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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6:31: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혜돈스님은 1949년 5월 경북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세살때부터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 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2009년까지 운영하였고 현재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시민선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2011년 3월에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서 열었다(조계종교육원)&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5</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5"/>
		<updated>2022-06-21T06:29: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   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혜돈스님은 1949년 5월 경북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세살때부터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 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2009년까지 운영하였고 현재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시민선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2011년 3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이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 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4</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4"/>
		<updated>2022-06-21T06:24: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 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2009년까지 운영하였고 현재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시민선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2011년 3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이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 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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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3</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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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6:19: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선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지유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지명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 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2009년까지 운영하였고 현재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시민선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2011년 3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이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 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72</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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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6:16: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4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선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악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지유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지명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 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2009년까지 운영하였고 현재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시민선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br /&gt;
2011년 3월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이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종단 최초로 비구니 영어전문교육기관인 '국제불교학교'를 화운사에 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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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파일:혜돈(慧頓).jpg</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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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5:42: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MsUpload로 파일을 올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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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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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3:16: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화운사 불력=&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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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9</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9"/>
		<updated>2022-06-21T02:53: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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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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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2:21: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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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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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2:20: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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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6"/>
		<updated>2022-06-21T02:17: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5</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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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2:16: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활동 및 공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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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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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2:15: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  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가야만했다 &lt;br /&gt;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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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으며 &lt;br /&gt;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고 &lt;br /&gt;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고 상주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와 집안일을 돕게했다&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절에가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다니던&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2</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2"/>
		<updated>2022-06-21T00:46: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출  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lt;br /&gt;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lt;br /&gt;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lt;br /&gt;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 해,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lt;br /&gt;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lt;br /&gt;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lt;br /&gt;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lt;br /&gt;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lt;br /&gt;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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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461</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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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0:42: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lt;br /&gt;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lt;br /&gt;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안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 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lt;br /&gt;
그해,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lt;br /&gt;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lt;br /&gt;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lt;br /&gt;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lt;br /&gt;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도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함께 살수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lt;br /&gt;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lt;br /&gt;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lt;br /&gt;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인 정월대보름이 지난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디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곳을 떠올였다. 바로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 잠자기가 &lt;br /&gt;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lt;br /&gt;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lt;br /&gt;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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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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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0:08:0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lt;br /&gt;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lt;br /&gt;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안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 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lt;br /&gt;
그해,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lt;br /&gt;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lt;br /&gt;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lt;br /&gt;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lt;br /&gt;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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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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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lt;br /&gt;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lt;br /&gt;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안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 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lt;br /&gt;
그해,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lt;br /&gt;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lt;br /&gt;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lt;br /&gt;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lt;br /&gt;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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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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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1T00:06: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Sunjung: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lt;br /&gt;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lt;br /&gt;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안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 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lt;br /&gt;
그해,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lt;br /&gt;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lt;br /&gt;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lt;br /&gt;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lt;br /&gt;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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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입적 = &lt;br /&gt;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 ==&lt;br /&gt;
* 혜돈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amp;lt;br/&amp;gt;&lt;br /&gt;
&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 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지다&lt;br /&gt;
혜돈 (慧頓) 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lt;br /&gt;
세살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lt;br /&gt;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했다. 외지로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lt;br /&gt;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임을 중학교에 보내지안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읍내에 진학한 &lt;br /&gt;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일이 있으면 집안을 돕도록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어 절어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스님은 열여덟살이되던&lt;br /&gt;
그해,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lt;br /&gt;
그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lt;br /&gt;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사름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lt;br /&gt;
수원으로 향했다. 도착할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고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다&lt;br /&gt;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찿아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lt;br /&gt;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lt;br /&gt;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 &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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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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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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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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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lt;br /&gt;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lt;br /&gt;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lt;br /&gt;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lt;br /&gt;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lt;br /&gt;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lt;br /&gt;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lt;br /&gt;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lt;br /&gt;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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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혜돈(慧頓)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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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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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lt;br /&gt;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lt;br /&gt;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lt;br /&gt;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lt;br /&gt;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lt;br /&gt;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lt;br /&gt;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lt;br /&gt;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lt;br /&gt;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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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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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lt;br /&gt;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lt;br /&gt;
스님은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lt;br /&gt;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도 싫은 나머지 절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 살 되던 해 &lt;br /&gt;
친척 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 가서 며칠을 지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lt;br /&gt;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보내달라고  &lt;br /&gt;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 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lt;br /&gt;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lt;br /&gt;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 같은 저녁 공양을 하는 것으로 출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Sunjung</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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