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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igun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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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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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 1951生,_ 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 1951生,_ 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 상덕(常德)스님]] || [[성근(性根)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개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청암사]] || ~를 중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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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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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8:01: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 1951生,_ 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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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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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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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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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7:58: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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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 1951生,_ 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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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덕(常德)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常德, 1951~)|| 常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常德,_ 1951生,_ 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 상덕(常德)스님]] || [[혜법(慧法)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부석동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  | 상덕(常德)스님]] || [[혜명사]] || ~를 창건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8%B8%E5%BE%B7,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163</id>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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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7:44: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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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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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7:37: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활동 및 공헌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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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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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6:58: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8%B8%E5%BE%B7,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160</id>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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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6:57: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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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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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6:55: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8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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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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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5T06:51: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     ||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lt;br /&gt;
===득도 및 수계===&lt;br /&gt;
&lt;br /&gt;
1965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4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lt;br /&gt;
1973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lt;br /&gt;
&lt;br /&gt;
1974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lt;br /&gt;
&lt;br /&gt;
1981 서울 경국사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3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경력===&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2015년(현재)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현재) 청암사 주지&lt;br /&gt;
&lt;br /&gt;
2003년 ~ 2006년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식차마나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6년 우슈 단증 취득&lt;br /&gt;
&lt;br /&gt;
2007년 ~ 2015년(현재)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8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청암사승가대학전통음식연구회 이사장&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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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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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4T07:43: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상덕(常德)스님&lt;br /&gt;
|사진 = [[File:.jpg|200px]]&lt;br /&gt;
|법명 = 상덕(常德)&lt;br /&gt;
|법호 = 의진(義眞)&lt;br /&gt;
|속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본관 = 전주(全州)&lt;br /&gt;
|출생 = 1951. 10. 23&lt;br /&gt;
|출가 = 1965&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청암사승가대학(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 &lt;br /&gt;
|-&lt;br /&gt;
|1965 ||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3 ||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    &lt;br /&gt;
|-&lt;br /&gt;
|1974 ||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1981 || 서울 경국사 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lt;br /&gt;
|1990년 ~ ||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 || 청암사 주지&lt;br /&gt;
|- &lt;br /&gt;
|2003년 ~ 2006년 ||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2005년 ~ 2015년 ||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 ||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 ||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명성·수련·수법·수인·수완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lt;br /&gt;
===득도 및 수계===&lt;br /&gt;
&lt;br /&gt;
1965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4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lt;br /&gt;
1973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lt;br /&gt;
&lt;br /&gt;
1974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lt;br /&gt;
&lt;br /&gt;
1981 서울 경국사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3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경력===&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2015년(현재)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현재) 청암사 주지&lt;br /&gt;
&lt;br /&gt;
2003년 ~ 2006년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식차마나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6년 우슈 단증 취득&lt;br /&gt;
&lt;br /&gt;
2007년 ~ 2015년(현재)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8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청암사승가대학전통음식연구회 이사장&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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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덕스님(常德,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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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4T07:17: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새 문서: 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상덕(常德)스님      * 법 명 :...&lt;/p&gt;
&lt;hr /&gt;
&lt;div&gt;상덕(常德)스님_220303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722.03.02 21:22댓글 1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상덕(常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상덕(常德)&lt;br /&gt;
&lt;br /&gt;
* 법 호 : 의진(義眞)&lt;br /&gt;
&lt;br /&gt;
* 속 명 : 이상덕(李常德)&lt;br /&gt;
&lt;br /&gt;
* 본 관 : 전주(全州)&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51. 10. 23&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청암사승가대학&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1. 정의&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인 의정(義淨) 지형(志炯) 강백과 함께 청암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고 청암사 승가대학을 국내 굴지의 승가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 생애&lt;br /&gt;
&lt;br /&gt;
득도 및 수계&lt;br /&gt;
&lt;br /&gt;
1965 충남 개심사에서 성근스님을 은사로 득도&lt;br /&gt;
&lt;br /&gt;
1968 제7교구 수덕사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4 통도사 금강계단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보살계 수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학력&lt;br /&gt;
&lt;br /&gt;
1973 공주 동학사승가대학 졸업&lt;br /&gt;
&lt;br /&gt;
1974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 수료&lt;br /&gt;
&lt;br /&gt;
1981 서울 경국사법보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83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3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경력&lt;br /&gt;
&lt;br /&gt;
1984년 ~ 1987년 화운사승가대학, 청암사승가대학 중강&lt;br /&gt;
&lt;br /&gt;
1987년 ~ 1990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1990년 ~ 2015년(현재) 청암승가대학 강사&lt;br /&gt;
&lt;br /&gt;
1991년 ~ 1993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행자교육원 습의사, 갈마사&lt;br /&gt;
&lt;br /&gt;
1993년 ~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습의사&lt;br /&gt;
&lt;br /&gt;
2003년 ~ 2015년(현재) 청암사 주지&lt;br /&gt;
&lt;br /&gt;
2003년 ~ 2006년 동학사승가대학 총동문회장&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5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식차마나니계 갈마위원&lt;br /&gt;
&lt;br /&gt;
2006년 우슈 단증 취득&lt;br /&gt;
&lt;br /&gt;
2007년 ~ 2015년(현재) 청암사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lt;br /&gt;
&lt;br /&gt;
2008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청암사승가대학전통음식연구회 이사장&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직지사복지재단 이사&lt;br /&gt;
&lt;br /&gt;
2009년 ~ 2015년(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계 교수사&lt;br /&gt;
&lt;br /&gt;
2010년 ~ 2013년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2012년 ~ 2015년(현재) 사단법인 대한태극권협회장&lt;br /&gt;
&lt;br /&gt;
[이상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1569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삼현(三賢)&lt;br /&gt;
&lt;br /&gt;
* 저서 및 작품 :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1998)&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 외&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3.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의진(義眞) 상덕(常德)스님은 1951년 10월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아버지 이완영과 어머니 김계생(대덕화 보살) 사이의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상덕이다.&lt;br /&gt;
&lt;br /&gt;
무릇 법도를 세움에 있어서는 한 치의 틈도 용납치 않아야 하고, 하화(下化)에 있어서는 일신을 돌보지 않는 보살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마땅하리라.&lt;br /&gt;
&lt;br /&gt;
불법의 혜명을 이어감에 대원력(大願力)을 세우고, 불령산 아래 천년 고찰의 가람 청암사에서 그 뜻을 펼침에 20여 년을 한결같은 묵연함으로, 때로는 엄준하면서도 부드러운 외유내강의 수행자로, 어버이의 자상함으로 후학 들의 귀감이 되고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분이 바로 상덕스님이다.&lt;br /&gt;
&lt;br /&gt;
집안이 불교와 인연이 깊어서 스님들과의 왕래가 잦았던 터라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갔다. 특히 어머니 인 대덕화 보살은 불심이 남달리 돈독한 분이셨다.&lt;br /&gt;
&lt;br /&gt;
세속에서의 삶보다는 출가자로서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스님의 출가는 어렸을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모친의 남다른 불법에의 귀의와 굳은 신심은 이후로 스님의 수도 생활에 오롯한 지침이 되어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다.&lt;br /&gt;
&lt;br /&gt;
딸의 출가에 대한 어머니의 원력으로 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어머니가 문득 서산 개심사로 출가를 권유하셨다. 스님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스님은 그동안 어머니께 누누히 출가에 대해 들어왔기에 별다른 갈등이나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서산 개심사는 성능스님이 강주로 계신 비구니 강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고봉스님(청암사 강원), 대은스님 (화운사 강원), 성능스님 등 선·교를 겸한 분들이 각 강원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개심사가 적합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숙세의 인연이 무르익은 덕분인지 출가하기로 결정을 하자 스님의 마음은 무조건적이다시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더 나아가서는 “나 중노릇하러 간다.”고 자랑하며 개심사로 출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15세이던 1965년 음력 3월 15일 충남 개심사로 출가하여 열흘 만에 삭발했다. 그 당시 은사스님이신 성근(性根)스님은 오대산 육수암에서 정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스님이신 보인(寶仁)스님이 삭발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lt;br /&gt;
[사진출처] 현대불교 (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0666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삭발 후 큰방에서 스님들과 함께 기거하며 3년여의 행자 생활을 했고, 그 사이 염불과 예참 등을 익히고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배웠다.&lt;br /&gt;
&lt;br /&gt;
출가하고 1년이 넘어서야 뵙게 된 은사스님은 제방을 두루 다니며 공부하는 선객으로 가끔씩 들를 뿐이었고, 스님은 노스님(개심사 총무 소임)을 시봉하면서 열심히 공부해나 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대혜선사의 서장을 배우던 1967년 17세 되던 해에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비구니계는 후에 1974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수지하게 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개심사 강원 강주이신 성능(性能)스님에게 4년간 『금강경』 등을 수학하다가 강원이 폐강되자 1969년 가을 동학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앞으로 아름다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지형스님을 만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리고 1973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를 하던 중 경학을 더 깊게 연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가산 지관스님 문하에서 재강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지형스님에 이어 비구니스님으로는 두 번째로 지관스님의 전강 제자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보다 깊고 넓은 배움을 향한 노력은 삼선교 청룡암에서 정릉 경국사로 이어졌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모두 이수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 및 청암사 강원 중흥&lt;br /&gt;
&lt;br /&gt;
참된 수행자를 배출해야 한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화운사 강주로 있던 지형스님의 권유로 1984년부터 2년여 동안 화운사에서 중강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 정월 그믐에 지형스님과 함께 학인 16명을 데리고 평생의 수행 정진과 원력의 텃밭이 될 청암사로 들어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 인조 때의 대강백이었던 회암 정혜선사가 최초로 강원을 개설했고, 근세에 이르러 한영, 권상로, 고봉스님 등이 강석을 펼친 유서 깊은 전통강원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도반 지형스님과 함께&lt;br /&gt;
70년대 초반 고봉스님이 강석을 펴 우룡, 고산, 덕민스님 등이 공부를 했으나 그 후로 강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상덕스님과 지형스님이 강원을 다시 개원하면서 교학도량의 맥이 되살아난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 일행이 청암사에 당도했을 당시 청암사의 각 당우들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하여 비가 오면 대야를 받쳐놓아야 했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했으며, 축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방채인 육화료에 대중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아침에 수업이 끝나면 학인들과 함께 기둥과 마루의 찌든 때를 매일 양잿물로 닦아내고 솔과 걸레로 문질렀다. 그러고도 끝없는 보수 불사가 이어져 연일 울력이 계속되었는데, 스님은 늘 학인들과 동사섭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1인 3~4역을 해냈다.&lt;br /&gt;
&lt;br /&gt;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스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항상 대장부의 기상으로 당당했으며 철저한 신심으로 초연함 속에 지냈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강원&lt;br /&gt;
되는 것 안 되는 것 등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일이요, 부처님이 해결할 일이었기에 늘 기도를 통해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인 참 수행자의 모습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크고 작은 일도 늘 지형스님과 의논하여 함께 해나갔으며, 상대가 누구이든 먼저 주장하기보다는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깊이 인내하며 화합했다. 이러한 스님의 인내와 화합의 가르침은 때로는 학인들과의 수업을 통해, 때로는 몸소 실행을 통해 은은하게 배어나왔다. 학인들은 그런 스님의 모습만 보아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중창불사&lt;br /&gt;
&lt;br /&gt;
2003년 가을부터 청암사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상덕스님은 지형스님과 함께 육화료, 보광전, 정법루, 진영각, 극락전 등 보수공사와 선열당, 중현당, 종각, 백화당 신축에 이어서 교육관 건립과 일주문, 사천왕 이전 불사와 해우소, 그리고 대웅전 보수 불사를 완성했다.&lt;br /&gt;
&lt;br /&gt;
당시 120여명이 정진하는 청암사는 매년 여름 법화산림을 열었다. 전 대중이 4개조로 나뉘어 24시간 내내 &amp;lt;법화경&amp;gt;을 독송하는 법회다. 극락전 누수가 너무 심각해 나라에서 보조금 좀 받게 해달라고 빈 것이 법화산림의 기원이다. 주변에선 성스러운 부처님한테 그딴 걸 발원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졌다.&lt;br /&gt;
&lt;br /&gt;
[출처]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1987년과 1990년 조계종 제8회와 제11회 단일계단 사미니계 습의사를 지냈고, 1991년과 1993년에는 조계종 행자교육원 제1기, 5기 습의사를 지냈다. 또한 1993~1994년까지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습의사를 지냈으며, 1998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행자교육원 갈마위원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 경내&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논문으로는 「불교승가의 성립과 운영에 대한 소고」와 「능엄경의 여래장 사상에 대한 소고」가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명조(明照)·자목(慈穆)·해명(海明)·명학(明學)·명석·명경·명림·명관·명허·명율스님 등 10명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72~279.&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0.&lt;br /&gt;
&lt;br /&gt;
불교신문 2007.9.29.일자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3165 )&lt;br /&gt;
&lt;br /&gt;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청암사 및 승가대학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688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암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이다.&lt;br /&gt;
&lt;br /&gt;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lt;br /&gt;
&lt;br /&gt;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다.&lt;br /&gt;
&lt;br /&gt;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 강백과 의진상덕 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다.&lt;br /&gt;
&lt;br /&gt;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출처] 청암사 홈페이지 ( http://www.chungamsa.org/?page_id=10953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203 상덕(常德)스님.hwp&lt;br /&gt;
1.02M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400</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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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5:18: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시맨틱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총(聖叢)스님&lt;br /&gt;
|사진 = [[File:036 계수(桂修).jpg|300px]]&lt;br /&gt;
|법명 =  성총(聖叢)&lt;br /&gt;
|법호 =  벽산(碧山)&lt;br /&gt;
|속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본관 = 광주&lt;br /&gt;
|출생 = 1944. 3. 20&lt;br /&gt;
|출가 = 1967&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관음정사(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여러 사찰에서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관음정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聖叢)스님]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묘전(妙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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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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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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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5:17:13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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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속명=김정숙(金貞淑)&lt;br /&gt;
|본관=의성&lt;br /&gt;
|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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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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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 &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喜圓)스님]]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명안(明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미타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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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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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5:16:2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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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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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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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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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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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喜圓)스님]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명안(明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미타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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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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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5:14: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속명=김정숙(金貞淑)&lt;br /&gt;
|본관=의성&lt;br /&gt;
|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 &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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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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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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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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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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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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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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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희원(喜圓)스님]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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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명안(明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6</id>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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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5:14: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속명=김정숙(金貞淑)&lt;br /&gt;
|본관=의성&lt;br /&gt;
|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 &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희원(喜圓)스님] || 본항목 ||  || 희원스님(喜圓, 1951~)|| 喜圓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희원스님(喜圓,_195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묘전(妙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 | 희원(喜圓)스님]] ||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5</id>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5"/>
		<updated>2022-07-07T15:07: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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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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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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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 &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_220220_전영숙1차.hwp&lt;br /&gt;
465.50KB&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4</id>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4"/>
		<updated>2022-07-07T15:06: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속명=김정숙(金貞淑)&lt;br /&gt;
|본관=의성&lt;br /&gt;
|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1 ||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 ||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   &lt;br /&gt;
|1979 ||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실상(實相)문중 &lt;br /&gt;
|-&lt;br /&gt;
|생활신조||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_220220_전영숙1차.hwp&lt;br /&gt;
465.50KB&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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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3"/>
		<updated>2022-07-07T14:59: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희원(喜圓)스님&lt;br /&gt;
|사진=희원스님1.png|300px&lt;br /&gt;
|법명=희원(喜圓)&lt;br /&gt;
|속명=김정숙(金貞淑)&lt;br /&gt;
|본관=의성&lt;br /&gt;
|출생=1951. 7. 4&lt;br /&gt;
|출가=1966년&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51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9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_220220_전영숙1차.hwp&lt;br /&gt;
465.50KB&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2</id>
		<title>희원스님(喜圓, 195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D%AC%EC%9B%90%EC%8A%A4%EB%8B%98(%E5%96%9C%E5%9C%93,_195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2"/>
		<updated>2022-07-07T14:55: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새 문서:   법 명 : 희원(喜圓)  속 명 : 김정숙(金貞淑)  본 관 : 의성  출생년도 : 1951. 7. 4  주 소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미타사     ==정의==...&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법 명 : 희원(喜圓)&lt;br /&gt;
&lt;br /&gt;
속 명 : 김정숙(金貞淑)&lt;br /&gt;
&lt;br /&gt;
본 관 : 의성&lt;br /&gt;
&lt;br /&gt;
출생년도 : 1951. 7. 4&lt;br /&gt;
&lt;br /&gt;
주 소 :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미타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음성 미타사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51 충북 충주 출생&lt;br /&gt;
&lt;br /&gt;
1967 명안(明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8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동학사 강원 대교 졸업&lt;br /&gt;
&lt;br /&gt;
미타사 도로 불사&lt;br /&gt;
&lt;br /&gt;
1974 석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9 미타사 법당 불사&lt;br /&gt;
&lt;br /&gt;
1980 미타사 선원 불사&lt;br /&gt;
&lt;br /&gt;
1981 세등선원, 내원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2000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조성 봉안&lt;br /&gt;
&lt;br /&gt;
2004 현재 미타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lt;br /&gt;
생활신조 :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하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라.&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효섭(曉燮)·법농(法農)·원상(元常)·효찬(曉燦)·동화(東樺)·보선(菩禪)&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픔 몸 덕분에 출가 인연을 맞다===&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은 1951년 7월 4일 충북 충주시 봉방동에서 아버지 김승모와 어머니 경장호 사이의 2남 6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며, 이름은 김정숙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맹장수술을 했더니 복막염에 걸리고, 복막염이 낫고 나니 또 다른 병이 줄줄이 생겼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탓에 혹독한 고통을 받아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현대 의학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듣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두루 실행해 보았지만 특별한 차도가 없었다. 스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북 음성 미타사에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5일쯤 지났을까. 비몽사몽간에 허름한 옷을 입은 비구스님에게 불경을 받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 몸이 점차 좋아졌다. 기도 가피를 경험한 스님은 발심하여 백일기도가 끝나기 전에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백일기도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가피를 체험한 후 삭발염의를 했지만 병고는 떠날 줄 모르고 여전히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백일기도가 한 차례 끝나면 다시 백일기도를 거듭하였다. 강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기도가 곧 스님 생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님은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이룬다.’는 말씀을 수행지침으로 삼고, 아무리 몸이 아파 고통을 받더라도 평생 부처님 곁에서 살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lt;br /&gt;
&lt;br /&gt;
1971년 동학사 강원에 입학한 희원스님은 잦은 병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강원 생활을 마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치병에 걸려 치료를 포기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병마에 시달리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제대로 마실 수 없었던 시절 스님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lt;br /&gt;
&lt;br /&gt;
“저를 살려주면 부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은사이신 명안스님은 평생 동안 아픈 사람들을 거둬 보살피는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희원스님 또한 은사스님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기에 은사스님을 은사이기 이전에 부모님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불사로 미타사를 일신하다===&lt;br /&gt;
&lt;br /&gt;
희원스님은 1978년 도로 불사를 시작으로 1979년 미타사 법당 불사와 1980년 미타사 선원 불사를 하였다. 또한 수익금으로 스님들의 복지와 노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납골공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납골당 내에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을 조성·봉안하였다. 2012년에는 지하1층·지상 4층 규모로 39개의 병실과 151개의 병상을 갖춘 밝은언덕 노인요양원을 개원했으며, 2016년에는 문중의 역대 대표적 비구니 선사인 만성스님, 현행스님, 명안스님을 기리어 부도탑을 조성하였고, 2020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의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정경 (출처: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지장대불과 추모공원 (출처: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때에는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한 차례 중수하고, 고종 때 이원식 비구니가 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당시에는 유룡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원효대사의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유룡사가 퇴락한 것을 보고 중창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을 모집하여 오랑캐를 물리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라에서 호국도량으로 크게 중수하여 주었으나 영조 18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찰을 1965년 비구니 명안선사가 운수행각 중 발견하고 대원을 세워 불사를 시작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 음성군 네이버 블로그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참조) 충북 유형문화재 130호 마애여래입상과 함께 동양최대 지장보살입상, 요양병원과 납골당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lt;br /&gt;
&lt;br /&gt;
희원(喜圓)스님_220220_전영숙1차.hwp&lt;br /&gt;
465.50KB&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05~408.&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86.&lt;br /&gt;
&lt;br /&gt;
BTN불교TV2016.10.18.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 부도탑 제막&lt;br /&gt;
&lt;br /&gt;
BBS NEWS2016.10.17. 충북 음성 미타사 '중창불사 회향법회와 부도탑 제막식' 봉행&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2012.03.28. 음성 미타사 밝은언덕 노인요양원 개원&lt;br /&gt;
&lt;br /&gt;
미타사 가섭산(709.6m) 자락에 위치한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1206_love/222400315423&lt;br /&gt;
&lt;br /&gt;
충청타임즈2020.04.23. 음성 미타사 템플 정식 운영사찰 지정&lt;br /&gt;
&lt;br /&gt;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10563&lt;br /&gt;
&lt;br /&gt;
밥숟가락질도 못하던 사람이 미타사에 오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lt;br /&gt;
&lt;br /&gt;
음성군 공식미디어기자단, 음성 이색데이트코스 미타사( 2022.1.31.)&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eumseonggun/222636039768&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 홈페이지: http://www.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1</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1"/>
		<updated>2022-07-07T14:52: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lt;/p&gt;
&lt;hr /&gt;
&lt;div&gt;{{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총(聖叢)스님&lt;br /&gt;
|사진 = [[File:036 계수(桂修).jpg|300px]]&lt;br /&gt;
|법명 =  성총(聖叢)&lt;br /&gt;
|법호 =  벽산(碧山)&lt;br /&gt;
|속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본관 = 광주&lt;br /&gt;
|출생 = 1944. 3. 20&lt;br /&gt;
|출가 = 1967&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관음정사(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여러 사찰에서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관음정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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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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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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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총(聖叢)스님]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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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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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묘전(妙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88%98%EC%8A%A4%EB%8B%98(%E6%A1%82%E4%BF%AE,_194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90</id>
		<title>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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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4:41: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시맨틱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계수(桂修)스님&lt;br /&gt;
|사진 = [[File:036 계수(桂修).jpg|300px]]&lt;br /&gt;
|법명 = 계수(桂修)&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박희옥(朴喜玉)&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946. 3. 15&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천개사(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스님을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은사로 출가하여 천개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6 || 전북 무주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法能)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 운문사 강원 사교 수학 &lt;br /&gt;
|-&lt;br /&gt;
|1968~2004  || 전국 제방 선원에서 평생 참선&lt;br /&gt;
|-&lt;br /&gt;
|1970 ||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94 ||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 비구니 정혜도량 회장&lt;br /&gt;
|-&lt;br /&gt;
|1995 ||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2004 || 현재 천개사 회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백양사 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하루하루를 부끄럽지 않게 살자.&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1946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이름은 박희옥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7세 때 무주구천동 관음사에서 5개월 동안 동문선습, 명심보감 등 한문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그때 관음사에 오신 은사스님을 만났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절에 간 것은 스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검게 그을린 시골 사람들만 보다가 천사같이 곱고 섬섬옥수 예쁜 스님들을 보니 마냥 좋을 뿐이었다.&lt;br /&gt;
&lt;br /&gt;
공부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후 스님은 산중의 공기가 고향의 공기보다 훨씬 좋게 느껴졌다. 산바람이 그립고 스님들이 그리웠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스님은 도봉산 원효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발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스님들과 함께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절집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짐을 지고, 땅을 파고, 나무를 하고, 스님들 시봉을 하느라 한 번도 앉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밤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억울한 마음에 보따리를 쌌다. 그러나 출가할 때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나왔기에 선뜻 돌아갈 수가 없어 아침이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날마다 보따리를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세에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보리베기 울력(1964. 6. 9)]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4&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에 가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20세에 운문사 강원에 가게 되었다. 운문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물이 너무나도 맑아 낮에도 ‘이목소’에서 목욕을 했다. 스님은 운문사 도량이 무척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잘 견디어 여기까지 온 자신이 대견스럽고 장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마침내 운문사에서 발심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봐도, 산을 봐도, 물을 봐도 좋았다. 하루하루 너무 좋아서 신심이 났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스님은 24세에 『기신론』 소문에서 진정한 발심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지환즉즉리(知幻卽卽離) 즉리즉각(卽離卽覺)&lt;br /&gt;
&lt;br /&gt;
환인 줄 알면 곧 여의고 여읜 즉 깨달음이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나날이 발심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심 있게 생활하던 중 계수스님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지스님의 맏상좌 스님이 해제를 하고 돌아와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다.&lt;br /&gt;
&lt;br /&gt;
최고의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가면 다시는 되찾지 못한다는 절박함에 삼직 스님은 서둘러 석남사로 향했다. 석남사의 어른스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전국의 비구니가 모두 나서서라도 운문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이 선두에 서서 데모를 하고, 묘전 주지스님과 어른스님들 또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은 큰방에 소변통을 들여 놓고 하루 동안 단식을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방에 앉아 있다가는 다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며 동화사로 가서 데모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하여 모두들 동화사로 찾아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동화사에서 데모를 하는 동안에도 별 소득이 없었다. 주지스님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동화사 주지스님이 대구 포교당에 있으니 그곳으로 옮겨야 하며, 언론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학인들은 다시 대구 포교당으로 거처를 옮겨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다. 그제야 주지스님이 나와 ‘소원대로 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였고, 학인들은 데모를 멈추고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주지스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비구니스님들은 결국 운문사를 되찾았다. 모든 비구니가 마음을 합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때 계수스님은 학인 대표로서 혜춘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한 달여 동안 총무원을 드나들며 운문사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운문사를 되찾은 뒤 묘전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당시 마포 석불사에서 학인 몇 명을 가르치던 묘엄스님을 비구니 초대강사로 모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의 생활은 무척 고되었다. 농사일부터 시작하여 벌목꾼까지 잡으러 다녀야 했다. 1960년대에는 운문사의 주변 산에 불법벌목이 극심했다. 스님들은 숯 굽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숯을 구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여 함께 잡으러 다니곤 하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하였더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도망가고 노인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을 붙잡아 산을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따라왔다. 노인의 아내라고 하였다. 다른 산에는 나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운문사 주변까지 들어온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가난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불법으로 벌목을 해야 했던 노부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하러 간 사이 계수스님은 몰래 노부부를 도망가게 해주었다. 나중에 노부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어른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나 스님은 모르는 척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24세에 사교입선을 하고 『기신론』을 보다가 재발심을 하게 된 스님은 선원에 가기를 원하였다. 당시에는 강원에서 선원으로 가는 사람이 없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겨울 결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정한 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스승님은 성철 큰스님께 가서 화두를 타라고 하셨다. 계수스님은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큰스님을 찾아뵙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당시 전매청 뒤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이 있었는데, 동화사나 해인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성철 큰스님의 소식을 물으니 마침 출타 중이라서 해인사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계수스님은 성철 큰스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포교당에서 3일 동안 머물렀다. 잠시였지만 스님은 산중 생활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향곡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때 대구 동화사에 향곡 큰스님께서 오셨다는 얘기가 들렸다. 계수스님은 평소 향곡 큰스님을 뵙고 싶어 했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lt;br /&gt;
&lt;br /&gt;
일찍이 향곡 큰스님은 속가 시절 이미 출가한 사촌 형에게 책을 한 권 받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서당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해석을 해주시기는 하였으나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듯하였다. 이후 향곡 큰스님은 늘 책을 품고 다녔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심부름으로 절에 갔다가 한 젊은 지객스님께 다시 책의 뜻을 여쭈었다. 지객스님은 그 책이 치문이라며,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향곡 큰스님은 서당 선생님도 모르는 것을 젊은 스님이 모두 알고 있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향곡 큰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18세에 견성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로 찾아가 향곡 큰스님을 뵈었다.&lt;br /&gt;
&lt;br /&gt;
“어디서 왔느냐.”&lt;br /&gt;
&lt;br /&gt;
체구가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하신 향곡 큰스님이 물으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서 왔습니다.”&lt;br /&gt;
&lt;br /&gt;
“너는 강사하면 낫겠다.”&lt;br /&gt;
&lt;br /&gt;
큰스님의 말씀에 계수스님은 이렇게 여쭈었다.&lt;br /&gt;
&lt;br /&gt;
“백년 찌꺼기를 씹느니 한 모금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하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에서 큰스님께 화두를 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용맹정진===&lt;br /&gt;
&lt;br /&gt;
그해 겨울 향곡 큰스님께서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기로 하자 많은 수좌들이 내원암으로 모여 들었다. 큰스님은 이번 철에 대한민국의 비구니 큰스님이라 할 만한 딸 하나를 낳고 싶다.”고 하시며 수좌들과 한 방에서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lt;br /&gt;
&lt;br /&gt;
그만큼 스님의 경책 또한 매우 강하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님은 향을 뭉치째 불을 붙여 그대로 지졌고, ‘죽은 송장이나 같은 산송장이라 죽여도 괜찮다.’며 장삼 끈으로 목을 묶어서 도량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시절 불국사 참배 기념(1964. 11. 2)]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7&lt;br /&gt;
향곡 큰스님의 경책은 상처에 뿌리는 소금과도 같았다. 그래서 계수스님 역시 ‘내 금생에 확철대오하기 전에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리라.’하며 발심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다른 수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8시까지 정좌한 뒤 다시 양진암 토굴에 가서 또 앉을 정도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은 도가 높을 텐데도 저렇게 잠도 주무시지 않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하며 어른스님들을 따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lt;br /&gt;
&lt;br /&gt;
추운 겨울 눈밭에서 있다시피 하였더니 한 달 반 정도 지나자 이가 들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기 힘들뿐더러 고통도 심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듯하였다. 그래도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스님은 거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점점 말라갔다. 잠깐씩 도둑잠을 잘 때도 다른 스님들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스님은 힘이 없어서 조금만 졸아도 몸이 크게 움직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뒷줄 왼쪽 두 번째부터 무착, 정오, 혜해, 심원스님 앞줄 왼쪽부터 상행스님, 향곡 큰스님, 계수스님(내원사, 197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8&lt;br /&gt;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 끝나자 향곡스님께서 수좌들에게 말씀하셨다.&lt;br /&gt;
&lt;br /&gt;
“밥값하게 한 마디씩 해보아라. 역대 조사가 이 문에 들어오면 무간지옥을 간다고 하셨는데 무간지옥을 벗어나는 길을 일러라.”&lt;br /&gt;
&lt;br /&gt;
스님은‘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하라는 말씀을 잊고, 지혜가 부족하여 마음만 헐떡거렸다.’고 한다. 당대를 주름잡던 어른스님들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끝에 앉은 스님이 사량 분별로 한마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lt;br /&gt;
&lt;br /&gt;
“저는 큰스님처럼 확철대오도 못하고 공부도 못했지만 두 달 정진했는데 이 고통은 비길 바가 없어서 정말 이 문에 들어온 스님들은 생과 사를 넘을 지경이니 무간지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대한민국의 비구니 딸 하나 낳으려고 몸부림쳤으나 헛수고였구나.”하셨다.&lt;br /&gt;
&lt;br /&gt;
==치아 때문에 고생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첫 철을 나는 동안 건강이 나빠진 스님은 치아가 들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도블럭이 네모반듯하다는 사실도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긴 줄로만 알고 늘 조심스럽게 걸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느라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한 철을 지낸 후 계수스님은 치아를 모두 뽑아버리면 장애가 없을 것 같아 25세에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하였다. 치과의사가 시술한 것이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운 사람이 이를 뽑았다. 그리고 결국이 치료를 위해 마을에 있는 한 보살님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기가 막힌 것은 초발심이 불길 같아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그 집의 방이 단칸방이라 신랑이 퇴근하고 오면 스님은 다락으로 올라가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가 아침에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내려와서 생활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그 집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죽을 먹지 않았다. 이가 그 모양이라 본해탈보살이 이를 해주고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까봐 잇몸에서 피가 줄줄 나는데도 죽을 안 먹는다고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비록 틀니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아 때문에 장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lt;br /&gt;
 “돌이켜보면 지혜로운 처사는 아니었지만, 그런 초발심으로 용맹스럽게 수행했기 때문에 평생동안 제가 선원에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lt;br /&gt;
&lt;br /&gt;
1989년 계수스님은 혜춘스님의 소개로 좋은 치과에서 다시 틀니를 하게 되었다. 원래 틀니를 하는데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지만 혜춘스님이 ‘앞으로 비구니계를 책임질 스님이니 돈을 못 받게 되더라도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수중의 350만 원을 주고 치료를 받았다.&lt;br /&gt;
&lt;br /&gt;
처음 틀니를 할 때는 한 달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1년이 소요되었다. 주위에서는 사기꾼한테 걸려든 게 아니냐고 우려를 하였지만, 병원에서는 성심껏 정성을 다해 만드는 중이었다. 병원 원장은 불교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스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스님은 틀니를 만드는 그 1년 동안 선원을 다니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틀니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원장이 간호사에게 새 틀니를 씻어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틀니가 깨지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빨리 가져오라고 채근을 하였다. 계수스님은 원장에게 “틀니가 깨진 것 같은데, 너무 야단치지는 마세요.”하고 말하였다. 원장은 다시 소리를 치며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자 간호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틀니가 깨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장은 버럭 화를 냈고, 스님은 “이왕 깨진 거 나무란다고 복구될 것도 아닌데 그만 하세요.” 하며 말렸다.&lt;br /&gt;
&lt;br /&gt;
결국 밤새 다시 끊여서 아랫니는 다음날 기워서 끼웠다고 한다. 원장은 계수스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거듭 사죄를 하였다.&lt;br /&gt;
&lt;br /&gt;
“혜춘스님 말씀대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 상황이면 어느 누구도 화를 안 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가 꼭 다시 해드리겠습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틀니의 붙인 부분이 떨어져서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무척 바쁜지 틀니 교정은 계속 미뤄졌다. 그래도 스님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치과를 찾아서 교정을 하였다. 틀니는 여전히 잘 맞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원래의 치과를 찾았으나 원장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선원을 두루 다니며 정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맨 뒷줄 왼쪽 첫 번째 계수스님, 두 번째 수덕사 성우스님, 가운데줄 왼쪽 두 번째 도연 노스님, 세 번째 마하 노스님, 앞줄 왼쪽부터 경봉 큰스님, 선경 노스님(내원사, 1974.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lt;br /&gt;
 &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스님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이모님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이 계수스님을 부르셨다.&lt;br /&gt;
&lt;br /&gt;
“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lt;br /&gt;
&lt;br /&gt;
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의현스님이 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으로 계신 의현스님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1&lt;br /&gt;
 &lt;br /&gt;
&lt;br /&gt;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다===&lt;br /&gt;
&lt;br /&gt;
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lt;br /&gt;
&lt;br /&gt;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인 법능스님===&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의 은사스님은 1968년 도봉산 원효사에서 나와 청계산 끝자락에 토굴을 짓고 20년동안 노보살님과 함께 사셨다. 평생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비구니스님이자 학자로 살았던 은사스님은 공양을 드시면서 짜고 맵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밥도 못하는 사람이다. 짜면 물을 넣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서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처음 토굴을 지을 때 보살님 명의로 주택 허가를 받아 집을 짓고 사셨다. 그런데 당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서 1995년 계수스님이 사찰로 만들려고 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스님은 1년 가까이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겨우 사찰 토지로 만들어 놓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스님은 새로 불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부전생활을 하였다. 하루 사분정근을 하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 21편과 관세음보살 정근 천념을 하였고, 사시에는 매일 관음시식을 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계수스님은 독살이 절 살림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선원에서 살 때는 전혀 모르던 힘든 일이었다. 이후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원의 후인들에게 독살이 스님들의 어려움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선원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공양을 해주는 독살이 스님들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독살이 하는 곳에 불사가 있으면 해제철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살이하며 공양하는 스님들이 없으면 선원이 유지될 수 없고, 또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불사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불사를 마쳤다. 그런데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 은사스님께서 주신 불사금은 1억 5천만 원이었는데, 불사를 끝내고 모두 계산을 해보니 총 공사비가 10억이 넘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청빈 공덕인지, 제가 30년 면벽 공덕을 쌓았는지, 상좌와 함께 3대가 잘 산 공덕인지 모르겠지만 불사를 할 때는 말만 하면 다 되었습니다. ‘불사를 하는 것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니 힘 따라 하리라.’ 하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곤 했지요. 그때부터 저는 사심없이 불사를 하면 부처님께서 다 이뤄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무문관에 들다===&lt;br /&gt;
계수스님은 정축년 여름 결재를 오대산 지장암에서 나고, 8월 그믐께 무문관에 들어갔다. 평소 스님은 특별 기도하러 간다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 오후 불식 한다는 사람 등 특별히 무엇을 한다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며, 수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에 살면서 대중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무문관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하였는데, 도반인 수덕사 성우스님이 혼자서 가기가 어려웠는지 결제하는 것과 똑같다며 거듭 청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바랑만 메고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것저것 준비하거나 꼼꼼히 계산해서 돈을 쓰지 않고, 쓸 수 있는 만큼 한 번에 쓰고 마는 성품이어서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따로 무엇을 준비하지 않았었다.&lt;br /&gt;
&lt;br /&gt;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할 만큼 답답한 것을 못 견뎌했던 스님은 창문에 큰 창살이 박혀 있고 개구멍만한 구멍으로 밥이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서 수행을 했는데, 저혈압에다 심장까지 약해서 문이 쾅 닫힐 때마다 그 충격으로 앞뒤가 끊어졌다. 밥은 하루 한번만 들어오기 때문에 식은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 선경 노스님, 마하 노스님 등 어른스님들을 모시고 (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3&lt;br /&gt;
스님은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도 몰랐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을 줄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꽉 막힌 공간에서 두 달이 지나도록 창문을 열지도 않은 채, 경치 좋은 전국의 선원을 두루 다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은산철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한 달 쯤 지나자 극도로 상기되어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님은 ‘30년이 지나서 여기까지 왔거늘 어디서 죽은들 어떠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하며 휴지를 머리에 감고 무통 침으로 수백 군데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정도였다.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전후가 끊어져 아무 기억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올 때 알아보기나 할 것을.........’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어서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깨끗해졌다.&lt;br /&gt;
&lt;br /&gt;
원래 위가 약해서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해지곤 하였으니 음식의 양이 적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평소 잠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눈도 깜빡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았다. 그런 와중에 ‘3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lt;br /&gt;
&lt;br /&gt;
무문관은 알릴 사항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 각 방에 밥과 함께 들여보냈다. 하루는 쪽지에 ‘내일은 해가 바뀌는 29일, 뜨거운 물이 나오니 목욕하세요.’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평소 몸이 차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하였던 스님은 그날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달력의 글씨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는 ‘계룡산 갑사’라고 적혀 있었다.&lt;br /&gt;
&lt;br /&gt;
‘아, 여기가 계룡산 갑사란 말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구나.’&lt;br /&gt;
&lt;br /&gt;
스님은 그때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수좌스님들과 산행]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4&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지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아 수행 정진하는 데 큰 힘이 되는 몇 가지 말씀들이 있다.&lt;br /&gt;
&lt;br /&gt;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lt;br /&gt;
&lt;br /&gt;
이것은 1964년 무렵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세계불교 세미나가 열렸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lt;br /&gt;
&lt;br /&gt;
수계할 때 전강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지혜 있는 도학자여! 계산을 잘 해라.’라는 말씀에도 큰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lt;br /&gt;
‘깨닫지 못하면 산송장이다.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lt;br /&gt;
&lt;br /&gt;
향곡 큰스님의 이 말씀 또한 스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세 분의 큰스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을 늘 되새기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학들에게도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4세 되던 해 봄에 쌍계사에 경 찍으러 갔다가 주렴에 적힌 ‘삼라만상개오사(森羅萬象開悟事)’라는 글귀를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lt;br /&gt;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방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악연(惡緣)도 인연, 선연(善緣)도 인연입니다. 한때 어른스님들이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모두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를 주장하셨지만 저는 점수돈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인행시를 돌아보면 감히 수행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항상 기력이 없어서 서른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순을 넘긴 지금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부처님 인행과 용맹을 흉내 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며 오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늘 방일하지 말고, 혼자 있어도 대중에 있는 듯이 삼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속가 어머니와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강원에서 인과를 배울 때 한마디를 들으니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조부 밑에 인자하신 어머니가 계셨고, 무서운 노스님 밑에 자비하신 은사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어머니와 은사스님을 통해 이미 인과에 대해 배우고 깨달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아버지는 5형제 중의 셋째이셨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큰 아들 노릇을 하여 다른 이들이 큰집이라 부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그런데 스님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 할아버지가 매우 엄하게 대하셨다.&lt;br /&gt;
&lt;br /&gt;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돌아와 밥상을 뒤엎으며 어머니에게 욕을 하는 등 매우 모질게 대하며 재혼을 종용하였다. 스님은 할아버지에게 곤욕을 치르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밤새 울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lt;br /&gt;
&lt;br /&gt;
다음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장국을 끓여서 상을 차려 들고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잘못했다며 사죄를 드렸다. 할아버지께 아침밥을 차려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간밤의 행동이 부끄러워 식사를 하러 나오지 못할까봐 그랬던 것이다.’라고 하셨다.&lt;br /&gt;
&lt;br /&gt;
불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은사스님 또한 매우 훌륭하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올 때 은사스님은 31세, 스님은 18세였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쌀 2가마니를 팔아 그 돈을 어린 스님에게 맡겼는데, 계수스님은 깜짝 놀라며 거절을 하였다.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알아서 쓰라며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평생 통장을 소유한 적이 없고, 직접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셨다. 수중에 책값 몇 푼만 있으면 만족하는 분이셨다.&lt;br /&gt;
&lt;br /&gt;
강원 시절 계수스님이 운문사에서 오면 은사스님은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비를 모자라게 주시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탁발을 해야 했는데, 그런 생활이 고되어서 ‘나중에 크면 절대 탁발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저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은사스님은 젊은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분이 아니어서 힘든 면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더욱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원효암 행자 시절,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도로에서 원효암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길을 짐까지 지고 올라다녔다. 나무하기, 밥하기 등 절집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딸이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매우 완고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속가 시절보다는 모든 게 수월하게 느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가운데 진제 큰스님, 오른쪽 흥륜사 혜해 노스님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6&lt;br /&gt;
 &lt;br /&gt;
&lt;br /&gt;
===후대스님들에 대한 당부===&lt;br /&gt;
&lt;br /&gt;
행자 시절에는 늘 잠이 모자라기 일쑤여서 저녁에 짐을 지러 도로에 내려가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되었다. 행자 여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채 내려가곤 하였는데, 한 사람만 깨어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졸면서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스님들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바닥에 엉덩이만 닿으면 잠이 쏟아졌다. 해우소에 가서도 잿더미에 이마를 한 번 찧어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곤 하였다. 스님의 사형 중에는 스님보다 잠이 많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무를 하러 가면 꼭 ‘잠깐만’ 하고 앉아서 조는 것이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잠이 들어 늘 어른스님께 혼이 나곤 하였다. 함께 행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 가운데 현재까지 계신 분은 당시 꼬마 사숙이었던 위봉사 주지스님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요즘의 선원 분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가 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옛날에는 공부하려는 수좌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안 시킬 만큼 선원에서 참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원은 선을 하는 사람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총무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출가하면 8안거를 나야 한다고 하니 제도에 묶여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 분위기를 다 버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선 시간에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음악 듣고, 온갖 즐길 것 다 즐기는데, 그러면 공부는 언제 하겠습니까. 스님들은 근기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데,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좌가 정진 못하면 산송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은 어디를 갈 때 보따리는 싸서 택배로 부치고 몸은 가볍게 다닌다고 합니다. 수행자가 직접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젊은 시절 장래가 유망한 스님으로 주목을 받았고, 타고난 언변을 가졌다며 지도를 잘 받으면 훗날 좋은 강사가 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현재 스님은 천개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도량을 가꾸며 살고 있다.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법당을 보며 3대가 조용히 지내고 있는 천개사는 누구라도 한 번 들어오면 결재하러 선방에 가는 일 외에 일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상좌 한 명이 그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음악회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시내로 볼 일을 보러 다니기도 하자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때 계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삭발했으니 수행자가 아니냐. 그렇게 살자면 왜 수행의 길을 선택했느냐. 속인들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찌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무엇이 수행자의 길이냐.’하고 물었다. 상좌들은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고, 그 후부터는 스님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에게 오신채 냄새가 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사람멀미를 하는 계수스님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 엽서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사람만 맞으며 ‘하루를 함부로 지우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것이 수행’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수행 정진 중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7&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키백과, 서울 천개사 대혜보각선사서&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_%EC%B2%9C%EA%B0%9C%EC%82%AC_%EB%8C%80%ED%98%9C%EB%B3%B4%EA%B0%81%EC%84%A0%EC%82%AC%EC%84%9C&lt;br /&gt;
&lt;br /&gt;
현대불교, 서초구사암聯 신년하례법회 (2003년)&lt;br /&gt;
&lt;br /&gt;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154&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서울 서초불교사암聯, 21일 신년하례봉행 (2005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87&lt;br /&gt;
&lt;br /&gt;
불교닷컴, 서초사암련, 우면산 희생자 천도법회 열기로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01&lt;br /&gt;
&lt;br /&gt;
유튜브, 천개사 주지 계수스님 인터뷰 (2020년)&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Er4dWboklGs&lt;br /&gt;
&lt;br /&gt;
==천개사==&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전경] 사진출처 : http://www.vdc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53&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 || 본항목 ||  || 계수스님(桂修, 1946~)|| 桂修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수스님(桂修,_194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수(桂修)스님] || 본항목 ||  || 계수스님(桂修, 1946~)|| 桂修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수스님(桂修,_194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스님]] || [[법능(法能)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스님]] || [[용화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02~11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서초구 원터길 45)&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9</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9"/>
		<updated>2022-07-07T14:39: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聖叢)스님]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묘전(妙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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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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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4:39: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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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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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묘전(妙典)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운문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7</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7"/>
		<updated>2022-07-07T14:37: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소임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총(聖叢)스님] || 본항목 ||  || 성총스님(聖叢, 1944~)||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법능(法能)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 | 성총(聖叢)스님]] || [[용화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6</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6"/>
		<updated>2022-07-07T14:29: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4 ||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   &lt;br /&gt;
|1978 ||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   &lt;br /&gt;
|1986~1995 ||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   &lt;br /&gt;
|2003 ||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5</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5"/>
		<updated>2022-07-07T14:13: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44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lt;br /&gt;
1978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lt;br /&gt;
1986~1995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lt;br /&gt;
2003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수정(水晶)&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4</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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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4:10: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총(聖叢)스님은&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44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lt;br /&gt;
1978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lt;br /&gt;
1986~1995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lt;br /&gt;
2003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수정(水晶)&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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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3</id>
		<title>성총스님(聖叢, 1944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B4%9D%EC%8A%A4%EB%8B%98(%E8%81%96%E5%8F%A2,_1944%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83"/>
		<updated>2022-07-07T14:0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새 문서: 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성총(聖叢)스님      * 법 명 :...&lt;/p&gt;
&lt;hr /&gt;
&lt;div&gt;성총(聖叢)스님_220405_이병두1차&lt;br /&gt;
&lt;br /&gt;
무념 이병두추천 0조회 522.04.05 10:59댓글 0북마크기능 더보기&lt;br /&gt;
게시글 본문내용&lt;br /&gt;
성총(聖叢)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법 명 : 성총(聖叢)&lt;br /&gt;
&lt;br /&gt;
* 법 호 : 벽산(碧山)&lt;br /&gt;
&lt;br /&gt;
* 속 명 : 이명희(李明姬)&lt;br /&gt;
&lt;br /&gt;
* 본 관 : 광주&lt;br /&gt;
&lt;br /&gt;
* 출생년도 : 1944. 3. 20&lt;br /&gt;
&lt;br /&gt;
* 주 소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관음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1944 경기 이천 출생&lt;br /&gt;
&lt;br /&gt;
1967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1970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0~1972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4 금산 보석사 주지 (4년)&lt;br /&gt;
&lt;br /&gt;
1978 음성 광명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0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lt;br /&gt;
&lt;br /&gt;
1982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lt;br /&gt;
&lt;br /&gt;
1985~1986 요사채 40평 불사&lt;br /&gt;
&lt;br /&gt;
1986~1995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1995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lt;br /&gt;
&lt;br /&gt;
2000 혜국사 주지 및 주석&lt;br /&gt;
&lt;br /&gt;
2003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04 현재 관음정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수정(水晶)&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담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lt;br /&gt;
&lt;br /&gt;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lt;br /&gt;
&lt;br /&gt;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lt;br /&gt;
&lt;br /&gt;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출가===&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lt;br /&gt;
&lt;br /&gt;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lt;br /&gt;
&lt;br /&gt;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lt;br /&gt;
&lt;br /&gt;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lt;br /&gt;
&lt;br /&gt;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 및 수행===&lt;br /&gt;
&lt;br /&gt;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lt;br /&gt;
&lt;br /&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소임===&lt;br /&gt;
&lt;br /&gt;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lt;br /&gt;
&lt;br /&gt;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lt;br /&gt;
&lt;br /&gt;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문경 관음정사 :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lt;br /&gt;
&lt;br /&gt;
&lt;br /&gt;
220 성총(聖叢)스님.hwp&lt;br /&gt;
45.50KB&lt;br /&gt;
 &lt;br /&gt;
첨부된 파일 1개▼&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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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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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주스님(性珠, 194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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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3:36: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김천 봉곡사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주(性珠))스님&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 성주(性珠) &lt;br /&gt;
|법호 = 향림(香林)&lt;br /&gt;
|속명 = 이은직(李殷稷))&lt;br /&gt;
|본관 = 전주&lt;br /&gt;
|출생 = 1946. 12.27&lt;br /&gt;
|출가 = 1942년&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봉곡사(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2리2) &lt;br /&gt;
|입적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향림(香林) 성주(性珠)스님은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一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김천 봉곡사를 중창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6 || 충북 제원 출생&lt;br /&gt;
|-&lt;br /&gt;
|1962 ||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一光)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3  ||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5 || 대원사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67~1969  || 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1971 || 양진암에서 동·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0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1 || 내원사에서 동안거 성만사&lt;br /&gt;
|-&lt;br /&gt;
|1972~1973  || 해인사에서 약수암, 삼선암 하·동안거(3년) 성만&lt;br /&gt;
|-&lt;br /&gt;
|1973  || 청암사 주석&lt;br /&gt;
|-&lt;br /&gt;
|1974 ||  속리산 성불사 5년간 주석&lt;br /&gt;
|-&lt;br /&gt;
|  || 석남사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 || 백흥암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79 ||  김천 봉곡사 주석, 봉곡사 중창 불사&lt;br /&gt;
&lt;br /&gt;
|-&lt;br /&gt;
|2004  || 봉곡사 총무&lt;br /&gt;
|-&lt;br /&gt;
| 2020  || 봉곡사 주지&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일엽(一葉)문중 제3대손&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해태하지 말고 정진하자.&lt;br /&gt;
|-&lt;br /&gt;
|특기     || 간경(看經), 원예(園藝)&lt;br /&gt;
|-&lt;br /&gt;
|취미 : 『법화경』 사경&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동현·현탁·현조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향림(香林) 성주(性珠)스님은 1946년 12월 27일 충북 제원군 청풍면 양평리에서 아버지 이태하와 어머니 달성 서씨 서임석의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은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나이 17세 되던 무렵은 불교종단 정화시기로 비구와 대처승이 대립하는 와중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 여름 한 비구스님이 스님의 동네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그 스님이 어찌나 좋아 보였던지 성주스님은 무작정 집을 나와 해인사 홍제암으로 갔다. 그러나 인연이 없었는지 그곳의 스님 소개로 통도사 취운암으로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주스님은 통도사 취운암에서 일광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1962년 음력 9월에 삭발염의하였다.&lt;br /&gt;
&lt;br /&gt;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3년 3월 15일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한 성주스님은 행자 시절에 이미 『치문』과 『사집』을 모두 공부하였다.&lt;br /&gt;
&lt;br /&gt;
===수학과 수행===&lt;br /&gt;
&lt;br /&gt;
스님의 효심은 참으로 각별하여 1967년 22세의 나이로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면서 은사스님을 차마 홀로 둘 수가 없어 모시고 함께 들어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 곧바로 사교반(능엄반)반으로 들어가 1969년에 대교를 수료하였다.&lt;br /&gt;
&lt;br /&gt;
그해 겨울 양진암에 방부를 들이고, 1971년 하안거까지 1년 6개월 동안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lt;br /&gt;
1970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한 스님은 이듬해 내원사에서 동안거를 성만하고, 이후에는 남해 보리암에서 백일기도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972년부터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1974년에는 석남사, 백흥암 등에서 하안거와 동안거, 다시 하안거를 계속하여 3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청암사에 들어가 겨울을 났다. 1974년부터 속리산 성불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5년을 머물렀다. 그리고 1979년에 현재의 봉곡사로 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봉곡사로 오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성불사가 사설 사암이다 보니 늘 신세를 지고 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방부를 들이려 해도 이것저것 걱정이 되고 신경 쓰는 일이 많은 게 싫어서 봉곡사로 오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성불사에서 스님은 5년 동안 살았으나 양말 한 짝도 얻어 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하게 살아서인지 성불사에서 나올 당시 사찰의 보살님이 두루마기를 한 벌 해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옷을 안 받으려고 하였지만 간곡히 권하는 보살님의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입고 나왔다.&lt;br /&gt;
&lt;br /&gt;
또한 스님은 그 사찰을 나올 때 다음에 누가 와서 살더라도 불편함이 없게끔 다 준비해 놓고 나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정작 봉곡사에 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힘이 많이 들었다. 봉곡사는 1300년의 유구한 세월을 이겨온 고찰이었으나, 스님이 당도했을 당시의 마당은 돌밭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를 손보며 살아야 했다. 스님이 팔을 걷어 부치고 중창 불사를 한 결과 마침내 오늘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이신 일광(一光)스님===&lt;br /&gt;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을 19년 동안 모시고 살았는데, 은사스님에 대해 ‘성품이 지순차순하며 자비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엄할 때는 엄했지만 당당하고 고요한 분이셨다. 은사스님은 항상 ‘은현동시隱現同時, 즉 나타날 때나 아닐 때나 똑같이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았는지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에는 도반스님들이 보증수표라고 할 만큼 모든 일에 빈틈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봉곡사의 엄격한 생활===&lt;br /&gt;
&lt;br /&gt;
도반스님들이 봉곡사에 와서 보고는 ‘독살이인 줄 알고 왔더니 대중살이보다 더 엄하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봉곡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밤 11시에 취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스님은 ‘사찰의 기강은 풀어 놓으면 풀어 놓는 대로 한도 끝도 없다. 동여매면 매는 대로 되어진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봉곡사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아침 9시 전까지는 1,000여 평의 도량을 청소하고, 낮에는 소임을 마치고, 저녁 5시 공양 후에는 낫과 호미를 들고 들에 나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 평소에 스님은 백장청규를 철칙으로 실천해 나가며 채소와 야채는 직접 심고 가꾸어 자급자족으로 해결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지병인 허리 통증이 있지만, 하루에 8시간 정도를 정진한다. 스님의 말씀인즉 ‘아프다고 신경 쓰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동여매면 통증을 완화할 수가 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평소에 사경을 하는 스님은 그동안 전등록을 사경했고, 현재는 『법화경』을 사경하는 중이다.&lt;br /&gt;
&lt;br /&gt;
2004년 현재 김천 봉곡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성주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현·현탁·현조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김천인터넷뉴스, 비봉산(飛鳳山) ‘봉곡사(鳳谷寺)’남과 다르다고 이를 흉보지 말일이다. (2009년)&lt;br /&gt;
&lt;br /&gt;
http://gcinews.com/front/news/view.do?articleId=11523&lt;br /&gt;
&lt;br /&gt;
법보신문, 9. 김천 비봉산 봉곡사 (2012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316&lt;br /&gt;
&lt;br /&gt;
직지사, 봉곡사 성주스님 임명장 수여(11.18) (2020년)&lt;br /&gt;
&lt;br /&gt;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4010&amp;amp;wr_id=1268&lt;br /&gt;
&lt;br /&gt;
황악신문, 봉곡사 (鳳谷寺)...봉황이 점지한 골짜기 봉황의 알도 있어 (2021년)&lt;br /&gt;
&lt;br /&gt;
http://www.hwangak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1&lt;br /&gt;
&lt;br /&gt;
불교닷컴, 자장이 선택한 절터 (2022년)&lt;br /&gt;
&lt;br /&gt;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1463&lt;br /&gt;
&lt;br /&gt;
유튜브, 비봉산 봉곡사 김천여행&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ZUK3i1ly7m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김천 봉곡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107020&amp;amp;wr_id=39&lt;br /&gt;
&lt;br /&gt;
https://blog.naver.com/bonggoksa&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922년(태조 5)에 승려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lt;br /&gt;
&lt;br /&gt;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산 너머에 있는 구성면 연곡(燕谷)에 절터를 닦고 목수를 불러 재목을 다듬는데,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재목을 다듬고 난 조각들을 자꾸 물어가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 보니 지금의 봉곡사 터였다.그 자리가 더 훌륭한 곳임을 판단한 도선은 자신이 미물인 새만도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자리를 옮겨지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40여동의 당우와 오층석탑·석교(石橋) 등이 있었으며, 승려 1,000여명이 기거하였고 경남 일원과 전북 일원까지 말사(末寺)를 거느렸던 큰 절이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소규모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동상실(東上室)을 비롯하여 부속건물 2동이 있다. 대웅전은 1707년(숙종 33)에 세 번째의 중수를 거쳐 1916년에 단청과 함께 중수되었으며, 명부전은 1690년에 승려 대완(大完)이 중건하였고, 1908년에 중수하였다.&lt;br /&gt;
&lt;br /&gt;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80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김천 봉곡사 대웅전 석조석가여래삼존상&lt;br /&gt;
&lt;br /&gt;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298&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lt;br /&gt;
&lt;br /&gt;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1913&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性住)스님]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영신(永信)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서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7~141.&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89.&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54, 440.&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봉곡사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길 1224-5 (대덕면 조룡리 880) 054-437-1305&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A3%BC%EC%8A%A4%EB%8B%98(%E6%80%A7%E4%BD%8F,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65</id>
		<title>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A3%BC%EC%8A%A4%EB%8B%98(%E6%80%A7%E4%BD%8F,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65"/>
		<updated>2022-07-07T13:31: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주(性住)&lt;br /&gt;
|사진 = 성주(性住).jpg&lt;br /&gt;
|법명 = 법홍(法弘)&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임권순(林權順)&lt;br /&gt;
|본관 = 나주&lt;br /&gt;
|출생 = 1938. 11. 253&lt;br /&gt;
|출가 = 1961&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덕산사(경북 청도군 매전면 덕산리 893)&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성주(性住)스님은 부산 서운암에서 영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 경북 달성 출생&lt;br /&gt;
|-&lt;br /&gt;
|1961 || 부산 서운암에서 영신(永信)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2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7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별좌 소임&lt;br /&gt;
|-&lt;br /&gt;
|     || 개심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     || 동학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1975 || 대성암, 석남사, 세등선원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9~2004  ||  덕산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보운(普雲)문중&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혜현(惠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성주(性住)스님은 1938년 11월 25일 경북 달성군에서 아버지 임병륜과 어머니 김금이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권순이다.&lt;br /&gt;
&lt;br /&gt;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스님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다가 24세 되던 1961년 5월 부산 수영구 서운암에서 영신(永信)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그 후 26세 되던 1963년 봄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시봉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노스님 밑에서 생활하다가 운문사 강원으로 갔다. 당시 운문사에는 수인 사숙님께서 운문사 초대 주지로 계셨다. 그러나 사숙님이 소임을 맡아 계시는 탓에 글은 배우지 못하고 사중 소임인 별좌만 몇 철을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지내던 중 주지스님이 바뀔 때 탁발하여 양식값을 만들어서 개심사 강원에 갔지만 노스님이 부르셔서 다시 서운암으로 돌아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동학사에서 한 철을 지내고 나자 병환 중인 노스님께서 성주스님을 불러 “내가 세상을 뜨면 가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후회를 많이 할 것 같아 노스님을 모시고 살기로 하고 강원 공부를 접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은 입적하시기 4년 전부터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스님은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노스님은 1972년 음력 11월 22일 서운암에서 82세로 입적하셨다. 그 후 내원사 선원에 계시던 은사스님께서 신경통으로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방을 얻어 거동이 불편한 은사스님을 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지극한 효심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은사스님께서 1975년 1월 서운암에서 70세로 입적하신 뒤 스님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성암에서 여러 철, 석남사에서 한 철 그리고 세등선원에서 안거를 난 후 그만 황달에 걸리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용맹정진 중에 쓰러졌는데, 단지 힘이 없다고만 생각을 했지 황달에 걸린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제 후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는데 약국에서 링거 3병을 사서 맞으라는 말을 듣고 링거를 구입하여 왔다. 그러나 스님의 병세에 부작용이라도 생길까 걱정하여 누구도 스님에게 링거를 놔 주려고 하지 않아 하는 수없이 알부민 주사를 맞고 ‘편자환’이라는 약을 10알 먹은 후 알게 모르게 병이 나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그 어느 것에도 욕심 없이 오직 화두참구에 힘쓰고 있다. 인가라고는 10여 가구가 전부인 말 그대로 토굴에서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전념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lt;br /&gt;
&lt;br /&gt;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전생에 닦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인과로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는데, 시은만 지고 사는 것 같다며 겸허한 모습을 보인다. 스님은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모시고 어렵게 살던 그 시절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2004년 덕산사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인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현(惠昡)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도 덕산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덕산사 전경] 사진출처 : https://cafe.daum.net/mdala/KjZ7/544?q=%EC%B2%AD%EB%8F%84%20%EB%8D%95%EC%82%B0%EC%82%AC  &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性住)스님]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영신(永信)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서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4~.136&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0.&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9&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덕산사 청도군 매전면 곰티로 410-13 (청도군 매전면 덕산리 893)&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A3%BC%EC%8A%A4%EB%8B%98(%E6%80%A7%E4%BD%8F,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64</id>
		<title>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C%A3%BC%EC%8A%A4%EB%8B%98(%E6%80%A7%E4%BD%8F,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64"/>
		<updated>2022-07-07T13:30: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청도 덕산사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주(性住)&lt;br /&gt;
|사진 = 성주(性住).jpg&lt;br /&gt;
|법명 = 법홍(法弘)&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임권순(林權順)&lt;br /&gt;
|본관 = 나주&lt;br /&gt;
|출생 = 1938. 11. 253&lt;br /&gt;
|출가 = 1961&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덕산사(경북 청도군 매전면 덕산리 893)&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성주(性住)스님은 부산 서운암에서 영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 경북 달성 출생&lt;br /&gt;
|-&lt;br /&gt;
|1961 || 부산 서운암에서 영신(永信)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2 ||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7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별좌 소임&lt;br /&gt;
|-&lt;br /&gt;
|     || 개심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     || 동학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1975 || 대성암, 석남사, 세등선원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9~2004  ||  덕산사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보운(普雲)문중&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혜현(惠昡)&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성주(性住)스님은 1938년 11월 25일 경북 달성군에서 아버지 임병륜과 어머니 김금이 사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권순이다.&lt;br /&gt;
&lt;br /&gt;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스님이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다가 24세 되던 1961년 5월 부산 수영구 서운암에서 영신(永信)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그 후 26세 되던 1963년 봄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시봉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노스님 밑에서 생활하다가 운문사 강원으로 갔다. 당시 운문사에는 수인 사숙님께서 운문사 초대 주지로 계셨다. 그러나 사숙님이 소임을 맡아 계시는 탓에 글은 배우지 못하고 사중 소임인 별좌만 몇 철을 살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지내던 중 주지스님이 바뀔 때 탁발하여 양식값을 만들어서 개심사 강원에 갔지만 노스님이 부르셔서 다시 서운암으로 돌아와야만 했다.&lt;br /&gt;
&lt;br /&gt;
동학사에서 한 철을 지내고 나자 병환 중인 노스님께서 성주스님을 불러 “내가 세상을 뜨면 가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후회를 많이 할 것 같아 노스님을 모시고 살기로 하고 강원 공부를 접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은 입적하시기 4년 전부터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스님은 지극 정성으로 수발을 들었다. 노스님은 1972년 음력 11월 22일 서운암에서 82세로 입적하셨다. 그 후 내원사 선원에 계시던 은사스님께서 신경통으로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예 방을 얻어 거동이 불편한 은사스님을 3년 동안 모시고 살았다. 지극한 효심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은사스님께서 1975년 1월 서운암에서 70세로 입적하신 뒤 스님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성암에서 여러 철, 석남사에서 한 철 그리고 세등선원에서 안거를 난 후 그만 황달에 걸리고 말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용맹정진 중에 쓰러졌는데, 단지 힘이 없다고만 생각을 했지 황달에 걸린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제 후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는데 약국에서 링거 3병을 사서 맞으라는 말을 듣고 링거를 구입하여 왔다. 그러나 스님의 병세에 부작용이라도 생길까 걱정하여 누구도 스님에게 링거를 놔 주려고 하지 않아 하는 수없이 알부민 주사를 맞고 ‘편자환’이라는 약을 10알 먹은 후 알게 모르게 병이 나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그 어느 것에도 욕심 없이 오직 화두참구에 힘쓰고 있다. 인가라고는 10여 가구가 전부인 말 그대로 토굴에서 배만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전념하다 보면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lt;br /&gt;
&lt;br /&gt;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전생에 닦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인과로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는데, 시은만 지고 사는 것 같다며 겸허한 모습을 보인다. 스님은 노스님과 은사스님을 모시고 어렵게 살던 그 시절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2004년 덕산사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인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혜현(惠昡)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청도 덕산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덕산사 전경] 사진출처 : https://cafe.daum.net/mdala/KjZ7/544?q=%EC%B2%AD%EB%8F%84%20%EB%8D%95%EC%82%B0%EC%82%AC  &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주(性住)스님] || 본항목 ||  || 성주스님(性住, 1938~) || 性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주스님(性住,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보현(普賢)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주스님(性住, 1938生, 비구니) | 성주(性住)스님]] || [[원만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4~.136&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0.&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39&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덕산사 청도군 매전면 곰티로 410-13 (청도군 매전면 덕산리 893)&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8</id>
		<title>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8"/>
		<updated>2022-07-07T12:04:1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시맨틱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법홍(法弘)&lt;br /&gt;
|사진 = 194 법홍(法弘).jpg&lt;br /&gt;
|법명 = 법홍(法弘)&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백해선(白海仙)&lt;br /&gt;
|본관 = 수원&lt;br /&gt;
|출생 = 1943. 5. 3&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원만사(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보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구 원만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3 || 부산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원만사에서 보현(普賢)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1971  ||  동학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5 ||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사&lt;br /&gt;
|-&lt;br /&gt;
|1979 || 원만사 총무&lt;br /&gt;
|-&lt;br /&gt;
|1995 || 삼화불교대학 유아교육과 졸업&lt;br /&gt;
|-&lt;br /&gt;
|1997 || 중앙대학교 보육교사 2급 취득&lt;br /&gt;
|-&lt;br /&gt;
|1999  || 원만사 주지 취임, 원만사 유치원 이사장 및 원장 취임&lt;br /&gt;
|-&lt;br /&gt;
|2004 || 원만사 주지 및 원만사 유치원 원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도는 못 깨쳐도 승려다워야 한다.&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휴담(休潭)·선진&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1943년 5월 3일 부산에서 아버지 백용이와 어머니 창녕 황씨 황공덕화 사이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며, 이름은 백해선이다.&lt;br /&gt;
&lt;br /&gt;
1962년 세수 20세 되던 해에 원만사에서 보현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그해 3월 15일 일타 큰스님께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은 1964년 동학사에 입학해 1971년에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7&lt;br /&gt;
그 이후 약수암에서 여러 차례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75년 고암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뒤에 은사스님을 도와 지금까지 계속 원만사에 상주하며 불사를 돕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강원 생활 중에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스님이 원주 소임을 살 때였다. 일초, 보명, 지형스님 등 도반스님들과 어울려, 제사에 쓰려고 장을 봐서 다락에 보관해둔 물품들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몰래 꺼내 먹는가 하면, 큰방 대중이 잠이 들면 슬그머니 들어가 잠자는 스님들의 얼굴에 잉크로 낙서를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행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삭발염의한 머리와 승복을 돌아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또한 수연스님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어서 항상 승려로서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는 승려다운 자세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살자고 다짐을 하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탁자 밥을 내려 먹을 줄은 알아야 하는데, 요즘 세대 스님들은 법당에서의 의식 절차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불제자로서의 예를 갖출 줄 알고 미덕을 실천하는 생활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원만사 불사 중에 위장병이 심했던 스님이 운문사의 북대암에서 기도할 때의 일이다.&lt;br /&gt;
‘제가 은사스님을 모시고 불사를 도와드리려면 제 몸이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건강한 몸으로 우리 스님 뒷바라지하게 해주십시오.’하며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보다 어른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루에 사천배씩 삼일 동안 만배를 하여 회향하였다. 그 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지내왔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원만사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세수 44세 되던 해인 1986년 현재의 원만사 봉불식을 거행한 스님은 1999년 57세에 이르러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9&lt;br /&gt;
스님은 지금까지 은사스님을 모시고 원만사에 살면서 살림을 도맡아 왔고, 그동안 많은 아이들을 키워서 배출하였다. 원만사에는 지금도 스님이 돌보는 여러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스님은 모든 공로를 은사인 보현스님에게 돌리고 정작 당신은 한 것이 없다고 겸양하게 말한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로는 휴담(休潭)·선진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보신문, 대구 원만사 법홍 스님 주지 취임 (2004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30&lt;br /&gt;
&lt;br /&gt;
영남일보TV, '40년 전 發心' 대구 원만사 약사여래불 점안식 (2010년)&lt;br /&gt;
&lt;br /&gt;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01201.010240719150001&lt;br /&gt;
&lt;br /&gt;
불교신문, 대구 원만사 약사대불 점안 (2010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603&lt;br /&gt;
&lt;br /&gt;
BTN, 부처님, 저요저요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01&amp;amp;PID=P665&amp;amp;DPID=63305&lt;br /&gt;
&lt;br /&gt;
==대구 원만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lt;br /&gt;
&lt;br /&gt;
달구벌대로 계산오거리와 신남네거리 중간지점 대도로변에 위치한 도심 속에 우뚝 선 사찰로 경내에 높이 8m 약사여래대불이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중구 동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원만사는 원만 스님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으며, 현재 원만사 유치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lt;br /&gt;
&lt;br /&gt;
* 원만사 유치원 : https://cafe.daum.net/wonkid&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  &lt;br /&gt;
&lt;br /&gt;
[원만사 약사여래불]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39kkkiok/16155880  &lt;br /&gt;
&lt;br /&gt;
[원만사유치원] 사진출처 : 원만사유치원카페 https://cafe.daum.net/wonkid/k7Y4/1?q=%EC%9B%90%EB%A7%8C%EC%82%AC%EC%9C%A0%EC%B9%98%EC%9B%90&amp;amp;re=1&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法弘)스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보현(普賢)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원만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26~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94.&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5, 35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15 (동산동 708) 053-257-1914&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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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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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2:02: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선주(禪周)&lt;br /&gt;
|사진 =  선주(禪周)).jpg&lt;br /&gt;
|법명 = 선주(禪周))&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이계순(李桂順&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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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8. 3. 2&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내원사 금강암(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918)&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선주(禪周)스님은 양산 내원사에서 각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 울산 출생생&lt;br /&gt;
|-&lt;br /&gt;
|1962 || 양산 내원사에서 각진(覺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1963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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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969 || 운문사 강원 졸업 &lt;br /&gt;
|-&lt;br /&gt;
|1970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      || 내원사 성불암에서 23년 주석 &lt;br /&gt;
|-&lt;br /&gt;
|      || 김룡사, 석남사, 내원사 성불암, 대원사, 불영사, 육수암 등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 || 경주 금련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4 || 내원사 금강암 주석&lt;br /&gt;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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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수정(水晶)문중 &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만법이 사라진다.&lt;br /&gt;
|-&lt;br /&gt;
|특기     || 만행&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정욱(淨煜)·정민(淨珉)·정구(淨丘)·정효(淨傚)&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선주(禪周)스님은 1938년 3월 2일 울산시 방어동 155번지에서 아버지 이부갑과 어머니 김말선 사이의 3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이며, 이름은 이계순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나이 25세 되던 해인 1962년 음력 7월 9일 내원사에서 각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할 가치 있는 곳을 찾다가 불가에 귀의한 것이 출가 동기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미 출가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데, 부산에서 처음 개설한 불교학생회에서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하였다. 그때 〈해동&amp;gt;이라는 불교지를 청년회에서 발행하였고, 입산 전부터 설봉스님의 법문을 수도 없이 들었으며, 최초로 나온 한글 번역 『불교성전』을 보고 불교 교리를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lt;br /&gt;
&lt;br /&gt;
선주스님은 1963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그해에 당시 5년 과정이었던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였다.&lt;br /&gt;
&lt;br /&gt;
강원시절을 돌아보면 많은 추억들이 있다. 입승 소임을 살고 있을 적에(초창기 때) 학인 스님들과 데모를 하여 사리암을 운문사 직영체제로 만들었고, 당시 대처승인 노 강사스님을 통도사로 모셔다드린 다음 동화사에서 33명의 학인이 데모를 하여 묘전스님을 주지로, 묘엄스님을 운문사 강사로 모신 일도 있었다. 당시 동화사에서 데모를 할 적에 동화사 주지스님이 선주스님을 보고 모략꾼이라고 할 정도로 스님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면 끝까지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갔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서는 방학을 모르고 살 정도로 일이 많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밭 중간에 있는 돌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그 외의 사중 일을 하느라고 방학 동안에도 쉴 틈이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한 일이었다. 운문사 강원 1회 때에는 여러 스님이 모여서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강원은 범어사 2회로 들어감).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을 배우기 위해 직접 강사스님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치문』을 보고 오는 스님들은 다른 곳에서 이미 경을 배우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운문사에서 『치문』부터 『화엄경』까지 모두 본 사람은 선주스님밖에 없을 만큼 스님은 모든 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또한 후배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주위에서는 스님을 부지런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스님 자신은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부지런하고 깨끗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이신 각진스님===&lt;br /&gt;
&lt;br /&gt;
스님의 노스님은 월혜스님이시고, 은사스님은 각진스님인데 1982년에 입적하셨다. 은사스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은사스님은 스님과 함께 내원사 성불암의 본래 있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서 2km 정도의 산길을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오르내렸을 정도로 신심이 강하고 대중을 위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으셨다.&lt;br /&gt;
&lt;br /&gt;
원사 성불암을 지을 당시 마땅한 부지가 없어 고사목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집을 지어야 했다. 그때 주지스님이 임의대로 나무를 베었는데, 혹시 일이 커질까 염려한 은사스님은 자신이 다 베었다고 했다. 그 일로 재판소에 여러 번 불려 다닐 정도로 대중을 위해서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선주스님은 1969년에 강원을 졸업하고, 다음해에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졸업 후 내원사 성불암에서 23년간 머물며 김룡사에서 첫 철을 시작으로 석남사, 내원사 성불암, 대원사, 불영사, 육수암 등 제방 선원을 두루 다니면서 정진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만법이 사라진다.’를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는 선주스님은 2004년 현재 내원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으며, 결제 철에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를 난다.&lt;br /&gt;
&lt;br /&gt;
계제자로는 정욱(淨煜)(전남 해남 덕성사)·정민(淨珉)·정구(淨丘)·정효(淨傚)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내원사 금강암==&lt;br /&gt;
&lt;br /&gt;
&lt;br /&gt;
[양산 내원사 금강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Busanacademy/WUyz/153?q=%EB%82%B4%EC%9B%90%EC%82%AC%20%EA%B8%88%EA%B0%95%EC%95%94&lt;br /&gt;
&lt;br /&gt;
[내원사 성불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Busanacademy/WUyz/153?q=%EB%82%B4%EC%9B%90%EC%82%AC%20%EA%B8%88%EA%B0%95%EC%95%94&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 || 본항목 ||  || 선주스님(禪周, 1938~) || 禪周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주스님(禪周,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선주(禪周)스님] || 본항목 ||  || 선주스님(禪周, 1938~) || 禪周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주스님(禪周,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스님]] || [[각진(覺眞)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스님]] || [[양산 내원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1~13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52.&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97, 40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금강암 경남 양산시 내원로 207 (하북면 용연리 291)&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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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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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A0%EC%A3%BC%EC%8A%A4%EB%8B%98(%E7%A6%AA%E5%91%A8,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6"/>
		<updated>2022-07-07T12:02: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내원사 금강암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선주(禪周)&lt;br /&gt;
|사진 =  선주(禪周)).jpg&lt;br /&gt;
|법명 = 선주(禪周))&lt;br /&gt;
|법호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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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선주(禪周)스님은 양산 내원사에서 각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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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 울산 출생생&lt;br /&gt;
|-&lt;br /&gt;
|1962 || 양산 내원사에서 각진(覺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1963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3~1969 || 운문사 강원 졸업 &lt;br /&gt;
|-&lt;br /&gt;
|1970  ||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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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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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특기     || 만행&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정욱(淨煜)·정민(淨珉)·정구(淨丘)·정효(淨傚)&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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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선주(禪周)스님은 1938년 3월 2일 울산시 방어동 155번지에서 아버지 이부갑과 어머니 김말선 사이의 3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이며, 이름은 이계순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나이 25세 되던 해인 1962년 음력 7월 9일 내원사에서 각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lt;br /&gt;
&lt;br /&gt;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할 가치 있는 곳을 찾다가 불가에 귀의한 것이 출가 동기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미 출가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데, 부산에서 처음 개설한 불교학생회에서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하였다. 그때 〈해동&amp;gt;이라는 불교지를 청년회에서 발행하였고, 입산 전부터 설봉스님의 법문을 수도 없이 들었으며, 최초로 나온 한글 번역 『불교성전』을 보고 불교 교리를 배웠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lt;br /&gt;
&lt;br /&gt;
선주스님은 1963년 3월 15일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그해에 당시 5년 과정이었던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였다.&lt;br /&gt;
&lt;br /&gt;
강원시절을 돌아보면 많은 추억들이 있다. 입승 소임을 살고 있을 적에(초창기 때) 학인 스님들과 데모를 하여 사리암을 운문사 직영체제로 만들었고, 당시 대처승인 노 강사스님을 통도사로 모셔다드린 다음 동화사에서 33명의 학인이 데모를 하여 묘전스님을 주지로, 묘엄스님을 운문사 강사로 모신 일도 있었다. 당시 동화사에서 데모를 할 적에 동화사 주지스님이 선주스님을 보고 모략꾼이라고 할 정도로 스님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면 끝까지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갔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서는 방학을 모르고 살 정도로 일이 많았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변했지만 당시에는 밭 중간에 있는 돌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그 외의 사중 일을 하느라고 방학 동안에도 쉴 틈이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한 일이었다. 운문사 강원 1회 때에는 여러 스님이 모여서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강원은 범어사 2회로 들어감).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을 배우기 위해 직접 강사스님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치문』을 보고 오는 스님들은 다른 곳에서 이미 경을 배우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운문사에서 『치문』부터 『화엄경』까지 모두 본 사람은 선주스님밖에 없을 만큼 스님은 모든 경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또한 후배들을 가르쳤다.&lt;br /&gt;
&lt;br /&gt;
주위에서는 스님을 부지런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스님 자신은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부지런하고 깨끗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이신 각진스님===&lt;br /&gt;
&lt;br /&gt;
스님의 노스님은 월혜스님이시고, 은사스님은 각진스님인데 1982년에 입적하셨다. 은사스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은사스님은 스님과 함께 내원사 성불암의 본래 있던 집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서 2km 정도의 산길을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오르내렸을 정도로 신심이 강하고 대중을 위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으셨다.&lt;br /&gt;
&lt;br /&gt;
원사 성불암을 지을 당시 마땅한 부지가 없어 고사목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집을 지어야 했다. 그때 주지스님이 임의대로 나무를 베었는데, 혹시 일이 커질까 염려한 은사스님은 자신이 다 베었다고 했다. 그 일로 재판소에 여러 번 불려 다닐 정도로 대중을 위해서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선주스님은 1969년에 강원을 졸업하고, 다음해에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졸업 후 내원사 성불암에서 23년간 머물며 김룡사에서 첫 철을 시작으로 석남사, 내원사 성불암, 대원사, 불영사, 육수암 등 제방 선원을 두루 다니면서 정진을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만법이 사라진다.’를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는 선주스님은 2004년 현재 내원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으며, 결제 철에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를 난다.&lt;br /&gt;
&lt;br /&gt;
계제자로는 정욱(淨煜)(전남 해남 덕성사)·정민(淨珉)·정구(淨丘)·정효(淨傚)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내원사 금강암==&lt;br /&gt;
&lt;br /&gt;
&lt;br /&gt;
[양산 내원사 금강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Busanacademy/WUyz/153?q=%EB%82%B4%EC%9B%90%EC%82%AC%20%EA%B8%88%EA%B0%95%EC%95%94&lt;br /&gt;
&lt;br /&gt;
[내원사 성불암 전경] 사진출처: 다음카페 https://cafe.daum.net/Busanacademy/WUyz/153?q=%EB%82%B4%EC%9B%90%EC%82%AC%20%EA%B8%88%EA%B0%95%EC%95%94&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 || 본항목 ||  || 선주스님(禪周, 1938~) || 禪周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주스님(禪周,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선주(禪周)스님] || 본항목 ||  || 선주스님(禪周, 1938~) || 禪周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선주스님(禪周,_1938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스님]] || [[보현(普賢)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선주스님(禪周, 1938生, 비구니) | 선주(禪周)스님]] || [[원만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31~133.&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52.&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97, 40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금강암 경남 양산시 내원로 207 (하북면 용연리 291)&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5</id>
		<title>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5"/>
		<updated>2022-07-07T11:55: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법홍(法弘)&lt;br /&gt;
|사진 = 194 법홍(法弘).jpg&lt;br /&gt;
|법명 = 법홍(法弘)&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백해선(白海仙)&lt;br /&gt;
|본관 = 수원&lt;br /&gt;
|출생 = 1943. 5. 3&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원만사(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보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구 원만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3 || 부산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원만사에서 보현(普賢)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1971  ||  동학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5 ||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사&lt;br /&gt;
|-&lt;br /&gt;
|1979 || 원만사 총무&lt;br /&gt;
|-&lt;br /&gt;
|1995 || 삼화불교대학 유아교육과 졸업&lt;br /&gt;
|-&lt;br /&gt;
|1997 || 중앙대학교 보육교사 2급 취득&lt;br /&gt;
|-&lt;br /&gt;
|1999  || 원만사 주지 취임, 원만사 유치원 이사장 및 원장 취임&lt;br /&gt;
|-&lt;br /&gt;
|2004 || 원만사 주지 및 원만사 유치원 원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도는 못 깨쳐도 승려다워야 한다.&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휴담(休潭)·선진&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1943년 5월 3일 부산에서 아버지 백용이와 어머니 창녕 황씨 황공덕화 사이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며, 이름은 백해선이다.&lt;br /&gt;
&lt;br /&gt;
1962년 세수 20세 되던 해에 원만사에서 보현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그해 3월 15일 일타 큰스님께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은 1964년 동학사에 입학해 1971년에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7&lt;br /&gt;
그 이후 약수암에서 여러 차례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75년 고암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뒤에 은사스님을 도와 지금까지 계속 원만사에 상주하며 불사를 돕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강원 생활 중에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스님이 원주 소임을 살 때였다. 일초, 보명, 지형스님 등 도반스님들과 어울려, 제사에 쓰려고 장을 봐서 다락에 보관해둔 물품들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몰래 꺼내 먹는가 하면, 큰방 대중이 잠이 들면 슬그머니 들어가 잠자는 스님들의 얼굴에 잉크로 낙서를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행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삭발염의한 머리와 승복을 돌아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또한 수연스님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어서 항상 승려로서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는 승려다운 자세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살자고 다짐을 하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탁자 밥을 내려 먹을 줄은 알아야 하는데, 요즘 세대 스님들은 법당에서의 의식 절차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불제자로서의 예를 갖출 줄 알고 미덕을 실천하는 생활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원만사 불사 중에 위장병이 심했던 스님이 운문사의 북대암에서 기도할 때의 일이다.&lt;br /&gt;
‘제가 은사스님을 모시고 불사를 도와드리려면 제 몸이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건강한 몸으로 우리 스님 뒷바라지하게 해주십시오.’하며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보다 어른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루에 사천배씩 삼일 동안 만배를 하여 회향하였다. 그 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지내왔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원만사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세수 44세 되던 해인 1986년 현재의 원만사 봉불식을 거행한 스님은 1999년 57세에 이르러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9&lt;br /&gt;
스님은 지금까지 은사스님을 모시고 원만사에 살면서 살림을 도맡아 왔고, 그동안 많은 아이들을 키워서 배출하였다. 원만사에는 지금도 스님이 돌보는 여러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스님은 모든 공로를 은사인 보현스님에게 돌리고 정작 당신은 한 것이 없다고 겸양하게 말한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로는 휴담(休潭)·선진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보신문, 대구 원만사 법홍 스님 주지 취임 (2004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30&lt;br /&gt;
&lt;br /&gt;
영남일보TV, '40년 전 發心' 대구 원만사 약사여래불 점안식 (2010년)&lt;br /&gt;
&lt;br /&gt;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01201.010240719150001&lt;br /&gt;
&lt;br /&gt;
불교신문, 대구 원만사 약사대불 점안 (2010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603&lt;br /&gt;
&lt;br /&gt;
BTN, 부처님, 저요저요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01&amp;amp;PID=P665&amp;amp;DPID=63305&lt;br /&gt;
&lt;br /&gt;
==대구 원만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lt;br /&gt;
&lt;br /&gt;
달구벌대로 계산오거리와 신남네거리 중간지점 대도로변에 위치한 도심 속에 우뚝 선 사찰로 경내에 높이 8m 약사여래대불이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중구 동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원만사는 원만 스님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으며, 현재 원만사 유치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lt;br /&gt;
&lt;br /&gt;
* 원만사 유치원 : https://cafe.daum.net/wonkid&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  &lt;br /&gt;
&lt;br /&gt;
[원만사 약사여래불]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39kkkiok/16155880  &lt;br /&gt;
&lt;br /&gt;
[원만사유치원] 사진출처 : 원만사유치원카페 https://cafe.daum.net/wonkid/k7Y4/1?q=%EC%9B%90%EB%A7%8C%EC%82%AC%EC%9C%A0%EC%B9%98%EC%9B%90&amp;amp;re=1&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法弘)스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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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보현(普賢)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원만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26~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94.&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5, 35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15 (동산동 708) 053-257-1914&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4</id>
		<title>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B2%95%ED%99%8D%EC%8A%A4%EB%8B%98(%E6%B3%95%E5%BC%98,_1943%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4"/>
		<updated>2022-07-07T11:54:1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대구 원만사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법홍(法弘)&lt;br /&gt;
|사진 = 194 법홍(法弘).jpg&lt;br /&gt;
|법명 = 법홍(法弘)&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백해선(白海仙)&lt;br /&gt;
|본관 = 수원&lt;br /&gt;
|출생 = 1943. 5. 3&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게종&lt;br /&gt;
|사찰 = 원만사(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보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구 원만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3 || 부산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원만사에서 보현(普賢)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일타(日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1971  ||  동학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5 ||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사&lt;br /&gt;
|-&lt;br /&gt;
|1979 || 원만사 총무&lt;br /&gt;
|-&lt;br /&gt;
|1995 || 삼화불교대학 유아교육과 졸업&lt;br /&gt;
|-&lt;br /&gt;
|1997 || 중앙대학교 보육교사 2급 취득&lt;br /&gt;
|-&lt;br /&gt;
|1999  || 원만사 주지 취임, 원만사 유치원 이사장 및 원장 취임&lt;br /&gt;
|-&lt;br /&gt;
|2004 || 원만사 주지 및 원만사 유치원 원장&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도는 못 깨쳐도 승려다워야 한다.&lt;br /&gt;
|-&lt;br /&gt;
|특기     || 서예, 사군자, 지장기도 &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휴담(休潭)·선진&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법홍(法弘)스님은 1943년 5월 3일 부산에서 아버지 백용이와 어머니 창녕 황씨 황공덕화 사이에서 8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며, 이름은 백해선이다.&lt;br /&gt;
&lt;br /&gt;
1962년 세수 20세 되던 해에 원만사에서 보현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그해 3월 15일 일타 큰스님께 사미니계를 받은 스님은 1964년 동학사에 입학해 1971년에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7&lt;br /&gt;
그 이후 약수암에서 여러 차례 안거를 성만하였으며, 1975년 고암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뒤에 은사스님을 도와 지금까지 계속 원만사에 상주하며 불사를 돕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강원 생활 중에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스님이 원주 소임을 살 때였다. 일초, 보명, 지형스님 등 도반스님들과 어울려, 제사에 쓰려고 장을 봐서 다락에 보관해둔 물품들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몰래 꺼내 먹는가 하면, 큰방 대중이 잠이 들면 슬그머니 들어가 잠자는 스님들의 얼굴에 잉크로 낙서를 하는 등 짓궂은 장난을 많이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행하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삭발염의한 머리와 승복을 돌아보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또한 수연스님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어서 항상 승려로서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는 승려다운 자세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살자고 다짐을 하였다.&lt;br /&gt;
&lt;br /&gt;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탁자 밥을 내려 먹을 줄은 알아야 하는데, 요즘 세대 스님들은 법당에서의 의식 절차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불제자로서의 예를 갖출 줄 알고 미덕을 실천하는 생활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원만사 불사 중에 위장병이 심했던 스님이 운문사의 북대암에서 기도할 때의 일이다.&lt;br /&gt;
‘제가 은사스님을 모시고 불사를 도와드리려면 제 몸이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건강한 몸으로 우리 스님 뒷바라지하게 해주십시오.’하며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보다 어른 스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루에 사천배씩 삼일 동안 만배를 하여 회향하였다. 그 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지내왔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lt;br /&gt;
원만사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세수 44세 되던 해인 1986년 현재의 원만사 봉불식을 거행한 스님은 1999년 57세에 이르러 원만사 주지로 취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9&lt;br /&gt;
스님은 지금까지 은사스님을 모시고 원만사에 살면서 살림을 도맡아 왔고, 그동안 많은 아이들을 키워서 배출하였다. 원만사에는 지금도 스님이 돌보는 여러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다. 스님은 모든 공로를 은사인 보현스님에게 돌리고 정작 당신은 한 것이 없다고 겸양하게 말한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로는 휴담(休潭)·선진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법보신문, 대구 원만사 법홍 스님 주지 취임 (2004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30&lt;br /&gt;
&lt;br /&gt;
영남일보TV, '40년 전 發心' 대구 원만사 약사여래불 점안식 (2010년)&lt;br /&gt;
&lt;br /&gt;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01201.010240719150001&lt;br /&gt;
&lt;br /&gt;
불교신문, 대구 원만사 약사대불 점안 (2010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603&lt;br /&gt;
&lt;br /&gt;
BTN, 부처님, 저요저요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01&amp;amp;PID=P665&amp;amp;DPID=63305&lt;br /&gt;
&lt;br /&gt;
==대구 원만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는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708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본사 동화사의 말사이다.&lt;br /&gt;
&lt;br /&gt;
달구벌대로 계산오거리와 신남네거리 중간지점 대도로변에 위치한 도심 속에 우뚝 선 사찰로 경내에 높이 8m 약사여래대불이 조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중구 동산동에 위치하고 있는 원만사는 원만 스님에 의해 최초로 창건되었으며, 현재 원만사 유치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 출처 :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lt;br /&gt;
&lt;br /&gt;
* 원만사 유치원 : https://cafe.daum.net/wonkid&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전경]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buddhafind/221902598493  &lt;br /&gt;
&lt;br /&gt;
[원만사 약사여래불]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39kkkiok/16155880  &lt;br /&gt;
&lt;br /&gt;
[원만사유치원] 사진출처 : 원만사유치원카페 https://cafe.daum.net/wonkid/k7Y4/1?q=%EC%9B%90%EB%A7%8C%EC%82%AC%EC%9C%A0%EC%B9%98%EC%9B%90&amp;amp;re=1&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법홍(法弘)스님] || 본항목 ||  || 법홍스님(法弘, 1943~) || 法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홍스님(法弘,_1943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현행(賢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법홍스님(法弘, 1943生, 비구니) | 법홍(法弘)스님]] ||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26~130.&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94.&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45, 35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원만사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15 (동산동 708) 053-257-1914&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A%85%EC%95%88%EC%8A%A4%EB%8B%98(%E6%98%8E%E5%B2%B8,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3</id>
		<title>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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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1:33: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명안(明岸)스님&lt;br /&gt;
|사진= 117 명안(明岸).jpg&lt;br /&gt;
|법명=명안(明岸)&lt;br /&gt;
|법호=&lt;br /&gt;
|속명=이정애&lt;br /&gt;
|출생=1941.1.12&lt;br /&gt;
|출가=196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입적=2006.8.2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명안(明岸)스님은 견성암에서 현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음성 미타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1 || 대전 출생&lt;br /&gt;
|-&lt;br /&gt;
|1962 || 견성암에서 현행(賢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3 || 무량사, 개심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1964 || 미타사 대웅전 불사&lt;br /&gt;
|-&lt;br /&gt;
|1975 ||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     || (천일기도 정진-묵언 및 산문 밖 출입을 금함)&lt;br /&gt;
|-&lt;br /&gt;
|1979 || 기도 회향, 대웅전 및 요사채 건립&lt;br /&gt;
|-&lt;br /&gt;
|1980  || 미타사 선원 건립&lt;br /&gt;
|-&lt;br /&gt;
|1992 || 일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받아 대광명 사리탑 조성&lt;br /&gt;
|-&lt;br /&gt;
|1998 ||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lt;br /&gt;
|-&lt;br /&gt;
|1999  || 성지도로 개통식&lt;br /&gt;
|-&lt;br /&gt;
|2006.8.27.  || 미타사에서 입적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청정하고 청빈한 수행 생활&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명안(明岸)스님은 1941년 1월 12일 대전에서 아버지 이순필과 어머니 양용분 사이의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며, 이름은 이정애이다.&lt;br /&gt;
&lt;br /&gt;
물을 길어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발가락을 황룡이 무는 예사롭지 않은 태몽을 꾸고 태어난 스님은 장차 효도할 줄 알았던 부모님의 기대와 는 달리 5살 되던 해에 당시 8살인 오빠의 죽음을 보고 일찍이 생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9&lt;br /&gt;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는 번민거리였다. 눈앞에 이제까지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까닭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체험은 두려움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생사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싶은 의지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스님은 21세 되던 1962년 석헌 큰스님으로부터 불교사상과 생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향천사에서 보산 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0&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과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출가한 뒤 석헌 큰스님과 비구니 만성스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금생에 꼭 성불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웠다. 1962년 간월도에서 선객스님 10여 명과 함께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성불을 하려면 일주일에 삼만배는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밤새워 절 기도를 하였다. 오로지 참선하여 성불할 생각만 했기 때문에 염불은 익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불을 못하여 은사스님께 걱정을 끼치자 20일 만에 모든 염불을 다 익히기도 하였다. 그만큼 스님은 영민함을 타고난 데다가 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집념이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몸이 몹시 허약했던 스님이지만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하루 육천 배씩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아픈 몸을 생각지 않고 자신을 호되게 몰아붙이던 스님은 은사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여에 있는 무량사 강원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뜻과 상관없이 시작한 강원 생활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개심사 강원으로 옮겨 사집을 보다가 걸망을 꾸려 만행 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만행 중 미타사로 오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여러 곳을 만행하던 중 우연히 미타사에 발길이 닿게 되었다.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던 고찰이다.&lt;br /&gt;
&lt;br /&gt;
창건 이후 고려시대 무학대사, 조선시대 사명대사 등 대덕스님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었고,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항마군)을 모집하여 청나라 병사를 물리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조선 영조 18년에 여러 차례의 화재와 이후 일어난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던 황량한 폐사지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미타사에서 잠시 걸망을 풀고 수행하다가 떠날 생각으로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법회를 볼 수 있는 장소마저 없어 야단법석으로 법문을 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1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불사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미타사에는 조선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석불이 비바람만 겨우 가린 채 허술하게 모셔져 있었다. 부처님을 편히 모실 수 있도록 절 한 채만 지어주고 가라는 신도들의 염원은 스님의 발길을 묶었는데, 절 한 채만 지어주고 떠나겠다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의 미타사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시작한 불사는 절 주변의 땅 30평을 시주받고 20만 원의 예산으로 시작하여 1965년 사월초파일에 기와 불사를 하여 원만히 성취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7년 스님은 걸망을 지고 만행의 길에 오르지만 무슨 인연인지 다시 미타사에 오게 되면서 첫 인연부터 마지막 삶까지 현몽을 꾸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이곳이 자신의 인연 터임을 인정하고 평소 걷고자 했던 수좌의 길은 아니지만 이생에서의 삶은 대중 외호와 포교를 위한 불사의 원력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1975년 고암 대화상을 계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한 명안스님은 같은 해 5월 묵언과 산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한 채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잠도 잊은 채 매진하였던 이 기도를 통하여 스님은 비록 간절히 원하였던 성불은 하지 못하였지만 대신 법당을 지어주겠다는 시주자(施主者)가 나타나 그해 법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때의 기도는 후일 미타사에서 21년 동안 천일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80년 스님은 선원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서암 큰스님의 지도 하에 일주일씩 장좌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과수원을 운영하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어떤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원이 생기고 대중 외호를 하다 보니 사찰의 경제를 신도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나무 과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납골당 건립===&lt;br /&gt;
10년 동안 농사를 짓다 보니 모든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즈음 스님의 속가 집안에서도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스님은 장례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수원 운영 문제도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그곳에 납골당을 건립하여 기도처로 활용한다면 사찰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원력을 세우고 곧바로 일을 추진하였다.&lt;br /&gt;
&lt;br /&gt;
납골당은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되 혐오감이 없고, 후손들이 아무 때나 찾아와 기도하고 참배 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공간이어야 했다. 스님은 이런 점을 인식하고 주불(키 108척)을 중심으로 좌우 6분의 지장보살을 겸한 7지장보살을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1인 1불 모시기 운동’으로 만 불의 원불을 함께 모실 계획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광명사리탑 조성===&lt;br /&gt;
&lt;br /&gt;
1992년 일타 큰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 받아 대광명(大光明) 사리탑을 조성하였고, 1998년에는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을 가진 뒤, 다음해 12월 22일 성지도로 개통식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불사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 10월 4일 조성 중이던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점안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후 납골당이 원만히 회향되고 그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복지관과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스님은 부처님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으로 마지막 생을 회향하고자 한다. 살아생전에 이 불사가 끝날지는 모르지만 회향은 걱정하지 않는다. 시작은 했으니 나머지 반은 후학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불사의 원력으로 살아온 스님은 그동안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청정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마음에 때를 묻혀서는 안 되며, 죽어서 설사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야 함을 강조하는 스님은 이 모든 불사의 원력이 청정한 삶에서 오는 힘이었다고 말씀한다.&lt;br /&gt;
&lt;br /&gt;
다음 생에는 선 수행하여 꼭 성불하고 싶다는 명안스님. 이곳 미타사가 지장보살의 성지로 우뚝 서서, 외롭고 힘든 중생들에게 영원한 귀의처가 되는 날은 스님의 원력과 지장보살님의 원력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명안스님은 2006년 8월 27일 미타사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법구에서 연꽃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로는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3&lt;br /&gt;
&lt;br /&gt;
[미타사 세존진신 사리탑]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4&lt;br /&gt;
&lt;br /&gt;
[명안스님] 사진출처: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신문, 기획/미타사 자연 가정납골 공원 (2001년)&lt;br /&gt;
&lt;br /&gt;
http://www.u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9&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음성 미타사 주지 명안 스님 입적 (2006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 연꽃모양 사리 '눈길' 음성 미타사 명안스님 입적후 발견 (2006년)&lt;br /&gt;
&lt;br /&gt;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716&lt;br /&gt;
&lt;br /&gt;
트래블아이,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을 품은 천년도량, 음성 ‘미타사’ (2018년)&lt;br /&gt;
&lt;br /&gt;
http://www.traveli.co.kr/read/contentsView/183/0/26/1&lt;br /&gt;
&lt;br /&gt;
BBS, 음성 미타사, '템플스테이 운영사찰' 지정…충북 8번째 (2020년)&lt;br /&gt;
&lt;br /&gt;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4932&lt;br /&gt;
&lt;br /&gt;
충북일보, 충북도SNS서포터즈 - 음성 미타사 (2020년)&lt;br /&gt;
&lt;br /&gt;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607294&lt;br /&gt;
&lt;br /&gt;
유튜브, 충북 음성 미타사 “詩” 그림자 부처 되어&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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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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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데이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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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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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  | 명안(明岸)스님]] || [[현행(賢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 | 명안(明岸)스님]] ||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彌陀寺)는 법주사의 말사로서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가섭산 동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의 준령이, 남쪽으로는 괴산군 감물면 성불산(成佛山)이 아득히 보이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이 절은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고, 헌강왕 2년 도선국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고종 1년 (1192년) 이원신 스님이 중수 한 뒤 1370년 무학대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조선 선조 38년(1584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으며,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대사가 항마군(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하여 출정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영조 18년(1742년)에 화재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1964년에 명안스님이 폐사지였던 이곳에서 중창의 원력을 세우고, 1965년 8칸의 당우를 다시 세우면서 불사를 시작했다. 당시 금오(金烏)스님과 혜암(惠庵)스님은 ‘수도자가 도를 깨칠 만한 도량’이라 찬탄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1979년 법당 앞에 대광명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1998년 경내지 농지 터에 지장보살 성지 조성불사에 착수하였다. 중창불사를 시작한 이래 11년 동안 임야 30정보를 매입하고 사찰 유지를 위해 약 1만여 평을 매입하였으며, 스님들이 직접 개간하였다. 개간지에는 사과와 배나무를 가꾸어 과수원으로 활용하다가 일부를 지장보살 성지로 조성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극락전, 미타선원, 자임당, 적운당, 서원당, 삼성각 등의 당우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미타사의 원불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아미타불이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좌상이 현몽을 하여 절을 중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 아래쪽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마애불(높이 230cm)이 있다. 자연 암벽에 양각한 것으로 신라 말엽 불상 양식을 계승,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전경] 사진출처 : 티스토리 https://kokyu.tistory.com/657&lt;br /&gt;
&lt;br /&gt;
[미타사 납골당] 사진출처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lt;br /&gt;
&lt;br /&gt;
[동양 최대 지장보살상]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servan/6349781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lt;br /&gt;
&lt;br /&gt;
,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陰城 彌陀寺 磨崖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신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머리와 어깨 부분을 깊이 새겨 상반신의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양손과 허리, 하반신부분은 음각의 선으로 윤곽만 나타내었다. 전체 높이 4.05m, 어깨 넓이 1.24m이며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묶음, 머리에는 두건형의 관모를 썼으며, 얼굴은 자비로우며 풍만하게 표현하고, 네모난 얼굴에 눈, 코, 입, 귀 등의 선은 뚜렷하나 약식화되어 정교함을 볼 수 없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어깨는 수평을 이루어 당당하지만 사실감이 적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이며,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수인(手印)은 아미타불의 손모양 가운데 한 형식을 표현한 듯 오른손은 밑으로 내렸고,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댄 모습으로 당시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여기에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옷자락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거구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lt;br /&gt;
* 출처 :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Type=R&amp;amp;thisPage=33&amp;amp;bbIdx=9021&amp;amp;searchField=&amp;amp;searchTex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 사진출처 :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Type=R&amp;amp;thisPage=33&amp;amp;bbIdx=9021&amp;amp;searchField=&amp;amp;searchTex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18~125.&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17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41, 43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음성군 소이면 소이로61번길 164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043-873-0330&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A%85%EC%95%88%EC%8A%A4%EB%8B%98(%E6%98%8E%E5%B2%B8,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2</id>
		<title>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A%85%EC%95%88%EC%8A%A4%EB%8B%98(%E6%98%8E%E5%B2%B8,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2"/>
		<updated>2022-07-07T11:31: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음성 미타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명안(明岸)스님&lt;br /&gt;
|사진= 117 명안(明岸).jpg&lt;br /&gt;
|법명=명안(明岸)&lt;br /&gt;
|법호=&lt;br /&gt;
|속명=이정애&lt;br /&gt;
|출생=1941.1.12&lt;br /&gt;
|출가=196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lt;br /&gt;
|입적=2006.8.2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명안(明岸)스님은 견성암에서 현행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음성 미타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1 || 대전 출생&lt;br /&gt;
|-&lt;br /&gt;
|1962 || 견성암에서 현행(賢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보산(普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3 || 무량사, 개심사 강원 수학&lt;br /&gt;
|-&lt;br /&gt;
|1964 || 미타사 대웅전 불사&lt;br /&gt;
|-&lt;br /&gt;
|1975 ||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     || (천일기도 정진-묵언 및 산문 밖 출입을 금함)&lt;br /&gt;
|-&lt;br /&gt;
|1979 || 기도 회향, 대웅전 및 요사채 건립&lt;br /&gt;
|-&lt;br /&gt;
|1980  || 미타사 선원 건립&lt;br /&gt;
|-&lt;br /&gt;
|1992 || 일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받아 대광명 사리탑 조성&lt;br /&gt;
|-&lt;br /&gt;
|1998 ||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lt;br /&gt;
|-&lt;br /&gt;
|1999  || 성지도로 개통식&lt;br /&gt;
|-&lt;br /&gt;
|2006.8.27.  || 미타사에서 입적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실상(實相)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청정하고 청빈한 수행 생활&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명안(明岸)스님은 1941년 1월 12일 대전에서 아버지 이순필과 어머니 양용분 사이의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이며, 이름은 이정애이다.&lt;br /&gt;
&lt;br /&gt;
물을 길어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발가락을 황룡이 무는 예사롭지 않은 태몽을 꾸고 태어난 스님은 장차 효도할 줄 알았던 부모님의 기대와 는 달리 5살 되던 해에 당시 8살인 오빠의 죽음을 보고 일찍이 생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9&lt;br /&gt;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는 번민거리였다. 눈앞에 이제까지 보이던 것이 어느 순간 까닭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체험은 두려움을 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생사에 대한 근원을 밝히고 싶은 의지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스님은 21세 되던 1962년 석헌 큰스님으로부터 불교사상과 생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향천사에서 보산 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0&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과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출가한 뒤 석헌 큰스님과 비구니 만성스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금생에 꼭 성불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웠다. 1962년 간월도에서 선객스님 10여 명과 함께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성불을 하려면 일주일에 삼만배는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밤새워 절 기도를 하였다. 오로지 참선하여 성불할 생각만 했기 때문에 염불은 익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불을 못하여 은사스님께 걱정을 끼치자 20일 만에 모든 염불을 다 익히기도 하였다. 그만큼 스님은 영민함을 타고난 데다가 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집념이 있었기에 어릴 때부터 몸이 몹시 허약했던 스님이지만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하루 육천 배씩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할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아픈 몸을 생각지 않고 자신을 호되게 몰아붙이던 스님은 은사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여에 있는 무량사 강원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뜻과 상관없이 시작한 강원 생활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개심사 강원으로 옮겨 사집을 보다가 걸망을 꾸려 만행 길에 올랐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만행 중 미타사로 오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여러 곳을 만행하던 중 우연히 미타사에 발길이 닿게 되었다. 미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던 고찰이다.&lt;br /&gt;
&lt;br /&gt;
창건 이후 고려시대 무학대사, 조선시대 사명대사 등 대덕스님들에 의해 몇 차례 중건되었고,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각성대사가 의병 3천 명(항마군)을 모집하여 청나라 병사를 물리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조선 영조 18년에 여러 차례의 화재와 이후 일어난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던 황량한 폐사지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미타사에서 잠시 걸망을 풀고 수행하다가 떠날 생각으로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법회를 볼 수 있는 장소마저 없어 야단법석으로 법문을 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1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불사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그 당시 미타사에는 조선시대 불상으로 추정되는 석불이 비바람만 겨우 가린 채 허술하게 모셔져 있었다. 부처님을 편히 모실 수 있도록 절 한 채만 지어주고 가라는 신도들의 염원은 스님의 발길을 묶었는데, 절 한 채만 지어주고 떠나겠다던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의 미타사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시작한 불사는 절 주변의 땅 30평을 시주받고 20만 원의 예산으로 시작하여 1965년 사월초파일에 기와 불사를 하여 원만히 성취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7년 스님은 걸망을 지고 만행의 길에 오르지만 무슨 인연인지 다시 미타사에 오게 되면서 첫 인연부터 마지막 삶까지 현몽을 꾸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이곳이 자신의 인연 터임을 인정하고 평소 걷고자 했던 수좌의 길은 아니지만 이생에서의 삶은 대중 외호와 포교를 위한 불사의 원력으로 살 것을 결심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일기도를 시작하다===&lt;br /&gt;
&lt;br /&gt;
1975년 고암 대화상을 계사로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한 명안스님은 같은 해 5월 묵언과 산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한 채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잠도 잊은 채 매진하였던 이 기도를 통하여 스님은 비록 간절히 원하였던 성불은 하지 못하였지만 대신 법당을 지어주겠다는 시주자(施主者)가 나타나 그해 법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때의 기도는 후일 미타사에서 21년 동안 천일기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80년 스님은 선원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서암 큰스님의 지도 하에 일주일씩 장좌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과수원을 운영하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어떤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원이 생기고 대중 외호를 하다 보니 사찰의 경제를 신도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나무 과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납골당 건립===&lt;br /&gt;
10년 동안 농사를 짓다 보니 모든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즈음 스님의 속가 집안에서도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로 인하여 스님은 장례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수원 운영 문제도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그곳에 납골당을 건립하여 기도처로 활용한다면 사찰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원력을 세우고 곧바로 일을 추진하였다.&lt;br /&gt;
&lt;br /&gt;
납골당은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나되 혐오감이 없고, 후손들이 아무 때나 찾아와 기도하고 참배 할 수 있는 편안한 휴식공간이어야 했다. 스님은 이런 점을 인식하고 주불(키 108척)을 중심으로 좌우 6분의 지장보살을 겸한 7지장보살을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단위로 ‘1인 1불 모시기 운동’으로 만 불의 원불을 함께 모실 계획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대광명사리탑 조성===&lt;br /&gt;
&lt;br /&gt;
1992년 일타 큰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분봉 받아 대광명(大光明) 사리탑을 조성하였고, 1998년에는 동양 최대 지장보살 성지 조성 기공식을 가진 뒤, 다음해 12월 22일 성지도로 개통식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불사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 10월 4일 조성 중이던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상 점안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후 납골당이 원만히 회향되고 그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복지관과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스님은 부처님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으로 마지막 생을 회향하고자 한다. 살아생전에 이 불사가 끝날지는 모르지만 회향은 걱정하지 않는다. 시작은 했으니 나머지 반은 후학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불사의 원력으로 살아온 스님은 그동안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청정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마음에 때를 묻혀서는 안 되며, 죽어서 설사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로 청정해야 함을 강조하는 스님은 이 모든 불사의 원력이 청정한 삶에서 오는 힘이었다고 말씀한다.&lt;br /&gt;
&lt;br /&gt;
다음 생에는 선 수행하여 꼭 성불하고 싶다는 명안스님. 이곳 미타사가 지장보살의 성지로 우뚝 서서, 외롭고 힘든 중생들에게 영원한 귀의처가 되는 날은 스님의 원력과 지장보살님의 원력이 하나가 되는 바로 그 날이 될 것이다.&lt;br /&gt;
&lt;br /&gt;
명안스님은 2006년 8월 27일 미타사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법구에서 연꽃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로는 희원(喜圓)·희찬(喜燦)·희성(喜性)·희문(喜文)·허응(虛應)·희운(喜雲)·수진(秀眞)·희경(嘉鏡)·정범(正梵)·청곡(靑谷)·희묵(喜默)·희철(希喆)·희유(希有)·석진(昔眞)·재홍(才弘)·희권(熹權)·희공(希空)·동찬(東煥)·석호(釋護)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3&lt;br /&gt;
&lt;br /&gt;
[미타사 세존진신 사리탑]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24&lt;br /&gt;
&lt;br /&gt;
[명안스님] 사진출처: 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신문, 기획/미타사 자연 가정납골 공원 (2001년)&lt;br /&gt;
&lt;br /&gt;
http://www.u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9&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음성 미타사 주지 명안 스님 입적 (2006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2784&lt;br /&gt;
&lt;br /&gt;
충청투데이, 연꽃모양 사리 '눈길' 음성 미타사 명안스님 입적후 발견 (2006년)&lt;br /&gt;
&lt;br /&gt;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716&lt;br /&gt;
&lt;br /&gt;
트래블아이, 동양 최대의 지장보살을 품은 천년도량, 음성 ‘미타사’ (2018년)&lt;br /&gt;
&lt;br /&gt;
http://www.traveli.co.kr/read/contentsView/183/0/26/1&lt;br /&gt;
&lt;br /&gt;
BBS, 음성 미타사, '템플스테이 운영사찰' 지정…충북 8번째 (2020년)&lt;br /&gt;
&lt;br /&gt;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4932&lt;br /&gt;
&lt;br /&gt;
충북일보, 충북도SNS서포터즈 - 음성 미타사 (2020년)&lt;br /&gt;
&lt;br /&gt;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607294&lt;br /&gt;
&lt;br /&gt;
유튜브, 충북 음성 미타사 “詩” 그림자 부처 되어&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 미타사==&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   | 명안(明岸)]] || 본항목 ||  || 명안스님(明岸, 1941~) || 明岸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안스님(明岸,_1941生,_비구니)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명안(明岸)스님] || 본항목 ||  || 명안스님(明岸, 1941~) || 明岸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명안스님(明岸,_1941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  | 명안(明岸)스님]] || [[법능(法能)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명안스님(明岸, 1941生, 비구니) | 명안(明岸)스님]] || [[용화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mitasa.or.kr/bod/index_true.php&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彌陀寺)는 법주사의 말사로서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가섭산 동남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의 준령이, 남쪽으로는 괴산군 감물면 성불산(成佛山)이 아득히 보이는 곳이다.&lt;br /&gt;
&lt;br /&gt;
이 절은 진덕여왕 8년(630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였고, 헌강왕 2년 도선국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고종 1년 (1192년) 이원신 스님이 중수 한 뒤 1370년 무학대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조선 선조 38년(1584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으며, 조선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대사가 항마군(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하여 출정한 공로로 나라에서 크게 중수하였으나, 영조 18년(1742년)에 화재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1964년에 명안스님이 폐사지였던 이곳에서 중창의 원력을 세우고, 1965년 8칸의 당우를 다시 세우면서 불사를 시작했다. 당시 금오(金烏)스님과 혜암(惠庵)스님은 ‘수도자가 도를 깨칠 만한 도량’이라 찬탄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1979년 법당 앞에 대광명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1998년 경내지 농지 터에 지장보살 성지 조성불사에 착수하였다. 중창불사를 시작한 이래 11년 동안 임야 30정보를 매입하고 사찰 유지를 위해 약 1만여 평을 매입하였으며, 스님들이 직접 개간하였다. 개간지에는 사과와 배나무를 가꾸어 과수원으로 활용하다가 일부를 지장보살 성지로 조성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극락전, 미타선원, 자임당, 적운당, 서원당, 삼성각 등의 당우로 구성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미타사의 원불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아미타불이 삼성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좌상이 현몽을 하여 절을 중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 아래쪽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인 마애불(높이 230cm)이 있다. 자연 암벽에 양각한 것으로 신라 말엽 불상 양식을 계승,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전경] 사진출처 : 티스토리 https://kokyu.tistory.com/657&lt;br /&gt;
&lt;br /&gt;
[미타사 납골당] 사진출처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V-FHTZTNhMc&lt;br /&gt;
&lt;br /&gt;
[동양 최대 지장보살상]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servan/6349781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lt;br /&gt;
&lt;br /&gt;
,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陰城 彌陀寺 磨崖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신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머리와 어깨 부분을 깊이 새겨 상반신의 입체감을 부각시켰다. 양손과 허리, 하반신부분은 음각의 선으로 윤곽만 나타내었다. 전체 높이 4.05m, 어깨 넓이 1.24m이며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높은 머리묶음, 머리에는 두건형의 관모를 썼으며, 얼굴은 자비로우며 풍만하게 표현하고, 네모난 얼굴에 눈, 코, 입, 귀 등의 선은 뚜렷하나 약식화되어 정교함을 볼 수 없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어깨는 수평을 이루어 당당하지만 사실감이 적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이며,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다. 수인(手印)은 아미타불의 손모양 가운데 한 형식을 표현한 듯 오른손은 밑으로 내렸고, 왼손은 들어 가슴 앞에 댄 모습으로 당시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평판적인 신체, 직선적인 윤곽, 여기에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 옷자락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 거구의 불상양식을 계승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lt;br /&gt;
&lt;br /&gt;
* 출처 :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Type=R&amp;amp;thisPage=33&amp;amp;bbIdx=9021&amp;amp;searchField=&amp;amp;searchText=&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음성미타사마애여래입상] 사진출처 :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Type=R&amp;amp;thisPage=33&amp;amp;bbIdx=9021&amp;amp;searchField=&amp;amp;searchTex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18~125.&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117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41, 434&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미타사 음성군 소이면 소이로61번길 164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043-873-0330&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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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88%98%EC%8A%A4%EB%8B%98(%E6%A1%82%E4%BF%AE,_194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1</id>
		<title>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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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1:25: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계수(桂修)스님&lt;br /&gt;
|사진 = [[File:036 계수(桂修).jpg|300px]]&lt;br /&gt;
|법명 = 계수(桂修)&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박희옥(朴喜玉)&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946. 3. 15&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천개사(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스님을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은사로 출가하여 천개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6 || 전북 무주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法能)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 운문사 강원 사교 수학 &lt;br /&gt;
|-&lt;br /&gt;
|1968~2004  || 전국 제방 선원에서 평생 참선&lt;br /&gt;
|-&lt;br /&gt;
|1970 ||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94 ||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 비구니 정혜도량 회장&lt;br /&gt;
|-&lt;br /&gt;
|1995 ||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2004 || 현재 천개사 회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백양사 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하루하루를 부끄럽지 않게 살자.&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1946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이름은 박희옥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7세 때 무주구천동 관음사에서 5개월 동안 동문선습, 명심보감 등 한문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그때 관음사에 오신 은사스님을 만났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절에 간 것은 스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검게 그을린 시골 사람들만 보다가 천사같이 곱고 섬섬옥수 예쁜 스님들을 보니 마냥 좋을 뿐이었다.&lt;br /&gt;
&lt;br /&gt;
공부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후 스님은 산중의 공기가 고향의 공기보다 훨씬 좋게 느껴졌다. 산바람이 그립고 스님들이 그리웠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스님은 도봉산 원효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발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스님들과 함께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절집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짐을 지고, 땅을 파고, 나무를 하고, 스님들 시봉을 하느라 한 번도 앉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밤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억울한 마음에 보따리를 쌌다. 그러나 출가할 때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나왔기에 선뜻 돌아갈 수가 없어 아침이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날마다 보따리를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세에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보리베기 울력(1964. 6. 9)]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4&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에 가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20세에 운문사 강원에 가게 되었다. 운문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물이 너무나도 맑아 낮에도 ‘이목소’에서 목욕을 했다. 스님은 운문사 도량이 무척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잘 견디어 여기까지 온 자신이 대견스럽고 장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마침내 운문사에서 발심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봐도, 산을 봐도, 물을 봐도 좋았다. 하루하루 너무 좋아서 신심이 났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스님은 24세에 『기신론』 소문에서 진정한 발심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지환즉즉리(知幻卽卽離) 즉리즉각(卽離卽覺)&lt;br /&gt;
&lt;br /&gt;
환인 줄 알면 곧 여의고 여읜 즉 깨달음이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나날이 발심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심 있게 생활하던 중 계수스님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지스님의 맏상좌 스님이 해제를 하고 돌아와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다.&lt;br /&gt;
&lt;br /&gt;
최고의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가면 다시는 되찾지 못한다는 절박함에 삼직 스님은 서둘러 석남사로 향했다. 석남사의 어른스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전국의 비구니가 모두 나서서라도 운문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이 선두에 서서 데모를 하고, 묘전 주지스님과 어른스님들 또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은 큰방에 소변통을 들여 놓고 하루 동안 단식을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방에 앉아 있다가는 다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며 동화사로 가서 데모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하여 모두들 동화사로 찾아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동화사에서 데모를 하는 동안에도 별 소득이 없었다. 주지스님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동화사 주지스님이 대구 포교당에 있으니 그곳으로 옮겨야 하며, 언론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학인들은 다시 대구 포교당으로 거처를 옮겨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다. 그제야 주지스님이 나와 ‘소원대로 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였고, 학인들은 데모를 멈추고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주지스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비구니스님들은 결국 운문사를 되찾았다. 모든 비구니가 마음을 합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때 계수스님은 학인 대표로서 혜춘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한 달여 동안 총무원을 드나들며 운문사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운문사를 되찾은 뒤 묘전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당시 마포 석불사에서 학인 몇 명을 가르치던 묘엄스님을 비구니 초대강사로 모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의 생활은 무척 고되었다. 농사일부터 시작하여 벌목꾼까지 잡으러 다녀야 했다. 1960년대에는 운문사의 주변 산에 불법벌목이 극심했다. 스님들은 숯 굽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숯을 구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여 함께 잡으러 다니곤 하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하였더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도망가고 노인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을 붙잡아 산을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따라왔다. 노인의 아내라고 하였다. 다른 산에는 나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운문사 주변까지 들어온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가난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불법으로 벌목을 해야 했던 노부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하러 간 사이 계수스님은 몰래 노부부를 도망가게 해주었다. 나중에 노부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어른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나 스님은 모르는 척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24세에 사교입선을 하고 『기신론』을 보다가 재발심을 하게 된 스님은 선원에 가기를 원하였다. 당시에는 강원에서 선원으로 가는 사람이 없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겨울 결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정한 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스승님은 성철 큰스님께 가서 화두를 타라고 하셨다. 계수스님은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큰스님을 찾아뵙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당시 전매청 뒤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이 있었는데, 동화사나 해인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성철 큰스님의 소식을 물으니 마침 출타 중이라서 해인사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계수스님은 성철 큰스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포교당에서 3일 동안 머물렀다. 잠시였지만 스님은 산중 생활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향곡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때 대구 동화사에 향곡 큰스님께서 오셨다는 얘기가 들렸다. 계수스님은 평소 향곡 큰스님을 뵙고 싶어 했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lt;br /&gt;
&lt;br /&gt;
일찍이 향곡 큰스님은 속가 시절 이미 출가한 사촌 형에게 책을 한 권 받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서당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해석을 해주시기는 하였으나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듯하였다. 이후 향곡 큰스님은 늘 책을 품고 다녔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심부름으로 절에 갔다가 한 젊은 지객스님께 다시 책의 뜻을 여쭈었다. 지객스님은 그 책이 치문이라며,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향곡 큰스님은 서당 선생님도 모르는 것을 젊은 스님이 모두 알고 있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향곡 큰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18세에 견성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로 찾아가 향곡 큰스님을 뵈었다.&lt;br /&gt;
&lt;br /&gt;
“어디서 왔느냐.”&lt;br /&gt;
&lt;br /&gt;
체구가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하신 향곡 큰스님이 물으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서 왔습니다.”&lt;br /&gt;
&lt;br /&gt;
“너는 강사하면 낫겠다.”&lt;br /&gt;
&lt;br /&gt;
큰스님의 말씀에 계수스님은 이렇게 여쭈었다.&lt;br /&gt;
&lt;br /&gt;
“백년 찌꺼기를 씹느니 한 모금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하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에서 큰스님께 화두를 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용맹정진===&lt;br /&gt;
&lt;br /&gt;
그해 겨울 향곡 큰스님께서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기로 하자 많은 수좌들이 내원암으로 모여 들었다. 큰스님은 이번 철에 대한민국의 비구니 큰스님이라 할 만한 딸 하나를 낳고 싶다.”고 하시며 수좌들과 한 방에서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lt;br /&gt;
&lt;br /&gt;
그만큼 스님의 경책 또한 매우 강하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님은 향을 뭉치째 불을 붙여 그대로 지졌고, ‘죽은 송장이나 같은 산송장이라 죽여도 괜찮다.’며 장삼 끈으로 목을 묶어서 도량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시절 불국사 참배 기념(1964. 11. 2)]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7&lt;br /&gt;
향곡 큰스님의 경책은 상처에 뿌리는 소금과도 같았다. 그래서 계수스님 역시 ‘내 금생에 확철대오하기 전에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리라.’하며 발심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다른 수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8시까지 정좌한 뒤 다시 양진암 토굴에 가서 또 앉을 정도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은 도가 높을 텐데도 저렇게 잠도 주무시지 않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하며 어른스님들을 따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lt;br /&gt;
&lt;br /&gt;
추운 겨울 눈밭에서 있다시피 하였더니 한 달 반 정도 지나자 이가 들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기 힘들뿐더러 고통도 심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듯하였다. 그래도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스님은 거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점점 말라갔다. 잠깐씩 도둑잠을 잘 때도 다른 스님들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스님은 힘이 없어서 조금만 졸아도 몸이 크게 움직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뒷줄 왼쪽 두 번째부터 무착, 정오, 혜해, 심원스님 앞줄 왼쪽부터 상행스님, 향곡 큰스님, 계수스님(내원사, 197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8&lt;br /&gt;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 끝나자 향곡스님께서 수좌들에게 말씀하셨다.&lt;br /&gt;
&lt;br /&gt;
“밥값하게 한 마디씩 해보아라. 역대 조사가 이 문에 들어오면 무간지옥을 간다고 하셨는데 무간지옥을 벗어나는 길을 일러라.”&lt;br /&gt;
&lt;br /&gt;
스님은‘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하라는 말씀을 잊고, 지혜가 부족하여 마음만 헐떡거렸다.’고 한다. 당대를 주름잡던 어른스님들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끝에 앉은 스님이 사량 분별로 한마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lt;br /&gt;
&lt;br /&gt;
“저는 큰스님처럼 확철대오도 못하고 공부도 못했지만 두 달 정진했는데 이 고통은 비길 바가 없어서 정말 이 문에 들어온 스님들은 생과 사를 넘을 지경이니 무간지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대한민국의 비구니 딸 하나 낳으려고 몸부림쳤으나 헛수고였구나.”하셨다.&lt;br /&gt;
&lt;br /&gt;
==치아 때문에 고생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첫 철을 나는 동안 건강이 나빠진 스님은 치아가 들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도블럭이 네모반듯하다는 사실도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긴 줄로만 알고 늘 조심스럽게 걸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느라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한 철을 지낸 후 계수스님은 치아를 모두 뽑아버리면 장애가 없을 것 같아 25세에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하였다. 치과의사가 시술한 것이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운 사람이 이를 뽑았다. 그리고 결국이 치료를 위해 마을에 있는 한 보살님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기가 막힌 것은 초발심이 불길 같아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그 집의 방이 단칸방이라 신랑이 퇴근하고 오면 스님은 다락으로 올라가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가 아침에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내려와서 생활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그 집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죽을 먹지 않았다. 이가 그 모양이라 본해탈보살이 이를 해주고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까봐 잇몸에서 피가 줄줄 나는데도 죽을 안 먹는다고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비록 틀니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아 때문에 장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lt;br /&gt;
 “돌이켜보면 지혜로운 처사는 아니었지만, 그런 초발심으로 용맹스럽게 수행했기 때문에 평생동안 제가 선원에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lt;br /&gt;
&lt;br /&gt;
1989년 계수스님은 혜춘스님의 소개로 좋은 치과에서 다시 틀니를 하게 되었다. 원래 틀니를 하는데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지만 혜춘스님이 ‘앞으로 비구니계를 책임질 스님이니 돈을 못 받게 되더라도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수중의 350만 원을 주고 치료를 받았다.&lt;br /&gt;
&lt;br /&gt;
처음 틀니를 할 때는 한 달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1년이 소요되었다. 주위에서는 사기꾼한테 걸려든 게 아니냐고 우려를 하였지만, 병원에서는 성심껏 정성을 다해 만드는 중이었다. 병원 원장은 불교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스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스님은 틀니를 만드는 그 1년 동안 선원을 다니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틀니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원장이 간호사에게 새 틀니를 씻어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틀니가 깨지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빨리 가져오라고 채근을 하였다. 계수스님은 원장에게 “틀니가 깨진 것 같은데, 너무 야단치지는 마세요.”하고 말하였다. 원장은 다시 소리를 치며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자 간호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틀니가 깨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장은 버럭 화를 냈고, 스님은 “이왕 깨진 거 나무란다고 복구될 것도 아닌데 그만 하세요.” 하며 말렸다.&lt;br /&gt;
&lt;br /&gt;
결국 밤새 다시 끊여서 아랫니는 다음날 기워서 끼웠다고 한다. 원장은 계수스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거듭 사죄를 하였다.&lt;br /&gt;
&lt;br /&gt;
“혜춘스님 말씀대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 상황이면 어느 누구도 화를 안 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가 꼭 다시 해드리겠습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틀니의 붙인 부분이 떨어져서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무척 바쁜지 틀니 교정은 계속 미뤄졌다. 그래도 스님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치과를 찾아서 교정을 하였다. 틀니는 여전히 잘 맞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원래의 치과를 찾았으나 원장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선원을 두루 다니며 정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맨 뒷줄 왼쪽 첫 번째 계수스님, 두 번째 수덕사 성우스님, 가운데줄 왼쪽 두 번째 도연 노스님, 세 번째 마하 노스님, 앞줄 왼쪽부터 경봉 큰스님, 선경 노스님(내원사, 1974.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lt;br /&gt;
 &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스님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이모님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이 계수스님을 부르셨다.&lt;br /&gt;
&lt;br /&gt;
“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lt;br /&gt;
&lt;br /&gt;
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의현스님이 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으로 계신 의현스님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1&lt;br /&gt;
 &lt;br /&gt;
&lt;br /&gt;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다===&lt;br /&gt;
&lt;br /&gt;
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lt;br /&gt;
&lt;br /&gt;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인 법능스님===&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의 은사스님은 1968년 도봉산 원효사에서 나와 청계산 끝자락에 토굴을 짓고 20년동안 노보살님과 함께 사셨다. 평생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비구니스님이자 학자로 살았던 은사스님은 공양을 드시면서 짜고 맵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밥도 못하는 사람이다. 짜면 물을 넣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서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처음 토굴을 지을 때 보살님 명의로 주택 허가를 받아 집을 짓고 사셨다. 그런데 당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서 1995년 계수스님이 사찰로 만들려고 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스님은 1년 가까이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겨우 사찰 토지로 만들어 놓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스님은 새로 불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부전생활을 하였다. 하루 사분정근을 하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 21편과 관세음보살 정근 천념을 하였고, 사시에는 매일 관음시식을 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계수스님은 독살이 절 살림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선원에서 살 때는 전혀 모르던 힘든 일이었다. 이후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원의 후인들에게 독살이 스님들의 어려움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선원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공양을 해주는 독살이 스님들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독살이 하는 곳에 불사가 있으면 해제철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살이하며 공양하는 스님들이 없으면 선원이 유지될 수 없고, 또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불사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불사를 마쳤다. 그런데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 은사스님께서 주신 불사금은 1억 5천만 원이었는데, 불사를 끝내고 모두 계산을 해보니 총 공사비가 10억이 넘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청빈 공덕인지, 제가 30년 면벽 공덕을 쌓았는지, 상좌와 함께 3대가 잘 산 공덕인지 모르겠지만 불사를 할 때는 말만 하면 다 되었습니다. ‘불사를 하는 것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니 힘 따라 하리라.’ 하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곤 했지요. 그때부터 저는 사심없이 불사를 하면 부처님께서 다 이뤄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무문관에 들다===&lt;br /&gt;
계수스님은 정축년 여름 결재를 오대산 지장암에서 나고, 8월 그믐께 무문관에 들어갔다. 평소 스님은 특별 기도하러 간다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 오후 불식 한다는 사람 등 특별히 무엇을 한다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며, 수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에 살면서 대중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무문관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하였는데, 도반인 수덕사 성우스님이 혼자서 가기가 어려웠는지 결제하는 것과 똑같다며 거듭 청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바랑만 메고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것저것 준비하거나 꼼꼼히 계산해서 돈을 쓰지 않고, 쓸 수 있는 만큼 한 번에 쓰고 마는 성품이어서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따로 무엇을 준비하지 않았었다.&lt;br /&gt;
&lt;br /&gt;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할 만큼 답답한 것을 못 견뎌했던 스님은 창문에 큰 창살이 박혀 있고 개구멍만한 구멍으로 밥이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서 수행을 했는데, 저혈압에다 심장까지 약해서 문이 쾅 닫힐 때마다 그 충격으로 앞뒤가 끊어졌다. 밥은 하루 한번만 들어오기 때문에 식은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 선경 노스님, 마하 노스님 등 어른스님들을 모시고 (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3&lt;br /&gt;
스님은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도 몰랐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을 줄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꽉 막힌 공간에서 두 달이 지나도록 창문을 열지도 않은 채, 경치 좋은 전국의 선원을 두루 다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은산철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한 달 쯤 지나자 극도로 상기되어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님은 ‘30년이 지나서 여기까지 왔거늘 어디서 죽은들 어떠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하며 휴지를 머리에 감고 무통 침으로 수백 군데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정도였다.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전후가 끊어져 아무 기억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올 때 알아보기나 할 것을.........’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어서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깨끗해졌다.&lt;br /&gt;
&lt;br /&gt;
원래 위가 약해서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해지곤 하였으니 음식의 양이 적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평소 잠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눈도 깜빡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았다. 그런 와중에 ‘3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lt;br /&gt;
&lt;br /&gt;
무문관은 알릴 사항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 각 방에 밥과 함께 들여보냈다. 하루는 쪽지에 ‘내일은 해가 바뀌는 29일, 뜨거운 물이 나오니 목욕하세요.’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평소 몸이 차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하였던 스님은 그날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달력의 글씨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는 ‘계룡산 갑사’라고 적혀 있었다.&lt;br /&gt;
&lt;br /&gt;
‘아, 여기가 계룡산 갑사란 말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구나.’&lt;br /&gt;
&lt;br /&gt;
스님은 그때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수좌스님들과 산행]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4&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지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아 수행 정진하는 데 큰 힘이 되는 몇 가지 말씀들이 있다.&lt;br /&gt;
&lt;br /&gt;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lt;br /&gt;
&lt;br /&gt;
이것은 1964년 무렵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세계불교 세미나가 열렸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lt;br /&gt;
&lt;br /&gt;
수계할 때 전강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지혜 있는 도학자여! 계산을 잘 해라.’라는 말씀에도 큰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lt;br /&gt;
‘깨닫지 못하면 산송장이다.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lt;br /&gt;
&lt;br /&gt;
향곡 큰스님의 이 말씀 또한 스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세 분의 큰스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을 늘 되새기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학들에게도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4세 되던 해 봄에 쌍계사에 경 찍으러 갔다가 주렴에 적힌 ‘삼라만상개오사(森羅萬象開悟事)’라는 글귀를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lt;br /&gt;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방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악연(惡緣)도 인연, 선연(善緣)도 인연입니다. 한때 어른스님들이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모두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를 주장하셨지만 저는 점수돈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인행시를 돌아보면 감히 수행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항상 기력이 없어서 서른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순을 넘긴 지금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부처님 인행과 용맹을 흉내 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며 오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늘 방일하지 말고, 혼자 있어도 대중에 있는 듯이 삼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속가 어머니와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강원에서 인과를 배울 때 한마디를 들으니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조부 밑에 인자하신 어머니가 계셨고, 무서운 노스님 밑에 자비하신 은사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어머니와 은사스님을 통해 이미 인과에 대해 배우고 깨달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아버지는 5형제 중의 셋째이셨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큰 아들 노릇을 하여 다른 이들이 큰집이라 부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그런데 스님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 할아버지가 매우 엄하게 대하셨다.&lt;br /&gt;
&lt;br /&gt;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돌아와 밥상을 뒤엎으며 어머니에게 욕을 하는 등 매우 모질게 대하며 재혼을 종용하였다. 스님은 할아버지에게 곤욕을 치르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밤새 울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lt;br /&gt;
&lt;br /&gt;
다음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장국을 끓여서 상을 차려 들고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잘못했다며 사죄를 드렸다. 할아버지께 아침밥을 차려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간밤의 행동이 부끄러워 식사를 하러 나오지 못할까봐 그랬던 것이다.’라고 하셨다.&lt;br /&gt;
&lt;br /&gt;
불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은사스님 또한 매우 훌륭하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올 때 은사스님은 31세, 스님은 18세였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쌀 2가마니를 팔아 그 돈을 어린 스님에게 맡겼는데, 계수스님은 깜짝 놀라며 거절을 하였다.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알아서 쓰라며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평생 통장을 소유한 적이 없고, 직접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셨다. 수중에 책값 몇 푼만 있으면 만족하는 분이셨다.&lt;br /&gt;
&lt;br /&gt;
강원 시절 계수스님이 운문사에서 오면 은사스님은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비를 모자라게 주시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탁발을 해야 했는데, 그런 생활이 고되어서 ‘나중에 크면 절대 탁발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저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은사스님은 젊은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분이 아니어서 힘든 면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더욱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원효암 행자 시절,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도로에서 원효암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길을 짐까지 지고 올라다녔다. 나무하기, 밥하기 등 절집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딸이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매우 완고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속가 시절보다는 모든 게 수월하게 느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가운데 진제 큰스님, 오른쪽 흥륜사 혜해 노스님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6&lt;br /&gt;
 &lt;br /&gt;
&lt;br /&gt;
===후대스님들에 대한 당부===&lt;br /&gt;
&lt;br /&gt;
행자 시절에는 늘 잠이 모자라기 일쑤여서 저녁에 짐을 지러 도로에 내려가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되었다. 행자 여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채 내려가곤 하였는데, 한 사람만 깨어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졸면서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스님들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바닥에 엉덩이만 닿으면 잠이 쏟아졌다. 해우소에 가서도 잿더미에 이마를 한 번 찧어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곤 하였다. 스님의 사형 중에는 스님보다 잠이 많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무를 하러 가면 꼭 ‘잠깐만’ 하고 앉아서 조는 것이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잠이 들어 늘 어른스님께 혼이 나곤 하였다. 함께 행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 가운데 현재까지 계신 분은 당시 꼬마 사숙이었던 위봉사 주지스님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요즘의 선원 분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가 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옛날에는 공부하려는 수좌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안 시킬 만큼 선원에서 참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원은 선을 하는 사람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총무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출가하면 8안거를 나야 한다고 하니 제도에 묶여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 분위기를 다 버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선 시간에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음악 듣고, 온갖 즐길 것 다 즐기는데, 그러면 공부는 언제 하겠습니까. 스님들은 근기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데,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좌가 정진 못하면 산송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은 어디를 갈 때 보따리는 싸서 택배로 부치고 몸은 가볍게 다닌다고 합니다. 수행자가 직접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젊은 시절 장래가 유망한 스님으로 주목을 받았고, 타고난 언변을 가졌다며 지도를 잘 받으면 훗날 좋은 강사가 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현재 스님은 천개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도량을 가꾸며 살고 있다.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법당을 보며 3대가 조용히 지내고 있는 천개사는 누구라도 한 번 들어오면 결재하러 선방에 가는 일 외에 일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상좌 한 명이 그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음악회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시내로 볼 일을 보러 다니기도 하자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때 계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삭발했으니 수행자가 아니냐. 그렇게 살자면 왜 수행의 길을 선택했느냐. 속인들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찌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무엇이 수행자의 길이냐.’하고 물었다. 상좌들은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고, 그 후부터는 스님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에게 오신채 냄새가 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사람멀미를 하는 계수스님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 엽서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사람만 맞으며 ‘하루를 함부로 지우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것이 수행’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수행 정진 중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7&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키백과, 서울 천개사 대혜보각선사서&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_%EC%B2%9C%EA%B0%9C%EC%82%AC_%EB%8C%80%ED%98%9C%EB%B3%B4%EA%B0%81%EC%84%A0%EC%82%AC%EC%84%9C&lt;br /&gt;
&lt;br /&gt;
현대불교, 서초구사암聯 신년하례법회 (2003년)&lt;br /&gt;
&lt;br /&gt;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154&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서울 서초불교사암聯, 21일 신년하례봉행 (2005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87&lt;br /&gt;
&lt;br /&gt;
불교닷컴, 서초사암련, 우면산 희생자 천도법회 열기로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01&lt;br /&gt;
&lt;br /&gt;
유튜브, 천개사 주지 계수스님 인터뷰 (2020년)&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Er4dWboklGs&lt;br /&gt;
&lt;br /&gt;
==천개사==&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전경] 사진출처 : http://www.vdc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53&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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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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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02~11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서초구 원터길 45)&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88%98%EC%8A%A4%EB%8B%98(%E6%A1%82%E4%BF%AE,_194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50</id>
		<title>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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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1:24: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천개사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계수(桂修)스님&lt;br /&gt;
|사진 = [[File:036 계수(桂修).jpg|300px]]&lt;br /&gt;
|법명 = 계수(桂修)&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박희옥(朴喜玉)&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946. 3. 15&lt;br /&gt;
|출가 = 1962&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천개사(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스님을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은사로 출가하여 천개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6 || 전북 무주 출생&lt;br /&gt;
|-&lt;br /&gt;
|1962 || 인천 용화사에서 법능(法能)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     || 용화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 운문사 강원 사교 수학 &lt;br /&gt;
|-&lt;br /&gt;
|1968~2004  || 전국 제방 선원에서 평생 참선&lt;br /&gt;
|-&lt;br /&gt;
|1970 || 부산 범어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94 ||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 비구니 정혜도량 회장&lt;br /&gt;
|-&lt;br /&gt;
|1995 ||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2004 || 현재 천개사 회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백양사 문중&lt;br /&gt;
|-&lt;br /&gt;
|수행지침 || 하루하루를 부끄럽지 않게 살자.&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계수(桂修)스님은 1946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이며, 이름은 박희옥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은 17세 때 무주구천동 관음사에서 5개월 동안 동문선습, 명심보감 등 한문공부를 하며 지냈는데, 그때 관음사에 오신 은사스님을 만났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절에 간 것은 스님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불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으며, 검게 그을린 시골 사람들만 보다가 천사같이 곱고 섬섬옥수 예쁜 스님들을 보니 마냥 좋을 뿐이었다.&lt;br /&gt;
&lt;br /&gt;
공부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후 스님은 산중의 공기가 고향의 공기보다 훨씬 좋게 느껴졌다. 산바람이 그립고 스님들이 그리웠다.&lt;br /&gt;
&lt;br /&gt;
그리하여 스님은 도봉산 원효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발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스님들과 함께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절집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짐을 지고, 땅을 파고, 나무를 하고, 스님들 시봉을 하느라 한 번도 앉지 못했다.&lt;br /&gt;
&lt;br /&gt;
밤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억울한 마음에 보따리를 쌌다. 그러나 출가할 때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놓고 나왔기에 선뜻 돌아갈 수가 없어 아침이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날마다 보따리를 쌌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3년 동안 행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세에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보리베기 울력(1964. 6. 9)]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4&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에 가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20세에 운문사 강원에 가게 되었다. 운문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물이 너무나도 맑아 낮에도 ‘이목소’에서 목욕을 했다. 스님은 운문사 도량이 무척 마음이 들었고, 그동안 잘 견디어 여기까지 온 자신이 대견스럽고 장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마침내 운문사에서 발심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봐도, 산을 봐도, 물을 봐도 좋았다. 하루하루 너무 좋아서 신심이 났다.&lt;br /&gt;
&lt;br /&gt;
그리고 스님은 24세에 『기신론』 소문에서 진정한 발심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지환즉즉리(知幻卽卽離) 즉리즉각(卽離卽覺)&lt;br /&gt;
&lt;br /&gt;
환인 줄 알면 곧 여의고 여읜 즉 깨달음이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나날이 발심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신심 있게 생활하던 중 계수스님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지스님의 맏상좌 스님이 해제를 하고 돌아와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전해준 것이다.&lt;br /&gt;
&lt;br /&gt;
최고의 비구니 도량인 운문사가 비구스님들에게 넘어가면 다시는 되찾지 못한다는 절박함에 삼직 스님은 서둘러 석남사로 향했다. 석남사의 어른스님들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전국의 비구니가 모두 나서서라도 운문사를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셨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이 선두에 서서 데모를 하고, 묘전 주지스님과 어른스님들 또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학인들은 큰방에 소변통을 들여 놓고 하루 동안 단식을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이렇게 방에 앉아 있다가는 다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며 동화사로 가서 데모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하여 모두들 동화사로 찾아갔다.&lt;br /&gt;
&lt;br /&gt;
그러나 동화사에서 데모를 하는 동안에도 별 소득이 없었다. 주지스님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다시 ‘동화사 주지스님이 대구 포교당에 있으니 그곳으로 옮겨야 하며, 언론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학인들은 다시 대구 포교당으로 거처를 옮겨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몰려와서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썼다. 그제야 주지스님이 나와 ‘소원대로 해줄 테니 돌아가라.’고 하였고, 학인들은 데모를 멈추고 돌아갔다.&lt;br /&gt;
&lt;br /&gt;
주지스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비구니스님들은 결국 운문사를 되찾았다. 모든 비구니가 마음을 합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때 계수스님은 학인 대표로서 혜춘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한 달여 동안 총무원을 드나들며 운문사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운문사를 되찾은 뒤 묘전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당시 마포 석불사에서 학인 몇 명을 가르치던 묘엄스님을 비구니 초대강사로 모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의 생활은 무척 고되었다. 농사일부터 시작하여 벌목꾼까지 잡으러 다녀야 했다. 1960년대에는 운문사의 주변 산에 불법벌목이 극심했다. 스님들은 숯 굽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숯을 구울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여 함께 잡으러 다니곤 하였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서둘러 현장에 도착하였더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도망가고 노인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 노인을 붙잡아 산을 내려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따라왔다. 노인의 아내라고 하였다. 다른 산에는 나무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운문사 주변까지 들어온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가난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불법으로 벌목을 해야 했던 노부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하러 간 사이 계수스님은 몰래 노부부를 도망가게 해주었다. 나중에 노부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어른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나 스님은 모르는 척하며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24세에 사교입선을 하고 『기신론』을 보다가 재발심을 하게 된 스님은 선원에 가기를 원하였다. 당시에는 강원에서 선원으로 가는 사람이 없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겨울 결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정한 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스승님은 성철 큰스님께 가서 화두를 타라고 하셨다. 계수스님은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큰스님을 찾아뵙기로 하였다.&lt;br /&gt;
&lt;br /&gt;
당시 전매청 뒤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한 보살이 있었는데, 동화사나 해인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성철 큰스님의 소식을 물으니 마침 출타 중이라서 해인사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 계수스님은 성철 큰스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포교당에서 3일 동안 머물렀다. 잠시였지만 스님은 산중 생활이 몹시도 그리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향곡스님과의 인연===&lt;br /&gt;
&lt;br /&gt;
그런데 그때 대구 동화사에 향곡 큰스님께서 오셨다는 얘기가 들렸다. 계수스님은 평소 향곡 큰스님을 뵙고 싶어 했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lt;br /&gt;
&lt;br /&gt;
일찍이 향곡 큰스님은 속가 시절 이미 출가한 사촌 형에게 책을 한 권 받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서당 선생님께 여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해석을 해주시기는 하였으나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 듯하였다. 이후 향곡 큰스님은 늘 책을 품고 다녔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의 심부름으로 절에 갔다가 한 젊은 지객스님께 다시 책의 뜻을 여쭈었다. 지객스님은 그 책이 치문이라며,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향곡 큰스님은 서당 선생님도 모르는 것을 젊은 스님이 모두 알고 있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이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향곡 큰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18세에 견성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로 찾아가 향곡 큰스님을 뵈었다.&lt;br /&gt;
&lt;br /&gt;
“어디서 왔느냐.”&lt;br /&gt;
&lt;br /&gt;
체구가 깡마르고 눈빛이 형형하신 향곡 큰스님이 물으셨다.&lt;br /&gt;
&lt;br /&gt;
“운문사에서 왔습니다.”&lt;br /&gt;
&lt;br /&gt;
“너는 강사하면 낫겠다.”&lt;br /&gt;
&lt;br /&gt;
큰스님의 말씀에 계수스님은 이렇게 여쭈었다.&lt;br /&gt;
&lt;br /&gt;
“백년 찌꺼기를 씹느니 한 모금 술을 마시고 싶습니다.”&lt;br /&gt;
&lt;br /&gt;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하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동화사에서 큰스님께 화두를 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용맹정진===&lt;br /&gt;
&lt;br /&gt;
그해 겨울 향곡 큰스님께서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기로 하자 많은 수좌들이 내원암으로 모여 들었다. 큰스님은 이번 철에 대한민국의 비구니 큰스님이라 할 만한 딸 하나를 낳고 싶다.”고 하시며 수좌들과 한 방에서 함께 용맹정진을 하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lt;br /&gt;
&lt;br /&gt;
그만큼 스님의 경책 또한 매우 강하였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님은 향을 뭉치째 불을 붙여 그대로 지졌고, ‘죽은 송장이나 같은 산송장이라 죽여도 괜찮다.’며 장삼 끈으로 목을 묶어서 도량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운문사 강원 시절 불국사 참배 기념(1964. 11. 2)]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7&lt;br /&gt;
향곡 큰스님의 경책은 상처에 뿌리는 소금과도 같았다. 그래서 계수스님 역시 ‘내 금생에 확철대오하기 전에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리라.’하며 발심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다른 수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8시까지 정좌한 뒤 다시 양진암 토굴에 가서 또 앉을 정도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은 도가 높을 텐데도 저렇게 잠도 주무시지 않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게으름 피우면 안 되지.’하며 어른스님들을 따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lt;br /&gt;
&lt;br /&gt;
추운 겨울 눈밭에서 있다시피 하였더니 한 달 반 정도 지나자 이가 들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기 힘들뿐더러 고통도 심하여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듯하였다. 그래도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스님은 거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점점 말라갔다. 잠깐씩 도둑잠을 잘 때도 다른 스님들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스님은 힘이 없어서 조금만 졸아도 몸이 크게 움직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뒷줄 왼쪽 두 번째부터 무착, 정오, 혜해, 심원스님 앞줄 왼쪽부터 상행스님, 향곡 큰스님, 계수스님(내원사, 197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8&lt;br /&gt;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 끝나자 향곡스님께서 수좌들에게 말씀하셨다.&lt;br /&gt;
&lt;br /&gt;
“밥값하게 한 마디씩 해보아라. 역대 조사가 이 문에 들어오면 무간지옥을 간다고 하셨는데 무간지옥을 벗어나는 길을 일러라.”&lt;br /&gt;
&lt;br /&gt;
스님은‘거문고 줄을 다루듯이 하라는 말씀을 잊고, 지혜가 부족하여 마음만 헐떡거렸다.’고 한다. 당대를 주름잡던 어른스님들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끝에 앉은 스님이 사량 분별로 한마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lt;br /&gt;
&lt;br /&gt;
“저는 큰스님처럼 확철대오도 못하고 공부도 못했지만 두 달 정진했는데 이 고통은 비길 바가 없어서 정말 이 문에 들어온 스님들은 생과 사를 넘을 지경이니 무간지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그러자 큰스님께서 “에라, 이놈아. 대한민국의 비구니 딸 하나 낳으려고 몸부림쳤으나 헛수고였구나.”하셨다.&lt;br /&gt;
&lt;br /&gt;
==치아 때문에 고생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첫 철을 나는 동안 건강이 나빠진 스님은 치아가 들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도블럭이 네모반듯하다는 사실도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원래 울퉁불퉁하게 생긴 줄로만 알고 늘 조심스럽게 걸었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느라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한 철을 지낸 후 계수스님은 치아를 모두 뽑아버리면 장애가 없을 것 같아 25세에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하였다. 치과의사가 시술한 것이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운 사람이 이를 뽑았다. 그리고 결국이 치료를 위해 마을에 있는 한 보살님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기가 막힌 것은 초발심이 불길 같아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그 집의 방이 단칸방이라 신랑이 퇴근하고 오면 스님은 다락으로 올라가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았다가 아침에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내려와서 생활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그 집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죽을 먹지 않았다. 이가 그 모양이라 본해탈보살이 이를 해주고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살이에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들까봐 잇몸에서 피가 줄줄 나는데도 죽을 안 먹는다고 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비록 틀니가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치아 때문에 장애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스님은 이후 제대로 씹어 먹을 수 없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lt;br /&gt;
 “돌이켜보면 지혜로운 처사는 아니었지만, 그런 초발심으로 용맹스럽게 수행했기 때문에 평생동안 제가 선원에서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lt;br /&gt;
&lt;br /&gt;
1989년 계수스님은 혜춘스님의 소개로 좋은 치과에서 다시 틀니를 하게 되었다. 원래 틀니를 하는데 비용이 무척 많이 들었지만 혜춘스님이 ‘앞으로 비구니계를 책임질 스님이니 돈을 못 받게 되더라도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여 수중의 350만 원을 주고 치료를 받았다.&lt;br /&gt;
&lt;br /&gt;
처음 틀니를 할 때는 한 달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1년이 소요되었다. 주위에서는 사기꾼한테 걸려든 게 아니냐고 우려를 하였지만, 병원에서는 성심껏 정성을 다해 만드는 중이었다. 병원 원장은 불교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스님이 방문하는 날에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스님은 틀니를 만드는 그 1년 동안 선원을 다니지 못하였다.&lt;br /&gt;
&lt;br /&gt;
틀니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원장이 간호사에게 새 틀니를 씻어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짤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틀니가 깨지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은 빨리 가져오라고 채근을 하였다. 계수스님은 원장에게 “틀니가 깨진 것 같은데, 너무 야단치지는 마세요.”하고 말하였다. 원장은 다시 소리를 치며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자 간호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틀니가 깨졌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장은 버럭 화를 냈고, 스님은 “이왕 깨진 거 나무란다고 복구될 것도 아닌데 그만 하세요.” 하며 말렸다.&lt;br /&gt;
&lt;br /&gt;
결국 밤새 다시 끊여서 아랫니는 다음날 기워서 끼웠다고 한다. 원장은 계수스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거듭 사죄를 하였다.&lt;br /&gt;
&lt;br /&gt;
“혜춘스님 말씀대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 상황이면 어느 누구도 화를 안 낼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가 꼭 다시 해드리겠습니다.”&lt;br /&gt;
&lt;br /&gt;
얼마 후 틀니의 붙인 부분이 떨어져서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무척 바쁜지 틀니 교정은 계속 미뤄졌다. 그래도 스님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치과를 찾아서 교정을 하였다. 틀니는 여전히 잘 맞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원래의 치과를 찾았으나 원장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그동안 전국의 유명한 선원을 두루 다니며 정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맨 뒷줄 왼쪽 첫 번째 계수스님, 두 번째 수덕사 성우스님, 가운데줄 왼쪽 두 번째 도연 노스님, 세 번째 마하 노스님, 앞줄 왼쪽부터 경봉 큰스님, 선경 노스님(내원사, 1974.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0&lt;br /&gt;
 &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lt;br /&gt;
&lt;br /&gt;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날 즈음 스님은 ‘우리가 선원에서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총무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야 선원에만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의현스님이 너무 오래 집권하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해제철을 맞아 잠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이모님의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은사스님이 계수스님을 부르셨다.&lt;br /&gt;
&lt;br /&gt;
“너를 찾아 난리가 났다. 지금 총무원이 쑥대밭이란다.” 때마침 선원의 수좌가 전화를 걸어와 하소연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학인들은 맞아 죽게 되었는데, 어른스님들은 보이지도 않아요. 스님들만 살려고 와 보시지도 않는 건가요? 스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lt;br /&gt;
&lt;br /&gt;
TV에서는 학인들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일단 한 번은 얼굴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계사로 갔다. 스님이 도착하자 일연스님은 ‘어른스님이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하며 죽은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듯 매우 반가워했다.&lt;br /&gt;
&lt;br /&gt;
그렇게 하여 학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수좌들까지 힘을 합쳐 일을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의현스님이 사상은 출가자 정신이라 학인들이 움직일 때는 그저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전국의 수좌들이 움직이니 수좌들에게 꺾이어 일단락이 났다. 비구니 어른스님들은 오랫동안 총무원장으로 계신 의현스님의 친분 때문에 나서지 못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1&lt;br /&gt;
 &lt;br /&gt;
&lt;br /&gt;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다===&lt;br /&gt;
&lt;br /&gt;
그 후 계수스님은 비구니 정혜도량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나는 뜻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굉장히 고생을 하였지요.”&lt;br /&gt;
&lt;br /&gt;
모임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해서 ‘정혜도량’이라 짓고 비구니 대표로 선원수좌(정)와 교학하는 강사(혜)들 모임으로 1년간 활동한 뒤 집권이 바뀌었으니 더이상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해체를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인 법능스님===&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의 은사스님은 1968년 도봉산 원효사에서 나와 청계산 끝자락에 토굴을 짓고 20년동안 노보살님과 함께 사셨다. 평생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비구니스님이자 학자로 살았던 은사스님은 공양을 드시면서 짜고 맵다는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밥도 못하는 사람이다. 짜면 물을 넣고 싱거우면 간장을 넣어서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처음 토굴을 지을 때 보살님 명의로 주택 허가를 받아 집을 짓고 사셨다. 그런데 당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서 1995년 계수스님이 사찰로 만들려고 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스님은 1년 가까이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겨우 사찰 토지로 만들어 놓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불사===&lt;br /&gt;
&lt;br /&gt;
스님은 새로 불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부전생활을 하였다. 하루 사분정근을 하면서 신묘장구대다라니 21편과 관세음보살 정근 천념을 하였고, 사시에는 매일 관음시식을 하며 『금강경』을 독송하였다.&lt;br /&gt;
&lt;br /&gt;
이때 계수스님은 독살이 절 살림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체험하였다. 선원에서 살 때는 전혀 모르던 힘든 일이었다. 이후 스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원의 후인들에게 독살이 스님들의 어려움과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lt;br /&gt;
&lt;br /&gt;
“우리가 선원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공양을 해주는 독살이 스님들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독살이 하는 곳에 불사가 있으면 해제철에 가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독살이하며 공양하는 스님들이 없으면 선원이 유지될 수 없고, 또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지 않으면 무간지옥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불사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무사히 불사를 마쳤다. 그런데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 은사스님께서 주신 불사금은 1억 5천만 원이었는데, 불사를 끝내고 모두 계산을 해보니 총 공사비가 10억이 넘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청빈 공덕인지, 제가 30년 면벽 공덕을 쌓았는지, 상좌와 함께 3대가 잘 산 공덕인지 모르겠지만 불사를 할 때는 말만 하면 다 되었습니다. ‘불사를 하는 것은 유산을 남기는 것이니 힘 따라 하리라.’ 하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곤 했지요. 그때부터 저는 사심없이 불사를 하면 부처님께서 다 이뤄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무문관에 들다===&lt;br /&gt;
계수스님은 정축년 여름 결재를 오대산 지장암에서 나고, 8월 그믐께 무문관에 들어갔다. 평소 스님은 특별 기도하러 간다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 오후 불식 한다는 사람 등 특별히 무엇을 한다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루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며, 수행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에 살면서 대중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그래서 스님은 무문관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하였는데, 도반인 수덕사 성우스님이 혼자서 가기가 어려웠는지 결제하는 것과 똑같다며 거듭 청하는 바람에 아무 준비 없이 바랑만 메고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것저것 준비하거나 꼼꼼히 계산해서 돈을 쓰지 않고, 쓸 수 있는 만큼 한 번에 쓰고 마는 성품이어서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따로 무엇을 준비하지 않았었다.&lt;br /&gt;
&lt;br /&gt;
지하실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할 만큼 답답한 것을 못 견뎌했던 스님은 창문에 큰 창살이 박혀 있고 개구멍만한 구멍으로 밥이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서 수행을 했는데, 저혈압에다 심장까지 약해서 문이 쾅 닫힐 때마다 그 충격으로 앞뒤가 끊어졌다. 밥은 하루 한번만 들어오기 때문에 식은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야 했다.&lt;br /&gt;
&lt;br /&gt;
&lt;br /&gt;
[내원사 동안거. 선경 노스님, 마하 노스님 등 어른스님들을 모시고 (1974. 1)]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3&lt;br /&gt;
스님은 전자레인지를 사용할 줄도 몰랐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을 줄도 몰랐다.&lt;br /&gt;
&lt;br /&gt;
그런데 꽉 막힌 공간에서 두 달이 지나도록 창문을 열지도 않은 채, 경치 좋은 전국의 선원을 두루 다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은산철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한 달 쯤 지나자 극도로 상기되어 계속 머리가 어지러웠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스님은 ‘30년이 지나서 여기까지 왔거늘 어디서 죽은들 어떠랴.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낫다.’ 하며 휴지를 머리에 감고 무통 침으로 수백 군데를 사정없이 찔렀다. 피가 줄줄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고일 정도였다. 무문관에 들어가면서 전후가 끊어져 아무 기억도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올 때 알아보기나 할 것을.........’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일어서면 쓰러질 줄 알았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깨끗해졌다.&lt;br /&gt;
&lt;br /&gt;
원래 위가 약해서 많이 먹으면 속이 불편해지곤 하였으니 음식의 양이 적은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평소 잠이 많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눈도 깜빡이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았다. 그런 와중에 ‘30년 동안 무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lt;br /&gt;
&lt;br /&gt;
무문관은 알릴 사항이 있으면 쪽지에 적어 각 방에 밥과 함께 들여보냈다. 하루는 쪽지에 ‘내일은 해가 바뀌는 29일, 뜨거운 물이 나오니 목욕하세요.’ 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평소 몸이 차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좋아하였던 스님은 그날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달력의 글씨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달력에는 ‘계룡산 갑사’라고 적혀 있었다.&lt;br /&gt;
&lt;br /&gt;
‘아, 여기가 계룡산 갑사란 말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르구나.’&lt;br /&gt;
&lt;br /&gt;
스님은 그때 환희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수좌스님들과 산행]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4&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지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에게는 마음에 오래 남아 수행 정진하는 데 큰 힘이 되는 몇 가지 말씀들이 있다.&lt;br /&gt;
&lt;br /&gt;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lt;br /&gt;
&lt;br /&gt;
이것은 1964년 무렵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세계불교 세미나가 열렸을 때 성철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다.&lt;br /&gt;
&lt;br /&gt;
수계할 때 전강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지혜 있는 도학자여! 계산을 잘 해라.’라는 말씀에도 큰 뜻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lt;br /&gt;
‘깨닫지 못하면 산송장이다. 죽여도 살인이 아니다.’&lt;br /&gt;
&lt;br /&gt;
향곡 큰스님의 이 말씀 또한 스님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세 분의 큰스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을 늘 되새기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후학들에게도 전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4세 되던 해 봄에 쌍계사에 경 찍으러 갔다가 주렴에 적힌 ‘삼라만상개오사(森羅萬象開悟事)’라는 글귀를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스승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lt;br /&gt;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방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인연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악연(惡緣)도 인연, 선연(善緣)도 인연입니다. 한때 어른스님들이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고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모두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돈오를 주장하셨지만 저는 점수돈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인행시를 돌아보면 감히 수행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항상 기력이 없어서 서른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예순을 넘긴 지금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부처님 인행과 용맹을 흉내 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며 오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늘 방일하지 말고, 혼자 있어도 대중에 있는 듯이 삼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속가 어머니와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강원에서 인과를 배울 때 한마디를 들으니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조부 밑에 인자하신 어머니가 계셨고, 무서운 노스님 밑에 자비하신 은사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어머니와 은사스님을 통해 이미 인과에 대해 배우고 깨달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아버지는 5형제 중의 셋째이셨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큰 아들 노릇을 하여 다른 이들이 큰집이라 부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그런데 스님이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 할아버지가 매우 엄하게 대하셨다.&lt;br /&gt;
&lt;br /&gt;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돌아와 밥상을 뒤엎으며 어머니에게 욕을 하는 등 매우 모질게 대하며 재혼을 종용하였다. 스님은 할아버지에게 곤욕을 치르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밤새 울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lt;br /&gt;
&lt;br /&gt;
다음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장국을 끓여서 상을 차려 들고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잘못했다며 사죄를 드렸다. 할아버지께 아침밥을 차려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간밤의 행동이 부끄러워 식사를 하러 나오지 못할까봐 그랬던 것이다.’라고 하셨다.&lt;br /&gt;
&lt;br /&gt;
불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은사스님 또한 매우 훌륭하고 자비로운 분이셨다.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올 때 은사스님은 31세, 스님은 18세였다. 하루는 은사스님께서 쌀 2가마니를 팔아 그 돈을 어린 스님에게 맡겼는데, 계수스님은 깜짝 놀라며 거절을 하였다.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알아서 쓰라며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평생 통장을 소유한 적이 없고, 직접 돈을 지니고 다니지 않으셨다. 수중에 책값 몇 푼만 있으면 만족하는 분이셨다.&lt;br /&gt;
&lt;br /&gt;
강원 시절 계수스님이 운문사에서 오면 은사스님은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교통비를 모자라게 주시곤 했다. 그럴 때면 스님은 탁발을 해야 했는데, 그런 생활이 고되어서 ‘나중에 크면 절대 탁발하지 않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저는 은사스님의 말씀을 거역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은사스님은 젊은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분이 아니어서 힘든 면이 많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더욱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원효암 행자 시절, 계수스님은 어른스님들께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도로에서 원효암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 길을 짐까지 지고 올라다녔다. 나무하기, 밥하기 등 절집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딸이 일곱이나 되는 집안에서, 매우 완고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속가 시절보다는 모든 게 수월하게 느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가운데 진제 큰스님, 오른쪽 흥륜사 혜해 노스님과 함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6&lt;br /&gt;
 &lt;br /&gt;
&lt;br /&gt;
===후대스님들에 대한 당부===&lt;br /&gt;
&lt;br /&gt;
행자 시절에는 늘 잠이 모자라기 일쑤여서 저녁에 짐을 지러 도로에 내려가면 그때가 쉬는 시간이 되었다. 행자 여러 명이 서로 손을 잡고 깍지를 낀 채 내려가곤 하였는데, 한 사람만 깨어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졸면서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스님들이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바닥에 엉덩이만 닿으면 잠이 쏟아졌다. 해우소에 가서도 잿더미에 이마를 한 번 찧어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곤 하였다. 스님의 사형 중에는 스님보다 잠이 많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무를 하러 가면 꼭 ‘잠깐만’ 하고 앉아서 조는 것이었다. 그러면 옆에서 기다리다가 같이 잠이 들어 늘 어른스님께 혼이 나곤 하였다. 함께 행자 시절을 보낸 스님들 가운데 현재까지 계신 분은 당시 꼬마 사숙이었던 위봉사 주지스님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요즘의 선원 분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가 된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옛날에는 공부하려는 수좌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안 시킬 만큼 선원에서 참선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원은 선을 하는 사람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총무원에서 잘못하고 있습니다. 출가하면 8안거를 나야 한다고 하니 제도에 묶여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수좌들이 몰려와 선방 분위기를 다 버려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선 시간에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음악 듣고, 온갖 즐길 것 다 즐기는데, 그러면 공부는 언제 하겠습니까. 스님들은 근기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데, 기본교육 과정이라는 제도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좌가 정진 못하면 산송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스님들은 어디를 갈 때 보따리는 싸서 택배로 부치고 몸은 가볍게 다닌다고 합니다. 수행자가 직접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입니다.”&lt;br /&gt;
&lt;br /&gt;
계수스님은 젊은 시절 장래가 유망한 스님으로 주목을 받았고, 타고난 언변을 가졌다며 지도를 잘 받으면 훗날 좋은 강사가 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현재 스님은 천개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도량을 가꾸며 살고 있다.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법당을 보며 3대가 조용히 지내고 있는 천개사는 누구라도 한 번 들어오면 결재하러 선방에 가는 일 외에 일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상좌 한 명이 그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는데, 음악회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시내로 볼 일을 보러 다니기도 하자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때 계수스님은 상좌들에게 ‘삭발했으니 수행자가 아니냐. 그렇게 살자면 왜 수행의 길을 선택했느냐. 속인들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찌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과연 무엇이 수행자의 길이냐.’하고 물었다. 상좌들은 아무 답변도 하지 못했고, 그 후부터는 스님의 지도를 잘 따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사람들에게 오신채 냄새가 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사람멀미를 하는 계수스님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 엽서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지도 않는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인연이 되어 찾아오는 사람만 맞으며 ‘하루를 함부로 지우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것이 수행’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수행 정진 중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서형(書亨)·석준(碩晙)·석원(碩圓)·석희(碩烯)·석담(碩潭)·석문(碩文)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17&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위키백과, 서울 천개사 대혜보각선사서&lt;br /&gt;
&lt;br /&gt;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_%EC%B2%9C%EA%B0%9C%EC%82%AC_%EB%8C%80%ED%98%9C%EB%B3%B4%EA%B0%81%EC%84%A0%EC%82%AC%EC%84%9C&lt;br /&gt;
&lt;br /&gt;
현대불교, 서초구사암聯 신년하례법회 (2003년)&lt;br /&gt;
&lt;br /&gt;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154&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서울 서초불교사암聯, 21일 신년하례봉행 (2005년)&lt;br /&gt;
&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5287&lt;br /&gt;
&lt;br /&gt;
불교닷컴, 서초사암련, 우면산 희생자 천도법회 열기로 (2011년)&lt;br /&gt;
&lt;br /&gt;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5901&lt;br /&gt;
&lt;br /&gt;
유튜브, 천개사 주지 계수스님 인터뷰 (2020년)&lt;br /&gt;
&lt;br /&gt;
https://www.youtube.com/watch?v=Er4dWboklGs&lt;br /&gt;
&lt;br /&gt;
==천개사==&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전경] 사진출처 : http://www.vdc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53&lt;br /&gt;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 || 본항목 ||  || 계수스님(桂修, 1946~)|| 眞愚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수스님(桂修,_194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수(桂修)스님] || 본항목 ||  || 계수스님(桂修, 1946~)||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수스님(桂修,_194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수스님(桂修, 1946生, 비구니) | 계수(桂修)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102~11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천개사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441 (서초구 원터길 45)&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4%EC%9A%B0%EC%8A%A4%EB%8B%98(%E7%9C%9E%E6%84%9A,_194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9</id>
		<title>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4%EC%9A%B0%EC%8A%A4%EB%8B%98(%E7%9C%9E%E6%84%9A,_194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9"/>
		<updated>2022-07-07T11:19: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진우(眞愚)스님&lt;br /&gt;
|사진 = 488 진우(眞愚)).jpg&lt;br /&gt;
|법명 = 진우(眞愚)&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김순희(金順喜)&lt;br /&gt;
|본관 = 경주&lt;br /&gt;
|출생 = 1949. 7. 18&lt;br /&gt;
|출가 = 1961년&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입적 = 생존&lt;br /&gt;
|사찰 = 팔정사(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342)&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진우(眞愚)스님은 연호스님을 은사로 팔정사에서 출가하여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9 || 서울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서울 팔정사에서 연호(蓮湖)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5 || 팔정사에서 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9 || 동학사 강원 사교 수료,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lt;br /&gt;
|-&lt;br /&gt;
|1971 ||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lt;br /&gt;
|-&lt;br /&gt;
|1974 || 명성여자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78 || 서울 동국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61 || 쌍계사에서 고산(杲山) 혜원(慧元)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9 || 세등선원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0 || 대성암 2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1 || 해인사 약수암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2 || 견성암 3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은해사 백흥암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5 || 오대산에서 2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 || 진주 토굴에서 정진&lt;br /&gt;
|-&lt;br /&gt;
|1994 ||  팔정사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19 || 팔정사 주석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5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생활신조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단경(䞡景)·준오(埈悟)&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진우(眞愚)스님은 1949년 7월 18일 서울시 중구 수하동 12번지에서 아버지 김재식과 어머니 신정열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순희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을 때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인연이 다했던지 같이 오래 살지 못하고 13살 되던 해에 헤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스님의 출가 동기는 지금의 사제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스님이 절에 와본 기억이라고는 국민학교 때 소풍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삭발한 동자스님의 모습이 그냥 좋아 보여 무작정 팔정사로 찾아갔다.&lt;br /&gt;
&lt;br /&gt;
이렇게 하여 1961년 10월 15일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연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1965년 성북동 팔정사에서 수덕사 혜암 노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학사 강원의 경봉스님의 시봉이 되다===&lt;br /&gt;
&lt;br /&gt;
다음 해에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였으며, 대중의 막내로 강사이신 경봉 노스님의 시자 소임을 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한번은 강사스님께 맛있는 공양을 해드린다며 싸리버섯을 따다 삶지도 않고 날것으로 반찬을 올린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강사스님은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어린 시자의 정성에 웃으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스님은 지금도 싸리버섯을 보면 철없던 때의 시자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후 스님은 『기신론』을 보다가 1969년에 외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강원을 나왔다. 그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71년에 검정고시로 명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명문학교였던 명성여고를 마친 뒤 1974년 동국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1978년에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캄보디아 성지 순례]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0&lt;br /&gt;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모여서 합동으로 계를 받았는데, 스님은 1978년 쌍계사에서 고산스님께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진우스님은 세등선원에서 안거를 시작으로 학문의 길을 접고 자신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자 선객의 길로 들어섰다. 대성암(1980년)에서 2년 안거, 수덕사 견성암(1982년)에서 3년 안거, 오대산(1985년)에서 2년 안거를 하는 등 10여 년간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후 1988년 진주의 토굴에서 다도를 하는 원표스님과 5년 가까이 함께 정진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극락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1&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주지소임을 맡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이 연세가 많다 보니 사찰관리가 여의치 않아서 스님은 본의 아니게 1994년부터 팔정사의 주지 소임을 맡아 현재까지 도량에 돌을 쌓고 큰 방과 선방을 증축하는 불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요사채를 잘 지어서 시민선방으로 활용함으로써 모든 대중이 함께 정진할 수 있는 도량을 발원하고 있는데, 서울 시내에 그만큼 아늑하고 아름다운 도량은 드물 것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오랫동안 선객으로 지내다가 주지를 맡아 사찰을 운영하면서 문득문득 걸망을 지고 떠나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는 스님은 연로하신 은사스님을 사십 평생 모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lt;br /&gt;
&lt;br /&gt;
2004년 진우스님은 매일 새벽 예불 후 『금강경』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49번 염송한 후 입선에 들어 ‘처처(處處) 안락국(安樂國)’을 화두삼아 정진 중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단경(䞡景)·준오(埈悟)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신문, 세상 밝게 만드는 스님 · 불자 자비나눔 이야기 (2019년)&lt;br /&gt;
&lt;br /&gt;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5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kyh61/18344599&lt;br /&gt;
팔정사 목 보살좌상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84호)&lt;br /&gt;
&lt;br /&gt;
팔정사(성북구 성북로31가길 82)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상이다. 팔정사 극락보전에 아미타불의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봉안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의 한 암자에서 모셔 왔다고 한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불꽃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조선 후기 보살상의 보관으로 크게 유행한 것이다. 몸체는 단아한 느낌을 주며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상의 바닥에는 복장공(腹藏孔)이 있으나 현재 복장물은 남아있지 않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유행하던 목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정연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대세지보살로서 조선 후기 불상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4년 7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071.do;jsessionid=C4D23BD321B87AAB1B3F335D2DC2522D&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목 보살좌상] 사진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071.do;jsessionid=C4D23BD321B87AAB1B3F335D2DC2522D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 || 본항목 ||  || 진우스님(眞愚, 1949~)|| 眞愚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우스님(眞愚,_194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진우(眞愚)스님] || 본항목 ||  || 진우스님(眞愚, 1949~)||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우스님(眞愚,_194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스님]] || [[연호(蓮湖)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스님]] || [[팔정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8~101.&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88.&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1, 41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서울 성북구 성북로31가길 82 (성북동 3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4%EC%9A%B0%EC%8A%A4%EB%8B%98(%E7%9C%9E%E6%84%9A,_194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8</id>
		<title>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4%EC%9A%B0%EC%8A%A4%EB%8B%98(%E7%9C%9E%E6%84%9A,_194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8"/>
		<updated>2022-07-07T11:18: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팔정사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진우(眞愚)스님&lt;br /&gt;
|사진 = 488 진우(眞愚)).jpg&lt;br /&gt;
|법명 = 진우(眞愚)&lt;br /&gt;
|법호 =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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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1961년&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입적 = 생존&lt;br /&gt;
|사찰 = 팔정사(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 342)&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진우(眞愚)스님은 연호스님을 은사로 팔정사에서 출가하여 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9 || 서울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서울 팔정사에서 연호(蓮湖)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5 || 팔정사에서 혜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9 || 동학사 강원 사교 수료,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lt;br /&gt;
|-&lt;br /&gt;
|1971 ||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lt;br /&gt;
|-&lt;br /&gt;
|1974 || 명성여자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78 || 서울 동국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61 || 쌍계사에서 고산(杲山) 혜원(慧元)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9 || 세등선원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0 || 대성암 2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1 || 해인사 약수암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2 || 견성암 3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3 || 은해사 백흥암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5 || 오대산에서 2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88 || 진주 토굴에서 정진&lt;br /&gt;
|-&lt;br /&gt;
|1994 ||  팔정사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2019 || 팔정사 주석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5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생활신조 ||처처(處處)가 안락국(安樂國)이다.&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단경(䞡景)·준오(埈悟)&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진우(眞愚)스님은 1949년 7월 18일 서울시 중구 수하동 12번지에서 아버지 김재식과 어머니 신정열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순희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아직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을 때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인연이 다했던지 같이 오래 살지 못하고 13살 되던 해에 헤어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스님의 출가 동기는 지금의 사제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스님이 절에 와본 기억이라고는 국민학교 때 소풍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도 삭발한 동자스님의 모습이 그냥 좋아 보여 무작정 팔정사로 찾아갔다.&lt;br /&gt;
&lt;br /&gt;
이렇게 하여 1961년 10월 15일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연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1965년 성북동 팔정사에서 수덕사 혜암 노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동학사 강원의 경봉스님의 시봉이 되다===&lt;br /&gt;
&lt;br /&gt;
다음 해에 동학사 강원에 입학하였으며, 대중의 막내로 강사이신 경봉 노스님의 시자 소임을 맡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한번은 강사스님께 맛있는 공양을 해드린다며 싸리버섯을 따다 삶지도 않고 날것으로 반찬을 올린 일이 있었다. 이를 보고 강사스님은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어린 시자의 정성에 웃으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셨다. 스님은 지금도 싸리버섯을 보면 철없던 때의 시자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 후 스님은 『기신론』을 보다가 1969년에 외전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강원을 나왔다. 그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71년에 검정고시로 명성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명문학교였던 명성여고를 마친 뒤 1974년 동국대학교에 입학을 하여 1978년에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캄보디아 성지 순례]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0&lt;br /&gt;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모여서 합동으로 계를 받았는데, 스님은 1978년 쌍계사에서 고산스님께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행===&lt;br /&gt;
&lt;br /&gt;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진우스님은 세등선원에서 안거를 시작으로 학문의 길을 접고 자신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고자 선객의 길로 들어섰다. 대성암(1980년)에서 2년 안거, 수덕사 견성암(1982년)에서 3년 안거, 오대산(1985년)에서 2년 안거를 하는 등 10여 년간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 후 1988년 진주의 토굴에서 다도를 하는 원표스님과 5년 가까이 함께 정진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극락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101&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주지소임을 맡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이 연세가 많다 보니 사찰관리가 여의치 않아서 스님은 본의 아니게 1994년부터 팔정사의 주지 소임을 맡아 현재까지 도량에 돌을 쌓고 큰 방과 선방을 증축하는 불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요사채를 잘 지어서 시민선방으로 활용함으로써 모든 대중이 함께 정진할 수 있는 도량을 발원하고 있는데, 서울 시내에 그만큼 아늑하고 아름다운 도량은 드물 것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lt;br /&gt;
&lt;br /&gt;
오랫동안 선객으로 지내다가 주지를 맡아 사찰을 운영하면서 문득문득 걸망을 지고 떠나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는 스님은 연로하신 은사스님을 사십 평생 모시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lt;br /&gt;
&lt;br /&gt;
2004년 진우스님은 매일 새벽 예불 후 『금강경』을 독송하고 다라니를 49번 염송한 후 입선에 들어 ‘처처(處處) 안락국(安樂國)’을 화두삼아 정진 중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단경(䞡景)·준오(埈悟)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신문, 세상 밝게 만드는 스님 · 불자 자비나눔 이야기 (2019년)&lt;br /&gt;
&lt;br /&gt;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5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블로그 https://blog.daum.net/kyh61/18344599&lt;br /&gt;
팔정사 목 보살좌상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84호)&lt;br /&gt;
&lt;br /&gt;
팔정사(성북구 성북로31가길 82)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상이다. 팔정사 극락보전에 아미타불의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봉안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의 한 암자에서 모셔 왔다고 한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불꽃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조선 후기 보살상의 보관으로 크게 유행한 것이다. 몸체는 단아한 느낌을 주며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상의 바닥에는 복장공(腹藏孔)이 있으나 현재 복장물은 남아있지 않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유행하던 목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정연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대세지보살로서 조선 후기 불상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4년 7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lt;br /&gt;
&lt;br /&gt;
* 출처 :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071.do;jsessionid=C4D23BD321B87AAB1B3F335D2DC2522D&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목 보살좌상] 사진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1071.do;jsessionid=C4D23BD321B87AAB1B3F335D2DC2522D  &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 || 본항목 ||  || 진우스님(眞愚, 1949~)|| 眞愚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우스님(眞愚,_194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진우(眞愚)스님] || 본항목 ||  || 진우스님(眞愚, 1949~)||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진우스님(眞愚,_194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진우스님(眞愚, 1949生, 비구니) | 진우(眞愚)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8~101.&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88.&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1, 417.&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팔정사 서울 성북구 성북로31가길 82 (성북동 3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8%98%EC%A7%84%EC%8A%A4%EB%8B%98(%E4%BF%AE%E7%9C%9E,_195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7</id>
		<title>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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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1:05: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시맨틱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수진(修眞)스님&lt;br /&gt;
|사진 = [[File: 수진(修眞).jpg|300px]]&lt;br /&gt;
|법명 = 수진(修眞))&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이세영&lt;br /&gt;
|본관 = 전주&lt;br /&gt;
|출생 = 1950. 3. 9&lt;br /&gt;
|출가 = 1961. 10&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수도사(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수도암에서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고 수도사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0 || 충남 서산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수도암에서 보화(普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 || 개심사에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7 || 수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8회 졸업&lt;br /&gt;
|-&lt;br /&gt;
|2021 || 수도사 주석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저서 || 『그날의 그림자는 소용돌이치네』, 황금알, 2019 (공저)&lt;br /&gt;
&lt;br /&gt;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세』, 황금알, 2020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3, 공저)&lt;br /&gt;
&lt;br /&gt;
『참꽃』, 황금알, 2021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4, 공저)&lt;br /&gt;
|-&lt;br /&gt;
|특기     || 염불&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동일(童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1950년 3월 9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아버지 이회만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순홍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세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태어났을 당시 스님의 속가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들은 공부를 가르쳤지만 여자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며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절에 다니고 있던 스님의 먼 친척인 육촌 올케가 수진스님에게 절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육촌 올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너무 잘 해주면서 서로들 상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에 육촌 올케가 청양 정혜사로 입산하자 스님도 비로소 발심하였고, 또한 절에 가면 늙을 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1961년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0월,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님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수도암으로 도망을 갔다.&lt;br /&gt;
&lt;br /&gt;
수도암에 오자마자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옥색저고리에 고의를 입고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에는 장삼이 없어서 스님은 지금 대처승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하루는 옷의 동정이 너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잿물에 빨았는데 동정이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1967년 개심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화엄경』을 다 마친 후 1977년에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강원에 보내 달라고 은사스님을 설득하여 개심사 강원에 입방하였고, 화엄사 강원과 청룡사 강원을 거쳐 운문사에서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강원을 옮겨 다닌 스님은 화엄사에서는 이모스님인 법우스님께 글을 배웠고 청룡사 강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룡사 강원에는 스님들 외에도 수녀, 수사, 신부님들도 있었고 대졸 출신뿐만 아니라 교편을 잡던 사람들도 있어서 강의 내용이 어려웠다. 내전뿐만 아니라 장자 등 한문 강의도 있어서 벅찼다고 한다. 그곳에서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스님은 한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셨다. 노스님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공부 중이어서 점심공양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돈이 없어서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율무차를 한 번 뽑아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 율무차 한 잔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을 떠올리면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 생전에 맛있는 것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이 한이 될 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가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무조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가 한 일에는 뭔가를 이루는 날이 꼭 온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전과 외전의 조화를 이루는 참된 수행&lt;br /&gt;
&lt;br /&gt;
언젠가 셋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신도 한 분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까지 있었던 보살님은 어느 날 가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스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보살은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시면 폭행이 잦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님을 위로하며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보살님은 고맙다면서 10년 후에는 웃으면서 스님을 뵈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며 떠났다.&lt;br /&gt;
&lt;br /&gt;
10년이 흐르고 난 뒤 어느 날 한 처사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며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을 둘러보고는 가로등이 없는 것을 보고 가로등을 세워주었다. 10년 전 스님을 찾아왔던 보살의 남편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과거 배고프던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진 만큼 나태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옛날 스님들은 은사스님과 대중에게 극진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일을 더 좋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와 근면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젊은 스님네 들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보기는 좋으나 참선 수행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외전도 중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전을 잘 가꾸어 조화를 이뤄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염불하는 것을 좋아하며 틈틈이 자수 놓는 것도 즐긴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지만 예전에는 병풍에 수를 놓아서 선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글 쓰는 것을 즐기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lt;br /&gt;
&lt;br /&gt;
2004년 수도암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수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일(童逸)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스님] 사진출처: 서산시대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농심 식문화연구, [사찰음식] 떡절로 유명한 수도사- 충남 서산시 (2011년)&lt;br /&gt;
&lt;br /&gt;
http://m.agroheart.co.kr/food/show_food_visit;jsessionid=ZpTGSzZTmpbJlc2Jb1Qv5xpvftrQ3tJ6Csgb4bj9H5SCtjk3BvZD!1703744216?groupCode=1&amp;amp;groupId=175&lt;br /&gt;
&lt;br /&gt;
불교신문, ⑦ 서산 수도사 호박떡 (2016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41&lt;br /&gt;
&lt;br /&gt;
서산시대, 【부처님 오신날 특별 인터뷰】 수도사 주지 수진(이세영) 스님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lt;br /&gt;
신아일보, 서산 수도사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산사음악회' 청중 심금 울려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6369&lt;br /&gt;
&lt;br /&gt;
중도일보, 홍성교도소서산지소교정협의회, 구정명절 특식 기증 (2012년)&lt;br /&gt;
&lt;br /&gt;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년&lt;br /&gt;
&lt;br /&gt;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amp;amp;barcode=4808974793418&amp;amp;search=Y&lt;br /&gt;
&lt;br /&gt;
==서산 수도사==&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icep/16165534&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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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진(修眞)스님]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4~9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0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1길 135-11 (부석면 취평리 14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8%98%EC%A7%84%EC%8A%A4%EB%8B%98(%E4%BF%AE%E7%9C%9E,_195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6</id>
		<title>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8%98%EC%A7%84%EC%8A%A4%EB%8B%98(%E4%BF%AE%E7%9C%9E,_195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4346"/>
		<updated>2022-07-07T11:05:0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서산 수도사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수진(修眞)스님&lt;br /&gt;
|사진 = [[File: 수진(修眞).jpg|300px]]&lt;br /&gt;
|법명 = 수진(修眞))&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이세영&lt;br /&gt;
|본관 = 전주&lt;br /&gt;
|출생 = 1950. 3. 9&lt;br /&gt;
|출가 = 1961. 10&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수도사(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수도암에서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고 수도사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0 || 충남 서산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수도암에서 보화(普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 || 개심사에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7 || 수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8회 졸업&lt;br /&gt;
|-&lt;br /&gt;
|2021 || 수도사 주석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저서 || 『그날의 그림자는 소용돌이치네』, 황금알, 2019 (공저)&lt;br /&gt;
&lt;br /&gt;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세』, 황금알, 2020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3, 공저)&lt;br /&gt;
&lt;br /&gt;
『참꽃』, 황금알, 2021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4, 공저)&lt;br /&gt;
|-&lt;br /&gt;
|특기     || 염불&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동일(童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1950년 3월 9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아버지 이회만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순홍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세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태어났을 당시 스님의 속가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들은 공부를 가르쳤지만 여자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며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절에 다니고 있던 스님의 먼 친척인 육촌 올케가 수진스님에게 절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육촌 올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너무 잘 해주면서 서로들 상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에 육촌 올케가 청양 정혜사로 입산하자 스님도 비로소 발심하였고, 또한 절에 가면 늙을 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1961년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0월,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님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수도암으로 도망을 갔다.&lt;br /&gt;
&lt;br /&gt;
수도암에 오자마자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옥색저고리에 고의를 입고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에는 장삼이 없어서 스님은 지금 대처승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하루는 옷의 동정이 너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잿물에 빨았는데 동정이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1967년 개심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화엄경』을 다 마친 후 1977년에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강원에 보내 달라고 은사스님을 설득하여 개심사 강원에 입방하였고, 화엄사 강원과 청룡사 강원을 거쳐 운문사에서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강원을 옮겨 다닌 스님은 화엄사에서는 이모스님인 법우스님께 글을 배웠고 청룡사 강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룡사 강원에는 스님들 외에도 수녀, 수사, 신부님들도 있었고 대졸 출신뿐만 아니라 교편을 잡던 사람들도 있어서 강의 내용이 어려웠다. 내전뿐만 아니라 장자 등 한문 강의도 있어서 벅찼다고 한다. 그곳에서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스님은 한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셨다. 노스님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공부 중이어서 점심공양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돈이 없어서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율무차를 한 번 뽑아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 율무차 한 잔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을 떠올리면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 생전에 맛있는 것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이 한이 될 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가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무조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가 한 일에는 뭔가를 이루는 날이 꼭 온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전과 외전의 조화를 이루는 참된 수행&lt;br /&gt;
&lt;br /&gt;
언젠가 셋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신도 한 분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까지 있었던 보살님은 어느 날 가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스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보살은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시면 폭행이 잦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님을 위로하며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보살님은 고맙다면서 10년 후에는 웃으면서 스님을 뵈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며 떠났다.&lt;br /&gt;
&lt;br /&gt;
10년이 흐르고 난 뒤 어느 날 한 처사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며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을 둘러보고는 가로등이 없는 것을 보고 가로등을 세워주었다. 10년 전 스님을 찾아왔던 보살의 남편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과거 배고프던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진 만큼 나태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옛날 스님들은 은사스님과 대중에게 극진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일을 더 좋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와 근면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젊은 스님네 들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보기는 좋으나 참선 수행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외전도 중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전을 잘 가꾸어 조화를 이뤄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염불하는 것을 좋아하며 틈틈이 자수 놓는 것도 즐긴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지만 예전에는 병풍에 수를 놓아서 선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글 쓰는 것을 즐기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lt;br /&gt;
&lt;br /&gt;
2004년 수도암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수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일(童逸)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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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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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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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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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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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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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스님] 사진출처: 서산시대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농심 식문화연구, [사찰음식] 떡절로 유명한 수도사- 충남 서산시 (2011년)&lt;br /&gt;
&lt;br /&gt;
http://m.agroheart.co.kr/food/show_food_visit;jsessionid=ZpTGSzZTmpbJlc2Jb1Qv5xpvftrQ3tJ6Csgb4bj9H5SCtjk3BvZD!1703744216?groupCode=1&amp;amp;groupId=175&lt;br /&gt;
&lt;br /&gt;
불교신문, ⑦ 서산 수도사 호박떡 (2016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41&lt;br /&gt;
&lt;br /&gt;
서산시대, 【부처님 오신날 특별 인터뷰】 수도사 주지 수진(이세영) 스님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lt;br /&gt;
신아일보, 서산 수도사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산사음악회' 청중 심금 울려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6369&lt;br /&gt;
&lt;br /&gt;
중도일보, 홍성교도소서산지소교정협의회, 구정명절 특식 기증 (2012년)&lt;br /&gt;
&lt;br /&gt;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년&lt;br /&gt;
&lt;br /&gt;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amp;amp;barcode=4808974793418&amp;amp;search=Y&lt;br /&gt;
&lt;br /&gt;
==서산 수도사==&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icep/16165534&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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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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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수진(修眞)스님]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4~9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0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1길 135-11 (부석면 취평리 14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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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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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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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0:57: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수진(修眞)스님&lt;br /&gt;
|사진 = [[File: 수진(修眞).jpg|300px]]&lt;br /&gt;
|법명 = 수진(修眞))&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이세영&lt;br /&gt;
|본관 = 전주&lt;br /&gt;
|출생 = 1950. 3. 9&lt;br /&gt;
|출가 = 1961. 10&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수도사(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수도암에서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고 수도사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0 || 충남 서산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수도암에서 보화(普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 || 개심사에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7 || 수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8회 졸업&lt;br /&gt;
|-&lt;br /&gt;
|2021 || 수도사 주석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저서 || 『그날의 그림자는 소용돌이치네』, 황금알, 2019 (공저)&lt;br /&gt;
&lt;br /&gt;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세』, 황금알, 2020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3, 공저)&lt;br /&gt;
&lt;br /&gt;
『참꽃』, 황금알, 2021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4, 공저)&lt;br /&gt;
|-&lt;br /&gt;
|특기     || 염불&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동일(童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1950년 3월 9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아버지 이회만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순홍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세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태어났을 당시 스님의 속가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들은 공부를 가르쳤지만 여자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며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절에 다니고 있던 스님의 먼 친척인 육촌 올케가 수진스님에게 절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육촌 올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너무 잘 해주면서 서로들 상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에 육촌 올케가 청양 정혜사로 입산하자 스님도 비로소 발심하였고, 또한 절에 가면 늙을 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1961년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0월,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님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수도암으로 도망을 갔다.&lt;br /&gt;
&lt;br /&gt;
수도암에 오자마자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옥색저고리에 고의를 입고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에는 장삼이 없어서 스님은 지금 대처승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하루는 옷의 동정이 너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잿물에 빨았는데 동정이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1967년 개심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화엄경』을 다 마친 후 1977년에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강원에 보내 달라고 은사스님을 설득하여 개심사 강원에 입방하였고, 화엄사 강원과 청룡사 강원을 거쳐 운문사에서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강원을 옮겨 다닌 스님은 화엄사에서는 이모스님인 법우스님께 글을 배웠고 청룡사 강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룡사 강원에는 스님들 외에도 수녀, 수사, 신부님들도 있었고 대졸 출신뿐만 아니라 교편을 잡던 사람들도 있어서 강의 내용이 어려웠다. 내전뿐만 아니라 장자 등 한문 강의도 있어서 벅찼다고 한다. 그곳에서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스님은 한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셨다. 노스님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공부 중이어서 점심공양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돈이 없어서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율무차를 한 번 뽑아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 율무차 한 잔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을 떠올리면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 생전에 맛있는 것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이 한이 될 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가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무조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가 한 일에는 뭔가를 이루는 날이 꼭 온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전과 외전의 조화를 이루는 참된 수행&lt;br /&gt;
&lt;br /&gt;
언젠가 셋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신도 한 분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까지 있었던 보살님은 어느 날 가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스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보살은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시면 폭행이 잦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님을 위로하며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보살님은 고맙다면서 10년 후에는 웃으면서 스님을 뵈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며 떠났다.&lt;br /&gt;
&lt;br /&gt;
10년이 흐르고 난 뒤 어느 날 한 처사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며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을 둘러보고는 가로등이 없는 것을 보고 가로등을 세워주었다. 10년 전 스님을 찾아왔던 보살의 남편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과거 배고프던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진 만큼 나태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옛날 스님들은 은사스님과 대중에게 극진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일을 더 좋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와 근면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젊은 스님네 들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보기는 좋으나 참선 수행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외전도 중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전을 잘 가꾸어 조화를 이뤄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염불하는 것을 좋아하며 틈틈이 자수 놓는 것도 즐긴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지만 예전에는 병풍에 수를 놓아서 선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글 쓰는 것을 즐기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lt;br /&gt;
&lt;br /&gt;
2004년 수도암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수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일(童逸)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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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수진(修眞)스님]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수도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스님] 사진출처: 서산시대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농심 식문화연구, [사찰음식] 떡절로 유명한 수도사- 충남 서산시 (2011년)&lt;br /&gt;
&lt;br /&gt;
http://m.agroheart.co.kr/food/show_food_visit;jsessionid=ZpTGSzZTmpbJlc2Jb1Qv5xpvftrQ3tJ6Csgb4bj9H5SCtjk3BvZD!1703744216?groupCode=1&amp;amp;groupId=175&lt;br /&gt;
&lt;br /&gt;
불교신문, ⑦ 서산 수도사 호박떡 (2016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41&lt;br /&gt;
&lt;br /&gt;
서산시대, 【부처님 오신날 특별 인터뷰】 수도사 주지 수진(이세영) 스님 (2019년)&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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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신아일보, 서산 수도사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산사음악회' 청중 심금 울려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6369&lt;br /&gt;
&lt;br /&gt;
중도일보, 홍성교도소서산지소교정협의회, 구정명절 특식 기증 (2012년)&lt;br /&gt;
&lt;br /&gt;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년&lt;br /&gt;
&lt;br /&gt;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amp;amp;barcode=4808974793418&amp;amp;search=Y&lt;br /&gt;
&lt;br /&gt;
==서산 수도사==&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icep/16165534&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4~9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0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1길 135-11 (부석면 취평리 14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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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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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0:55:5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수진(修眞)스님&lt;br /&gt;
|사진 = [[File: 수진(修眞).jpg|300px]]&lt;br /&gt;
|법명 = 수진(修眞))&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이세영&lt;br /&gt;
|본관 = 전주&lt;br /&gt;
|출생 = 1950. 3. 9&lt;br /&gt;
|출가 = 1961. 10&lt;br /&gt;
|종단 = 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 수도사(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144-1) &lt;br /&gt;
|입적 =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수도암에서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고 수도사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7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50 || 충남 서산 출생&lt;br /&gt;
|-&lt;br /&gt;
|1961 || 수도암에서 보화(普和)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67 || 개심사에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77 || 수덕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 운문사 강원 8회 졸업&lt;br /&gt;
|-&lt;br /&gt;
|2021 || 수도사 주석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 육화(六和)문중&lt;br /&gt;
|-&lt;br /&gt;
|저서 || 『그날의 그림자는 소용돌이치네』, 황금알, 2019 (공저)&lt;br /&gt;
&lt;br /&gt;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세』, 황금알, 2020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3, 공저)&lt;br /&gt;
&lt;br /&gt;
『참꽃』, 황금알, 2021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4, 공저)&lt;br /&gt;
|-&lt;br /&gt;
|특기     || 염불&lt;br /&gt;
|-&lt;br /&gt;
|수계제자 || 동일(童逸)&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1950년 3월 9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아버지 이회만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순홍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세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태어났을 당시 스님의 속가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들은 공부를 가르쳤지만 여자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며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절에 다니고 있던 스님의 먼 친척인 육촌 올케가 수진스님에게 절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육촌 올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너무 잘 해주면서 서로들 상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에 육촌 올케가 청양 정혜사로 입산하자 스님도 비로소 발심하였고, 또한 절에 가면 늙을 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1961년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0월,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님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수도암으로 도망을 갔다.&lt;br /&gt;
&lt;br /&gt;
수도암에 오자마자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옥색저고리에 고의를 입고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에는 장삼이 없어서 스님은 지금 대처승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하루는 옷의 동정이 너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잿물에 빨았는데 동정이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1967년 개심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화엄경』을 다 마친 후 1977년에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강원에 보내 달라고 은사스님을 설득하여 개심사 강원에 입방하였고, 화엄사 강원과 청룡사 강원을 거쳐 운문사에서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강원을 옮겨 다닌 스님은 화엄사에서는 이모스님인 법우스님께 글을 배웠고 청룡사 강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룡사 강원에는 스님들 외에도 수녀, 수사, 신부님들도 있었고 대졸 출신뿐만 아니라 교편을 잡던 사람들도 있어서 강의 내용이 어려웠다. 내전뿐만 아니라 장자 등 한문 강의도 있어서 벅찼다고 한다. 그곳에서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스님은 한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셨다. 노스님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공부 중이어서 점심공양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돈이 없어서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율무차를 한 번 뽑아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 율무차 한 잔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을 떠올리면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 생전에 맛있는 것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이 한이 될 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가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무조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가 한 일에는 뭔가를 이루는 날이 꼭 온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전과 외전의 조화를 이루는 참된 수행&lt;br /&gt;
&lt;br /&gt;
언젠가 셋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신도 한 분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까지 있었던 보살님은 어느 날 가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스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보살은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시면 폭행이 잦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님을 위로하며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보살님은 고맙다면서 10년 후에는 웃으면서 스님을 뵈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며 떠났다.&lt;br /&gt;
&lt;br /&gt;
10년이 흐르고 난 뒤 어느 날 한 처사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며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을 둘러보고는 가로등이 없는 것을 보고 가로등을 세워주었다. 10년 전 스님을 찾아왔던 보살의 남편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과거 배고프던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진 만큼 나태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옛날 스님들은 은사스님과 대중에게 극진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일을 더 좋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와 근면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젊은 스님네 들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보기는 좋으나 참선 수행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외전도 중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전을 잘 가꾸어 조화를 이뤄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염불하는 것을 좋아하며 틈틈이 자수 놓는 것도 즐긴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지만 예전에는 병풍에 수를 놓아서 선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글 쓰는 것을 즐기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lt;br /&gt;
&lt;br /&gt;
2004년 수도암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수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일(童逸)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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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수진(修眞)스님] || 본항목 ||  || 수진스님(修眞, 1950~)|| 修眞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수진스님(修眞,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보화(普和)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부석동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혜명사]] || ~를 창건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스님] 사진출처: 서산시대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농심 식문화연구, [사찰음식] 떡절로 유명한 수도사- 충남 서산시 (2011년)&lt;br /&gt;
&lt;br /&gt;
http://m.agroheart.co.kr/food/show_food_visit;jsessionid=ZpTGSzZTmpbJlc2Jb1Qv5xpvftrQ3tJ6Csgb4bj9H5SCtjk3BvZD!1703744216?groupCode=1&amp;amp;groupId=175&lt;br /&gt;
&lt;br /&gt;
불교신문, ⑦ 서산 수도사 호박떡 (2016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41&lt;br /&gt;
&lt;br /&gt;
서산시대, 【부처님 오신날 특별 인터뷰】 수도사 주지 수진(이세영) 스님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lt;br /&gt;
신아일보, 서산 수도사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산사음악회' 청중 심금 울려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6369&lt;br /&gt;
&lt;br /&gt;
중도일보, 홍성교도소서산지소교정협의회, 구정명절 특식 기증 (2012년)&lt;br /&gt;
&lt;br /&gt;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년&lt;br /&gt;
&lt;br /&gt;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amp;amp;barcode=4808974793418&amp;amp;search=Y&lt;br /&gt;
&lt;br /&gt;
==서산 수도사==&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icep/16165534&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4~9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0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1길 135-11 (부석면 취평리 14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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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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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7T10:51: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Hyuhyu: /* 수학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수진(修眞)스님&lt;br /&gt;
|사진 = [[File: 수진(修眞).jpg|300px]]&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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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수도암에서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고 수도사에서 수행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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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생애==&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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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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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1950 || 충남 서산 출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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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개심사에서 사미니계 수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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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세』, 황금알, 2020 (문학청춘작가회 동인지 3, 공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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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수진(修眞)스님은 1950년 3월 9일 충남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서 아버지 이회만과 어머니 남평 문씨 문순홍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세영이다.&lt;br /&gt;
&lt;br /&gt;
스님이 태어났을 당시 스님의 속가는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아들은 공부를 가르쳤지만 여자는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자는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면 된다.’며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셨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절에 다니고 있던 스님의 먼 친척인 육촌 올케가 수진스님에게 절에 같이 가보자고 권하였다.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육촌 올케를 따라 절에 갔는데, 스님들이 너무 잘 해주면서 서로들 상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lt;br /&gt;
&lt;br /&gt;
그해에 육촌 올케가 청양 정혜사로 입산하자 스님도 비로소 발심하였고, 또한 절에 가면 늙을 때까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1961년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10월, 가족들에게는 나들이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스님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수도암으로 도망을 갔다.&lt;br /&gt;
&lt;br /&gt;
수도암에 오자마자 삭발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옥색저고리에 고의를 입고 보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에는 장삼이 없어서 스님은 지금 대처승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하루는 옷의 동정이 너무 누렇게 바랜 것을 보고 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양잿물에 빨았는데 동정이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호되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스님은 1967년 개심사에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화엄경』을 다 마친 후 1977년에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어 강원에 보내 달라고 은사스님을 설득하여 개심사 강원에 입방하였고, 화엄사 강원과 청룡사 강원을 거쳐 운문사에서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공부를 하기 위해 몇몇 강원을 옮겨 다닌 스님은 화엄사에서는 이모스님인 법우스님께 글을 배웠고 청룡사 강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lt;br /&gt;
&lt;br /&gt;
청룡사 강원에는 스님들 외에도 수녀, 수사, 신부님들도 있었고 대졸 출신뿐만 아니라 교편을 잡던 사람들도 있어서 강의 내용이 어려웠다. 내전뿐만 아니라 장자 등 한문 강의도 있어서 벅찼다고 한다. 그곳에서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스님은 한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운문사에 있을 때 노스님이 입적하셨다. 노스님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공부 중이어서 점심공양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노스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돈이 없어서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율무차를 한 번 뽑아 드린 것이 전부였다. 그 율무차 한 잔을 가지고 서로 마시라고 양보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을 떠올리면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 생전에 맛있는 것을 제대로 못 해드린 것이 한이 될 뿐이라고 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가 있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였다. 인연이 되는 사람은 무조건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키울 때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가 한 일에는 뭔가를 이루는 날이 꼭 온다.’고 믿는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내전과 외전의 조화를 이루는 참된 수행&lt;br /&gt;
&lt;br /&gt;
언젠가 셋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신도 한 분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정불화까지 있었던 보살님은 어느 날 가정 문제로 고민하던 중 스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였다.&lt;br /&gt;
&lt;br /&gt;
그 보살은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술을 마시면 폭행이 잦아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님은 보살님을 위로하며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보살님은 고맙다면서 10년 후에는 웃으면서 스님을 뵈러 오겠노라고 약속을 하며 떠났다.&lt;br /&gt;
&lt;br /&gt;
10년이 흐르고 난 뒤 어느 날 한 처사가 절에 와서 기도를 하며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절을 둘러보고는 가로등이 없는 것을 보고 가로등을 세워주었다. 10년 전 스님을 찾아왔던 보살의 남편이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과거 배고프던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공부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진 만큼 나태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lt;br /&gt;
&lt;br /&gt;
“옛날 스님들은 은사스님과 대중에게 극진했는데 지금은 많이 변해서 안타깝습니다. 부처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일을 더 좋게 할 수 있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와 근면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젊은 스님네 들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보기는 좋으나 참선 수행이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외전도 중요 하지만 무엇보다 내전을 잘 가꾸어 조화를 이뤄야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염불하는 것을 좋아하며 틈틈이 자수 놓는 것도 즐긴다. 지금은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지만 예전에는 병풍에 수를 놓아서 선물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글 쓰는 것을 즐기며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lt;br /&gt;
&lt;br /&gt;
2004년 수도암사에서 수행 정진 중인 수진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동일(童逸)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2022년 상황 확인이 안됨)&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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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맨틱 데이터==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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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부석동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수진스님(修眞, 1950生, 비구니) | 수진(修眞)스님]] || [[혜명사]] || ~를 창건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진스님] 사진출처: 서산시대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농심 식문화연구, [사찰음식] 떡절로 유명한 수도사- 충남 서산시 (2011년)&lt;br /&gt;
&lt;br /&gt;
http://m.agroheart.co.kr/food/show_food_visit;jsessionid=ZpTGSzZTmpbJlc2Jb1Qv5xpvftrQ3tJ6Csgb4bj9H5SCtjk3BvZD!1703744216?groupCode=1&amp;amp;groupId=175&lt;br /&gt;
&lt;br /&gt;
불교신문, ⑦ 서산 수도사 호박떡 (2016년)&lt;br /&gt;
&lt;br /&gt;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41&lt;br /&gt;
&lt;br /&gt;
서산시대, 【부처님 오신날 특별 인터뷰】 수도사 주지 수진(이세영) 스님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s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923&lt;br /&gt;
&lt;br /&gt;
신아일보, 서산 수도사 '시와 음악이 어우러진 산사음악회' 청중 심금 울려 (2019년)&lt;br /&gt;
&lt;br /&gt;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66369&lt;br /&gt;
&lt;br /&gt;
중도일보, 홍성교도소서산지소교정협의회, 구정명절 특식 기증 (2012년)&lt;br /&gt;
&lt;br /&gt;
http://m.joongdo.co.kr/view.php?key=20210215010005446&lt;br /&gt;
&lt;br /&gt;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년&lt;br /&gt;
&lt;br /&gt;
http://preview.kyobobook.co.kr/epubPreviewPopup.jsp?type=web&amp;amp;barcode=4808974793418&amp;amp;search=Y&lt;br /&gt;
&lt;br /&gt;
==서산 수도사==&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전경]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nicep/16165534&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94~97.&lt;br /&gt;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10 .&lt;br /&gt;
&lt;br /&gt;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227, 423.&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수도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도비산1길 135-11 (부석면 취평리 144-2)&lt;/div&gt;</summary>
		<author><name>Hyuhyu</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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