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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igun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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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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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9T16:10: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자민(慈珉)스님&lt;br /&gt;
|사진= 385 자민(慈珉).jpg&lt;br /&gt;
|법명= '''자민(慈珉)'''&lt;br /&gt;
|법호= 보월(寶月)&lt;br /&gt;
|속명= 정시자(鄭時子)&lt;br /&gt;
|출생= 1939.10.15.&lt;br /&gt;
|출가= 1952년&lt;br /&gt;
|입적= &lt;br /&gt;
|사찰= '''연대선원'''&amp;lt;/br&amp;gt;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성동 589-5&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 시절에 청정한 승가를 위한 인재양성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재불사에 매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9 || 충북 제천 출생&lt;br /&gt;
|-&lt;br /&gt;
|1952 || 부산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진(惠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4 || 부산 범어사에서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2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개심사]에서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음&lt;br /&gt;
|-&lt;br /&gt;
|1969 || 서산 개심사 강원 강사 이후 [https://100.daum.net/encyclopedia;jsessionid=02313F5DDA96E0DE7FF6D9C0FD94A44C/view/14XXE0074132 청룡사],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사 역임&lt;br /&gt;
|-&lt;br /&gt;
|1978~1979 || 서산 개심사 강원 강주, 천안 연대암 주지, 재단법인 선학원 감사&lt;br /&gt;
|-   &lt;br /&gt;
|1981 || 대한불교 조계종 7, 8, 9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1985 ||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lt;br /&gt;
|-&lt;br /&gt;
|1985~1995 ||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lt;br /&gt;
|-&lt;br /&gt;
|1986 || 재단법인 선학원 교무이사&lt;br /&gt;
|-&lt;br /&gt;
|1988 || 서울 보련암(신림동) 주지, 서울 보성사(둔촌동) 주지&lt;br /&gt;
|-&lt;br /&gt;
|1997 || 양천구 목동청소년수련(회)관(현 목동청소년센터) 부관장&lt;br /&gt;
|-   &lt;br /&gt;
|2002 || 재단법인 선학원 교육위원장&lt;br /&gt;
|-   &lt;br /&gt;
|2018 || 선학원개혁비대위 상임대표,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둔촌동) 회주, 선학원미래포럼 회장&lt;br /&gt;
|-&lt;br /&gt;
|2019 || 명사법계 품수&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해훈(海訓, 6)→전오(典悟, 7)→행관(行觀, 8)→혜진(惠眞, 9)→[[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慈珉, 10)]]→지현(志衒, 11), 대영(大暎, 11), 재응(在應, 11), 보연(輔衍, 11), 선주(善住, 11), 상규(常圭, 11), 영운(嶺雲, 11), 진우(辰祐, 11), 지선(知宣, 11), 계현(季泫, 11), 성운(星雲, 11), 지오(志悟, 11), 진각(眞覺, 11), 영조(暎照, 11), 인욱(仁旭, 11)&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자민스님 아버지의 출가 및 환속===&lt;br /&gt;
[[File:385-01.jpg|섬네일|[졸업기념 (1965)]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5]]&lt;br /&gt;
[[File:385-02.jpg|섬네일|[범어사 비구 비구니 양선원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6]]&lt;br /&gt;
[[File:385-03.jpg|섬네일|[범어사 대성암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8]]&lt;br /&gt;
[[File:385-04.jpg|섬네일|[범어사 양선원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9]]&lt;br /&gt;
[[File:385-05.jpg|섬네일|[묘엄스님 전강받던 날]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1]]&lt;br /&gt;
[[File:385-06.jpg|섬네일|[비구니 수계식]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2]]&lt;br /&gt;
[[File:385-07.jpg|섬네일|개심사 제 1 회 대교졸업 기념 (1967. 2. 25)]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3]]&lt;br /&gt;
[[File:385-08.jpg|섬네일|[병오년 여름, 혜암 큰스님을 모시고]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5]]&lt;br /&gt;
[[File:385-09.jpg|섬네일|[강사 재직 시 사중 소임자 학인스님과 함께 ,  전강 직후  (1969)]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6]]&lt;br /&gt;
[[File:385-10.jpg|섬네일|[운문사 임시 강주시절 학인스님들과 함께 (1976)]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9]]&lt;br /&gt;
[[File:385-11.jpg|섬네일|[조치원 신광사 특강 기념 제자들과 함께 (1999)]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30]]&lt;br /&gt;
[[File:연대선원_천안.jpg|섬네일|[연대선원] 사진출처:선학원http://www.seonhakwon.or.kr/bbs/view.php?id=seon_sachal2&amp;amp;page=2&amp;amp;sn1=&amp;amp;divpage=1&amp;amp;category=5&amp;amp;sn=off&amp;amp;ss=on&amp;amp;sc=on&amp;amp;select_arrange=headnum&amp;amp;desc=asc&amp;amp;no=160&amp;amp;PHPSESSID=42f2b824ae31ef8abda907de9fea4e8c]]&lt;br /&gt;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1939년 10월 15일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류 상의 출생지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시자이다.&lt;br /&gt;
자민스님의 증조부 정운의는 병조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동학혁명 때 강진 해남으로 낙향을 했다. 어려운 세상살이에 시골 생활의 고단함까지 더해지자 스님의 할머니는 4살인 스님의 아버지를 업고 절로 들어갔다. 이에 스님의 아버지는 11세 때 계룡산 신원사에서 수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관응, 석주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출가 후 여러 수행처를 두루 다니며 수행하던 중 33세 되던 해 금강산에서 겨울을 나고 내려와 강원도를 지나는 길에 스님의 어머니를 만나 환속을 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의 출가===&lt;br /&gt;
&lt;br /&gt;
스님의 부모님은 화전민으로 양봉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북 단양의 하동산 스님 옆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동산 스님에게는 부모님의 강요로 얻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자라자 아버지 스님을 따라 출가를 했다. 그 분이 바로 지선스님이다. 자민스님은 지선스님을 14세 때 처음 만났고, 스님보다 세 살 위인 지선스님의 조카 하연자와 친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52년 어느 날, 친구 하연자와 범어사에 놀러 갔던 자민스님은 그곳이 마치 옛날에 살던 집처럼 느껴져서 출가하게 되었다. 그때 함께 갔던 이가 훗날 유화사 주지스님의 상좌가 된 연방스님(하동산 스님의 맏손녀)인데, 연방스님은 나중에 환속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의 은사스님(혜진(惠眞)스님)===&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대성암의 흙으로 만든 부뚜막에서 아침이면 죽 공양을 짓고, 나무를 하여 새끼줄로 묶어 짊어지고 와서 은사스님 방에 군불을 때면서 살았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멋쟁이셨다. 초하루와 보름 저녁이면 법문을 들으러 가시는 은사스님을 위해 자민스님은 꼭 광목 장삼을 다려 드렸다.&lt;br /&gt;
&lt;br /&gt;
16세의 자민스님은 후원에서 혼자 공양주&amp;lt;ref&amp;gt;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amp;lt;/ref&amp;gt; 를 살았는데, 70여 명의 공양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그 복으로 오늘까지 산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우스님이 부전&amp;lt;ref&amp;gt; 불전(佛殿)을 돌보고 각종 의식(儀式)을 담당하는 소임 &amp;lt;/ref&amp;gt;을 살고 만성스님과 탁자 밑에서 잠을 자던 그때가 영산회상 시절이었다. 은사스님은 범어사 주지스님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당 스님]의 아내였다. 경산당 스님의 영정은 범어사 영각에 모셔져 있다. 경산당 스님은 9명의 자녀를 두고 상처를 했는데, 은사스님의 모친(노스님)이 당신의 딸을 시집 보내어 아홉 아이를 키우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경산당 스님이 돌아가시고 은사스님은 진갑 해에 삭발을 했으며, 사자암과 논 20마지기를 경작하며 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쪽에서 본공스님과 본견스님 등 비구니스님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거처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민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큰절에 가서 절을 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라며 요청했고, 그리하여 사자암과 대성암을 바꾸어 받게 되었다. 대성암은 스님의 본사이다.&lt;br /&gt;
&lt;br /&gt;
이후 만성스님이 입승&amp;lt;ref&amp;gt;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amp;lt;/ref&amp;gt; 을 살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본견 스님이 도감&amp;lt;ref&amp;gt;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소임 &amp;lt;/ref&amp;gt; 을, 도정스님이 원주 소임&amp;lt;ref&amp;gt;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소임 &amp;lt;/ref&amp;gt; 을 살게 되었다. 소임을 돌려야 한다는 대중스님들의 의견에 따라 은사스님께서 도감을 내놓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민스님은 월명스님의 설득에 넘어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도감이 바뀌었는데, 종무소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았다. 성품이 선하신 은사스님에 대해 호의적 이었던 대처승들이 의리를 보여준 것이었고, 대처승들은 은사스님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대성암은 만성스님의 회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장군암 에피소드===&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17세 때 장군암에서 속임수를 당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이광우 스님, 대전에는 진광우 스님, 부산에는 강광우 스님이 있었다. 하루는 월명스님이 '장군암(강광우 스님)에서 부전을 살면 논산 정덕사에서 공부를 시켜주겠다.”며 자꾸 자민스님을 설득했다. 스님은 당시 자호스님이 재실 같은 곳을 고쳐서 정덕사로 이름 짓고 비구니 강단을 시작하려고 할 때여서 마음은 움직여도 은사스님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월명스님의 설득은 날로 강해졌고, 견디다 못한 스님은 빨래를 다 해놓고, 아침 죽까지 쑤어서 양푼에 넣어둔 다음 미리 챙겨둔 바랑을 메고 밤에 길을 떠났다. 월명스님은 일주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장군암에서는 부전살이&amp;lt;ref&amp;gt; 불전(佛殿)을 돌보고 각종 의식(儀式)을 담당하는 소임 &amp;lt;/ref&amp;gt;와 공양주살이를 했다. 그러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지만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월명스님이 모두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상가에 시달림을 가서 한 푼이라도 받아오면 그것마저 온갖 핑계를 대며 가져갔다. 누군가가 장삼을 해 입으라고 주었던 소청 한 필마저 가져가버렸다.&lt;br /&gt;
&lt;br /&gt;
그때는 부전살이를 하면 두 가지 누명을 쓴다는 말이 있었다. 도둑질과 서방질이 그것이다. 매일 장군암에서 고된 살림을 사느라 자민스님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논산 정덕사에 가서 공부를 시켜준다던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팔려서 간 것도 아닌데 수중에 돈이 전혀 없으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헌국불교정화운동 시 비구니스님들의 역할===&lt;br /&gt;
&lt;br /&gt;
장군암을 벗어나게 된 것은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928 정화운동] 때였다. 전국의 비구·비구니스님이 서울로 집결했다. 비구니스님들의 힘을 모두 모아 정화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장군암에서는 주지와 두 명의 스님 이 상경하기로 했고, 이에 자민스님이 가게 된 것이다. 기차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니 객차 안은 스님들로 가득했다. 당시는 정화운동이 일어난 초창기였고,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뒤 스님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장군암에서 7~8개월 동안 고달픈 머슴살이를 살았다. 은사스님이 미움을 받은 바람에 고생이 더 심했다. 은사스님의 성정이 착하고 자민스님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했던 뼈아픈 경험이었다.&lt;br /&gt;
&lt;br /&gt;
조계사는 대처승의 본부였다. 1953년 7월경 정화회의가 시작되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연되다가 삼동에 선학원과 조계사를 오가며 대처승들과 대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비구스님들은 비구니스님들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조계사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선학원에 가 있었다.&lt;br /&gt;
비구니스님들은 조계사에서 대처승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두면 대치 상황이 길어질 것으로 판단한 대처승들이 비구니스님들을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어느 날 밤 행동에 돌입했다. 그 와중에 대처승이 비구니스님을 끌어안았다 하여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 뒤 결국 조계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차지가 되었고, 대처승들은 물러나고 말았다.&lt;br /&gt;
당시 사람들은 대처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여론은 비구니스님들의 편이었다. 비구니스님들은 이런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관계부처 장관이나 관련 공무원들의 부인들을 찾아가 비구니 스님들의 사연을 알리고 설득을 한 것이다. 그렇게 펼친 안방 공사는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장관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대처승으로부터 조계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대처승들이 물러나자 그제야 선학원에 가 있던 비구스님들이 불편하다면서 조계사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비구니스님들은 선학원으로 가게 되었고, 아침이면 가사 장삼을 수하고 줄지어 조계사로 내려오곤 했다.&lt;br /&gt;
&lt;br /&gt;
비구스님들은 상황이 불리할 때면 비구니스님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정법은 언제나 비구니스님들이 지켜갔다. 정화 당시 조계사를 되찾은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lt;br /&gt;
&lt;br /&gt;
그 시절 대처승들은 김범이, 김동화 등의 인재를 길러 사회로 진출시켰으며, 재계나 학계로 뻗어나가 불교계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종의 비구스님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목이 좁아 인재 육성에 소홀했다. 집 열 채를 지은들 그 집을 지킬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정화가 끝날 무렵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스님]]은 내원사에 내려가서 사찰 복원 불사를 맡았다. 내원사 복원 불사를 함께하여 낙성법회를 마치고 자민스님은 1959년 19세 되던 해에 동학사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두 강원에서 합동법회를 했다. 동학사에서는 [[묘엄스님(妙嚴, 1931生, 비구니)|묘엄스님]], 혜성 중강스님, 자흔스님, 지윤 스님이 참석했고 선암사에서는 [[명성스님(眀星, 1931生, 비구니)|명성스님]], 지운스님(환속)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대처승들의 중상모략으로 동학사 강주 스님에게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삼복 중에 자흔스님과 함께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스님]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그곳에서 도원스님, 인보스님, 지도스님, 녹원스님 등과 같이 사집 현토, 주역, 선혜, 영가집 등의 강의를 들었다. 1년 반 동안 공부를 한 후 1962년에 영은사에서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즈음 자민스님은 몸이 매우 아팠다. 그러자 죽을 때 죽더라도 계를 받고 싶은 마음에 범어사로 향했고, 24세 때 계를 받게 되었다. 비구니계를 받을 때 오래된 구참들과 자은, 랑천, 법형스님 등이 함께했다. 이후 관응스님이 직지사에서 강을 하게 되자 녹원스님의 권유로 함께 [http://www.jikjisa.or.kr/ 직지사]로 가서 능엄, 기신, 반야 등 사교 재강을 받았다. 자흔스님은 관응스님 밑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하고는 오지 않았다. 자흔스님은 탄허스님께 배우기를 더 원했다. 그래서 두 스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에 비해 공부가 뒤처질까 염려하여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직지사에서 공부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흔스님은 직지사에 오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의 공부가 일취월장할 것 같은 조바심에 괘종시계를 사서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15명 정도가 모여 함께 공부를 했다.&lt;br /&gt;
&lt;br /&gt;
1년 뒤 스님은 관응스님을 모시고 내원사 화엄산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흔스님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공부가 덜 되어 있었다. 그 뒤 자흔스님은 결국 혼자 떨어져 지내다가 인연을 만나 환속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후 관응스님이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시면서 강원이 해체되었고, 자민스님은 자광스님과 함께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 시절에는 명우스님, 도문스님 등과 함께 『반야경』과 『원각경』을 보고, 3년 동안 『화엄경』을 보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화엄종강을 앞둔 동짓달 열하룻날이자 성능 스님의 생신날이었다. 생신상을 마련하고 모두 자리에 앉자 성능스님께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셨다. 박헌영 스님 강맥으로 전강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민스님은 '보월(寶月)'이라는 당호와 함께 성능스님께 전강을 받게 되었다. 관응스님께도 '허조(虛照)'라는 당호를 받았는데, 이는 보월과 비슷한 당호였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출가 후 [http://www.jikjisa.or.kr/ 경봉스님], 탄허스님, 관응스님, 성능스님께 회향을 했고, 네 분 스승이 모두 당대 대강사 종장인지라 늘 스승 복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lt;br /&gt;
&lt;br /&gt;
===명성스님과 자민스님===&lt;br /&gt;
&lt;br /&gt;
그 후 [https://100.daum.net/encyclopedia;jsessionid=02313F5DDA96E0DE7FF6D9C0FD94A44C/view/14XXE0074132 청룡사]에 있던 명성스님이 운문사로 가게 되었고, 청룡사 주지스님은 절 식구들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탄허스님께 강사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탄허스님은 강사를 구해주는 대신 방을 하나 내어달라는 청을 넣은 뒤에 도원스님을 강사로 추천했다. 월정사에서 살다가 온 도원스님은 청룡사에 와서 둘러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다급해진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전보를 넣었다. 그때 스님은 성능스님이 열반하셔서 49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lt;br /&gt;
&lt;br /&gt;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화엄합론 원고 교정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스님은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기 위하여 허락을 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만에 탄허스님이 이문동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자 스님 또한 청룡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lt;br /&gt;
&lt;br /&gt;
그 즈음 운문사는 산판 이중계약 사건, 호거산 큰 산불로 인한 학인 압사사건 등 몇 가지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 명성스님이 태국 왕실 초청 유럽순례를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명성스님은 1975년 12월 11일부터 1976년 6월 1일까지 정확히 5개월 24일 동안 태국왕립사원 초청으로 원시불교연구를 위해 동남아 일대와 유럽을 거쳐서 미국까지 돌아보았음.)&lt;br /&gt;
&lt;br /&gt;
강주스님이 공석이라 두세 번 사양하다가 자민스님은 혹시라도 그 사이 대처승들이 운문사를 차지하면 명성스님이 돌아왔을 때 갈 곳이 없게 될까 염려하여, 명성스님이 돌아오면 즉시 떠나리라 마음을 먹고 운문사를 맡기로 결정했다.&lt;br /&gt;
이렇게 하여 해인사 혜안스님이 주지를 맡고, 스님이 강사를 하며 6개월 정도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성스님이 유럽순례를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즉시 운문사를 떠났다.&lt;br /&gt;
명성스님이 돌아와서 자민스님을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더 이상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초발심의 재충전===&lt;br /&gt;
&lt;br /&gt;
6년 만에 다시 개심사 강원을 열고 강의하던 시절, 자민스님은 '누군가의 귀한 딸이 삭발하고 출가하여 남의 상좌가 되었는데, 책임지고 잘 가르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을 보게 했다. 뜻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스님들은 아래 단계로 내려 보내 다시 지도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스님이 아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책임감을 갖고 가르쳐서 내보내겠다는 각오로 강의를 했다. 스님은 농사를 지어서 살아가는 방법도 가르치고 싶었지만,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은 어디로들 갔는지 자민스님은 점점 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더 나은 강사 스님께 보내고, 이후 대중포교 분야로 돌아섰다.&lt;br /&gt;
&lt;br /&gt;
당시 스님은 강원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섯 군데 정도 법문을 다니고 있었다. 한 곳에 50명 정도였으니 어림잡아 250명 정도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했던 것이다. 신도들은 '한 달에 한 번 법문을 듣고 재충전을 하여 다시 새로운 한 달을 살아간다.'고 했다. 또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절에 오는데, 스님이 오시지 않으면 정말 힘이 빠진다.'고도 했다.&lt;br /&gt;
자민스님은 이렇게 스님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단을 접기로 결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양 흥국사 시절===&lt;br /&gt;
&lt;br /&gt;
그 후 스님은 천안으로 내려갔다. 자민스님을 만난 흥국사 덕수스님은 스님에게 강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며, 문중 어른들과 함께 1년이나 설득을 했다. 결국 자민스님은 주경야독하며 힘들게 집을 지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범조스님(청룡사에서 서장을 배우던 학인)과 덕수스님 사이에 갈등이 생겨, 덕수스님이 황진경 스님에게 그만 사표를 던져버렸다. 호랑이 입에 넣어준 격이었다. 결국 흥국사는 비구스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lt;br /&gt;
&lt;br /&gt;
덕수스님은 원래 개운사 위쪽에 있는 대원암에 있었는데, 정화 공신이라고 대원암을 내주고 흥국사를 받아서 살았다. 학인들과 수많은 고생 끝에 도량을 가꾸었는데,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임술년 4월에서 9월까지 근 5개월 가량 비구스님들과 대치하여 싸웠으나, 절을 되찾지는 못했다. 자민스님은 천안에 절을 지으려고 모아둔 1,300만 원을 흥국사 주지실 재건축비로 썼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받고 나왔다.&lt;br /&gt;
&lt;br /&gt;
학인들 몇몇은 흥국사를 떠났고, 더러는 '스님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가느냐.'며 떠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죽도암 주지스님의 상좌가 있었다. 자민스님은 학인들과 함께 죽도암에 가서 바위 위에 앉았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심정이었다. 그날 따라 폭풍이 심해서 파도가 거칠었고, 배도 갈매기도 보이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다음날이 되자 날씨가 맑아졌다. 배도 보이고 갈매기도 날아다녔다. 그때 스님은 '세상이 험악할 때에는 쉬어 가는 것이 최고의 진리'임을 자연에서 배웠다. 그런 깨달음을 얻자 마음이 쉽게 가라앉았다.&lt;br /&gt;
&lt;br /&gt;
“장자 강의를 들을 때였습니다. 한번은 공자님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성인의 정치이념을 강의하는데 공자님을 시기하는 패가 나무를 베는 바람에 압사당할 뻔한 수모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성인도 어려움을 겪는데, 이 정도는 고맙게 생각하자,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자고 마음을 먹으니 편안해졌습니다. 스님들한테 고통을 준 사람들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 망치 들고 각목 들고 설치면서 세상을 한 손에 움켜쥐려고 했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지만, 나는 아직 건재합니다. 참는 것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지금은 아무 후회 없이 살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 시절===&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7, 8, 9대 종회의원을 지냈다. 그런데 종회의원이 되어 처음 종회에 갔을 때, 비구니 스님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정의도 없었다. 그러나 차츰 무언의 표현이 오히려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lt;br /&gt;
&lt;br /&gt;
7대 종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종회의원 정족수는 35명이었는데 비구니스님은 3명뿐이었다. 세 명의 비구니스님은 서로 합심하기로 뜻을 모으고, 표결을 할 때 항상 함께 하여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권위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무엇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는 성품이었다. 뒤로 물러설 줄도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몇 명씩 늘어나면서 출석만 하고 그냥 가버리는 스님들이 생겼다. 그래서 표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종회에서 큰 난리가 벌어지고 급기야 고소가 잇따랐다. 비구니스님들이 공명정대하다고 판단한 검찰은 자민스님에게 법정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 법정에 선 자민스님은 비구스님들의 거짓된 모습에 한심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검사는 스님의 말 없는 표현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그때 비구니 종회의원들은 내적 단결을 위해 비구스님들과 어울리지 않는 등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성되는 부분이 있다.&lt;br /&gt;
“함께 식사를 하거나 어울려야 비구스님들의 얘기도 듣고 그 속사정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겁니다.”&lt;br /&gt;
&lt;br /&gt;
===선학원 감사 및 이사 소임===&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선학원 감사로 16년, 이사로 12년을 살았다. 선학원에 소속된 350개의 사찰 대부분이 비구니 사찰이었다.&lt;br /&gt;
우이동 '보광사 사건'은 사적인 감정이 발단이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선학원 이사 소임을 내놓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lt;br /&gt;
&lt;br /&gt;
===인재불사===&lt;br /&gt;
&lt;br /&gt;
그 후 성열스님(강남 포교당)과 함께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2년 전, 몇몇 스님들이 모여서 장학 사업을 시작했는데,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시상식을 갖기로 하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세 번 지급했다. 얼마 전에는 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쳤다. '불교연구 소장학자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파알리어 원전 번역을 하거나 논문을 쓰는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인재불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들의 업적을 남기고 사후 관리까지 도와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돈은 필요할 때 주선해서 쓸 수 있지만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재가 곧 재산입니다.”&lt;br /&gt;
&lt;br /&gt;
===“상좌는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상좌스님들의 교육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lt;br /&gt;
&lt;br /&gt;
“상좌들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25년 전에 일체 소임과 경제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하루는 장을 봐왔는데, 저와 상좌스님이 서로 다르게 장을 봐왔습니다. 저는 싸면서 싱싱하고 좋은 것을 사왔는데, 상좌는 물건을 볼 줄 몰라서 돈은 더 주고 품질은 더 안 좋은 것을 사온 것입니다. 그때 '내가 화장막 가서 장 봐다 줄 수는 없으니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지불하더라도 직접 하도록 시켰습니다. 더 나가는 돈은 교육비로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몇 달 정도 지나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아예 다 맡겨 버렸습니다.”&lt;br /&gt;
&lt;br /&gt;
그 후 자민스님은 살림에 대해 절대 묻지 않는다고 한다. 상좌들이 알아서 살도록 간섭하지 않고 있다. 자꾸 질문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대충 대답하는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민스님은 상좌에게 살림을 못 맡기겠다는 스님을 보면 안타깝다고 한다. 언젠가 살림을 맡길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넘겨 그들의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상좌들이 좀 더 폭넓은 사회 활동을 하며 살기를 바라고 있다. '스님이 하시는데 우리가 뭘요.'하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만 같아 마땅치가 않고,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스님의 성에 차지는 않는다.&lt;br /&gt;
&lt;br /&gt;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도 상좌들이 승가대학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노장님, 기력 없어 보이는데 상좌를 두셔야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상좌가 아니라 종을 두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상좌를 마치 종 하나 두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사고가 깨이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스님은 공부도 가르치질 않습니다. 상좌는 나의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입니다.”&lt;br /&gt;
&lt;br /&gt;
오래 전 자민스님은 명우스님, 도문스님, 길상스님 등과 함께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에서 한 철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얀마 스님들에게 '한국에 한번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분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미얀마 스님들을 편안히 모실만 한 사찰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 중에 진관사에서 장소를 제공해준다고 약속을 해주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방문 사흘을 남겨두고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lt;br /&gt;
&lt;br /&gt;
고민하던 자민스님은 지난 21년간 법회를 다녔던 승가사 주지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주지스님께서 쾌히 승낙해주셔서 다행히 거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 우빤디타, 우짜띨라, 우케민다(일본거주 미얀마스님)스님은 승가사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가셨다. 이때 통역은 거해스님이 맡았으며, 한 달 동안 승가사에서 법회를 열어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lt;br /&gt;
&lt;br /&gt;
그때의 인연으로 현재 자민스님의 상좌 두 명과 제자 등 10여 명이 미얀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상좌인 천안 연대암 주지스님도 가기를 원하여서 보내주었다. 당시 자민스님은 중학교 1학년생과 2학년생, 유치원생을 돌보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승가사에서 관응스님을 모시고 법화산림을 하는 한편 다른 사찰로 법문을 다니기도 했다. 자민스님은 아이들을 뒷바라지할 공양주를 급히 구해서 맡기고, 새벽에 출근하여 밤 10시에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공부를 하겠다는 상좌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었다. 안 하려고 해서 문제이지, 거들어줄 상좌없이 혼자 살게 되더라고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 언제든지 보내준 것이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상좌들이 스님의 환갑 때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하여 운전을 배운 적이 있었다. 기사를 둔다는 가정 하에 유지비를 따져보니 매월 약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 스님은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운전면허를 딴 후 자동차를 살 때가 되었는데, 차의 크기에 대해 스님의 생각과 상좌들의 생각이 달랐다.&lt;br /&gt;
&lt;br /&gt;
상좌들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차를 원했고, 스님은 혼자 타고 다닐 만한 소형차를 원했다. 의견 차이로 차를 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 자민스님이 넘어져서 어깨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된 스님은 자동차 사고 때문에 다치고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보고 차를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절 집의 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들이 먹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반찬은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간혹 상좌들이 반찬을 많이 차려오면 나무란다.&lt;br /&gt;
&lt;br /&gt;
또한 스님은 이 시대에는 모든 면에 밝아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오뉴월 박넝쿨이 초가지붕을 다 덮어도 가을 소슬바람 찬 서리가 내리면 시들고 말듯이 요즘은 사실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종교전쟁이 나면 그때는 어떡할 겁니까? '자연의 순리를 따르자, 우주의 법칙에 맡기자.' 하며 혼자 마음을 다잡기도 하지만 때로는 속이 상합니다. 불법이 보배이면 무엇 합니까? 다른 종교에 정복이라도 당하게 되면 끝입니다. 불법승 삼보의 승보가 없으면, 이 시대에 불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승보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2019년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수했으며 2021년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 회주로 있다. 수계제자로는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4~230.&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5.&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77.&lt;br /&gt;
* 현대불교, 후학양성·사회사업 헌신하는 자민 스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94 (2005년)&lt;br /&gt;
* BTNm, 이하얀이 만난 스님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11&amp;amp;PID=P613&amp;amp;DPID=58471 (2010년)&lt;br /&gt;
* 연합뉴스, 조계종, 비구니스님 11명에 최고 품계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5124500005 (2019년)&lt;br /&gt;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5. 자민 스님 인터뷰(끝)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358 (2020년)&lt;br /&gt;
* BBS, 믿음이 중요한 이유? _ 자민스님 [찾아가는 백고좌 법회]  https://www.youtube.com/watch?v=x0WO9fwv2oQ (2021년)&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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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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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범어사 대성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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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천안 연대선원]]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서울 보련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서울 보성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연대선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성동 589-5&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799661 | 경도=127.15739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자민스님(慈珉,_1939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자민스님(慈珉,_193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90%EB%AF%BC%EC%8A%A4%EB%8B%98(%E6%85%88%E7%8F%89,_193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6356</id>
		<title>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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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6-29T16:03: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자민(慈珉)스님&lt;br /&gt;
|사진= 385 자민(慈珉).jpg&lt;br /&gt;
|법명= '''자민(慈珉)'''&lt;br /&gt;
|법호= 보월(寶月)&lt;br /&gt;
|속명= 정시자(鄭時子)&lt;br /&gt;
|출생= 1939.10.15.&lt;br /&gt;
|출가= 1952년&lt;br /&gt;
|입적= &lt;br /&gt;
|사찰= '''연대선원'''&amp;lt;/br&amp;gt;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성동 589-5&lt;br /&gt;
|특이사항=&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lt;br /&gt;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 시절에 청정한 승가를 위한 인재양성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재불사에 매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9 || 충북 제천 출생&lt;br /&gt;
|-&lt;br /&gt;
|1952 || 부산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범어사 대성암]에서 혜진(惠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4 || 부산 범어사에서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2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699 개심사]에서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음&lt;br /&gt;
|-&lt;br /&gt;
|1969 || 서산 개심사 강원 강사 이후 [https://100.daum.net/encyclopedia;jsessionid=02313F5DDA96E0DE7FF6D9C0FD94A44C/view/14XXE0074132 청룡사], [http://www.unmunsa.or.kr/ 운문사] 강사 역임&lt;br /&gt;
|-&lt;br /&gt;
|1978~1979 || 서산 개심사 강원 강주, 천안 연대암 주지, 재단법인 선학원 감사&lt;br /&gt;
|-   &lt;br /&gt;
|1981 || 대한불교 조계종 7, 8, 9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1985 ||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lt;br /&gt;
|-&lt;br /&gt;
|1985~1995 ||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lt;br /&gt;
|-&lt;br /&gt;
|1986 || 재단법인 선학원 교무이사&lt;br /&gt;
|-&lt;br /&gt;
|1988 || 서울 보련암(신림동) 주지, 서울 보성사(둔촌동) 주지&lt;br /&gt;
|-&lt;br /&gt;
|1997 || 양천구 목동청소년수련(회)관(현 목동청소년센터) 부관장&lt;br /&gt;
|-   &lt;br /&gt;
|2002 || 재단법인 선학원 교육위원장&lt;br /&gt;
|-   &lt;br /&gt;
|2018 || 선학원개혁비대위 상임대표,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둔촌동) 회주&lt;br /&gt;
|-&lt;br /&gt;
|2019 || 명사법계 품수&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문중|| [[삼현(三賢)문중]]&lt;br /&gt;
|-&lt;br /&gt;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lt;br /&gt;
|- &lt;br /&gt;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해훈(海訓, 6)→전오(典悟, 7)→행관(行觀, 8)→혜진(惠眞, 9)→[[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慈珉, 10)]]→지현(志衒, 11), 대영(大暎, 11), 재응(在應, 11), 보연(輔衍, 11), 선주(善住, 11), 상규(常圭, 11), 영운(嶺雲, 11), 진우(辰祐, 11), 지선(知宣, 11), 계현(季泫, 11), 성운(星雲, 11), 지오(志悟, 11), 진각(眞覺, 11), 영조(暎照, 11), 인욱(仁旭, 11)&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자민스님 아버지의 출가 및 환속===&lt;br /&gt;
[[File:385-01.jpg|섬네일|[졸업기념 (1965)]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5]]&lt;br /&gt;
[[File:385-02.jpg|섬네일|[범어사 비구 비구니 양선원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6]]&lt;br /&gt;
[[File:385-03.jpg|섬네일|[범어사 대성암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8]]&lt;br /&gt;
[[File:385-04.jpg|섬네일|[범어사 양선원 해제 기념]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9]]&lt;br /&gt;
[[File:385-05.jpg|섬네일|[묘엄스님 전강받던 날]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1]]&lt;br /&gt;
[[File:385-06.jpg|섬네일|[비구니 수계식]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2]]&lt;br /&gt;
[[File:385-07.jpg|섬네일|개심사 제 1 회 대교졸업 기념 (1967. 2. 25)]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3]]&lt;br /&gt;
[[File:385-08.jpg|섬네일|[병오년 여름, 혜암 큰스님을 모시고]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5]]&lt;br /&gt;
[[File:385-09.jpg|섬네일|[강사 재직 시 사중 소임자 학인스님과 함께 ,  전강 직후  (1969)]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6]]&lt;br /&gt;
[[File:385-10.jpg|섬네일|[운문사 임시 강주시절 학인스님들과 함께 (1976)]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29]]&lt;br /&gt;
[[File:385-11.jpg|섬네일|[조치원 신광사 특강 기념 제자들과 함께 (1999)]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30]]&lt;br /&gt;
[[File:연대선원_천안.jpg|섬네일|[연대선원] 사진출처:선학원http://www.seonhakwon.or.kr/bbs/view.php?id=seon_sachal2&amp;amp;page=2&amp;amp;sn1=&amp;amp;divpage=1&amp;amp;category=5&amp;amp;sn=off&amp;amp;ss=on&amp;amp;sc=on&amp;amp;select_arrange=headnum&amp;amp;desc=asc&amp;amp;no=160&amp;amp;PHPSESSID=42f2b824ae31ef8abda907de9fea4e8c]]&lt;br /&gt;
보월(寶月) 자민(慈珉)스님은 1939년 10월 15일 어머니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류 상의 출생지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정시자이다.&lt;br /&gt;
자민스님의 증조부 정운의는 병조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동학혁명 때 강진 해남으로 낙향을 했다. 어려운 세상살이에 시골 생활의 고단함까지 더해지자 스님의 할머니는 4살인 스님의 아버지를 업고 절로 들어갔다. 이에 스님의 아버지는 11세 때 계룡산 신원사에서 수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관응, 석주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출가 후 여러 수행처를 두루 다니며 수행하던 중 33세 되던 해 금강산에서 겨울을 나고 내려와 강원도를 지나는 길에 스님의 어머니를 만나 환속을 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의 출가===&lt;br /&gt;
&lt;br /&gt;
스님의 부모님은 화전민으로 양봉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북 단양의 하동산 스님 옆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하동산 스님에게는 부모님의 강요로 얻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자라자 아버지 스님을 따라 출가를 했다. 그 분이 바로 지선스님이다. 자민스님은 지선스님을 14세 때 처음 만났고, 스님보다 세 살 위인 지선스님의 조카 하연자와 친구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952년 어느 날, 친구 하연자와 범어사에 놀러 갔던 자민스님은 그곳이 마치 옛날에 살던 집처럼 느껴져서 출가하게 되었다. 그때 함께 갔던 이가 훗날 유화사 주지스님의 상좌가 된 연방스님(하동산 스님의 맏손녀)인데, 연방스님은 나중에 환속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의 은사스님(혜진(惠眞)스님)===&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대성암의 흙으로 만든 부뚜막에서 아침이면 죽 공양을 짓고, 나무를 하여 새끼줄로 묶어 짊어지고 와서 은사스님 방에 군불을 때면서 살았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은 멋쟁이셨다. 초하루와 보름 저녁이면 법문을 들으러 가시는 은사스님을 위해 자민스님은 꼭 광목 장삼을 다려 드렸다.&lt;br /&gt;
&lt;br /&gt;
16세의 자민스님은 후원에서 혼자 공양주&amp;lt;ref&amp;gt;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amp;lt;/ref&amp;gt; 를 살았는데, 70여 명의 공양을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그 복으로 오늘까지 산다.'고 말한다.&lt;br /&gt;
&lt;br /&gt;
성우스님이 부전&amp;lt;ref&amp;gt; 불전(佛殿)을 돌보고 각종 의식(儀式)을 담당하는 소임 &amp;lt;/ref&amp;gt;을 살고 만성스님과 탁자 밑에서 잠을 자던 그때가 영산회상 시절이었다. 은사스님은 범어사 주지스님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7589 경산당 스님]의 아내였다. 경산당 스님의 영정은 범어사 영각에 모셔져 있다. 경산당 스님은 9명의 자녀를 두고 상처를 했는데, 은사스님의 모친(노스님)이 당신의 딸을 시집 보내어 아홉 아이를 키우도록 했다.&lt;br /&gt;
&lt;br /&gt;
그 후 경산당 스님이 돌아가시고 은사스님은 진갑 해에 삭발을 했으며, 사자암과 논 20마지기를 경작하며 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쪽에서 본공스님과 본견스님 등 비구니스님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거처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민스님은 은사스님에게 “큰절에 가서 절을 달라고 하는 게 어떨까요.”라며 요청했고, 그리하여 사자암과 대성암을 바꾸어 받게 되었다. 대성암은 스님의 본사이다.&lt;br /&gt;
&lt;br /&gt;
이후 만성스님이 입승&amp;lt;ref&amp;gt;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amp;lt;/ref&amp;gt; 을 살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본견 스님이 도감&amp;lt;ref&amp;gt;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소임 &amp;lt;/ref&amp;gt; 을, 도정스님이 원주 소임&amp;lt;ref&amp;gt; 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소임 &amp;lt;/ref&amp;gt; 을 살게 되었다. 소임을 돌려야 한다는 대중스님들의 의견에 따라 은사스님께서 도감을 내놓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긴 일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민스님은 월명스님의 설득에 넘어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lt;br /&gt;
&lt;br /&gt;
도감이 바뀌었는데, 종무소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았다. 성품이 선하신 은사스님에 대해 호의적 이었던 대처승들이 의리를 보여준 것이었고, 대처승들은 은사스님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대성암은 만성스님의 회상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장군암 에피소드===&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17세 때 장군암에서 속임수를 당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이광우 스님, 대전에는 진광우 스님, 부산에는 강광우 스님이 있었다. 하루는 월명스님이 '장군암(강광우 스님)에서 부전을 살면 논산 정덕사에서 공부를 시켜주겠다.”며 자꾸 자민스님을 설득했다. 스님은 당시 자호스님이 재실 같은 곳을 고쳐서 정덕사로 이름 짓고 비구니 강단을 시작하려고 할 때여서 마음은 움직여도 은사스님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월명스님의 설득은 날로 강해졌고, 견디다 못한 스님은 빨래를 다 해놓고, 아침 죽까지 쑤어서 양푼에 넣어둔 다음 미리 챙겨둔 바랑을 메고 밤에 길을 떠났다. 월명스님은 일주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lt;br /&gt;
&lt;br /&gt;
장군암에서는 부전살이&amp;lt;ref&amp;gt; 불전(佛殿)을 돌보고 각종 의식(儀式)을 담당하는 소임 &amp;lt;/ref&amp;gt;와 공양주살이를 했다. 그러나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지만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월명스님이 모두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상가에 시달림을 가서 한 푼이라도 받아오면 그것마저 온갖 핑계를 대며 가져갔다. 누군가가 장삼을 해 입으라고 주었던 소청 한 필마저 가져가버렸다.&lt;br /&gt;
&lt;br /&gt;
그때는 부전살이를 하면 두 가지 누명을 쓴다는 말이 있었다. 도둑질과 서방질이 그것이다. 매일 장군암에서 고된 살림을 사느라 자민스님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논산 정덕사에 가서 공부를 시켜준다던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팔려서 간 것도 아닌데 수중에 돈이 전혀 없으니 아무 데도 가지 못한 것이다.&lt;br /&gt;
&lt;br /&gt;
===헌국불교정화운동 시 비구니스님들의 역할===&lt;br /&gt;
&lt;br /&gt;
장군암을 벗어나게 된 것은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amp;amp;dataType=01&amp;amp;contents_id=GC04205928 정화운동] 때였다. 전국의 비구·비구니스님이 서울로 집결했다. 비구니스님들의 힘을 모두 모아 정화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장군암에서는 주지와 두 명의 스님 이 상경하기로 했고, 이에 자민스님이 가게 된 것이다. 기차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니 객차 안은 스님들로 가득했다. 당시는 정화운동이 일어난 초창기였고, 그렇게 서울로 올라간 뒤 스님은 다시 내려가지 않았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장군암에서 7~8개월 동안 고달픈 머슴살이를 살았다. 은사스님이 미움을 받은 바람에 고생이 더 심했다. 은사스님의 성정이 착하고 자민스님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했던 뼈아픈 경험이었다.&lt;br /&gt;
&lt;br /&gt;
조계사는 대처승의 본부였다. 1953년 7월경 정화회의가 시작되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연되다가 삼동에 선학원과 조계사를 오가며 대처승들과 대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비구스님들은 비구니스님들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조계사에 남아 있으라고 한 뒤 선학원에 가 있었다.&lt;br /&gt;
비구니스님들은 조계사에서 대처승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두면 대치 상황이 길어질 것으로 판단한 대처승들이 비구니스님들을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어느 날 밤 행동에 돌입했다. 그 와중에 대처승이 비구니스님을 끌어안았다 하여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났다.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진 뒤 결국 조계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차지가 되었고, 대처승들은 물러나고 말았다.&lt;br /&gt;
당시 사람들은 대처승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여론은 비구니스님들의 편이었다. 비구니스님들은 이런 상황을 적극 활용했다. 관계부처 장관이나 관련 공무원들의 부인들을 찾아가 비구니 스님들의 사연을 알리고 설득을 한 것이다. 그렇게 펼친 안방 공사는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장관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대처승으로부터 조계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lt;br /&gt;
&lt;br /&gt;
대처승들이 물러나자 그제야 선학원에 가 있던 비구스님들이 불편하다면서 조계사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비구니스님들은 선학원으로 가게 되었고, 아침이면 가사 장삼을 수하고 줄지어 조계사로 내려오곤 했다.&lt;br /&gt;
&lt;br /&gt;
비구스님들은 상황이 불리할 때면 비구니스님들에게 일을 맡기고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정법은 언제나 비구니스님들이 지켜갔다. 정화 당시 조계사를 되찾은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lt;br /&gt;
&lt;br /&gt;
그 시절 대처승들은 김범이, 김동화 등의 인재를 길러 사회로 진출시켰으며, 재계나 학계로 뻗어나가 불교계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종의 비구스님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목이 좁아 인재 육성에 소홀했다. 집 열 채를 지은들 그 집을 지킬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학===&lt;br /&gt;
&lt;br /&gt;
정화가 끝날 무렵 [[수옥스님(守玉, 1902生, 비구니)|수옥스님]]은 내원사에 내려가서 사찰 복원 불사를 맡았다. 내원사 복원 불사를 함께하여 낙성법회를 마치고 자민스님은 1959년 19세 되던 해에 동학사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두 강원에서 합동법회를 했다. 동학사에서는 [[묘엄스님(妙嚴, 1931生, 비구니)|묘엄스님]], 혜성 중강스님, 자흔스님, 지윤 스님이 참석했고 선암사에서는 [[명성스님(眀星, 1931生, 비구니)|명성스님]], 지운스님(환속)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대처승들의 중상모략으로 동학사 강주 스님에게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삼복 중에 자흔스님과 함께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https://ko.wikipedia.org/wiki/탄허 탄허스님]을 찾아갔다.&lt;br /&gt;
&lt;br /&gt;
그곳에서 도원스님, 인보스님, 지도스님, 녹원스님 등과 같이 사집 현토, 주역, 선혜, 영가집 등의 강의를 들었다. 1년 반 동안 공부를 한 후 1962년에 영은사에서 나왔다.&lt;br /&gt;
&lt;br /&gt;
그 즈음 자민스님은 몸이 매우 아팠다. 그러자 죽을 때 죽더라도 계를 받고 싶은 마음에 범어사로 향했고, 24세 때 계를 받게 되었다. 비구니계를 받을 때 오래된 구참들과 자은, 랑천, 법형스님 등이 함께했다. 이후 관응스님이 직지사에서 강을 하게 되자 녹원스님의 권유로 함께 [http://www.jikjisa.or.kr/ 직지사]로 가서 능엄, 기신, 반야 등 사교 재강을 받았다. 자흔스님은 관응스님 밑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하고는 오지 않았다. 자흔스님은 탄허스님께 배우기를 더 원했다. 그래서 두 스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에 비해 공부가 뒤처질까 염려하여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lt;br /&gt;
&lt;br /&gt;
스님이 직지사에서 공부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흔스님은 직지사에 오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자민스님은 자흔스님의 공부가 일취월장할 것 같은 조바심에 괘종시계를 사서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15명 정도가 모여 함께 공부를 했다.&lt;br /&gt;
&lt;br /&gt;
1년 뒤 스님은 관응스님을 모시고 내원사 화엄산림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흔스님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공부가 덜 되어 있었다. 그 뒤 자흔스님은 결국 혼자 떨어져 지내다가 인연을 만나 환속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후 관응스님이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시면서 강원이 해체되었고, 자민스님은 자광스님과 함께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 시절에는 명우스님, 도문스님 등과 함께 『반야경』과 『원각경』을 보고, 3년 동안 『화엄경』을 보았다.&lt;br /&gt;
&lt;br /&gt;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화엄종강을 앞둔 동짓달 열하룻날이자 성능 스님의 생신날이었다. 생신상을 마련하고 모두 자리에 앉자 성능스님께서 갑자기 폭탄선언을 하셨다. 박헌영 스님 강맥으로 전강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민스님은 '보월(寶月)'이라는 당호와 함께 성능스님께 전강을 받게 되었다. 관응스님께도 '허조(虛照)'라는 당호를 받았는데, 이는 보월과 비슷한 당호였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출가 후 [http://www.jikjisa.or.kr/ 경봉스님], 탄허스님, 관응스님, 성능스님께 회향을 했고, 네 분 스승이 모두 당대 대강사 종장인지라 늘 스승 복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lt;br /&gt;
&lt;br /&gt;
===명성스님과 자민스님===&lt;br /&gt;
&lt;br /&gt;
그 후 [https://100.daum.net/encyclopedia;jsessionid=02313F5DDA96E0DE7FF6D9C0FD94A44C/view/14XXE0074132 청룡사]에 있던 명성스님이 운문사로 가게 되었고, 청룡사 주지스님은 절 식구들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탄허스님께 강사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탄허스님은 강사를 구해주는 대신 방을 하나 내어달라는 청을 넣은 뒤에 도원스님을 강사로 추천했다. 월정사에서 살다가 온 도원스님은 청룡사에 와서 둘러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다급해진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전보를 넣었다. 그때 스님은 성능스님이 열반하셔서 49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lt;br /&gt;
&lt;br /&gt;
탄허스님은 자민스님에게 화엄합론 원고 교정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스님은 작은 힘이나마 보태드리기 위하여 허락을 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만에 탄허스님이 이문동으로 이사를 가시게 되자 스님 또한 청룡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lt;br /&gt;
&lt;br /&gt;
그 즈음 운문사는 산판 이중계약 사건, 호거산 큰 산불로 인한 학인 압사사건 등 몇 가지 힘든 일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 명성스님이 태국 왕실 초청 유럽순례를 가게 되었다.&lt;br /&gt;
&lt;br /&gt;
(※ 명성스님은 1975년 12월 11일부터 1976년 6월 1일까지 정확히 5개월 24일 동안 태국왕립사원 초청으로 원시불교연구를 위해 동남아 일대와 유럽을 거쳐서 미국까지 돌아보았음.)&lt;br /&gt;
&lt;br /&gt;
강주스님이 공석이라 두세 번 사양하다가 자민스님은 혹시라도 그 사이 대처승들이 운문사를 차지하면 명성스님이 돌아왔을 때 갈 곳이 없게 될까 염려하여, 명성스님이 돌아오면 즉시 떠나리라 마음을 먹고 운문사를 맡기로 결정했다.&lt;br /&gt;
이렇게 하여 해인사 혜안스님이 주지를 맡고, 스님이 강사를 하며 6개월 정도를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성스님이 유럽순례를 마치고 일본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즉시 운문사를 떠났다.&lt;br /&gt;
명성스님이 돌아와서 자민스님을 찾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더 이상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lt;br /&gt;
&lt;br /&gt;
===초발심의 재충전===&lt;br /&gt;
&lt;br /&gt;
6년 만에 다시 개심사 강원을 열고 강의하던 시절, 자민스님은 '누군가의 귀한 딸이 삭발하고 출가하여 남의 상좌가 되었는데, 책임지고 잘 가르쳐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을 보게 했다. 뜻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는 스님들은 아래 단계로 내려 보내 다시 지도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스님이 아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책임감을 갖고 가르쳐서 내보내겠다는 각오로 강의를 했다. 스님은 농사를 지어서 살아가는 방법도 가르치고 싶었지만,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lt;br /&gt;
&lt;br /&gt;
처음 발심한 그 마음은 어디로들 갔는지 자민스님은 점점 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더 나은 강사 스님께 보내고, 이후 대중포교 분야로 돌아섰다.&lt;br /&gt;
&lt;br /&gt;
당시 스님은 강원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섯 군데 정도 법문을 다니고 있었다. 한 곳에 50명 정도였으니 어림잡아 250명 정도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했던 것이다. 신도들은 '한 달에 한 번 법문을 듣고 재충전을 하여 다시 새로운 한 달을 살아간다.'고 했다. 또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면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절에 오는데, 스님이 오시지 않으면 정말 힘이 빠진다.'고도 했다.&lt;br /&gt;
자민스님은 이렇게 스님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단을 접기로 결정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고양 흥국사 시절===&lt;br /&gt;
&lt;br /&gt;
그 후 스님은 천안으로 내려갔다. 자민스님을 만난 흥국사 덕수스님은 스님에게 강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며, 문중 어른들과 함께 1년이나 설득을 했다. 결국 자민스님은 주경야독하며 힘들게 집을 지었다.&lt;br /&gt;
&lt;br /&gt;
그런데 범조스님(청룡사에서 서장을 배우던 학인)과 덕수스님 사이에 갈등이 생겨, 덕수스님이 황진경 스님에게 그만 사표를 던져버렸다. 호랑이 입에 넣어준 격이었다. 결국 흥국사는 비구스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lt;br /&gt;
&lt;br /&gt;
덕수스님은 원래 개운사 위쪽에 있는 대원암에 있었는데, 정화 공신이라고 대원암을 내주고 흥국사를 받아서 살았다. 학인들과 수많은 고생 끝에 도량을 가꾸었는데,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만 것이다. 임술년 4월에서 9월까지 근 5개월 가량 비구스님들과 대치하여 싸웠으나, 절을 되찾지는 못했다. 자민스님은 천안에 절을 지으려고 모아둔 1,300만 원을 흥국사 주지실 재건축비로 썼기 때문에 그 돈을 돌려받고 나왔다.&lt;br /&gt;
&lt;br /&gt;
학인들 몇몇은 흥국사를 떠났고, 더러는 '스님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가느냐.'며 떠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죽도암 주지스님의 상좌가 있었다. 자민스님은 학인들과 함께 죽도암에 가서 바위 위에 앉았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심정이었다. 그날 따라 폭풍이 심해서 파도가 거칠었고, 배도 갈매기도 보이지 않았다.&lt;br /&gt;
&lt;br /&gt;
다음날이 되자 날씨가 맑아졌다. 배도 보이고 갈매기도 날아다녔다. 그때 스님은 '세상이 험악할 때에는 쉬어 가는 것이 최고의 진리'임을 자연에서 배웠다. 그런 깨달음을 얻자 마음이 쉽게 가라앉았다.&lt;br /&gt;
&lt;br /&gt;
“장자 강의를 들을 때였습니다. 한번은 공자님이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성인의 정치이념을 강의하는데 공자님을 시기하는 패가 나무를 베는 바람에 압사당할 뻔한 수모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성인도 어려움을 겪는데, 이 정도는 고맙게 생각하자,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자고 마음을 먹으니 편안해졌습니다. 스님들한테 고통을 준 사람들도 용서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 망치 들고 각목 들고 설치면서 세상을 한 손에 움켜쥐려고 했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지만, 나는 아직 건재합니다. 참는 것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지금은 아무 후회 없이 살고 있습니다.”&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종회의원 시절===&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7, 8, 9대 종회의원을 지냈다. 그런데 종회의원이 되어 처음 종회에 갔을 때, 비구니 스님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정의도 없었다. 그러나 차츰 무언의 표현이 오히려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lt;br /&gt;
&lt;br /&gt;
7대 종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종회의원 정족수는 35명이었는데 비구니스님은 3명뿐이었다. 세 명의 비구니스님은 서로 합심하기로 뜻을 모으고, 표결을 할 때 항상 함께 하여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권위도 있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무엇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해내는 성품이었다. 뒤로 물러설 줄도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몇 명씩 늘어나면서 출석만 하고 그냥 가버리는 스님들이 생겼다. 그래서 표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았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종회에서 큰 난리가 벌어지고 급기야 고소가 잇따랐다. 비구니스님들이 공명정대하다고 판단한 검찰은 자민스님에게 법정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했다. 법정에 선 자민스님은 비구스님들의 거짓된 모습에 한심한 생각만 들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검사는 스님의 말 없는 표현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lt;br /&gt;
&lt;br /&gt;
그때 비구니 종회의원들은 내적 단결을 위해 비구스님들과 어울리지 않는 등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성되는 부분이 있다.&lt;br /&gt;
“함께 식사를 하거나 어울려야 비구스님들의 얘기도 듣고 그 속사정도 알 수 있을 텐데,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겁니다.”&lt;br /&gt;
&lt;br /&gt;
===선학원 감사 및 이사 소임===&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선학원 감사로 16년, 이사로 12년을 살았다. 선학원에 소속된 350개의 사찰 대부분이 비구니 사찰이었다.&lt;br /&gt;
우이동 '보광사 사건'은 사적인 감정이 발단이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선학원 이사 소임을 내놓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lt;br /&gt;
&lt;br /&gt;
===인재불사===&lt;br /&gt;
&lt;br /&gt;
그 후 성열스님(강남 포교당)과 함께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2년 전, 몇몇 스님들이 모여서 장학 사업을 시작했는데, 봄과 가을 두 차례씩 시상식을 갖기로 하고, 지금까지 장학금을 세 번 지급했다. 얼마 전에는 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쳤다. '불교연구 소장학자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파알리어 원전 번역을 하거나 논문을 쓰는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인재불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들의 업적을 남기고 사후 관리까지 도와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돈은 필요할 때 주선해서 쓸 수 있지만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재가 곧 재산입니다.”&lt;br /&gt;
&lt;br /&gt;
===“상좌는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상좌스님들의 교육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lt;br /&gt;
&lt;br /&gt;
“상좌들은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25년 전에 일체 소임과 경제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하루는 장을 봐왔는데, 저와 상좌스님이 서로 다르게 장을 봐왔습니다. 저는 싸면서 싱싱하고 좋은 것을 사왔는데, 상좌는 물건을 볼 줄 몰라서 돈은 더 주고 품질은 더 안 좋은 것을 사온 것입니다. 그때 '내가 화장막 가서 장 봐다 줄 수는 없으니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지불하더라도 직접 하도록 시켰습니다. 더 나가는 돈은 교육비로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몇 달 정도 지나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아예 다 맡겨 버렸습니다.”&lt;br /&gt;
&lt;br /&gt;
그 후 자민스님은 살림에 대해 절대 묻지 않는다고 한다. 상좌들이 알아서 살도록 간섭하지 않고 있다. 자꾸 질문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대충 대답하는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좌들이 거짓말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민스님은 상좌에게 살림을 못 맡기겠다는 스님을 보면 안타깝다고 한다. 언젠가 살림을 맡길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넘겨 그들의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상좌들이 좀 더 폭넓은 사회 활동을 하며 살기를 바라고 있다. '스님이 하시는데 우리가 뭘요.'하면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만 같아 마땅치가 않고,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한다 하더라도 스님의 성에 차지는 않는다.&lt;br /&gt;
&lt;br /&gt;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도 상좌들이 승가대학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노장님, 기력 없어 보이는데 상좌를 두셔야겠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상좌가 아니라 종을 두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상좌를 마치 종 하나 두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사고가 깨이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스님은 공부도 가르치질 않습니다. 상좌는 나의 분신이요,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존재입니다.”&lt;br /&gt;
&lt;br /&gt;
오래 전 자민스님은 명우스님, 도문스님, 길상스님 등과 함께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에서 한 철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얀마 스님들에게 '한국에 한번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분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미얀마 스님들을 편안히 모실만 한 사찰이 마땅치 않았다. 그런 중에 진관사에서 장소를 제공해준다고 약속을 해주어서 마음을 놓았는데, 방문 사흘을 남겨두고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lt;br /&gt;
&lt;br /&gt;
고민하던 자민스님은 지난 21년간 법회를 다녔던 승가사 주지스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주지스님께서 쾌히 승낙해주셔서 다행히 거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후 우빤디타, 우짜띨라, 우케민다(일본거주 미얀마스님)스님은 승가사에서 한 달 동안 머물고 가셨다. 이때 통역은 거해스님이 맡았으며, 한 달 동안 승가사에서 법회를 열어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lt;br /&gt;
&lt;br /&gt;
그때의 인연으로 현재 자민스님의 상좌 두 명과 제자 등 10여 명이 미얀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lt;br /&gt;
&lt;br /&gt;
상좌인 천안 연대암 주지스님도 가기를 원하여서 보내주었다. 당시 자민스님은 중학교 1학년생과 2학년생, 유치원생을 돌보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승가사에서 관응스님을 모시고 법화산림을 하는 한편 다른 사찰로 법문을 다니기도 했다. 자민스님은 아이들을 뒷바라지할 공양주를 급히 구해서 맡기고, 새벽에 출근하여 밤 10시에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공부를 하겠다는 상좌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었다. 안 하려고 해서 문제이지, 거들어줄 상좌없이 혼자 살게 되더라고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 언제든지 보내준 것이다.&lt;br /&gt;
&lt;br /&gt;
한번은 상좌들이 스님의 환갑 때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하여 운전을 배운 적이 있었다. 기사를 둔다는 가정 하에 유지비를 따져보니 매월 약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 스님은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운전면허를 딴 후 자동차를 살 때가 되었는데, 차의 크기에 대해 스님의 생각과 상좌들의 생각이 달랐다.&lt;br /&gt;
&lt;br /&gt;
상좌들은 스님의 신분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차를 원했고, 스님은 혼자 타고 다닐 만한 소형차를 원했다. 의견 차이로 차를 사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 자민스님이 넘어져서 어깨를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된 스님은 자동차 사고 때문에 다치고 장애인이 된 사람들을 보고 차를 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절 집의 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님들이 먹는 데 투자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특히 반찬은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간혹 상좌들이 반찬을 많이 차려오면 나무란다.&lt;br /&gt;
&lt;br /&gt;
또한 스님은 이 시대에는 모든 면에 밝아야 한다고 생각한다.&lt;br /&gt;
&lt;br /&gt;
“오뉴월 박넝쿨이 초가지붕을 다 덮어도 가을 소슬바람 찬 서리가 내리면 시들고 말듯이 요즘은 사실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종교전쟁이 나면 그때는 어떡할 겁니까? '자연의 순리를 따르자, 우주의 법칙에 맡기자.' 하며 혼자 마음을 다잡기도 하지만 때로는 속이 상합니다. 불법이 보배이면 무엇 합니까? 다른 종교에 정복이라도 당하게 되면 끝입니다. 불법승 삼보의 승보가 없으면, 이 시대에 불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승보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lt;br /&gt;
&lt;br /&gt;
자민스님은 2019년 비구니 스님에 대한 최고 지위인 명사법계를 품수했으며 2021년 천안 연대선원, 서울 보성사 회주로 있다. 수계제자로는 지현(志衒)·재응(在應)·대영(大暎)·덕운(德雲)·보연(補衍)·상규(尙圭)·영운(嶺雲)·진우(振佑)·인욱(仁旭)·계현(季泫)·성운(星雲)·영조(暎照)·진각(眞覺)·지오(志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214~230.&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85.&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77.&lt;br /&gt;
* 현대불교, 후학양성·사회사업 헌신하는 자민 스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94 (2005년)&lt;br /&gt;
* BTNm, 이하얀이 만난 스님 http://www.btn.co.kr/pro/Program_detail.asp?ls_StSbCode=CATPR_11&amp;amp;PID=P613&amp;amp;DPID=58471 (2010년)&lt;br /&gt;
* 연합뉴스, 조계종, 비구니스님 11명에 최고 품계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5124500005 (2019년)&lt;br /&gt;
* 법보신문, [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5. 자민 스님 인터뷰(끝)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9358 (2020년)&lt;br /&gt;
* BBS, 믿음이 중요한 이유? _ 자민스님 [찾아가는 백고좌 법회]  https://www.youtube.com/watch?v=x0WO9fwv2oQ (2021년)&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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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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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혜진(惠眞)스님|혜진스님(惠眞)]]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범어사 대성암]]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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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명사(明師)|명사법계(明師法階)]] || ~을(를) 품수하다 ||&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천안 연대선원]]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서울 보련암]]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 [[자민스님(慈珉, 1939生, 비구니)|자민스님(慈珉)]] || [[서울 보성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연대선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성동 589-5&lt;br /&gt;
{{구글지도 | 위도= 36.799661 | 경도=127.157392 | 줌=17}}&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자민스님(慈珉,_1939生,_비구니)}}&lt;br /&gt;
{{AINarrative | key=자민스님(慈珉,_1939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D%98%B8%EC%8A%A4%EB%8B%98(%E6%88%92%E6%98%8A,_195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6265</id>
		<title>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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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03-31T03:46: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호(戒昊)스님&lt;br /&gt;
|사진= 039 계호(戒昊).jpg&lt;br /&gt;
|법명= '''계호(戒昊)'''&lt;br /&gt;
|법호= 원인(圓仁)&lt;br /&gt;
|속명= 김옥희(金玉姬)&lt;br /&gt;
|출생= 1950. 12. 6&lt;br /&gt;
|출가= 1968년&lt;br /&gt;
|입적= &lt;br /&gt;
|사찰='''보광사'''&amp;lt;/br&amp;gt;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남산리 72&lt;br /&gt;
|특이사항= &lt;br /&gt;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 1950 || 강원 묵호 출생&lt;br /&gt;
|-&lt;br /&gt;
| 1969 || 진관사에서 진관(眞觀)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 1974 || 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 1978 ||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 || 대원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 1979 || 산청 대원사에서 수선 안거 이래 10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 1983 ||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lt;br /&gt;
| 1983~1995 || 운문사 강원에서 13년간 강사 역임&lt;br /&gt;
|-&lt;br /&gt;
| 1993 ||운문사 강원에서 명성(眀星)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받음&lt;br /&gt;
|-&lt;br /&gt;
| 1994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수료&lt;br /&gt;
|-&lt;br /&gt;
| 1994~2004 || 횡성 보광사 주지 및 부설 룸비니유치원 원장&lt;br /&gt;
|-&lt;br /&gt;
| 1998~2004 || 대한불교 조계종 제12, 13대 중앙종회의원&lt;br /&gt;
|-&lt;br /&gt;
| 2004 || 보광사 주지 &lt;br /&gt;
|}&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middle; text-align:left; background-color:white; width:64%&amp;quot; &lt;br /&gt;
|-&lt;br /&gt;
| 문중 || [[법기(法起)문중|법기문중(法起)]]&lt;br /&gt;
|-&lt;br /&gt;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성문(成門)·기석(耆石)·성조(性照)·성종(成宗)·성범(成範)&lt;br /&gt;
|-&lt;br /&gt;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심공(心空, 7)→정자(淨慈, 8)→[[인홍스님(仁弘, 1908生, 비구니)|인홍(仁弘, 9)]]→[[진관스님(眞觀, 1928生, 비구니)|진관(眞觀, 10)]]→[[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戒昊, 11)]]→성문(成門, 12), 기석(耆石, 12), 성조(性照, 12), 성종(成宗, 12), 성범(成範, 12)&lt;br /&gt;
|}&lt;br /&gt;
&lt;br /&gt;
== 참고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9&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365, 370.&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_1950生,_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본항목 || || 계호스님(戒昊, 1950~ ) || 戒昊||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호스님(戒昊,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항목1 ||  항목2 ||  관계 || style=&amp;quot;width:300px&amp;quot; | 속성&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법기(法起)문중|법기문중(法起)]] || ~의 일원이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진관스님(眞觀, 1928生, 비구니)|진관스님(眞觀)]] || ~의 수계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서울 청룡사]] || ~에서 출가하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자운성우(慈雲盛祐)|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비구니계&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운문사 강원(승가대학)]] || ~에서 수학하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운문사 강원(승가대학)]]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강사&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명성스님(眀星, 1931生, 비구니)|명성스님(眀星)]] || ~(으)로부터 전강하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중앙승가대학교]] || ~을(를) 졸업하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 ~을(를) 졸업하다 ||&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횡성 보광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룸비니유치원(횡성)]]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원장&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종회의원&lt;br /&gt;
|-&lt;br /&gt;
| [[계호스님(戒昊, 1950生, 비구니)|계호스님(戒昊)]]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산청 대원사 등&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횡성 보광사''' :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남산리 72&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7.4715828 | 경도= 127.9974201 | 줌=17 }}&lt;br /&gt;
&lt;br /&gt;
==다른 비구니 스님==&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한국) 주요 비구니 스님]]'''&lt;br /&gt;
   '''☞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대한민국(한국) 비구니 인물사전 데이터 아카이브]]'''&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lt;br /&gt;
==지식관계망==&lt;br /&gt;
{{SemanticGraph | key=계호스님(戒昊,_1950生,_비구니)}}&lt;br /&gt;
&lt;br /&gt;
==주석==&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 : 비구니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75</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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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48: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세심사===&lt;br /&gt;
세심사(洗心寺)는 전통사찰 제61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영인산 기슭에 있는 절로써 백제 때 창건해 654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스님이 중창했다고 하지만 입증할 문헌은 아직 찾지 못했다. 1530년(중종25)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의《여지도서》《범우고》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lt;br /&gt;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 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lt;br /&gt;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 · 산신각 · 범종각 · 요사채가 있다.&lt;br /&gt;
대웅전 안에는 소조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lt;br /&gt;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원정·보심·품관·대운 등이 그렸다.&lt;br /&gt;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lt;br /&gt;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으며,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으로 만든 9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231호)이 있는데, 상륜부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lt;br /&gt;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부도 2기만 있다.&lt;br /&gt;
이 밖에 1563년(명종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의식집인 청문판 4매가 남아 있다.&lt;br /&gt;
* 출처 : 아산시 문화관광 https://www.asan.go.kr/tour/develop/m_tour/?m_mode=view&amp;amp;pds_no=2019111514555772380&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3.&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0, 340&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 ~안거를 성만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74</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74"/>
		<updated>2022-06-29T15:47: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세심사===&lt;br /&gt;
세심사(洗心寺)는 전통사찰 제61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영인산 기슭에 있는 절로써 백제 때 창건해 654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스님이 중창했다고 하지만 입증할 문헌은 아직 찾지 못했다. 1530년(중종25)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의《여지도서》《범우고》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lt;br /&gt;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 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lt;br /&gt;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 · 산신각 · 범종각 · 요사채가 있다.&lt;br /&gt;
대웅전 안에는 소조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lt;br /&gt;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원정·보심·품관·대운 등이 그렸다.&lt;br /&gt;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lt;br /&gt;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으며,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으로 만든 9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231호)이 있는데, 상륜부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lt;br /&gt;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부도 2기만 있다.&lt;br /&gt;
이 밖에 1563년(명종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의식집인 청문판 4매가 남아 있다.&lt;br /&gt;
* 출처 : 아산시 문화관광 https://www.asan.go.kr/tour/develop/m_tour/?m_mode=view&amp;amp;pds_no=2019111514555772380&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3.&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0, 340&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 ~안거를 성만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72</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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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43: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세심사===&lt;br /&gt;
세심사(洗心寺)는 전통사찰 제61호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영인산 기슭에 있는 절로써 백제 때 창건해 654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스님이 중창했다고 하지만 입증할 문헌은 아직 찾지 못했다. 1530년(중종25)에 편찬한《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 의《여지도서》《범우고》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 왔음을 알 수 있다.&lt;br /&gt;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 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lt;br /&gt;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해 영산전 · 산신각 · 범종각 · 요사채가 있다.&lt;br /&gt;
대웅전 안에는 소조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lt;br /&gt;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원정·보심·품관·대운 등이 그렸다.&lt;br /&gt;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lt;br /&gt;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으며,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으로 만든 9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231호)이 있는데, 상륜부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lt;br /&gt;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부도 2기만 있다.&lt;br /&gt;
이 밖에 1563년(명종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의식집인 청문판 4매가 남아 있다.&lt;br /&gt;
* 출처 : 아산시 문화관광 https://www.asan.go.kr/tour/develop/m_tour/?m_mode=view&amp;amp;pds_no=2019111514555772380&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3.&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0, 340&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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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71</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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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38:4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3.&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0, 340&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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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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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34:3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76~7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3.&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30, 340&lt;br /&gt;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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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68</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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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31: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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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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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30:3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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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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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66"/>
		<updated>2022-06-29T15:30:0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65</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65"/>
		<updated>2022-06-29T15:29:4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lt;br /&gt;
*법보신문, 아산 세심사, 소장 ‘부모은중경’ 학술세미나 (2019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825&lt;br /&gt;
*충청일보, 세심사 25일 학술세미나 개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주제 (2019년)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3759&lt;br /&gt;
*유튜브, 마음을 씻어 주는 아산 세심사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9ALTS4X6wqs&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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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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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26: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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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불교회관]]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60</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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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5:24:0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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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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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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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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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법연(法蓮)]]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아산 세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룸비니 유치원]] || ~을 개원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일현(一玄)(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석암(昔岩)스님(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34</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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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4:30: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세심사에서 법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25</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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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9T14:19: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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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2713"/>
		<updated>2022-06-29T14:04: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   File]]&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지행(智行)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719</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719"/>
		<updated>2022-06-25T09:37:1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   File]]&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76)]]&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718</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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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34:1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   File(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파일:473-02.jpg|섬네일|지장암의 모습]]&lt;br /&gt;
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716</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716"/>
		<updated>2022-06-25T09:30: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파일473-02   File(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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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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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9:25: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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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섬네일, 1941生, 비구니)|섬네일]]&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File(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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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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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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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File(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 &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혜종(慧宗)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오대산 남대 지장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남대 지장암 기린선원]] || ~을 정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만화(萬化) 희찬(喜燦)스님|희찬(喜燦)스님(1919~1983;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청하당(淸霞堂) 성원(性源) 대선사|성원(性源)스님(1927~2004;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 ~의 주지(감원)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정안(淨岸)스님]] || [[백양사 천진암 백암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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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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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29: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File(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세심사 대웅전과 다층석탑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73~47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76&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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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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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05:3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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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나주&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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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80</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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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04: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불교대학 개설과 교육포교===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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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74</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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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8:02: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와 수행===&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lt;br /&gt;
1960년 친구와 함께 충남 마곡사 영은암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남 아산시 세심사에서 법련(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강원에 들어갔지만 사정이 생겨 세심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심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생활하던 스님은 어느 날 내원사로 가기 위해 무작정 걸망을 지고 나와 군용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렸다. 그때 내원사로 향하는 한 스님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내원사에서 그 스님과 함께 정진하며 생활했는데, 아쉽게도 도반스님은 아이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며 속퇴하였다. &lt;br /&gt;
그 뒤 지행스님은 내원암, 동화사 등 제방의 선방에서 수선 정진을 하며 20안거를 성만하였다. &lt;br /&gt;
&lt;br /&gt;
&lt;br /&gt;
===어린이 포교와 룸비니 유치원 개원===&lt;br /&gt;
공부를 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던 스님은 당시 세심사 주지였던 이청우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주지를 맡아 살며 어린이 포교에 힘을 기울여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건물은 신도가 지어서 기증을 하였다. 당시 세심사에는 중·고등부 학생회가 있었는데 유치원을 개원함으로써 장차 청년 포교의 발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현재 룸비니 유치원은 16회 졸업생을 배출하며 많은 새싹 불자들을 키워냈다. 유치원 법회에는 이곳을 졸업한 아이들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함께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며 불심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불심을 배우고 키워야 순수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법문도 잘 받아들인다는 스님의 생각은 이렇게 유치원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평생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부처님 일을 하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스님의 바람이다. &lt;br /&gt;
스님은 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서인지 온몸에 생기가 가득 차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평소 아산에 불교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스님은 룸비니 유치원을 개원한 뒤 힘을 기울여 회관을 지어 현재 아산불교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lt;br /&gt;
지금은 아산 불교의 모든 일을 그곳에서 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또한 포교대학인 전통불교대학을 개설하여 교수님들 과 큰스님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고, 스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합하여 200여 명의 신도들에게 기초교리를 강의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포교활동을 자원하는 젊은 스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젊은 스님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을 보고 배워 포교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lt;br /&gt;
예전에 비하면 포교 여건이 훨씬 잘 갖추어져 있는 실정인데도 포교에 임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며 힘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젊은 스님들을 찾고 있다. 바쁜 생활을 하는 지행스님은 하루에 2시간밖에 자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도 신도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스님을 보고 신도들은 ‘머슴’이란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부처님 은혜로 살기에 늘 감사하다는 스님은 ‘출가해서 왜 편히 살려고 하는지, 부처님 법을 펴는데 과연 힘을 다하고 있는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출가란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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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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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7:54: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출가를 결심하다===&lt;br /&gt;
무진스님은 1954년 7월 13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이의석과 어머니 서순태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정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슬퍼하다가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님은 1969년 나이 16세에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법주사 혜정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82년 범어사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화운사강원과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하다===&lt;br /&gt;
&lt;br /&gt;
1982년 스님은 화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는 서울 옥경사 주지로 부임했으며, 1986년에는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 법계를 품수하였다. 한편 스님은 강원 교육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앙승가대학교 복지학과에 진학하여 198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 동화사 양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하는 수 없이 화장사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13.png | 400px | center | 무진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lt;br /&gt;
화장사로 돌아온 후 스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은사 수인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여 1988년 화장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화장사는 1938년(불기 2482년) 비구니 영서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에서 수행하던 영서스님이 절터를 찾아 청주에 왔다가 샘물가에 피어있던 흰 꽃에 반하여 법당을 겸한 요사, 후원 1동의 소박한 절을 세운 것이다. 그 후 영서스님의 뒤를 이어 수제자 수인스님이 화장사를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가람 수호와 수행 정진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lt;br /&gt;
&lt;br /&gt;
무진스님은 1988년 5월 6일 화장사 3대 주지로 취임한 뒤 협소하고 허물어져가는 13평짜리 법당을 중창 복원하려는 불사 원력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데에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사 주변 토지를 매입·재정비하여 1991년 8월 30일 불사 기공식을 하고 5년 후 1996년 4월 29일 1층 종무소 겸 요사 100평, 2층 70평 법당을 완공하였다. 대웅보전을 웅장하게 짓고 나니 전에 모셨던 청동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새롭게 조성하여 모시고 후불탱화, 감로탱화, 신중탱화 등 3점을 봉안하여 1997년 12월 7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반영하여 전통적 오색단청의 틀을 유지하되 현대성을 반영한 황금단청으로 장엄하여 2002년 10월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91.png | 400px | center | 화장사의 봄 (사진출처: [https://화장사.com 화장사 홈페이지])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포교를 활발히 하고 있다. 가족건강법회를 통하여 요가, 선체조, 스포츠마사지 등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기구를 설치해 주기도 하고 절 주위에 수많은 꽃을 심어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가침박달나무가 꽃피는 때를 이용하여 매년 &amp;lt;깨침 꽃 축제&amp;gt;를 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청주시 북부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복지사업에 뜻을 두어 수십 년간 해마다 3회씩 혜능보육원에 보시를 하여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008년 3월 9일 필리핀에 대웅보전 불사를 시작하여 약 60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요사채, 선원, 다원, 교육실, 식당, 일주문등 10여동 불사를 마치고 2011년 4월 8일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최초의 한국 비구니사찰인 마닐라선원을 개원했다. 이 선원은 어느 한국인 불자부부가 이민생활 15년 동안 필리핀에서 모은 재산으로 마닐라 외곽에 아름다운 선원을 지어 조계종단에 기증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스님은 불교의 불모지 필리핀에서 참선, 템플스테이, 다도, 사찰음식 등의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엘리트 불자 양성에 매진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lt;br /&gt;
&lt;br /&gt;
화장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47-7&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67</id>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7%80%ED%96%89%EC%8A%A4%EB%8B%98(%E6%99%BA%E8%A1%8C,_194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1567"/>
		<updated>2022-06-25T07:53: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지행스님.png [[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출가를 결심하다===&lt;br /&gt;
무진스님은 1954년 7월 13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이의석과 어머니 서순태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정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슬퍼하다가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님은 1969년 나이 16세에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법주사 혜정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82년 범어사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화운사강원과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하다===&lt;br /&gt;
&lt;br /&gt;
1982년 스님은 화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는 서울 옥경사 주지로 부임했으며, 1986년에는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 법계를 품수하였다. 한편 스님은 강원 교육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앙승가대학교 복지학과에 진학하여 198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 동화사 양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하는 수 없이 화장사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13.png | 400px | center | 무진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lt;br /&gt;
화장사로 돌아온 후 스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은사 수인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여 1988년 화장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화장사는 1938년(불기 2482년) 비구니 영서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에서 수행하던 영서스님이 절터를 찾아 청주에 왔다가 샘물가에 피어있던 흰 꽃에 반하여 법당을 겸한 요사, 후원 1동의 소박한 절을 세운 것이다. 그 후 영서스님의 뒤를 이어 수제자 수인스님이 화장사를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가람 수호와 수행 정진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lt;br /&gt;
&lt;br /&gt;
무진스님은 1988년 5월 6일 화장사 3대 주지로 취임한 뒤 협소하고 허물어져가는 13평짜리 법당을 중창 복원하려는 불사 원력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데에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사 주변 토지를 매입·재정비하여 1991년 8월 30일 불사 기공식을 하고 5년 후 1996년 4월 29일 1층 종무소 겸 요사 100평, 2층 70평 법당을 완공하였다. 대웅보전을 웅장하게 짓고 나니 전에 모셨던 청동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새롭게 조성하여 모시고 후불탱화, 감로탱화, 신중탱화 등 3점을 봉안하여 1997년 12월 7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반영하여 전통적 오색단청의 틀을 유지하되 현대성을 반영한 황금단청으로 장엄하여 2002년 10월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91.png | 400px | center | 화장사의 봄 (사진출처: [https://화장사.com 화장사 홈페이지])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포교를 활발히 하고 있다. 가족건강법회를 통하여 요가, 선체조, 스포츠마사지 등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기구를 설치해 주기도 하고 절 주위에 수많은 꽃을 심어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가침박달나무가 꽃피는 때를 이용하여 매년 &amp;lt;깨침 꽃 축제&amp;gt;를 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청주시 북부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복지사업에 뜻을 두어 수십 년간 해마다 3회씩 혜능보육원에 보시를 하여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008년 3월 9일 필리핀에 대웅보전 불사를 시작하여 약 60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요사채, 선원, 다원, 교육실, 식당, 일주문등 10여동 불사를 마치고 2011년 4월 8일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최초의 한국 비구니사찰인 마닐라선원을 개원했다. 이 선원은 어느 한국인 불자부부가 이민생활 15년 동안 필리핀에서 모은 재산으로 마닐라 외곽에 아름다운 선원을 지어 조계종단에 기증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스님은 불교의 불모지 필리핀에서 참선, 템플스테이, 다도, 사찰음식 등의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엘리트 불자 양성에 매진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lt;br /&gt;
&lt;br /&gt;
화장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47-7&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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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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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7:52: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지행스님.png&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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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출가를 결심하다===&lt;br /&gt;
무진스님은 1954년 7월 13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이의석과 어머니 서순태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정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슬퍼하다가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님은 1969년 나이 16세에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법주사 혜정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82년 범어사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화운사강원과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하다===&lt;br /&gt;
&lt;br /&gt;
1982년 스님은 화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는 서울 옥경사 주지로 부임했으며, 1986년에는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 법계를 품수하였다. 한편 스님은 강원 교육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앙승가대학교 복지학과에 진학하여 198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 동화사 양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하는 수 없이 화장사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13.png | 400px | center | 무진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lt;br /&gt;
화장사로 돌아온 후 스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은사 수인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여 1988년 화장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화장사는 1938년(불기 2482년) 비구니 영서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에서 수행하던 영서스님이 절터를 찾아 청주에 왔다가 샘물가에 피어있던 흰 꽃에 반하여 법당을 겸한 요사, 후원 1동의 소박한 절을 세운 것이다. 그 후 영서스님의 뒤를 이어 수제자 수인스님이 화장사를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가람 수호와 수행 정진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lt;br /&gt;
&lt;br /&gt;
무진스님은 1988년 5월 6일 화장사 3대 주지로 취임한 뒤 협소하고 허물어져가는 13평짜리 법당을 중창 복원하려는 불사 원력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데에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사 주변 토지를 매입·재정비하여 1991년 8월 30일 불사 기공식을 하고 5년 후 1996년 4월 29일 1층 종무소 겸 요사 100평, 2층 70평 법당을 완공하였다. 대웅보전을 웅장하게 짓고 나니 전에 모셨던 청동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새롭게 조성하여 모시고 후불탱화, 감로탱화, 신중탱화 등 3점을 봉안하여 1997년 12월 7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반영하여 전통적 오색단청의 틀을 유지하되 현대성을 반영한 황금단청으로 장엄하여 2002년 10월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91.png | 400px | center | 화장사의 봄 (사진출처: [https://화장사.com 화장사 홈페이지])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포교를 활발히 하고 있다. 가족건강법회를 통하여 요가, 선체조, 스포츠마사지 등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기구를 설치해 주기도 하고 절 주위에 수많은 꽃을 심어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가침박달나무가 꽃피는 때를 이용하여 매년 &amp;lt;깨침 꽃 축제&amp;gt;를 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청주시 북부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복지사업에 뜻을 두어 수십 년간 해마다 3회씩 혜능보육원에 보시를 하여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008년 3월 9일 필리핀에 대웅보전 불사를 시작하여 약 60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요사채, 선원, 다원, 교육실, 식당, 일주문등 10여동 불사를 마치고 2011년 4월 8일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최초의 한국 비구니사찰인 마닐라선원을 개원했다. 이 선원은 어느 한국인 불자부부가 이민생활 15년 동안 필리핀에서 모은 재산으로 마닐라 외곽에 아름다운 선원을 지어 조계종단에 기증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스님은 불교의 불모지 필리핀에서 참선, 템플스테이, 다도, 사찰음식 등의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엘리트 불자 양성에 매진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lt;br /&gt;
&lt;br /&gt;
화장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47-7&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br /&gt;
[[파일:지행스님.png|섬네일]]&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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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지행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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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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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본관=나주&lt;br /&gt;
|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출가를 결심하다===&lt;br /&gt;
무진스님은 1954년 7월 13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이의석과 어머니 서순태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정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슬퍼하다가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님은 1969년 나이 16세에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법주사 혜정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82년 범어사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화운사강원과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하다===&lt;br /&gt;
&lt;br /&gt;
1982년 스님은 화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는 서울 옥경사 주지로 부임했으며, 1986년에는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 법계를 품수하였다. 한편 스님은 강원 교육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앙승가대학교 복지학과에 진학하여 198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 동화사 양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하는 수 없이 화장사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13.png | 400px | center | 무진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lt;br /&gt;
화장사로 돌아온 후 스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은사 수인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여 1988년 화장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화장사는 1938년(불기 2482년) 비구니 영서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에서 수행하던 영서스님이 절터를 찾아 청주에 왔다가 샘물가에 피어있던 흰 꽃에 반하여 법당을 겸한 요사, 후원 1동의 소박한 절을 세운 것이다. 그 후 영서스님의 뒤를 이어 수제자 수인스님이 화장사를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가람 수호와 수행 정진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lt;br /&gt;
&lt;br /&gt;
무진스님은 1988년 5월 6일 화장사 3대 주지로 취임한 뒤 협소하고 허물어져가는 13평짜리 법당을 중창 복원하려는 불사 원력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데에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사 주변 토지를 매입·재정비하여 1991년 8월 30일 불사 기공식을 하고 5년 후 1996년 4월 29일 1층 종무소 겸 요사 100평, 2층 70평 법당을 완공하였다. 대웅보전을 웅장하게 짓고 나니 전에 모셨던 청동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새롭게 조성하여 모시고 후불탱화, 감로탱화, 신중탱화 등 3점을 봉안하여 1997년 12월 7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반영하여 전통적 오색단청의 틀을 유지하되 현대성을 반영한 황금단청으로 장엄하여 2002년 10월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91.png | 400px | center | 화장사의 봄 (사진출처: [https://화장사.com 화장사 홈페이지])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포교를 활발히 하고 있다. 가족건강법회를 통하여 요가, 선체조, 스포츠마사지 등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기구를 설치해 주기도 하고 절 주위에 수많은 꽃을 심어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가침박달나무가 꽃피는 때를 이용하여 매년 &amp;lt;깨침 꽃 축제&amp;gt;를 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청주시 북부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복지사업에 뜻을 두어 수십 년간 해마다 3회씩 혜능보육원에 보시를 하여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008년 3월 9일 필리핀에 대웅보전 불사를 시작하여 약 60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요사채, 선원, 다원, 교육실, 식당, 일주문등 10여동 불사를 마치고 2011년 4월 8일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최초의 한국 비구니사찰인 마닐라선원을 개원했다. 이 선원은 어느 한국인 불자부부가 이민생활 15년 동안 필리핀에서 모은 재산으로 마닐라 외곽에 아름다운 선원을 지어 조계종단에 기증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스님은 불교의 불모지 필리핀에서 참선, 템플스테이, 다도, 사찰음식 등의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엘리트 불자 양성에 매진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lt;br /&gt;
&lt;br /&gt;
화장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47-7&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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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행스님(智行, 194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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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지행(智行)스님&lt;br /&gt;
|사진=&lt;br /&gt;
|법명=지행(智行)&lt;br /&gt;
|속명=임순희(林順姬)&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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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41. 10. 3&lt;br /&gt;
|출가=&lt;br /&gt;
|사찰= 세심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양리 221)&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지행(智行)스님은 1941년 10월 3일 아버지 임동출과 어머니 김해점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며, 이름은 임순희이다.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1 충남 당진 출생 &lt;br /&gt;
1960 세심사에서 법연(法蓮)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1962 일현一玄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내원암, 동화사 등 선방에서 20여 안거 성만&lt;br /&gt;
1963 석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lt;br /&gt;
     세심사 주지 취임 &lt;br /&gt;
     룸비니유치원 운영 &lt;br /&gt;
 2004 현재 세심사 주지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어린이 포교===&lt;br /&gt;
===수계제자 : 덕수(德修)·인수·성수·연수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출가를 결심하다===&lt;br /&gt;
무진스님은 1954년 7월 13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이의석과 어머니 서순태의 장녀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정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슬퍼하다가 건강까지 해치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님은 1969년 나이 16세에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법주사 혜정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82년 범어사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lt;br /&gt;
&lt;br /&gt;
===화운사강원과 중앙승가대학에서 공부하다===&lt;br /&gt;
&lt;br /&gt;
1982년 스님은 화운사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는 서울 옥경사 주지로 부임했으며, 1986년에는 청주 화장사에서 수인 법계를 품수하였다. 한편 스님은 강원 교육만으로는 아쉬움을 느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앙승가대학교 복지학과에 진학하여 1987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 동화사 양진암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그러나 선원에서 정진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하는 수 없이 화장사로 돌아왔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13.png | 400px | center | 무진스님(사진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p415)]]&lt;br /&gt;
&lt;br /&gt;
===화장사 주지를 맡아 사찰 면모를 일신하다=== &lt;br /&gt;
&lt;br /&gt;
화장사로 돌아온 후 스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고, 은사 수인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여 1988년 화장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화장사는 1938년(불기 2482년) 비구니 영서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에서 수행하던 영서스님이 절터를 찾아 청주에 왔다가 샘물가에 피어있던 흰 꽃에 반하여 법당을 겸한 요사, 후원 1동의 소박한 절을 세운 것이다. 그 후 영서스님의 뒤를 이어 수제자 수인스님이 화장사를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가람 수호와 수행 정진으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다. &lt;br /&gt;
&lt;br /&gt;
무진스님은 1988년 5월 6일 화장사 3대 주지로 취임한 뒤 협소하고 허물어져가는 13평짜리 법당을 중창 복원하려는 불사 원력을 세웠다. 지대가 높은 데에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지 않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사 주변 토지를 매입·재정비하여 1991년 8월 30일 불사 기공식을 하고 5년 후 1996년 4월 29일 1층 종무소 겸 요사 100평, 2층 70평 법당을 완공하였다. 대웅보전을 웅장하게 짓고 나니 전에 모셨던 청동 아미타불님과 관세음보살님, 대세지보살님이 너무 작아 보였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지장보살님을 새롭게 조성하여 모시고 후불탱화, 감로탱화, 신중탱화 등 3점을 봉안하여 1997년 12월 7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편리성과 효율성을 반영하여 전통적 오색단청의 틀을 유지하되 현대성을 반영한 황금단청으로 장엄하여 2002년 10월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무진스님-PICCF91.png | 400px | center | 화장사의 봄 (사진출처: [https://화장사.com 화장사 홈페이지]) ]]&lt;br /&gt;
&lt;br /&gt;
===활발한 포교를 펼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방법으로 포교를 활발히 하고 있다. 가족건강법회를 통하여 요가, 선체조, 스포츠마사지 등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어린이들을 위해 놀이기구를 설치해 주기도 하고 절 주위에 수많은 꽃을 심어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가침박달나무가 꽃피는 때를 이용하여 매년 &amp;lt;깨침 꽃 축제&amp;gt;를 열고 있다. 또한 스님은 청주시 북부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하면서 복지사업에 뜻을 두어 수십 년간 해마다 3회씩 혜능보육원에 보시를 하여 감사패를 받은 바 있다.&lt;br /&gt;
&lt;br /&gt;
===필리핀 최초의 비구니 한국사찰 ‘마닐라선원’의 주지를 맡다===&lt;br /&gt;
&lt;br /&gt;
스님은 2008년 3월 9일 필리핀에 대웅보전 불사를 시작하여 약 60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요사채, 선원, 다원, 교육실, 식당, 일주문등 10여동 불사를 마치고 2011년 4월 8일 필리핀 카비테 실랑에 최초의 한국 비구니사찰인 마닐라선원을 개원했다. 이 선원은 어느 한국인 불자부부가 이민생활 15년 동안 필리핀에서 모은 재산으로 마닐라 외곽에 아름다운 선원을 지어 조계종단에 기증한 인연에 의한 것이다. 스님은 불교의 불모지 필리핀에서 참선, 템플스테이, 다도, 사찰음식 등의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향후 엘리트 불자 양성에 매진하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lt;br /&gt;
&lt;br /&gt;
화장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47-7&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413~417.&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49.&lt;br /&gt;
* 연합뉴스 2011.4.11. 필리핀 마닐라선원 개원 및 점안 대법회 (https://www.yna.co.kr/view/RPR20110411014500353)&lt;br /&gt;
* 불교신문 주말 건강법회 여는 청주 화장사 2004.09.15.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불교신문 가을 청소년문화마당’ 연 청주 화장사 주지 무진스님. 2005. 9. 20.(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8304)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1441)&lt;br /&gt;
* 청주 화장사 가침박달나무(blog.naver.com›wybshj)&lt;br /&gt;
* 화장사 홈페이지(https://화장사.com)&lt;br /&gt;
&lt;br /&gt;
&lt;br /&gt;
[[분류: 비구니 인명사전]]&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46</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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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6:27:0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흥륜사(경북 경주시 국당3길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 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선수행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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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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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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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6:26: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생애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흥륜사(경북 경주시 국당3길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 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선수행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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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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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6:19:0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흥륜사(경북 경주시 국당3길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 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선수행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8</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8"/>
		<updated>2022-06-25T06:17: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 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선수행에 전념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7</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7"/>
		<updated>2022-06-25T06:11: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 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셨으며 선수행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6</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6"/>
		<updated>2022-06-25T06:10: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寶珠堂) 혜해(慧海)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셨으며 선수행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5</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5"/>
		<updated>2022-06-25T06:08: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셨으며 선수행에 전념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4</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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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6:07:5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보주당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경주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신계사 복원사업에 큰 기여를 하셨으며 선수행에 전념하신[[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3</id>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D%95%B4(%E6%85%A7%E6%B5%B7)%EC%8A%A4%EB%8B%98&amp;diff=1533"/>
		<updated>2022-06-25T06:05:2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보주당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선수행에 전념하신[[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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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혜해(慧海)스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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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25T06:04: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부주당 혜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선수행에 전념하신[[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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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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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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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정의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해(慧海)스님&lt;br /&gt;
|사진=[[File:혜해스님1.jpg|240px]]&lt;br /&gt;
|법명=혜해(慧海)&lt;br /&gt;
|법호=보주당(寶珠堂)&lt;br /&gt;
|속명=박성일(朴聖一) &lt;br /&gt;
|본관=밀양&lt;br /&gt;
|출생=1921. 4. 27&lt;br /&gt;
|출가=1944년&lt;br /&gt;
|입적=2020. 5. 2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경북 경주시 국당3길5 흥륜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혜햬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흥륜사 [[천경림금당선원]]을 개원하였고,선수행에 전념하신[[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21 평북 정주 출생&lt;br /&gt;
1941 유점사 말사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금강산에서 남하&lt;br /&gt;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46~1990 각 제방 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1980~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lt;br /&gt;
1991~  흥륜사 천경림 금당선원 선원장 겸 주지&lt;br /&gt;
2020. 5. 29. 입적(법랍 77세, 세납 100세)&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 수계제자 :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외&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 &lt;br /&gt;
혜해 스님은 1921년 4월27일 평안북도 정주군 안홍면에서 1남3녀 중 삼녀로 태어났다. 24세가 되던 1944년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 스님]]을 은사로 행자 생활을 시작해 6개월 후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정진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lt;br /&gt;
&lt;br /&gt;
(출처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lt;br /&gt;
스님은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다가도 목탁을 두드리며 지나가는 탁발승만 보면 나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님들을 하대하던 당시의 현실에 출가의 꿈을 접었고, 더욱이 여자가 출가하면 남동생의 운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스님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이 다음에 자라면 금강산에 가서 살 거야.” 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1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스님은 3년 상을 마친 후 홀연히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유점사의 말사인 신계사 미륵도량 법기암에 올라 미련 없이 삭발염의하고 대원스님을 은사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lt;br /&gt;
&lt;br /&gt;
법기암에서의 행자 시절은 엄하고 무섭기만 하였다. 내금강 법기봉 아래에 있던 법기암은 법기보살이 상주하며 설법하는 곳으로 미륵 부처님이 나올 곳이라는 얘기가 있던 절이었다. 법기암에는 은사 대원스님을 위시하여 사숙님과 사형들, 거기에 은사스님이 데려다 기르는 아이들까지 더 해 20여 명의 대중들이 모여 살았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엄격한 은사스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사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공양 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또한 보급대로 차출되어 며칠씩 흙짐을 지어 나르기도 했는데, 밥만 먹으면 흙짐을 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하루에 하나씩 떨어지곤 했다.&lt;br /&gt;
&lt;br /&gt;
겨울이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20여 명이 넘는 대중의 옷을 한꺼번에 빨 때면 대중이 벗어 놓은 빨래가 태산 같아서 하루에 다 빨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며칠에 걸쳐 도랑에 큰 솥을 걸어놓고 삶아내고, 삶은 빨래는 도랑물에 헹궈 풀밭에 널었다가 다시 푹 삶아 잿물을 뺀 다음, 먹물을 들였다. 겨울이면 빨래가 더디 마르기 때문에 여느 계절보다 며칠은 더 고생을 했다.&lt;br /&gt;
 &lt;br /&gt;
===은사스님의 가르침===&lt;br /&gt;
혜해스님이 출가하기 전 법기암 근처에 산불이 났는데, 은사 대원스님은 모두를 대피시킨 다음 법당 부처님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람에 실려 온 불덩이들이 법기암에는 떨어지지 않고 피해갔다고 한다. 은사스님은 항상 관음기도를 하면서 겨울이면 '법화경 산림'을 열었을 정도로 신심 깊은 분이셨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계를 받은 이듬해에 잠시 유점사의 일을 돕게 되었는데, 마침 신계사에 가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의 가사 장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알게 된 은사스님은 ‘제가 와서 가져갈 일이지 심부름을 시키다니.' 하며 몹시 역정을 내셨다. 다행히 사형스님이 '어쨌든지 잘 있다고 하니 보내주시지요.' 하고 말해주어서 노여움을 풀고 가사 장삼과 바리때를 보내주셨다고 한다. 그때 은사스님과의 잠깐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이차돈의 순교성지에 천경림 선원 개원===&lt;br /&gt;
24세 되던 해인 1944년 무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 받은 스님은 이듬해 8·15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lt;br /&gt;
당시 스님은 정치·사회적으로 금강산에서는 더 수행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1946년 10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왔다. 이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그리고 25세에 [[향곡(香谷)스님]]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받은 이래로 오로지 화두만을 들고 물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의 문을 두드리며 운수납자의 길을 걸어왔다. 혜해스님의 사형인 응민스님도 만공스님의 선풍을 좋아 수덕사로 내려갔다.&lt;br /&gt;
&lt;br /&gt;
납자의 길만 걷던 스님은 우연히 1970년대 초에 당시 향곡 큰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던 신라의 성지 [[천경림 흥륜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lt;br /&gt;
&lt;br /&gt;
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성지라는 역사 기록만 있을 뿐 황량하게 버려진 폐사지를 복원하여 천경림 선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향곡스님과 원만 비구니스님의 원력이 큰 힘이 되었다.&lt;br /&gt;
&lt;br /&gt;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lt;br /&gt;
&lt;br /&gt;
무엇보다 스님은 신라 고도의 땅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 ‘천경림’을 설립해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수행림 조성에 앞장섰다. 1980년대부터는 천경림 선원의 선원장을 맡아 여름과 겨울 안거 때마다 20여 수행자들의 방부를 받고 정진 대중의 외호에 힘을 기울였다. 후학들에 따르면,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죽비를 잡았으며 정진 대중으로부터 ‘생불(生佛)’로 불릴 만큼 수행자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 흥륜사가 복원된 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선방에서 좌선 중이던 혜해 스님의 몸에서 큰 불꽃이 발하는 듯한 빛이 발생한 일, 내원사 결제 당시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오직 화두 하나만 깨끗하게 들리고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고 맑은 경계를 3년 내내 이어간 삼매의 경험 등 혜해 스님의 일화는 후학 스님들에게 그대로 생생한 수행자의 이정표가 됐다.&lt;br /&gt;
&lt;br /&gt;
혜해스님은 학인들에게 자기가 살 곳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하고, 언제나 화두 공부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이 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렵고 또 좋은지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중이 되었으면 사회적인 일도, 포교활동도 모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중노릇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사에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많이 하고 각자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File:혜해스님8.jpg|400px|섬네일|금강산 복원시 인터뷰, 출처:법보신문 인터넷2020.6.3.]]&lt;br /&gt;
&lt;br /&gt;
==금강산 신계사 복원에 기여==&lt;br /&gt;
&lt;br /&gt;
한결같은 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지난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이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2007년 10월13일 낙성법회가 열릴 때까지 4년 가까이 신계사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평화를 발원하며 정진했다. 이 사실 역시 불교계 남북교류를 담당했던 스님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행담이다. 낙성법회 당시 스님의 세납은 86세였다.&lt;br /&gt;
&lt;br /&gt;
&lt;br /&gt;
==혜혜스님의 선사상==&lt;br /&gt;
&lt;br /&gt;
===구두선을 경계하고 실참을 강조했다===&lt;br /&gt;
혜해스님은 선방 수좌들에게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선방 수좌들에게 실참을 강조했다. 효봉스님은 그 참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사어록에 나와 있는 구절에 현혹되어 깨달음을 얻은 양 입으로만 떠드는 구두선으로 언행이 어긋나는 수행자를 비판하였고, 도둑질과 음행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에 장애되지 않는다고 하며 계율을 무시하는 수행자를 비판하면서 삼학을 같이 닦을 것을 강조하는 한편, 나아가 화두를 깨쳐서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정의 힘[정력, 定力]이 없는 혜(慧)를 공중의 누각과 같은 것으로 보고 선정의 힘을 중요시했다. &lt;br /&gt;
&amp;lt;br/&amp;gt;혜해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록 우리의 근본 마음이 다 밝고 똑똑하지만, 화두 잡기에는 좀 둔하고 무식한 이가 실제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좀 더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했다. 혜해 스님은 가르침을 청하는 수좌들에게, 누군가에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선문답으로,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방편으로 가르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하심과 수좌5계를 지키고 가르쳤다===&lt;br /&gt;
수행자에게 말이 큰 폐단으로 묵언을 지키되 글씨로라도 말하려는 것을 경계하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로지 화두 하나만 챙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스스로 수좌5계를 철저히 지키고, 수좌들에게 소참 법문 등을 통해서 가르쳤다.&amp;lt;br/&amp;gt;&lt;br /&gt;
수좌오계는 성철스님이 선방에 널리 공표한 것으로, '첫째 돌아다니지 마라, 둘째 말하지 마라, 셋째 책보지 마라, 넷째 간식하지 마라, 다섯째 잠 많이 자지 마라.' 이다. &lt;br /&gt;
&lt;br /&gt;
===수행과정에서 중도사상을 보이셨다===&lt;br /&gt;
선정을 위해 실참을 중요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전 공부도 소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진리의 길을 가고 그 열매를 따로록 자신을 차례차례 성숙시켜줄 다섯 가지 법으로, '첫째 훌륭한 벗을 가까이해야 한다. 둘째 계율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셋째 좋은 법문을 자주자주 들어야 한다. 넷째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예리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라고 늘 제자들에게 일렀다.&amp;lt;br/&amp;gt;&lt;br /&gt;
평소에, 모든 면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양쪽의 경계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일렀다. 심지어 어느 스승을 찾아갈 것인지를 물어오는 이에게도, &amp;quot;남쪽은 누구 북쪽은 누구, 선택은 스스로&amp;quot;라고 안내했다. 한편,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amp;lt;br/&amp;gt;&lt;br /&gt;
그와같이 70년 참선 수행을 외길을 걸으신 스님은 신계사에서 3년여 기도정진한 시간 외에는, 원적에 들 때가지 천경림 금당 선방을 떠난 적이 없었고, 스스로 수행의 정도를 내비친 적이 없으셨다.&lt;br /&gt;
(출처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  &lt;br /&gt;
&lt;br /&gt;
&lt;br /&gt;
==입적==&lt;br /&gt;
&lt;br /&gt;
[[File:입적사진.jpg|400px|흥륜사 천경림에서 화장장]]&lt;br /&gt;
[[File:사리.jpg|400px|섬네일|혜해스님의 사리]]&lt;br /&gt;
&lt;br /&gt;
평생 연의미식(軟衣美食), 호화로운 의식을 원치 않고 근검절약과 하심을 몸소 실천하며 오직 수행을 거듭하며 후학들을 제접해 온 스님은 윤4월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을 하루 앞둔 5월29일 오후9시30분, 법랍 77세, 세납 100세로 원적에 들었다.&lt;br /&gt;
&lt;br /&gt;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은 추모사에서 “때로는 방광을 나투시어 내면의 힘을 보이시고, 때로는 해 맑은 미소로 청정심을 드러내 보이신 스님은 부처님 법 만난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기셨고 초지일관 정진의 고삐를 놓치 않으셨으며 후학들에게는 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하시면서 수행의 정도를 깨우쳐 주신 큰 스승”이라며 “100년을 하루같이 생명 다하시는 날까지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으셨던 그 청산으로 자리에 머무시어 저희 후학을 경책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추모했다.(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lt;br /&gt;
&lt;br /&gt;
* 수계제자로는 법념(法念)·명진(明眞)·장주(長主)·법우(法友)·일념(一念)·법경(法鏡)·일미(一味)·법원(法原)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 자료==&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p.576~582)&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574)&lt;br /&gt;
* 유정, &amp;lt;보주당 혜해스님의 선사상&amp;gt; (2022. 5. 27 중앙승가대학교 학술발표)&lt;br /&gt;
*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법보신문 2020.06.03., 제1541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742)&lt;br /&gt;
* [사진] CBN뉴스 (홈페이지 http://www.icbnnews.com/default/index_view_page.php?idx=112827)&lt;br /&gt;
* [사진] 산따라 물따라 (인터넷 블로그 https://blog.daum.net/bori-yo/10611)&lt;br /&gt;
&lt;br /&gt;
==시맨틱 자료==&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본항목 ||선수행 비구니 ||혜해(慧海, 1921~2020)|| 慧海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혜해(慧海)스님&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대원(大願)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현대 금강산 선수행]]  || ~의 마지막 주자로 꼽힌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금강산 신계사 복원]] || ~에서 3년간 현장에서 함께 했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무불(無佛)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금당]]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해(慧海)스님]] || [[경주 흥륜사]] || ~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530</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530"/>
		<updated>2022-06-25T05:20: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혜돈 (慧頓)스님&lt;br /&gt;
|사진 = [[File:혜돈(慧頓).jpg|200px]]&lt;br /&gt;
|법명 = 혜돈 (慧頓)&lt;br /&gt;
|법호 = &lt;br /&gt;
|속명 = 정 민 오 (鄭敏梧)&lt;br /&gt;
|출생 = 1949. 5. 15 &lt;br /&gt;
|출가 = &lt;br /&gt;
|사찰 = '''용인 화운사''' 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lt;br /&gt;
}}&lt;br /&gt;
&lt;br /&gt;
== 정의 ==&lt;br /&gt;
&lt;br /&gt;
* 혜돈(慧頓)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 할머니와함께 고향에있는 작은암자 극락암을 다닌 세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여졌다&lt;br /&gt;
&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 1973~1976   해인사 약수암,삼선암,내원암,대성암등 안거 성만&lt;br /&gt;
*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수지.&lt;br /&gt;
*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 2004   현재 화운사 주석&lt;br /&gt;
&lt;br /&gt;
== 활동 및 공헌 ==&lt;br /&gt;
&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 지정(智晶) &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드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 출   가 ===&lt;br /&gt;
혜돈스님은 1949년 5월 경북상주의 불교집안에서 태어났다 &lt;br /&gt;
열여덟살이되던 해, 공부를 하고 싶었던 스님은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lt;br /&gt;
다 큰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후 편지를 써놓고 집을나와 할머니와 세살때부터 다니던 &lt;br /&gt;
극락암 주지스님께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lt;br /&gt;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새벽,서울행 첫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lt;br /&gt;
화운사입구에 당도했을때는 밤8시가 넘은 캄캄한 밤중이었기에 길을 찿기어려웠다&lt;br /&gt;
겨우찾은 어느 낮은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과 그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스님보다 어린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다&lt;br /&gt;
&lt;br /&gt;
=== 행 자 생 활 ===&lt;br /&gt;
&lt;br /&gt;
막상 출가를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출가를 결심한것은 아니었다.&lt;br /&gt;
고요한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 집을 도망쳐나왔다는것이 좀더 솔직한심정&lt;br /&gt;
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을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분을 모시고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lt;br /&gt;
어느날 [[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lt;br /&gt;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에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명과 선원에 몇분의 스님이 있었다&lt;br /&gt;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들어가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않고도 행자로서 큰방에서 &lt;br /&gt;
공부 할수 있었다. 혜돈스님은 화운사에 들어간지 3개월후, 정월대보름이 지난뒤에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시설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lt;br /&gt;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것만 있어서 누덕누덕 기워입으며 지냈다.&lt;br /&gt;
행자 혜돈은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lt;br /&gt;
다음날 새벽3시에는 반드시 일어나야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lt;br /&gt;
더군다나 행자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기에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 예불을 드리면서도 몰래 숨어 잠잘데가 없을까?&lt;br /&gt;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을 떠올렸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자기 적당하다 싶은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lt;br /&gt;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하면서 어른스님들 시중도 들기에 늘 잠이 부족했다. &lt;br /&gt;
잠자는시간은 많아야 서너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고통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 선수행의 길을 나서다 ===&lt;br /&gt;
스님은 수행을 위해 세수 24세에 해인사국일암을 시작으로 약수암 삼선암에서 안거를 보냈고, 범어사 대성암과 양산내원사등어서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대성암시절 지유큰스님께서 &amp;quot;없는데서 공부하고 찿아보고 괴로웠던것을 돌이켜봐라 &amp;quot; 돌이키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해보았다 &lt;br /&gt;
괴롭고 서러운것을 끝까지 뒤집고 다시 밑바닥까지 돌이키면서 마침내 마음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중앙승가대학 진학하다 - 1989년 재학시절 남원사 주지를 맡다&lt;br /&gt;
금산사 말사인 남원사는 1300년 역사의 고찰이지만 퇴락한 사찰이였다&lt;br /&gt;
스님은 대웅전과 요사채를 증축하고 일주문을 세우며 담장을 전통방식으로 새로 쌓았고 반야교를 놓고 길을 확장하며 도량을 일신하였다&lt;br /&gt;
10년이상을 계획했던 공사를 5년만에 마치면서도 한순간도 화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범어사 지유스님의 법문을 듣는과정에서 &lt;br /&gt;
돌연 의심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하였다 &lt;br /&gt;
[[File:혜돈스님.jpg|400px]]&lt;br /&gt;
&lt;br /&gt;
1997년 남원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은사지명스님이 계신 용인화운사로 돌아오다&lt;br /&gt;
&lt;br /&gt;
= 참고자료= &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트란출판사 , 2007,p 541. 혜돈(慧頓)스님&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393</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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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12T14:03: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4.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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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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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6-12T14:03:16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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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lt;br /&gt;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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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Chsimwon: /* 출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390</id>
		<title>사용자:혜돈(慧頓)</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2%AC%EC%9A%A9%EC%9E%90:%ED%98%9C%EB%8F%88(%E6%85%A7%E9%A0%93)&amp;diff=1390"/>
		<updated>2022-06-12T14:00:0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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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돈스님(慧頓)&lt;br /&gt;
|사진= [[:&lt;br /&gt;
[[파일:혜돈스님]]&lt;br /&gt;
|법명=혜돈(慧頓)) &lt;br /&gt;
|속명=정민오(鄭敏悟) &lt;br /&gt;
|본관=연일(延日)&lt;br /&gt;
|출생=1949. 5. 15&lt;br /&gt;
|본적=경북 상주군 화동면 보미리&lt;br /&gt;
|주소=경기도 용인시 삼가동 산 31 화운사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lt;br /&gt;
혜돈 스님은 수행과 불사에 매진해 온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949 경북 상주 출생&lt;br /&gt;
1967 화운사에서 지명(智明)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1969 대은(大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1973~1976 해인사 약수암, 삼선암, 내원암, 대성암 등 안거 성만&lt;br /&gt;
1974 화운사 사교 수료&lt;br /&gt;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1987 중앙승가대학교 졸업&lt;br /&gt;
1989~1997 전북 남원사 주지&lt;br /&gt;
1999~2000 화운사 주지&lt;br /&gt;
2004 현재 화운사 주석 (이후 상황 확인 필요함)&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 문    중 : 실상(實相)&lt;br /&gt;
* 수계제자 : 묘향(妙香)•지정(智晶)&lt;br /&gt;
* 수행지침 : 주한 바 없는 데서 마음 작용은 현실이 그대로 해인삼매로다.&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자존심을 가지자.&lt;br /&gt;
* 상    훈 :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 주지 표창패 수여 (1995)&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할머니 손잡고 다니던 세 살의 불연이 출가로 이어지다.&lt;br /&gt;
혜돈(慧頓)스님은 1949년 5월 15일 경북 상주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lt;br /&gt;
본관은 연일, 이름은 정민오이다.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 극락암을 다녔다&lt;br /&gt;
스님이 살던 곳은 심심산골이어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상주 읍내까지 나가야만 했다. &lt;br /&gt;
외지로 나가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는 장녀인 스님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lt;br /&gt;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상주 읍내에 진학한 남동생 뒷바라지를 시키면서 고향집에 바쁜 일이 있으면 집안일을 돕도록 하였다.&lt;br /&gt;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집도 싫고 부모님도 싫은 나머지 절에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스님은 열여덟살 되던 해 &lt;br /&gt;
친척오빠에게 부탁하여 절에가서 며칠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자 다 큰 처녀가 외박하고 왔다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lt;br /&gt;
그 후 스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와 그 길로 어려서 할머니손을 잡고 다니던 극락암으로 가서 어디라도 좋으니 절에만 있게 해달라고  &lt;br /&gt;
주지스님께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철없는 아이의 푸념으로만 여기고 야단을 치시던 극락암 주지스님은 출가에대한 진심을 알고 화운사를 추천해 주었다.&lt;br /&gt;
다음날 새벽, 스님은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집에 다시 붙들려 가게 될까 조심하며 서울행 첫 차인 완행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는데, &lt;br /&gt;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화운사 입구에 당도했을 때는 밤 8시가 거의 다 된 캄캄한 밤중이었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lt;br /&gt;
간신히 길을 찾아 낮은 고개에 오르자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를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그 동안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lt;br /&gt;
마침내 스님보다 어린 행자가 차려주는 꿀맛같은 저녁공양을 하는것으로 출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19세 되던 1967년 10월 21일이었다.&lt;br /&gt;
&lt;br /&gt;
===행자생활===&lt;br /&gt;
막상 출가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스님은 불교를 잘 알아서 발심 출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절 분위기가 좋았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이 싫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만 은사 지명스님은 뵙자마자 너무나 좋았다. 지명스님 같은 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하루하루 지명스님을 뵙는 기쁨으로 살던 혜돈스님은 어느 날『선가귀감』을 읽게 되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색다른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스님은 미지의 세계에 단숨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낙으로 삼고, 나의 괴로운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하였다.&lt;br /&gt;
혜돈스님이 출가한 당시 화운사에는 학인 30여 명이 있었으며 선원에도 몇 분의 스님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삭발하지 않으면 큰방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규칙이 없었기에 혜돈스님은 머리를 깎지 않고 행자로서 큰방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운사에 들어간 지 3개월쯤 후인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 삭발하였다.&lt;br /&gt;
행자 시절은 몹시도 힘이 들었다. 때가 아니면 음식을 금지하고 매 끼니를 보리밥으로 때우기 일쑤여서 수저를 내려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배가 고팠다. 옷도 다 떨어진 것만 주는 바람에 누덕누덕 기워 입고 생활하였다. 어른스님의 시봉을 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사스님의 시자로 들어가 은사스님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취침시간을 불문하고 다음날 새벽 3시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기에 힘이 많이 들었다. 더군다나 행자 일이란 해도해도 끝이없는 법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던 스님은 새벽에 예불을 하면서도‘몰래 숨어 잠잘 데가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마침내 기막힌 장소 한 곳을 떠올렸다. 바로 이불을 넣어 두는 벽장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 잠자기에 적당하다 싶은 데를 손으로 더듬거리는데 이미 누군가가 스님보다 먼저 와서 자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의 행자스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소임을 살면서 어른스님들 시중을 들다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많아야 서너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자스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잠이었던 것이다.&lt;br /&gt;
&lt;br /&gt;
==4.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395~40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lt;/div&gt;</summary>
		<author><name>Chsimwon</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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