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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bigun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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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1T03:26:12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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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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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6:10: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주(慧珠)스님&lt;br /&gt;
|사진= 568 혜주(慧珠).jpg&lt;br /&gt;
|법명=혜주(慧珠)&lt;br /&gt;
|속명=배석남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25.4.29&lt;br /&gt;
|출가= 1959년&lt;br /&gt;
|입적=2004.9.4.&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회룡사(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혜주(慧珠)스님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회룡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서울 출생 &lt;br /&gt;
|-&lt;br /&gt;
|1939|| 일본 복강현국민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43|| 복강 소창시 적십자간호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59|| 회룡사에서 도준(道準)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니계 수지 &lt;br /&gt;
|-    &lt;br /&gt;
|1963|| 석농스님에게 사집 수료&lt;br /&gt;
|-&lt;br /&gt;
|1966||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광동학원 이사 &lt;br /&gt;
|-&lt;br /&gt;
|1974|| 광동여고 설립&lt;br /&gt;
|-&lt;br /&gt;
|1981|| 회룡사 주지&lt;br /&gt;
|-&lt;br /&gt;
|1984~1998|| 자비유치원 설립 및 원장 취임&lt;br /&gt;
|-&lt;br /&gt;
|1999|| 자비장학재단 설립 및 이사장 취임&lt;br /&gt;
|-&lt;br /&gt;
|2000~2004|| 회룡사 회주&lt;br /&gt;
|-&lt;br /&gt;
|2004.9|| 회룡사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5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중 : 법기문중 처금계통 청룡사계열 제 10대손 (수행담록에는 ‘청룡’이라고 나와 있음)&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내가 아는 만큼 전달하자.&lt;br /&gt;
* 상훈 : 봉선사 감사패(1997) 외 다수&lt;br /&gt;
* 수계제자 :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혜주(慧珠)스님은 1925년 4월 29일 서울 뚝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은 배석남이다. 서울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장한 스님은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에 일본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다가 세수 20세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lt;br /&gt;
&lt;br /&gt;
===6·25전쟁 때 간호사로 근무하다===&lt;br /&gt;
스님은 6·25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 동산병원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하였다. 당시에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간호사로 근무를 하려면 많은 공부와 실습이 뒤따르지만 그때는 경험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채용할 때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에서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 근무 경력까지 있는 스님은 물어볼 것도 없이 채용되었다. &lt;br /&gt;
스님은 군인을 돌보는 야전병원이 아닌 민사처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홍천, 원주, 춘천 등에서 1년 정도 근무를 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병원 시설은 형편없을 만큼 열악하였다. &lt;br /&gt;
당시 시골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인근 산에 굴을 파고 들어가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향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주민들의 그런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아군은 사방으로 폭격을 하였고, 사람들은 굴속에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지내다가 원인 모를 이상한 병에 걸려 죽는 일이 빈번했다. &lt;br /&gt;
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한 무리씩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도 흔했다. 미군은 허물어진 집을 수리하여 임시 고아원이나 피난민 수용소로 만들었는데, 목사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여 그들에게 운영을 일임했다. &lt;br /&gt;
그러나 미군들이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음식을 제공해주면 정작 목사들은 고아들에게는 10분의 1도 주지 않고 밤에 몰래 민간인들에게 음식을 팔아 자신의 배불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스님은 그런 목사들의 행동을 보고 기독교를 불신하게 되었다. &lt;br /&gt;
야전병원이 폭격을 맞으면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파편이 몸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며 이곳저곳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이런 사람들은 트럭에 실어 춘천으로 보내 기본 응급치료를 한 후 후방인 원주로 보냈다. 아비지옥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다. 스님은 사지가 마치 나뭇가지 잘리듯 잘려나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보기가 괴로웠다. 1952년의 일이었다. &lt;br /&gt;
추운 피난 수용소에서 간호사들은 하루 종일 예방주사를 놓느라 무척 바빴다. 피난민들은 여러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에 가죽을 입혀놓은 상태와 다름없었다. 주사 바늘을 꽂으면 바늘이 푹 꺼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처참한 광경에 스님의 가슴은 미어졌고, 그즈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이처럼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 재가 신도로서 모범적인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스님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껍데기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홀연한 깨달음이 들자 한순간에 세간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죽으면 몸은 땅속으로 들어가지만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태어났다 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은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lt;br /&gt;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2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님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해 1959년 도봉산 회룡사로 향했다. 회룡사 노스님께 자신의 의문을 여쭈었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바로 그 문제를 우리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lt;br /&gt;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인생을 알기 위한 공부!’라는 일언지하에 스님은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세속의 인연을 끊었다. &lt;br /&gt;
당시 스님은 영등포에서 1,5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많은 친구들에게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스님은 사업 정리와 자금 회수 등의 문제를 손위 언니께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두고 가족들도 모르게 출가를 하였다. &lt;br /&gt;
세수 35세 되던 해인 1959년 3월, 스님은 의정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삭발은 몇 달 후인 7월 12일에 하였는데, 노스님께서 가장 좋은 날이라고 정해주신 날이었다. &lt;br /&gt;
스님은 삭발한 그 다음해, 회룡사를 사찰 명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lt;br /&gt;
출가를 한 후 스님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수덕사에 주석하시던 일타스님의 누님인 응민스님께서 혜주스님을 위해 절을 하나 얻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수행을 한다는 생각과 머지않아 자신의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도 알게 되리라는 확신과 기쁨으로 신심이 하늘 끝까지 뻗쳐올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고 살면서 실망도 많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이신 도준스님===&lt;br /&gt;
회룡사는 전쟁 당시 후퇴하던 미군들이 불을 내서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터였는데, 1953년에 은사스님이 오셔서 불사를 이룩해놓은 절이다. &lt;br /&gt;
은사스님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려워 석굴암의 복천스님께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회룡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는 미군들에게 원조를 요청해 기와나 목재 등의 자재를 지원받은 덕분에 마침내 44평의 절을 세우게 되었다. 건물 하나로 불공과 참선, 주무시는 것까지 다 해결하였다. &lt;br /&gt;
은사스님은 회룡사를 불사할 당시 미송의 목재로 지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되다 보니 모두 썩어서 붕괴되기 직전이라 근래에 다시 뜯어서 개축을 했고, 개축할 당시 스님들은 선방 운영을 2년 동안 하지 못했다. &lt;br /&gt;
요즘의 행자 기간은 절차가 간단하고 시간도 짧지만 예전의 행자 시절은 해야 할 일이 끝이 없고 절차도 복잡하며 시일도 길었다. 지금에 와서 행자 생활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무척 어려웠다. 회룡사부터 지금의 병무청 자리인 의정부까지 이어진 땅이 모두 스님들의 논이었고, 하루에 두 번씩 직접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는 등 무려 10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지금의 광동여자고등학교는 훗날 그 논을 팔아 세운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행과 수학===&lt;br /&gt;
스님이 회룡사에 온 지 이제 40년이 되었다. 그동안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비록 힘은 들었지만 행자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행자 시절에 스님은 ‘해야 할 일이나 힘든 것이 곧 수행이고, 생전 안 해본 일도 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도보로 왕복하면서 농사를 짓고, 염불을 익혔다. 참선도 이때 기초를 잡았을 정도로 부지런히 익히고 닦으며 살았다. &lt;br /&gt;
1963년에는 전강스님이 쌍룡사에 오셔서 선방을 열었다. 스님은 참회 기도를 하러 30일 동안 매일 같이 쌍룡사에 갔다. 차를 타면 지척의 거리지만 그때는 그 먼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렇게 참회 기도를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lt;br /&gt;
관해스님이 행자로 왔을 즈음의 일이다. 혜주스님은 호롱불을 켜놓고 다른 스님들과 함께 참선을 하면서 스님들이 조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키가 큰 어떤 스님이 참선을 하면서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스님 같아 보여서 한편으로는 피곤해서 그러시겠지 하며 이해를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좋은 도량에서 계속 졸 고 계시니 조금은 얄미웠다. 그러나 피곤을 무릅쓰고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고 거룩하게 느껴져 혜주스님은 환희심이 났다. 대중 들은 37일간 계속 용맹정진을 하였다. &lt;br /&gt;
예전에는 큰 길에서 회룡사까지 오려면 좁고 험한 길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신도들은 매월 열리는 법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고 드물게 이따금씩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스님은 종종 신도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기도를 해주곤 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568-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6.]]&lt;br /&gt;
&lt;br /&gt;
그 당시는 하루 세끼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소금 덩어리에 배추를 넣다시피 하여 일부러 짜게 절여 김치 한 조각이라도 아껴서 먹고, 국은 거의 우거지국이었으며, 겨울에는 동치미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lt;br /&gt;
속가에서 넉넉히 살다가 갑자기 궁색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지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님은 애당초 음식 욕심이 없는 분이었고, 먹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은 다 이겨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lt;br /&gt;
그러나 스님도 속퇴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선배 스님들이 불법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욕을 한다든지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혜주스님은 ‘저런 분들을 선배로 모시면서 구태여 이런 세계에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갈등을 두 번이나 했었다. &lt;br /&gt;
스님은 이런 일을 극복하기 위해 효봉 큰스님과 청담 큰스님, 경봉 큰스님 등을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받았지만 분명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File:568-02.jpg|섬네일|회룡사 경내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7]]&lt;br /&gt;
&lt;br /&gt;
그러나 스님의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해주신 분은 거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lt;br /&gt;
책 한 권도 제대로 빌려보기가 어려웠고 강원에서도 한문 경전으로 어렵게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스님은 한문을 잘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만약 한문을 몰랐으면 중노릇도 못했을 것이라면서 요즘도 한문 배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lt;br /&gt;
‘때론 글귀를 보고도 중노릇을 하는 법’이라고 말씀하는 스님은 발심을 스승으로 삼고, 도봉산을 화두로 삼았다. &lt;br /&gt;
스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lt;br /&gt;
‘도봉산 산 속에 큰 보물이 있어 그 보물(자기 것)을 찾으려고 왔는데, 앞에서만 뒤적거리다가 없다고 속상해 하며 돌아가 버리면 그 보물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그 깊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lt;br /&gt;
혜주스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고, ‘이런 고생쯤이야.’ 하는 확고한 의지로 고비들을 넘겨왔다. 스님은 자신도 중생이다 보니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런 말들을 가슴속에 새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광동여고 설립===&lt;br /&gt;
1966년 세수 42세에 스님이 이사로 취임한 광동학원은 1974년에 현재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설립하였다. 처음 개교할 때는 고등공민학교였고, 그것이 지금의 광동여고의 전신이다. &lt;br /&gt;
&lt;br /&gt;
[[File:568-03.jpg|섬네일|제9회 관인 자비유치원 졸업기념(1993. 2. 13.)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8 ]]    &lt;br /&gt;
&lt;br /&gt;
옛날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다. 스님은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고, 불교 신도였던 교장선생님과 승가 행진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스님은 불교 학교라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지나던 길에 고등공민학교에 법원의 차압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사정을 알아보니 당시 교장이었던 사업가가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학교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lt;br /&gt;
그때가 1971년으로 당시 스님은 법당을 짓느라고 허리가 휠 정도로 애를 쓰고 다녔고, 법당을 짓고 보니 차압당한 고등공민학교를 살릴 돈이 없었다. &lt;br /&gt;
때마침 노스님의 형제뻘 되시는 선학원의 병암스님이 찾아왔다. 혜주스님이 법당을 잘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선학원을 다시 짓기 위해 스님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병암스님은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는 선학원의 건물을 잘 지어주면 지금의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선학원을 맡아주는 조건으로 광동여고를 다시 설립하게 되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그러나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선학원 건물을 한창 짓고 있는데 선학원의 스님이 동국대학교 총장 선거에 재출마하여 낙선을 한 것이다. &lt;br /&gt;
사방에서 돈줄이 막혀 하는 수 없이 스님은 운허스님을 찾아가 광동여고가 위치한 산을 팔자고 제의를 하였다. 광동여고 재정이 어려워 교사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니 산을 팔아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자.’고 제의한 것이다. 운허스님의 허락을 받아낸 후 스님은 학교 운영에 힘을 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File:568-04.jpg|섬네일|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9]]&lt;br /&gt;
&lt;br /&gt;
당시 스님은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5년에 걸쳐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학교에 몸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lt;br /&gt;
광동여고는 설립 당시 11개의 교실에 불과했지만 후에 도시개발이 되어 증축을 하여 현재의 5층 건물이 되었다. 실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lt;br /&gt;
1962년 세수 38세에 스님은 운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그 다음해에 이석동 강사스님께 사집과를 수학하였다. 그 후 세수 42세 되던 해인 1966년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스님은 1959~1963년에 이르는 동안 회룡사 강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때 스님과 함께 강원에서 공부했던 분 가운데 한 분을 제외하고 아쉽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속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룡사 강원의 강사로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당시로는 드문 학력을 갖춘 대처승이 계셨고, 그 후임으로 역시 대처승인 일연스님이 계셨다. &lt;br /&gt;
스님의 은사스님은 입방선 시간을 반드시 지키게 했다. 농사를 하고 있는 중간에도 입선 시간을 지켜야 했으며, 겨울에는 참선에 몰두하며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혹여라도 혜주스님이 어영부영 하다가 입선을 못 드리면 며칠씩 화를 내시며 스님을 나무라셨다. &lt;br /&gt;
1971년에 법당을 짓고 스님이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입원을 하여 꼼짝을 못하자 이때부터 은사 스님의 엄한 성품이 약간은 수그러들었다. 그 정도로 입선을 강조하던 은사스님이셨다. &lt;br /&gt;
&lt;br /&gt;
[[File:568-05.jpg|섬네일|회룡사 5층 석탑, 경기도 문화재 자료 168호.신라 선덕여왕 6년 (632년)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탑이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0]]&lt;br /&gt;
&lt;br /&gt;
법당을 지은 뒤에 노스님께서 돌아가시고, 그 직후에는 디스크가 생기는 등 여느 해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다. &lt;br /&gt;
은사스님은 구족계를 청룡사에서, 혜주스님은 해인사에서 받았다. 은사스님은 6·25전쟁 전에 성도원이라는 양로원을 운영하셨고, 전시에는 노인들을 모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lt;br /&gt;
&lt;br /&gt;
===회룡사 주지===&lt;br /&gt;
혜주스님은 1964년에 회룡사 총무 소임을 맡았고, 1981년에는 주지로 취임하였다. 사찰의 규모가 크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커서 일이 끊임없이 많다. 또한 스님은 의정부에 사는 비구니스님들의 모임인 자비회를 조직하였고,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자비회==&lt;br /&gt;
자비회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1974년 신도들로부터 장학기금을 모금하고 스님들도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발생되는 이자로 일 년에 한두 명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1억이 되면 재단 설립이 가능하여 자비회 장학재단은 현재 법인으로 정식 등록된 상태이다. &lt;br /&gt;
혜주스님은 1982년 자비회관을 짓기 시작하여 1983년에 완공을 하였고, 1984년~1996년까지 자비유치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상좌스님을 동국대학교 아동학과에 보내 졸업하게 하여 원장을 맡기기도 하였으며 크게 마음을 열 때는 불사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청룡사 노스님이 기도를 다닐 때 꼭 혜주스님과 동행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룡사는 강원과 선방을 겸하고 있을 때였는데, 노스님은 혜주스님이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을 알고 같이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lt;br /&gt;
노스님이 기도를 다니신 연유는, 어렸을 때부터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갑이 지나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노스님을 금강산에 있는 절에 업어다주었는데, 노스님은 90세가 넘어서도 정정하셨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남해 보리암에 간 적도 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아침에 여수에 도착해서 남해 가는 배를 타고 그 다음에 다시 남해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마다않고 노스님은 그 곳에서 기도를 하셨다. 이때 노스님은 남해 보리암의 주지스님을 위해 옷을 꼭 한 벌씩 가져가곤 하셨다. 노스님이 직접 광목 한 필을 끊어다가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옷이었다. 노스님은 화장실 가는 옷도 따로 있었으며 법당에 가실 때는 그냥 가지 않고 목욕재계를 한 후에 가셨다. 노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혜주스님은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lt;br /&gt;
&lt;br /&gt;
==노인복지시설==&lt;br /&gt;
스님은 복지시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출가 후 열심히 수행정진 하면서 농사도 짓고 불전에 기도도 하고 참선 공부도 했지만 세월만 가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열심히 공부를 해도 부처가 되지 못하니 시은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lt;br /&gt;
이때 의정부 회관 옆에 있는 동회 사무실을 시에서 불하받아 건물을 허물고 수리를 하여 1층은 무료병원, 2층은 무료급식소로 활용하는 노인 복지시설을 만들었다. 의정부 경찰서에서 경승 15명을 선출하여 경찰서 안에 법당을 만들어 접대를 한 적도 있다.&lt;br /&gt;
&lt;br /&gt;
==경승제도== &lt;br /&gt;
우리나라는 경승제도가 전무한 실정이라 신도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선출된 15명의 경찰들로 경승제도를 만든 것이다. 신도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제도인 셈이다. 경승제도를 만든 후에는 법회를 시작하였다. &lt;br /&gt;
스님은 항상 검소한 생활과 진실한 모습으로 수행 실천에 앞장섰으며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만족감을 느끼고, 물질과 명리에도 초연하였다. 스님은 ‘마음으로는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형편상으로는 그게 잘 안되어 아쉽다.’고 하였다. &lt;br /&gt;
‘바다는 사람의 힘으로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심은 채울 수 없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밖에서는 구할 수 없고 다만 마음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lt;br /&gt;
혜주스님은 2004년 9월 회룡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45세로 사바의 인연을 다하였다. &lt;br /&gt;
수계제자인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스님 등이 스님의 유훈을 따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회룡사==&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Hoeryongsa   &lt;br /&gt;
&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936년(경순왕 10)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삼창하였다.&lt;br /&gt;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1384년(우왕 10)에 무학(無學)이 중창을 한 뒤이며, 여기에는 이성계(李成桂)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lt;br /&gt;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403년(태종 3) 태조가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에 의하여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왔으므로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하였다고도 한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630년(인조 8)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4년부터 비구니 도준(道準)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삼성각·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수조(水槽)와 떡돌, 반파된 석탑 등이 있다.&lt;br /&gt;
이 중 오층석탑은 이 절의 창건주로 전하는 의상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높이 3.2m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부속 암자인 석굴암은 출입구가 절 아래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된 암자로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선방(禪房)·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김구(金九)의 휘호이다. 그리고 옛날 무학이 이성계의 창업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무학굴은 현재 찾을 수가 없다.&lt;br /&gt;
* 출처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5487&lt;br /&gt;
&lt;br /&gt;
[[File:회룡사전경혜주.png|섬네일|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806]]&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32~4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68.&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7, 363&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 월간해인, &amp;quot;북한산 관통땐 지역주민 위기&amp;quot; (2003년)&lt;br /&gt;
http://haein.or.kr/bbs/board.php?bo_table=free&amp;amp;wr_id=95&amp;amp;page=50&amp;amp;sfl=&amp;amp;stx=&amp;amp;sst=wr_datetime&amp;amp;sod=desc&amp;amp;sop=and&amp;amp;page=50&lt;br /&gt;
* 미디어조계사, [법회/행사] 북한산 살리기 생명법회 (2003년)&lt;br /&gt;
http://m.jogyesa.kr/news/articleView.html?idxno=450&lt;br /&gt;
* 법보신문, 회룡사 회주 혜주 스님 (2004년)&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39&lt;br /&gt;
* 고산신문,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찰, 회룡사를 소개합니다 (2021년)&lt;br /&gt;
http://www.gosa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0&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 혜주(慧珠)스님]] || 본항목 ||  || 혜주스님(慧珠, 1925~2004)|| 慧珠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 혜주스님(慧珠,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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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도준(道準)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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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도준(道準)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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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회룡사(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7.720074 | 경도=127.027504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81</id>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81"/>
		<updated>2022-07-29T06:07: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73&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04&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대오(大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포명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월하(月下)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옥수동 미타사(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7.543644 | 경도=127.017324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80</id>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80"/>
		<updated>2022-07-29T06:06: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55&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621218 | 경도=129.032626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9</id>
		<title>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9"/>
		<updated>2022-07-29T06:04: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육년(六年)스님&lt;br /&gt;
|사진 = 349 육년(六年).jpg&lt;br /&gt;
|법명 = 육년(六年)&lt;br /&gt;
|법호 = 부용(芙蓉)&lt;br /&gt;
|속명 = 성남수&lt;br /&gt;
|본관 = 창녕&lt;br /&gt;
|출생 = 1906. 1. 26&lt;br /&gt;
|출가 = 1944 &lt;br /&gt;
|종단 = &lt;br /&gt;
|입적 = 1999. 5. 29(음력)&lt;br /&gt;
|사찰 = 부용암(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 624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육년(六年)스님은 부용암 만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우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매진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6||경북 성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부용암에서 만선(萬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7||보덕사에서 2하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51||인천 도화동 대원암 (현 부용암)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1952||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춘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1999|| 부용암 주석, 부용암 대웅전 중창 불사, 요사채 불사&lt;br /&gt;
|-&lt;br /&gt;
|1999. 5. 29(음력)||부용암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56세) &lt;br /&gt;
|}&lt;br /&gt;
[[File:349-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문중]]&lt;br /&gt;
*수행지침 : 자비실천&lt;br /&gt;
*상 훈 : 인천시장 표창장(고아 20여 명을 양육한 공로)&lt;br /&gt;
*수계제자 : 연경(학수)·본각(本覺)&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부용당(芙蓉堂) 육년(六年)스님은 1906년 1월 26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성태영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남수이다. &lt;br /&gt;
일찍이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던 중, 39세 되던 1944년에 법기문중의 제6대 만선스님을 은사로 늦은 출가를 하였다. &lt;br /&gt;
1947년 5월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2하안거를 성만한 이래로 일생 부용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람수호와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다. &lt;br /&gt;
은사스님이신 만선(萬善)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바위틈에서 백일기도를 하시고 꿈에 인천 부용암 터를 선몽 받았다. 함께 있던 부영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터를 찾아 떠나라고 권유하여 탁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곳을 찾게 되어 터를 잡고 암자를 열었는데, 그때가 1941년경이었다.&lt;br /&gt;
[[File:349-02.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만선스님과 인연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암자 이름이 대원암이었는데, 정화운동 후에 대원암 현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의 부용암(芙蓉庵)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일설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 부속암자인 대원암 현판이 정화 당시 인천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만선스님은 다시 금강산 유점사에 다녀오면서 나한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이렇게 모시고 내려온 나한님은 모두 8분이었고, 현재까지 부용암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만선스님은 1945년부터 탁발을 하며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탁 발을 다니실 때는 과일 껍질, 헌옷 등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주워 걸망 속에 넣어왔다. 그리고 과일 껍질은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말려 장아찌를 담그고 누더기 옷은 잘 기워서 동자승들에게 입히곤 하였다. 만선스님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함이 있었다. 눈병이 유행할 당시 탁발을 하다가 눈병환자를 만나 진언을 외우면 곧 깨끗하게 나았다. 몸에 기생하는 이를 머리 깎는 삭두칼에 모이게 해서 갖다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선스님은 ‘신통쟁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편으로는 성격이 몹시 괴팍한 면이 있어서 법당에 마지를 삐뚤게 올리거나 잘못 올리면 그대로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밥을 씻어서 먹고 마지를 다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서진 대소쿠리를 불에 태우다가 들킨 스님도 있었다. 그러면 도로 끄집어내어 타버린 반쪽을 삼베로 이어서 다시 사용하게 만들만큼 물건을 철저하게 아끼셨다. 은사스님의 꾸중이 무서웠던 대중들은 늘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육년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닦은 그릇을 또 닦고 하다못해 솥 밑에 묻은 그을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그을음이 많으면 땔감도 많이 들어간다고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은사스님 곁을 떠나려고 네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데, 인연이 중하였던지 떠나지 못하고 부용암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 같은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던 육년스님은 1955년에 만선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뒤를 이어서 부용암을 계속 지켜왔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육년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은 날은 어김없이 밥을 굶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이틀이든 사흘이든 먹지 않았다. 하루는 동자스님이 볼 일이 있어 마을에 다녀왔는데, 와서 보니 스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은사스님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육년스님은 평생 말이 없었고 의식염불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진 당일 새벽녘에 돌배를 주우러 뒷산에 갔는데 짐을 진 사람들이 몰려오고, 비행기에서는 삐라가 뿌려졌다. 인천 사람 전부가 수봉산으로 몰려오는 듯하였다. 배를 주워서 절에 가니 절에도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는 스님들도 많았다. 육년스님은 배를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에게 공양을 준비해 주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3.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육년스님은 전쟁 통에 불이 난 밀가루 공장에 가서 타다 남은 밀가루를 퍼 왔다. 낮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불을 때지 못하고 밤에만 군불을 지폈는데, 그때 밀가루 죽을 쑤어서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이 많아 밀가루 양이 적으면 물을 넉넉히 넣어 모두가 골고루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육년스님과 사제 동자스님은 밀가루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단무지 공장에 불이 났는데, 반찬이 없어서 고심하던 육년스님은 불탄 공장에 가서 무거운 단무지를 걸망에 잔뜩 담아 짊어 지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와서 대중들이 먹도록 하였다. 육년스님과 사제스님은 배가 고파 그 자리에서 조금 먹고 왔는데, 절에 돌아와서 은사스님께 시주의 은혜가 들어 있는 단무지를 먹었다고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전쟁 중에는 탁발을 다니면 어느 집에서든 조금이라도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부용암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육년스님은 절을 지키고 은사스님과 동자스님들은 수원으로 떠나기로 했다. 은사 만선스님은 동자스님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산과 절 이름을 외우게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같이 있지 말고 떨어져 있고, 잘 때는 손을 붙들고 자고, 낮에는 멀리 떨어져서 서로 눈빛만 보고 있으라 당부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원을 쥐어주셨다. 육년스님은 전쟁 중에도 성격이 괴팍하신 은사스님을 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드리고 피난길에서도 빨래를 한 뒤 양은대야에 진흙을 담아 그 대야를 불에 달궈서 다림질까지 해드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번은 육년스님이 쌀을 탁발하고 동자스님은 김치를 얻고자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집은 비어 있고 장독위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시체의 머리를 들어 장독뚜껑에 올려놓고 속을 헤치니 김치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비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김칫국물을 꼭 짜서 걸망에 넣고 돌아왔다. 부용암에 도착하여 김치에 소금을 뿌린 후 장독에 물을 부어 함께 넣었다. 그리고 죽과 함께 반찬으로 공양을 하였다. 육년스님은 은사스님의 고된 시집살이 때문에 화병이 생겼었다. 그래서 얼음을 좋아하였고 입적할 때까지 뜨거운 것은 물론이고 미지근한 것도 먹지 못했으며, 상좌스님들은 공양을 모두 식혀서 올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4.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워라=== &lt;br /&gt;
육년스님은 은사스님께 받은 상처를 자비로 승화시켜 전쟁고아와 부모 없는 아이들을 평생 보살피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 야학까지 보내면서 교육을 시켰으며 항상 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아이들이 절집에서 산다고 하면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신도회장에게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부모 없는 아이라고 흉보지 못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절의 신도와 수양딸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절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선생님 이후에 모든 것을 알고 스님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교사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신도가 된 일도 있었다. &lt;br /&gt;
스님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친 적이 없었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신이 키운 아이들이 시집을 갈 때면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여 보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하루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도둑의 발이 하도 커서 구둣발로 아이들을 밟으면 아이가 죽을까봐 밟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평소에 건강을 위하여 끼고 있던 구리반지까지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스님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겨울 내내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만들곤 하였다. &lt;br /&gt;
만선스님의 원력만큼 육년스님도 평생 부용암을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일생에 단 한 번 7일간의 전국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큼 어렵고 답답하게 살아서인지 당신의 상좌들은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자랑스런 인천시민상 수상===  &lt;br /&gt;
스님은 인천시 모범시민으로 뽑혀서 제6회 모범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잘 시킨 공로였다. 당신은 배운 것이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좋은데, 좁은 곳에서 너의 인생을 스스로 막으려고 하느냐.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 큰 욕심 내지마라. 괜히 집 크게 짓고 욕심내면 그것 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간다. 너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히 살아라.” 하고 늘 당부하였다. &lt;br /&gt;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본각스님은 세 살 때부터 육년스님이 기상을 꺾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본각스님은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 귀하게 키우며, 자기의 일로써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던 은사 육년스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lt;br /&gt;
 [[File:349-05.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 입적=== &lt;br /&gt;
육년스님은 1999년 음력 5월 29일 인천 부용암에서 힘들었던 사바의 일생을 접고 세수 94세, 법랍 56세로 입적에 들었다. 다비 후에 부분적으로 거둔 사리만도 47과나 되었다. 현재 부용암은 육년스님의 맏시봉인 연경스님이 1999년에 도량불사를 완비하고 스님의 뒤를 이어 3대째 도량을 지키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연경(학수)스님과 본각(本覺)스님이 있고, 손상좌 선덕·덕현·덕민·효공·덕효·효범·효욱·효장·효은·효근·효중·효석스님과 증손 상좌 효상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4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본항목 ||  || 육년스님(六年 1906~1999)|| 六年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년스님(六年, _1906生, _비구니) &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법기(法起)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부용사 부용암(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624-240)&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7.462724 | 경도=126.662659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8</id>
		<title>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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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6:03: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육년(六年)스님&lt;br /&gt;
|사진 = 349 육년(六年).jpg&lt;br /&gt;
|법명 = 육년(六年)&lt;br /&gt;
|법호 = 부용(芙蓉)&lt;br /&gt;
|속명 = 성남수&lt;br /&gt;
|본관 = 창녕&lt;br /&gt;
|출생 = 1906. 1. 26&lt;br /&gt;
|출가 = 1944 &lt;br /&gt;
|종단 = &lt;br /&gt;
|입적 = 1999. 5. 29(음력)&lt;br /&gt;
|사찰 = 부용암(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 624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육년(六年)스님은 부용암 만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우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매진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6||경북 성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부용암에서 만선(萬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7||보덕사에서 2하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51||인천 도화동 대원암 (현 부용암)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1952||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춘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1999|| 부용암 주석, 부용암 대웅전 중창 불사, 요사채 불사&lt;br /&gt;
|-&lt;br /&gt;
|1999. 5. 29(음력)||부용암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56세) &lt;br /&gt;
|}&lt;br /&gt;
[[File:349-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문중]]&lt;br /&gt;
*수행지침 : 자비실천&lt;br /&gt;
*상 훈 : 인천시장 표창장(고아 20여 명을 양육한 공로)&lt;br /&gt;
*수계제자 : 연경(학수)·본각(本覺)&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부용당(芙蓉堂) 육년(六年)스님은 1906년 1월 26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성태영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남수이다. &lt;br /&gt;
일찍이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던 중, 39세 되던 1944년에 법기문중의 제6대 만선스님을 은사로 늦은 출가를 하였다. &lt;br /&gt;
1947년 5월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2하안거를 성만한 이래로 일생 부용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람수호와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다. &lt;br /&gt;
은사스님이신 만선(萬善)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바위틈에서 백일기도를 하시고 꿈에 인천 부용암 터를 선몽 받았다. 함께 있던 부영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터를 찾아 떠나라고 권유하여 탁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곳을 찾게 되어 터를 잡고 암자를 열었는데, 그때가 1941년경이었다.&lt;br /&gt;
[[File:349-02.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만선스님과 인연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암자 이름이 대원암이었는데, 정화운동 후에 대원암 현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의 부용암(芙蓉庵)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일설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 부속암자인 대원암 현판이 정화 당시 인천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만선스님은 다시 금강산 유점사에 다녀오면서 나한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이렇게 모시고 내려온 나한님은 모두 8분이었고, 현재까지 부용암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만선스님은 1945년부터 탁발을 하며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탁 발을 다니실 때는 과일 껍질, 헌옷 등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주워 걸망 속에 넣어왔다. 그리고 과일 껍질은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말려 장아찌를 담그고 누더기 옷은 잘 기워서 동자승들에게 입히곤 하였다. 만선스님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함이 있었다. 눈병이 유행할 당시 탁발을 하다가 눈병환자를 만나 진언을 외우면 곧 깨끗하게 나았다. 몸에 기생하는 이를 머리 깎는 삭두칼에 모이게 해서 갖다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선스님은 ‘신통쟁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편으로는 성격이 몹시 괴팍한 면이 있어서 법당에 마지를 삐뚤게 올리거나 잘못 올리면 그대로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밥을 씻어서 먹고 마지를 다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서진 대소쿠리를 불에 태우다가 들킨 스님도 있었다. 그러면 도로 끄집어내어 타버린 반쪽을 삼베로 이어서 다시 사용하게 만들만큼 물건을 철저하게 아끼셨다. 은사스님의 꾸중이 무서웠던 대중들은 늘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육년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닦은 그릇을 또 닦고 하다못해 솥 밑에 묻은 그을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그을음이 많으면 땔감도 많이 들어간다고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은사스님 곁을 떠나려고 네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데, 인연이 중하였던지 떠나지 못하고 부용암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 같은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던 육년스님은 1955년에 만선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뒤를 이어서 부용암을 계속 지켜왔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육년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은 날은 어김없이 밥을 굶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이틀이든 사흘이든 먹지 않았다. 하루는 동자스님이 볼 일이 있어 마을에 다녀왔는데, 와서 보니 스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은사스님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육년스님은 평생 말이 없었고 의식염불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진 당일 새벽녘에 돌배를 주우러 뒷산에 갔는데 짐을 진 사람들이 몰려오고, 비행기에서는 삐라가 뿌려졌다. 인천 사람 전부가 수봉산으로 몰려오는 듯하였다. 배를 주워서 절에 가니 절에도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는 스님들도 많았다. 육년스님은 배를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에게 공양을 준비해 주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3.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육년스님은 전쟁 통에 불이 난 밀가루 공장에 가서 타다 남은 밀가루를 퍼 왔다. 낮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불을 때지 못하고 밤에만 군불을 지폈는데, 그때 밀가루 죽을 쑤어서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이 많아 밀가루 양이 적으면 물을 넉넉히 넣어 모두가 골고루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육년스님과 사제 동자스님은 밀가루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단무지 공장에 불이 났는데, 반찬이 없어서 고심하던 육년스님은 불탄 공장에 가서 무거운 단무지를 걸망에 잔뜩 담아 짊어 지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와서 대중들이 먹도록 하였다. 육년스님과 사제스님은 배가 고파 그 자리에서 조금 먹고 왔는데, 절에 돌아와서 은사스님께 시주의 은혜가 들어 있는 단무지를 먹었다고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전쟁 중에는 탁발을 다니면 어느 집에서든 조금이라도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부용암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육년스님은 절을 지키고 은사스님과 동자스님들은 수원으로 떠나기로 했다. 은사 만선스님은 동자스님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산과 절 이름을 외우게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같이 있지 말고 떨어져 있고, 잘 때는 손을 붙들고 자고, 낮에는 멀리 떨어져서 서로 눈빛만 보고 있으라 당부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원을 쥐어주셨다. 육년스님은 전쟁 중에도 성격이 괴팍하신 은사스님을 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드리고 피난길에서도 빨래를 한 뒤 양은대야에 진흙을 담아 그 대야를 불에 달궈서 다림질까지 해드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번은 육년스님이 쌀을 탁발하고 동자스님은 김치를 얻고자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집은 비어 있고 장독위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시체의 머리를 들어 장독뚜껑에 올려놓고 속을 헤치니 김치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비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김칫국물을 꼭 짜서 걸망에 넣고 돌아왔다. 부용암에 도착하여 김치에 소금을 뿌린 후 장독에 물을 부어 함께 넣었다. 그리고 죽과 함께 반찬으로 공양을 하였다. 육년스님은 은사스님의 고된 시집살이 때문에 화병이 생겼었다. 그래서 얼음을 좋아하였고 입적할 때까지 뜨거운 것은 물론이고 미지근한 것도 먹지 못했으며, 상좌스님들은 공양을 모두 식혀서 올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4.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워라=== &lt;br /&gt;
육년스님은 은사스님께 받은 상처를 자비로 승화시켜 전쟁고아와 부모 없는 아이들을 평생 보살피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 야학까지 보내면서 교육을 시켰으며 항상 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아이들이 절집에서 산다고 하면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신도회장에게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부모 없는 아이라고 흉보지 못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절의 신도와 수양딸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절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선생님 이후에 모든 것을 알고 스님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교사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신도가 된 일도 있었다. &lt;br /&gt;
스님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친 적이 없었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신이 키운 아이들이 시집을 갈 때면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여 보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하루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도둑의 발이 하도 커서 구둣발로 아이들을 밟으면 아이가 죽을까봐 밟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평소에 건강을 위하여 끼고 있던 구리반지까지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스님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겨울 내내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만들곤 하였다. &lt;br /&gt;
만선스님의 원력만큼 육년스님도 평생 부용암을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일생에 단 한 번 7일간의 전국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큼 어렵고 답답하게 살아서인지 당신의 상좌들은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자랑스런 인천시민상 수상===  &lt;br /&gt;
스님은 인천시 모범시민으로 뽑혀서 제6회 모범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잘 시킨 공로였다. 당신은 배운 것이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좋은데, 좁은 곳에서 너의 인생을 스스로 막으려고 하느냐.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 큰 욕심 내지마라. 괜히 집 크게 짓고 욕심내면 그것 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간다. 너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히 살아라.” 하고 늘 당부하였다. &lt;br /&gt;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본각스님은 세 살 때부터 육년스님이 기상을 꺾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본각스님은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 귀하게 키우며, 자기의 일로써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던 은사 육년스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lt;br /&gt;
 [[File:349-05.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 입적=== &lt;br /&gt;
육년스님은 1999년 음력 5월 29일 인천 부용암에서 힘들었던 사바의 일생을 접고 세수 94세, 법랍 56세로 입적에 들었다. 다비 후에 부분적으로 거둔 사리만도 47과나 되었다. 현재 부용암은 육년스님의 맏시봉인 연경스님이 1999년에 도량불사를 완비하고 스님의 뒤를 이어 3대째 도량을 지키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연경(학수)스님과 본각(本覺)스님이 있고, 손상좌 선덕·덕현·덕민·효공·덕효·효범·효욱·효장·효은·효근·효중·효석스님과 증손 상좌 효상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4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본항목 ||  || 육년스님(六年 1906~1999)|| 六年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년스님(六年, _1906生, _비구니) &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법기(法起)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신광사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 3동 193)&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69291| 경도=126.940231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7</id>
		<title>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7"/>
		<updated>2022-07-29T06:02: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현(聖賢)스님&lt;br /&gt;
|사진 = 301 성현(聖賢).jpg&lt;br /&gt;
|법명 = 성현(聖賢)&lt;br /&gt;
|법호 = 대주(大珠) &lt;br /&gt;
|속명 = 김귀분(金貴分) &lt;br /&gt;
|본관 = 광산&lt;br /&gt;
|출생 = 1927. 7. 25 (비구니)&lt;br /&gt;
|출가 = 1944.&lt;br /&gt;
|입적 = &lt;br /&gt;
|사찰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1동)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현(聖賢)스님은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강원 설립에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7|| 경북 상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금천선원에서 성진(性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6||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0||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4~1963|| 동학사 강원 졸업(1회)&lt;br /&gt;
|-&lt;br /&gt;
|1963|| 동학사 총무&lt;br /&gt;
|-&lt;br /&gt;
|1965|| 금천선원 총무&lt;br /&gt;
|-&lt;br /&gt;
|1966~1984|| 금천선원 주지(가람 수호, 포교, 도제양성)&lt;br /&gt;
|-&lt;br /&gt;
|1984|| 주지 사임&lt;br /&gt;
|-&lt;br /&gt;
|1984~1994|| 금천선원에서 10년간 두문불출 10시간 이상 정진&lt;br /&gt;
|-&lt;br /&gt;
|1994~1996||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6~2002|| 경주 금련선원 안거&lt;br /&gt;
|-&lt;br /&gt;
|2004||현재 금천선원 주석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행지침 : 지행합일(知行合一) &lt;br /&gt;
*상 훈 : 삼현문중상 &lt;br /&gt;
*수계제자 : 현주(現珠)·현근(現根)&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가===   &lt;br /&gt;
대주당(大珠堂) 성현(聖賢)스님은 1927년 7월 25일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월리에서 아버지 김학천과 어머니 김음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이름은 김귀분이다. &lt;br /&gt;
무종교 집안에서 순탄하게 자란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상주 남장사에서 수옥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되었다. &lt;br /&gt;
“마음만 견고하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노니는 사문이 될 수 있다.” &lt;br /&gt;
이 한마디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일깨웠다. &lt;br /&gt;
이후 성현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옷가지 하나 없이 올올이 출가를 결행하여 1944년 17세에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1946년 스님은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범어사 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lt;br /&gt;
금천선원 경내 (사진)&lt;br /&gt;
===비구니강원 설립의 중요성 인식=== &lt;br /&gt;
스님은 덕운당(德雲堂) 성진스님 문하에 들어가서 하루하루 탑을 쌓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중에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금빛을 머금은 경책을 받는 꿈을 꾸었고, 경론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침 강원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신 은사스님이 지원해주셔서 동학사 경봉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때가 1954년 스님의 나이 28세였다. &lt;br /&gt;
비구·대처승 간의 대립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에 비구니 강원의 설립을 시급하게 여겨 뜻 맞는 도반스님 몇 분과 함께 학인 자체 내에서 주지를 내어 강원을 세우고 오전 강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울력을 하며 도량을 일구었다. &lt;br /&gt;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5년간 입승 소임을 보았는데, 저녁 9시에 방선을 한 후 대중이 자는 사이 대웅전에서 새벽 3시까지 3년간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스님의 돈독한 신심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t;br /&gt;
시월 보름 결제 후에는 상반들이 열흘씩 탁발을 하여 아랫반의 부족함을 메워주었고, 청담 큰 스님을 모시고 일주일씩 특강을 듣기도 했다. &lt;br /&gt;
이렇게 성현스님은 28세에 동학사에 들어가 37세 되던 1963년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lt;br /&gt;
같은 해에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았으며, 1965년 금천선원 총무로 부임하여 40세 되던 해인 1966년 금천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 도제양성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보시 인욕행 실천=== &lt;br /&gt;
처음 발심할 때 참선정진에 뜻을 두었기에 지금도 하루 종일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새벽 참선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만공스님 어록을 탐독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병고로 3년간 누워 지낼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시봉하고 보살펴서 타의 모범이 되었고, 은사와 상좌 간 인연의 지중함을 몸소 실천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보여주었다. &lt;br /&gt;
도제들이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년까지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 않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상좌 등 대중들에게 한 번도 성을 낸 적이 없다. 또 가람에 들어오는 인연들을 부처님처럼 보살피는 보시 인욕행(忍辱行)을 실천해왔는데, 그 공로로 삼현문중상을 수상하였다. &lt;br /&gt;
68세 되던 1994년 경남 내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하고, 다음해에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 하였다. &lt;br /&gt;
성현스님은 『유마경』 보살행 품의 ‘큰사랑(大慈)을 여의지 아니하고 어여삐 여김을 버리지 아니하며, 일체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고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게으르지 말라. 네 가지로 법수하는 법에 따라 행하기를 생각하며, 옳은 법을 옹호하되 몸과 마음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선한 근본을 심되 싫은 마음이 없으며, 방편으로 회향하는데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말라. 법문을 말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부지런히 공양할 것 이니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lt;br /&gt;
1996년에서 2002년까지 경북 경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한 스님은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10시간 이상 정진에 전념했다. &lt;br /&gt;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01&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본항목 ||  || 성현스님(聖賢, 1927~1987)|| 聖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현스님(聖賢, _192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금천선원]]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699-1)&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24783 | 경도=129.084352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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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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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6:00: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현(聖賢)스님&lt;br /&gt;
|사진 = 301 성현(聖賢).jpg&lt;br /&gt;
|법명 = 성현(聖賢)&lt;br /&gt;
|법호 = 대주(大珠) &lt;br /&gt;
|속명 = 김귀분(金貴分)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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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 7. 25 (비구니)&lt;br /&gt;
|출가 = 1944.&lt;br /&gt;
|입적 = &lt;br /&gt;
|사찰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1동)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현(聖賢)스님은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강원 설립에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7|| 경북 상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금천선원에서 성진(性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6||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0||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4~1963|| 동학사 강원 졸업(1회)&lt;br /&gt;
|-&lt;br /&gt;
|1963|| 동학사 총무&lt;br /&gt;
|-&lt;br /&gt;
|1965|| 금천선원 총무&lt;br /&gt;
|-&lt;br /&gt;
|1966~1984|| 금천선원 주지(가람 수호, 포교, 도제양성)&lt;br /&gt;
|-&lt;br /&gt;
|1984|| 주지 사임&lt;br /&gt;
|-&lt;br /&gt;
|1984~1994|| 금천선원에서 10년간 두문불출 10시간 이상 정진&lt;br /&gt;
|-&lt;br /&gt;
|1994~1996||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6~2002|| 경주 금련선원 안거&lt;br /&gt;
|-&lt;br /&gt;
|2004||현재 금천선원 주석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행지침 : 지행합일(知行合一) &lt;br /&gt;
*상 훈 : 삼현문중상 &lt;br /&gt;
*수계제자 : 현주(現珠)·현근(現根)&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가===   &lt;br /&gt;
대주당(大珠堂) 성현(聖賢)스님은 1927년 7월 25일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월리에서 아버지 김학천과 어머니 김음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이름은 김귀분이다. &lt;br /&gt;
무종교 집안에서 순탄하게 자란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상주 남장사에서 수옥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되었다. &lt;br /&gt;
“마음만 견고하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노니는 사문이 될 수 있다.” &lt;br /&gt;
이 한마디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일깨웠다. &lt;br /&gt;
이후 성현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옷가지 하나 없이 올올이 출가를 결행하여 1944년 17세에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1946년 스님은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범어사 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lt;br /&gt;
금천선원 경내 (사진)&lt;br /&gt;
===비구니강원 설립의 중요성 인식=== &lt;br /&gt;
스님은 덕운당(德雲堂) 성진스님 문하에 들어가서 하루하루 탑을 쌓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중에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금빛을 머금은 경책을 받는 꿈을 꾸었고, 경론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침 강원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신 은사스님이 지원해주셔서 동학사 경봉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때가 1954년 스님의 나이 28세였다. &lt;br /&gt;
비구·대처승 간의 대립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에 비구니 강원의 설립을 시급하게 여겨 뜻 맞는 도반스님 몇 분과 함께 학인 자체 내에서 주지를 내어 강원을 세우고 오전 강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울력을 하며 도량을 일구었다. &lt;br /&gt;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5년간 입승 소임을 보았는데, 저녁 9시에 방선을 한 후 대중이 자는 사이 대웅전에서 새벽 3시까지 3년간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스님의 돈독한 신심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t;br /&gt;
시월 보름 결제 후에는 상반들이 열흘씩 탁발을 하여 아랫반의 부족함을 메워주었고, 청담 큰 스님을 모시고 일주일씩 특강을 듣기도 했다. &lt;br /&gt;
이렇게 성현스님은 28세에 동학사에 들어가 37세 되던 1963년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lt;br /&gt;
같은 해에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았으며, 1965년 금천선원 총무로 부임하여 40세 되던 해인 1966년 금천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 도제양성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보시 인욕행 실천=== &lt;br /&gt;
처음 발심할 때 참선정진에 뜻을 두었기에 지금도 하루 종일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새벽 참선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만공스님 어록을 탐독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병고로 3년간 누워 지낼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시봉하고 보살펴서 타의 모범이 되었고, 은사와 상좌 간 인연의 지중함을 몸소 실천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보여주었다. &lt;br /&gt;
도제들이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년까지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 않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상좌 등 대중들에게 한 번도 성을 낸 적이 없다. 또 가람에 들어오는 인연들을 부처님처럼 보살피는 보시 인욕행(忍辱行)을 실천해왔는데, 그 공로로 삼현문중상을 수상하였다. &lt;br /&gt;
68세 되던 1994년 경남 내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하고, 다음해에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 하였다. &lt;br /&gt;
성현스님은 『유마경』 보살행 품의 ‘큰사랑(大慈)을 여의지 아니하고 어여삐 여김을 버리지 아니하며, 일체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고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게으르지 말라. 네 가지로 법수하는 법에 따라 행하기를 생각하며, 옳은 법을 옹호하되 몸과 마음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선한 근본을 심되 싫은 마음이 없으며, 방편으로 회향하는데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말라. 법문을 말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부지런히 공양할 것 이니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lt;br /&gt;
1996년에서 2002년까지 경북 경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한 스님은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10시간 이상 정진에 전념했다. &lt;br /&gt;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01&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본항목 ||  || 성현스님(聖賢, 1927~1987)|| 聖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현스님(聖賢, _192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금천선원]]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신광사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 3동 193)&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169291| 경도=126.940231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4</id>
		<title>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74"/>
		<updated>2022-07-29T05:59: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전(戒田)&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계전(戒田)&lt;br /&gt;
|법호 = 해월(海月)&lt;br /&gt;
|속명 = 박금계(朴錦溪)&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889. 7. 13 &lt;br /&gt;
|출가=1944.&lt;br /&gt;
|입적=1987.&lt;br /&gt;
|사찰 =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7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계전(戒田)스님은 전남 신광사에서 출가하여 운주사에서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로 유명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5%&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9|| 전남 광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신광사에서 성화(性化)스님을 은사로 출가,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입적(세수 99세, 법랍 44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계제자 : 법진(法眞)·도의(道義)&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해월당(海月堂) 계전(戒田)스님은 1889년 7월 13일 광주시 풍향동에서 아버지 박덕일(朴德泆)과 어머니 최서외(崔西外)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계이다. &lt;br /&gt;
스님은 고암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을 모시며 공부를 하였는데 ‘늦게라도 출가해서 가사장삼 수하는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에 더 가깝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4년 신광사에서 윤성화(尹性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범어사 대성암에서 몇 해의 안거를 성만하고, 광주 신광사 선원에서 8년간 안거를 하면서 마음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전강 큰스님을 모시고 하였다. &lt;br /&gt;
신광사는 광주 북구 두암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말사이다. 1933년 광주 시내에 사는 최동열의 어머니 김청제월 보살님의 시주금으로 당시 대본산 선암사 광주시 서방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1944년 10월 20일에 현재의 주지 비구니 안혜운 스님이 인수, 보호 중 법당이 협소하여 1964년 4월에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다. 1974년 8월에 요사채를 헐어 다시 요사채와 강당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 &lt;br /&gt;
&lt;br /&gt;
신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줄기에 자리하여 광주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선남선녀 여러 불자들이 국태민안과 무운장구를 빌며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계전스님은 전남 운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였는데, 화순의 운주사로 들어간 때는 정확치 않다. 어려운 시절에 너릿재 고개를 넘어서 광주에서 화순까지 쌀을 탁발하여 여러 가마니를 지고 올라오기도 하였다. 너릿재 고개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와 광주시 동구 선교동 접도지 역으로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더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운주사에서 스님은 혼자서도 입·방선을 지켜 수행하고 걸식을 하면서 인법당에서 매일 절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에 가서 염불을 하는데 같은 시간에 당신 처소에서도 죽비소리가 났다고 한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수 청소나 빨래를 하였으며 평소 참선을 하면 곧 선열의 삼매에 들었다. 한 번은 삼매 중에 극락세계를 다녀와서 스님의 법명인 ‘조계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숙명통을 얻어서 전생을 보았으며, 입적할 때 ‘다음 생에 광주에서 태어나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lt;br /&gt;
계전스님은 상좌 법진스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여 때리기도 하는 등 모질게 대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입적하기 전 어느 봄날 지나가는 법진스님에게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어떻게 알았겠소. 여보시오, 내가 이제 욕을 안 할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본 후였다. 전생에 스님은 동서지간이 모두 넷이었는데 당신이 법진스님의 막내 동서였다. 그런데 법진스님이 계전스님에게 몹시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고, 그 인과로 금생에 법진스님을 만나 모진 말과 행동을 자주 하게 된 것이었다. 계전스님은 말년에 치매에 걸렸는데도 참선과 염불만은 잊지 않고 하였다. 치매증세가 있는 중에도 침식을 잊고 큰소리로 일주일 정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고, 정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3일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스님의 마지막 당부는 염불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수 99세, 법랍 44세로 입적하기 직전까지 염주를 돌렸는데, 숨이 끊어지자 염주가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늦게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한 계행과 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후학들에게 큰 지표가 되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법진(法眞)·도의(道義)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운주사 &lt;br /&gt;
*승적자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본항목 ||  || 계전스님(戒田, 1889~1987)|| 戒田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전스님(戒田, _1889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윤성화(尹性化)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신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운주사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1)&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4.925547 | 경도=126.880111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9</id>
		<title>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9"/>
		<updated>2022-07-29T05:55: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전(戒田)&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계전(戒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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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 7. 13 &lt;br /&gt;
|출가=194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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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계전(戒田)스님은 전남 신광사에서 출가하여 운주사에서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로 유명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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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9|| 전남 광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신광사에서 성화(性化)스님을 은사로 출가,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입적(세수 99세, 법랍 44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계제자 : 법진(法眞)·도의(道義)&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해월당(海月堂) 계전(戒田)스님은 1889년 7월 13일 광주시 풍향동에서 아버지 박덕일(朴德泆)과 어머니 최서외(崔西外)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계이다. &lt;br /&gt;
스님은 고암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을 모시며 공부를 하였는데 ‘늦게라도 출가해서 가사장삼 수하는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에 더 가깝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4년 신광사에서 윤성화(尹性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범어사 대성암에서 몇 해의 안거를 성만하고, 광주 신광사 선원에서 8년간 안거를 하면서 마음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전강 큰스님을 모시고 하였다. &lt;br /&gt;
신광사는 광주 북구 두암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말사이다. 1933년 광주 시내에 사는 최동열의 어머니 김청제월 보살님의 시주금으로 당시 대본산 선암사 광주시 서방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1944년 10월 20일에 현재의 주지 비구니 안혜운 스님이 인수, 보호 중 법당이 협소하여 1964년 4월에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다. 1974년 8월에 요사채를 헐어 다시 요사채와 강당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 &lt;br /&gt;
&lt;br /&gt;
신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줄기에 자리하여 광주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선남선녀 여러 불자들이 국태민안과 무운장구를 빌며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계전스님은 전남 운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였는데, 화순의 운주사로 들어간 때는 정확치 않다. 어려운 시절에 너릿재 고개를 넘어서 광주에서 화순까지 쌀을 탁발하여 여러 가마니를 지고 올라오기도 하였다. 너릿재 고개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와 광주시 동구 선교동 접도지 역으로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더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운주사에서 스님은 혼자서도 입·방선을 지켜 수행하고 걸식을 하면서 인법당에서 매일 절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에 가서 염불을 하는데 같은 시간에 당신 처소에서도 죽비소리가 났다고 한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수 청소나 빨래를 하였으며 평소 참선을 하면 곧 선열의 삼매에 들었다. 한 번은 삼매 중에 극락세계를 다녀와서 스님의 법명인 ‘조계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숙명통을 얻어서 전생을 보았으며, 입적할 때 ‘다음 생에 광주에서 태어나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lt;br /&gt;
계전스님은 상좌 법진스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여 때리기도 하는 등 모질게 대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입적하기 전 어느 봄날 지나가는 법진스님에게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어떻게 알았겠소. 여보시오, 내가 이제 욕을 안 할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본 후였다. 전생에 스님은 동서지간이 모두 넷이었는데 당신이 법진스님의 막내 동서였다. 그런데 법진스님이 계전스님에게 몹시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고, 그 인과로 금생에 법진스님을 만나 모진 말과 행동을 자주 하게 된 것이었다. 계전스님은 말년에 치매에 걸렸는데도 참선과 염불만은 잊지 않고 하였다. 치매증세가 있는 중에도 침식을 잊고 큰소리로 일주일 정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고, 정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3일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스님의 마지막 당부는 염불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수 99세, 법랍 44세로 입적하기 직전까지 염주를 돌렸는데, 숨이 끊어지자 염주가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늦게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한 계행과 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후학들에게 큰 지표가 되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법진(法眞)·도의(道義)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운주사 &lt;br /&gt;
*승적자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본항목 ||  || 계전스님(戒田, 1889~1987)|| 戒田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전스님(戒田, _1889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윤성화(尹性化)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신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7</id>
		<title>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7"/>
		<updated>2022-07-29T05:54: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출가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전(戒田)&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계전(戒田)&lt;br /&gt;
|법호 = 해월(海月)&lt;br /&gt;
|속명 = 박금계(朴錦溪)&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889. 7. 13 &lt;br /&gt;
|출가=1944.&lt;br /&gt;
|입적=1987.&lt;br /&gt;
|사찰 =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7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계전(戒田)스님은 전남 신광사에서 출가하여 운주사에서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로 유명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5%&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9|| 전남 광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신광사에서 성화(性化)스님을 은사로 출가,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입적(세수 99세, 법랍 44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계제자 : 법진(法眞)·도의(道義)&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해월당(海月堂) 계전(戒田)스님은 1889년 7월 13일 광주시 풍향동에서 아버지 박덕일(朴德泆)과 어머니 최서외(崔西外)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계이다. &lt;br /&gt;
스님은 고암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을 모시며 공부를 하였는데 ‘늦게라도 출가해서 가사장삼 수하는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에 더 가깝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4년 신광사에서 윤성화(尹性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범어사 대성암에서 몇 해의 안거를 성만하고, 광주 신광사 선원에서 8년간 안거를 하면서 마음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전강 큰스님을 모시고 하였다. &lt;br /&gt;
신광사는 광주 북구 두암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말사이다. 1933년 광주 시내에 사는 최동열의 어머니 김청제월 보살님의 시주금으로 당시 대본산 선암사 광주시 서방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1944년 10월 20일에 현재의 주지 비구니 안혜운 스님이 인수, 보호 중 법당이 협소하여 1964년 4월에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다. 1974년 8월에 요사채를 헐어 다시 요사채와 강당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lt;br /&gt;
&lt;br /&gt;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 &lt;br /&gt;
&lt;br /&gt;
신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줄기에 자리하여 광주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선남선녀 여러 불자들이 국태민안과 무운장구를 빌며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계전스님은 전남 운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였는데, 화순의 운주사로 들어간 때는 정확치 않다. 어려운 시절에 너릿재 고개를 넘어서 광주에서 화순까지 쌀을 탁발하여 여러 가마니를 지고 올라오기도 하였다. 너릿재 고개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와 광주시 동구 선교동 접도지 역으로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더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운주사에서 스님은 혼자서도 입·방선을 지켜 수행하고 걸식을 하면서 인법당에서 매일 절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에 가서 염불을 하는데 같은 시간에 당신 처소에서도 죽비소리가 났다고 한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수 청소나 빨래를 하였으며 평소 참선을 하면 곧 선열의 삼매에 들었다. 한 번은 삼매 중에 극락세계를 다녀와서 스님의 법명인 ‘조계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숙명통을 얻어서 전생을 보았으며, 입적할 때 ‘다음 생에 광주에서 태어나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lt;br /&gt;
계전스님은 상좌 법진스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여 때리기도 하는 등 모질게 대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입적하기 전 어느 봄날 지나가는 법진스님에게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어떻게 알았겠소. 여보시오, 내가 이제 욕을 안 할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본 후였다. 전생에 스님은 동서지간이 모두 넷이었는데 당신이 법진스님의 막내 동서였다. 그런데 법진스님이 계전스님에게 몹시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고, 그 인과로 금생에 법진스님을 만나 모진 말과 행동을 자주 하게 된 것이었다. 계전스님은 말년에 치매에 걸렸는데도 참선과 염불만은 잊지 않고 하였다. 치매증세가 있는 중에도 침식을 잊고 큰소리로 일주일 정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고, 정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3일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스님의 마지막 당부는 염불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수 99세, 법랍 44세로 입적하기 직전까지 염주를 돌렸는데, 숨이 끊어지자 염주가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늦게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한 계행과 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후학들에게 큰 지표가 되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법진(法眞)·도의(道義)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운주사&lt;br /&gt;
*승적자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본항목 ||  || 계전스님(戒田, 1889~1987)|| 戒田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전스님(戒田, _1889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윤성화(尹性化)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신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6</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6"/>
		<updated>2022-07-29T04:50: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1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보광사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267-1)&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205674 | 경도=129.013907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5</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5"/>
		<updated>2022-07-29T04:49: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1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보광사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26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205674| 경도=129.013907 | 줌=17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4</id>
		<title>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4"/>
		<updated>2022-07-29T04:48: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만성(萬性)스님&lt;br /&gt;
|사진= 106 만성(萬性).jpg&lt;br /&gt;
|법명= 만성(萬性) &lt;br /&gt;
|속명=김운자(金雲子)  &lt;br /&gt;
|본관=경주(慶州)&lt;br /&gt;
|출생=1897. 11. 16 &lt;br /&gt;
|출가= 1936&lt;br /&gt;
|입적=1975. 5. 9&lt;br /&gt;
|종단=&lt;br /&gt;
|사찰=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용맹정진 수행에 전력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97|| 충남 논산 출생 &lt;br /&gt;
|-&lt;br /&gt;
|1933|| 수덕사 만공스님 친견 후 입산&lt;br /&gt;
|- &lt;br /&gt;
|1936||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1941||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lt;br /&gt;
|-&lt;br /&gt;
|1946~1956|| 운문사 청신암, 금강산 보덕굴, 쌍계사 국사암 등에서 운수행각&lt;br /&gt;
|-&lt;br /&gt;
|1956|| 범어사 대성암 입승, 가람수호 및 운수납자 제접 &lt;br /&gt;
|-&lt;br /&gt;
|1975. 5. 9||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만공스님이 계신 전월사에서 70여 일간 땅에 허리를 대지 않고 용맹정진: ‘상근기는 7일, 중근기는 21일, 하근기는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 놓고 참선에 전념하던 중 21일째에 정신적 희열감을 느끼고 거듭 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 &lt;br /&gt;
*생활신조 : 항상 출가자는 계를 지키고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여 훌륭한 승려가 되어야 한다. &lt;br /&gt;
*취 미 : 독서 &lt;br /&gt;
*수계제자 : 현행(賢行)·삼현(三顯)&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1897년 11월 16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경주 김씨 가문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운자이다. &lt;br /&gt;
불심이 돈독하였던 스님은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나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숭산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여 선문(禪門)에 드는 법연(法緣)을 맺게 되어 화두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lt;br /&gt;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일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로 일구월심 피나는 정진수행을 하여 5년 만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lt;br /&gt;
===생사를 초월한 선승의 좌표=== &lt;br /&gt;
40세 되던 해 의선(義善)스님(만공스님의 모친)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수계를 하고,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만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lt;br /&gt;
스님은 만공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수행 정진하던 덕숭산을 떠나 운수행각으로 남방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큰 스님을 친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조실이신 동산스님을 친견하고 여생을 동산스님의 법하에서 정진 수행할 것을 결심한 스님은 이로부터 행각을 접고 금정산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를 제접하였다. 당시 동산스님께서도 밝은 혜안을 갖춘 비구니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스님은 납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살피면서 일체 모든 것을 무언의 실천으로 대신하였고, 입·방선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수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안의 공기가 &lt;br /&gt;
&lt;br /&gt;
[[File:106-01.jpg||섬네일|1956년부터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납자를 제접하던 대성암 전경.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훈훈하면 혼침에 빠질까 염려하여 항상 싸늘하게 하여서 수좌들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도록 지도했다. &lt;br /&gt;
평소 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검소하고 깔끔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실천수행 하였고, ‘옹대작대’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성품이 직설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게 자신의 행동을 잘 갈무리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성암에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lt;br /&gt;
평생을 이렇듯 선수행 속에서 생로병사의 중생 업을 녹이며 조용히 선정삼매에서 지내던 스님은 세연이 다함을 직감하고, 하루는 문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lt;br /&gt;
첫째는 당신이 입적하면 수장(水葬)(시신을 바다 속에 던져 어족(魚族)들에게 보시하는 것)하고, 둘째는 모양과 형식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말며 당신으로 인한 일체의 번거로운 상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lt;br /&gt;
===입적===&lt;br /&gt;
만성스님은 1975년(불기 2519년) 5월 9일 세수 79세, 법랍 40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문도들은 큰스님을 잃은 슬픔에 수장을 하지 못하고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범어사(梵魚寺) 산중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문도들은 사리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지 않음으로써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lt;br /&gt;
스님은 항상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고, 평소 ‘묘문법화(妙門法話)’를 경책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106-02.jpg||섬네일|생전 만공스님 친필 노트 사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세세생생에 참선밖에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 &lt;br /&gt;
참선은 절대로 혼자 못하는 것이라 &lt;br /&gt;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 &lt;br /&gt;
선지식을 믿는 만치 공부가 되는 것이다. &lt;br /&gt;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lt;br /&gt;
생사를 자재하여 일체 문제의 걸림이 없고 일체 지식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lt;br /&gt;
터럭 하나 어른거리지 못할 만치 온전한 정신을 모아 &lt;br /&gt;
정진하여야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다. &lt;br /&gt;
장맛을 보아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참선할 수 있다. &lt;br /&gt;
인생이란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이니 &lt;br /&gt;
집을 짓고 옷을 입으며 부모와 형제 의리를 지키며 &lt;br /&gt;
학문을 배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lt;br /&gt;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아 얻는데 인생의 참다운 귀함이 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만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행(賢行)·삼현(三顯)스님과 손상좌 일법(一法)·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대성암==&lt;br /&gt;
&lt;br /&gt;
대성암(大聖庵)은 범어사의 산내 암자로 기암괴석이 중첩하고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는 해발 801m의 금정산 기슭에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lt;br /&gt;
1680년 준영(俊英)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취규(就奎)스님이 3창, 경의(敬儀)스님이 4창하였다. &lt;br /&gt;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대성암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스님이 선객 지도와 외호에 힘썼지만 전면 보수는 하지 못한 채 겨우 비만 새지 않게 손을 보는 정도였다. &lt;br /&gt;
대성암 선원은 암주 찬훈스님이 1909년 10월 1일 오성월(吳惺月) 스님의 인가 아래 개원하였다. 당시 범어사 산내 선원이 4곳이나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껴 또 하나의 선원을 개설한 것이다. 찬훈스님은 방답(房畓) 3두락을 선량(禪粮)으로 확보해 수좌들을 모아 그해 16명의 대중스님과 동안거 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선원 명칭을 대성선사(大聖禪寺)라고 하였고,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만성스님 입적 후 1977년 현재의 선원장 비구니 자행(自涬)스님이 퇴락한 건물 4동 중 2동을 다시 짓고 정진하였고, 1987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도량을 넓히고 새롭게 전각을 지어 1991년 10월 불사를 회향하였다. &lt;br /&gt;
현재 대성암은 큰방 각해선림(覺海禪林)을 주축으로 지장전, 요사채가 ‘ㅁ’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범어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본항목 ||  || 만성스님(萬性, 1897~1975)|| 慧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성스님(萬性, _189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의선(義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동산스님]] || ~의 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범어사 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35)&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282252 | 경도=129.066999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3</id>
		<title>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3"/>
		<updated>2022-07-29T04:46: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쾌민(快敏)스님&lt;br /&gt;
|사진= 499 쾌민(快敏).jpg&lt;br /&gt;
|법명=쾌민(快敏)&lt;br /&gt;
|속명=김쾌민&lt;br /&gt;
|본관=해풍&lt;br /&gt;
|출생=1916.10.28&lt;br /&gt;
|출가= 1932&lt;br /&gt;
|입적=199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대성사(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성사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3%&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16||개성 출생&lt;br /&gt;
|- &lt;br /&gt;
|1932|| 백양사에서 법현(法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lt;br /&gt;
|1933||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1938|| 백양사 강원 사교 수료 &lt;br /&gt;
|-&lt;br /&gt;
|1954||정혜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대성사 10년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7|| 용암사 3년 결사 성만 &lt;br /&gt;
|-&lt;br /&gt;
|1973|| 대성사 주지 취임 &lt;br /&gt;
|-&lt;br /&gt;
|1978|| 세등선원 3년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81|| 견성암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92|| 대성사에서 입적(세수 77세, 법랍 61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백양사 &lt;br /&gt;
*수계제자 :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1916년 10월 28일 지금은 이북 땅인 개성에서 아버지 김석종과 어머니 홍태오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이며, 이름은 김쾌민이다. &lt;br /&gt;
스님은 1932년 6월 15일 17세에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거주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2월 15일 18세에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쾌민스님은 23세 되던 1938년 1월 15일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1954년 2월 15일 전주 정혜사에서 만암 대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lt;br /&gt;
49세 되던 1964년 1월 15일 전남 나주 대성사에서 수선안거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성만하였다. 1967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용암사 천운선림에서 3년 결사하였으며, 1973년 세수 58세에 대성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성사는 1948년 세수 59세의 은사스님께서 작은 오두막에 의지하고 계시던 사찰이다. 은사 법현스님은 백양사 만암 노스님을 계사로 도준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그 뒤 법현스님께서는 1950년 남평리 18번지에 법당을 새로 짓고 인근의 많은 신도들에게 포교를 하셨다. 1954년 문하에 쾌민스님과 법선스님을 두셨으며, 함께 도량을 수호하다 1968년 세수 81세로 입적하셨다.당시 상좌이던 쾌민스님은 상좌 다섯 명을 교육시키면서 중창 불사를 하였다. 스님은 1978년 대전 세등선원 송담 큰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거를 하였고, 1981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쾌민스님은 1984년 주지직을 상좌 현정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하다가 1992년 6월 19일 오전 8시 입적에 드니,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였다. &lt;br /&gt;
스님이 평생 수행 정진하였던 대성사는 그 뒤 1987년 현 주지인 현정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고, 2년 뒤에는 단층 법당을 지었으며, 1993년부터 법당 중창 불사를 시작해 2층 법당을 증축하였다.&lt;br /&gt;
대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도량으로서 쾌민스님의 후학들이 스님의 유지를 이어 불법수호(佛法守護)에 앞장서고 있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성사&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9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본항목 || || 쾌민스님(快敏, 1916~1992)|| 快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민스님(快敏,_191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법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대성사]]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대성사(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047324 | 경도=126.844067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1</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1"/>
		<updated>2022-07-29T04:44: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해인사 약수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치인리10)&lt;br /&gt;
{{ 구글지도 | 위도= 35.795485 | 경도=128.09833 | 줌=17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0</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60"/>
		<updated>2022-07-29T04:43:3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해인사 약수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치인리10)&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795485| 경도=128.098330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56</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56"/>
		<updated>2022-07-29T04:40:4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해인사 약수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795485| 경도=128.098330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51</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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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4:38:0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7.579860| 경도=127.016593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6</id>
		<title>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6"/>
		<updated>2022-07-29T04:33: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만성(萬性)스님&lt;br /&gt;
|사진= 106 만성(萬性).jpg&lt;br /&gt;
|법명= 만성(萬性) &lt;br /&gt;
|속명=김운자(金雲子)  &lt;br /&gt;
|본관=경주(慶州)&lt;br /&gt;
|출생=1897. 11. 16 &lt;br /&gt;
|출가= 1936&lt;br /&gt;
|입적=1975. 5. 9&lt;br /&gt;
|종단=&lt;br /&gt;
|사찰=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용맹정진 수행에 전력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97|| 충남 논산 출생 &lt;br /&gt;
|-&lt;br /&gt;
|1933|| 수덕사 만공스님 친견 후 입산&lt;br /&gt;
|- &lt;br /&gt;
|1936||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1941||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lt;br /&gt;
|-&lt;br /&gt;
|1946~1956|| 운문사 청신암, 금강산 보덕굴, 쌍계사 국사암 등에서 운수행각&lt;br /&gt;
|-&lt;br /&gt;
|1956|| 범어사 대성암 입승, 가람수호 및 운수납자 제접 &lt;br /&gt;
|-&lt;br /&gt;
|1975. 5. 9||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만공스님이 계신 전월사에서 70여 일간 땅에 허리를 대지 않고 용맹정진: ‘상근기는 7일, 중근기는 21일, 하근기는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 놓고 참선에 전념하던 중 21일째에 정신적 희열감을 느끼고 거듭 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 &lt;br /&gt;
*생활신조 : 항상 출가자는 계를 지키고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여 훌륭한 승려가 되어야 한다. &lt;br /&gt;
*취 미 : 독서 &lt;br /&gt;
*수계제자 : 현행(賢行)·삼현(三顯)&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1897년 11월 16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경주 김씨 가문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운자이다. &lt;br /&gt;
불심이 돈독하였던 스님은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나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숭산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여 선문(禪門)에 드는 법연(法緣)을 맺게 되어 화두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lt;br /&gt;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일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로 일구월심 피나는 정진수행을 하여 5년 만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lt;br /&gt;
===생사를 초월한 선승의 좌표=== &lt;br /&gt;
40세 되던 해 의선(義善)스님(만공스님의 모친)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수계를 하고,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만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lt;br /&gt;
스님은 만공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수행 정진하던 덕숭산을 떠나 운수행각으로 남방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큰 스님을 친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조실이신 동산스님을 친견하고 여생을 동산스님의 법하에서 정진 수행할 것을 결심한 스님은 이로부터 행각을 접고 금정산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를 제접하였다. 당시 동산스님께서도 밝은 혜안을 갖춘 비구니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스님은 납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살피면서 일체 모든 것을 무언의 실천으로 대신하였고, 입·방선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수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안의 공기가 &lt;br /&gt;
&lt;br /&gt;
[[File:106-01.jpg||섬네일|1956년부터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납자를 제접하던 대성암 전경.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훈훈하면 혼침에 빠질까 염려하여 항상 싸늘하게 하여서 수좌들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도록 지도했다. &lt;br /&gt;
평소 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검소하고 깔끔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실천수행 하였고, ‘옹대작대’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성품이 직설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게 자신의 행동을 잘 갈무리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성암에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lt;br /&gt;
평생을 이렇듯 선수행 속에서 생로병사의 중생 업을 녹이며 조용히 선정삼매에서 지내던 스님은 세연이 다함을 직감하고, 하루는 문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lt;br /&gt;
첫째는 당신이 입적하면 수장(水葬)(시신을 바다 속에 던져 어족(魚族)들에게 보시하는 것)하고, 둘째는 모양과 형식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말며 당신으로 인한 일체의 번거로운 상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lt;br /&gt;
===입적===&lt;br /&gt;
만성스님은 1975년(불기 2519년) 5월 9일 세수 79세, 법랍 40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문도들은 큰스님을 잃은 슬픔에 수장을 하지 못하고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범어사(梵魚寺) 산중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문도들은 사리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지 않음으로써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lt;br /&gt;
스님은 항상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고, 평소 ‘묘문법화(妙門法話)’를 경책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106-02.jpg||섬네일|생전 만공스님 친필 노트 사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세세생생에 참선밖에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 &lt;br /&gt;
참선은 절대로 혼자 못하는 것이라 &lt;br /&gt;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 &lt;br /&gt;
선지식을 믿는 만치 공부가 되는 것이다. &lt;br /&gt;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lt;br /&gt;
생사를 자재하여 일체 문제의 걸림이 없고 일체 지식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lt;br /&gt;
터럭 하나 어른거리지 못할 만치 온전한 정신을 모아 &lt;br /&gt;
정진하여야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다. &lt;br /&gt;
장맛을 보아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참선할 수 있다. &lt;br /&gt;
인생이란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이니 &lt;br /&gt;
집을 짓고 옷을 입으며 부모와 형제 의리를 지키며 &lt;br /&gt;
학문을 배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lt;br /&gt;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아 얻는데 인생의 참다운 귀함이 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만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행(賢行)·삼현(三顯)스님과 손상좌 일법(一法)·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대성암==&lt;br /&gt;
&lt;br /&gt;
대성암(大聖庵)은 범어사의 산내 암자로 기암괴석이 중첩하고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는 해발 801m의 금정산 기슭에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lt;br /&gt;
1680년 준영(俊英)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취규(就奎)스님이 3창, 경의(敬儀)스님이 4창하였다. &lt;br /&gt;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대성암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스님이 선객 지도와 외호에 힘썼지만 전면 보수는 하지 못한 채 겨우 비만 새지 않게 손을 보는 정도였다. &lt;br /&gt;
대성암 선원은 암주 찬훈스님이 1909년 10월 1일 오성월(吳惺月) 스님의 인가 아래 개원하였다. 당시 범어사 산내 선원이 4곳이나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껴 또 하나의 선원을 개설한 것이다. 찬훈스님은 방답(房畓) 3두락을 선량(禪粮)으로 확보해 수좌들을 모아 그해 16명의 대중스님과 동안거 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선원 명칭을 대성선사(大聖禪寺)라고 하였고,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만성스님 입적 후 1977년 현재의 선원장 비구니 자행(自涬)스님이 퇴락한 건물 4동 중 2동을 다시 짓고 정진하였고, 1987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도량을 넓히고 새롭게 전각을 지어 1991년 10월 불사를 회향하였다. &lt;br /&gt;
현재 대성암은 큰방 각해선림(覺海禪林)을 주축으로 지장전, 요사채가 ‘ㅁ’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범어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본항목 ||  || 만성스님(萬性, 1897~1975)|| 慧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성스님(萬性, _189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의선(義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동산스님]] || ~의 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범어사 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35)&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282252| 경도=129.066999|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5</id>
		<title>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5"/>
		<updated>2022-07-29T04:31: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만성(萬性)스님&lt;br /&gt;
|사진= 106 만성(萬性).jpg&lt;br /&gt;
|법명= 만성(萬性) &lt;br /&gt;
|속명=김운자(金雲子)  &lt;br /&gt;
|본관=경주(慶州)&lt;br /&gt;
|출생=1897. 11. 16 &lt;br /&gt;
|출가= 1936&lt;br /&gt;
|입적=1975. 5. 9&lt;br /&gt;
|종단=&lt;br /&gt;
|사찰=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용맹정진 수행에 전력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97|| 충남 논산 출생 &lt;br /&gt;
|-&lt;br /&gt;
|1933|| 수덕사 만공스님 친견 후 입산&lt;br /&gt;
|- &lt;br /&gt;
|1936||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1941||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lt;br /&gt;
|-&lt;br /&gt;
|1946~1956|| 운문사 청신암, 금강산 보덕굴, 쌍계사 국사암 등에서 운수행각&lt;br /&gt;
|-&lt;br /&gt;
|1956|| 범어사 대성암 입승, 가람수호 및 운수납자 제접 &lt;br /&gt;
|-&lt;br /&gt;
|1975. 5. 9||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만공스님이 계신 전월사에서 70여 일간 땅에 허리를 대지 않고 용맹정진: ‘상근기는 7일, 중근기는 21일, 하근기는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 놓고 참선에 전념하던 중 21일째에 정신적 희열감을 느끼고 거듭 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 &lt;br /&gt;
*생활신조 : 항상 출가자는 계를 지키고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여 훌륭한 승려가 되어야 한다. &lt;br /&gt;
*취 미 : 독서 &lt;br /&gt;
*수계제자 : 현행(賢行)·삼현(三顯)&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1897년 11월 16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경주 김씨 가문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운자이다. &lt;br /&gt;
불심이 돈독하였던 스님은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나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숭산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여 선문(禪門)에 드는 법연(法緣)을 맺게 되어 화두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lt;br /&gt;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일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로 일구월심 피나는 정진수행을 하여 5년 만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lt;br /&gt;
===생사를 초월한 선승의 좌표=== &lt;br /&gt;
40세 되던 해 의선(義善)스님(만공스님의 모친)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수계를 하고,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만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lt;br /&gt;
스님은 만공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수행 정진하던 덕숭산을 떠나 운수행각으로 남방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큰 스님을 친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조실이신 동산스님을 친견하고 여생을 동산스님의 법하에서 정진 수행할 것을 결심한 스님은 이로부터 행각을 접고 금정산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를 제접하였다. 당시 동산스님께서도 밝은 혜안을 갖춘 비구니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스님은 납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살피면서 일체 모든 것을 무언의 실천으로 대신하였고, 입·방선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수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안의 공기가 &lt;br /&gt;
&lt;br /&gt;
[[File:106-01.jpg||섬네일|1956년부터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납자를 제접하던 대성암 전경.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훈훈하면 혼침에 빠질까 염려하여 항상 싸늘하게 하여서 수좌들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도록 지도했다. &lt;br /&gt;
평소 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검소하고 깔끔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실천수행 하였고, ‘옹대작대’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성품이 직설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게 자신의 행동을 잘 갈무리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성암에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lt;br /&gt;
평생을 이렇듯 선수행 속에서 생로병사의 중생 업을 녹이며 조용히 선정삼매에서 지내던 스님은 세연이 다함을 직감하고, 하루는 문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lt;br /&gt;
첫째는 당신이 입적하면 수장(水葬)(시신을 바다 속에 던져 어족(魚族)들에게 보시하는 것)하고, 둘째는 모양과 형식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말며 당신으로 인한 일체의 번거로운 상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lt;br /&gt;
===입적===&lt;br /&gt;
만성스님은 1975년(불기 2519년) 5월 9일 세수 79세, 법랍 40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문도들은 큰스님을 잃은 슬픔에 수장을 하지 못하고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범어사(梵魚寺) 산중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문도들은 사리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지 않음으로써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lt;br /&gt;
스님은 항상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고, 평소 ‘묘문법화(妙門法話)’를 경책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106-02.jpg||섬네일|생전 만공스님 친필 노트 사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세세생생에 참선밖에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 &lt;br /&gt;
참선은 절대로 혼자 못하는 것이라 &lt;br /&gt;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 &lt;br /&gt;
선지식을 믿는 만치 공부가 되는 것이다. &lt;br /&gt;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lt;br /&gt;
생사를 자재하여 일체 문제의 걸림이 없고 일체 지식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lt;br /&gt;
터럭 하나 어른거리지 못할 만치 온전한 정신을 모아 &lt;br /&gt;
정진하여야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다. &lt;br /&gt;
장맛을 보아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참선할 수 있다. &lt;br /&gt;
인생이란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이니 &lt;br /&gt;
집을 짓고 옷을 입으며 부모와 형제 의리를 지키며 &lt;br /&gt;
학문을 배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lt;br /&gt;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아 얻는데 인생의 참다운 귀함이 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만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행(賢行)·삼현(三顯)스님과 손상좌 일법(一法)·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대성암==&lt;br /&gt;
&lt;br /&gt;
대성암(大聖庵)은 범어사의 산내 암자로 기암괴석이 중첩하고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는 해발 801m의 금정산 기슭에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lt;br /&gt;
1680년 준영(俊英)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취규(就奎)스님이 3창, 경의(敬儀)스님이 4창하였다. &lt;br /&gt;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대성암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스님이 선객 지도와 외호에 힘썼지만 전면 보수는 하지 못한 채 겨우 비만 새지 않게 손을 보는 정도였다. &lt;br /&gt;
대성암 선원은 암주 찬훈스님이 1909년 10월 1일 오성월(吳惺月) 스님의 인가 아래 개원하였다. 당시 범어사 산내 선원이 4곳이나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껴 또 하나의 선원을 개설한 것이다. 찬훈스님은 방답(房畓) 3두락을 선량(禪粮)으로 확보해 수좌들을 모아 그해 16명의 대중스님과 동안거 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선원 명칭을 대성선사(大聖禪寺)라고 하였고,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만성스님 입적 후 1977년 현재의 선원장 비구니 자행(自涬)스님이 퇴락한 건물 4동 중 2동을 다시 짓고 정진하였고, 1987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도량을 넓히고 새롭게 전각을 지어 1991년 10월 불사를 회향하였다. &lt;br /&gt;
현재 대성암은 큰방 각해선림(覺海禪林)을 주축으로 지장전, 요사채가 ‘ㅁ’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범어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본항목 ||  || 만성스님(萬性, 1897~1975)|| 慧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성스님(萬性, _189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의선(義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동산스님]] || ~의 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7.579860| 경도=127.016593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4</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4"/>
		<updated>2022-07-29T04:31: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1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보광사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26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205674| 경도=129.013907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3</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3"/>
		<updated>2022-07-29T04:29: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1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7.579860| 경도=127.016593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1</id>
		<title>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41"/>
		<updated>2022-07-29T04:27: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쾌민(快敏)스님&lt;br /&gt;
|사진= 499 쾌민(快敏).jpg&lt;br /&gt;
|법명=쾌민(快敏)&lt;br /&gt;
|속명=김쾌민&lt;br /&gt;
|본관=해풍&lt;br /&gt;
|출생=1916.10.28&lt;br /&gt;
|출가= 1932&lt;br /&gt;
|입적=199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대성사(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성사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3%&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16||개성 출생&lt;br /&gt;
|- &lt;br /&gt;
|1932|| 백양사에서 법현(法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lt;br /&gt;
|1933||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1938|| 백양사 강원 사교 수료 &lt;br /&gt;
|-&lt;br /&gt;
|1954||정혜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대성사 10년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7|| 용암사 3년 결사 성만 &lt;br /&gt;
|-&lt;br /&gt;
|1973|| 대성사 주지 취임 &lt;br /&gt;
|-&lt;br /&gt;
|1978|| 세등선원 3년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81|| 견성암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92|| 대성사에서 입적(세수 77세, 법랍 61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백양사 &lt;br /&gt;
*수계제자 :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1916년 10월 28일 지금은 이북 땅인 개성에서 아버지 김석종과 어머니 홍태오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이며, 이름은 김쾌민이다. &lt;br /&gt;
스님은 1932년 6월 15일 17세에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거주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2월 15일 18세에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쾌민스님은 23세 되던 1938년 1월 15일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1954년 2월 15일 전주 정혜사에서 만암 대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lt;br /&gt;
49세 되던 1964년 1월 15일 전남 나주 대성사에서 수선안거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성만하였다. 1967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용암사 천운선림에서 3년 결사하였으며, 1973년 세수 58세에 대성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성사는 1948년 세수 59세의 은사스님께서 작은 오두막에 의지하고 계시던 사찰이다. 은사 법현스님은 백양사 만암 노스님을 계사로 도준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그 뒤 법현스님께서는 1950년 남평리 18번지에 법당을 새로 짓고 인근의 많은 신도들에게 포교를 하셨다. 1954년 문하에 쾌민스님과 법선스님을 두셨으며, 함께 도량을 수호하다 1968년 세수 81세로 입적하셨다.당시 상좌이던 쾌민스님은 상좌 다섯 명을 교육시키면서 중창 불사를 하였다. 스님은 1978년 대전 세등선원 송담 큰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거를 하였고, 1981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쾌민스님은 1984년 주지직을 상좌 현정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하다가 1992년 6월 19일 오전 8시 입적에 드니,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였다. &lt;br /&gt;
스님이 평생 수행 정진하였던 대성사는 그 뒤 1987년 현 주지인 현정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고, 2년 뒤에는 단층 법당을 지었으며, 1993년부터 법당 중창 불사를 시작해 2층 법당을 증축하였다.&lt;br /&gt;
대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도량으로서 쾌민스님의 후학들이 스님의 유지를 이어 불법수호(佛法守護)에 앞장서고 있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성사&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9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본항목 || || 쾌민스님(快敏, 1916~1992)|| 快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민스님(快敏,_191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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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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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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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대성사]]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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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지도==&lt;br /&gt;
* 대성사(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047324| 경도=126.844067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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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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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4:25: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쾌민(快敏)스님&lt;br /&gt;
|사진= 499 쾌민(快敏).jpg&lt;br /&gt;
|법명=쾌민(快敏)&lt;br /&gt;
|속명=김쾌민&lt;br /&gt;
|본관=해풍&lt;br /&gt;
|출생=1916.10.28&lt;br /&gt;
|출가= 1932&lt;br /&gt;
|입적=199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대성사(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성사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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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16||개성 출생&lt;br /&gt;
|- &lt;br /&gt;
|1932|| 백양사에서 법현(法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lt;br /&gt;
|1933||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1938|| 백양사 강원 사교 수료 &lt;br /&gt;
|-&lt;br /&gt;
|1954||정혜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대성사 10년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7|| 용암사 3년 결사 성만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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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세등선원 3년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81|| 견성암 안거 성만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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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대성사에서 입적(세수 77세, 법랍 61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백양사 &lt;br /&gt;
*수계제자 :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1916년 10월 28일 지금은 이북 땅인 개성에서 아버지 김석종과 어머니 홍태오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이며, 이름은 김쾌민이다. &lt;br /&gt;
스님은 1932년 6월 15일 17세에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거주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2월 15일 18세에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쾌민스님은 23세 되던 1938년 1월 15일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1954년 2월 15일 전주 정혜사에서 만암 대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lt;br /&gt;
49세 되던 1964년 1월 15일 전남 나주 대성사에서 수선안거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성만하였다. 1967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용암사 천운선림에서 3년 결사하였으며, 1973년 세수 58세에 대성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성사는 1948년 세수 59세의 은사스님께서 작은 오두막에 의지하고 계시던 사찰이다. 은사 법현스님은 백양사 만암 노스님을 계사로 도준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그 뒤 법현스님께서는 1950년 남평리 18번지에 법당을 새로 짓고 인근의 많은 신도들에게 포교를 하셨다. 1954년 문하에 쾌민스님과 법선스님을 두셨으며, 함께 도량을 수호하다 1968년 세수 81세로 입적하셨다.당시 상좌이던 쾌민스님은 상좌 다섯 명을 교육시키면서 중창 불사를 하였다. 스님은 1978년 대전 세등선원 송담 큰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거를 하였고, 1981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쾌민스님은 1984년 주지직을 상좌 현정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하다가 1992년 6월 19일 오전 8시 입적에 드니,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였다. &lt;br /&gt;
스님이 평생 수행 정진하였던 대성사는 그 뒤 1987년 현 주지인 현정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고, 2년 뒤에는 단층 법당을 지었으며, 1993년부터 법당 중창 불사를 시작해 2층 법당을 증축하였다.&lt;br /&gt;
대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도량으로서 쾌민스님의 후학들이 스님의 유지를 이어 불법수호(佛法守護)에 앞장서고 있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성사&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9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본항목 || || 쾌민스님(快敏, 1916~1992)|| 快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민스님(快敏,_191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법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대성사]]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청룡사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1)&lt;br /&gt;
{{구글지도 | 위도=37.579860| 경도=127.016593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35</id>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35"/>
		<updated>2022-07-29T04:24: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지도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55&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br /&gt;
* 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구글지도 | 위도=35.621218| 경도=129.032626 | 줌=70.88 m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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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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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29T03:50:1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55&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13</id>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13"/>
		<updated>2022-07-29T03:49: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73&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04&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대오(大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포명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월하(月下)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10</id>
		<title>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10"/>
		<updated>2022-07-29T03:47: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육년(六年)스님&lt;br /&gt;
|사진 = 349 육년(六年).jpg&lt;br /&gt;
|법명 = 육년(六年)&lt;br /&gt;
|법호 = 부용(芙蓉)&lt;br /&gt;
|속명 = 성남수&lt;br /&gt;
|본관 = 창녕&lt;br /&gt;
|출생 = 1906. 1. 26&lt;br /&gt;
|출가 = 1944 &lt;br /&gt;
|종단 = &lt;br /&gt;
|입적 = 1999. 5. 29(음력)&lt;br /&gt;
|사찰 = 부용암(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 624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육년(六年)스님은 부용암 만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우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매진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6||경북 성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부용암에서 만선(萬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7||보덕사에서 2하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51||인천 도화동 대원암 (현 부용암)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1952||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춘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1999|| 부용암 주석, 부용암 대웅전 중창 불사, 요사채 불사&lt;br /&gt;
|-&lt;br /&gt;
|1999. 5. 29(음력)||부용암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56세) &lt;br /&gt;
|}&lt;br /&gt;
[[File:349-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문중]]&lt;br /&gt;
*수행지침 : 자비실천&lt;br /&gt;
*상 훈 : 인천시장 표창장(고아 20여 명을 양육한 공로)&lt;br /&gt;
*수계제자 : 연경(학수)·본각(本覺)&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부용당(芙蓉堂) 육년(六年)스님은 1906년 1월 26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성태영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남수이다. &lt;br /&gt;
일찍이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던 중, 39세 되던 1944년에 법기문중의 제6대 만선스님을 은사로 늦은 출가를 하였다. &lt;br /&gt;
1947년 5월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2하안거를 성만한 이래로 일생 부용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람수호와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다. &lt;br /&gt;
은사스님이신 만선(萬善)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바위틈에서 백일기도를 하시고 꿈에 인천 부용암 터를 선몽 받았다. 함께 있던 부영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터를 찾아 떠나라고 권유하여 탁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곳을 찾게 되어 터를 잡고 암자를 열었는데, 그때가 1941년경이었다.&lt;br /&gt;
[[File:349-02.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만선스님과 인연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암자 이름이 대원암이었는데, 정화운동 후에 대원암 현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의 부용암(芙蓉庵)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일설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 부속암자인 대원암 현판이 정화 당시 인천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만선스님은 다시 금강산 유점사에 다녀오면서 나한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이렇게 모시고 내려온 나한님은 모두 8분이었고, 현재까지 부용암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만선스님은 1945년부터 탁발을 하며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탁 발을 다니실 때는 과일 껍질, 헌옷 등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주워 걸망 속에 넣어왔다. 그리고 과일 껍질은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말려 장아찌를 담그고 누더기 옷은 잘 기워서 동자승들에게 입히곤 하였다. 만선스님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함이 있었다. 눈병이 유행할 당시 탁발을 하다가 눈병환자를 만나 진언을 외우면 곧 깨끗하게 나았다. 몸에 기생하는 이를 머리 깎는 삭두칼에 모이게 해서 갖다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선스님은 ‘신통쟁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편으로는 성격이 몹시 괴팍한 면이 있어서 법당에 마지를 삐뚤게 올리거나 잘못 올리면 그대로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밥을 씻어서 먹고 마지를 다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서진 대소쿠리를 불에 태우다가 들킨 스님도 있었다. 그러면 도로 끄집어내어 타버린 반쪽을 삼베로 이어서 다시 사용하게 만들만큼 물건을 철저하게 아끼셨다. 은사스님의 꾸중이 무서웠던 대중들은 늘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육년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닦은 그릇을 또 닦고 하다못해 솥 밑에 묻은 그을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그을음이 많으면 땔감도 많이 들어간다고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은사스님 곁을 떠나려고 네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데, 인연이 중하였던지 떠나지 못하고 부용암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 같은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던 육년스님은 1955년에 만선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뒤를 이어서 부용암을 계속 지켜왔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육년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은 날은 어김없이 밥을 굶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이틀이든 사흘이든 먹지 않았다. 하루는 동자스님이 볼 일이 있어 마을에 다녀왔는데, 와서 보니 스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은사스님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육년스님은 평생 말이 없었고 의식염불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진 당일 새벽녘에 돌배를 주우러 뒷산에 갔는데 짐을 진 사람들이 몰려오고, 비행기에서는 삐라가 뿌려졌다. 인천 사람 전부가 수봉산으로 몰려오는 듯하였다. 배를 주워서 절에 가니 절에도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는 스님들도 많았다. 육년스님은 배를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에게 공양을 준비해 주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3.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육년스님은 전쟁 통에 불이 난 밀가루 공장에 가서 타다 남은 밀가루를 퍼 왔다. 낮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불을 때지 못하고 밤에만 군불을 지폈는데, 그때 밀가루 죽을 쑤어서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이 많아 밀가루 양이 적으면 물을 넉넉히 넣어 모두가 골고루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육년스님과 사제 동자스님은 밀가루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단무지 공장에 불이 났는데, 반찬이 없어서 고심하던 육년스님은 불탄 공장에 가서 무거운 단무지를 걸망에 잔뜩 담아 짊어 지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와서 대중들이 먹도록 하였다. 육년스님과 사제스님은 배가 고파 그 자리에서 조금 먹고 왔는데, 절에 돌아와서 은사스님께 시주의 은혜가 들어 있는 단무지를 먹었다고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전쟁 중에는 탁발을 다니면 어느 집에서든 조금이라도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부용암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육년스님은 절을 지키고 은사스님과 동자스님들은 수원으로 떠나기로 했다. 은사 만선스님은 동자스님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산과 절 이름을 외우게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같이 있지 말고 떨어져 있고, 잘 때는 손을 붙들고 자고, 낮에는 멀리 떨어져서 서로 눈빛만 보고 있으라 당부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원을 쥐어주셨다. 육년스님은 전쟁 중에도 성격이 괴팍하신 은사스님을 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드리고 피난길에서도 빨래를 한 뒤 양은대야에 진흙을 담아 그 대야를 불에 달궈서 다림질까지 해드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번은 육년스님이 쌀을 탁발하고 동자스님은 김치를 얻고자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집은 비어 있고 장독위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시체의 머리를 들어 장독뚜껑에 올려놓고 속을 헤치니 김치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비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김칫국물을 꼭 짜서 걸망에 넣고 돌아왔다. 부용암에 도착하여 김치에 소금을 뿌린 후 장독에 물을 부어 함께 넣었다. 그리고 죽과 함께 반찬으로 공양을 하였다. 육년스님은 은사스님의 고된 시집살이 때문에 화병이 생겼었다. 그래서 얼음을 좋아하였고 입적할 때까지 뜨거운 것은 물론이고 미지근한 것도 먹지 못했으며, 상좌스님들은 공양을 모두 식혀서 올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4.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워라=== &lt;br /&gt;
육년스님은 은사스님께 받은 상처를 자비로 승화시켜 전쟁고아와 부모 없는 아이들을 평생 보살피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 야학까지 보내면서 교육을 시켰으며 항상 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아이들이 절집에서 산다고 하면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신도회장에게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부모 없는 아이라고 흉보지 못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절의 신도와 수양딸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절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선생님 이후에 모든 것을 알고 스님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교사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신도가 된 일도 있었다. &lt;br /&gt;
스님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친 적이 없었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신이 키운 아이들이 시집을 갈 때면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여 보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하루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도둑의 발이 하도 커서 구둣발로 아이들을 밟으면 아이가 죽을까봐 밟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평소에 건강을 위하여 끼고 있던 구리반지까지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스님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겨울 내내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만들곤 하였다. &lt;br /&gt;
만선스님의 원력만큼 육년스님도 평생 부용암을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일생에 단 한 번 7일간의 전국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큼 어렵고 답답하게 살아서인지 당신의 상좌들은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자랑스런 인천시민상 수상===  &lt;br /&gt;
스님은 인천시 모범시민으로 뽑혀서 제6회 모범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잘 시킨 공로였다. 당신은 배운 것이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좋은데, 좁은 곳에서 너의 인생을 스스로 막으려고 하느냐.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 큰 욕심 내지마라. 괜히 집 크게 짓고 욕심내면 그것 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간다. 너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히 살아라.” 하고 늘 당부하였다. &lt;br /&gt;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본각스님은 세 살 때부터 육년스님이 기상을 꺾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본각스님은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 귀하게 키우며, 자기의 일로써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던 은사 육년스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lt;br /&gt;
 [[File:349-05.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 입적=== &lt;br /&gt;
육년스님은 1999년 음력 5월 29일 인천 부용암에서 힘들었던 사바의 일생을 접고 세수 94세, 법랍 56세로 입적에 들었다. 다비 후에 부분적으로 거둔 사리만도 47과나 되었다. 현재 부용암은 육년스님의 맏시봉인 연경스님이 1999년에 도량불사를 완비하고 스님의 뒤를 이어 3대째 도량을 지키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연경(학수)스님과 본각(本覺)스님이 있고, 손상좌 선덕·덕현·덕민·효공·덕효·효범·효욱·효장·효은·효근·효중·효석스님과 증손 상좌 효상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4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본항목 ||  || 육년스님(六年 1906~1999)|| 六年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년스님(六年, _1906生, _비구니) &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법기(法起)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8</id>
		<title>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8"/>
		<updated>2022-07-29T03:46: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현(聖賢)스님&lt;br /&gt;
|사진 = 301 성현(聖賢).jpg&lt;br /&gt;
|법명 = 성현(聖賢)&lt;br /&gt;
|법호 = 대주(大珠) &lt;br /&gt;
|속명 = 김귀분(金貴分) &lt;br /&gt;
|본관 = 광산&lt;br /&gt;
|출생 = 1927. 7. 25 (비구니)&lt;br /&gt;
|출가 = 1944.&lt;br /&gt;
|입적 = &lt;br /&gt;
|사찰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1동)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현(聖賢)스님은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강원 설립에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7|| 경북 상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금천선원에서 성진(性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6||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0||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4~1963|| 동학사 강원 졸업(1회)&lt;br /&gt;
|-&lt;br /&gt;
|1963|| 동학사 총무&lt;br /&gt;
|-&lt;br /&gt;
|1965|| 금천선원 총무&lt;br /&gt;
|-&lt;br /&gt;
|1966~1984|| 금천선원 주지(가람 수호, 포교, 도제양성)&lt;br /&gt;
|-&lt;br /&gt;
|1984|| 주지 사임&lt;br /&gt;
|-&lt;br /&gt;
|1984~1994|| 금천선원에서 10년간 두문불출 10시간 이상 정진&lt;br /&gt;
|-&lt;br /&gt;
|1994~1996||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6~2002|| 경주 금련선원 안거&lt;br /&gt;
|-&lt;br /&gt;
|2004||현재 금천선원 주석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행지침 : 지행합일(知行合一) &lt;br /&gt;
*상 훈 : 삼현문중상 &lt;br /&gt;
*수계제자 : 현주(現珠)·현근(現根)&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가===   &lt;br /&gt;
대주당(大珠堂) 성현(聖賢)스님은 1927년 7월 25일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월리에서 아버지 김학천과 어머니 김음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이름은 김귀분이다. &lt;br /&gt;
무종교 집안에서 순탄하게 자란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상주 남장사에서 수옥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되었다. &lt;br /&gt;
“마음만 견고하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노니는 사문이 될 수 있다.” &lt;br /&gt;
이 한마디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일깨웠다. &lt;br /&gt;
이후 성현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옷가지 하나 없이 올올이 출가를 결행하여 1944년 17세에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1946년 스님은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범어사 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lt;br /&gt;
금천선원 경내 (사진)&lt;br /&gt;
===비구니강원 설립의 중요성 인식=== &lt;br /&gt;
스님은 덕운당(德雲堂) 성진스님 문하에 들어가서 하루하루 탑을 쌓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중에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금빛을 머금은 경책을 받는 꿈을 꾸었고, 경론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침 강원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신 은사스님이 지원해주셔서 동학사 경봉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때가 1954년 스님의 나이 28세였다. &lt;br /&gt;
비구·대처승 간의 대립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에 비구니 강원의 설립을 시급하게 여겨 뜻 맞는 도반스님 몇 분과 함께 학인 자체 내에서 주지를 내어 강원을 세우고 오전 강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울력을 하며 도량을 일구었다. &lt;br /&gt;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5년간 입승 소임을 보았는데, 저녁 9시에 방선을 한 후 대중이 자는 사이 대웅전에서 새벽 3시까지 3년간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스님의 돈독한 신심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t;br /&gt;
시월 보름 결제 후에는 상반들이 열흘씩 탁발을 하여 아랫반의 부족함을 메워주었고, 청담 큰 스님을 모시고 일주일씩 특강을 듣기도 했다. &lt;br /&gt;
이렇게 성현스님은 28세에 동학사에 들어가 37세 되던 1963년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lt;br /&gt;
같은 해에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았으며, 1965년 금천선원 총무로 부임하여 40세 되던 해인 1966년 금천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 도제양성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보시 인욕행 실천=== &lt;br /&gt;
처음 발심할 때 참선정진에 뜻을 두었기에 지금도 하루 종일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새벽 참선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만공스님 어록을 탐독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병고로 3년간 누워 지낼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시봉하고 보살펴서 타의 모범이 되었고, 은사와 상좌 간 인연의 지중함을 몸소 실천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보여주었다. &lt;br /&gt;
도제들이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년까지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 않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상좌 등 대중들에게 한 번도 성을 낸 적이 없다. 또 가람에 들어오는 인연들을 부처님처럼 보살피는 보시 인욕행(忍辱行)을 실천해왔는데, 그 공로로 삼현문중상을 수상하였다. &lt;br /&gt;
68세 되던 1994년 경남 내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하고, 다음해에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 하였다. &lt;br /&gt;
성현스님은 『유마경』 보살행 품의 ‘큰사랑(大慈)을 여의지 아니하고 어여삐 여김을 버리지 아니하며, 일체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고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게으르지 말라. 네 가지로 법수하는 법에 따라 행하기를 생각하며, 옳은 법을 옹호하되 몸과 마음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선한 근본을 심되 싫은 마음이 없으며, 방편으로 회향하는데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말라. 법문을 말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부지런히 공양할 것 이니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lt;br /&gt;
1996년에서 2002년까지 경북 경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한 스님은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10시간 이상 정진에 전념했다. &lt;br /&gt;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01&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본항목 ||  || 성현스님(聖賢, 1927~1987)|| 聖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현스님(聖賢, _192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금천선원]]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6</id>
		<title>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6"/>
		<updated>2022-07-29T03:45: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전(戒田)&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계전(戒田)&lt;br /&gt;
|법호 = 해월(海月)&lt;br /&gt;
|속명 = 박금계(朴錦溪)&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889. 7. 13 &lt;br /&gt;
|출가=1944.&lt;br /&gt;
|입적=1987.&lt;br /&gt;
|사찰 =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7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계전(戒田)스님은 전남 신광사에서 출가하여 운주사에서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로 유명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5%&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9|| 전남 광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신광사에서 성화(性化)스님을 은사로 출가,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입적(세수 99세, 법랍 44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계제자 : 법진(法眞)·도의(道義)&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해월당(海月堂) 계전(戒田)스님은 1889년 7월 13일 광주시 풍향동에서 아버지 박덕일(朴德泆)과 어머니 최서외(崔西外)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계이다. &lt;br /&gt;
스님은 고암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을 모시며 공부를 하였는데 ‘늦게라도 출가해서 가사장삼 수하는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에 더 가깝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4년 신광사에서 윤성화(尹性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범어사 대성암에서 몇 해의 안거를 성만하고, 광주 신광사 선원에서 8년간 안거를 하면서 마음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전강 큰스님을 모시고 하였다. &lt;br /&gt;
신광사는 광주 북구 두암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말사이다. 1933년 광주 시내에 사는 최동열의 어머니 김청제월 보살님의 시주금으로 당시 대본산 선암사 광주시 서방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1944년 10월 20일에 현재의 주지 비구니 안혜운 스님이 인수, 보호 중 법당이 협소하여 1964년 4월에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다. 1974년 8월에 요사채를 헐어 다시 요사채와 강당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운주사 전경 (사진)&lt;br /&gt;
&lt;br /&gt;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 &lt;br /&gt;
&lt;br /&gt;
신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줄기에 자리하여 광주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선남선녀 여러 불자들이 국태민안과 무운장구를 빌며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계전스님은 전남 운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였는데, 화순의 운주사로 들어간 때는 정확치 않다. 어려운 시절에 너릿재 고개를 넘어서 광주에서 화순까지 쌀을 탁발하여 여러 가마니를 지고 올라오기도 하였다. 너릿재 고개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와 광주시 동구 선교동 접도지 역으로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더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운주사에서 스님은 혼자서도 입·방선을 지켜 수행하고 걸식을 하면서 인법당에서 매일 절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에 가서 염불을 하는데 같은 시간에 당신 처소에서도 죽비소리가 났다고 한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수 청소나 빨래를 하였으며 평소 참선을 하면 곧 선열의 삼매에 들었다. 한 번은 삼매 중에 극락세계를 다녀와서 스님의 법명인 ‘조계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숙명통을 얻어서 전생을 보았으며, 입적할 때 ‘다음 생에 광주에서 태어나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lt;br /&gt;
계전스님은 상좌 법진스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여 때리기도 하는 등 모질게 대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입적하기 전 어느 봄날 지나가는 법진스님에게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어떻게 알았겠소. 여보시오, 내가 이제 욕을 안 할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본 후였다. 전생에 스님은 동서지간이 모두 넷이었는데 당신이 법진스님의 막내 동서였다. 그런데 법진스님이 계전스님에게 몹시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고, 그 인과로 금생에 법진스님을 만나 모진 말과 행동을 자주 하게 된 것이었다. 계전스님은 말년에 치매에 걸렸는데도 참선과 염불만은 잊지 않고 하였다. 치매증세가 있는 중에도 침식을 잊고 큰소리로 일주일 정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고, 정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3일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스님의 마지막 당부는 염불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수 99세, 법랍 44세로 입적하기 직전까지 염주를 돌렸는데, 숨이 끊어지자 염주가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늦게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한 계행과 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후학들에게 큰 지표가 되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법진(法眞)·도의(道義)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운주사&lt;br /&gt;
*승적자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4&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3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본항목 ||  || 계전스님(戒田, 1889~1987)|| 戒田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전스님(戒田, _1889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윤성화(尹性化)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신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1</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901"/>
		<updated>2022-07-29T03:43: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문중]]&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oem&amp;gt;&lt;br /&gt;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oem&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1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98</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98"/>
		<updated>2022-07-29T03:41:5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95</id>
		<title>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95"/>
		<updated>2022-07-29T03:40:3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만성(萬性)스님&lt;br /&gt;
|사진= 106 만성(萬性).jpg&lt;br /&gt;
|법명= 만성(萬性) &lt;br /&gt;
|속명=김운자(金雲子)  &lt;br /&gt;
|본관=경주(慶州)&lt;br /&gt;
|출생=1897. 11. 16 &lt;br /&gt;
|출가= 1936&lt;br /&gt;
|입적=1975. 5. 9&lt;br /&gt;
|종단=&lt;br /&gt;
|사찰=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용맹정진 수행에 전력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97|| 충남 논산 출생 &lt;br /&gt;
|-&lt;br /&gt;
|1933|| 수덕사 만공스님 친견 후 입산&lt;br /&gt;
|- &lt;br /&gt;
|1936||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1941||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lt;br /&gt;
|-&lt;br /&gt;
|1946~1956|| 운문사 청신암, 금강산 보덕굴, 쌍계사 국사암 등에서 운수행각&lt;br /&gt;
|-&lt;br /&gt;
|1956|| 범어사 대성암 입승, 가람수호 및 운수납자 제접 &lt;br /&gt;
|-&lt;br /&gt;
|1975. 5. 9||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만공스님이 계신 전월사에서 70여 일간 땅에 허리를 대지 않고 용맹정진: ‘상근기는 7일, 중근기는 21일, 하근기는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 놓고 참선에 전념하던 중 21일째에 정신적 희열감을 느끼고 거듭 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 &lt;br /&gt;
*생활신조 : 항상 출가자는 계를 지키고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여 훌륭한 승려가 되어야 한다. &lt;br /&gt;
*취 미 : 독서 &lt;br /&gt;
*수계제자 : 현행(賢行)·삼현(三顯)&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1897년 11월 16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경주 김씨 가문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운자이다. &lt;br /&gt;
불심이 돈독하였던 스님은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나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숭산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여 선문(禪門)에 드는 법연(法緣)을 맺게 되어 화두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lt;br /&gt;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일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로 일구월심 피나는 정진수행을 하여 5년 만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lt;br /&gt;
===생사를 초월한 선승의 좌표=== &lt;br /&gt;
40세 되던 해 의선(義善)스님(만공스님의 모친)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수계를 하고,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만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lt;br /&gt;
스님은 만공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수행 정진하던 덕숭산을 떠나 운수행각으로 남방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큰 스님을 친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조실이신 동산스님을 친견하고 여생을 동산스님의 법하에서 정진 수행할 것을 결심한 스님은 이로부터 행각을 접고 금정산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를 제접하였다. 당시 동산스님께서도 밝은 혜안을 갖춘 비구니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스님은 납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살피면서 일체 모든 것을 무언의 실천으로 대신하였고, 입·방선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수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안의 공기가 &lt;br /&gt;
&lt;br /&gt;
[[File:106-01.jpg||섬네일|1956년부터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납자를 제접하던 대성암 전경.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훈훈하면 혼침에 빠질까 염려하여 항상 싸늘하게 하여서 수좌들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도록 지도했다. &lt;br /&gt;
평소 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검소하고 깔끔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실천수행 하였고, ‘옹대작대’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성품이 직설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게 자신의 행동을 잘 갈무리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성암에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lt;br /&gt;
평생을 이렇듯 선수행 속에서 생로병사의 중생 업을 녹이며 조용히 선정삼매에서 지내던 스님은 세연이 다함을 직감하고, 하루는 문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lt;br /&gt;
첫째는 당신이 입적하면 수장(水葬)(시신을 바다 속에 던져 어족(魚族)들에게 보시하는 것)하고, 둘째는 모양과 형식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말며 당신으로 인한 일체의 번거로운 상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lt;br /&gt;
===입적===&lt;br /&gt;
만성스님은 1975년(불기 2519년) 5월 9일 세수 79세, 법랍 40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문도들은 큰스님을 잃은 슬픔에 수장을 하지 못하고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범어사(梵魚寺) 산중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문도들은 사리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지 않음으로써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lt;br /&gt;
스님은 항상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고, 평소 ‘묘문법화(妙門法話)’를 경책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106-02.jpg||섬네일|생전 만공스님 친필 노트 사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세세생생에 참선밖에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 &lt;br /&gt;
참선은 절대로 혼자 못하는 것이라 &lt;br /&gt;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 &lt;br /&gt;
선지식을 믿는 만치 공부가 되는 것이다. &lt;br /&gt;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lt;br /&gt;
생사를 자재하여 일체 문제의 걸림이 없고 일체 지식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lt;br /&gt;
터럭 하나 어른거리지 못할 만치 온전한 정신을 모아 &lt;br /&gt;
정진하여야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다. &lt;br /&gt;
장맛을 보아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참선할 수 있다. &lt;br /&gt;
인생이란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이니 &lt;br /&gt;
집을 짓고 옷을 입으며 부모와 형제 의리를 지키며 &lt;br /&gt;
학문을 배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lt;br /&gt;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아 얻는데 인생의 참다운 귀함이 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만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행(賢行)·삼현(三顯)스님과 손상좌 일법(一法)·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대성암==&lt;br /&gt;
&lt;br /&gt;
대성암(大聖庵)은 범어사의 산내 암자로 기암괴석이 중첩하고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는 해발 801m의 금정산 기슭에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lt;br /&gt;
1680년 준영(俊英)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취규(就奎)스님이 3창, 경의(敬儀)스님이 4창하였다. &lt;br /&gt;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대성암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스님이 선객 지도와 외호에 힘썼지만 전면 보수는 하지 못한 채 겨우 비만 새지 않게 손을 보는 정도였다. &lt;br /&gt;
대성암 선원은 암주 찬훈스님이 1909년 10월 1일 오성월(吳惺月) 스님의 인가 아래 개원하였다. 당시 범어사 산내 선원이 4곳이나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껴 또 하나의 선원을 개설한 것이다. 찬훈스님은 방답(房畓) 3두락을 선량(禪粮)으로 확보해 수좌들을 모아 그해 16명의 대중스님과 동안거 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선원 명칭을 대성선사(大聖禪寺)라고 하였고,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만성스님 입적 후 1977년 현재의 선원장 비구니 자행(自涬)스님이 퇴락한 건물 4동 중 2동을 다시 짓고 정진하였고, 1987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도량을 넓히고 새롭게 전각을 지어 1991년 10월 불사를 회향하였다. &lt;br /&gt;
현재 대성암은 큰방 각해선림(覺海禪林)을 주축으로 지장전, 요사채가 ‘ㅁ’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범어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2&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06.&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본항목 ||  || 만성스님(萬性, 1897~1975)|| 慧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성스님(萬性, _189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의선(義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동산스님]] || ~의 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89</id>
		<title>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6889"/>
		<updated>2022-07-29T03:3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쾌민(快敏)스님&lt;br /&gt;
|사진= 499 쾌민(快敏).jpg&lt;br /&gt;
|법명=쾌민(快敏)&lt;br /&gt;
|속명=김쾌민&lt;br /&gt;
|본관=해풍&lt;br /&gt;
|출생=1916.10.28&lt;br /&gt;
|출가= 1932&lt;br /&gt;
|입적=199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대성사(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성사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3%&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16||개성 출생&lt;br /&gt;
|- &lt;br /&gt;
|1932|| 백양사에서 법현(法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lt;br /&gt;
|1933||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1938|| 백양사 강원 사교 수료 &lt;br /&gt;
|-&lt;br /&gt;
|1954||정혜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대성사 10년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7|| 용암사 3년 결사 성만 &lt;br /&gt;
|-&lt;br /&gt;
|1973|| 대성사 주지 취임 &lt;br /&gt;
|-&lt;br /&gt;
|1978|| 세등선원 3년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81|| 견성암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92|| 대성사에서 입적(세수 77세, 법랍 61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백양사 &lt;br /&gt;
*수계제자 :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1916년 10월 28일 지금은 이북 땅인 개성에서 아버지 김석종과 어머니 홍태오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이며, 이름은 김쾌민이다. &lt;br /&gt;
스님은 1932년 6월 15일 17세에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거주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2월 15일 18세에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쾌민스님은 23세 되던 1938년 1월 15일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1954년 2월 15일 전주 정혜사에서 만암 대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lt;br /&gt;
49세 되던 1964년 1월 15일 전남 나주 대성사에서 수선안거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성만하였다. 1967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용암사 천운선림에서 3년 결사하였으며, 1973년 세수 58세에 대성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성사는 1948년 세수 59세의 은사스님께서 작은 오두막에 의지하고 계시던 사찰이다. 은사 법현스님은 백양사 만암 노스님을 계사로 도준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그 뒤 법현스님께서는 1950년 남평리 18번지에 법당을 새로 짓고 인근의 많은 신도들에게 포교를 하셨다. 1954년 문하에 쾌민스님과 법선스님을 두셨으며, 함께 도량을 수호하다 1968년 세수 81세로 입적하셨다.당시 상좌이던 쾌민스님은 상좌 다섯 명을 교육시키면서 중창 불사를 하였다. 스님은 1978년 대전 세등선원 송담 큰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거를 하였고, 1981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쾌민스님은 1984년 주지직을 상좌 현정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하다가 1992년 6월 19일 오전 8시 입적에 드니,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였다. &lt;br /&gt;
스님이 평생 수행 정진하였던 대성사는 그 뒤 1987년 현 주지인 현정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고, 2년 뒤에는 단층 법당을 지었으며, 1993년부터 법당 중창 불사를 시작해 2층 법당을 증축하였다.&lt;br /&gt;
대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도량으로서 쾌민스님의 후학들이 스님의 유지를 이어 불법수호(佛法守護)에 앞장서고 있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성사&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9.&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49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본항목 || || 쾌민스님(快敏, 1916~1992)|| 快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민스님(快敏,_191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법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대성사]]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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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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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4T15:16:2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73&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대오(大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포명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월하(月下)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3</id>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3"/>
		<updated>2022-07-04T15:15:1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2</id>
		<title>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C%A1%EB%85%84%EC%8A%A4%EB%8B%98(%E5%85%AD%E5%B9%B4,_190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2"/>
		<updated>2022-07-04T15:13: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육년(六年)스님&lt;br /&gt;
|사진 = 349 육년(六年).jpg&lt;br /&gt;
|법명 = 육년(六年)&lt;br /&gt;
|법호 = 부용(芙蓉)&lt;br /&gt;
|속명 = 성남수&lt;br /&gt;
|본관 = 창녕&lt;br /&gt;
|출생 = 1906. 1. 26&lt;br /&gt;
|출가 = 1944 &lt;br /&gt;
|종단 = &lt;br /&gt;
|입적 = 1999. 5. 29(음력)&lt;br /&gt;
|사찰 = 부용암(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 624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육년(六年)스님은 부용암 만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우기 위해 어린이 교육에 매진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6||경북 성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부용암에서 만선(萬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7||보덕사에서 2하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51||인천 도화동 대원암 (현 부용암) 주지 취임&lt;br /&gt;
|-&lt;br /&gt;
|1952||춘성(春城)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춘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0~1999|| 부용암 주석, 부용암 대웅전 중창 불사, 요사채 불사&lt;br /&gt;
|-&lt;br /&gt;
|1999. 5. 29(음력)||부용암에서 입적(세수 94세, 법랍 56세) &lt;br /&gt;
|}&lt;br /&gt;
[[File:349-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lt;br /&gt;
*수행지침 : 자비실천&lt;br /&gt;
*상 훈 : 인천시장 표창장(고아 20여 명을 양육한 공로)&lt;br /&gt;
*수계제자 : 연경(학수)·본각(本覺) &lt;br /&gt;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부용당(芙蓉堂) 육년(六年)스님은 1906년 1월 26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에서 아버지 성태영과 어머니 벽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남수이다. &lt;br /&gt;
일찍이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던 중, 39세 되던 1944년에 법기문중의 제6대 만선스님을 은사로 늦은 출가를 하였다. &lt;br /&gt;
1947년 5월 충남 예산 보덕사에서 2하안거를 성만한 이래로 일생 부용암 산문을 벗어나지 않고 가람수호와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수행의 일과를 삼았다. &lt;br /&gt;
은사스님이신 만선(萬善)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바위틈에서 백일기도를 하시고 꿈에 인천 부용암 터를 선몽 받았다. 함께 있던 부영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과 짚신 몇 켤레를 주며 터를 찾아 떠나라고 권유하여 탁발을 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본 곳을 찾게 되어 터를 잡고 암자를 열었는데, 그때가 1941년경이었다.&lt;br /&gt;
[[File:349-02.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만선스님과 인연 ===&lt;br /&gt;
&lt;br /&gt;
처음에는 암자 이름이 대원암이었는데, 정화운동 후에 대원암 현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현재의 부용암(芙蓉庵)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일설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 부속암자인 대원암 현판이 정화 당시 인천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만선스님은 다시 금강산 유점사에 다녀오면서 나한님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이렇게 모시고 내려온 나한님은 모두 8분이었고, 현재까지 부용암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만선스님은 1945년부터 탁발을 하며 부용암 불사를 시작하셨는데, 탁 발을 다니실 때는 과일 껍질, 헌옷 등 먹고 입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주워 걸망 속에 넣어왔다. 그리고 과일 껍질은 깨끗이 씻어서 햇빛에 말려 장아찌를 담그고 누더기 옷은 잘 기워서 동자승들에게 입히곤 하였다. 만선스님에게는 병을 치유하는 영험함이 있었다. 눈병이 유행할 당시 탁발을 하다가 눈병환자를 만나 진언을 외우면 곧 깨끗하게 나았다. 몸에 기생하는 이를 머리 깎는 삭두칼에 모이게 해서 갖다버리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래서 만선스님은 ‘신통쟁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편으로는 성격이 몹시 괴팍한 면이 있어서 법당에 마지를 삐뚤게 올리거나 잘못 올리면 그대로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밥을 씻어서 먹고 마지를 다시 지어 올리게 하였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서진 대소쿠리를 불에 태우다가 들킨 스님도 있었다. 그러면 도로 끄집어내어 타버린 반쪽을 삼베로 이어서 다시 사용하게 만들만큼 물건을 철저하게 아끼셨다. 은사스님의 꾸중이 무서웠던 대중들은 늘 긴장 속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육년스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닦은 그릇을 또 닦고 하다못해 솥 밑에 묻은 그을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그을음이 많으면 땔감도 많이 들어간다고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러한 은사스님 곁을 떠나려고 네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데, 인연이 중하였던지 떠나지 못하고 부용암에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혹독한 시집살이 같은 생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던 육년스님은 1955년에 만선스님이 입적하시자 그 뒤를 이어서 부용암을 계속 지켜왔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육년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고 고지식한 편이었다. 은사스님께 걱정을 들은 날은 어김없이 밥을 굶어야 했는데,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 허락이 있을 때까지 이틀이든 사흘이든 먹지 않았다. 하루는 동자스님이 볼 일이 있어 마을에 다녀왔는데, 와서 보니 스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은사스님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육년스님은 평생 말이 없었고 의식염불을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터진 당일 새벽녘에 돌배를 주우러 뒷산에 갔는데 짐을 진 사람들이 몰려오고, 비행기에서는 삐라가 뿌려졌다. 인천 사람 전부가 수봉산으로 몰려오는 듯하였다. 배를 주워서 절에 가니 절에도 피난민들이 가득하였다. 그 중에는 스님들도 많았다. 육년스님은 배를 나눠주는 것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에게 공양을 준비해 주었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3.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육년스님은 전쟁 통에 불이 난 밀가루 공장에 가서 타다 남은 밀가루를 퍼 왔다. 낮에는 땔감을 아끼느라 불을 때지 못하고 밤에만 군불을 지폈는데, 그때 밀가루 죽을 쑤어서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사람들이 많아 밀가루 양이 적으면 물을 넉넉히 넣어 모두가 골고루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였다. 그때 육년스님과 사제 동자스님은 밀가루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단무지 공장에 불이 났는데, 반찬이 없어서 고심하던 육년스님은 불탄 공장에 가서 무거운 단무지를 걸망에 잔뜩 담아 짊어 지고 또 양손 가득히 들고 와서 대중들이 먹도록 하였다. 육년스님과 사제스님은 배가 고파 그 자리에서 조금 먹고 왔는데, 절에 돌아와서 은사스님께 시주의 은혜가 들어 있는 단무지를 먹었다고 걱정을 들어야만 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전쟁 중에는 탁발을 다니면 어느 집에서든 조금이라도 시주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부용암도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육년스님은 절을 지키고 은사스님과 동자스님들은 수원으로 떠나기로 했다. 은사 만선스님은 동자스님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산과 절 이름을 외우게 하고,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얻어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면 같이 있지 말고 떨어져 있고, 잘 때는 손을 붙들고 자고, 낮에는 멀리 떨어져서 서로 눈빛만 보고 있으라 당부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인 200원을 쥐어주셨다. 육년스님은 전쟁 중에도 성격이 괴팍하신 은사스님을 위하여 필요한 생필품을 챙겨드리고 피난길에서도 빨래를 한 뒤 양은대야에 진흙을 담아 그 대야를 불에 달궈서 다림질까지 해드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번은 육년스님이 쌀을 탁발하고 동자스님은 김치를 얻고자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집은 비어 있고 장독위에 사람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서움도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시체의 머리를 들어 장독뚜껑에 올려놓고 속을 헤치니 김치가 나왔다. 그 당시에는 비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김칫국물을 꼭 짜서 걸망에 넣고 돌아왔다. 부용암에 도착하여 김치에 소금을 뿌린 후 장독에 물을 부어 함께 넣었다. 그리고 죽과 함께 반찬으로 공양을 하였다. 육년스님은 은사스님의 고된 시집살이 때문에 화병이 생겼었다. 그래서 얼음을 좋아하였고 입적할 때까지 뜨거운 것은 물론이고 미지근한 것도 먹지 못했으며, 상좌스님들은 공양을 모두 식혀서 올렸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File:349-04.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키워라=== &lt;br /&gt;
육년스님은 은사스님께 받은 상처를 자비로 승화시켜 전쟁고아와 부모 없는 아이들을 평생 보살피며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 야학까지 보내면서 교육을 시켰으며 항상 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아이들이 절집에서 산다고 하면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신도회장에게 어머니 역할을 하게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부모 없는 아이라고 흉보지 못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면 절의 신도와 수양딸의 인연을 맺게 하였다. 절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라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선생님 이후에 모든 것을 알고 스님의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교사부부가 함께 귀의하여 신도가 된 일도 있었다. &lt;br /&gt;
스님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친 적이 없었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신이 키운 아이들이 시집을 갈 때면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여 보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하루는 아이들 다섯을 데리고 자고 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도둑의 발이 하도 커서 구둣발로 아이들을 밟으면 아이가 죽을까봐 밟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하며 평소에 건강을 위하여 끼고 있던 구리반지까지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스님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아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스님은 바느질 솜씨가 매우 좋았는데, 설날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겨울 내내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만들곤 하였다. &lt;br /&gt;
만선스님의 원력만큼 육년스님도 평생 부용암을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일생에 단 한 번 7일간의 전국 여행을 하였는데, 그만큼 어렵고 답답하게 살아서인지 당신의 상좌들은 가능하면 자유롭게 살도록 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자랑스런 인천시민상 수상===  &lt;br /&gt;
스님은 인천시 모범시민으로 뽑혀서 제6회 모범시민상을 수상하였다. 아이들을 잘 키울 뿐만 아니라 교육을 잘 시킨 공로였다. 당신은 배운 것이 없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만큼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지원해주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좋은데, 좁은 곳에서 너의 인생을 스스로 막으려고 하느냐.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하고 싶으면 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 큰 욕심 내지마라. 괜히 집 크게 짓고 욕심내면 그것 치다꺼리 하다가 인생 다 간다. 너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히 살아라.” 하고 늘 당부하였다. &lt;br /&gt;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본각스님은 세 살 때부터 육년스님이 기상을 꺾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키웠다. 본각스님은 ‘모든 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서 귀하게 키우며, 자기의 일로써 남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던 은사 육년스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lt;br /&gt;
 [[File:349-05.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 입적=== &lt;br /&gt;
육년스님은 1999년 음력 5월 29일 인천 부용암에서 힘들었던 사바의 일생을 접고 세수 94세, 법랍 56세로 입적에 들었다. 다비 후에 부분적으로 거둔 사리만도 47과나 되었다. 현재 부용암은 육년스님의 맏시봉인 연경스님이 1999년에 도량불사를 완비하고 스님의 뒤를 이어 3대째 도량을 지키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연경(학수)스님과 본각(本覺)스님이 있고, 손상좌 선덕·덕현·덕민·효공·덕효·효범·효욱·효장·효은·효근·효중·효석스님과 증손 상좌 효상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56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본항목 ||  || 육년스님(六年 1906~1999)|| 六年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육년스님(六年, _1906生, _비구니) &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법기(法起)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육년스님(六年, 1906生, 비구니) | 육년(六年)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1</id>
		<title>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4%B1%ED%98%84%EC%8A%A4%EB%8B%98(%E8%81%96%E8%B3%A2,_192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1"/>
		<updated>2022-07-04T15:12: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 성현(聖賢)스님&lt;br /&gt;
|사진 = 301 성현(聖賢).jpg&lt;br /&gt;
|법명 = 성현(聖賢)&lt;br /&gt;
|법호 = 대주(大珠) &lt;br /&gt;
|속명 = 김귀분(金貴分) &lt;br /&gt;
|본관 = 광산&lt;br /&gt;
|출생 = 1927. 7. 25 (비구니)&lt;br /&gt;
|출가 = 1944.&lt;br /&gt;
|입적 = &lt;br /&gt;
|사찰 = 금천선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1동)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성현(聖賢)스님은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강원 설립에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7|| 경북 상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 금천선원에서 성진(性眞)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6||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0||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4~1963|| 동학사 강원 졸업(1회)&lt;br /&gt;
|-&lt;br /&gt;
|1963|| 동학사 총무&lt;br /&gt;
|-&lt;br /&gt;
|1965|| 금천선원 총무&lt;br /&gt;
|-&lt;br /&gt;
|1966~1984|| 금천선원 주지(가람 수호, 포교, 도제양성)&lt;br /&gt;
|-&lt;br /&gt;
|1984|| 주지 사임&lt;br /&gt;
|-&lt;br /&gt;
|1984~1994|| 금천선원에서 10년간 두문불출 10시간 이상 정진&lt;br /&gt;
|-&lt;br /&gt;
|1994~1996|| 내원사, 범어사, 대성암, 경주 금련선원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96~2002|| 경주 금련선원 안거&lt;br /&gt;
|-&lt;br /&gt;
|2004||현재 금천선원 주석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행지침 : 지행합일(知行合一) &lt;br /&gt;
*상 훈 : 삼현문중상 &lt;br /&gt;
*수계제자 : 현주(現珠)·현근(現根)&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가===   &lt;br /&gt;
대주당(大珠堂) 성현(聖賢)스님은 1927년 7월 25일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월리에서 아버지 김학천과 어머니 김음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이름은 김귀분이다. &lt;br /&gt;
무종교 집안에서 순탄하게 자란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상주 남장사에서 수옥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게 되었다. &lt;br /&gt;
“마음만 견고하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노니는 사문이 될 수 있다.” &lt;br /&gt;
이 한마디가 스님의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부처님과의 인연을 일깨웠다. &lt;br /&gt;
이후 성현스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옷가지 하나 없이 올올이 출가를 결행하여 1944년 17세에 덕운당 성진스님을 은사로 부산 금천선원으로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1946년 스님은 범어사에서 운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0년 범어사 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lt;br /&gt;
금천선원 경내 (사진)&lt;br /&gt;
===비구니강원 설립의 중요성 인식=== &lt;br /&gt;
스님은 덕운당(德雲堂) 성진스님 문하에 들어가서 하루하루 탑을 쌓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중에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가서 삼칠일 기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금빛을 머금은 경책을 받는 꿈을 꾸었고, 경론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마침 강원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신 은사스님이 지원해주셔서 동학사 경봉 큰스님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때가 1954년 스님의 나이 28세였다. &lt;br /&gt;
비구·대처승 간의 대립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에 비구니 강원의 설립을 시급하게 여겨 뜻 맞는 도반스님 몇 분과 함께 학인 자체 내에서 주지를 내어 강원을 세우고 오전 강의가 끝나면 오후 내내 울력을 하며 도량을 일구었다. &lt;br /&gt;
동학사 강원 시절 스님은 5년간 입승 소임을 보았는데, 저녁 9시에 방선을 한 후 대중이 자는 사이 대웅전에서 새벽 3시까지 3년간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스님의 돈독한 신심과 불퇴전의 용맹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lt;br /&gt;
시월 보름 결제 후에는 상반들이 열흘씩 탁발을 하여 아랫반의 부족함을 메워주었고, 청담 큰 스님을 모시고 일주일씩 특강을 듣기도 했다. &lt;br /&gt;
이렇게 성현스님은 28세에 동학사에 들어가 37세 되던 1963년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동학사 강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lt;br /&gt;
같은 해에 동학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았으며, 1965년 금천선원 총무로 부임하여 40세 되던 해인 1966년 금천선원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 도제양성에 주력하였다.&lt;br /&gt;
&lt;br /&gt;
===보시 인욕행 실천=== &lt;br /&gt;
처음 발심할 때 참선정진에 뜻을 두었기에 지금도 하루 종일 일을 놓지 않으면서도 새벽 참선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만공스님 어록을 탐독하고 있다. &lt;br /&gt;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병고로 3년간 누워 지낼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직접 시봉하고 보살펴서 타의 모범이 되었고, 은사와 상좌 간 인연의 지중함을 몸소 실천하는 대비심(大悲心)을 보여주었다. &lt;br /&gt;
도제들이 공부와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년까지 살림을 직접 도맡아 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쉬지 않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상좌 등 대중들에게 한 번도 성을 낸 적이 없다. 또 가람에 들어오는 인연들을 부처님처럼 보살피는 보시 인욕행(忍辱行)을 실천해왔는데, 그 공로로 삼현문중상을 수상하였다. &lt;br /&gt;
68세 되던 1994년 경남 내원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하고, 다음해에 부산 범어사 대성암에서 동안거 결제를 성만 하였다. &lt;br /&gt;
성현스님은 『유마경』 보살행 품의 ‘큰사랑(大慈)을 여의지 아니하고 어여삐 여김을 버리지 아니하며, 일체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고 잊어버리지 아니하며, 중생을 교화하되 게으르지 말라. 네 가지로 법수하는 법에 따라 행하기를 생각하며, 옳은 법을 옹호하되 몸과 마음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선한 근본을 심되 싫은 마음이 없으며, 방편으로 회향하는데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을 구하기에 게으르지 말라. 법문을 말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며 부처님께 부지런히 공양할 것 이니라.’는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며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lt;br /&gt;
1996년에서 2002년까지 경북 경주 금련선원에서 동안거 결제를 한 스님은 외부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매일 10시간 이상 정진에 전념했다. &lt;br /&gt;
2004년 현재 세수 78세, 법랍 61세인 성현스님은 금천선원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현주(現珠)·현근(現根)스님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본항목 ||  || 성현스님(聖賢, 1927~1987)|| 聖賢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현스님(聖賢, _192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덕운당 성진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부산 금천선원]]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운암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성현스님(聖賢, 1927生, 비구니) | 성현(聖賢)스님]] || [[금천선원]]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0</id>
		<title>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A%B3%84%EC%A0%84%EC%8A%A4%EB%8B%98(%E6%88%92%E7%94%B0,_1889%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30"/>
		<updated>2022-07-04T15:11: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계전(戒田)&lt;br /&gt;
|사진 = &lt;br /&gt;
|법명 =계전(戒田)&lt;br /&gt;
|법호 = 해월(海月)&lt;br /&gt;
|속명 = 박금계(朴錦溪)&lt;br /&gt;
|본관 = &lt;br /&gt;
|출생 = 1889. 7. 13 &lt;br /&gt;
|출가=1944.&lt;br /&gt;
|입적=1987.&lt;br /&gt;
|사찰 = 운주사(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7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계전(戒田)스님은 전남 신광사에서 출가하여 운주사에서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로 유명한 비구니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5%&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89|| 전남 광주 출생 &lt;br /&gt;
|-&lt;br /&gt;
|1944||신광사에서 성화(性化)스님을 은사로 출가,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입적(세수 99세, 법랍 44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삼현(三賢) &lt;br /&gt;
*수계제자 : 법진(法眞)·도의(道義)&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lt;br /&gt;
해월당(海月堂) 계전(戒田)스님은 1889년 7월 13일 광주시 풍향동에서 아버지 박덕일(朴德泆)과 어머니 최서외(崔西外)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박금계이다. &lt;br /&gt;
스님은 고암 큰스님과 전강 큰스님을 모시며 공부를 하였는데 ‘늦게라도 출가해서 가사장삼 수하는 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에 더 가깝다.’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출가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4년 신광사에서 윤성화(尹性化)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lt;br /&gt;
출가 후 범어사 대성암에서 몇 해의 안거를 성만하고, 광주 신광사 선원에서 8년간 안거를 하면서 마음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공부를 할 때는 항상 전강 큰스님을 모시고 하였다. &lt;br /&gt;
신광사는 광주 북구 두암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말사이다. 1933년 광주 시내에 사는 최동열의 어머니 김청제월 보살님의 시주금으로 당시 대본산 선암사 광주시 서방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1944년 10월 20일에 현재의 주지 비구니 안혜운 스님이 인수, 보호 중 법당이 협소하여 1964년 4월에 법당과 선방을 중창하였다. 1974년 8월에 요사채를 헐어 다시 요사채와 강당을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lt;br /&gt;
운주사 전경 (사진)&lt;br /&gt;
&lt;br /&gt;
===철저한 계행으로 일관한 진정한 수행자=== &lt;br /&gt;
&lt;br /&gt;
신광사는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줄기에 자리하여 광주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선남선녀 여러 불자들이 국태민안과 무운장구를 빌며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원으로 유명하다. 계전스님은 전남 운주사에서도 수행을 하였는데, 화순의 운주사로 들어간 때는 정확치 않다. 어려운 시절에 너릿재 고개를 넘어서 광주에서 화순까지 쌀을 탁발하여 여러 가마니를 지고 올라오기도 하였다. 너릿재 고개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와 광주시 동구 선교동 접도지 역으로 1971년에 터널이 완공되기 전까지 겨울이면 며칠씩 교통이 끊겼고, 더 이전에는 대낮에도 산적이 나오는 험한 고개였다. 운주사에서 스님은 혼자서도 입·방선을 지켜 수행하고 걸식을 하면서 인법당에서 매일 절을 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운주사에 가서 염불을 하는데 같은 시간에 당신 처소에서도 죽비소리가 났다고 한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수 청소나 빨래를 하였으며 평소 참선을 하면 곧 선열의 삼매에 들었다. 한 번은 삼매 중에 극락세계를 다녀와서 스님의 법명인 ‘조계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숙명통을 얻어서 전생을 보았으며, 입적할 때 ‘다음 생에 광주에서 태어나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lt;br /&gt;
계전스님은 상좌 법진스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여 때리기도 하는 등 모질게 대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입적하기 전 어느 봄날 지나가는 법진스님에게 “내가 공부를 안했으면 어떻게 알았겠소. 여보시오, 내가 이제 욕을 안 할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본 후였다. 전생에 스님은 동서지간이 모두 넷이었는데 당신이 법진스님의 막내 동서였다. 그런데 법진스님이 계전스님에게 몹시 심한 시집살이를 시켰고, 그 인과로 금생에 법진스님을 만나 모진 말과 행동을 자주 하게 된 것이었다. 계전스님은 말년에 치매에 걸렸는데도 참선과 염불만은 잊지 않고 하였다. 치매증세가 있는 중에도 침식을 잊고 큰소리로 일주일 정도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고, 정신이 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3일 내내 잠을 잤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스님의 마지막 당부는 염불을 하라는 것이었다. 세수 99세, 법랍 44세로 입적하기 직전까지 염주를 돌렸는데, 숨이 끊어지자 염주가 멈추었다고 전해진다. 늦게 출가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한 계행과 수행으로 일관한 스님의 삶은 후학들에게 큰 지표가 되고 있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법진(法眞)·도의(道義)스님이 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운주사&lt;br /&gt;
*승적자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4&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본항목 ||  || 계전스님(戒田, 1889~1987)|| 戒田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계전스님(戒田, _1889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삼현(三賢)]]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윤성화(尹性化)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신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계전스님(戒田, 1889生, 비구니) | 계전(戒田)스님]] || [[고암(古庵)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9</id>
		<title>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A0%95%EB%AA%85%EC%8A%A4%EB%8B%98(%E6%B7%A8%E6%98%8E,_1940%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9"/>
		<updated>2022-07-04T15:10: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정명(淨明)스님&lt;br /&gt;
|사진= 416 정명(淨明).jpg&lt;br /&gt;
|법명=정명(淨明)&lt;br /&gt;
|법호=향산(香山)&lt;br /&gt;
|속명=김분남(金粉南)&lt;br /&gt;
|본관=김해(金海)&lt;br /&gt;
|출생=1940. 3. 14&lt;br /&gt;
|출가=1943.&lt;br /&gt;
|입적=200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 보광사(부산광역시 북구 덕천3동 118-3)&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lt;br /&gt;
정명(淨明)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으며, 화두수행에 정진하면서도 어린이 포교에 관심을 가졌던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40|| 경북 경산 출생&lt;br /&gt;
|- &lt;br /&gt;
|1943||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永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4|| 부산 보광사 거주&lt;br /&gt;
|-&lt;br /&gt;
|1958||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니과 수료&lt;br /&gt;
|-&lt;br /&gt;
|1959|| 해인사에서 석우(石友)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에서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68|| 서울 보문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69|| 부산 보광사 주지 취임.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2000|| 보광사 가람 수호 및 주지&lt;br /&gt;
|-&lt;br /&gt;
|2002|| 보광사에서 입적(세수 63세, 법랍 6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 중 : 계민(戒珉)&lt;br /&gt;
* 생활신조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자.&lt;br /&gt;
* 수계제자 : 광석(光石)·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lt;br /&gt;
정명(淨明)스님 (보광사)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출가하여 승이 됨이 어찌 작은 일이랴?&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안일을 구함도 아니며&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함도 아님이며&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명리를 구함도 아님이라.&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오직 번뇌를 끊기 위함이며&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생사를 벗어나기 위함이며&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부처님 지혜의 명을 잇기 위함이며,&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삼계를 벗어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lt;br /&gt;
===출생===&lt;br /&gt;
향산(香山) 정명(淨明)스님은 1940년 3월 14일 경북 경산군 남산면에서 아버지 김윤이와 어머니 남말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이름은 김분남이다. &lt;br /&gt;
스님은 네 살 되던 해인 1943년 청도 운문사 청신암에서 영오스님을 은사로 동진출가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운문사 청신암(靑神庵)은 칠성전에 빌어서 얻은 아이가 싱그럽게 자라서 공부를 잘 하라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후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독성각은 조선조 말 최현화 화상이 짓고, 삼성(三聖)을 모셨다. 칸칸마다 현액을 달았으며, 운악화상이 중건하였다. 1858년에 중수를 하였고, 1924년과 1937년, 1956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889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amp;lt;/pre&amp;gt;&lt;br /&gt;
북극전 앞에 있는 돌탑에서 칠성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생남을 했다고 전한다. 정명스님은 출가한 다음해인 1944년 부산 보광사로 거처를 옮기고 보광사에서 불법을 배우고 계와 정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lt;br /&gt;
===운문사, 동학사, 보문사, 통도사에서 수학===&lt;br /&gt;
스님은 불문에도 일찍 들었지만 화두도 어린 나이에 받았는데, 스님의 나이 겨우 7세에 당시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고 계시던 경봉 큰스님께 탔다고 한다. 정명스님은 12세 되던 1951년, ‘비구니는 사대주 주력을 해야 장애가 없다.’는 일타 큰스님의 말씀을 들은 뒤 마음에서 사대주 주력을 놓지 않으려고 늘 노력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58년 운문사에서 임제응 강주스님께 사미니과를 수학하고, 1959년 20세 되던 해에 해인사 설석우 계사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받았다. 또한 그해 동학사에서 사집, 사교를 호경 강주 스님께 수학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1968년 나이 29세 때 서울 보문사에서 황영진 강사스님에게 대교를 수학하고, 다음해에 통도사에서 월하화상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이때 스님의 나이 30세였다. 스님은 38세 되던 1977년에 부산 보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입·방선을 할 때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과연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항상 생각하였으며, 성장 후엔 경봉 노스님의 법문 중에서 ‘염화미소’라는 화두를 들고 수행에 정진하였다.&amp;lt;/pre&amp;gt;&lt;br /&gt;
===포교===&lt;br /&gt;
스님은 1992년 관음전 천불(千佛) 천수천안 불사를 시작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포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법안이 밝았던 것이다. &amp;lt;/pre&amp;gt;&lt;br /&gt;
보광사는 30명 정도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이들 중에는 현재 출가자의 길을 가는 제자도 있는데, 바로 주융스님이다.&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스님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명스님은 2002년 보광사에서 세수 63세, 법랍 60세로 사바세계의 연을 다하였다. 수계제자인 광석(光石)(전북 고창 고림사)·주융(周融)·주형(周亨)·주광(周廣)·주경스님 등이 정명스님의 유지를 따라 수행 정진 중이다.&amp;lt;/pre&amp;gt;&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551&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정명(淨明))스님]] || 본항목 ||  || 정명스님(淨明, 1940~2002)|| 淨明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명스님(淨明, _1940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정&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계민(戒珉)]]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영오(永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석우(石友)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월하(月下)스님 ]]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정명스님(淨明, 1940生, 비구니))|정명(淨明)스님]] || [[ 부산 보광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8</id>
		<title>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83%81%EB%8D%95%EC%8A%A4%EB%8B%98(%E5%B0%99%E6%82%B3,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8"/>
		<updated>2022-07-04T15:07:4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상덕(尙悳)스님&lt;br /&gt;
|사진= 232 상덕(尙悳).jpg&lt;br /&gt;
|법명=상덕(尙悳)&lt;br /&gt;
|속명=허두남(許斗南) &lt;br /&gt;
|본관=양천&lt;br /&gt;
|출생=1925. 3. 3 &lt;br /&gt;
|출가= 1933&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해인사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염불수행, 근검절약, 불교정화운동 등등 정직한 수행자로 인도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7%&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경남 합천 출생 &lt;br /&gt;
|-&lt;br /&gt;
|1933|| 해인사 약수암에서 재희(在喜)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40|| 해인사에서 보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혜옥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및 『법화경』 수료&lt;br /&gt;
|-&lt;br /&gt;
|1945||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팔공산 부인사 주지&lt;br /&gt;
|-&lt;br /&gt;
|1975|| 대원사, 윤필암, 내원사 등 선원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2000|| 해인사 약수암에서 정진&lt;br /&gt;
|-&lt;br /&gt;
|2004|| 현재 약수암 주석 (선덕), 문중회장 재임&lt;br /&gt;
|} &lt;br /&gt;
&lt;br /&gt;
*문 중 : 청해(靑海) &lt;br /&gt;
*수행지침 : 부처님 법을 따르자. &lt;br /&gt;
*상 훈 : 부인사 주지 재직시 문교부장관상 수여 &lt;br /&gt;
*특 기 : 염불 &lt;br /&gt;
*수계제자 :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File:232-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尙悳)스님은 1925년 3월 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352번지에서 아버지 허주일과 어머니 김만덕광(불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허두남이다. 스님이 아홉 살 되던 해인 1933년, 어머니는 딸을 외할머니께 보냈다. 외할머니는 스님을 데리고 약수암으로 갔는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가면서 ‘절에 가면 쌀밥을 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절에 따라 간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출가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외할머니가 신심이 돈독 했던 분이라고 믿고 있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40년 16세 때 해인사 큰법당에서 장보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5년 후에 다시 해인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모시고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lt;br /&gt;
출가 문중은 청해이고, 은사스님은 재희(在喜) 스님으로 상덕스님이 21세 되던 해인 1945년 1월 16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회진(會眞) 노스님은 은사스님과 같은 해인 1945년 11월 9일 약수암에서 입적하셨다. &lt;br /&gt;
정은(正恩) 노스님은 상덕스님의 노스님으로 그해 7월 그믐날 입적하셨다. &lt;br /&gt;
팔공산 부인사 주지로 재직 중이던 은사스님과 13세의 상덕스님은 같이 생활하다가 은사스님이 주지를 퇴임하시고 상덕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나이 21세였는데, 이후 50세까지 근 30년을 주지로 살았다. 큰절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혜옥 강사스님께 『법화경』을 배웠으며, 부인사에 있으면서 내원사 주지로 10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논과 밭과 산을 구입하여 30세에 요사채를 짓고 32세에는 법당을 완공하였다. 요사채를 지을 때에는 3년 동안 노스님과 보살의 힘을 보태 집을 지었고 논밭과 산을 사고 틈틈이 일을 해가며 헌신적으로 불사에 매진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부인사에 사는 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부처님께 크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 잘 입거나 잘 먹어본 적도 없고, 주위에서 ‘부처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맡은 소임에 모든 정열을 바쳤다. &lt;br /&gt;
요사채에 손님이 오면 나무를 해다 장작을 패어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비록 자신은 제대로 먹지 못해도 부족한 가운데 공양을 지어 정성껏 대접했다. 또한 이불이 없을 때면 자신의 이불까지 선뜻 내주어 사람을 서운치 않게 하였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부유하였고, 가난함 속에서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지 않았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1967~1968년까지 처음으로 대성암에서 안거를 하고, 1970~1971년에는 윤필암과 내원사에서 대중을 위해 선방외호에 힘을 썼다. 이후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인사 약수암 선방에서 오래도록 참선에 몰입하고 수행 정진하였다. &lt;br /&gt;
1987년 대원사 결제 때에는 한푼 두푼 모은 사비를 다 털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를 해드리기도 하였다. 조각을 이어 만든 이불을 30년 동안 쓰고, 새 옷은 다른 스님들에게 드리고 누덕누덕 기운 옷 두서너 벌 정도만 입는 등 근검절약하여 경(經)불사나 사찰을 짓는데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염불의 달인===&lt;br /&gt;
[[File:232-02.jpg||섬네일|상덕스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상덕스님은 평생 독살이를 하지 않고 오직 대중을 위해 살았다. 또한 혼자서 열심히 염불을 익혀서 제방의 각종 행사나 가사 불사에 동참하여 정성껏 염불을 하였는데, 실력이 뛰어나 경봉 큰스님께서 염불소리 가 좋다고 칭찬을 하실 정도였다. &lt;br /&gt;
상덕스님은 ‘염불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염불을 많이 했는데, 어릴 때부터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스님은 어른스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오며가며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고, 혼자서 배운 것을 외워보곤 하였다. &lt;br /&gt;
===불교정화 운동===&lt;br /&gt;
스님은 불사하는 곳이 있다면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석하였는데, 많은 것을 두루 배우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더욱 정진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서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배우기 위해 외부의 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런 일은 자신의 정진에도 도움이 되지만 불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불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lt;br /&gt;
비구니스님들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화운동 당시, 어떤 스님은 할복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분신을 하기도 하는 등 밤을 지새우면서 야단법석이었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런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스님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들을 생각하며 눈에 심지를 켜고 무조건 밀어붙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때에 비구·비구니스님들은 대처승과 서로 창으로 찌르고 찔리면서 오직 불교계 정화를 위해 온몸을 희생하였다. &amp;lt;/pre&amp;gt;&lt;br /&gt;
정화 때 상덕스님은 조계사에서 목탁을 잡고 기도하였는데, 견성암의 어느 노스님은 ‘비구니 스님이 아니면 정화가 안됐을 것이다.’ 하면서 비구니스님들의 기상을 높이 샀다. 처음으로 법정스님이 사찰에 화장터를 만들자고 주장했을 때, 말만 거론되었지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어른스님들이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은 윤필암에서 한 철을 나면서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앞장을 섰고, 해인사에 화장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을 데리고 하는 일이었지만 힘이 무척 들었다.&lt;br /&gt;
&lt;br /&gt;
===근검절약===&lt;br /&gt;
&lt;br /&gt;
상덕스님은 항상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기침약이 150원이었을 때의 일이다. 스님이 감기에 걸려 약국에 가서 기침약을 달라며 100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약사가 50원을 더 달라고 했다. 스님은 감기약이 100원일 줄 알고 갔는데 어느새 50원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약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 돈이면 불사를 하고 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lt;br /&gt;
또한 양말 한 켤레로 사철을 지내기도 했다. 구멍이 나고 헤지면 기워서 신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아끼고 또 아끼는 생활이었다. 스님은 ‘돈이 없어도 상관없다. 아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으로 불사를 하였다. &lt;br /&gt;
===먼저 스스로에게 정직하라===&lt;br /&gt;
[[File:232-03.jpg|섬네일|상덕스님 친필.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요즘은 비구니 선방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지만, 예전의 어른스님들은 비구니 선방이 없어서 수행공간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공부를 하였다. 사정을 아는 비구스님들 중에는 비구스님 선방에 비구니스님을 받아 같이 공부를 하는 분들도 있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자비와 너그러움이 있던 시기였다. &lt;br /&gt;
스님은 노스님을 모시면서 온갖 좋은 것을 다 갖다 드리며 대접에 소홀하지 않았던 때가 행복했다고 한다. 또 요즘 학인들은 삭발만 하면 중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머리만 깎았다고 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현재의 수행 풍토를 염려하였다. &lt;br /&gt;
스님은 ‘중노릇하기 위해 왜 삭발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진정 참다운 중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mp;lt;/pre&amp;gt;&lt;br /&gt;
후학들은 상덕스님을 ‘호랑이 노스님’ 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 스님은 ‘나는 무섭지 않고 얌전한데 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다.’며 웃는다. 스님은 아랫사람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확실하고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마음속에는 애정이 넘치며 인자한 분이다. &lt;br /&gt;
스님은 그동안 내 마음을 속이지는 말자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 스님은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며 수련하고 정진하는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므로 자신에게 먼저 솔직함을 보여주라고 강조한다. &lt;br /&gt;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작은 돈도 아끼며 밤낮으로 일만하는 스님은 외면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다. &lt;br /&gt;
상덕스님은 문중회장을 지냈고, 28년간 부인사 주지를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 &lt;br /&gt;
부인사 주지 재직 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lt;br /&gt;
‘부처님 법만을 따르자.’는 신념을 갖고 있는 상덕스님은 현재까지 염불을 가장 잘하는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lt;br /&gt;
2004년 현재 해인사 약수암에 주석하며 수행 정진중인 상덕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해성(海星)·해관(海觀)·준용·동우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해인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상덕(尙悳)스님]] || 본항목 ||  || 상덕스님(尙悳, 1925~1998)|| 尙悳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덕스님(尙悳,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청해]]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재희(在喜)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해인사 화장터]]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장보해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팔공산 부인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상덕스님(尙悳, 1925生, 비구니))|상덕(尙悳)스님]] || [[내원사 ]]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7</id>
		<title>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B%A7%8C%EC%84%B1%EC%8A%A4%EB%8B%98(%E8%90%AC%E6%80%A7,_1897%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7"/>
		<updated>2022-07-04T15:06: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 만성(萬性)스님&lt;br /&gt;
|사진= 106 만성(萬性).jpg&lt;br /&gt;
|법명= 만성(萬性) &lt;br /&gt;
|속명=김운자(金雲子)  &lt;br /&gt;
|본관=경주(慶州)&lt;br /&gt;
|출생=1897. 11. 16 &lt;br /&gt;
|출가= 1936&lt;br /&gt;
|입적=1975. 5. 9&lt;br /&gt;
|종단=&lt;br /&gt;
|사찰=대성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범어사)&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용맹정진 수행에 전력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897|| 충남 논산 출생 &lt;br /&gt;
|-&lt;br /&gt;
|1933|| 수덕사 만공스님 친견 후 입산&lt;br /&gt;
|- &lt;br /&gt;
|1936|| 수덕사 견성암에서 의선(義善)(만공스님 속가 모친)스님을 은사로 출가 &lt;br /&gt;
|-&lt;br /&gt;
|1941|| 만공스님으로부터 법 인가 &lt;br /&gt;
|-&lt;br /&gt;
|1946~1956|| 운문사 청신암, 금강산 보덕굴, 쌍계사 국사암 등에서 운수행각&lt;br /&gt;
|-&lt;br /&gt;
|1956|| 범어사 대성암 입승, 가람수호 및 운수납자 제접 &lt;br /&gt;
|-&lt;br /&gt;
|1975. 5. 9|| 대성암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0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만공스님이 계신 전월사에서 70여 일간 땅에 허리를 대지 않고 용맹정진: ‘상근기는 7일, 중근기는 21일, 하근기는 100일’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100일을 정해 놓고 참선에 전념하던 중 21일째에 정신적 희열감을 느끼고 거듭 정진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법을 인가받음. &lt;br /&gt;
&lt;br /&gt;
*문 중 : 실상(實相) &lt;br /&gt;
*생활신조 : 항상 출가자는 계를 지키고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여 훌륭한 승려가 되어야 한다. &lt;br /&gt;
*취 미 : 독서 &lt;br /&gt;
*수계제자 : 현행(賢行)·삼현(三顯)&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만성(萬性)스님은 1897년 11월 16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에서 경주 김씨 가문의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김운자이다. &lt;br /&gt;
불심이 돈독하였던 스님은 속세에 인연이 있었으나 오대산 방한암(方漢岩)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덕숭산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여 선문(禪門)에 드는 법연(法緣)을 맺게 되어 화두를 챙기기 시작하였다. &lt;br /&gt;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일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하니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를 화두로 일구월심 피나는 정진수행을 하여 5년 만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여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lt;br /&gt;
===생사를 초월한 선승의 좌표=== &lt;br /&gt;
40세 되던 해 의선(義善)스님(만공스님의 모친)을 은사로 수덕사 견성암에서 삭발수계를 하고, 만공 큰스님으로부터 ‘만성’이란 법명을 받았다. &lt;br /&gt;
스님은 만공 큰스님이 입적하신 후 사십구재를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수행 정진하던 덕숭산을 떠나 운수행각으로 남방일대를 다니면서 여러 큰 스님을 친견하였다. 금정산 범어사 조실이신 동산스님을 친견하고 여생을 동산스님의 법하에서 정진 수행할 것을 결심한 스님은 이로부터 행각을 접고 금정산 범어사 대성암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를 제접하였다. 당시 동산스님께서도 밝은 혜안을 갖춘 비구니라고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스님은 납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상하게 살피면서 일체 모든 것을 무언의 실천으로 대신하였고, 입·방선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 수좌들에게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방안의 공기가 &lt;br /&gt;
&lt;br /&gt;
[[File:106-01.jpg||섬네일|1956년부터 만성스님이 입승으로 주석하면서 납자를 제접하던 대성암 전경.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훈훈하면 혼침에 빠질까 염려하여 항상 싸늘하게 하여서 수좌들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도록 지도했다. &lt;br /&gt;
평소 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검소하고 깔끔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실천수행 하였고, ‘옹대작대’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성품이 직설적이었으며, 누구도 감히 말 한 마디 붙일 수 없게 자신의 행동을 잘 갈무리 하였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성암에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고 한다. &lt;br /&gt;
평생을 이렇듯 선수행 속에서 생로병사의 중생 업을 녹이며 조용히 선정삼매에서 지내던 스님은 세연이 다함을 직감하고, 하루는 문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lt;br /&gt;
첫째는 당신이 입적하면 수장(水葬)(시신을 바다 속에 던져 어족(魚族)들에게 보시하는 것)하고, 둘째는 모양과 형식적인 의식에 얽매이지 말며 당신으로 인한 일체의 번거로운 상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lt;br /&gt;
===입적===&lt;br /&gt;
만성스님은 1975년(불기 2519년) 5월 9일 세수 79세, 법랍 40세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문도들은 큰스님을 잃은 슬픔에 수장을 하지 못하고 전국비구니회 장으로 범어사(梵魚寺) 산중 다비장에서 다비를 모셨다. 문도들은 사리를 수습하여 탑에 봉안하지 않음으로써 큰스님의 유훈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lt;br /&gt;
스님은 항상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간직하였고, 평소 ‘묘문법화(妙門法話)’를 경책으로 삼고 정진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106-02.jpg||섬네일|생전 만공스님 친필 노트 사본.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세세생생에 참선밖에 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 &lt;br /&gt;
참선은 절대로 혼자 못하는 것이라 &lt;br /&gt;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할 것 &lt;br /&gt;
선지식을 믿는 만치 공부가 되는 것이다. &lt;br /&gt;
선지식은 인생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lt;br /&gt;
생사를 자재하여 일체 문제의 걸림이 없고 일체 지식의 막힘이 없는 사람이다. &lt;br /&gt;
터럭 하나 어른거리지 못할 만치 온전한 정신을 모아 &lt;br /&gt;
정진하여야 참선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다. &lt;br /&gt;
장맛을 보아 짠 줄 아는 사람은 다 참선할 수 있다. &lt;br /&gt;
인생이란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이니 &lt;br /&gt;
집을 짓고 옷을 입으며 부모와 형제 의리를 지키며 &lt;br /&gt;
학문을 배우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lt;br /&gt;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아 얻는데 인생의 참다운 귀함이 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만성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행(賢行)·삼현(三顯)스님과 손상좌 일법(一法)·명안(明岸)·명관(明官).명선(明仙)·명지(明志)·명상(明尙)·돈오(頓悟)스님 등이 있다.&lt;br /&gt;
&lt;br /&gt;
==대성암==&lt;br /&gt;
&lt;br /&gt;
대성암(大聖庵)은 범어사의 산내 암자로 기암괴석이 중첩하고 수려한 계곡을 자랑하는 해발 801m의 금정산 기슭에 단정하게 들어서 있다. &lt;br /&gt;
1680년 준영(俊英)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이후 취규(就奎)스님이 3창, 경의(敬儀)스님이 4창하였다. &lt;br /&gt;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대성암에 군인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건물이 많이 퇴락했다.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비구니 만성(萬性)스님이 선객 지도와 외호에 힘썼지만 전면 보수는 하지 못한 채 겨우 비만 새지 않게 손을 보는 정도였다. &lt;br /&gt;
대성암 선원은 암주 찬훈스님이 1909년 10월 1일 오성월(吳惺月) 스님의 인가 아래 개원하였다. 당시 범어사 산내 선원이 4곳이나 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함을 느껴 또 하나의 선원을 개설한 것이다. 찬훈스님은 방답(房畓) 3두락을 선량(禪粮)으로 확보해 수좌들을 모아 그해 16명의 대중스님과 동안거 결사에 들어갔다. 이때 선원 명칭을 대성선사(大聖禪寺)라고 하였고, 정화 이후 대성암 선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만성스님 입적 후 1977년 현재의 선원장 비구니 자행(自涬)스님이 퇴락한 건물 4동 중 2동을 다시 짓고 정진하였고, 1987년 대대적인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도량을 넓히고 새롭게 전각을 지어 1991년 10월 불사를 회향하였다. &lt;br /&gt;
현재 대성암은 큰방 각해선림(覺海禪林)을 주축으로 지장전, 요사채가 ‘ㅁ’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범어사&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p.312&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본항목 ||  || 만성스님(萬性, 1897~1975)|| 慧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만성스님(萬性, _1897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의선(義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동산스님]] || ~의 제자이다 &lt;br /&gt;
|-&lt;br /&gt;
| [[만성스님(萬性, 1897生, 비구니)| 만성((萬性)스님]]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6</id>
		<title>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BE%8C%EB%AF%BC%EC%8A%A4%EB%8B%98(%E5%BF%AB%E6%95%8F,_1916%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6"/>
		<updated>2022-07-04T15:05: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쾌민(快敏)스님&lt;br /&gt;
|사진= 499 쾌민(快敏).jpg&lt;br /&gt;
|법명=쾌민(快敏)&lt;br /&gt;
|속명=김쾌민&lt;br /&gt;
|본관=해풍&lt;br /&gt;
|출생=1916.10.28&lt;br /&gt;
|출가= 1932&lt;br /&gt;
|입적=1992&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대성사(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평리 18) &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대성사에서 오직 수행에 전념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3%&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16||개성 출생&lt;br /&gt;
|- &lt;br /&gt;
|1932|| 백양사에서 법현(法玄)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 &lt;br /&gt;
|1933|| 백양사에서 만암(曼庵)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lt;br /&gt;
|-&lt;br /&gt;
|1938|| 백양사 강원 사교 수료 &lt;br /&gt;
|-&lt;br /&gt;
|1954||정혜사에서 만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4|| 대성사 10년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7|| 용암사 3년 결사 성만 &lt;br /&gt;
|-&lt;br /&gt;
|1973|| 대성사 주지 취임 &lt;br /&gt;
|-&lt;br /&gt;
|1978|| 세등선원 3년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81|| 견성암 안거 성만 &lt;br /&gt;
|-&lt;br /&gt;
|1992|| 대성사에서 입적(세수 77세, 법랍 61세)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문 중 : 백양사 &lt;br /&gt;
*수계제자 :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 &lt;br /&gt;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쾌민(快敏)스님은 1916년 10월 28일 지금은 이북 땅인 개성에서 아버지 김석종과 어머니 홍태오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풍이며, 이름은 김쾌민이다. &lt;br /&gt;
스님은 1932년 6월 15일 17세에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거주하였다. 다음해인 1933년 2월 15일 18세에 백양사에서 법현스님을 은사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쾌민스님은 23세 되던 1938년 1월 15일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스승으로 사교과를 수료하였으며,1954년 2월 15일 전주 정혜사에서 만암 대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오직 수행정진에 전념===&lt;br /&gt;
49세 되던 1964년 1월 15일 전남 나주 대성사에서 수선안거를 무려 10년 동안이나 성만하였다. 1967년 1월 15일 전남 화순 용암사 천운선림에서 3년 결사하였으며, 1973년 세수 58세에 대성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대성사는 1948년 세수 59세의 은사스님께서 작은 오두막에 의지하고 계시던 사찰이다. 은사 법현스님은 백양사 만암 노스님을 계사로 도준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다. 그 뒤 법현스님께서는 1950년 남평리 18번지에 법당을 새로 짓고 인근의 많은 신도들에게 포교를 하셨다. 1954년 문하에 쾌민스님과 법선스님을 두셨으며, 함께 도량을 수호하다 1968년 세수 81세로 입적하셨다.당시 상좌이던 쾌민스님은 상좌 다섯 명을 교육시키면서 중창 불사를 하였다. 스님은 1978년 대전 세등선원 송담 큰스님 문하에서 3년 동안 안거를 하였고, 1981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1년 안거를 성만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입적===&lt;br /&gt;
쾌민스님은 1984년 주지직을 상좌 현정스님에게 맡기고 오직 수행 정진에 전념하다가 1992년 6월 19일 오전 8시 입적에 드니, 세수 77세요, 법랍 61세였다. &lt;br /&gt;
스님이 평생 수행 정진하였던 대성사는 그 뒤 1987년 현 주지인 현정스님이 부처님 사리탑을 세웠고, 2년 뒤에는 단층 법당을 지었으며, 1993년부터 법당 중창 불사를 시작해 2층 법당을 증축하였다.&lt;br /&gt;
대성사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깨끗한 도량으로서 쾌민스님의 후학들이 스님의 유지를 이어 불법수호(佛法守護)에 앞장서고 있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정(玄定)·경신(敬信)·유정·명신(明信)·원정스님 등이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 대성사&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09.&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본항목 || || 쾌민스님(快敏, 1916~1992)|| 快敏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쾌민스님(快敏,_1916生,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법현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장성 백양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만암(曼庵) 스님|만암(曼庵)스님(1876~1957;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lt;br /&gt;
&lt;br /&gt;
| [[쾌민스님(快敏, 1916生, 비구니) | 쾌민(快敏)스님]] || [[전남 대성사]]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D%98%9C%EC%A3%BC%EC%8A%A4%EB%8B%98(%E6%85%A7%E7%8F%A0,_1925%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5</id>
		<title>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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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4T07:42: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혜주(慧珠)스님&lt;br /&gt;
|사진= 568 혜주(慧珠).jpg&lt;br /&gt;
|법명=혜주(慧珠)&lt;br /&gt;
|속명=배석남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25.4.29&lt;br /&gt;
|출가= 1959년&lt;br /&gt;
|입적=2004.9.4.&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회룡사(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혜주(慧珠)스님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회룡사 주지를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25|| 서울 출생 &lt;br /&gt;
|-&lt;br /&gt;
|1939|| 일본 복강현국민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43|| 복강 소창시 적십자간호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59|| 회룡사에서 도준(道準)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니계 수지 &lt;br /&gt;
|-    &lt;br /&gt;
|1963|| 석농스님에게 사집 수료&lt;br /&gt;
|-&lt;br /&gt;
|1966||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광동학원 이사 &lt;br /&gt;
|-&lt;br /&gt;
|1974|| 광동여고 설립&lt;br /&gt;
|-&lt;br /&gt;
|1981|| 회룡사 주지&lt;br /&gt;
|-&lt;br /&gt;
|1984~1998|| 자비유치원 설립 및 원장 취임&lt;br /&gt;
|-&lt;br /&gt;
|1999|| 자비장학재단 설립 및 이사장 취임&lt;br /&gt;
|-&lt;br /&gt;
|2000~2004|| 회룡사 회주&lt;br /&gt;
|-&lt;br /&gt;
|2004.9|| 회룡사에서 입적(세수 79세, 법랍 45세)               &lt;br /&gt;
|}&lt;br /&gt;
        &lt;br /&gt;
* 문중 : 법기문중 처금계통 청룡사계열 제 10대손 (수행담록에는 ‘청룡’이라고 나와 있음)&lt;br /&gt;
* 생활신조 : 승려로서 내가 아는 만큼 전달하자.&lt;br /&gt;
* 상훈 : 봉선사 감사패(1997) 외 다수&lt;br /&gt;
* 수계제자 :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혜주(慧珠)스님은 1925년 4월 29일 서울 뚝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은 배석남이다. 서울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장한 스님은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에 일본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다가 세수 20세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lt;br /&gt;
&lt;br /&gt;
===6·25전쟁 때 간호사로 근무하다===&lt;br /&gt;
스님은 6·25전쟁 때 대구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 동산병원에서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을 하였다. 당시에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간호사로 근무를 하려면 많은 공부와 실습이 뒤따르지만 그때는 경험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채용할 때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본에서 적십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 근무 경력까지 있는 스님은 물어볼 것도 없이 채용되었다. &lt;br /&gt;
스님은 군인을 돌보는 야전병원이 아닌 민사처병원으로 발령을 받아 홍천, 원주, 춘천 등에서 1년 정도 근무를 하였다. 전쟁 중이어서 병원 시설은 형편없을 만큼 열악하였다. &lt;br /&gt;
당시 시골에는 피난을 가지 않고 인근 산에 굴을 파고 들어가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향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주민들의 그런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아군은 사방으로 폭격을 하였고, 사람들은 굴속에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지내다가 원인 모를 이상한 병에 걸려 죽는 일이 빈번했다. &lt;br /&gt;
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한 무리씩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도 흔했다. 미군은 허물어진 집을 수리하여 임시 고아원이나 피난민 수용소로 만들었는데, 목사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여 그들에게 운영을 일임했다. &lt;br /&gt;
그러나 미군들이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음식을 제공해주면 정작 목사들은 고아들에게는 10분의 1도 주지 않고 밤에 몰래 민간인들에게 음식을 팔아 자신의 배불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스님은 그런 목사들의 행동을 보고 기독교를 불신하게 되었다. &lt;br /&gt;
야전병원이 폭격을 맞으면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파편이 몸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며 이곳저곳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이런 사람들은 트럭에 실어 춘천으로 보내 기본 응급치료를 한 후 후방인 원주로 보냈다. 아비지옥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전쟁의 참혹함은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았다. 스님은 사지가 마치 나뭇가지 잘리듯 잘려나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보기가 괴로웠다. 1952년의 일이었다. &lt;br /&gt;
추운 피난 수용소에서 간호사들은 하루 종일 예방주사를 놓느라 무척 바빴다. 피난민들은 여러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뼈에 가죽을 입혀놓은 상태와 다름없었다. 주사 바늘을 꽂으면 바늘이 푹 꺼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처참한 광경에 스님의 가슴은 미어졌고, 그즈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출가===&lt;br /&gt;
이처럼 사회봉사 활동은 물론 재가 신도로서 모범적인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스님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껍데기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홀연한 깨달음이 들자 한순간에 세간의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죽으면 몸은 땅속으로 들어가지만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태어났다 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은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lt;br /&gt;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2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님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해 1959년 도봉산 회룡사로 향했다. 회룡사 노스님께 자신의 의문을 여쭈었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바로 그 문제를 우리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lt;br /&gt;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 인생을 알기 위한 공부!’라는 일언지하에 스님은 바로 마음을 정리하고 세속의 인연을 끊었다. &lt;br /&gt;
당시 스님은 영등포에서 1,5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많은 친구들에게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스님은 사업 정리와 자금 회수 등의 문제를 손위 언니께 부탁한다는 편지를 써두고 가족들도 모르게 출가를 하였다. &lt;br /&gt;
세수 35세 되던 해인 1959년 3월, 스님은 의정부 회룡사에서 도준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삭발은 몇 달 후인 7월 12일에 하였는데, 노스님께서 가장 좋은 날이라고 정해주신 날이었다. &lt;br /&gt;
스님은 삭발한 그 다음해, 회룡사를 사찰 명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lt;br /&gt;
출가를 한 후 스님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수덕사에 주석하시던 일타스님의 누님인 응민스님께서 혜주스님을 위해 절을 하나 얻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lt;br /&gt;
스님은 자신이 수행을 한다는 생각과 머지않아 자신의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도 알게 되리라는 확신과 기쁨으로 신심이 하늘 끝까지 뻗쳐올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과 부딪치고 살면서 실망도 많았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은사이신 도준스님===&lt;br /&gt;
회룡사는 전쟁 당시 후퇴하던 미군들이 불을 내서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터였는데, 1953년에 은사스님이 오셔서 불사를 이룩해놓은 절이다. &lt;br /&gt;
은사스님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려워 석굴암의 복천스님께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회룡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는 미군들에게 원조를 요청해 기와나 목재 등의 자재를 지원받은 덕분에 마침내 44평의 절을 세우게 되었다. 건물 하나로 불공과 참선, 주무시는 것까지 다 해결하였다. &lt;br /&gt;
은사스님은 회룡사를 불사할 당시 미송의 목재로 지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되다 보니 모두 썩어서 붕괴되기 직전이라 근래에 다시 뜯어서 개축을 했고, 개축할 당시 스님들은 선방 운영을 2년 동안 하지 못했다. &lt;br /&gt;
요즘의 행자 기간은 절차가 간단하고 시간도 짧지만 예전의 행자 시절은 해야 할 일이 끝이 없고 절차도 복잡하며 시일도 길었다. 지금에 와서 행자 생활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무척 어려웠다. 회룡사부터 지금의 병무청 자리인 의정부까지 이어진 땅이 모두 스님들의 논이었고, 하루에 두 번씩 직접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는 등 무려 10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지금의 광동여자고등학교는 훗날 그 논을 팔아 세운 것이다.&lt;br /&gt;
&lt;br /&gt;
===수행과 수학===&lt;br /&gt;
스님이 회룡사에 온 지 이제 40년이 되었다. 그동안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비록 힘은 들었지만 행자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행자 시절에 스님은 ‘해야 할 일이나 힘든 것이 곧 수행이고, 생전 안 해본 일도 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도보로 왕복하면서 농사를 짓고, 염불을 익혔다. 참선도 이때 기초를 잡았을 정도로 부지런히 익히고 닦으며 살았다. &lt;br /&gt;
1963년에는 전강스님이 쌍룡사에 오셔서 선방을 열었다. 스님은 참회 기도를 하러 30일 동안 매일 같이 쌍룡사에 갔다. 차를 타면 지척의 거리지만 그때는 그 먼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은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렇게 참회 기도를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lt;br /&gt;
관해스님이 행자로 왔을 즈음의 일이다. 혜주스님은 호롱불을 켜놓고 다른 스님들과 함께 참선을 하면서 스님들이 조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키가 큰 어떤 스님이 참선을 하면서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스님 같아 보여서 한편으로는 피곤해서 그러시겠지 하며 이해를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좋은 도량에서 계속 졸 고 계시니 조금은 얄미웠다. 그러나 피곤을 무릅쓰고 정진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고 거룩하게 느껴져 혜주스님은 환희심이 났다. 대중 들은 37일간 계속 용맹정진을 하였다. &lt;br /&gt;
예전에는 큰 길에서 회룡사까지 오려면 좁고 험한 길을 걸어 올라와야 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신도들은 매월 열리는 법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고 드물게 이따금씩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스님은 종종 신도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기도를 해주곤 하였다. &lt;br /&gt;
&lt;br /&gt;
[[File:568-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6.]]&lt;br /&gt;
&lt;br /&gt;
그 당시는 하루 세끼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소금 덩어리에 배추를 넣다시피 하여 일부러 짜게 절여 김치 한 조각이라도 아껴서 먹고, 국은 거의 우거지국이었으며, 겨울에는 동치미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lt;br /&gt;
속가에서 넉넉히 살다가 갑자기 궁색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지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스님은 애당초 음식 욕심이 없는 분이었고, 먹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은 다 이겨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lt;br /&gt;
그러나 스님도 속퇴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선배 스님들이 불법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욕을 한다든지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혜주스님은 ‘저런 분들을 선배로 모시면서 구태여 이런 세계에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갈등을 두 번이나 했었다. &lt;br /&gt;
스님은 이런 일을 극복하기 위해 효봉 큰스님과 청담 큰스님, 경봉 큰스님 등을 찾아다니면서 자문을 받았지만 분명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lt;br /&gt;
&lt;br /&gt;
[[File:568-02.jpg|섬네일|회룡사 경내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7]]&lt;br /&gt;
&lt;br /&gt;
그러나 스님의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해주신 분은 거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lt;br /&gt;
책 한 권도 제대로 빌려보기가 어려웠고 강원에서도 한문 경전으로 어렵게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스님은 한문을 잘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만약 한문을 몰랐으면 중노릇도 못했을 것이라면서 요즘도 한문 배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lt;br /&gt;
‘때론 글귀를 보고도 중노릇을 하는 법’이라고 말씀하는 스님은 발심을 스승으로 삼고, 도봉산을 화두로 삼았다. &lt;br /&gt;
스님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lt;br /&gt;
‘도봉산 산 속에 큰 보물이 있어 그 보물(자기 것)을 찾으려고 왔는데, 앞에서만 뒤적거리다가 없다고 속상해 하며 돌아가 버리면 그 보물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지 못한다. 그 깊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lt;br /&gt;
혜주스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고, ‘이런 고생쯤이야.’ 하는 확고한 의지로 고비들을 넘겨왔다. 스님은 자신도 중생이다 보니 기대했던 일이 어긋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런 말들을 가슴속에 새기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한다.&lt;br /&gt;
&lt;br /&gt;
===광동여고 설립===&lt;br /&gt;
1966년 세수 42세에 스님이 이사로 취임한 광동학원은 1974년에 현재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설립하였다. 처음 개교할 때는 고등공민학교였고, 그것이 지금의 광동여고의 전신이다. &lt;br /&gt;
&lt;br /&gt;
[[File:568-03.jpg|섬네일|제9회 관인 자비유치원 졸업기념(1993. 2. 13.)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8 ]]    &lt;br /&gt;
&lt;br /&gt;
옛날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다. 스님은 중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고, 불교 신도였던 교장선생님과 승가 행진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스님은 불교 학교라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lt;br /&gt;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지나던 길에 고등공민학교에 법원의 차압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사정을 알아보니 당시 교장이었던 사업가가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학교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lt;br /&gt;
그때가 1971년으로 당시 스님은 법당을 짓느라고 허리가 휠 정도로 애를 쓰고 다녔고, 법당을 짓고 보니 차압당한 고등공민학교를 살릴 돈이 없었다. &lt;br /&gt;
때마침 노스님의 형제뻘 되시는 선학원의 병암스님이 찾아왔다. 혜주스님이 법당을 잘 지었다는 얘기를 듣고 선학원을 다시 짓기 위해 스님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병암스님은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는 선학원의 건물을 잘 지어주면 지금의 광동여고를 외상으로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선학원을 맡아주는 조건으로 광동여고를 다시 설립하게 되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그러나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선학원 건물을 한창 짓고 있는데 선학원의 스님이 동국대학교 총장 선거에 재출마하여 낙선을 한 것이다. &lt;br /&gt;
사방에서 돈줄이 막혀 하는 수 없이 스님은 운허스님을 찾아가 광동여고가 위치한 산을 팔자고 제의를 하였다. 광동여고 재정이 어려워 교사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니 산을 팔아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자.’고 제의한 것이다. 운허스님의 허락을 받아낸 후 스님은 학교 운영에 힘을 쓰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File:568-04.jpg|섬네일|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때.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39]]&lt;br /&gt;
&lt;br /&gt;
당시 스님은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5년에 걸쳐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학교에 몸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lt;br /&gt;
광동여고는 설립 당시 11개의 교실에 불과했지만 후에 도시개발이 되어 증축을 하여 현재의 5층 건물이 되었다. 실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lt;br /&gt;
1962년 세수 38세에 스님은 운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그 다음해에 이석동 강사스님께 사집과를 수학하였다. 그 후 세수 42세 되던 해인 1966년 자운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스님은 1959~1963년에 이르는 동안 회룡사 강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때 스님과 함께 강원에서 공부했던 분 가운데 한 분을 제외하고 아쉽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속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룡사 강원의 강사로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당시로는 드문 학력을 갖춘 대처승이 계셨고, 그 후임으로 역시 대처승인 일연스님이 계셨다. &lt;br /&gt;
스님의 은사스님은 입방선 시간을 반드시 지키게 했다. 농사를 하고 있는 중간에도 입선 시간을 지켜야 했으며, 겨울에는 참선에 몰두하며 말 그대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혹여라도 혜주스님이 어영부영 하다가 입선을 못 드리면 며칠씩 화를 내시며 스님을 나무라셨다. &lt;br /&gt;
1971년에 법당을 짓고 스님이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입원을 하여 꼼짝을 못하자 이때부터 은사 스님의 엄한 성품이 약간은 수그러들었다. 그 정도로 입선을 강조하던 은사스님이셨다. &lt;br /&gt;
&lt;br /&gt;
[[File:568-05.jpg|섬네일|회룡사 5층 석탑, 경기도 문화재 자료 168호.신라 선덕여왕 6년 (632년)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탑이다.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0]]&lt;br /&gt;
&lt;br /&gt;
법당을 지은 뒤에 노스님께서 돌아가시고, 그 직후에는 디스크가 생기는 등 여느 해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다. &lt;br /&gt;
은사스님은 구족계를 청룡사에서, 혜주스님은 해인사에서 받았다. 은사스님은 6·25전쟁 전에 성도원이라는 양로원을 운영하셨고, 전시에는 노인들을 모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lt;br /&gt;
&lt;br /&gt;
===회룡사 주지===&lt;br /&gt;
혜주스님은 1964년에 회룡사 총무 소임을 맡았고, 1981년에는 주지로 취임하였다. 사찰의 규모가 크다 보니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커서 일이 끊임없이 많다. 또한 스님은 의정부에 사는 비구니스님들의 모임인 자비회를 조직하였고,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lt;br /&gt;
&lt;br /&gt;
==자비회==&lt;br /&gt;
자비회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1974년 신도들로부터 장학기금을 모금하고 스님들도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발생되는 이자로 일 년에 한두 명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지방에서는 1억이 되면 재단 설립이 가능하여 자비회 장학재단은 현재 법인으로 정식 등록된 상태이다. &lt;br /&gt;
혜주스님은 1982년 자비회관을 짓기 시작하여 1983년에 완공을 하였고, 1984년~1996년까지 자비유치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상좌스님을 동국대학교 아동학과에 보내 졸업하게 하여 원장을 맡기기도 하였으며 크게 마음을 열 때는 불사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였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청룡사 노스님이 기도를 다닐 때 꼭 혜주스님과 동행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룡사는 강원과 선방을 겸하고 있을 때였는데, 노스님은 혜주스님이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을 알고 같이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lt;br /&gt;
노스님이 기도를 다니신 연유는, 어렸을 때부터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갑이 지나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은 노스님을 금강산에 있는 절에 업어다주었는데, 노스님은 90세가 넘어서도 정정하셨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남해 보리암에 간 적도 있다. 밤새도록 기차를 타고 아침에 여수에 도착해서 남해 가는 배를 타고 그 다음에 다시 남해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마다않고 노스님은 그 곳에서 기도를 하셨다. 이때 노스님은 남해 보리암의 주지스님을 위해 옷을 꼭 한 벌씩 가져가곤 하셨다. 노스님이 직접 광목 한 필을 끊어다가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옷이었다. 노스님은 화장실 가는 옷도 따로 있었으며 법당에 가실 때는 그냥 가지 않고 목욕재계를 한 후에 가셨다. 노스님을 시봉하는 동안 혜주스님은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lt;br /&gt;
&lt;br /&gt;
==노인복지시설==&lt;br /&gt;
스님은 복지시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출가 후 열심히 수행정진 하면서 농사도 짓고 불전에 기도도 하고 참선 공부도 했지만 세월만 가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열심히 공부를 해도 부처가 되지 못하니 시은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lt;br /&gt;
이때 의정부 회관 옆에 있는 동회 사무실을 시에서 불하받아 건물을 허물고 수리를 하여 1층은 무료병원, 2층은 무료급식소로 활용하는 노인 복지시설을 만들었다. 의정부 경찰서에서 경승 15명을 선출하여 경찰서 안에 법당을 만들어 접대를 한 적도 있다.&lt;br /&gt;
&lt;br /&gt;
==경승제도== &lt;br /&gt;
우리나라는 경승제도가 전무한 실정이라 신도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서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선출된 15명의 경찰들로 경승제도를 만든 것이다. 신도들을 위한 일종의 복지제도인 셈이다. 경승제도를 만든 후에는 법회를 시작하였다. &lt;br /&gt;
스님은 항상 검소한 생활과 진실한 모습으로 수행 실천에 앞장섰으며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만족감을 느끼고, 물질과 명리에도 초연하였다. 스님은 ‘마음으로는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형편상으로는 그게 잘 안되어 아쉽다.’고 하였다. &lt;br /&gt;
‘바다는 사람의 힘으로 메울 수 있지만 사람의 욕심은 채울 수 없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밖에서는 구할 수 없고 다만 마음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lt;br /&gt;
혜주스님은 2004년 9월 회룡사에서 세수 79세, 법랍 45세로 사바의 인연을 다하였다. &lt;br /&gt;
수계제자인 성견·성타·종일·성범·성오·성진·성파·성원·성엽·성환스님 등이 스님의 유훈을 따르고 있다. &lt;br /&gt;
&lt;br /&gt;
==회룡사==&lt;br /&gt;
&lt;br /&gt;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Hoeryongsa   &lt;br /&gt;
&lt;br /&gt;
&lt;br /&gt;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하였다. 936년(경순왕 10)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070년(문종 24)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삼창하였다.&lt;br /&gt;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1384년(우왕 10)에 무학(無學)이 중창을 한 뒤이며, 여기에는 이성계(李成桂)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선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lt;br /&gt;
그 뒤 이성계가 동북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1403년(태종 3) 태조가 끈질긴 함흥차사(咸興差使)들의 노력에 의하여 노여움을 풀고 귀경한 뒤, 이 절로 무학을 찾아왔으므로 무학이 회란용가(回鸞龍駕)를 기뻐하여 회룡사라 하였다고도 한다.&lt;br /&gt;
&amp;lt;/pre&amp;gt;&lt;br /&gt;
1630년(인조 8)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4년부터 비구니 도준(道準)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삼성각·선실(禪室)·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수조(水槽)와 떡돌, 반파된 석탑 등이 있다.&lt;br /&gt;
이 중 오층석탑은 이 절의 창건주로 전하는 의상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전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높이 3.2m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lt;br /&gt;
부속 암자인 석굴암은 출입구가 절 아래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된 암자로서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선방(禪房)·요사채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새겨진 글씨들은 김구(金九)의 휘호이다. 그리고 옛날 무학이 이성계의 창업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무학굴은 현재 찾을 수가 없다.&lt;br /&gt;
* 출처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5487&lt;br /&gt;
&lt;br /&gt;
[[File:회룡사전경혜주.png|섬네일|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806]]&lt;br /&gt;
&lt;br /&gt;
==참고자료==&lt;br /&gt;
&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 32~41.&lt;br /&gt;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568.&lt;br /&gt;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157, 363&lt;br /&gt;
&lt;br /&gt;
===스님에 관한 책과 인터넷 게시물===&lt;br /&gt;
* 월간해인, &amp;quot;북한산 관통땐 지역주민 위기&amp;quot; (2003년)&lt;br /&gt;
http://haein.or.kr/bbs/board.php?bo_table=free&amp;amp;wr_id=95&amp;amp;page=50&amp;amp;sfl=&amp;amp;stx=&amp;amp;sst=wr_datetime&amp;amp;sod=desc&amp;amp;sop=and&amp;amp;page=50&lt;br /&gt;
* 미디어조계사, [법회/행사] 북한산 살리기 생명법회 (2003년)&lt;br /&gt;
http://m.jogyesa.kr/news/articleView.html?idxno=450&lt;br /&gt;
* 법보신문, 회룡사 회주 혜주 스님 (2004년)&lt;br /&gt;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39&lt;br /&gt;
* 고산신문,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찰, 회룡사를 소개합니다 (2021년)&lt;br /&gt;
http://www.gosa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0&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 혜주(慧珠)스님]] || 본항목 ||  || 혜주스님(慧珠, 1925~2004)|| 慧珠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 혜주스님(慧珠, _1925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법기]]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도준(道準)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회룡사]]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도준(道準)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자운(慈雲)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회룡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혜주스님(慧珠, 1925生, 비구니)| 혜주(慧珠)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4</id>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4"/>
		<updated>2022-07-04T07:33: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대오(大悟)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포명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월하(月下)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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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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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4T07:31:3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미타사]]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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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천진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2</id>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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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4T07:21: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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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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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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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천진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1</id>
		<title>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E%AC%ED%98%B8%EC%8A%A4%EB%8B%98(%E5%AE%B0%E6%AF%AB,_1938%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1"/>
		<updated>2022-07-04T07:19:1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참고문헌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재호(宰毫)스님&lt;br /&gt;
|사진= 404 재호(宰毫).jpg&lt;br /&gt;
|법명=재호(宰毫)&lt;br /&gt;
|속명=양재순(梁在順) &lt;br /&gt;
|본관=동래&lt;br /&gt;
|출생=1938. 7. 5&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미타사(서울시 성동구 옥수2동 395)&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옥수동 미타사로 출가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하신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미타사&lt;br /&gt;
*수행지침 :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lt;br /&gt;
*특 기 : 범패, 독서&lt;br /&gt;
*수계제자 : 철은·광후 &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38|| 경기 양평 출생 &lt;br /&gt;
|-&lt;br /&gt;
|1943|| 서당에서 한학 수학&lt;br /&gt;
|-&lt;br /&gt;
|1944||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에서 대오(大悟)스님을 은사로 출가&lt;br /&gt;
|-&lt;br /&gt;
|1955|| 미타사에서 포명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57|| 미타사 강원에서 범패 이수&lt;br /&gt;
|-&lt;br /&gt;
|1964|| 미타사 하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65||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68|| 미타사 강원 사교 수료&lt;br /&gt;
|-&lt;br /&gt;
|1971~1979|| 미타사 총무&lt;br /&gt;
|-&lt;br /&gt;
|1978|| 미타사 강원 졸업&lt;br /&gt;
|-&lt;br /&gt;
|1979~1986|| 미타사 재무&lt;br /&gt;
|-&lt;br /&gt;
|1981||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대교 이수&lt;br /&gt;
|-&lt;br /&gt;
|1982~1990|| 초등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 청담종합고등학교 졸업&lt;br /&gt;
|-&lt;br /&gt;
|1992~1998|| 미타사 주지&lt;br /&gt;
|-&lt;br /&gt;
|1995~2004|| 현재 미타사 주석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재호(宰毫)스님은 1938년 7월 5일 경기도 양평의 조용한 시골에서 아버지 양신환과 어머니 정을혜 사이의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이며, 이름은 양재순이다. &lt;br /&gt;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이듬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lt;br /&gt;
어머니의 죽음을 본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는 ‘사람은 왜 나고 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1944년 목련이 만발한 4월 중순에 아버지의 인도로 옥수동 미타사 금보암으로 출가하여 불문과 인연을 맺었다. &lt;br /&gt;
&amp;lt;/pre&amp;gt;&lt;br /&gt;
스님은 지금도 그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미타사에 데려다준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또한 부처님께 감사하고 있다. &lt;br /&gt;
미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스님은 18세 되던 1955년에 포명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20세에는 미타사 강원에서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를 이수하였다. &lt;br /&gt;
1964년 미타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난 후 다음해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월하 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lt;br /&gt;
31세에 미타사 강원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1971년부터 1986년까지 미타사 총무와 미타사 재무를 역임하였다. 44세 되던 1981년에 경국사 법보연구원에서 지관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일대시교의 최고봉인 대교를 수학할 기회를 가졌다.&lt;br /&gt;
&lt;br /&gt;
===방일(放逸)하지 않는 가일 수행=== &lt;br /&gt;
스님은 1982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만학의 꿈을 안고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거쳐 청담중학교와 청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lt;br /&gt;
55세 되던 1992년에 미타사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 4월까지 6년 동안 소임을 다하였다. 2004년 현재 재호스님은 미타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정진 중이다. &lt;br /&gt;
수계제자로는 철은·광후스님 등이 있다. &lt;br /&gt;
&lt;br /&gt;
==옥수동 미타사==&lt;br /&gt;
미타사는 888년(진성여왕 2년) 현재의 금호동 골짜기에 비구니 대원(大願)스님이 창건하였고, 1115년(예종 10년)에 봉적(奉寂), 만보(萬寶) 두 비구니스님이 지금의 종남산으로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lt;br /&gt;
그러나 19세기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종남산 미타사 약지’ (1943년, 안진호 스님 편찬)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무량수전 초창기(1827년, 순조27년)에 ‘1824년 3월에 대원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년 만에 갑자기 입적하여서 그 상좌인 환신스님이 대원스님의 뜻을 이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또 고려 말엽이나 조선 초기 무렵부터 종남산 동쪽 기슭인 현재의 금호동에 있었는데, 그 인근에서 운영되던 왕실의 메주 가마가 자하문 밖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곳에 도적이 들끓게 되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긴 후 이름을 미타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lt;br /&gt;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작은 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절 뒤의 산봉우리가 백 명의 과부가 나타날 상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비구니 사찰을 확장할 곳으로 판단하여 조선 중기에 여러 암자들을 합쳐 하나의 절을 지었고 그 이름을 미타사라 했다고 한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본항목 ||  || 재호스님(宰毫, 1938~19)|| 宰毫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재호스님(宰毫, _1938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문중]]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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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천진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 재호스님(宰毫, 1938生, 비구니) | 재호(宰毫)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0</id>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title=%EC%9D%B8%EC%84%B1%EC%8A%A4%EB%8B%98(%E4%BB%81%E6%88%90,_1901%E7%94%9F,_%EB%B9%84%EA%B5%AC%EB%8B%88)&amp;diff=3820"/>
		<updated>2022-07-04T07:12:3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릴레이션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법기(法起)]]  || ~의 일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정자(淨慈)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지장암]]  || ~에서 출가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한암(漢岩)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석남사]]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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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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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7-04T07:09:2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원혜영: /* 노드 데이터 */&lt;/p&gt;
&lt;hr /&gt;
&lt;div&gt;&amp;lt;indicator name=인명사전&amp;gt;비구니 인명사전&amp;lt;/indicator&amp;gt;&lt;br /&gt;
{{인물정보&lt;br /&gt;
|표제=인성(仁成)스님&lt;br /&gt;
|사진= 355 인성(仁成).jpg&lt;br /&gt;
|법명=인성(仁成)&lt;br /&gt;
|속명=서귀순 &lt;br /&gt;
|본관=&lt;br /&gt;
|출생=1901. 3. 12&lt;br /&gt;
|출가= 1944.&lt;br /&gt;
|입적=1989.&lt;br /&gt;
|종단=대한불교조계종&lt;br /&gt;
|사찰=석남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lt;br /&gt;
}}&lt;br /&gt;
&lt;br /&gt;
==정의==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오대산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석남사에서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수행에 전념한 비구니 스님이다.&lt;br /&gt;
&lt;br /&gt;
==생애==&lt;br /&gt;
&lt;br /&gt;
{| class=&amp;quot;wikitable sortable&amp;quot; style=&amp;quot;vertical-align: middle; text-align: left; background-color: white; width:60%&amp;quot; &lt;br /&gt;
|-&lt;br /&gt;
! 연도 !! 내용&lt;br /&gt;
|-&lt;br /&gt;
|1901|| 전북 정읍 출생&lt;br /&gt;
|- &lt;br /&gt;
|1944||  지장암에서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44~1987 || 지장암, 윤필암, 성주사, 홍제사, 석남사 등에서 안거 성만&lt;br /&gt;
|-&lt;br /&gt;
|1947|| 한암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lt;br /&gt;
|-&lt;br /&gt;
|1987|| 석남사에서 수행 정진&lt;br /&gt;
|-&lt;br /&gt;
|1989|| 석남사에서 입적(세수 89세, 법랍 46세) &lt;br /&gt;
|}&lt;br /&gt;
&lt;br /&gt;
*문 중 : 법기(法起) &lt;br /&gt;
*수행지침 : 철저한 계율사상에 입각한 무소유의 삶과 수행자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살자. &lt;br /&gt;
*수계제자 : 현묵(炫默)·도민(道敏) &lt;br /&gt;
&lt;br /&gt;
==활동 및 공헌==&lt;br /&gt;
===출생===&lt;br /&gt;
&lt;br /&gt;
인성(仁成)스님은 1901년 3월 12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서귀순이다. &lt;br /&gt;
정읍의 큰 부잣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아버지께서 글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글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공부를 하라는 아버지의 성화가 귀찮아서 가출을 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강원도에서 보냈다. &lt;br /&gt;
인성스님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봄, 44세의 나이로 불법을 만나 발심하여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였다. &lt;br /&gt;
한국 비구니계의 큰 맥을 이루는 법기문중(法起門中)의 정자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인성스님은 1944년 10월 15일 월정사에서 한암 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lt;br /&gt;
&lt;br /&gt;
===석남사의 숨은 도인=== &lt;br /&gt;
&lt;br /&gt;
사형사제는 모두 8분으로 석남사의 중창주 인홍스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두 스님은 1957년에 인홍스님이 석남사로 온 이후부터 입적할 때까지 함께 지냈다. &lt;br /&gt;
스님은 출가 후 지장암에서 상주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경북 문경군 사불산의 윤필암에 잠시 머물렀고, 그 후 창원 성주사에서 수행하였다. 이때 현재 석남사 선원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현묵(炫默)스님을 상좌로 두었다. 1952년에 다시 오대산 지장암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1956~1957년까지 태백산 홍제사에서 지냈다. &lt;br /&gt;
각 선원에서 정진할 때 원주 소임을 보며 수행하는 스님들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뒷바라지 하였던 인성스님은 석남사에 온 이후로는 수행에만 전념하였고, 늘 말없이 대중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며 죽비를 놓지 않고 정진하였다.&lt;br /&gt;
&amp;lt;/pre&amp;gt; &lt;br /&gt;
[[File:355-01.jpg||섬네일|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스님은 항상 많은 대중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입적할 때까지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lt;br /&gt;
스님은 아무리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원래 생로병사로 이뤄져 있으니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프면 아픔 그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참고 이겨냈다. 또한 항상 시은(施恩)의 무서움을 강조하였고 무엇이든 근검절약하며 생활하였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돈이라도 받으면 사중으로 돌리거나 다른 스님들에게 주고 당신은 청빈하게 살았다. &lt;br /&gt;
스님은 손상좌인 영운스님을 많이 아꼈다. 오대산 지장암 불사를 마치고 공부 계획을 세워 선원에 정좌한 뒤 손주상좌를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좌복(坐服)에 앉았는데, 비몽사몽 간에 대추나무 주장자가 당신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길로 바로 석남사에 내려와서 손주상좌를 보았는데, 그 스님이 바로 영운스님이었다. 손상좌 영운스님은 은사스님인 현묵스님의 뒤를 이어 제방의 선원을 다니며 공부하다가 은해사 백흥암에서 약 20여 년간 죽비를 놓지 않았으며, 지금은 석남사에서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lt;br /&gt;
&lt;br /&gt;
===입적=== &lt;br /&gt;
인성스님은 평생 시봉 받기를 원치 않았다. 입적하기 3일 전 까지도 손수 빨래와 방 청소를 할 정도였다. 거동이 불편한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시자가 공양을 가져다 드렸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허락하였다. 시자가 걱정이 되어 공양 시간 외에 스님에게 잠시 들르면,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왜 출가를 했느냐? 누구 시봉하려고 온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수행하여 청정 자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다. 너도 공부해야 하고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방에 오면 서로의 공부에 방해가 되니 오지 마라.” 하며 그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여 선방에 올라가지 못할 때는 당신 방에서 오대산 문수동자를 모셔놓고 입·방선 죽비를 치며 공부하였다.&lt;br /&gt;
스님은 석남사에 온 날부터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 노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법당 앞마당을 비질하였다. 인성스님은 삶 그 자체가 말없는 실천이었으며 살아있는 계율이요,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lt;br /&gt;
입적 일주일 전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고 준비를 하던 인성스님은 1989년 12월 6일 석남사에서 고요히 입적에 들었는데, 스님의 세수 89세, 법랍 46세였다. &lt;br /&gt;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석남사 유나를 맡고 있는 현묵(炫默)스님과 도민(道敏)스님이 있으며, 손상좌인 석남사 주지 영운스님 등이 그 유지를 받들고 있다.&lt;br /&gt;
==참고문헌==&lt;br /&gt;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lt;br /&gt;
&lt;br /&gt;
==시맨틱 데이터== &lt;br /&gt;
&lt;br /&gt;
===노드 데이터===&lt;br /&gt;
&lt;br /&gt;
{|class=&amp;quot;wikitable&amp;quot; style=&amp;quot;text-align:left&amp;quot;&lt;br /&gt;
! style=&amp;quot;width:150px&amp;quot; |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본항목 ||  || 인성스님(仁成, 1901~1989)|| 仁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인성스님(仁成, _1901生, _비구니)&lt;br /&gt;
|-&lt;br /&gt;
|} &lt;br /&gt;
※ 범례&lt;br /&gt;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lt;br /&gt;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lt;br /&gt;
&lt;br /&gt;
===릴레이션 데이터===&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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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amp;quot;width:120px&amp;quot; | 항목1 || style=&amp;quot;width:240px&amp;quot; | 항목2 || style=&amp;quot;width:180px&amp;quot; | 관계&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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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스님]] || ~의 제자이다&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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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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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천진암]]  ||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기린선원]] || ~을 중창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백암선원]] || ~을 창건하다&lt;br /&gt;
|-&lt;br /&gt;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선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  [[인성스님(仁成, 1901生, 비구니) | 인성(仁成)스님]] || [[강원]] || ~을 설립하다&lt;br /&gt;
|}&lt;br /&gt;
&lt;br /&gt;
==지도==&lt;/div&gt;</summary>
		<author><name>원혜영</name></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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