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와 정조의 효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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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일 (월) 13:15 판

주요 이야기

조선 정조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고 한동안 자식이 없어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1789년 화성 융릉(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성으로 이전하였고, 그 다음해인 1790년에 왕자(조선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왕자의 탄생이 융건릉 조성으로 인해 하늘이 주신 은혜라 생각했다. 때문에 1777년 폐지했던 원찰(願刹:소원이나 죽은 자를 위한 병복을 비는 절)제도를 부활시켜 융릉을 관리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절인 화성 용주사를 고려시대 길양사가 있던 자리에 창건한다.(1790년) (고려시대부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문화재로 국보 제12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범종인 화성 용주사 동종이 있다.)

화성 용주사에서 부처가 부모의 은혜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그것을 그린 그림을 모아 '불설대부모은중경 목판'를 제작한다.

불설대부모은중경 목판은 보물 제17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림은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이 목판으로 출간한 불설부대부모은중경 언해 중 하나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해왔던 정조가 절을 짓고, 불경을 편찬한 것은 정조의 불교관에 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정조 본인이 가진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 때문일 뿐만 아니라, 유교의 중요 가치 중 하나인 '효(孝)'를 백성에게 보다 친숙했던 불교를 통해 백성들에게도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유교에서 아버지-임금으로 확장되는 효(孝)의 개념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요 노드

  • 조선 정조 : 조선의 왕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을 짓고, 그를 기리기 위한 화성 용주사를 지었다.
  • 화성 융릉 :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모신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
  • 화성 용주사 :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을 관리하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정조가 지은 절이다.
  • 불설부대부모은중경 목판 : 부모의 은혜를 주제로 한 그림을 모아 만든 불경 목판으로, 여러 판본이 있으나 여기서는 화성 용주사에서 편찬한 것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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