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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867 정조]는 수원 화성성역(華城城役)을 ‘갑자년구상’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행하였음을 만년에 밝힌 바가 있다. 이 ‘갑자년구상’이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476 임오화변] 당시에 정조의 생부였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793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용서하고, 자신은 세자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943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어머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742 혜경궁 홍씨]를 새로이 건설한 화성으로 모시고 가서 순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을 할 수 있도록 명분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디 수원이라는 도시는 전통적으로 무향(武鄕). 즉,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강했던 도시었기에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조는 수원에 유학적 전통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정조는 조선 전기 공서린이 수원 일대에 낙향한 후 강학했던 사실과 그가 공자의 후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 수원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도시로 육성하는 좋은 방안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867 정조]는 수원 화성성역(華城城役)을 ‘갑자년구상’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행하였음을 만년에 밝힌 바가 있다. 이 ‘갑자년구상’이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5476 임오화변] 당시에 정조의 생부였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793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용서하고, 자신은 세자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943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어머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742 혜경궁 홍씨]를 새로이 건설한 화성으로 모시고 가서 순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을 할 수 있도록 명분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디 수원이라는 도시는 전통적으로 무향(武鄕). 즉,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강했던 도시었기에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조는 수원에 유학적 전통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정조는 조선 전기 공서린이 수원 일대에 낙향한 후 강학했던 사실과 그가 공자의 후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 수원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도시로 육성하는 좋은 방안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 ||
− | 수원부에 공씨(孔氏) 집성촌의 존재를 확인한 정조는 청나라에서 공씨 족보를 들여오도록 명하는 한편<ref>『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6년 8월 21일 정해(丁亥), “以先聖後裔錄用事、詢于大臣卿宰三司之臣、仍命赴燕書狀官、以閣臣差遣、求孔氏族譜。” 이날의 기록은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奎 5932)라는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졌다.</ref>, 공서린의 9대손인 공윤항(孔胤恒, 1769 ~ ?)을 등용함과 동시에 공서린에게 시호(諡號)를 추숭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 + | 수원부에 공씨(孔氏) 집성촌의 존재를 확인한 정조는 청나라에서 공씨 족보를 들여오도록 명하는 한편<ref>『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6년 8월 21일 정해(丁亥), “以先聖後裔錄用事、詢于大臣卿宰三司之臣、仍命赴燕書狀官、以閣臣差遣、求孔氏族譜。” 이날의 기록은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奎 5932)라는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졌다.</ref>, 공서린의 9대손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408 공윤항(孔胤恒, 1769 ~ ?)]을 등용함과 동시에 공서린에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521 시호(諡號)]를 추숭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
이후 정조는 경기감사로 하여금 수원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 유지(聖廟遺址)의 도상을 그려 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후손을 찾아보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공서린의 직계후손 공윤도(孔胤道)가 경상도 선산(善山)에 살고 있는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446 시장(諡狀)]의 일로 곧 상경할 것이며, 공덕일(孔德一)의 6대손 공윤동(孔胤東)을 통해 직계자손을 확인하였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리나라에 온 공씨는 마땅히 공서린을 정통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참봉으로 특제된 뒤 불사(不仕)한 공덕일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파 후손을 즉시 수용하고, 이후에는 양파(兩派) 후손 가운데서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중국 연성공(衍聖公)<ref>공자의 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로서 서한(西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1년(서기 1)에 예교(禮敎)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공자의 후예를 포성후(褒成侯)에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각 왕조를 거치면서 봉호의 명칭과 직위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송나라 인종(仁宗) 지화(至和) 2년(1055)에 이르러 '연성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연성공'의 직위를 취소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공자의 77대 장손인 공덕성(孔德成)이 마지막 연성공이자 최초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되었는데, 2008년에 그가 죽음으로 인해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ref>의 세작(世爵)을 모방하여 만일 문관, 무관, 음관 가운데 공씨가 한 명도 없을 경우 양파 가운데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관직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 이후 정조는 경기감사로 하여금 수원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 유지(聖廟遺址)의 도상을 그려 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후손을 찾아보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공서린의 직계후손 공윤도(孔胤道)가 경상도 선산(善山)에 살고 있는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446 시장(諡狀)]의 일로 곧 상경할 것이며, 공덕일(孔德一)의 6대손 공윤동(孔胤東)을 통해 직계자손을 확인하였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리나라에 온 공씨는 마땅히 공서린을 정통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참봉으로 특제된 뒤 불사(不仕)한 공덕일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파 후손을 즉시 수용하고, 이후에는 양파(兩派) 후손 가운데서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중국 연성공(衍聖公)<ref>공자의 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로서 서한(西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1년(서기 1)에 예교(禮敎)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공자의 후예를 포성후(褒成侯)에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각 왕조를 거치면서 봉호의 명칭과 직위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송나라 인종(仁宗) 지화(至和) 2년(1055)에 이르러 '연성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연성공'의 직위를 취소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공자의 77대 장손인 공덕성(孔德成)이 마지막 연성공이자 최초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되었는데, 2008년에 그가 죽음으로 인해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ref>의 세작(世爵)을 모방하여 만일 문관, 무관, 음관 가운데 공씨가 한 명도 없을 경우 양파 가운데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관직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 ||
− | 1792년 9월 29일 정조는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의 시호를 내린 후 4일 후에는 궐리사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미 도상형지(圖像形止)를 살펴본 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공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수원에 처음 거처한 것이 읍지(수원읍지)에 실려 있고, 일전에 경기감사에게 도상과 형판을 들이라 하여 보니 과연 기이하게도 궐리의 사우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으며, 세거(世居)한 후예가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건립한 영당이 있다.”'''는 것을 열거하면서 수원에 궐리사를 창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지시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초계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日次) 유생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여 공윤항에게 급제를 내리고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여 반궁(泮宮) 한 바퀴를 돌도록 명했다. 이때 공윤항은 『시전(詩傳)』「주남(周南)」편을 외워 순통(純通)을 받았고, 『서전(書傳)』「요전(堯典)」도 줄줄 잘 외웠다. 정조는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로 급제를 내린다는 율(律)을 적용하여 공윤항을 급제시켰다.<ref>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궐리사(闕里祠) 창건과 독산성(禿山城) 수축」, 신구문화사, 2009.</ref> | + | 1792년 9월 29일 정조는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의 시호를 내린 후 4일 후에는 궐리사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미 도상형지(圖像形止)를 살펴본 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공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수원에 처음 거처한 것이 읍지(수원읍지)에 실려 있고, 일전에 경기감사에게 도상과 형판을 들이라 하여 보니 과연 기이하게도 궐리의 사우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으며, 세거(世居)한 후예가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건립한 영당이 있다.”'''는 것을 열거하면서 수원에 궐리사를 창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지시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초계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日次) 유생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220 전강(殿講)]을 실시하여 공윤항에게 급제를 내리고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여 반궁(泮宮) 한 바퀴를 돌도록 명했다. 이때 공윤항은 『시전(詩傳)』「주남(周南)」편을 외워 순통(純通)을 받았고, 『서전(書傳)』「요전(堯典)」도 줄줄 잘 외웠다. 정조는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로 급제를 내린다는 율(律)을 적용하여 공윤항을 급제시켰다.<ref>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궐리사(闕里祠) 창건과 독산성(禿山城) 수축」, 신구문화사, 2009.</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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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9일 (월) 05:03 기준 최신판
주요 이야기
수원 화성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산 궐리사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이 후학지도를 위해 강학을 하던 장소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남아있다. 공서린은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내다가 낙향 후,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華山)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1]
정조는 수원 화성성역(華城城役)을 ‘갑자년구상’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진행하였음을 만년에 밝힌 바가 있다. 이 ‘갑자년구상’이란 임오화변 당시에 정조의 생부였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용서하고, 자신은 세자인 순조에게 왕위를 넘겨준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새로이 건설한 화성으로 모시고 가서 순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을 할 수 있도록 명분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디 수원이라는 도시는 전통적으로 무향(武鄕). 즉,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강했던 도시었기에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조는 수원에 유학적 전통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정조는 조선 전기 공서린이 수원 일대에 낙향한 후 강학했던 사실과 그가 공자의 후손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 수원을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도시로 육성하는 좋은 방안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수원부에 공씨(孔氏) 집성촌의 존재를 확인한 정조는 청나라에서 공씨 족보를 들여오도록 명하는 한편[2], 공서린의 9대손인 공윤항(孔胤恒, 1769 ~ ?)을 등용함과 동시에 공서린에게 시호(諡號)를 추숭하는 문제를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정조는 경기감사로 하여금 수원 구정촌(九井村)에 있는 성묘 유지(聖廟遺址)의 도상을 그려 오게 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공서린의 직계후손을 찾아보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는 공서린의 직계후손 공윤도(孔胤道)가 경상도 선산(善山)에 살고 있는데 시장(諡狀)의 일로 곧 상경할 것이며, 공덕일(孔德一)의 6대손 공윤동(孔胤東)을 통해 직계자손을 확인하였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정조는 우리나라에 온 공씨는 마땅히 공서린을 정통으로 삼아야 하며, 또한 참봉으로 특제된 뒤 불사(不仕)한 공덕일파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두 파 후손을 즉시 수용하고, 이후에는 양파(兩派) 후손 가운데서 대대로 봉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또 중국 연성공(衍聖公)[3]의 세작(世爵)을 모방하여 만일 문관, 무관, 음관 가운데 공씨가 한 명도 없을 경우 양파 가운데서 융통성 있게 처리하여 관직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1792년 9월 29일 정조는 공서린에게 ‘문헌(文獻)’의 시호를 내린 후 4일 후에는 궐리사를 영건하라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미 도상형지(圖像形止)를 살펴본 후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공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수원에 처음 거처한 것이 읍지(수원읍지)에 실려 있고, 일전에 경기감사에게 도상과 형판을 들이라 하여 보니 과연 기이하게도 궐리의 사우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으며, 세거(世居)한 후예가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건립한 영당이 있다.”는 것을 열거하면서 수원에 궐리사를 창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지시하였다. 그리고 10월 16일에는 초계문신을 직접 시험하는 과강(課講)과 일차(日次) 유생의 전강(殿講)을 실시하여 공윤항에게 급제를 내리고 풍악을 내려 성균관 관원이 그를 인도하여 반궁(泮宮) 한 바퀴를 돌도록 명했다. 이때 공윤항은 『시전(詩傳)』「주남(周南)」편을 외워 순통(純通)을 받았고, 『서전(書傳)』「요전(堯典)」도 줄줄 잘 외웠다. 정조는 양경(兩經)에 합격하면 특별 전교로 급제를 내린다는 율(律)을 적용하여 공윤항을 급제시켰다.[4]
주요 노드
- 수원화성 : 화성은 조선시대 수원부(화성)의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1789년(정조 13) 수원을 팔달산 아래 지금 자리로 옮기고, 5년 후에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에 성곽을 완성하였다.
- 사도세자 : 1735년 영조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여 정조를 낳았다.
- 혜경궁 홍씨 : 홍봉한의 여식이며 동갑내기의 사도세자와 혼인을 하였다. 만년에 저술한 『한중록』은 높은 사료적, 국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 갑자년구상 : 1795년 현륭원을 다녀온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언급한 정조의 계획으로, 사도세자의 국왕추숭과 혜경궁의 친정 남양 홍씨의 신원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다.
- 정조 : 조선후기 제22대(재위: 1776~1800) 왕. 1752년 사도세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 오산 궐리사 : 경기도 오산시에 위치한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공서린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공자의 64대손으로, 그가 강학하던 터에 이후 오산 궐리사가 창건됐다.
- 공윤항 : 공서린의 9대손, 정조에 의해 등용되었다.
- 성묘유지 도상 : 궐리사 창건을 위해 정조가 경기감사로 하여금 해당 지역 일대의 형세를 그려오도록 한 그림.
- 공성탄신연화 : 정조가 공윤항과 문답한 조선의 공자 후손들에 관한 사적과 대우문제 등을 논의한 내용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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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주석
- ↑ 이병휴, 「공서린」,『한국민족문화대백과』,작성일: 1996년.
- ↑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6년 8월 21일 정해(丁亥), “以先聖後裔錄用事、詢于大臣卿宰三司之臣、仍命赴燕書狀官、以閣臣差遣、求孔氏族譜。” 이날의 기록은 『공성탄신연화(孔聖誕辰筵話)』(奎 5932)라는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 ↑ 공자의 직계 후손에게 내려지던 세습봉호로서 서한(西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1년(서기 1)에 예교(禮敎)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공자의 후예를 포성후(褒成侯)에 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후 각 왕조를 거치면서 봉호의 명칭과 직위에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송나라 인종(仁宗) 지화(至和) 2년(1055)에 이르러 '연성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1935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연성공'의 직위를 취소하고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공자의 77대 장손인 공덕성(孔德成)이 마지막 연성공이자 최초의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되었는데, 2008년에 그가 죽음으로 인해 '연성공'이라는 작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 ↑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궐리사(闕里祠) 창건과 독산성(禿山城) 수축」, 신구문화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