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회
라오서(1899-1966)
1899년 중국 베이징에서 만주 족 무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수칭춘舒慶春, 자는 서위舍予. 11살 때 부친을 여의고 빈한한 생활 속에서 베이징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24년, 영국인 에반스의 추천을 받아 런던대학 중국어 교수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디킨스의 소설을 읽고 매료된 그는 유머와 풍자 가득한 리얼리즘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라오장의 철학』 『자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등이 이 시기에 씌어진 대표작이다. 런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는 산둥대학교 교수가 되어 한동안 창작과 교수생활을 병행했다. 『낙타샹즈』는 1936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든 그가 첫 번째로 탈고한 장편소설이자 라오서의 대표작이다. 1946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방미, 그곳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라오서는 중국 공산당의 요청으로 귀국해 문화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1966년 여름 문화혁명이 발생했고, 홍위병에게 가혹한 매질을 당한 다음날 베이징 북서쪽 타이핑 호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78년 복권되면서 그의 삶이 재조명되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금서로 낙인찍혔던 작품들도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목차
서지정보
연재
- 1936년 9월부터 《우주풍》 잡지에 총 24장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당시 연재를 마치고 쓴 글에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만족감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수정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신중국의 성립, 그리고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 속에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게 되었다. 그가 스스로 원했는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소설 《낙타샹즈》는 최초의 발표 당시와는 달리 크게 수정되어 출간되었다. 라오서는 1955년에 나온 이 소설의 수정본에서 자아비판 비슷한 후기를 덧붙였다.
초판
- 출판연도: 1939년 03월
- 출판사: 인간 서점
개정판
- 출판연도: 1955년 01월
- 출판사: 인민 문학 출판사
라오서, 《낙타샹즈》 후기, 1955
이 책은 이미 상당수의 중판을 거듭했다. 이번에 나온 새 판에서는 정결하지 못한 말들과 지리한 서술들을 모두 빼버렸다. 이것은 내가 19년 전 옛날에 쓴 옛 작품이다. 이 책 속에서 나는 비록 고통에 헤매는 인민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좋은 품성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출로를 터주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살아갔으며 억울하게 죽어갔을 뿐이다.
이것은 모두 내가 당시 사회의 캄캄한 절망의 단면만을 보았을 뿐, 혁명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혁명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서 온 것이었다. 당시의 도서 검열이 하도 심해서 나로 하여금 조심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인간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철저하게 할 수 없었다.
책이 나오고 얼마 안 되어 노동 인민들은 나에게 ‘이 책대로라면 우리는 너무 괴롭다. 너무 희망이 없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반응은 나에게 심한 죄책감을 일으켰다.[1]
번역
- 낙타 샹즈은 공은 영어,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러시아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역본
- <루어투어 시앙쯔>상하, 최영애 옮김, 김용옥 풀음, ( 통나무,1986 )
- <낙타 상자>, 류서준 옮김, ( 중앙일보사,1989 )
- <낙타 샹즈>, 심규호·유소영 옮김, ( 황소자리, 2008.02.10 )
- <낙타 상자>,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2019.03.08 )
책 읽기
제목
- 낙타샹즈
목차
일러두기=4 낙타샹즈=5 역자후기=37
줄거리
농촌에서 온 가난한 청년 샹즈는 인력거꾼이 된다. 그는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 인력거를 장만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근면성실하게 일한 끝에 인력거를 산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전쟁통에 손님을 잘못 받았다가 군부대에 붙잡히는 바람에 인력거를 빼앗기고 본인도 감옥에 갇히게 된다. 부대에 있던 낙타 세 마리를 팔아서 다시 인력거를 사겠다는 생각으로 탈출하였는데, 이후로 샹즈에게는 '낙타 샹즈라는 별명을 생기게 된다.
낙타 판 돈을 합해 다시 인력거를 사려고 일하는데, 인력거 대여소의 딸 후뉴가 샹즈에게 관심을 보내온다. 샹즈는 애써 무시했지만, 후니우의 유혹에 넘어가고 후니우가 거짓 임신으로 협박과 회유를 하자 결국 후니우와 결혼하게 된다. 샹즈는 후니우의 자금을 빌어 다시 인력거를 산다.
후니우가 진짜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후니우는 출산 중 죽고 만다. 샹즈도 후니우를 간호하다가 병을 얻는 바람에 몸이 많이 약해져 예전처럼 인력거를 끌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이웃집 샤오푸즈와 살림을 차려 열심히 살려고 하나 샤오푸즈가 사창가에 팔려 갔다가 자살하게 되어 마지막 남은 희망도 사라진다.
본문
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보통 인력거꾼처럼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총명하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만약 그의 환경이 좀더 좋았거나 혹은 좀더 교육을 받았더라면 분명 ‘인력거꾼 집단’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무엇을 하든 자신의 기회를 헛되이 저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인력거를 끌어야 했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능력과 총명을 보여주었다. -본문 10~11쪽
문득 자신이 올해 스물두 살이라는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도시로 온 이후로 생일을 쇤 적도 없었다. 그래 좋다! 오늘 새 인력거를 샀으니 생일로 삼지 뭐! 사람의 생일이자 인력거의 생일이니, 기억하기도 좋지. 게다가 이 인력거야말로 나 자신의 심혈을 퍼부은 것이니 사람과 인력거를 함께 묶는다고 무슨 대수랴! -본문 20쪽
고생쯤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력거를 다시 마련한다는 것은 그저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또다시 여러 해에 걸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과거의 성공이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샹즈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병사들을 원망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우롱하여 이런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본문 30쪽
몸에 걸친 다 떨어진 옷이며 뒤따라오는 세 마리 털 빠진 낙타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몰골 사나운 사람과 짐승, 이렇게 넷이서 그나마 위험 속을 빠져나와 태양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정말 기이한 일이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는 새삼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지 뭐! -본문 45쪽
‘낙타 샹즈’ 이야기가 전해진 이후에도 샹즈는 여전히 잠자코 자기 일만 했고, 그다지 부드럽다거나 상냥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그를 대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금시계를 주웠다고 했고, 어떤 이는 그에게 은화 300원이 공짜로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가장 정확한 소식통이라고 자처하는 이는 고개를 흔들며 샹즈가 서산에서 낙타를 끌고 왔는데, 자그마치 30마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본문 66쪽
이번 일은 다른 일과 전혀 달라 설사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할지라도 좀처럼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 몸에 착 달라붙은 것 같기도 하고 가슴 속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검은 점이 하나 생긴 듯도 했다. 제아무리 그녀를 원망하고 싫어해도 그녀는 이미 그의 마음을 꽉 틀어잡고 있었다. -본문 94쪽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처지가 되었는지 실감났다. 도시 생활이 몇 년짼데, 남은 거라곤 입고 있는 옷 한 벌에 5원뿐이라니. 이불도 빼앗겨버리지 않았는가! 그럼 내일은, 내일은 어떡하지? -본문 179쪽
샹즈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화도 내지 않았다. 마음이란 게 없어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냥 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마시고, 일이 있으면 일하고, 계속 손발을 놀리다보면 하루가 갈 것이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방아를 돌리는 나귀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본문 201쪽
후니우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지금 후니우는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것도 그와 함께 떠나기를 원하면서. 속 깊은 뜻이야 알 수 없지만 후니우는 지금 샹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24쪽
‘아버지’란 이름은 어찌 생각하면 간단하면서도 현묘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그것을 자기가 갖게 되다니, 아무리 무쇠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눈을 감고 ‘아버지’란 말을 떠올려보면 감동받지 않을 수 없으리라. 다른 것은 없어도 괜찮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면 자신의 생명도 그냥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문 297쪽
샹즈가 인력거를 팔았다! 돈이 물처럼 새나갔다. 아무리 해도 샹즈의 손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죽은 사람 장례도 지내야 했고, 사망증명서를 떼는 것조차 돈이 들었다. 샹즈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저 돈만 계속 풀 뿐이었다. -본문 303쪽
노력에서 멀어질수록 자꾸만 자신이 처량해졌다. 전에는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는데, 지금은 자꾸 편안한 것만 생각했다. 바람이 불거나 비만 와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몸이 조금만 쑤셔도 2~3일을 쉬었다. 자기 연민은 곧 이기적인 마음을 불러왔다. 다른 사람에겐 단돈 한 푼도 빌려주질 않고 오직 바람 불고 비오는 날 자신의 생활비로 충당했다. -본문 327쪽
평가
<낙타샹즈>는 베이징에 사는 인력거꾼 샹즈의 비참한 일생을 그린 이 소설은 당대 하층민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샹즈는 먹을 것, 입을 것을 아껴가며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자기 인력거를 샀지만, 전쟁이 나자 그 인력거를 뺏긴다. 병사들에게서 탈출하면서 그는 낙타 세 마리를 가져온다. 그후 샹즈는 '낙타'라는 별명을 갖게된다. 그는 살기 위해 돈을 벌고, 돈을 위해 사상을 받아들이고, 다시 하루의 즐거움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팔며, 순결했던 자기 영혼을 극단의 파국으로 몰아간다. 주인공 샹즈는 인간 곁에 살면서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젖을 주지만 유사시에는 온몸을 식용으로 바쳐야 하는 비운의 동물 낙타와 닮았다.
현대 중국의 대표 작가 라오서가 쓴 장편소설. 성실했던 한 청년의 삶에 스며든 개인주의의 파괴력, 20세기 초 북경 사람들의 일상사, 부패한 권력이 개인의 삶에 가하는 야만적 폭력 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당대 하층민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라오서는 인간 이성의 허약한 이면과 일상 속에 혼재한 폭력의 보편적이고도 추악한 실체를 세련되고 속도감 높은 문장으로 드러낸다. 그 비극성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 삶을 관통하는 것임을 환기시킨다.
반응 및 이해
당대의 반응
- 비평가 서평
- 중국 하층민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포착하여 비판적 리얼리즘 소설
- 한 인력거꾼의 이야기, 부패한 사회에 대한 통렬한 고발
- 현대 중국문학의 지형을 바꾼 문제작
- 허약한 삶의 토대, 인간 정신의 외줄타기
- 받은 상
- <낙타샹즈>는 유럽 각국에서도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특히 1945년 미국에서<Rickshaw Boy>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며 라오서를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 홍콩 〈아주주간〉이 선정한 ‘20세기 중국문학 베스트 100’에서 전체 3위, 장편소설 중에서는 1위에 오르는 등 중국 현대사의 거센 물살을 정면으로 견뎌낸 문제작이다.
현대의 반응
- 미디어 서평
- 출판사 서평
- 황소자리 중국 소설가들 중 맨 먼저 그 명성을 세계에 알린 라오서는 많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작가다. 현대 중국문학을 설명할 때 맨 윗자리에 놓이는<낙타샹즈>역시 1970~80년대 이미 두 차례 국내에 번역된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저작권자의 허락을 거치지 않은 판본이었고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지 않는 상태다. 황소자리가 그동안 산발적으로 소개되는 데 그쳤던 중국 근현대 명작들을 제대로 번역 출간하자는 취지로 ‘중국 현대소설선’ 시리즈를 기획한 이래 두 번째 목록으로 <낙타샹즈>를 올리는 건 어쩌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 책이 젊은 세대들에게 라오서와 그의 소설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판적 이해
- 샹즈의 희망, 인력거
인력거는 샹즈의 희망이었다. 희망이었다라는 부분에서 이는 과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20대 초반 시절, 인력거꾼의 삶을 자처하고 부자가 되리라 마음을 먹는다. 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인력거와 관련된 많은 상황이 좌초되었다. 그렇지만 본인의 돈으로 인력거를 구매 후 빼앗겨도, 샹즈가 후니우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인력거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샹즈는 자신이 유일하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던 부분이 인력거의 삶으로 본 것이다. 자신의 성실함이 결과로 보상받는 상황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후반부의 샤오푸즈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희망이 없어진다. 개인주의의 삶을 살았던 샹즈는 유일하게 좋아했던 샤오푸즈의 비보를 듣고 희망을 저버렸다. 그 결과, 그는 미래를 향한 인력거꾼의 삶은 버리고, 하루살이처럼 돈을 소비하는 행세를 보인다. 돈을 위해 돈을 빌리고, 사람을 파는 등 타락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욕망으로는 본인의 처우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의 한국사회와는 매우 다르다. 현시대에는 개인의 노력과 꾸준함으로 인해 정상을 보장받는다지만, 샹즈의 시대에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각자의 처세에 맞춰서 미래를 규정지었던 그 시대에 사회상은 빈익빈 부익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개인이 희망이 없어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요즘 현대인들이 느끼는 삶의 무의미라고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능동적인 자세, 국가의 개인의 주체성 인정이 조화되었을 때, 인간의 삶의 존재에 이유에 대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하며, 국가는 개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며, 최소한의 간섭만을 이행해야 한다.
- 인간의 체면
낙타샹즈에서 인력거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단어가 체면이다. 체면은 상위층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심리 현상이라고 본다. 이 책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존재하는데, 샹즈, 류쓰예, 후니우, 차오 선생, 샤오푸즈 등 각자 자신만의 체면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샹즈는 자신의 인력거를 구매하고 멀끔한 모습에서 자신의 체면을 인정받고자 한다. 후니우의 인력거꾼 아내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체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차오 선생의 교육자로서의 체면 등 각자 남에게 우호적으로 비추어졌으면 한다. 이로써 하층민이든 상류층이든 인간은 체면을 소유하며, 남에게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 중 하나이다. 샹즈의 별명은 파병꾼으로부터 벗어나는 도중에 낙타를 끌고 와서 낙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는 낙타의 인내력을 가지고 있는 점을 샹즈에 비유해 이러한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것 같다. 이 둘 사이에서의 차이점은 샹즈는 미래의 목표, 즉 체통을 위해 인내력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만, 낙타는 아무 생각 없이, 타인의 시선 상관없이, 인내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체면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샹즈의 마지막 순간, 짐승만도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의 체면은 사라졌다. 이처럼 체면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임을 인식시켜주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 개인주의 = 암담한 삶
공동체적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개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샹즈는 이 두 가지 중에 후자의 삶을 택했다. 중국은 본래 공동체주의를 외치는 사회에서 샹즈의 개인주의의 생활은 의외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개인이 성공해서 가족의 삶을 꾸리고 싶다는 욕망은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삶을 지켜나갔다. 누군가와 어울리지도 않고,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 그의 태도는 경제적 목표만을 위해 개인주의의 삶을 자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많은 타인이 샹즈의 삶에 개입되어 그의 인생을 파란만장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철저한 개인주의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의 존재로 어우러져 사건 사고가 나를 형성시킨다. 이 과정에서도 인력거의 삶을 꾸준히 이어갔지만, 결국 샤오푸즈로 인해 자신의 불행함을 인정하고, 타락의 삶을 자처했다. 이로써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감성을 소유한 존재로 철저한 개인주의로만은 살 수 없다. 개인주의의 삶을 살았던 샹즈도, 타인이 그의 인생에 개입되어 많은 영향력에 동조되었다. 그중에서도 국가의 영향력이 거대하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서, 개인주의의 삶은 비극 그 자체이다. 희망을 저버리고 나락으로 빠진 샹즈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 사회의 부조리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성공할 수 없게 만든다. 작가는 이를 고발하고자 자신의 생각을 샹즈라는 인물의 사건으로써 투영시켰다.
참고문헌
1. 공령운,「낙타 샹즈의 판본 변천 」,『베이징 사회과학』,2006.07.06
2. 윤태옥,<중국민가기행> ① 베이징 사합원」,『이코리아』,2017.09.16
3. 보여주는 中 하층민의 삶」,『연합뉴스』,2008.02.11
주석
- ↑ 낙타샹즈
- ↑ 윤태옥,<중국민가기행> ① 베이징 사합원」,『이코리아』,2017.09.16
- ↑ 보여주는 中 하층민의 삶」,『연합뉴스』,2008.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