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문
탑비 |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
---|---|
한자 | 漆谷 僊鳳寺 大覺國師碑 |
승려 | 의천(義天) |
찬자 | 임존(林存) |
서자 | 덕린(德麟) |
각자 | 대지(大智), 덕천(德遷) |
번역문
-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79-214쪽.[1]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題額)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 해동(海東) 천태종 시조 대각국사의 비명과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상서(尙書) 이부시랑(吏部侍郞) 지제고(知制誥)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 받은 신(臣) 임존(林存)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 의학(義學)이며, 월남사(月南寺) 주지(住持) 묘오(妙悟)와 삼중대사(三重大師) 신(臣) 승(僧) 덕린(德麟)은 선지(宣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아울러 전액(篆額)을 쓰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0년이 되는 대연헌(大淵獻) 장월(壯月) 7일에 존(存)에게 명하여 해동(海東)의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 대각국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시므로 곧 표상(表狀)을 갖추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명(御命)을 어찌할 수 없어서 감히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비로자나(毗盧遮那) 부처님이 계시는 화장장엄세계중(華藏莊嚴世界中)에 나타낸 바 제불세계(諸佛世界)를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가히 다 설(說)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오직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계시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곧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편만(遍滿)하시며, 비로법중(毗盧法中)에 가장 친근(親近)함이 됨이어든, 하물며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함에랴! 서천축국(西天竺國)과 이곳과는 멀지 않은 거리(距里)이다. 큰 구름이 두루 덮혀 일우(一雨)로 동점(同霑)하는 같은 하늘 밑에 있어서, 마땅히 함께 점덕(霑德)을 입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신라에 불법(佛法)이 전래됨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께서 만세(萬世)의 창업(創業)을 이룩함에 이르러, 서천축국의 마후라(摩睺羅)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초청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찾아왔다. 이 때 우리나라에 불법이 장래에 크게 흥왕(興旺)할 것임을 알고 더욱 원력(願力)에 의지하며, 완성된 정력(定力)과 신비한 공덕(功德)으로 손모(孫謀)를 후손에게 전해주어 불교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써 첫째의 의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오대(五代)를 지나 송조(宋朝)에 이르기까지 가끔 명승(名僧)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구법(求法)케 하였으나, 기근(機根)이 국한되어 겨우 일종(一宗)의 종지(宗旨)만을 얻어 그의 종도(宗徒)에게 전수(傳授)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국사는 부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나왔으나, 오히려 문도학법(問道學法)하는 형식을 거쳐 선조의 가풍을 계승하여 문도학법을 전하였으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가 한 번 나타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요,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父) 모(母) 자(子)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 『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또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조(文祖) 23년에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僧統職)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찾아오는 학인(學人)의 근기를 헤아려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하되, 성스러운 도량(道場)에서 사자후(師子吼)를 발하여 백천법문(百千法門)을 연설하여 인천(人天)의 한량없는 대중을 제도코자 하여 장차 자신이 얻은 바의 견해로써 이를 사람들에게 질문하여 믿음을 당시인들에게 취하려 했다. 그러므로 일찍이 입송구법(入宋求法)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문종(文宗)이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왕손(王孫)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적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 후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계속 여러번 요청하였는데, 선조도 결정하기 어려워서 군신회의(群臣會議)에 회부하였으나, 이 때에도 역시 대제(大弟)인 귀중한 신분으로써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종(肅宗)이 아직 번저(藩邸)에 있을 때, 어느 날 국사와 함께 인예태후(仁睿太后)를 배알(拜謁)하고 이야기하던 중, 우연히 이 부분에 언급하여 이르기를,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법(最上眞乘法)이나, 이 나라에 이 종파가 아직 세워져 있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석(可惜)한 일이므로, 신(臣)이 이에 대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숙조(肅祖)도 또한 외호(外護)가 되기를 원하였다.
선조 3년에 이르러 스스로 때가 다가온 줄 알고 다시 구법(求法)을 위한 출국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에도 비록 군신회의에서는 저지를 당하였으나, 이성(二聖)의 마음은 국사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호연(浩然)히 송나라로 가는 선박 탈 것을 결심하여 4월 8일에 드디어 해양을 건넜다. 최초로 밀주(密洲)의 경계에 도착하였다. 철종황제(哲宗皇帝)가 이 소식을 듣고, 경사(京師)에 있는 계성원(啓聖院)에 영치(迎置)하였다. 몇일 후 수공전(垂拱殿)에서 국사를 접견하되, 예우(禮遇)가 융숭하며 지극하였다. 이때 국사께서 고명한 대덕(大德)스님을 두루 참방(叅訪)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황제는 화엄법사(華嚴法師)인 유성(有誠)에게 명하여 별원(別院)에 와서 있게 하고, 국사가 가는 곳마다 수행(隨行)토록 하였다. 대저 성인(聖人)은 자신의 굴욕은 꺼리지 아니하고, 항상 겸선(兼善)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장홍(萇弘)과 사양(師襄)과 노담(老聃)과 담자(郯子)등을 스승로 섬기면서 배웠던 것이다. 국사는 밀주(密州)에서 부터 경사(京師)에 이르기까지 일법(一法)을 알거나, 일행(一行)을 가지는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두루 찾아가서 자문(咨問)하였으며 또한 고청(固請)하여 제자(弟子)의 예(禮)로써 친견하고 새로운 종지(宗旨)를 문답(問答)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따라서 현수(賢首)와 천태(天台)의 교판(敎判)의 동이부분(同異部分)과 이 양종(兩宗)의 유묘(幽渺)한 뜻에 대한 그 설명 듣기를 곡진(曲盡)히 하였다. 그 후 상국사(相國寺)에 나아감으로부터 원소종본선사(元炤宗本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원소가 법상에 올라 앉자 설법(說法)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국사를 찬양하는 게송(偈頌)을 설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불법(佛法)을 위해 몸을 잊고 선재(善財)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閻浮提)에서는 참으로 희유(希有)한 일이니, 마치 우담바라(優曇鉢花) 꽃이 불속에서 핀 것과 같네”라 하였다. 또 흥국사(興國寺)에 가서는 서천(西天)에서 온 천길상(天吉祥) 삼장법사(三藏法師)를 만나 약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인도 불교의 현황을 자세히 문학(問學)하였다.
철종에게 표장(表章)을 올려서 항주(杭州)에 있는 화엄좌주(華嚴座主)인 정원법사(淨源法師)의 강하(講下)에 가서 수업하여, 본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이를 받아 들여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어 동반케 하였다. 금산(金山)을 지나면서 불인료원선사(佛印了元禪師)를 배알하니, 이는 희세(稀世)의 만남이어서, 마치 부자(夫子)가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 나서 우리의 만남은 대화가 필요없고 목격하면 바로 그기에 도(道)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이어서 곧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참견(參見)하였다. 법사는 국사를 보고 법기(法器)가 비상(非常)함을 알고, 늦게 만나게된 것을 한탄하면서, “도(道)를 전해 주는 것으로써 나의 할일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또 여항(餘杭)의 산수(山水)가 천하에 제1이므로 모든 종파의 노덕(老德)들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연좌(宴坐)하고 있으나, 이들은 천하를 두루 살펴본 견문(見聞)이 많았다. 국사는 왕족의 애착을 끊으며 권세를 잊고, 만리(萬里)의 해외에서 불법(佛法)을 구하니 비록 도(道)를 쌓고, 덕(德)을 간직하여 입을 다물고 법을 전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오히려 쌀 궤짝을 비우며 물품 창고를 털어 시물(施物)을 가지고 줄을 이어 스님을 찾아 오므로, 제종(諸宗)의 법의(法義)가 다분히 여기서 얻게 되었다.
다음해인 1087년에 선종(宣宗)이 모후(母后)의 뜻을 송의 철종에게 전달하여 국사를 환국(還國)토록 명하여 줄것을 표청(表請)하였다. 이로 인하여 철종은 국사를 궐내(闕內)로 불러 귀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고, 귀국 길에 오르고자 하였다. 이때 천태종승(天台宗僧)인 자변대사(慈辯大師) 종간(從諫)이 부촉시(付囑詩) 한 수를 지어 수로(手爐)및 여의(如意)등과 함께 증정하였다. 국사가 송나라에 가기 이전에 이미 자변대사의 고명(高名)을 들은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이미 항주에 이르러서는 특히 자변(慈辯)에게 천태일종(天台一宗)의 경론(經論)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여 항상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과 그리고 모든 제자들과 함께 청강(聽講)하였으므로, 이제 이와 같이 부촉(付囑)하는 시를 지어 주었던 것이다. 경화(京華) 이르니, 황제께서 또 수공전(垂拱殿) 서 접견하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몇일 머물라고 했다. 다시 궐내(闕內) 들어가 귀국 인사를 드리고, 항주에 있는 정원법사(淨源法師) 처소에 이르니, 원(源) 날마다 화엄경(華嚴經)의 대의(大義)를 강설해 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향로와 불자(拂子)를 줌으로써 부법(付法)하는 신표(信表)로 삼았다.
그 다음 천태산(天台山)으로 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부도(浮圖)에 참배하고 발원문(發願文)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대사(大師)께서 판석(判釋)한 오시(五時) 팔교(八敎)의 교판(敎判)이 동류(東流)한 일대성언(一代聖言)을 궁진(窮盡)하지 않음이 없사옵니다. 본국에도 옛날 체관(諦觀)스님이 있어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승(傳承)하였으나, 이제 그 승습(承習)이 단절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제가 이제 분심을 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道)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미 전당(錢塘) 자변(慈辯)의 강하(講下)에서 천태 교관(敎觀)을 품수(稟受)하였사오니, 훗날 본국에 돌아가서 신명을 다하여 전양(傳揚)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명주(明州) 아육왕산(阿育王山) 광리사(廣利寺)에 가서 대각양연선사(大覺懹璉禪師)를 친견하였는데, 인종(仁宗)이 이 스님을 존중하여 복전(福田)을 삼았다. 이제 이 노사(老師)를 여기에서 귀의하였다. 즉 대각국사가 대각선사에게 문법(問法)하였으므로, 대각회련선사가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함을 만났으니, 심히 본래 출국한 뜻과 계합하였다. 이미배를 타고 본국의 경계에 도달하여는, 곧바로 허락없이 임의로 출국한 죄를 내려달라는 표상(表狀)을 올렸다. 그러나 왕은 벌을 주는 대신 크게 포상하라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궁내에 영입하여 구법도상(求法途上)에 따른 여고(旅苦)를 위로하는 예모(禮貌)가 융성하여 자못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국사께서 송나라에서 구법한 것은, 두루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문법(問法)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보고 느낀 바를 영부(靈府)에 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고 국사가 구해 온 경서중(經書中)에 반이상은 아직 본국에 유행(流行)하지 않는 귀중한 경들이었다. 구법일행(求法一行)이 헤어질 무렵 주객(主客)인 군신(君臣)이 모든 선(禪) 강(講) 제공(諸公)들에게 이르기를, 옛 부터 바다를 건너 구법한 이가 많았지만, 어찌 승통(僧統)께서 한 차례 상국(上國)에 가서 있는 바 천태(天台) 현수(賢首) 남산(南山) 자은(慈恩) 조계(曹溪) 서천범학(西天梵學)등 제종(諸宗)을 일시(一時)에 전래함과 같겠는가! 참으로 홍법(弘法)하는 대보살(大菩薩)의 행(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실한 의체(義諦)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울 뿐만이 아닌 것이다. 옛날 공자(孔子)가 위(衛)나라로 부터 노(魯)나라로 돌아온 연후에야 비로소 낙정(樂正)과 아송(雅頌)에 각각 그 경지를 얻은 것과 같이, 국사가 송으로부터 귀국한 뒤에야 모든 종파의 교리가 각기 그 정법(正法)을 얻었다. 하물며 천태일종(天台一宗)은 비록 체관(諦觀)과 지종(智宗)의 무리에서부터 그 남상(濫觴)을 두었으나, 이 땅에서 아직 그 종(宗)을 세우지 아니하여 학자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음에랴!
『법화경』에 이르기를, “일월등명(日月燈明)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을 설(說)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되, 여래(如來)는 다만 일불승법(一佛乘法)만으로써 중생을 위해 설하실뿐, 여승(餘乘)인 저 이승(二乘)이나 또는 삼승법(三乘法) 등은 전혀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이승과 삼승을 회통(會通)한 원묘(圓妙)의 일법(一法)에 대한 진관(眞觀)이 이미 『보살영락경』에 갖추어 있고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도제일의체(中道第一義諦)는 보처대사(補處大士)인 미륵보살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승받았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500여 년에 이르러 이단(異端)이 봉기하므로 용수보살이 『지도론』을 지어 중도(中道)의 이치를 발명하였다. 그러므로 형계담연(荊谿湛然)이 이르기를, 하물며 삼관(三觀)이 따로 있겠는가! 본종(本宗)의 영락일가(纓絡一家)의 교문(敎文)은 멀리로는 불경(佛經)을 품수하였으되, 법화(法華)로써 종골(宗骨)을 삼고, 지론(智論)으로써 지남(指南)을 삼았다. 용수보살로부터 형계(荊谿)에 이르기까지 천태(天台)의 9조(祖)가 된다. 그 교(敎)가 중국에서 대행(大行)한지 이미 요요(廖蓼)히 사백여년이 되었건만, 이 땅에는 아직도 입종(立宗)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여래께서 오랫 동안 유지(遺旨)에 대하여 묵묵하신 것은 이는 장차 그 법을 감당할 만한 스님을 기다려 전법(傳法)하고자 함이었다. 대임(大任)을 맡을 만한 재질(才質)은 제종(諸宗)의 학문에 있어 고심(刳心)하지 않음이 없다. 그리하여 국사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여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현수(賢首)와 천태(天台) 양종(兩宗)은 그 시절인연이 도래하였으므로 구법하고 돌아와서 최초로 왕에게 올린 표상(表狀)에 이르기를, “만리(萬里)의 홍파(洪波)를 타고, 백성(百城)의 선우(善友)를 친견하여 두루 진교(眞敎)를 심문(尋問)함은 오로지 부왕(父王)인 문종(文宗)의 성서러운 위력(威力)을 의뢰한 것이며, 천태종과 현수종지(賢首宗旨)까지 깊이 연구 하였아옵니다. 진수(晉水)와 고산(孤山)의 종지(宗旨)에 있어서는 외람되게 노불(爐拂)까지 전해 받았으니, 이는 기구(箕裘)를 잘못 승사(承事)한 것이 아닌가하고 저으기 걱정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따라 가히 홍도(弘道)할 만한 자를 모집하였는데,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이 각기 그의 도제(徒弟)를 거느리고 모아드니 모두 제자(弟子)의 행렬에 속하였다.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숙종이 또 대원(大願)을 세워 천수사(天壽寺)를 창건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홍포하려 하다가 낙성(落成)을 보지 못하고 용어(龍馭)께서 귀궁(貴弓)하시고 예고(睿考)가 왕위를 이어받아 숙종의 대원을 완성하므로써 영원히 삼한(三韓)을 비호하였으나, 아직도 사방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 창생(蒼生)은 도탄에 빠졌으나, 오직 이 해내(海內)에서만은 편안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다. 평화스럽게 닭이 울고, 개가 짖음이 사경(四境)에 달하였다. 남자는 밭에서 농사 짓고, 녀자는 집에서 배를 짜면서 그 부수(富壽)를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소치(所致)이겠는가? 그 중요한 원인은 국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이미 오래된 말세에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멀리 해외에 가서 법보(法寶)를 전해 와서 이 땅에 법륜(法輪)이 무궁토록 한 것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태후와 숙종, 그리고 지금의 인종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극한 정성을 발하여 수희찬탄하며 외호(外護)하였기 때문이다.
또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불사(佛事)를 완성시켜 묘법(妙法)으로 하여금 상주(常住)케하였으니, 제불(諸佛)의 호념(護念)한 바의 때문이며, 제천(諸天)의 옹위(擁衛)한 바의 힘이 아니겠는가!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또 국사가 입송하여 구법하는 도중 항주(杭州)에 있을 때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이르기를, “어제 아침 송자(松子)로 끓인 죽을 받아 먹을 때, 정자사(淨慈寺)의 종본장로(宗本長老)가 이르러 오므로 죽을 차려 드렸더니, 장로(長老)께서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수년전 용산사(龍山寺)에 투숙하였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한 대접의 잣죽을 주거늘,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방(東方) 부동불국(不動佛國)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늘 이 죽도 그 때 꿈에 보았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저 국사가 증득(證得)한 바의 지견(知見)이 모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경계(境界)인 즉 그의 나타내는 바 사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대선사(大禪師)인 순선(順善)과 선사(禪師)인 교웅(敎雄)과 유청(流淸)은 모두 국사의 법손(法孫)이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되, 우리 천태종은 이 땅에 유행(流行)하지 않던 것을 국사가 처음으로 제창(提唱)하여 힘을 다해 창립하였다. 저 달마대사가 진단(震旦)에 있어 선종(禪宗)의 시조(始祖)인 것과 같은데도 지금까지 비기(碑記)가 없으니, 만약 비를 세워 국사의 행상(行狀)을 새겨두지 아니하면, 그 방임(放任)한 일로 후세에 이르러 우리들에게 돌아올 허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법손의 의견을 모아 임금께 상주(上奏)하였더니, 임금께서 국사의 덕을 존중하고 도를 흠모하여 유덕(遺德)의 깊은 뜻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국사의 비(碑)를남숭산사(南崇山寺)에 세우도록 명하고, 법손으로 하여금 상속(相續)하여 주지(住持)해서 그 유교(遺敎)를 전양(傳揚)하며 단절(斷絶)함이 없도록하라 하였다. 국사의 위대한 업적을 촬략(撮略)하여 명(銘)하노라.
일체법(一切法) 공(空)한 것을 설(說)하려 하건만
분별심(分別心)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모든 법(法) 공(空)했지만 그대로 현상(現象_일새
육경(六境)에 집착하나 본래(本來)가 가명(假名)일 뿐.
이 이치(理致) 어찌하여 다할 수 있겠는가.
현상계(現象界) 그대로가 본래(本來)로 없는 것을.
색(色)과 공(空) 그 자체(自體)는 동체(同體)서 갈라진 것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中道)라 이름하네.
법(法)따라 궁구하여 본체(本體)를 발명(發明)하면
뚜렷한 원각(圓覺)자리 우주를 비추리라.
삼세(三世)에 두루하신 일체(一切)의 부처님도
모두가 이 길따라 정각(正覺)을 성취했네.
우리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서송(西宋)에 유학하여
천태(天台)의 삼지삼관(三止三觀) 교관(敎觀)을 전해왔네.
임금이 명령하여 숭산(崇山)에 터를 닦아
천태종(天台宗) 시조(始祖)이신 대각(大覺)의 비(碑)를 세우다.
남숭산(南崇山) 높고 높아 웃뚝히 솟았는데
비석(碑石)도 산(山)과 함께 영원(永遠)히 함께 하리.
- 문인(門人) 천수사(天壽寺)의 대지(大智)와 덕천(德遷)스님은 비문을 새기다.
음기
강어(强圉) 황락년(荒落年) 응종월(應鍾月)에 남숭산사(南崇山寺) 천태(天台) 시조(始祖)의 비음기(碑陰記)
해동(海東)에 불법이 전래된 후, 약 300년 동안 모든 종파가 각기 서로 앞을 다투어 연창(演唱)하였으나, 천태종만은 중간에 단절되어 전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원효대사(元曉大使)가 전대(前代)에서 칭미(稱美)하였고, 체관(諦觀)스님이 뒤를 이어 전양(傳揚)하였으나, 아직까지 재흥(再興)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중흥의 시기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중, 마침 우리 시조(始祖) 대각국사가 왕궁(王宮)에서 탄생하여 정광불롱(定光佛隴) 지자탑전(智者塔前)에서 법등(法燈)을 전해 받고, 본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천태 진종(眞宗)을 제창(提唱)하니, 도덕(道德)은 고독하지 아니하여 이웃이 있고, 구슬은 부르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이르러 오므로,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圓空國師) 신칙(神則)과 영암사(靈岩寺) 적연국사(寂然國師)의 고매(高邁)한 달경(達境)과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에게 수법(受法)한 5명(五名)의 권속(眷屬) 등 명공(名公) 학도(學徒)들이 왕의 명령에 따라 함께 모였고, 그 밖에도 바로 대각국사의 문하에 투신(投信)한 제산(諸山)의 명공(名公) 학도(學徒) 삼백여 명과 전오문(前五門)의 학도 일천여인(一千餘人)도 함께 모였다.
건통(乾統)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굉강(宏綱)을 거양(擧揚)하면서, 우수한 학자 일백명을 뽑아 봉은사(奉恩寺)에 있게 하고, 천태종의 경론(經論) 일백이십권으로써 고시(考試)를 보아 현량(賢良) 사십여인(四十餘人)을 선발하였으니, 선국(先國)의 초기에 대행(大行)하였던 조계(曹溪)·화엄(華嚴)·유가(瑜伽)·궤범(軌範)등으로 더불어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일러 사대업(四大業)이라 하였다. 국사가 입적한 후 앞의 오종문파(五宗門派)가 각기 차례로 본종(本宗)이었던 본사(本寺)로 되돌아갔지만, 오직 국사의 문하에는 의호(依怙)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건통 4년 갑신(甲申) 6월 일에 조판(詔判)으로 국사 이하 칭행(稱行)에 있어 천태종의 6법권(法眷) 중에 국사가 시조(始祖)라고 결정하였다.
대송(大宋) 건염(建炎) 원년, 대금(大金) 천회(天會) 7년(195) 기유(己酉) 5월 일에 성지(聖旨)에 따라 대각국사가 송나라에 가서 천태교(天台敎)를 전하여 왔다. 고려의 초기에는 천태종의 대법(大法)이 유행하지 않았던 것을, 시흥(始興)한 그 공업(功業)이 적지 아니하므로, 남숭산(南崇山) 선봉사(僊鳳寺)에 해동의 천태시조(天台始祖)인 대각국사의 비를 세웠으나,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태종도 점차로 침체할가 하는 부분이다. 병신년(丙辰年)에는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논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비를 세웠다. 그리고 법손이 계속 이어 주지(住持)하여 선사(先師)의 빛나는 도덕이 실추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그의 법자(法子) 법손(法孫)의 모직(謨職)의 명단을 음면(陰面)에 나열하여 후세인들의 관람(觀覽)에 공(供)하려 한다.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대선사(大禪師) 덕린(德麟)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순성(順成)·신웅(信雄)
삼중대사(三重大師) 이서(利諝)
중대사(重大師) 신지(信之)·세청(世淸)·간영(幹英)·창연(暢連)·도능(道能)·형여(瑩如)·현준(賢俊)·관순(觀純)·지선(志宣)·도충(道沖)·학련(學連)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선사(禪師) 익종(翼宗)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선사(大禪師) 순선(順善)·교웅(敎雄)
선사(禪師) 의관(懿觀)·석선(碩先)·유서(惟諝)
삼중대사(三重大師) 당준(唐俊)
중대사(重大師) 혜정(惠定)·신각(神覺)·원호(元浩)·각현(覺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신사(禪師) 경란(景蘭)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관호(觀皓)
중대사(重大師) 혜평(惠平)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법자(法子)
선사(禪師) 연묘(連妙)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선사(禪師) 유청(流淸)·양소(懹素)
삼중대사(三重大師) 제승(齊承)·수겸(首謙)
중대사(重大師) 관명(觀明)·계제(契濟)·서여(偦如)·영원(穎源)·홍윤(弘允)·존현(存玄)·영감(英鑒)·자성(資誠)·정륜(靖倫)·자진(資眞)
대사(大師) 안수(安樹)・지룡(智龍)
대선사(大禪師) 순선(順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삼중대사(三重大師) 자서(滋庶)
삼중대사(三重大師) 강진(講眞)·상령(尙玲)·각표(覺標)·각초(覺初)·자조(資照)·유고(惟古)·각관(覺觀)·영모(令模)·정웅(挺雄)
대사(大師) 승린(僧麟)·승원(承遠)·면조(沔照)·존기(存己)
대덕(大德) 탄순(誕純)·교간(敎干)·제기(齊己)·각진(覺眞)
대선사(大禪師) 교웅(敎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경인(景仁)·중제(衆濟)·덕소(德素)·원백(元白)
대사(大師) 지성(知性)·해원(解圓)·숙명(淑明)
대덕(大德) 공변(工辯)·덕숭(德嵩)·덕성(德成)·사중(師中)·진탑(眞塔)·현묵(賢黙)
선사(禪師) 의관(懿觀)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지실(至實)
선사(禪師) 현소(玄素)·남정(南挺)·담순(曇順)·석유(釋猷)·현석(玄碩)·상겸(尙謙)·처공(處恭)·준평(俊平)·형신(瑩神)·묘관(妙觀)・신조(神照)
대덕(大德) 관승(觀勝)·순고(純古)·관소(觀素)
선사(禪師) 순성(順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청(壽淸)
중대사(重大師) 천언(天彦)·원승(元承)·국영(國英)·학현(學玄)·성진(性眞)·경충(景沖)·준기(俊機)·지충(智沖)
선사(禪師) 유청(流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녹만(綠萬)·도가(道可)·체진(諦眞)
대덕(大德) 승연(昇衍)·영택(靈澤)·당이(唐伊)·인지(仁智)·심지(心智)
선사(禪師) 유서(惟諝)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담린(曇麟)
대덕(大德) 원미(元美)
선사(禪師) 신웅(信雄)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중대사(重大師) 관승(冠承)
대사(大師) 제식(齊軾)
선사(禪師) 회소(懷素)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사(大師) 영엄(永嚴)
대덕(大德) 영존(永存)
삼중대사(三重大師) 이서(利諝)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영간(領干)
삼중대사(三重大師) 석승(釋承)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선호(禪浩)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청(壽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신백(神白)
중대사(重大師) 세청(世淸)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문생(門生)
대덕(大德) 영순(領純)
그러나 사제(師弟)의 이름이 전후에 나열된 것은 감히 좋은 것은 못되나, 장차 만재(萬載)의 후에 그 기본(基本)을 말미암아 동요(動搖)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정사년(丁巳年) 8월 일에 성지(聖旨)에 따라,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와 판관(判官)에 권농사(勸農使)를 겸한 문림랑(文林郞)이며 예빈주부(禮賓注薄)인 김표민(金表民)과 천수사(天壽寺) 주지(住持) 홍진(洪眞)과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수청(壽淸), 그리고 천수사의 의학(義學)인 묘관(妙觀)과 중대사(重大師)인 상령(尙玲) 등의 감독하에 비석을 세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 중세상, 아세아문화사, 1984.[2]
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題額)」
南嵩山僊鳳寺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之碑銘(幷序)」
- 朝散大夫翰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尙書吏部侍郎知 制誥賜紫
- 金魚袋臣林 存奉 宣撰」
- 門人天壽寺義學月南寺住持妙悟三重大師臣 僧麟 奉
- 宣書幷篆額」
上御宇十年歲在大淵獻壯月七日 詔(臣)存撰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之碑銘卽表辭以不能而不獲命敢再拜稽首而言曰甞聞毗遮那華藏世界其中所顯諸佛世界窮刧」
不可說唯此娑婆世界其佛毗遮那則凡在大千世界者在毗遮那法中爲最親近况爲大事因緣出顯於世西天竺國去此不遠則大雲之遍覆一雨之同霑宜無不被者故自新」
羅大法東漸洎 我太祖創萬世之業西天竺國三蔵摩羅不召自來於是知大法之將興益憑願力耆定神功貽厥孫謨以弘揚佛道爲首務故涉五代及宋甞選名僧越海求法而」
機根所局僅得其一宗之旨來傳於其徒者有矣至於代佛出世猶假問道繼祖家風轉大法輪者如優曇花乃一得而見之師 文祖第四子母 仁睿太后諱釋煦字義天 二聖與」
師夙植夙緣妙契弌時師生而有異稍長行藝儼若成人年十一承 文祖宿志投景德國師剃度受賢首敎觀景德卒與其徒講學不止又廣會諸宗學者相與講論凡有所得卓爾非」
凡老師宿德之跂及 文祖二十三年賜號祐世授職爲僧統於是擬於方來欲聖道塲發師子吼演說百千法門度人天無量之衆則將以巳之所得者質之於人以取信於時故甞請」
入宋求法 文祖心許未降指揮洎 宣祖卽位屢請不已 宣祖難定議於群臣咸以爲大弟之重不宜越海 肅祖在」
蕃邸甞一日同謁 太后偶語及之曰天台三觀最上眞乘此
土宗門未立真可惜也臣竊有志焉 太后深垂隨喜 肅祖亦願爲外護 宣祖三年自知時至更請求法雖群議沮之 二聖似欲從之於是浩然决乘桴之計四月八日絶海洋初」
抵密州界 哲宗聞之迎置京師啓聖院御垂拱殿迎見禮遇備至師請遍叅名德於是詔華嚴法師存誠來止別院使與遊處相從夫聖人不憚屈已以兼人之善故孔子師萇弘師襄」
老聃郯子之徒師自密州指京聞有知一法持弌行者無不遍致咨問及此固請以弟子之禮致謁是日往返問答賢首天台判敎同異及兩宗幽渺之義曲盡其說後自詣相國寺叅元」
炤禪師宗本元炤昇堂說法繼以說偈云誰人萬里洪波上爲法忘軀勸善才相得閻浮應有優曇花向火中開又詣興國寺叅西天三藏天吉祥問西天事甚詳閱月上章請往杭州」
華嚴座主凈源講下受業以償素志詔從之差主客員外郎楊桀伴行過金山謁佛印禪師了元稀世之遇如夫子見溫伯雪子目擊而道存到杭州叅源公法師法師見法器非常恨相」
逢之晩以傳道爲事且徐杭山水甲於天下諸宗之老遺世宴坐者視天下爲多見師割愛忘勢萬里求法則雖積道藏德膠其☐而不傳者猶且倒廩傾囷羅列而進故諸宗法義多得」
於此越明年 宣祖述 母后意表請遣師還國遂詔到闕辭還師欲登道慈辯大師從諫著詩一首贈手爐如意師在本國聳聞慈辯高誼之日久矣旣至杭特請慈辯講天台一宗經」
論每與主客及諸弟子聽受故今有是付囑旣抵京 皇帝又御垂拱殿迎見留數日遂復入辭到杭州源公法師日講華嚴大義講畢贈以爐拂以爲付法之信次詣天台山謁智者大」
師浮圖述發願文誓於塔前曰甞聞大師以五時八敎判釋東流一代聖言 無不盡本國古有諦觀者傳得敎觀今承習久絶予發憤忘身尋師問道今巳錢塘慈辯講下承禀敎觀他」
日還鄕盡命傳揚及到明州往育王廣利寺謁大覺禪師懷璉 仁宗尤重此老以爲福田今歸老此屬師於至昇堂說法甚契本來旣浮杯達國界上表乞擅行之罪廻詔大加褒奬迎」
致撫慰禮貎之盛殆不勝言師之往求法非止遍叅歷問記在靈府其所求來經書太半本朝所未甞行者臨行主客謂諸禪師諸公曰自古聖賢越海求法者多矣豈如僧統一來上國」
所有天台賢首南山慈恩曹溪西天梵學一時傳了眞弘法大菩薩之行者此眞實義諦非溢美之言也昔孔子自衛返魯然後樂正雅頌各得其所國師自宋返國然後諸宗之敎各得」
其正况天台一宗雖或濫觴於諦觀智宗軰而此土未立其宗學者久絶法華經云日月燈明佛出顯於世說四諦十二因緣六波羅密佛告舍利弗如來但以一佛乘故爲衆生說法無」
有餘乘若二若三然不離此座値了二三會之圓妙一法眞觀已備於纓絡空假名及中道第一義諦補處大士金口親承如來滅後五百餘年異端並作龍樹菩薩作智度論發明中道」
故荊谿云况復三觀本宗纓絡一家敎文遠禀佛經以法華爲宗骨以智論爲指南自龍樹至荊谿世歷九祖其敎大行於中國寥寥四百餘年此土未立宗敎何哉葢如來久默遺旨是」
將有待師以命世大任之才其於諸宗之學靡不刳心而其自許以爲己任者在 賢首天台兩宗者當其時節因緣故其求法初還所上表云涉萬里之洪波叅百城之善友備尋眞敎」
盖賴聖威以至天台賢首之宗台嶺南山之旨濫傳爐拂謬事箕裘於是募可與弘道者德麟翼宗景蘭連妙各率其徒齒於弟子 太后尋舊大願欲起伽藍引揚宗敎 其號曰國淸」
大願未集 僊駕上天 肅祖繼而經營功旣畢詔師兼住 法駕親臨落成一宗學者及諸宗碩德無慮數千百人聞風競會師昇座振海潮音演未曾有一宗妙義無 根機多得中」
道無生法忍 肅祖又尋大願欲創今所謂天壽寺以奉敎觀經始未畢 龍馭遺弓 睿考肯堂而 肅祖之願大成以永庇于三韓且今者四方兵動蒼生墜於塗炭惟此海內晏然」
無虞鷄鳴狗吠達乎四境男耕於野女織于室不失其富壽此豈人力哉繄國師當去佛旣遠之後不惜身命遠求法寶傳之無窮而 大后 肅祖 睿考洎 今上發自至誠隨喜外」
護繼志述事使妙法常住而爲諸佛之所護念爲諸天之所擁衛之力也耶師卒贈册爲國師定諡曰大覺先時 肅祖欲以二字爲師之號懇讓曰大覺佛之德何敢濫而據焉卒不受」
及是使有司議諡復不出二字昔靈公死卜葬沙丘得石槨有銘曰靈公奪而埋之則夫靈公之爲靈公也久矣以是觀之今師之爲大覺亦已久矣而又師求法在杭州主客曰昨日惠」
松子粥時有淨慈本長老至遂與喫長老悚然曰予數年前宿龍山寺夢有神人與一椀粥問之曰從東方不動佛國來今日之粥無異夢中所見夫師之所證知見皆不可思議境界則」
其所顯於事者亦復如是也大禪師順善禪師敎雄流淸皆師之法孫相謂曰我之宗門此土未行遇師首唱而力創如達摩大士爲震旦禪那始祖今未有碑記其事後世其有所歸外」
哉一達其語契 上尊德 樂道欲光揚遺德之 意詔碑於南嵩山寺立之使法孫相續而住勿絶傳揚其遣敎銘曰
欲說空法 則不可測 空則是色 欲執假名 亦豈可窮 色卽是空 行如是觀 名爲中道 循而發之 圓覺普炤 三世諸佛 由此塗出」
大覺西遊 敎觀東流 是故詔立 始祖之碑 嵩山高高 碑與山宜 門人天壽寺大智德 遷刋字
陰記
强圉荒落年應鍾月南嵩山寺天台始祖碑陰記
海東佛法三百餘載諸宗竸演天台闕如雖元曉稱美於前諦觀傳揚於後猶未☐☐必待其時」
吾祖大覺國師誕跡 王宮傳燈傳隴言還本國首唱眞宗 德不孤而有隣珠無莅而自至故居頓神☐」
靈巖高達智谷五法眷名公學徒因 命會合其外直投大覺門下諸山名公學徒三百餘人與前五門學徒」
無慮一千人乾統元年辛巳大覺始擧宏綱抄學優者一百人坐奉恩寺以宗經論一百二十卷試取賢良四」
十餘人而與先國初大行曺溪華嚴瑜伽軌範齊等世謂之四大業也 大覺歸寂嚮之五門各有次蔭本山寺唯」
國師門下無所依怙乾統四年甲申六月 日 判以爲國師下稱行故天台六法眷中最爲首也大宋建炎元
年大金天會七年己酉五月 日 聖旨大覺入宋傳天台敎來國初未行大法始興功業不小於南嵩山寺立」
海東天台始祖碑而與予不同者浸潤㳂滞於丙辰年中書門下論功奏判立碑而法孫相繼住持不墜先
師道烈其法子孫謨職名列于陰面以爲後世之觀也」
大覺國師法子大禪師德麟門生禪師順成信雄三重利諝重大師信之世淸幹英暢連道能瑩如賢俊觀」
純志宣道冲學連 大覺國師法子禪師翼宗門生大禪師順善敎雄禪師懿觀碩先惟諝三重唐俊重」
大師惠定神覺元浩覺玄 大覺國師法子禪師景蘭門生禪師觀皓重大師惠平大覺國師法子禪」
師連妙門生禪師流淸懷素三重齊承首謙重大師觀明契濟偦如頴源弘允存玄英鑒資誠靖倫」
資眞大師安樹智龍 大禪師順善門生三重玆庶重大師講眞尙玲覺標覺初資照惟古覺觀令模」
挺雄大師僧麟承遠沔照存已大德誕純敎干齊己覺眞 大禪師敎雄門生重大師景仁衆濟德業」
元白大師知性解圓淑明大德工辯德嵩德成師中眞塔賢默禪師懿觀門生重大師至實禪師玄素」
南挺曇順釋猷玄碩尙謙處恭俊平瑩神妙觀神照大德觀勝純古觀素禪師順成門生三重壽」
淸重大師天彥元承國英學玄性眞景冲俊機智冲禪師流淸門生重大師緣萬道可諦眞大德」
昇衍靈澤唐伊仁智心智 禪師惟諝門生重大師曇麟大德元美 禪師信雄門生重大師冠承大」
師齊軾 禪師懷素門生大師永嚴大德永存 三重利諝門生大德領干三重釋承門生大德禪浩」
三重壽淸門生大德神白 重大師世淸門生大德領純然師弟之名列於前後者非敢好事也將使于萬載」
之下因其基本而無有動搖者爾丁巳八月 日
聖旨知京山府事判官兼勸農使文林郎禮賓注簿金表民寺住持洪眞三重大師壽淸天壽寺義學妙」
觀重大師尙玲監督立石
주석
- ↑ 온라인 참조: "선봉사대각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온라인 참조: "선봉사대각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