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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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槐山 覺淵寺 通一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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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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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
한자 | 槐山 覺淵寺 通一大師塔碑 |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태성리 7-1)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295호 |
문화재 지정일 | 1999년 6월 23일 |
찬자 | 김정언(金廷彦)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통일 |
건립연대 | 958년 |
승탑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 |
비문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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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각연사(覺淵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통일대사(通一大師)의 탑비.
내용
개요
높이 258cm, 폭 128cm, 두께 76cm. 탑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형태이다.
통일대사(通一大師)는 신라 말에 당나라로 유학하였으며, 귀국하여 각연사(覺淵寺)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1] 대사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이 통일대사(通一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시 한림원(翰林院)의 학사였던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2] 탑비의 근처에 통일대사의 승탑이 있으며,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3]
원래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석비중의 하나이며, 귀부(龜趺)의 머리가 거북머리에서 용머리로 변화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게 되는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4] 비문의 글씨는 해서체이다.
비문
46행에 1행 88자로 3,500여자의 비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위쪽과 아래쪽 일부 200여자만이 판독이 가능하다. 워낙 알 수 있는 비문 내용이 적어 당에 유학하였다가 귀국하여 고려 태조를 만나는 등의 교화 활동 사실만 알 수 있다. [5]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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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 김정언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 괴산 각연사 | A는 B에 있다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 통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 | 통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안성두, "통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 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경식, "괴산각연사통일대사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괴산각연사통일대사탑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연풍 각연사 통일대사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58-65쪽.
- 이우태,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한국금석문집성』제21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5-14쪽.
- "괴산각연사통일대사탑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