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국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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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국의 편지
한자명칭 金柱國 諺簡
영문명칭 A letter of Kim Juguk to his daughter-in-law, Yi of Jinseong
작자 김주국
작성시기 1765년
소장처 의성김씨 학봉종택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5.0×53.0㎝
판본 필사본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해독문 김주국의 편지 (해독)


정의

1765년 6월 14일에 시아버지 김주국(金柱國)이 며느리 진성이씨(眞城李氏)에게 보낸 간찰(簡札)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765년에 김광찬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김주국진성이씨를 위로하고 손자를 당부하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하였다. 김주국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과도하게 슬퍼하여 건강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와, 남편의 유언을 받들고 어린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가문의 존망이 진성이씨에게 달려 있으니 집안을 잘 보전하고 건강을 잘 돌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하였다. [1]

진성이씨의 자결 시도

편지 속에는 '수명의 장단이 정해져 있으니 인력으로도 못 하고 사생의 경중이 현현하니 일편되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가장(김광찬)이 남긴 유언이 범연하지 않거늘 네가 또 그리 하려 하니 어찌 그리 후일을 아니 생각하는가?' 등의 글이 있다. 김광찬의 사후 진성이씨가 여러 차례 자진을 시도하자 시아버지인 김주국이 몸을 아끼고 후사와 가정을 생각하기를 타이르는 뜻을 편지에 담은 것이다.

양반가 열녀의 입전

진성이씨의 자결 시도는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유교적 여성관이 드러난 것으로 열녀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열녀전을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열녀전 중 양반가 열녀의 입전 경우를 살펴보면 조상 중에 뛰어난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열녀의 정숙한 몸가짐과 남편이 죽은 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거나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후 후사를 잘 기르고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열녀전은 사회가 바라는 유교적 여성상을 내재화, 재생산하여 암묵적으로 조선 후기의 여성들에게 죽음이 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2] 퇴계의 후손으로서 평소 모범적인 여성의 몸가짐을 배우며 자랐을 진성이씨의 자진 행위에는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열녀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주국 김주국의 편지 A는 B를 저술하였다 1765년
김광찬 김주국의 편지 A는 B에 언급된다
김광찬 김광찬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김광찬의 처 진성이씨 A는 B에 소속된다
김주국 김광찬 A는 B의 어버이다
진성이씨 김주국의 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김주국의 편지 A는 B를 소장하였다 현재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65년 김주국이 김주국의 편지를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09771 128.669643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김주국의 편지를 소장하였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72쪽.
  2. 홍인숙, 「朝鮮 後期 烈女傳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