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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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한자 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승려 심희(審希)
찬자 경명왕(景明王)
서자 행기(幸其), 최인연(崔仁渷)
각자 성림(性林)



번역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1]

고(故) 진경대사의 비

유당 신라국 고국사 시진경대사 보월능공지탑 비명 및 서

문하승 행기가 교를 받들어 쓰고, 문인인 조청대부 전 수집사시랑 사자금어대 최인연이 전액을 쓰고, 내가 짓는다.

내가 듣건대, 높고 높은 하늘의 현상은 광활함을 차지하는 이름만이 아니고, 두텁고 두터운 땅의 모습은 깊고 그윽함을 칭하는 이름만은 아니다. 저 선(禪)에 깃든 상사(上士)와 법을 깨친 진인(眞人)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한 사람만이 사대(四大)를 초월하여 즐거이 노닐며 경치를 구경하고 삼단(三端)을 피하여 한가로이 거하며 달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호가호위하는 선백(禪伯)으로 하여금 혼란한 시절에 마▨(魔▨)를 일소하게 하고, 법령을 좇는 법왕(法王)으로 하여금 태평한 시절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돕게 하여, 자비의 구름이 다시 드리우고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며, 외도(外道)를 모두 물리쳐 하늘 끝까지 따르고 복종하며, 비밀스런 인(印)을 가지고서 심오한 뜻을 발휘하며, 그윽한 그물을 들어서 진실한 종지를 널리 드러내게 할 수 있으니, 오직 우리 대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요,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타고, 바다(鰈水)의 정기에 올라서, 문신의 길조를 잡아 재상의 뜰에 나왔고, 무신의 지략을 잡아 왕실을 높이 부양하였으며, 평생토록 ▨▨하여 두 적이 영원히 안정되고 토군(兎郡)의 사람들이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진한(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아버지 배상(盃相)은 도(道)는 노장사상을 높였고 뜻은 송교(松喬)를 흠모하였으며, 물과 구름이 비록 그 한가로움을 내버려둔다 할지라도 조야(朝野)는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아쉬워 하였다. 어머니 박씨가 일찍이 앉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가 꿈에 휴▨(休▨)를 얻었다. 나중에 미루어 생각해 보고는 깜짝 놀라며 임신을 하였다. 곧 냄새나는 음식을 끊고 그 몸과 마음을 비웠으며, 가만히 그윽한 신령에 감응하여 지혜로운 아들을 낳기를 빌었다. 대중(大中) 7년(853) 12월 10일에 태어났다. 대사는 기이한 자태가 넉넉히 드러났으며 신비한 색이 원융하게 밝았다. 나이 어려서도 철부지같은 마음은 없었으며, 이를 가는 7,8세의 나이에도 불사(佛事)를 ▨▨하였다. 모래를 쌓아 탑을 이루고, 잎을 따다 향으로 바쳤다. 아홉 살에 혜목산(惠目山)으로 곧장 가서 원감대사(圓鑑大師)를 알현하니, 대사는 지혜의 싹이 있음을 알고 절(祇樹)에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나이 비록 어렸지만 마음은 오히려 정성을 다하였다. 부지런히 애쓰는 데는 고봉(高鳳)도 공을 미루고 민첩함에는 양오(揚烏)도 아름다움을 양보할 만 하였다. 좇아서 승▨(僧▨)를 밟고 법당을 떠났다. 함통(咸通) 9년(868)에 스승이 병에 걸려 대사를 불러 말하기를, “이 법은 본래 서천(西天;인도)에서 동쪽으로 왔으며, 중국에서 꽃이 한번 피자 여섯 잎이 번성하였다. 대대로 서로 전승하여 끊임이 없도록 하였다. 내가 지난번에 중국에 가서 일찍이 백암(百巖)을 사사하였는데, 백암은 강서(江西)를 이었고 강서는 남악(南嶽)을 이었으니, 남악은 곧 조계(曺溪)의 아들이며 숭령(嵩嶺)의 현손이다. 비록 전신가사(傳信架裟)는 전하지 않았으나 심인(心印)은 서로 주었다. 멀리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잇고 가섭(迦葉)의 종지를 열었다. 그대는 마음의 등불을 전하라. 나는 법신(法信)을 부촉하노라”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스스로 열반(泥洹)에 들어갔다. 대사는 눈으로 이별함에 슬픔이 깊고 마음으로 사별함에 수심이 간절하였다. 스승을 잃은 애통함은 더 쌓이고 배움이 끊긴 근심은 실로 더하였다. 19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윽고 계율을 지킴에 마음이 들떠서 정처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으니, 산 넘고 물 건너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어찌 수고롭겠는가. 일따라 돌아다녔다. 명산을 찾아 고산을 우러러 보고, ▨▨을 더듬어 절경까지 찾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대사께서는 비록 이 땅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여 두루 현관(玄關)을 뵈었으나, 다른 나라까지 순력하여 모름지기 큰 선비를 뵙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달마(達摩)가 법을 부촉하고 혜가(惠可)가 마음을 전한 이래로 선종이 동쪽으로 전해졌거늘,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리오. 나는 이미 혜목(惠目)을 참알하였고 바야흐로 꽃다운 티끌을 접하였으니, 어찌 뗏목을 버린 마음을 가지고 뗏목을 탈 뜻을 근심하리오?”하였다. 문덕(文德) 초년부터 건녕(乾寧) 말년 사이에 먼저 송계(松溪)에 자리를 잡자, 학인들이 빗방울 처럼 모여 들였으며, 잠시 설악에 머물자 선객(禪客)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어디 간들 감추지 않았을 것이며 어찌 오직 그것 뿐이겠는가!

진성대왕(眞聖大王)이 급히 편지를 보내어 궁전(彤庭)으로 불렀다. 대사는 비록 임금의 말씀을 외람되이 받들기는 하였으나, 조사(祖師)의 업(業)을 어찌 중단하리오.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표를 올리고 굳이 사양하였으니, 가히 하늘 밖 학의 소리는 계림(鷄林)의 경계에 빨리 닿지만, 사람 가운데의 용덕(龍德)을 대궐 문(象闕) 옆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도다. 대사는 인하여 세속을 피하여 홀연히 운수처럼 떠나 명주(溟州)로 가서 머무르며, 산사에 의지하여 마음을 깃들였다. 천리가 잘 다스려져 편안하고 한 지방이 소생한 듯하였다. 얼마 안되어 멀리 김해(金海) 서쪽에 복림(福林)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문득 이 산을 떠났다. 그 소문이 남쪽 경계에 미치고 (대사가) 진례(進禮)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란 자가 있어 (대사의)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고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대사를) 기다리다가 맞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인하여 절을 수리하고 법의 가르침을 자문하는 것이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며,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만난 듯하였다. 효공대왕(孝恭大王)이 특별히 정법전의 대덕인 여환(如奐)을 보내어 멀리 조서를 내리고 법력을 빌었다. 붉은 인주(紫泥)를 사용하고 겸하여 향기로운 그릇(鉢)을 보냈으며, 특별한 사자(專介)를 보내어 신심(信心)을 열게 하였다. 그 임금이 귀의할 때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름이 모두 이러하였다. 어찌 육신보살(肉身菩薩)만이 멀리 성▨(聖▨)의 존중함을 입고, 청안율사(靑眼律師)만이 여러 어진이들의 존중함을 자주 입으리오. 이 절은 비록 지세가 산맥과 이어지고 문이 담장 뿌리(墻根)에 의지하였으나, 대사는 수석이 기이하고 풍광이 빼어나며, 준마가 서쪽 산봉우리에서 노닐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대사(大士)의 정에 과연 마땅하며 신인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띠집을 새로 수리하고 바야흐로 가마를 멈추고, 이름을 봉림(鳳林)이라 고치고 선방을 중건하였다. 이보다 앞서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 眞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은 가정(鯉庭)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대궐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숭앙하고 삼보(三寶)의 집을 돕고 수리하였다. 대사는 마음에 가련히 ▨▨하고 여생을 보낼 뜻을 가졌다. 현묘한 종지를 높이 강연하고 부처의 도를 널리 선양하였다. 과인이 삼가 대업을 받고 큰 기틀을 이어 다스림에, 도안과 혜원의 도를 힘입어 우탕(禹湯)의 운세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듣건대 대사는 당시 천하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해우(海隅;신라)에서 독보적 존재요, 북악의 북쪽에 오래도록 거처하며 동산(東山)의 법을 가만히 전수했다고 한다. (이에) 흥륜사(興輪寺) 상좌(上座) 석언림(釋彦琳)과 중사성(中事省) 내양(內養) 김문식(金文式)을 보내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 간절히 초청하였다. 대사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비록 깊은 산속이나 이 역시 임금의 땅이요, 하물며 (석가모니의) 부촉도 있으니 임금의 사자를 거절하기는 어렵다”하였다. 정명(貞明) 4년(918) 겨울 10월에 문득 산문을 나서서 ▨에 이르렀다. 가마가 11월 4일에 이르러 과인은 면류관과 예복을 정돈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예궁(蘂宮)으로 인도하고 난전(蘭殿)에서 공경히 만났으며,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예를 표하고 공손히 숭앙하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대사는 법복을 높이 휘날리며 법좌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술수를 설하고, 승려에 귀의하고 ▨▨에 ▨▨할 방책을 말하였다. 과인은 기쁜 마음으로 대사의 얼굴을 우러르고 오묘한 종지를 친히 들으매, 감격스러워 거듭 자리를 피하고 기쁨에 일일이 기록하였다. 이날 대사를 따라 궁궐에 오른 자가 80인이니, 무리 가운데 상족(上足) 경질선사(景質禪師)가 있어 우러러 종과 같은 맑음을 두드리고 그윽히 거울과 같은 지혜를 품었다. 대사가 ▨▨를 치매 소리가 조용하였다. 새벽의 해는 온 산에 비치고 맑은 바람에 온갖 만물의 소리가 화답하였다. 조용히 법을 연설하매 공유(空有)의 극단을 오로지 초월하였고, 분연히 선을 얘기하매 세속의 바깥을 진실로 벗어났으니, 누가 그 끝을 알았으리오. 다음날 마침내 모든 관료들에게 명하여 대사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 나란히 ▨(제자?)을 칭하게 하였다. 인하여 벼슬이 높은 사람을 보내어 존호를 올려서 법응대사(法膺大師)라 하였으니, 이는 곧 남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항상 덕을 숭앙하고 삼가 큰 이름을 드러내어 심오한 가르침을 빛나게 하였다. 그후에 대사는 이미 예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와 향기로운 가르침을 거듭 열어서 죽은 도(道)에 빠진 여러 학인들을 깨우쳤으며, 법의 요체를 갖추어 전하여 도탄에 빠진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자애로운 바람을 보시함은 필연적이다. 갑자기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도 마치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듯하매, 대중들은 돌아가실까(兩楹之夢) 의아하여 미리 쌍수의 슬픔을 머금었다. 용덕(龍德) 3년(923) 4월 24일 새벽에 대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모든 법은 다 공(空)하며 온갖 인연은 함께 고요하다. 말하자면 세상에 의지한 셈이니 흐르는 구름과 꼭 같도다. 너희는 힘써 머무르되 삼가하고 슬피 울지 말라”하고는 오른쪽으로 누워 봉림사 선방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로는 70이요 승려 나이로는 50이었다. 이때에 하늘색이 왕성하게 오르고 햇빛이 참담하였으며,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며 풀이 초췌하고 나무가 말랐다. 산짐승이 이에 슬피 울고 들짐승이 슬피 울었다. 문인들은 시신을 받들어 절의 북쪽 언덕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과인은 갑자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인하여 소현승(昭玄僧) 영회법사(榮會法師)를 보내어 먼저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21일째에 이르러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용 물자를 주고 또 시호를 진경대사(眞鏡大師)라 추증하고 탑 이름을 보월능공지탑(寶月凌空之塔)이라 하였다. 대사는 타고난 자질로 지혜로이 깨닫고 산악이 정령(精靈)을 내려서, 자비의 거울을 영대(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인식(認識)의 집에 걸었다. 이에 사방으로 교화를 넓히고 지경마다 자비로움을 보였으니, 알고서도 하지 않음이 없어 넉넉히 여유가 있었다. 세상을 마칠 때까지 마음이 단단하여 잠시라도 번뇌가 일어남이 없었고, 비록 잠깐이라도 몸이 단정하여 세속의 번뇌에 물들지 않았다. 법을 전하는 제자인 경질선사(景質禪師) 등 500여인은 모두 심인(心印)을 전하매 각각 계주를 보존하였다. 함께 보탑 곁에 머무르며, 같이 선림(禪林)의 고요함을 지켰다. 멀리서 (대사의) 행장을 기록하여 비석에 새길 것을 요청해 왔다. 과인은 재주는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배움은 ▨를 상대할 수 없으나, 유약한 붓으로 그 선덕(禪德)을 감히 드날리고 너절한 말로 그 도풍을 널리 펴고자 하노라. 웅이(熊耳)의 명문을 선뜻 재단하는데 어찌 양무제(梁武帝)를 부끄러워 하리오. 천태(天台)의 게송을 추억하며 짓는데 수나라 황제도 부끄럽지 않다.

사(詞)에 이르기를,

석가가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되, 오래도록 떠돌다가 나중에 오리라.

마음은 멸한데 법 흐름 언제 끊고, 도(道) 있거늘 떠난 사람 언제 돌아오리.

위대하도다 철인은 미로(迷路)를 근심하여, 염부제(閻浮提) 성모(聖母)의 태내에 태어났도다.

바다의 높은 파도 일엽편주로 건너고, 가야산 험한 길 삼재(三材)로 돌고자 .

흔연히 자리 앉으매 은색 꽃 피고, 문득 열반을 탄식하매 보월(寶月)은 사라져.

서리 젖은 학림(鶴林)에 슬픔은 길고, 계산(鷄山)의 짙은 안개 한번 걷히길 기다려.

용덕(龍德) 4년 갑신년(甲申年) 4월 1일에 세우고 문하승 성림(性林)이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한국고대사회연구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2]

故眞鏡」

大師碑


有唐新羅國故國師諡眞鏡大師寶月凌空之塔碑銘幷序」


門下僧幸期奉 敎書  門人朝請大夫前守執事侍郞賜紫金魚袋崔仁渷篆」 余製」


余聞高高天象非唯占廣闊之名厚厚地儀不獨稱幽玄之號豈若栖禪上士悟法眞人跨四大而遊化觀風避三端而晏居翫月遂使假威禪伯掃魔▨▨」

離亂之時追令法王扶釋敎於昇平之際以至慈雲再蔭佛日重輝外道咸賓彌天率服持秘印而發揮奧旨擧玄網而弘闡眞宗唯我大師則其人也」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鼇山稟氣鰈水騰精握文符而出自相庭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永安兎郡之人克奉三朝遐撫辰韓之俗考盃相道高莊老志慕松喬水雲雖縱其閑居朝野恨其無貴仕 妣朴氏嘗以坐而假寐夢得休▨▨」

後追思因驚有娠便以斷其葷血虛此身心潛感幽靈冀生智子以大中九年十二月十日誕生大師異姿瞻發神色融明綺紈而未有童心齠齔而▨▨」

佛事聚沙成塔摘葉獻香

年九歲徑往惠目山謁圓鑑大師大師知有惠牙許栖祇樹歲年雖少心意尙精勤勞則高鳳推功敏捷則揚烏讓美俾踐僧▨▨」

離法堂咸通九年先大師寢疾乃召 大師云此法本自西天東來中國一花啓發六葉敷榮歷代相承不令斷絶我曩遊中土曾事百巖百巖承嗣於▨▨」

江西繼明於南嶽南嶽則漕溪之冢子是嵩嶺之玄孫雖信衣不傳而心印相授遠嗣如來之敎長開迦葉之宗汝傳以心燈吾付爲法信寂然無語因▨▨」

洹 大師目訣悲深心喪懇切尤積亡師之慟實增絶學之憂十有九受具足戒旣而草繫興懷蓬飄託跡何勞跋涉卽事巡遊訪名山而仰止高山探▨▨」

而終尋絶境或問曰 大師雖備遊此土遍謁玄關而巡歷他方須參碩彦 大師答曰自達摩付法惠可傳心禪宗所以東流學者何由西去貧道已▨▨」

目方接芳塵豈料捨筏之心猶軫乘桴之志文德初歲乾寧末年先宴坐於松溪學人雨聚暫栖遲於雪嶽禪客風馳何往不臧曷維其已」

眞聖大王遽飛睿札徵赴彤庭 大師雖猥奉王言而寧隳祖業以修途多梗附表固辭可謂天外鶴聲早達於雞林之畔人中龍德難邀於象闕之旁▨▨」

因避煙塵欻離雲水投溟州而駐足託山寺以栖心千里乂安一方消息無何遠聞金海西有福林忽別此山言歸南界及乎達於進禮暫以踟躕爰有▨▨」

進禮城諸軍事金律熙慕道情深聞風志切候於境外迎入城中仍葺精廬諮留法車犬猶如孤兒之逢慈父衆病之遇毉王」

孝恭大王特遣政法大德如奐逈降綸言遙祈法力佐紫泥而兼送薰鉢憑專介而俾披信心其國主歸依時人敬仰皆此類也豈惟肉身菩薩遠蒙聖▨▨」

尊靑眼律師頻感群賢之重而已哉此寺雖地連山脈而門倚墻根 大師以水石探奇煙霞選勝遊西岫梟唳舊墟豈謂果宜大士之情深愜神人▨▨」

所以刱修茅舍方止 輿改號鳳林重開禪宇先是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金仁匡鯉庭稟訓龍闕馳誠歸仰禪門助修寶所 大師心憐▨▨」

意有終焉高演玄宗廣揚佛道寡人袨膺丕構嗣統洪基欲資安遠之風期致禹湯之運聞 大師時尊天下獨步海隅久栖北岳之陰潛授東山之法▨▨」

興輪寺上座釋彦琳中事省內養金文式卑辭厚禮至切嘉招 大師謂衆云雖在深山屬於率土況因付囑難拒王臣貞明四年冬十月忽出松門屆于▨」

輦至十一月四日寡人整其冕服稍淨襟懷延入蘂宮敬邀蘭殿特表師資之禮恭申鑽仰之儀 大師高拂毳衣直昇繩榻說理國安民之術敷歸僧▨▨」

之方寡人喜仰慈顔親聞妙旨感激而重重避席忻歡而一一書紳此日隨 大師上殿者八十人徒中有上足景質禪師仰扣鍾鳴潛廻鏡智大師▨▨」

撞擊聲在舂容曉日之暎群山淸風之和萬籟縱容演法偏超空有之邊慷慨譚禪實出境塵之表莫知其極誰識其端翌日遂命百寮詣於所止同列稱▨」

仍差高品上尊號曰法膺大師此則盡爲師表常仰德尊恭著鴻名以光玄敎 其後大師已歸舊隱重啓芳筵諭諸學於道灰俱傳法要援群生於途炭▨」

䞄慈風則必忽患微痾猶多羸色大衆疑入兩楹之夢預含雙樹之悲龍德三年四月二十四日詰旦告衆曰諸法皆空萬緣俱寂言其寄世宛若行雲汝等」

勤以住持愼無悲喪右脅而臥示滅於鳳林禪堂俗年七十僧臘五十於時天色氛氳日光慘澹山崩川竭草悴樹枯山禽於是苦啼野獸以之悲吼門人等」

號奉色身假于寺之北嶺寡人忽聆遷化身惻慟情仍遣昭玄僧榮會法師先令吊祭至于三七特差中使賚送賻資又以贈諡眞鏡大師塔名寶月凌空」

之塔 大師天資惠悟嶽降精靈懸慈鏡於靈臺掛戒珠於識宇於是隨方弘化逐境示慈知無不爲綽有餘裕至於終世心牢無瞥起之情雖在片時體正」

絶塵勞之染傳法弟子景質禪師等五百餘人皆傳心印各保髻珠俱栖寶塔之旁共守禪林之門遠陳行狀請勒貞珉寡人才謝凌雲學非對▨柔翰敢揚」

其禪德菲詞希播其道風遽裁熊耳之銘焉慙梁武追製天台之偈不媿隋皇其詞云」

釋迦法付大龜氏千劫流轉示後來心滅法流何日絶道存人去幾時廻偉矣哲人憂迷路生於浮世降聖胎慾海波高橫一葦邪山路險軫三材方忻宴坐」

銀花發忽歎泥洹寶月摧霜霑鶴樹悲長悴霧暗鷄山待一開」

龍德四年歲次甲申四月一日建門下僧性林刊字」

(陰記)

(마멸)金魚袋崔仁渷篆」

(마멸)假威禪伯掃魔」

(마멸)大師則其人」

(마멸)略而高扶王室」

(마멸)而假寐夢得休」

(마멸)有童心齠齔而」

(마멸)▨讓美俾踐僧」

(마멸)▨▨岩承嗣於」

(마멸)信寂然無語因」

(마멸)而仰止高山探」

(마멸)由西去貧道已」

(마멸)邀於邃闕之傍」

(마멸)暫以踟躕爰有」

(마멸)身菩薩遠蒙聖」

(마멸)之情深愜神人」

(마멸)所 大師心憐」

(마멸)潛授東山之法」

(마멸)月忽出松門屆于」

(마멸)民之術敷歸僧」

(마멸)廻鏡智 大師」

(마멸)詣於所止同列稱」

(마멸)要援群生於塗炭」

(마멸)寄世宛若行雲汝等」

(마멸)獸以之悲吼門人等」

(마멸)大師塔名寶月凌空」

(마멸)之情雖在片時體正」

(마멸)學非對曰柔翰敢揚」

(마멸)險軫三材方忻宴坐」

(마멸)性林刊字」

(마멸)▨已閏七月 日重竪北刊」


주석

  1. 온라인 참조: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