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문
탑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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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文 |
승려 | 충감(冲鑑) |
찬자 | 위소(危素) |
서자 | 양지(楊池) |
번역문
- 출처: 최연식,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고려 임주 대보광선사비(題額)
고려 임주 대보광선사 중창비 봉훈대부 국자감승(奉訓大夫 國子監丞) 위소(危素)가 지음. 승무랑 비서감비서랑(承務郞秘書監秘書郞) 양지(楊池)가 씀. 가의대부 숭문태감 겸검교서적사(嘉議大夫 崇文太監 兼檢校書籍事) 주백기(周伯琦)가 전액(篆額)을 씀.
옛날에 삼한(韓大)의 큰 스님인 원명(圓明) 국사가 세속의 영예를 버리고 (은거하여) 그 뜻을 온전히 하려고 하자 그 나라의 국왕(충숙왕(忠肅王)을 가리킴)이 재상인 장항(張沆)을 보내 임주(林州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까지 뒤쫓아 가게 하였다. 임주에는 옛날부터 보광사(普光寺)가 있었는데, 계곡과 산이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이곳의) 나이 든 스님 혜담(惠湛)과 달한(達閑) 등이 상서 전충용(田冲用)과 함께 국사를 만류하며 이곳에 머물게 하였는데, 국사의 문인은 3천여 명을 헤아렸으므로 이들을 다 수용하기에는 건물이 부족하였다. 이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인 최현우(崔玄佑)가 휘하의 관원들을 이끌고 늘려 지으려 하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 소식을 듣고 와서 시주하는 사람들이 구름과 같았다. 승려들의 요사채와 손님들이 머무는 방, 창고, 주방에 이르기까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모두 5백 간(間)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스님의 큰 형인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 치사(致仕)한 김영인(金永仁)과 둘째 형인 중대광 평양군(重大匡 平陽君)인 영순(永純)도 이에 감격하고 발원하여 집에서 부리는 노비 100명과 토지 100경(頃)을 사찰에 시납하였다. 얼마 지나서 절은 크게 번창하여 큰 도량이 되었다. 그후 스님께서 입적하실 때에 문도인 소주(紹珠)와 혜인(惠因) 등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찰을 이제 다시 새롭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흩어지지 말고 서로 이어서 주지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문도들은 스승의 뜻을 받아서 영원히 이어가고 있다. 그 나라 도성에 있는 선원보은선사(禪源報恩禪寺)의 주지인 굉연(宏演)이 와서 그 일을 적어줄 것을 청하였다. 굉연이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적에 그 절에서 경전을 배웠으므로 그 일을 적어달라는 부탁을 뒤로 미루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굉연에게서 스님의 행적을 전해듣고서 아울러 기록한다 . 스님의 휘는 충감(冲鑑)이고 자(字)는 절조(絶照), 호는 설봉(雪峰)이다. 어렸을 적부터 이미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놀 때에는 비단으로 가사를 만들어 부처님 놀이를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부모님의 명령을 받아 선원사(禪源寺)에서 출가하고 자오(慈悟) 국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나이 열 아홉에 승과에서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어느 날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비록 시방세계 부처님들의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많은 청정한 가르침을 모두 익힌다고 하여도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을 늘릴 뿐으로 어찌 무루과(無漏果 : 번뇌가 없는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를 닦음만 하겠는가’라 하고서 지금까지 공부하던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옷을 떨쳐 일어나 여러 지방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돌아다녔다. (중국의) 오초(吳楚 : 강남지방) 지역에 머물 때에 철산(鐵山) 소경(紹瓊) 선사의 도행이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 모시니 소경선사도 크게 기대하였다. 소경선사가 중국으로 돌아감에 미쳐 스님은 용천사(龍泉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가 제정한 『선문청규(禪門淸規)』를 가지고 실행하였다. 그후 선원사에서 15년간 주지하면서 선문의 종지를 드날려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보광사로 온 것은 두 번째 사용된 지원(至元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35~1340년까지 사용) 2년(충숙왕 복위5, 1336)이었다. 그로부터 4년째 되는 해 8월 24일에 곧 입적하려 함에 문인들에게 비석과 탑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곧 목용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가부좌를 하고 반듯하게 앉았다. 소주(紹珠)가 앞으로 나와서 ‘스승께서는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스님은 ‘마지막의 하나를 붙이니 너희들은 나누어 갖도록 하라(末後一著汝等有分薦取)’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곧바로 돌아가시니 세상의 나이로는 65세이고, 승려로서의 나이는 58이었다. 태어난 것은 첫 번째 지원(前至元 : 원나라 世祖의 연호, 1264~1294년까지 사용) 12년인 을해년(충렬왕 1, 1275) 초하루가 을유(乙酉)인 달의 신유(辛酉)일이었다.
나는 불교의 가르침이 서쪽에 있는 천축(天竺 : 인도)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수 만리를 멀다하지 않고 와서 동해바다의 끝까지 전해졌으니 얼마나 융성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원명국사와 같은 뛰어난 분이 계시니 그 가르침이 더욱 발전하고 더욱 밝아질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일 보광사에서 대대로 스님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어찌 어그러지고 무너질 때가 있을 것인가. 이에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명(銘)을 덧붙인다. (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가 삼한의 옛 땅에 나라를 여니 넓은 바다를 끼고 동오(東吳 : 중국의 강남지방)와 이어져 있다. 서쪽의 신독(身毒 : 인도)와 함께 각기 하늘 끝에 있는데 어느 때에 패다(貝多 : 貝葉에 쓴 글, 불경을 가리킴)과 범서(梵書 : 梵語로 쓴 책, 불경을 가리킴)가 전해져 학자들이 마음의 근본 바탕을 깨달았는가. 소경(紹瓊) 선사가 석장을 날려 이곳으로 오시니 원명(圓明) 국사가 가까이 모시었다. 조계(曹溪)의 바른 가르침을 힘써 떠받들었으니 한 마디 말이 오묘하게 일치하여 만가지 생각이 사라졌도다. 있음이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없음이 아니니 삶과 죽음은 하나로 돌아가 다를 바 없도다. 보광(普光)의 큰절에는 범종과 목어가 울리고 금빛과 푸른색이 빛나니 구름과 안개를 깔아 놓은 듯하다. 많은 학자들이 가르침을 구하여 몰려와 한가로운 마음으로 수행하며 진여를 밝히네. 가람은 번성한데 스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명(銘)을 새기고 사적을 기록하여 모범을 밝힌다. 하늘과 땅은 평안하여 교화의 날이 펼쳐졌으니 천자는 만수무강하시어 상서로움에 부합하소서. 지정(至正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41~1367년까지 사용) 18년인 무술년(공민왕 7, 1358) 6월 일에 문인 등이 비를 세우고, 글씨는 회정(懷正)이 새김.
(음기) 국사께서 머무실 때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임진년의 병란에 건물이 모두 불탈 때에 비를 보관하고 있던 건물도 잿더미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멸이 심하여 글씨를 누군들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국사의 행적이 사라져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주지인 석(釋) 능일(能一)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장인들을 모아 비석의 기록을 새롭게 하니 천년 전의 옛 자취가 어제 일처럼 분명하게 되었다. 아아, 아름답도다. 건륭(乾隆 : 청(淸)나라 고종(高宗) 연호, 1736~1795년까지 사용) 15년 경술년(영조 26, 1750) 6월 20일에 고쳐 새겨 세움. 철행(哲行) 성일(性日) 가선도영(嘉善道英) 상밀(尙密) 인행(印行) 경민(敬敏) 가선명찬(嘉善明贊) 이때의 주지 통정능일(通政能一) 삼강(三綱) 수승(首僧) 광훈(廣訓) 삼보(三寶) 해종(海宗) 지사(持寺) 응해(應海) 시석(詩釋) 해명(海明) 각자(刻字) 이충언(李忠言) 수종승(隨從僧) 각열(覺說) 공양주(供養主) 쌍윤(雙允)
판독문
- 출처: 허흥식, 『韓國金石全文』 中世下, 아세아문화사, 1984.[1]
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 (題額)」 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剏碑」 奉訓大夫國子監丞危素撰」 承務郎秘書監秘書郎楊池書」 嘉議大夫崇文太監兼檢校書籍事周伯琦篆」 昔三韓大浮圖圓明國師謝絕世榮歸求其志高麗 國王遣宰相張沆追及於林州州故有普光寺溪山幽勝耆宿惠湛達閑等與尙書田冲用遮留」 國師於此其門人三千餘指室屋不足以容楊廣道按廉崔君玄佑率其官屬謀爲增葺遠近聞風而至施者雲委僧」 寮賓館倉庫庖廚無不畢備爲屋凡五百間師之伯氏判典客寺事致仕金君永仁仲氏重大匡平陽君永純感激發」 願家童百人有田百頃歸于寺久之蔚然爲大道塲矣其後師示寂謂其徒紹珠惠因等曰寺旣重新汝等以勿散席」 甲乙而主之於是☐徒以受師志相繼無窮也因都城禪源報恩禪寺住持宏演來求書其事宏演之言曰吾少也受」 經玆寺紀述之託誠不敢後於是從宏演得師之始終而幷書之師諱冲鑑字絕照號雪峯髫齓時巳不茹葷與群兒」 嬉戱以帛製伽黎衣爲佛事稍長禀命父母祝髪於禪源寺禮慈悟國師以爲師年十有九入選登上上科一旦喟然」 歎曰雖復修持十方如來淸淨敎理如恒河沙乃益自勞曷若脩無漏果乃舍所事卽拂衣遊諸方宿留吳楚聞鐵山」 瓊禪師道行甚高迎之東還師執侍三載瓊公甚期待之及瓊公辭歸師主龍泉寺始取百丈海禪師禪門淸規行之」 後住禪源寺者十有五年弘揚宗旨爲 國矜式其來普光也寔再紀至元之二年越四年八月二十有四日將入滅戒門入母立碑造塔遽沐浴更衣跏趺端坐」 紹珠進白請和尙爲衆說法師曰末後一著汝等有分薦取言訖翛然而逝世壽六十有五僧臘五十有八生前至元」 之十有二年乙亥乙酉朔辛酉日也余甞論佛氏之學西出於天竺乃不遠數萬里被于東海之表何其盛哉而其卓」 然樹立如圓明師者冝其敎之益昌而益明若普光之寺世世以師爲楷則尙惡有隳廢之時也耶庸叙次之而系以」 銘其辭曰 高麗開國三韓墟 滄海浩渺連東吳 西詹身毒久天隅 何年貝多傳梵書 學者悟明心地初」 瓊公飛錫來此都 圓明國師侍起居 曹溪正宗湏力扶 一言妙契萬念除 謂有非有無非無」 死生一致不可渝 普光大刹鳴鍾魚 金碧炫晃雲霞鋪 翩翩學者承風趍 優游食息明眞如」 精藍欝欝師已殂 勒銘紀述昭楷模 乹坤淸夷化日舒 天子萬壽當禎符」 至正十八年戊戌六月日門人等入立石刻字懷正」 (陰記) 國師住笻刱建此寺而壬辰兵燹殿宇俱焚藏碑遺閣未免灰燼而紀蹟之碑但存其體剝落之字誰能卞明而國師遺蹟泯乎無徵矣住持釋能一慨然玆斯募工改刻碑誌重新千年故蹟昭昭若昨日事矣於戱美哉乾隆十五年庚午六月二十日改刻設立」 哲行 性日 喜善道英 尙密 印行 敬敏 嘉善明賛 時住持通政能一 三綱首僧 廣訓 三寶海宗 持寺應海 詩釋 海明 刻字李忠言 隨從 僧覺說 供養主雙允」
주석
- ↑ 온라인 참조: "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