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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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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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이칭 |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입석리) 실상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34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미상 |
서자 | 미상 |
각자 | 미상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수철 |
건립연대 | 905년 |
승탑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
비문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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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實相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
내용
개요
탑비는 대석(臺石),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893년(진성왕 7) 5월 4일 입적하였는데, 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따르면, 탑비는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지고, 1714년(숙종 40)에 중건[1]되었다.
비문의 찬자·서자·각자는 알 수 없으며, 비문에는 관직명만이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비문의 찬자를 최치원(崔致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비문의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3]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4] 이수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다투는 듯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채운 형태가 전후면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면에는 ⌂형으로 액(額)을 마련 후 '능가보월탑비(楞迦寶月塔碑)' 라는 전액(篆額)을 새겼다.[5]
비문
비문은 마멸과 결락이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많으며, 그로 인해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판독문을 제시하고 있다.[6]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수철화상은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深源寺)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국사수철화상(深源寺□□□國師秀澈和尙)'으로 쓰여 있다.[7]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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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 수철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 남원 실상사 | A는 B에 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1714년 탑비가 중건된 사실과 관련하여, 원래의 비신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보는 의견(정선종, 하일식, 최경선)과, 다시 비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을 새롭게 복각했을 것이라는 의견(추만호, 정병삼)이 있다.
- ↑ 추만호. 그러나 세련되고 정제된 변려문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치원의 글과 비교하여 수철화상탑비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있다. 또한 최치원은 898년 정월 해인사 중창과 관련된 글을 찬술한 시점에는 사실상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상태로 추정되기 때문에 904~905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비문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최경선, 220-221쪽.)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문화재청
-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 ↑ "건조물문화재(석조) 정기조사서",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확인:2017년 4월 12일. - ↑ 논문목록
- ↑ 김응현,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