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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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6월 7일 (수) 21:47 판 (판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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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 2008.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조선향토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탑비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한자 開城 靈通寺 大覺國師碑
승려 의천(義天)
찬자 김부식(金富軾)
서자 오언후(吳彦侯)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15-178쪽.[1]

증시(贈諡) 대각국사(大覺國師) 비명(碑銘) [전액(篆額)]

고려국 오관산(五冠山) 대화엄(大華嚴) 영통사(靈通寺) 증시 대각국사 비명과아울러 서문(序文)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檢校) 태위(太尉)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부사(禮部事) 수국사(修國史) 상주국(上柱國) 신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조산랑(朝散郞) 상서 공부시랑(工部侍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오언수(吳彦修)는 칙선(勅宣)에 의하여 비문을 쓰다.

인종 임금께서 왕위를 이은 지 4년째인 을사년 가을 7월 경오일에 아울러 전액(篆額)까지 내렸다. 대각국사 문인인 도승통(都僧統) 징엄(澄儼) 등이 국사의 행장(行狀)을 임금께 올려 고하기를 우리 선사(先師)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 비명(碑銘)이 저술되지 않아서 항상 그의 위대하신 덕업(德業)이 마멸된 바가 있어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오니, 오직 임금께서는 이 일을 통찰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미래에 구원(久遠)토록 전시(傳示)되게 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슬프도다. 국사는 나에게 종조부가 되신다. 유업(遺業)으로 남기신 공적의 여열(餘烈)에 대하여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를 어찌 덮어 두고 나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신 부식에게 행장을 주시면서 말씀하시되, “자네가 비명을 지으라”고 하시므로 신이 사양하다 못하여 물러나와 서술하되, 신의 보는 바로는 국사는 성인의 도(道)에 있어서 천성적으로 갖추어 태어날 뿐 아니라 날 때부터 이미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였다. 무엇으로써 그러한 줄 아느냐하면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었고 분잡하고 화려한 세속적 영광에 대해서는 마음에 조금도 유혹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가함에 미쳐서 도덕은 쇠퇴하고 학문은 황폐한 때를 당하여 국사만이 능히 시대적인 세태와 배치되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독보적인 개혁자로서, 옛 성현의 자취를 따라 조술(祖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7세의 단명이었으나, 그의 세운 바 업적은 이와 같이 위대하였다.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스스로의 정성(精誠)으로 발명(發明)한 자’라 하였으니, 그와 같은 유(類)라고 하겠다.

국사의 휘는 석 후(釋煦)이고, 속성은 왕씨이며, 자는 의천(義天)이었으나, 그 후 이름이 송 나라 철종(哲宗)의 휘와 같다하여 이름 대신 자(字)를 대행(代行)하였다. 국사는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 또한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니, 어느 날 밤 꿈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국사는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고 문장을 풀이하며 작문함에 있어서, 그 정민(精敏)함이 숙세(宿世)에 이미 익힌 것과 같았다. 국사의 다섯 형제가 모두 현명하였으나, 국사가 더욱 걸연(傑然)하고 봉영(鋒穎)이 빼어났다.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리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 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이미 성인(成人)이 된 후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등관법사(燈觀法師)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전해주는 것을 받았다. 이 때부터 국사는 혜해(慧解)가 날마다 증진하였다.

나이 장년에 이르러서부터 더욱 스스로 근고 정진(勤苦精進)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골골(矻矻)하여 많은 책을 열람하고 억세게 기억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덕이 높은 이가 있으면 지체없이 찾아가서 문학(問學)하였다. 현수교관(賢首敎觀)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大小乘)의 경율론(經律論)에 따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여력(餘力)으로 외학(外學)에 대해서도 견문이 연횡(淵橫)하여 중니(仲尼)와 노염(老聃)의 서적과 제자백가의 집록(集錄), 모든 사기(史記)까지도 또한 일찍부터 그 청화(菁華)함을 완미(玩味)하여 그 근저를 찾아냈으므로 의론이 종횡으로 치빙(馳騁)하고 곤곤(滾滾)하여 그 끝이 없었다. 비록 노사(老師)와 숙덕(宿德)이더라도 모두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자인하였다. 칭송하는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널리 들려서, 당시 사람들이 국사를 일컬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최고의 종장(宗匠)이라고 하였다.

정미년 7월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국사는 일찍부터 송 나라에 가서 불교를 문학(問學)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중, 진수(晉水)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혜행(慧行)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국사는 박가(舶賈)에 의탁하여 편지를 보내 예를 갖추었다. 원공(源公)이 편지를 받아 보고 국사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 알고는 곧 답장을 써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로 말미암아 국사는 가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선종(宣宗)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인송 나라 원풍 7년 정월 궁내에 들어가 입송 구법(入宋求法)하고자 출국을 허락하여 달라고 정성껏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문종이 군신들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왕자의 신분으로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락을 받지 못한 국사께서는 어전에서 “군신들과 성현들은 신명을 망각하고 불도를 흠모하였으니, 현장법사(玄奘法師)는 서역(西域)에 갔고, 의상조사(義湘祖師)는 중국에 들어가 구법하였거늘 어찌 편안하게만 지내고 스승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출가한 본의가 아닙니다” 라면서 고하는 말이 간절하여 말하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리하여 문종은 크게 감동하여 마음으로는 허락하였으나, 군신들의 결의는 확고하여 불허 방침으로 끝났다. 다음해 4월 경오일 밤 왕과 태후에게 올리는 편지를 남겨놓고, 제자 수개(壽介)를 거느리고 휘복(徽服)으로 정주(貞州)에 이르러 마침 상객선(商客船)의 출발함을 만났다. 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관료와 제자인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을 보내어 수종케 하였다. 5월 갑오에 대송 판교진(判橋鎭)에 이르렀다. 이 때 밀주(密州)지사(知事)인 조봉랑(朝奉郞) 범악(范鍔)이 영접하여 여행 중의 노고(路苦)를 위로하고, 철종에 표주(表奏)를 올려국사가 송 나라에 온 뜻을 구진(具陳)하였다. 황제가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인 소주정(蘇注廷)에 명하여 안내토록 하였다. 7월 경사의 계성사(啓聖寺)에 들어갔다.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이 주관하여 수일 후 부름을 받아 수공전(垂拱殿)에서 철종을 배알하고 객례(客禮)로써 기다려 아름다운 의류, 요, 이불등 몇 가지의 총품(寵品)을 받았다. 다음날 표장(表狀)을 올려 수업할 스승을 소개해 줄 것을 건의하였더니, 황제는 특조를 내려 주선해 주도록 하였다. 드디어 화엄종의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친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황제께서 우세 승통이 송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가(兩街)에 명하여 미리 고재 석학(高才碩學)을 선발하여 사범(師範)에 감당하도록 하였으므로 양가에서 유성법사를 추천하였다. 승통이 그 곳에 이르러 법사의 하풍(下風)에 구의(摳衣)하고, 제자의 예를 행하려 했다. 그러나 유성법사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받아들였다.

이에 국사께서 법사에게 여쭙되, “모갑(某甲)은 해외의 비속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도를 구하였으나, 아직 얻은 바가 없으니, 원하옵건대 법사께서는 자민히 여기시어 저의 미혹한 무명의 구름을 흩어주소서” 라 하였다. 법사가 대답하기를, “고불(古佛)들은 고심(刳心)하여 법을 구하되 내지 일문(一文)과 일구(一句)를 구함에 있어서도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자리까지 기꺼히 던져 버렸는데, 지금 상인(上人)이 능히 실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한다” 면서 감탄하였다. 법사가 말하되, “일승법(一乘法)에 뜻을 같이하며 함께 만행(萬行)을 닦아 화장세계(華藏世界)에 유희(遊戱)하려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 고 했다. 이 때 승통이 일승의 법문을 청문(請問)하였다. 법사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승통은 말의 뜻이 아름답고 간절하여 심심 미묘(甚深微妙)한 중관(重關)의 법을 잘 질문하니, 법왕(法王)의 진자(眞子)가 아니면 의상(義湘)의 후신(後身)이다” 라고 하였다. 다시 조지(朝旨)를 받들어 주객원외랑 양걸(楊傑)과 함께 경사를 나와 연소(沿泝)하여 회사(淮泗)에 이르렀다가 침심(浸尋)하여 여항(餘杭)에 있는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를 찾아가서 정원법사(淨源法師)를 친견하고 전일 유성법사를 만난 때와 같이 예를 올렸더니 원공(源公)이 엄연(儼然)히 앉았다. 승통이 그의 앞에 나아가 여쭙되, “모갑이 스님의 도덕을 앙모하여 하루를 1년으로 여기고 일체 험난함을 꺼리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찾아왔사오니, 원하옵건대 금구(金口)의 옥음(玉音)을 개시(開示)하여 마침내 깨닫도록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라 했다. 원공이 이르기를, “옛날 혜사대사(慧思大師)가 한번 지의(智顗)스님을 친견하고 곧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함께 지냈던 구면임을 알았으니 지금 승통이 찾아옴도 어찌 숙연(夙緣)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슬행(膝行)하는 예의를 차릴 것 없이 듣고자함을 청문(請問)하라” 고 했다. 그리하여 그 정성이 도응(道應)에 투합(投合)한 것이 마치 개자(芥子)가 바늘 끝에 닿는 것과 같았다. 묻는 대로 걸림없이 척척 대답하여 그 용용(舂容)을 다하였다. 원공이 지주(知州)인 포종맹(蒲宗孟)의 초청으로 남산(南山) 혜인원(慧因院)에 입원(入院)하여 주역본(周譯本)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하게 되었다. 승통이 돈을 희사하여 큰 재(齋)를 베풀었는데 많은 학도들이 모여 들었다. 원공이 전에 거주하던 곳에 각각 현수(賢首)의 교장(敎藏)과 아울러 현수조사(賢首祖師)의 등상을 안치하고, 이를 다시 마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양걸(楊傑)이 그 뜻을 알고 포종맹 지주와 모든 관료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경영하였다. 승통도 많은 은(銀)을 희사하고 교장 7,500여 권을 안치하였다. 귀국한 후 또 금서(金書) 대장경 삼역본(三譯本) 180권을 보내어 성수(聖壽)를 빌었다. 혜인원이 본래는 선원(禪院)이었으나, 강원(講院)으로 고치고 조세를 특면하였으니, 이는 본국 조정에서 국사를 위해서 경비를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고려의 선종이 송의 철종에게 상표하여 국사를 귀국하도록 청하였다. 드디어 철종이 조칙으로 승통을 경사로 오게 하였는데 원공과 함께 오는 선상(船上)에서도 강학(講學)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원우(元祐) 원년(元年)후 2월 13일 입경(入京)하여 황제를 재견하고 5일 동안 머무른 다음, 조정에서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주(秀州) 진여사(眞如寺)에 이르러 능엄경(楞嚴經) 주소(疏主)인 장수자선선사(長水子璿禪師)의 탑정(塔亭)이 경비(傾圮)한 것을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하여 희사금(喜捨金)을 사승(寺僧)에게 주어 보수토록 하였다. 양공(楊公)이 말하기를, “선공(璿公)이 오늘에야 비로소 지음(知音)을 만났다” 고 하였다. 오흥(吳興)의 장형(章衡)기(記)에 그 사실을 기록하되, “승통은 참으로 독후(篤厚)한 호학 군자(好學君子)라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그 해 4월에 다시 혜인원에 갔더니 원공이 도를 전(傳)하여 마치고 정좌(正坐)하여 분향하고 이르기를, “원컨대 승통은 귀국하여 광작불사(廣作佛事)하되, 한 등불을 전함으로부터 백천등(百千燈)으로 하여금 상속하여 무궁토록 하라”하고, 드디어 경서(經書)와 향로와 불자(拂子)를 전해 줌으로써 표신(表信)을 삼았으니, 이는 특히 승통 뿐만 아니라 원공에게도 도움이 되어 도가 더욱 증진되었다. 원공의 이름이 더욱 높아진 까닭은 승통이 더욱 발양(發揚)한 셈이 된다. 원법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와 천태산(天台山)에 이르러 정광불롱(定光佛隴)에 올라가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영정(影幀) 앞에서 직접 동국(東國)에 천태종지(天台宗旨)를 전포(傳布)하려는 발원문을 지어 탑전(塔前)에서 서원(誓願)을 세웠다. 이 사실을 양걸이 기록하고 중립(中立)스님이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밀경(密京)에서 시작하여 오월(吳越)로 왕래하는 동안에 무려 14개월이 걸렸다. 이르는 곳마다 명산과 승경(勝境), 그리고 모든 성적(聖跡)이 있는 곳에는 참배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친견하여 법요(法要)를 청문(請問)한 고승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정원법사와 같이 있었던 시간은 59일이나 되었다. (결락) 혜림(慧林)과 선연(善淵)이고, 계율(戒律)에 대하여 자문한 스님은 택기(擇基)와 원조(元照)스님이며, 범학(梵學)은 인도로부터 중국에 와서 흥국사(興國寺)에 있던 서천삼장(西天三藏)인 천길상(天吉祥)과 소덕(紹德)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탁연(卓然)하여 존경할만한 스님들이므로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장점을 길러 일가(一家)를 이룩한 선(禪), 강(講)의 종사(宗師)로서 각기 대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락) 승통은 삼장(三藏)과 모든 학문을 두루 겸비하였으니, 참으로 이는 중법대보살(重法大菩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통은 시학(始學)이 아니라, 자기의 소견과 모든 스님들과의 서로 시론(試論)해 보려고 송 나라에 온 것이라고 모든 스님들이 입을 모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승통에게 준 시에 “우세 승통과 같은 스님이 또 누구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결락)

삼한(三韓)의 왕자가 서쪽으로 와서 법을 구하니 “마치 습착치(習鑿齒)와 미천석도안(彌天釋道安)이 서로 대적함과 같아서 당시의 현인들로부터 추존(推尊)하는 바가 되었다” 라고 한 것이 이와 같은 유(類)이다. 5월 20일 본국의 조하사(朝賀使)가 돌아오는 편을 따라 배를 타고 29일 (결락) 임금을 비롯하여 좌우 신하가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의 황제가 기증한 금사(金絲)로 짠 비단과 국왕 태후 (國王太后)가 기송(寄送)한 재보(財寶)가 수만 량에 달한 거금이었다. 이 모두를 사원 도량(寺院道場)과 법문을 청해 들었던 여러 스님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무소(無少) (결락)

국사는 탄생한 이후 일찍부터 그 기본이 이미 노성(老成)한 사람과 같았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국가가 항상 큰 스님을 구하였으나, 그러한 인물을 얻지 못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교리를 선양하여 묘리(妙理)를 터득하고 신비(神秘)를 궁진(窮盡)하여 학인이 바다처럼 모여들어 아직까지 이와 같이 왕성한 회상(會上)이 없었다. 임금과 군신들이 (결락) 태불강고(怠不講故)로 관저(官褚)와 사저(私褚)를 모두 털어서 재차(再次)에 걸쳐 중국, 거란, 일본 등지로부터 경서를 구입하였다. 또 신미년 봄 남방으로 다니면서 수색하여 얻은 책이 무려 4,000권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먼지로 얼룩져서 글자가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백공천창(百孔千瘡)일 뿐 아니라 책장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단괴(斷壞)되어 어그러진 것들이다. 이를 모두 수합하여 궤중(軌中)에 담아가지고 개성으로 돌아와서 흥왕사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명유학자(名儒學者)를 소집하여 유결(謬缺) 부분을 교정 보완하고, 그를 모두 연참(鉛槧)하여 몇 년만에 문집이 대비되었으므로 학자들이 기꺼히 의뢰하였다.

갑술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 : 宣宗) 이 왕위를 계승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됨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獻宗)이 두 차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王都)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不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겹합(鵊鴿) 재원(在原)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寡人)이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拂衣)하였으나 일찍부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非夷非惠)하고 시속(時俗)과 더불어 권서(卷舒)가 무애(無礙)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義理)를 거역할 수 없다” 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면서 교학 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정축년 5월 국청사(國淸寺)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간에 폐멸(廢滅)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스스로 전당(錢塘) 에 가서 도(道)를 문학하고 천태불롱(天台佛隴)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誓願)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서원을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 인예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 국사는 이 때에 천태교문(天台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연구하여 모두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이 원명(圓明)하고 언어와 묵언(黙言)이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고수하려는 집유(執有)의 생각을 발진(拔盡)하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파(破)하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학자(學者)가 국사의 성애(聖涯)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1,000명이나 되었다. 왕성한 지라!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세에 불천(不遷)하는 종지(宗旨)라 하였으니 어찌 신행(信行)하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무인 4월 경인에 숙종 임금이 다섯째 왕자에게 명하여 국사를 시봉(侍奉)토록 하고 손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도승통(都僧統)인 징엄(澄儼)이 바로 이 스님이다. 신사년 2월에 숙종 임금이 홍원사(洪圓寺)에 구조당(九祖堂)이 낙성됨으로써 국사를 청하여 중수(重修)하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는데 전대로부터 화엄종의 조보(祖譜)가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으나, 이제 여기서는 ①마명(馬鳴), ②용수(龍樹), ③천친(天親), ④불타(佛陀), ⑤광통(光統), ⑥제심(帝心), ⑦운화(雲華), ⑧현수(賢首), ⑨청량(淸凉) 등으로 구조(九祖)를 삼았으니, 이것은 국사가 배정(配定)한 바이다. 8월에 이르러 병을 만나 궤상(几床)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을 하다가 때로는 지경(持經)도 하여 피로하다고 하여 스스로를 중지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 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寶幢)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의 진방(震方)에 안적(安庴)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불법이 양(梁) 나라 대통(大通) 원년(元年) 정미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원효와 의상이 중흥하였으니, 이 두 스님은 십지(十地)인 성종성(聖種性)이며 대종사(大宗師)이다. 말광(末光)으로 비추는 바이며, 여파(餘波)로 가피(加被)하는 바이나 모두가 담암(黮闇)에서 벗어나와 그 고명한 위치에 이르렀다. 부처님과의 상거(相距)가 점점 멀어지매 미쳐서는 불법도 따라서 해이하여졌다. 세상에서 이르는 바 명사(名士)란 마음이 명예에 탕탕무애하고, 지혜는 이권(利權)에 눈이 어두워졌으며, 학문은 부천(浮淺)함만 더하고, 많은 서적을 섭렵하나 문구만 책렬(磔裂)하여 치아간(齒牙間)에 끼워놓고, 노노(呶呶)하게 횡설수설하며 스스로 좋아하며 착각에 빠져있다.

후학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견(邪見)으로만 치닫고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국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습속(習俗)의 폐몽(蔽蒙)과 도덕의 울체(鬱滯)함을 개탄하고 감정이 격발하여 크게 분발하며 전력을 다해서 도를 밝히고 폐단을 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그리하여 국사는 잘못된 전학(典學)을 모조리 물리치고 묘온(妙蘊), 즉 묘법을 개시하며 유복(幽覆)한 것들을 부발(剖發)하고 유타(窳惰)한 자를 부기하였다. 그리고 뇌정(雷霆)으로써 진동하고 우로(雨露)로써 널리 뿌리는 중간에 비록 심복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가 있으나, 많은 사견자(邪見者)들이 정견자(正見者)를 질투하여 훼방하는 소리가 비등하나 이를 도로써 자처하여 염연히 마음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학자들이 흡연(翕然)히 모여들어 고질적인 사견의 병이 정견으로 돌아갔으며, 점차로 벽견(僻見)과 망집(妄執)한 자들이 얼굴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근본적인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일찍이 선가(禪家)에서 이른바 전제(筌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는 이는 상상근지자(上上根智者)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하사(下士)일 경우에는 구이(口耳)의 학으로써 일법만 터득하면 스스로 만족히 여기고 있다. 그리하여 선종(禪宗)에서는 삼장(三藏) 십이분교(十二分敎)를 추구(芻狗) 또는 조박(糟粕)이라고 천칭(賤稱)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족하다고 관찰하는 자가 또한 어찌 오견(誤見)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과 『기신론(起信論)』 등을 배우도록 권하였으며, 또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며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그가 사망하면 정성(精誠)을 다하여 천도공덕을 짓되, 내지 스스로 팔을 태우며 부모가 돌아가신 기일(忌日)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또 감식(鑒識)이 연하여 선행(善行) 닦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항상 진신(縉紳)을 띤 선생과 더불어 마주앉아 응대(應對)하되, 그 언론(言論)이 성인의 도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또 그 문사(文辭)가 평범하고 담담하나 깊은 뜻이 있으므로 사대부들이 그의 도풍(道風)을 받아 피미(披靡)하고 점점 인위적인 조탁(彫琢)함은 싫어하고 아정(雅正)한 데로 나아갔다. 심지어 속이(俗夷)와 호신(虎臣)은 문학으로써 스스로 업을 삼지 아니하였으며, 환도(宦道)와 이술(異術)은 마치 원수와 같아서 한번 그 모양을 보거나 그의 말을 들으면 송연하여 스스로 승복(承服)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서로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였다. 그 후 예고(睿考)께서 국사의 화상(畵像)을 보고 배회(徘徊)하면서 감모(感慕)하여 친히 200자나 되는 영찬(影讚)을 지었다.

국사가 송 나라에 갔을 때, 사상(泗上)에 있는 승가대사탑(僧伽大師塔)에 예배를 드릴 적에 등불과 같은 광명이 나타났고, 천축사(天竺寺)에서 관세음보살님께 절을 함에는 혁혁한 흰 광명을 방광(放光)하였다. 또 해인사(海印寺)에서 『화엄경』을 강설할 때는 당우가 홀연히 진동하여 경기(警起)하는 상서(祥瑞)가 나타났었다. 예고께서 아직 동궁에 있을 때 병에 걸렸다. 그리하여 국사를 청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독송케 하였다. 을야(乙夜)에 이르러 광명이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방 안을 훤히 비추었으니 고승전(高僧傳)에 이른 바 신이감통(神異感通)이란 것이 어찌 이러한 것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또 국태민안을 위하여 흥복사(興福寺)를 창건하는 일을 잊지 아니하였으며, 혹은 국가의 전로(前路)가 영원히 새로워지기를 기고(祈告)하였으니, 이곳은 백군(百郡)이 출입 교차하는 요충지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국태민안을 위한 기도처인 관(館)과 원(院)이 있었으나, 괴망(壞亡)하였다면서 문인들에게 지시하여 지남관(指南館)과 겸제원(兼濟院)을 중창 복구(重創復舊)하였다. 예고께서 많은 토지를 이 절에 헌납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국사의 공로(功勞)에 속한다. 태후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흥왕사 안에 따로 일원(一院)을 개창(開創)하려는 것이니, 국사가 이일(異日)에 행도(行道)하는 장소로 삼으라” 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와서 터를 잡고 그 후 건축을 마치고는 액호(額號)를 천복원(薦福院)이라 하였다. 기타 부속공사와 기물, 불상, 경문 등은 일일이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국사는 이미 일국의 존친(尊親)이 되었으므로 큰 정사가 있을 때마다, 관밀(款密)히 자문하였으므로, 임금과 더불어 나라의 대사를 논의하는 경우가 심히 많았다.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끼친 음덕이 많았으나, 또한 후세 사람들은 일일이 다 알지 못하고 있다. 국사께서 입언(立言)코자 함은 그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역대의 화엄종인(華嚴宗人)이 남긴 군언(群言)이 한만(汗漫)한 가운데서 그 정요(精要)만을 촬략(撮略)하여 종류별로 분류해서 『원종문류(圓宗文類)』라 이름하였다. 고금의 문장 중에 교(敎)에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회통(會通)하여 『석원사림(釋苑詞林)』을 만들다가 애석하게도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문인들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편집상에 있어 산거(刪去)하고 취입(取入)하는 과정에서 타당성을 어기는 실수를 범한 부분이 많았다. 문인들이 소집(所集)한 국사의 시문(詩文), 잔편(殘編), 단고(斷藁) 등은 거의 주차(紬次)가 없이 엮어 20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솔이(率爾)하게 낙필(落筆)한 것이므로 후세에 끼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므로 생전에 그 글 중에 필사(筆寫)한 책과 각판(刻板)한 판목(板木), 그리고 모든 원고를 소각해 버렸다.

당시 북요(北遼)의 천우 황제(天祐皇帝)가 국사의 이름을 듣고 대장경과 제종(諸宗)의 소초(疏鈔) 6,900여 권을 보내왔으며, 그 밖에도 문서, 약물, 금백(金帛) 등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연경(燕京)에 있는 운서법사(雲諝法師)와 고창국(高昌國)의 시라부저(尸羅嚩底) 아도리(阿闍梨) 등도 모두 국사를 지극히 존경하여 책서(策書)와 법복(法服)을 보내어 문안하였으며, 요 나라에서 온 사신들도 모두 친견하기를 희망하여 토산물로써 선사하고 적수(籍手)로써 예배하면서 “우리나라 사신들이 요에 들어오면 그때 반드시 국사의 안부를 묻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후에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문서를 구하는 목록 중에 대각국사의 비명(碑銘)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국사의 이름이 사방으로 나타나 이국(異國)에서까지 존경하는 바가 되었다. 또 이와 같은 일도 있었다. 국사가 어느 때 신(臣)의 선형(先兄)인 석 현담(釋玄湛)을 불러 함께 학문을 논하며 서로 절친한 교분이 마치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의 사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신이 단 한 번 국사를 배알한 적이 있었는데, 용색(容色)이 수청(睟淸)하여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을 보는 것과 같아서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것이 국사를 욕되게 하였다. 낮에서부터 밤이 다할 때까지『주역』과 『노자』, 『장자』 등에 대하여 일(一), 이(二)의 대의(大義)를 시문(試問)하므로 신이 우연히 능히 대답하게 되었다. 후일 자주 칭찬하기를, “담사의 동생도 재사(才士)이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국사께서 입적하였다. 슬프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등용되므로 가사(假使) 죽는 한이 있어도 가히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포발(布髮)하여 발에 흙이 묻지 앉도록 도우며, 또한 흔연(欣然)한 마음으로 흠모함이어든, 하물며 문자로써 이름을 비석의 끝에 걸게된 것이 어찌 영광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학술은 완고하며 비루하고 말솜씨는 삽눌(澁訥)하여 능히 국사의 깊은 덕에 잠겨있는 큰 광명을 개발(開發)하여 내예(來裔)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한탄하는 바이다. 이상의 홍대(弘大)한 업적을 찬송(讚頌)으로 명(銘)하여 읊노라.

신라의 의상조사 중국에 유학하여
화엄을 연구하고 그 원음(圓音) 전해왔네.
불교를 회통(會通)하신 원효는 독학이나
유치(幽致)를 궁진(窮盡)하고 심묘(深妙)를 극달(極達)하다.
국내서 연구하든 국외에 유학했든
일승(一乘)을 향한 마음 홀연히 하나였네.
심향(心香)을 훈수(熏修)하고 법우(法雨)로 윤택하며
학인(學人)은 책을 지고 숲처럼 찾아오며
불교도 세상 따라 쇠퇴를 거듭하고
일월은 쉬지 않고 허공을 지나는데
사견(邪見)은 광자(狂者)처럼 동으로 달아나고
무지한 망견자는 북으로 치닫는다.
미(迷)한 자 우매하여 회복 길 찾지 않고
방일(放逸)한 그 마음은 찾을 줄 모르는데
사심(邪心)이 치성(熾盛)하니 정법(正法)은 멸망하고
막힘도 본래없고 흐름도 아니로다.
그 마음 매각(昧却)하면 마침내 방황하고
왕자로 태어나니 그 인물 특이하네.
고귀한 부귀 영화 아랑곳 전혀 없고
불법을 배우려고 고명한 스승 찾다.
서송(西宋)을 멀다 않고 비밀리 떠나가서
창파(滄波)에 몸을 실고 송국(宋國)에 건너갔네.
곳곳에 찾아가서 지식을 친견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각종을 묻고 닦다.
이변(理邊)을 통달하니 현상계(現象界) 따로 없고
사변(事邊)을 터득하니 본체가 현상일세
견해(見解)가 자재하니 이사(理事)가 둘 아니며
호한(浩瀚)한 그 진리는 말로서 알 수 없네.
세계를 총섭(總攝)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일모(一毛)에 집어 넣어 시방(十方)이 따로 없네.
당체(當體)서 한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고
시방(十方)을 주행(周行)하되 걸림이 전혀 없네.
화엄(華嚴)의 깊은 진리 횡류(橫流)로 탕탕(湯湯)하니
국사(國師)가 그 진리를 혼자서 지녔도다.
근본은 하나지만 지말(枝末)은 백파(百派)일세
이 법(法)이 동점(東漸)하여 동국에 유입했네.
처음엔 한 사람도 믿는 이 있지 않아
소귀에 경 읽듯이 은은(狺狺)히 불신하나
정녕(叮嚀)히 타이르니 마침내 돌아와서
결국엔 갈고 닦아 큰 광명 발하였다.
뛰어난 현인이며 훌륭한 철인이요
그 인품 존귀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일세.
누구나 찾아가서 진리를 문학하고
국가의 중대사는 언제나 자문했네.
그윽히 도와주고 비밀리 협찬하며
타고난 그 바탕은 지극히 청아하다.
표연(飄然)히 이 세상을 떠나려 하시므로
미혹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울면서 만류하다
불법의 그 진리는 깊고도 광대하여
그 높음 하늘같고 넓기는 땅과 같네.
진리의 그 당체는 찾을 길 아득하여
말로도 알 수 없고 글로도 볼 수 없네.
당체가 수연(隨緣)하여 공(空)에서 성사(成事)했고
나타난 현상계는 무심(無心)한 토저(土苴)일 뿐
묘함은 피부같고 윤택은 구름같아
그 혜택 두루하여 만방에 가득하네.
망조(罔措)한 제자들은 수비(樹碑)를 간청했고
머리를 조아려서 소원(所願)을 피억(披臆)하니
비명(碑銘)을 세우려고 비문을 쓰게 하여
위대한 그 업적을 영원히 선양하다.
상(上)께서 주청(奏請)받고 기꺼히 윤계하여
국학(國學)을 찾던 중에 신에게 명하므로
임금께 배알하고 사서(辭書)를 올리어서
필력(筆力)이 부족타고 망극(罔極)을 개진(開陳)하다.

음기(陰記)

대각국사의 묘실(墓室)과 비명(碑銘) 건립에 대한 사적기(事蹟記)

국사의 묘실은 영통사 동북 쪽에 있는데, 태사령(太史令) 최자호(崔資顥)와 춘관(春官)정(正) 전간(全幹)이 숙종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터를 점복(占卜)하고, 원외랑(員外郞) 박호(朴浩)는 왕명을 받들어 묘지명을 찬술하였다. 삼중대사(三重大師)인 보자(普滋), 익현(翼玄)과 중대사(重大師)인 융개(融介), 섬현(暹顯), 낭기(朗機), 도(都) (결락) 등 300인이 작업하고, 귀법사(歸法寺)의 중대사인 묘열(妙悅), 충현(忠現) 등 500인이 대석(大石)을 운반하여 돌을 깎아 묘를 덮었으니 모두 삼중대사였는데, 익현은 감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를 지난 후 제당(祭堂) 3간을 묘의 남쪽 영통사에 건축하였는데, 중대사인 득엄(得嚴)과 법선(法善) 등 50인이 작업하였으며, 또 영통사 스님 450명도 함께 역사(役事)하였다. (결락) 항식(恒式)을 삼았다. 또 묘하(墓下)에 묘지기가 있을 집을 짓고 백정(白丁) 4명을 불러 살게 하고는 의식(衣食)을 공급해 주면서 묘를 수호(守護)토록 하였다. 임오(壬午)년 오월에 지주사(知奏事)인 윤관(尹瓘)이 성지를 받들어 국사의 비를 영통사에 세우도록 허락을 받았다. 갑신년(甲申年)에 이르러 숙종이 경선원(敬先院)을 건축하기 시작하고, 태사령인 최자호와 춘관정 전간에게 명하여 터를 잡았다. (결락) 보자(普滋 : 영덕원(永德院)주) 삼중 익현(翼玄 : 중각원(重閣院)주) 중대사 덕자(德滋 : 향해원(香海院)주) 중대사 진개(眞介 : 기방(岐房)주) 등이 역사를 도맡아 관리하며 감독하였다. 중대사 득묘(得妙 : 곤나방(毘羅房)주)는 식량을 주관하였고, 중대사 승류(勝流 : 진관사(眞觀寺)주)는 목재를 주선하였으며, 중대사 융개(融介 : 천태원(天台院)주)는 석재를 담당하였고, 단현(鍛賢)은 집사(執事)를 맡았으며 품(稟) (결락) 정굉(定宏) 등은 조수(助手)였고, 역승(役僧) 25명은 흥왕사 중대사였다.

석종(碩從)은 석공의 수장(首長)이며, 대사(大師)인 유영(有英), 신묘(神妙), 진헌(眞憲), 덕보(德甫) 등은 조수이고, 역승 25명과, 성(成)과 찬(贊), 김(金) 등 3인은 불무간에서 도구(道具) 단련(鍛鍊)을 맡았다. 그리하여 계사(癸巳)년 11월 일에 경선원(敬先院)이 낙성되었다. 청석(靑石)은 몰돈산(沒頓山)에서 채벌하였고, 삼중(三重)인 익(翼) (결락) 단사(鍛事)와 석공을 겸하였으며, 중대사인 석종은 역사를 조역(助役)하였다. 귀법사의 스님 35명이 이미 채벌한 청석을 하산하였으니, 이 35명과 흥왕사 천복원(薦福院)의 백정(白丁) 40명, 그리고 소 33두를 동원하여 석재를 제위보(濟危寶)로 운반하였다. 귀법사 주지이며 수좌인 응선(應先)이 대중 500명을 거느리고 나와 조역하였다. (결락) 그리고 이 비의 좌측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다. 귀법사 대중은 모두 돌려보냈다. 다음 날 영통사 대중 500여 명이 경선원 동합(東閤)인 보광원(普光院) 전중(田中)에 있는 돌을 전외(田外)로 운반하였다. 석공은 중대사인 석종이고, 석장(石匠)은 해(侅) (결락) 마음으로 용려(勇勵)를 수집(收集)하였다. 17일 동안 귀형(龜形)을 조각하여 경선원의 동합에 안치하였다. 8년을 지난 이후 신묘년(辛卯年)에 이르러 성주(省奏)하되, “대각국사의 비가 영통사 서북쪽 근맥(根脈)에 있는데 지세가 불편하니 마땅히 다른 곳으로” (결락) 원충(元忠) 춘관정인 전간이 영통사에 와서 문도인 명공(名公)과 더불어 터를 잡아 식당(食堂)을 지었으니, 남랑외(南廊外)의 평지가 바로 이 지대이다.

명년(明年) 2월에 이 흥왕사 대중 1,670명이 (결락) 혜선(慧宣 : 靈通寺 善炤院과 興王寺 正覺院主)과 흥복사(興福寺) 주지며 승통인 익현(翼玄 : 靈通寺 重覺院과 興王寺 無相院主)과 숭선사(崇善寺) 주지 수좌 몽영(夢英)과 단향사(檀香寺) 주지 (결락) 와 흥왕사 중대사인 세현(世賢), 신현(神現), 석종(碩從), 현한(玄漢) 등과 그리고 영통사 중대사인 점혜(占惠), 홍혜(洪惠), 지일(志一), 유충(惟沖), 석진(碩珍), 홍현(弘賢), 낭충(朗沖), 선선(善鮮), 진헌(眞憲), 덕보(德甫), 위개(爲介), 묘현(妙賢), 행조(幸照), 현람(賢覽) (결락) 화사(畵師) 박근(朴瑾)은 비석의 사방곽연(四方廓緣)에 문양을 그리고, 석장은 교위(校尉)인 임단(林旦)이 새겨서 12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중대사인 세현, 석종, 신종, 신현 등은 공사를 지도하였다. 영통사 대중 450명 (결락) 문인 사자사(師子寺) 주지. 오(悟) (결락)

음기곽외(陰記廓外)

대각국사 문도의 직명(職名)과 개좌(開坐), 그리고 비음(碑陰)은 좌(左)와 같다.

문인(門人) 견불사(見佛寺) 주지(住持) 사문(沙門) 혜소(慧素)가 왕명을 받들어 쓰다.

승통(僧統)
창원(昶元)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던 스님이
며, 홍호사(弘護寺) 제1대 주지였다.
칭도(稱道)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기(理琦)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으로 국사가 젊었을 때 수학하였다.
사소(俟韶) : 국사의 제자.
홍천(弘闡) : 국사의 제자.
낙진(樂眞) : 본래는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문인이었으나, 국사가 입송구법(入宋求法)할 때 시종(侍從)하였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기영(器英) : 국사의 제자.
청서(聽諝)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수좌(首座)
각연(覺淵) : 국사의 제자.
인윤(仁允) : 국사의 제자.
상영(爽英) : 국사의 제자.
영선(靈善) : 국사의 제자.
남효(南曉) : 국사의 제자.
영헌(靈憲) : 국사의 제자.
창지(昶之) : 국사의 제자.
융서(融諝) : 국사의 제자.
현심(顯深) : 국사의 제자.
삼중대사(三重大師)
영현(令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선기(善機)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간영(幹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영(敎英)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영천(英闡)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광자(廣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방고(芳古) : 국사의 제자.
홍열(洪悅) : 국사의 제자.
도진(道眞) : 국사의 제자.
선엄(善嚴) : 국사의 제자.
수개(壽介) : 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시종하였던 제자이다.
응선(應宣) : 국사의 제자.
성준(成俊) : 국사의 제자.
원련(圓璉) : 국사의 제자.
신이(神珥) : 국사의 제자.
이숭(利崇) : 국사의 제자.
유간(裕幹) : 국사의 제자.
연현(挻賢) : 국사의 제자.
영인(靈印) : 국사의 제자.
청혜(淸慧) : 국사의 제자.
계부(戒膚) : 국사의 제자.
유청(惟淸) : 국사의 제자.
창균(昶均) : 국사의 제자.
정현(正玄) : 국사의 제자.
담주(曇柱) : 국사의 제자.
덕칭(德稱) : 국사의 제자.
자수(資守) : 국사의 제자.
혜시(慧示)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중대사(重大師)
응주(應周)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향현(向玄)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응수(應守)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총지(聰智)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소여(紹餘)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교침(敎琛)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고충(古沖)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명서(明諝)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풍(戒豊)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계명(繼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조진(照眞)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순명(順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수명(守明)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재종(在宗)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종해(從海) : 본래는 경덕국사의 문인이었다. (이하 결락되었다)
상기(上機) : 국사의 제자.
일자(日滋) : 국사의 제자.
선기(先器) : 국사의 제자.
강진(講眞) : 국사의 제자.
응성(應成) : 국사의 제자.
준신(俊神) : 국사의 제자.
점숭(占崇) : 국사의 제자.
양구(亮口) : 국사의 제자.
유철(惟哲) : 국사의 제자.
성서(成諝) : 국사의 제자.
지명(志明) : 국사의 제자.
영관(英冠) : 국사의 제자.
법연(法緣) : 국사의 제자.
응충(應沖) : 국사의 제자.
서자(諝資) : 국사의 제자.
융현(融現) : 국사의 제자.
수남(守南) : 국사의 제자.
현서(玄諝) : 국사의 제자.
응청(應淸) : 국사의 제자.
수천(壽千) : 국사의 제자.
적지(迪之) : 국사의 제자.
의자(義滋) : 국사의 제자.
연영(挻英) : 국사의 제자.
처영(處英) : 국사의 제자.
의지(義持) : 국사의 제자.
진서(珍諝) : 국사의 제자.
인현(仁賢) : 국사의 제자.
성유(成裕) : 국사의 제자.
행구(幸口)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충(慧沖) : 국사의 제자.
치수(緇秀) : 국사의 제자.
득기(得機) : 국사의 제자.
염진(念眞) : 국사의 제자.
묘자(妙慈) : 국사의 제자.
영치(靈致) : 국사의 제자.
혜고(慧高) : 국사의 제자.
홍기(洪機) : 국사의 제자.
유오(猶吾) : 국사의 제자.
현(玄) : (이하 결락되었다)
파(派) : (이하 결락되었다)
경성(經成) : 국사의 제자.
양변(良辯) : 국사가 입송구법할 때 시종하였던 제자.
혜방(慧芳)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유정(裕貞) : 국사의 제자.
주관(周冠) : 국사의 제자.
광현(廣賢) : 국사의 제자.
성영(性英) : 국사의 제자.
서정(諝貞) : 국사의 제자.
법상(法常) : 국사의 제자.
법창(法暢) : 국사의 제자.
숭서(崇諝) : 국사의 제자.
순웅(順雄) : 국사의 제자.
유순(惟順) : 국사의 제자.
융개(融介) : 국사의 제자.
섬현(暹現) : 국사의 제자.
법오(法悟) : 국사의 제자.
개구(介口)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경유(景猷) : 국사의 제자.
성련(成璉) : 국사의 제자.
승류(勝流) : 국사의 제자.
석운(釋雲) : 국사의 제자.
인준(因俊) : 국사의 제자.
도운(道雲) : 국사의 제자.
진감(珍鑑) : 국사의 제자.
복원(復元) : 국사의 제자.
유승(惟勝) : 국사의 제자.
원량(元亮) : 국사의 제자.
종감(宗鑑) : 국사의 제자.
칭현(稱現)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소(慧素) : 국사의 제자.
혜겸(慧謙) : 국사의 제자.
관선(觀宣) : 국사의 제자.
혜당(慧幢) : 국사의 제자.
혜관(慧觀) : 국사의 제자.
혜묘(慧妙) : 국사의 제자.
혜남(慧南) : 국사의 제자.
혜오(慧悟) : 국사의 제자.
준린(俊隣) : 국사의 제자.
언각(彦覺) : 국사의 제자.
법구(法口) : 국사의 제자.
성조(性照) : 국사의 제자.
해경(海瓊)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엄(慧嚴) : 국사의 제자.
명개(明介) : 국사의 제자.
변진(辯眞) : 국사의 제자.
주민(周敏) : 국사의 제자.
주윤(周潤) : 국사의 제자.
교진(敎珍) : 국사의 제자.
정소(定韶) : 국사의 제자.
성관(性觀) : 국사의 제자.
회원(懷遠) : 국사의 제자.
혜진(慧瑧) : 국사의 제자.
소근(笑瑾) : 국사의 제자.
영구(英口) : 국사의 제자.
계현(繼玄)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혜인(慧仁) : 국사의 제자.
선련(善連) : 국사의 제자.
정진(正眞) : 국사의 제자.
성진(性眞) : 국사의 제자.
계웅(戒雄) : 국사의 제자.
웅조(雄照) : 국사의 제자.
계호(戒瑚) : 국사의 제자.
혜경(慧敬) : 국사의 제자.
혜량(慧良) : 국사의 제자.
혜약(慧約) : 국사의 제자.
계여(戒如) : 국사의 제자.
도종(道宗) : 국사의 제자.
상선(尙先) : 국사의 제자.
성진(成信) : 국사의 제자.
예관(銳觀) : 국사의 제자.
성오(玄悟) : 국사의 제자.
영기(穎機) : 국사의 제자.
혜심(慧深) : 국사의 제자.
경순(景純) : 국사의 제자.
숭묘(崇妙) : 국사의 제자.
증현(證玄) : 국사의 제자.
석전(釋銓) : 국사의 제자.
대사(大師)
사준(思俊) : 국사의 제자.
창영(唱英) : 국사의 제자.
이영(利英) : 국사의 제자.
담령(湛靈) : 국사의 제자.
연성(挻成) : 국사의 제자.
경융(慶融) : 국사의 제자.
청련(淸璉) : 국사의 제자.
혜선(慧先) : 국사의 제자.
종철(宗哲) : 국사의 제자.
의굉(義宏) : 국사의 제자.
자강(自强) : 국사의 제자.
혜구(慧口) : 국사의 제자.
이선(利宣) : 국사의 제자.
혜천(慧千) : 국사의 제자.
교원(敎元) : 국사의 제자.
조상(照常)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대덕(大德)
자녕(自寧) : 국사의 제자.
혜준(慧俊) : 국사의 제자.
혜균(慧均) : 국사의 제자.
성여(性如) : 국사의 제자.
관규(冠規) : 국사의 제자.
인영(仁永) : 국사의 제자.
유백(惟白) : 국사의 제자.
혜선(慧善) : 국사의 제자.
정단(正端) : 국사의 제자.
지원(志圓) : 국사의 제자.
점상(占常) : 국사의 제자.
법규(法規) : 국사의 제자. (이하 결락되었다)

이상의 문도 명단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시행한 것이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 중세상, 아세아문화사, 1984.[2]


贈諡大覺國師碑銘(題額)」

高麗國五冠山大華嚴靈通寺  贈諡大覺國師碑銘(並序)」

          金紫光祿大夫檢校太尉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
          平章事判尙書禮部事修國史上柱國臣金富軾奉宣 撰」
          朝散郎尙書工部侍郎賜紫金魚袋臣彥修奉  宣書

上嗣位之四年乙巳秋七月庚午並篆額大覺國師門人都僧統澄儼等師之行事以聞曰吾先師即世久矣 而碑銘未著常懼其德業有所磨滅而不記惟 上哀憐之使之裒撰以示久遠 上曰嗚呼師於余爲從祖而遺功餘烈炳然」 可觀其可盖  而不章乎遂授臣富軾以行狀曰汝其銘之臣讓不獲   命 退而叙曰以臣觀之師於聖人之道可謂性得而生知者也何以知其然哉自少知學不爲紛華盛麗之所移及其出家當道衰學廢之時獨能背馳於時態追古聖」

賢而祖述之不幸短命而其所樹立如此子思有言自誠而明者其是類乎師諱釋煦俗姓王氏字義天後以名犯  哲宗諱以字行  我太祖大王四世孫而文宗王第四子也母仁睿太后李氏夜夢若有龍入懷而有身焉至」

乙未秋九月二十八日生於宮中時有香氣郁然久而後歇師少超悟讀書屬辭精敏若宿習兄弟皆有賢行而師傑然出鋒頴上一日謂諸子曰孰能爲僧作福田爲利益乎師起曰臣有出世志惟上所使 上曰善  母后以」

前夢貴徵竊惜之  而業己受  君命叵如之何乙巳五月十四日徵景德國師於內殿剃 上再拜之許隨師出居靈通寺 冬十月就佛日寺戒壇受時春秋十一歲而學問不息己能成人甞夢人傳燈觀法師書自是慧解日進」

至年甫壯益  自勤苦早夜矻矻務博覽强記而無常師道之所存則從而學之自賢首敎觀及頓漸大小乘經律論章䟽無不探索又餘力外學見聞淵橫自仲尼老聃之書子史集錄百家之說亦甞玩其菁華而尋其根柢故議論縱橫馳」

騁洿洿無津涯雖老師宿德皆自以爲不及聲名流聞時謂法門有宗匠矣丁未七月乙酉  敎書褒爲祐世僧統  師甞有志如宋問道聞晋水淨源法師以慧行爲學者師託舶賈致書以修禮源公知師非常人即復書相招由是欲往滋」

甚至  宣王在位第二年是宋元豊七年春正月入內誠請  上會群臣議皆以爲不可師於  上前與群臣言聖賢忘軀慕道如玄奬往西域義湘入中國苟安安而不務求師非所以出家本意其言懇切繼之以泣上感激」

意許之  而群臣議確依違而罷至明年四月庚午夜留書上  王及太后率弟子壽介微服至貞州寓商客舩發上聞之驚差遣官僚與弟子樂眞慧宣道隣從之五月甲午至大宋板橋鎭知密州朝奉郎范鍔迎勞即附表陳所」

以來朝之意  皇帝命主客員外郎蘇注廷導之秋七月入京師啓聖寺以中書舍人范百祿  爲主數日見垂拱殿待以客禮寵數渥縟明日表乞承師受業優詔從之遂見華嚴有誠法師先此皇帝聞僧統之來詔兩街預選」

高才碩學堪爲師範者兩街推薦誠師至是僧統摳衣下風欲行弟子之禮誠師三辭而後受之乃進曰某之甲海外之鄙人也虛襟求道之日又未有所得願師慈憫開我迷雲答古佛刳心而爲法至有求一文一句而捨轉輪王位今上人」

能行之可謂難矣願同志一乘同修萬行以遊華藏海者吾之願也於是僧統請問云云師嘆曰辭旨婉切善啓重關非法王之眞子即義湘之後身復承朝旨與主客員外郎楊傑出京師沿汴達淮泗浸尋以至餘杭詣大中祥符寺謁源」

公如見誠公之禮源公儼然而坐僧統進曰某甲仰慕道誼以日爲歲不憚險難百舍來謁願開金口玉音以卒覺悟源公曰昔慧思一見智顗即知靈山之舊今僧統之來焉知非夙緣耶不須膝行爲禮請講以所聞於是誠投道應如芥」

就鍼有問有答盡其舂容源公因知州蒲公宗孟之請入南山慧因院開講周譯經僧統施錢營齋以延學徒甚衆源公於前所居之處各置賢首敎藏並祖師像至此又欲辦焉而未能楊公知其意與知州及諸僚力營之僧統亦捨銀置」

敎藏七千五百餘卷及還國又以金書大經三本歸之以祝  聖壽慧因本禪院改爲講院特免租稅朝廷爲僧統故也會國王上表乞令歸國遂詔趣赴京請源公同舟講學不輟以元祐元年後二月十三日入京再見淹五」

日  朝辭至秀州眞如寺見楞嚴疏主塔亭傾圮慨然歎之以金屬寺僧修葺楊公曰璿公今日始遇知音興章衡記其事云僧統可謂篤厚好學君子矣夏四月復入慧因院源公傳道訖正坐焚香云願僧統歸廣作佛事傳一燈使百」

千燈相續而無窮遂授經書爐拂以爲信非特僧統資源公而道益進源公名之所以益高以僧統揚之也禮辭源公行至天台登定光佛隴觀智者親筆願文禮於塔前誓傳敎于東土楊公志之沙門中立立石始自密室京以及越往來」

凡十有四月所至名山勝境諸有聖跡無不瞻禮所遇高僧五十餘人亦皆咨問法要若源公雅所望以爲五十(五十字缺)」

慧林善淵戒律則擇基元照梵學則天吉祥紹德此皆卓然可尙故資其所長者己及將歸禪講宗師各率徒衆(四八字缺)」

學之悉備此眞重法大菩薩者也然非是始學欲以己所得與諸師相試故來耳故 其所贈詩有孰若祐世師(五十九字缺)」

三韓王子西求法鑿齒彌天兩勅敵其爲時賢所推尊類皆然也夏五月二十日隨本國朝賀回使放洋二十九日(四十八字缺)」

上及左右無不感動  皇帝所贈金繪  國王太后寄送財寶以巨萬計擧施諸道場及所聞法諸師無少(五十一字缺)」

師誕年肇基旣成多歷年國家每議其主而  難其人至是宣演敎理盡妙窮神學者海會得未曾有  上及群臣(四十八字缺)」

怠不講故官滕私楮亡散幾盡遂重購求書於中國以及契丹日本又於辛未春南遊搜索所得書無慮四千卷皆塵昏蟬斷編簡壤舛倶収並拾包匭以歸請置敎藏司於興王寺召名流校定謬缺使上之鈆槧不幾稔閒文籍大備學者」

忻頼甲戌春二月初入洪圓寺其敎學如故居興王初  順王寢痾召師言寡人嘗願作大伽藍額號洪圓今病篤想不自濟若嗣君不相忘師其同心以終吾願師涕泣曰臣敢盡心力死生不易至於旣成乃命住持焉夏五月退居」

海印寺溪山自適浩然有終焉之志  獻王再徵不能致乙亥冬十月八日  肅祖即位數遣近臣齋書迎之固辭又敎曰不穀之望師可謂切矣非高山景行寤寐增想而鵊鴿在原義重匪他雖不能往屢以誠請拂衣高跡曾」

不我顧古之達者非夷非惠與時卷舒冀或一來副我意焉師飜然曰備禮厚辭義不可拒乃赴都復居興王寺敎學如初丁丑夏五月住持國淸寺初講天台敎是敎舊巳東漸而中廢師自問道於錢塘立盟於佛隴思有以振起之未曾」

一日忘於心  仁睿太后聞而悅之經始此寺  肅祖繼之以畢厥功師於此之時依文而顯理究理而盡悟止觀圍明語默自在抜盡信書之守破惡取空之執一時學者瞻望聖涯捨舊而自來幾一千之盛矣哉世之議台宗者爲」

師百世不遷之宗渠不信哉戊寅夏四月庚寅  上命第五子侍之師手落其髮今都僧統是也辛巳春二月上以洪圓寺九祖堂成請師重修而落之前世爲祖譜不一今以馬鳴龍樹天親佛陀光統帝心雲華賢首淸凉爲九祖」

師所定也秋八月遘疾隱几而坐或觀心或持經不以疲憊自止門人請修佛事曰事佛久矣上遣中使問體名醫處方俵寶衣名令於諸寺爲之請福疾革親來慰問曰恐有不可諱願聞其所欲言者曰所願重興正道而病奪」

其志伏望至誠外護以副如來遺敎則死且不杇冬十月五日壬辰右脇而化享年四十七僧臘三十六是前或夢寶幢崩摧于地上聞之慟命有司贈賻有加册爲國師諡曰大覺十六日癸卯茶毘収遺骨以十一月四日辛酉安備」

於五冠山靈通寺之震方從本敎也佛法以梁大通元年丁未肈入新羅後一百餘年義湘元曉作是二師者以聖種性爲大宗師末光所燭餘波所加皆得以出其黮闇而造其高明及去聖云遠法隨而弛世所謂名士者心蕩乎名智昏」

乎利學益浮淺涉獵典籍磔烈文句置之齒牙閒呶呶以自好後來者承誤襲謬往而不返師於是疾習俗之蔽蒙也道德之欝滞也激昻奮勵以明道救弊爲己任黜其典學示之妙蘊剖發幽覆扶起窳情雷霆而震動之雨露以溥灌之」

閒雖有心服而悅隨者而群邪嫉正謗毁沸騰以道自處恬不動心終而翕然寢變於正異時僻見妄執者革面遷慮務爲根本之學亦嘗言曰禪家所謂不籍筌蹄以心傳心則上上根智者也脫或下士以口耳之學認得一法自次爲足」

指三藏十二分敎蒭狗也糟粕也又烏足觀者不亦乎乃勸學楞伽起信等經論又天性至孝善養父母不怠及其亡則窮思畢情以營功德至自燒臂後値諱日亦如之仁譯持鑒識洞然樂善不倦每與縉紳先生燕見應對其言論不出聖人」

之道又其文辭平澹而有味故士大夫承風而披靡稍厭彫琢而趣雅正焉至於俗吏虎臣不以文學自業及宦道異術相背如仇讐者一見其貌聞其言則莫不竦然自服恨相値之晚後睿考覩畵像徘徊感慕親製讃詞二百字師」

適宋時泗上禮僧伽塔上有光明如燈火天竺寺禮觀音放素光赫赫然又在海印寺講經堂宇忽動有驚起者  睿考在東宮被疾請師爲讀金剛般若經至乙夜光自口出燭於戶牖傳所謂神異感通者豈是歟又不忘與福或告永」

新前路是百郡之所出入舊有舘院而壞亡卽指授門人作新之名館曰指南院曰兼濟至  睿考錫以土田始師之幼太后謂言吾願於興王寺內別開一院爲若異日行道之所伴來卜地至後營搆號之薦福其他所成佛像經文」

亦不能盡書師旣爲一國尊親有大政事必款密諮決故所與  上論列國家事甚多而有陰德於人民亦後世莫得而盡知師欲立言以垂不腐而志莫之遂甞以群言汗漫撮其精要類別部分名曰圓宗文類又欲會古今文章有補」

於敎以爲釋苑詞林而未及參定至後乃成故去取失當門人集所著詩文殘編斷藁存者無幾紬次爲二十卷此皆率爾落筆非將以貽後也故於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者取其板焚之當時北遼天祐帝聞其名送大藏及諸宗」

疎鈔六百九百餘卷其餘文書藥物金帛至不可勝計燕京法師雲諝高昌國阿闍梨尸羅 底亦皆尊嚮以策書法服爲問遼人來使者皆請見以土物籍手以拜吾使入遼則必問師之安否最後日本人求文書於我其目有大覺國師」

碑誌其名顯四方爲異國所尊又如此師甞召臣先兄釋玄湛與之遊甚歡相知之分非 期牙臣由是得以一謁容色睟淸若覩靑天白日辱賜之坐語自晝窮夜試問易老莊一二大義臣偶能言之他日數稱之曰湛師弟亦才士也居」

無何師入滅噫士爲知己者用假令死而可作雖布髮而籍足亦所欣慕焉况以文字掛名於碑石之下豈不爲榮幸也哉而學術固隨辭語澁訥不能發幽德之光以宗來裔是所恨焉其銘曰」

義湘西學侮佛圓音元曉獨見或幽極深或出或處沕然同心香薰霧潤學者林林道與世喪日薄月偸有狂東走無知北遊迷不知復放不知求邪熾正滅」

不塞不流否終則傾異人挺生不留富貴而趣高明誰謂宋遠木道乃行索焉而獲爲焉而成理無不盡事無不融遊觀自在浩不可窮攝諸刹海於一毛中」

不動一步周行虛空橫流浪浪獨爲之防道其百派東至于洋始則不信狺狺衆狂終隨而革磨淬發光惟君之哲其尊其師問道之要謀事之疑陰毘密賛」

幾格淸夷飄然遠擧則挽留之其道之大如天如地淵源之深固不聽議其出於時土苴而己如寸雲澤彌萬里厥徒叩閽稽首敷臆冀書之碑以揚宏則」

上曰其然乃命臣軾臣拜獻辭貽厥罔極」

陰記

大覺國師墓室及碑銘安立事跡記」

國師墓室在靈通寺東北隅太史令崔資顥春官正全幹奉  肅廟聖旨卜定其地員外郎朴浩奉  宣述墓誌三重普滋翼玄重大師融介暹顯朗機都(以下缺)」

三百人作之歸法寺重大師妙悅忠現等五百人輸大石覆其墓皆三重翼玄督視之旣而營祭堂三間于墓南靈通寺重大師得嚴法善等五十人作之又役靈通寺  僧四百五十人(以下缺)」

恒式又造家墓下引白丁四人居之給衣食使守墓壬午五月日知奏事尹瓘奉  聖旨許立國師碑靈通寺至甲申年經始敬先院 宣命大史令崔資顥春官正全幹卜地(以下缺)」

普滋(永寧院主)三重翼玄(重閣院主)重大師德滋(香海院主)重大師眞介(岐房主)等都管勾役事重大師得妙(毘羅房主)主穀重大師勝流(眞寺觀)主材重大師融介(天台院主)石主鍛賢善爲執事禀(以下缺)定宏等助手役僧二 十五人興王寺重大師碩從爲石工首大師有英神妙眞憲  德甫等助手役僧二十五人成賛加金三人作鍛也至癸巳年十一月日敬先院成伐靑石于沒頓山三重翼(以下缺)」

兼鍛事與石工重大師碩從助之役歸法寺僧三十五人旣伐石下山此三十五人及興王寺薦福院白丁四十人並用牛三十三首輸石到濟危寶歸法寺主首座應先領衆五百餘人出助(以下缺)」

此碑之左方彌勒堂遣歸法寺衆還之翌日以靈通寺衆五百餘人輸置敬先院東閣普光院田中有石半入于地右工重大師碩從石匠侅(以下缺)」

心収集勇勵也一七日閒問斲作龜形安置敬先院東閤踰八歲至辛卯年省奏大 覺國師碑在寺西北根脉於勢不便宜更(以下缺)」

元忠春官正全幹到寺與門徒名公卜擇得食堂南廊外平地卽今此地是也明年二月此興王寺衆一千六百七十人(以下缺)」

慧宣(靈通寺善炤院興王寺正覺院主)福興寺住持僧統翼玄(靈通寺重閣院興王寺無相)崇善寺

(住持首座夢英檀香寺住持)栴香寺住持(以下缺)」

興王寺重大師世賢神現碩從玄漢靈通寺重大師占惠洪惠志一性冲碩

珍弘現朗冲善解眞憲德甫爲介妙賢幸照賢覽(以下缺)」

朴瑾畫其緣石匠校尉林旦刻之等刻字畫士至十二月二十日畢工重大師世賢碩從申從申現指事以靈通寺衆四百五十人(以下缺)」

門人師子寺住持悟(以下缺)」

陰記廓內

大覺國師門徒職名開坐碑陰如左

      門人見佛寺住持沙門慧素奉 宣書

僧就

昶元(本是景德門人 師少時所咨禀者爲弘護寺第一代主) 稱道(本景德門人) 理琦(本景德門人 師少時所承受者) 俟韶弘闡樂眞(本是景德門人從師入宋求法至睿考時封爲王師) 器英聽諝宣慧(以下缺)」

首座

學淵仁允爽英靈善南曉靈憲昶之融諝顯深(以下缺)」

講明宿堅古先充世神悟普滋(以下缺)」

承照夢英惟儼彥冲靈法相智顯雄處常道隣(從師入宋者)代眞則由承冠賢濬慧溫」

三重

令玄善機幹英敎英英闡廣慈(己上本景德門人)芳古洪悅道眞善嚴壽介(從師入宋者)應宣成俊(以下缺)」

圓璉神珥利崇裕幹挺賢靈印淸慧戒膚惟淸昶均正玄曇柱德稱資守慧示(以下缺)

重大師

應周向玄應守聰智紹餘敎琛古冲明諝戒豊繼明照眞順明守明在宗從海(以下缺)」

(己上本景德門人) 上機日滋先器講眞應成俊神占崇亮▨惟哲成諝志明英冠法緣應冲 諝資融現守南玄諝應淸壽千迪之義滋挺英處英義持珎諝仁賢成裕幸▨(以下缺)

慧冲緇秀得機念眞妙慈靈致慧高洪機猶吾玄(以下缺)」

派經成良辯(從師入宋者)慧芳(以下缺)」

裕貞周冠廣賢性英諝貞法常法暢崇諝順雄惟順融介暹現法悟介▨(以下缺)」

景猷潤諝成璉勝流釋雲因俊道雲珎鑑復元惟勝元亮宗鑑稱現(以下缺)」

慧素慧謙觀宣慧幢慧觀慧妙慧南慧悟俊隣彥覺法▨性照海瓊(以下缺)」

慧嚴明介辯眞周敏周潤敎珎定韶性觀懷遠慧臻笑瑾英▨繼玄(以下缺)」

慧仁善連正眞性眞戒雄雄照戒瑚慧敬慧良慧約戒如(以下缺)

道宗尙先成信銳觀玄悟頴機慧深景純崇妙證玄釋詮(以下缺)」

大師

思俊唱英利英湛靈挺成慶融淸璉慧先宗哲義宏自强慧▨利宣慧千敎元照常(以下缺)

大德

自寧慧俊慧均性如冠規仁永惟白慧善正端志圓占常法規(以下缺)」

右奉  聖旨施行」

탑본

주석

  1.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3. 사진출처: "영통사 대각국사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