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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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한자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승려 형미(逈微)
찬자 최언위(崔彦撝)
서자 유훈율(柳勳律)
각자 김문윤(金文允), 최환규(崔奐規)


번역문

  • 출처: 이지관,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1]

고려국(高麗國) 고무위갑사(故無爲岬寺) 선각대사(先覺大師) 편광영탑비명(遍光靈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태상(太相)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 신(臣)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정조▨▨평시랑(正朝▨▨評侍郞) 주국(柱國) 단금어대(丹金魚袋)를 하사받은 유훈율(柳勳律)이 교지를 받들어 비문을 쓰다.

대개 들으니 부처님께서 취두(鷲頭)에서 출세하시어 인류를 이롭게 하는 교문(敎門)을 열었고, 가섭은 열반할 때가 되어 계족산(鷄足山)에 들어가 중생 교화하는 집을 닫았으니, (결락) 축건(竺乾)에서 성인이 돌아가시자 인도인이 부처님을 흠모하여 학수(鶴樹)에서 열반하셨음을 슬퍼하면서 미륵불이 출현할 용화회상(龍華會上)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였다. 悵 (결락) 隱. 그 교풍이 점점 쇠잔하여졌으니, 어찌 조조(祖祖)가 전심한 것을 마땅히 (결락) 微之. (결락) 사사(師師)가 자취를 상접(相接)하여 높은 산과 같이 숭앙(崇仰)하는 무리가 있어왔다. 그 후 원각(圓覺)조사가 그 깊은 원력으로 중국 남해(南海)에 도착함에 이르러 대홍석덕(大弘碩德)이 숭산에 머물고 있었다. (결락) 대면하여 토론할 자를 구하던 신광(神光)의 마음이 달마의 마음과 부합되어 한 송이 연꽃에 육엽(六葉)이 거듭 빛났다. 그 후로 중간 (결락) 上之. (결락) 법등(法燈)이 상속되어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계승하였는데, 사람만이 능히 도(道)를 홍포(弘布)할 수 있는 것이니, 조종(祖宗)을 보휘(保輝)할 이는 참으로 우리 스님만이 그를 감당할 사람이라 하겠다.

대사의 법휘는 형미(逈微)요, 속성은 최씨니, 그 선조는 박릉(博陵)의 귀족이며 웅부(雄府)의 동량이었으나 계림에 사신으로 왔다가 토군(兎郡)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운수(雲水)에 두고 자취를 해연(海壖)에 멈추어 이제는 무주(武州) (결락)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낙권(樂權)이니, 일찍부터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거문고, 서예, 적송자(赤松子), 그리고 왕자교(王子喬)의 초은지편(招隱之篇)을 유독 좋아하면서도 항상 절에 가서 공문(空門)의 스님과 친교(親交)하였다.

어머니는 김씨니, 어느 날 밤에 홀연히 상서로운 징조의 꿈을 꾸었는데, 어떤 호승(胡僧)이 방에 들어와 나무로 된 책상을 주었다. 문득 꿈을 깬 후 고침(藁砧)에게 물었더니 답하되, “반드시 보배로운 아들을 회임(懷妊)할 것이므로 미리 아들을 낳을 경사를 예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부터 어머니의 거실(居室)에는 언제나 환한 불빛이 있었다. 갑자지년(甲子之年) (결락) 에 등광(燈光)의 상서가 증명(證明)되어 함통(咸通) 5년 4월 10일에 탄생하였다. 대사는 날 때부터 수승한 상호를 타고 났으며, 어려서부터 함부로 아이들과 사귀지 않았고, 배움에 뜻을 둘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윽이 집을 떠나 입산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면서 양친에게 고하기를 “세속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투신할 마음이 간절합니다”하였으나, (결락) 부모는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유휘(志維諱) (결락) 爲山, 莫恒 (결락) 드디어 비스듬히 기로(岐路)를 밟아 장흥 보림사에 가서 보조체징선사(普照體澄禪師)를 친견하였다. 법을 받아 이었으니, 진전사(陳田寺) 도의(道義)선사의 손자에 해당한다. 체징선사가 “처음 보는 순간 비록 초면이지만 문득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 것 같다”하고,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전이거늘 어찌 그리 늦었는가”하며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결락) 于玆, 敬 (결락) 禪宗 (결락) 釋子 (결락) 구의사미(救蟻沙彌)보다 더하였다.

그로부터 부지런히 정진하여 항상 스님의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중화(中和) 2년에 이르러 화엄사 관단(官壇)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대사가 계단에 올라가 제자리에 앉는 순간 백색 무지개 기운이 법당을 가득 덮었다. 이때 (결락) 知有 (결락) 人 (결락) 之 (결락) 기름 발우를 기울여 (결락) 인계주(人戒珠)이니 감히 초계비구(草繫比丘)의 마음을 이지러지게 할 수 있으리오. 더욱이 시라(尸羅)인 계율을 보존함에 있어서랴! 그 해 하안거(夏安居)가 끝날 무렵 도륜산(度倫山)에 가서 융견장노(融見長老)를 친견하니 (결락) 어떤 스님이 묻기를 (결락) 서하(西河)의 위에서 북해(北海)의 스님을 추모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날 동안 선(禪)을 논함에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中霄 (결락) 諱長 (결락) 道知在 (결락) 人. 어찌 구름 덮인 산의 구름을 헤치며, 약산(藥山)에서 약을 캐지 아니 하리오. 노승(老僧)이 서소(西笑)를 따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길을 물어 6조(六祖)의 탑을 조계(曹溪)에서 참배하고, (결락) 地 (결락) 이섭(利涉)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 어찌 자기의 생각대로 얽혀 있으랴”하고, 멀리 망상(罔象)을 쫓아 (결락) 玄珠於 (결락) 黃龍 (결락) 청구(靑丘)의 언덕을 비추었다. 대순(大順) 2년 초봄에 이르러 홀연히 입조사(入朝使)를 만나 몸을 의탁하여 서방(西方)으로 가서 피안(彼岸)인 당나라에 도달하였으니, 배를 경수(鏡水)에 메어 놓고, 곧바로 종릉(鍾陵)을 향해 가다가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을 계획을 세웠다. 先佛 (결락) 之化. 실로 부촉(付囑)하신 마음을 따라 꾸준히 수행하였다. (결락) 工 (결락) 대사의 출현이 마치 황각(皇覺)이 나타난 것과 같았다. 대사가 이르되 “자네가 돌아왔으니 미리 올 것을 알았노라. 네가 승당(昇堂)하고자 하니 그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가르쳐 주겠다. 바라는 바는 (결락) 실가(室家)의 아름다움을 보고, 선교(禪敎)의 종지를 전해 받도록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깊고 깊은 문턱을 보았으며 현리(玄理)의 굴을 탐색하고, 參尋 (결락) 出 (결락) 그 어찌 가유(迦維)에서 연설하신 법에는 아난다가 석문(釋門)의 다문제일(多聞第一)로서 독보적이었으며, 궐리(闕里)에서 유교의 경(經)을 담론(談論)한 것에는 안자(顔子)가 호학(好學)으로 유교의 (결락) 室而已矣哉인지라. 경복(景福) 3년에 담주(潭州) 절수(節帥)인 마공(馬公)과 (결락) 절도부사(節度副使) 김공형(金公夐)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흠양하여 안개를 헤치고 찾아와서 지극히 공경하였다. (결락) 請 (결락) 居. 당시의 4부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음이 모두 이와 같은 류(類)들이었다.

천우(天祐) 2년 6월 (결락) 무주(武州) 회진(會津)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이때 지주소판왕공(知州蘇判王公)인 지본(池本)이 대사를 친견할 생각이 간절하여 배를 타고 평진(平津)에 이르자마자, (결락) 地 (결락) 慈 (결락) 항상 세간(世間)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혜일(慧日)을 비추어 주었다. 그리고 4사공양(四事供養)을 계속 궁중에서 보내왔으니 실로 展 (결락) 仍 (결락) 山 무위갑사(無爲岬寺)에 주지(住持)하도록 간청하므로 대사는 그 명(命)을 받아 영경(靈境)에 옮겨 가서 주석하였다. 이 절은 林泉 (결락) 意寂 (결락) 地. 그러므로 그 기지(基址)를 중수하고 8년 동안 주석하였다. 찾아오는 사람은 구름 같았고, 모인 대중은 바다와 같았다. (결락) 時 (결락) 6년에 나라가 어지럽기는 유조(劉曹)의 시대보다 심하였고, 위로 성주(聖主)가 없음은 고슴도치들이 모인 것 같았으며, 아래로는 용렬한 무리들만 모여 있어 경예(鯨鯢)의 난(難)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결락) 사해(四海)가 물 끓듯 하며, 삼한(三韓)은 소요하였다. 9년 8월 중에 이르러 전주(前主)가 영평(永平) (결락) 왕건(王建)이 축로선(舳艫船)을 발하여 친히 군졸을 이끌고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나주(羅州)가 항복하니, 군대를 포서(浦嶼)의 곁에 주둔시켰고, 무부(武府)는 저항하여 군중을 교기(郊畿)의 광장에 운집하게 하였다. (결락) 이 무렵 대왕께서 오월(吳越)로부터 귀국한 대사의 소식을 들었으니 마치 마니주(摩尼珠)를 해우(海隅)에 감추고, 미옥(美玉)을 하늘 밖에 간직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먼저 조서(詔書)를 보내어 초빙하여 스님의 도간(道竿)을 굴(屈 )하였다. 대사는 왕명을 받들어 배를 타고 풍랑을 무릅쓰고 왕궁에 도착하여 호익(虎翼)을 친견하니 왕은 좌우에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워둔 용두(龍頭)를 치우기까지 하였다. (결락) 吳王 (결락) 明之下 (결락)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 후 반사(班師)하는 때에 스님과 함께 돌아가자고 특별히 청하여 2~3일만에 북안(北岸)에 이르렀다. 드디어 (결락) (결락) 拂 (결락) 스님에게 올리는 공양물은 모두 내고(內庫)에서 지출되었다. 그러나 한탄스러운 바는 많은 마군들에게는 항복받기 어려웠고, 중병(重病)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비록 (결락) 法以栖 (결락) 迺 (결락) 今 (결락) 禍者遍 (결락)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죽는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였으니 운둔(雲屯)을 모조리 죄인(罪人)으로 처벌하였다. 이러한 즉 “불도징(佛圖澄)의 도덕으로도 감히 호석(胡石)의 흉악을 고칠 수 없으며, 혜소(慧昭)의 인자(仁慈)함으로도 어찌 혁련(赫連)의 포악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떠나려하였으니 오직 사람들만을 죽게 한다”고 부르짖었다. 可謂 (결락) 不 (결락) 以 (결락) 日. 대왕은 봉필(鳳筆)을 보내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취가 끊어진 공사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무언(無言)의 이치인 선리(禪理)를 알고자 하였다. 대사(大師)가 狼 (결락) 內. 주상이 당상(堂上)에 우뚝 서있는 것을 보고, 그 단예(端倪)를 헤아리기 어려워 거조(擧措)를 잃었으니, 恐 (결락) 玄高之 (결락) 君 (결락) 마침내 거짓 시대를 만났다. 이것은 (결락) 업보의 대응이 장차 다가오니 어찌 인연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겸하여 최호(崔皓)가 불교를 사견(沙汱)시킬 간계를 품고, 구겸지(寇謙之)가 (결락) 대왕이 대사에게 이르되 “우리 스님은 인간의 자부(慈父)이시고 세상의 도사이시니, 어찌 그릇하심이 있으리요마는 피차(彼此)는 없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바야흐로 화(禍)가 급하여 罔 (결락) 嬰莒僕之 (결락) 者懷恩. 어찌 상신(商臣)과 같은 악당에 참여하겠는가. 그러나 한마디의 말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遷 (결락) 더욱 목숨을 버리고 열반할 때라고 하였다. 세상에서의 (결락) 연(緣)을 다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는 54세요, 승랍은 35였다. 이 때에 개울과 못의 물이 마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으며, 도속(道俗)이 슬픔을 머금고, 인간과 하늘 또한 변색(變色)하였으니, (결락) 請秦 (결락) 卽 (결락) 한실(漢室)이 용흥(龍興)하였다. 금상(今上)이 용상(龍床)에 있으면서 여러 신하(臣下)들에게 이르되 “고요히 생각해보니 입적(入寂)하신 대사의 도(道)는 십지(十地)를 지났고, 덕(德)은 제방(諸方)을 덮었다. 遠出 (결락) 方 낙토(樂土)에 돌아오셨다. 과인(寡人)이 일찍 첨앙(瞻仰)하며 공경히 귀의하였다.” 원하옵건대 유득(有得)의 인연을 생각하면 항상 스님을 잃은 아픔이 간절하여 눈물을 비오듯 흘렸으니, (결락) 俾修 (결락) 다음해 3월에 이르러 드디어 제자인 한준(閑俊)과 화백(化白) 등을 불러놓고 이르되 “개주(開州)의 (결락) 冠山 (결락) 지장태처(之藏胎處)이니, 이 산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지맥(地脈)이 편안하여 마땅히 집을 짓고 살만하며, 반드시 존종(尊宗)을 이룰 만 한 곳이다”고 하였으니, 가사(可師) 등이 유사(有司)와 함께 산사(山寺)를 수축하고 석탑(石塔)을 세우기로 하고 때가 되어 먼저 인사(仁祠)를 짓고 이어서 높은 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지니 가사(可師) 등 제자들이 슬퍼하며 색신(色身)을 받들어 건립한 탑몽(塔冢)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조칙(詔勅)을 내려 “법답게 스님의 선덕(禪德)을 현창하여 마땅히 가명(嘉名)을 하사하리라”하고는 시호를 선각대사(先覺大師), 탑명(塔名)을 편광영탑(遍光靈塔)이라고 추증하고, 사액(寺額)을 태안(太安)이라 하였으니, 추모함을 받는 영광이 이와 같이 융성한 적은 없었다.

하신(下臣)은 변변치 못한 학문인데도 외람되게 중책을 맡게 되어 윤색(潤色)을 선재(仙才)에 사양하고 지언(知言)을 철장(哲匠)에게 미루었다. 선대(先代)에는 옥실(玉室)이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방(金牓)에 올랐으나, 어찌 비문을 짓는 일을 감당할 수 있으랴마는, “자니(紫泥)를 필문(蓽門)에 내려 황견(黃絹)을 연우(蓮宇)에 새기도록 하라”하시기에 억지로 붓을 잡아 대군(大君)께서 불법을 숭상하신 연유를 밝히며, 애오라지 선명한 문장을 지어 스님의 문인(門人)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정성을 위로하는 것이다. 명(銘)하여 이르되,


깊고 깊은 깨달음 신령한 그 경지여!

(결락)

정력(定力)으로 뭉쳐진 선열(禪悅)로 밥을 삼고,

수도하는 그 마음 강력한 군사일세.

색(色)이지만 색이 아니고 공(空)이지만 공이 아니니

이름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가명(假名)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방편이라 말하지만

모두가 중생을 제도코자 하는 것일 뿐.

여기에 스님의 제자(弟子)인 승승(僧乘)이 있어

(결락) 功

能 (결락)

마군들로 하여금 항복을 하게 하여

모두들 불교에 귀의(歸依)시켜 제도하였네.

문하(門下)에는 우중(雨中)에 도마(稻麻)처럼 모이고

서리 내린 후라야 그 지조(志操) 알 수 있네.

친견한 불자(佛子)들은 모두가 찬탄하네

그토록 우아함을 감출 길 전혀 없고

움직이는 거동마다 불사(佛事)가 아님 없어

일거 일동 그 모두가 중생을 위함이요.

진리(眞理)는 쇠해지고 속(俗)됨은 왕성하며

불법(佛法)은 약해지고 마군(魔軍)은 강해지네.

신체는 욕되지만 이름은 고상하며

목숨은 끝났지만 도덕은 빛이 나네.

생전(生前)을 회고하니 한점도 후회없다.

조사(祖師)의 남겨주신 거룩한 그 업적을.

도덕을 추모하여 비석에 새겨두어

후세에 영원토록 썩지 않고 남아 있어

창자를 베어내 듯 제자(弟子)들의 애도함을

(결락)

(결락)

(결락)

멀고 긴 반석겁(磐石劫)의 그 시간 다하도록

하늘처럼 영원하고 땅처럼 끝이 없네!


개운(開運) 3년 세차 병오(丙午) 5월 경인삭(庚寅朔) 29일 무오(戊午)에 세우고,

김문윤(金文允)과 최환규(崔奐規)는 글자를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한국금석전문』 중세상편, 아세아문화사, 1984.[2]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幷序」

太相檢校尙書左僕射兼御史大夫上柱國知元鳳省事臣崔彦撝奉      敎撰」

正朝▨▨評侍郎柱國賜丹金魚袋柳勲律奉 敎書」

盖聞佛陁出世鷲頭開利物之門迦葉乘時雞足闔歸全之路▨越竺軋去聖身毒懷仁傷鶴樹之昇遐竢龍華之▨▨▨悵▨▨▨隱其風漸衰豈謂祖祖傳心當具體而微之侶師師」

接踵有高山仰止之流至於圓覺深仁遠居南海大弘碩德曾栖▨山有待之心諧於郢匠一蓮啓處六葉重光中間徒▨上之▨▨繼在雲居之嗣人能弘道保▨祖宗唯我大師則其」

人也 大師法諱逈微俗姓崔氏其先博陵冠盖雄府棟梁奉使雞林流恩兎郡所以栖心雲水寓蹟海壖今爲武州▨▨人▨父樂權早閑莊老所愛琴書松▨▨招隱之篇蕭寺結」

空門之友母金氏魂交之夕忽得休徵見胡僧入房擎玉案爲寄欻焉驚覺尋報藁砧答云必生懷寳之兒先告弄璋之慶▨後於▨▨室內每有鐙煇之▨甲子之▨▨證定光之瑞以咸」

通五年四月十日誕生大師生有殊相幼無雜交洎于志學之年潛蘊辭家之念此時忽垂雙淚虔告二親曰切欲去塵投其▨▨父母不▨▨志維諱▨▨▨▨▨爲山莫恒▨▨」

遂乃斜登歧路直詣寶林謁體澄禪師禪師法胤相承東田孫子也和尙雖云一見便似相知謂曰昔別稍遙今來何暮許令▨室▨▨于玆敬▨禪宗▨▨▨▨▨▨▨▨▨釋子▨▨」

於救蟻沙彌勤苦增勞不離左右至於中和二年受具戒於華嚴寺官壇 大師經陟戒壇▨爲安坐白虹之氣來覆法堂▨是▨▨知有▨人▨爲▨▨之▨▨▨▨▨傾油知▨人」

戒珠敢 虧草繫之心尤保尸羅之律及其夏末往度倫山禮見融堅長老▨兮▨▨僧陳問▨▨▨西河之上追思北海之中所以數▨論禪中▨諱長▨▨▨▨▨▨道知在▨人」

盍雲巘披雲藥山采藥老僧恨不隨他西笑問徑上游禮祖塔於曹溪巡▨▨▨▨地▨▨▨▨利涉莫以因循時不待人曷維其已所屬遠從 罔象▨玄珠於▨▨▨湏龍▨黃之▨法」

鏡於靑丘之畔洎于大順二年春首忽遇入朝使車託足而西達于彼岸維舟鏡水指路鍾陵企聞▨▨道膺大師先佛▨▨▨▨▨▨▨▨▨▨之兆實㳂付囑之心行道遲遲遠經▨▨▨工▨▨▨▨▨▨▨▨」

大師若披皇覺 大師謂曰吾子歸矣早知汝來如欲▨昇堂指其實藏所喜者▨▨室家之美▨傳禪敎之宗由是覩奧幽扃探玄理窟參尋▨▨▨▨▨▨▨▨▨▨▨▨出▨▨▨▨▨▨▨▨▨」

豈惟迦維演法阿難之獨步釋門闕里談經顔子之▨▨▨室而巳矣哉景福三年潭州節帥馬公▨節度副使金公聞風欽仰拂霧敬恭▨▨▨▨▨▨▨▨▨▨▨▨▨▨▨▨請▨」

居其爲時所瞻依皆如此類也迺於天祐二年六月▨退定武州之會津此時知州蘇判王公池本竊承 大師纔諧捨 已抵平津▨地▨之攀▨▨▨▨▨▨▨▨▨▨▨▨▨慈▨」

每以趍塵如窺慧日常於四事遠假天厨實展▨▨▨▨▨▨仍以▨那山無爲岬寺請以住持 大師唯命是聽徙居靈境此寺也林泉▨意寂▨▨▨▨▨▨▨▨▨▨▨▨於▨」

地然則重修基址八換星霜來者如雲納之似海之年亂甚於劉曹之代上無聖主猶鋪猬聚之徒下有庸流莫防鯨鯢之歎物▨▨▨▨▨如▨如」

四海沸騰三韓騷擾至九年八月中  前主永平北▨▨▨▨▨▨▨▨發舳艫親駐車駕此時羅州歸命屯軍於浦嶼之傍武府逆鱗動衆於郊畿之場此時倐」

大王聞 大師近從吳越新到秦韓匿摩尼於海隅藏美玉於天表所以先飛 丹詔遽屈道竿 大師捧制奔波趍風猛浪親窺虎翼暗縮龍頭僧▨▨壽吳王轉明之下▨▨」

無以加也其後班師之際特請同歸信宿之間臻于北岸遂於▨▨▨▨拂▨▨供給之資出於內庫所恨群魔難伏衆病莫除唯奉法以栖眞迺▨▨▨▨▨▨今▨禍者遍▨▨▨」

枉殺無辜而乃遭艱者塡其雲屯同歸有罪然則澄公道德敢悛胡石之兇慧始仁慈寧止赫連之暴况又永言移國唯唱喫人謂多疑者▨不信以十▨▨▨▨▨▨日」

大王驟飛鳳筆令赴龍庭冀聞絶跡之譚猶認無言之理 大師狼▨▨內 主上鶚立當軒難測端倪失於擧指豈思就日玄高之復▨▨君無▨▨▨▨▨▨▨終遭僞代是▨謂」

業對將至因綠靡逃兼被崔皓懷姧寇馮▨▨大王謂 大師曰吾師人閒慈父世上導師何有存非不無彼此 大師方知禍急网避危期▨曰▨▨▨▨嬰呂僕之謀仁」

者懷恩寧厠商臣之惡然而壹言不納遷▨以加捨命之時世▨▨緣俗年五十有四僧臘三十有五于時川池忽竭日月無光道俗呑聲人天變色豈謂秦原▨▨▨▨▨即世之▨」

漢室龍興當」

今上居尊之際謂群臣曰竊惟故 大師道高十地德冠諸▨遠出▨方來儀樂土寡人早披瞻仰恭▨歸依願思有得之緣常切亡師之痛仍於雨泣實慟▨▨追▨▨▨俾修▨▨」

至明年三月日遂召門弟子閑俊化白等曰聞州之▨冠山▨▨之藏昭處此山也山崗勝美地脉平安宜爲置冡之居必致▨▨▨▨尊宗之祐可師等與有司宜速修山寺尋造石塔」

者至其月日先起仁祠便成高塔塔成師等號奉色身遷葬于所建之冡越二年 詔曰式旌禪德宜賜嘉名賜諡爲」

先覺大師塔名爲遍光靈塔乃錫其寺額勑号太安追遠之榮未有如斯之盛者也下臣謬因宦學叨典樞機辭潤色於仙才謝知言於哲匠先是玉室獻賦金牓題名何期降」

紫泥於蓽門銘黃絹於蓮宇所冀强揺柔翰申」

大君崇法之由聊著鮮文慰門下送終之懇銘曰 奧哉靈境▨▨▨禪▨爲食道情是兵卽色非色惟名假名雖云方便祇爲衆生爰有僧英▨▨禪伯能使魔軍克歸▨▨雨中稻」

麻霜後松栢須拜昌言難欺雅▨動爲佛事翻被人▨眞衰俗盛法弱魔▨身辱名高命終道光無懴遺跡祖師舊芳紀德于玆傳於不杇神足傷心▨▨▨▨塔▨▨▨▨▨▨▨石刧」

頻移天長地久」

開運三年歲次丙午五月庚寅朔二十九日戊午立 ▨▨▨金文允崔奐規」

주석

  1. 온라인 참조: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